2월 독서정산


뒤늦은 2월 독서정산이다. 밀도있게 읽은 책이 얼마 없는 데다가 붙잡았던 책들을 기록도 안 해둬서 뭘 어떻게 읽었는지 많이 까먹었다. 계획한 책은커녕 지난 달에 붙잡았던 책들 갈무리도 안 했으니...


① 토니 모리슨 저, 이다희 역,『보이지 않는 잉크』, 바다출판사, 1판(2021), 완독 


 토니 모리슨이라는 작가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빌러비드』가 대표적으로 유명하며 1993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유명한데 읽어본 작품은 전무한지라 이 책을 읽는 데는 좀 애를 먹었다. 자기 이야기를, 특히 자기 소설 이야기를 매우 많이 하는데 읽어본 게 없어서...

 되돌아보니 크게 두 가지가 인상 깊게 남았다. 하나는 모리슨이 기존의 역사를, 서사를 비틀어 독자가 생각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생각의 틀, 사고의 틀을 뒤흔드는 소설을 쓰기 원했다는 사실. 다른 하나는 그가 집요하리 만큼 천착했던 인종과 관련된 꾸준한 문제의식이다. 모리슨의 소설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게 괜찮은 작품일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그건 바로 첫 번째 사실 때문이다. 나 또한 모리슨이 그러는 것처럼 뭔가 불편하게 하는 작품,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책을 읽는 이유는 그 책에서 나의 생각을 찾기 위한 게 아니라, 책을 읽고 내 삶이 변화하고 한층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좋은 책을 읽는 거도 중요하지만 적극적으로 읽는 거도 중요한데... 요즘 그러질 않는다.) 두 번째 사실이 인상깊었던 이유는, 내게도 모리슨의 '인종'과 같은 인생의 주요 키워드가 무엇인지, 그 키워드를 위해 얼마나 발싸심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문 때문이었다. 


 허태연 저,『플라멩코 추는 남자』,다산북스, 1판(2021), 완독


 편하게 읽기 좋았던 책이었다. 별 생각 없이 읽었는데 머리를 싸매고 읽을 필요도 없었고, 글도 매우 쉽게 쓰여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 봤던 기억이 난다.  60대 이상의 남성이라는, 어떻게 보면 쉽게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렵고 때로는 그 꼰대스러움에 기분이 나빠져 가까이 하기 싫어지는 캐릭터에 대한 따뜻한 애정, 이해의 노력이 엿보였다고 해야 할까. 그 캐릭터, 즉 '남훈'의 노력하는 자세, 책임지는 자세도 좋아 보였다. 성장은 아이들만 하는 게 아니다. 어른들도 한다. 아니, 어떻게 보면 성장은 아이들보다 어른에게 더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옳다는, 틀리지 않다는 자만은 아이들보다 어른들에게 더 가깝고, 그런 자만이 세상의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니까.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남훈의 성장 이야기였다.


③ 도스토예프스키 저, Adam Edwards 편역,『The Brothers Karamazov』, The Text a YBM Company, 1판(2008), 완독


 The Text A YBM Company에서 간행한 The Classic House 시리즈의 59번째 책,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영어 편역본이다. 이 시리즈를 알게 된 건 9년 전. 서울 시청에서 공공근로를 했을 때 거기에서 일하던 학과 선배 형이 영어 공부하기에 좋다며 추천해줬던 것이다. 산 건 16년도였던 거 같고 그 해에 한 번 읽었고, 거의 6년 만에 다시 봤다. 올 해 매달 한 권씩 이 시리즈를 보는 게 목표였는데 쉽진 않을 듯하고 적어도 두 달에 한 권씩은 보고싶다.

 읽고 보면 원전의 내용이 무척 궁금해지는 걸 보면 편역 자체도 괜찮게 되어 있다. 나쁘지 않았다.





④ 창작과 비평 편집부 저, 『창작과 비평 194호, 2021 겨울』, 창비, 1판(2021), 완독


 처음으로 읽어본 문학 계간지. 모르는 국내 문학 작품이 많이 다뤄져서 솔직히 글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던 부분이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계간지를 읽으니 현재 문학계에서 어떤 부분을 관심에 두고 있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사항은 어떤 부분인지 등 현황을 좇을 수 있어서 좋았다. 

황정아 교수의 글 "'문학의 정치'를 다시 생각한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문학적 정치 수행의 까다로움, 협소하게 규정된 PC에 속박된 채로 제대로된 정치성을 탐구하지 않는 문학의 현실, 공적 장소를 개인적 감수성에 예속화한 탓에 사라지는 공공성 등 재미있는 논점이 많았다.




한 달을 돌아보며


 무료하고, 무기력하고,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았다. 책도 쇼핑만 하고 욕심만 많았지 정작 끈덕지게 읽고 생각을 꼼꼼하게 정리한 적도 얼마 없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아무래도 회사랑 코로나 영향이 큰 것 같지만 그 탓을 하며 자꾸만 아쉽게 허송세월하는 나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진 않다. 일단은 좀 비우기로 했다. '이것도 해야지, 저것도 해야지, 저거도 중요하고, 이거도 중요하고.' 욕심만 많아지니 부담감만 심해지고, 읽지도 않을 뿐더러 쓰지도 않는다. 

 그래서 일단 책 말고 한 권 가지고 다니는 거로 만족하기로 했다. 내가 무료하고, 무기력하고, 자존감이 낮아지고, 공허해지는 이유는 꾸준히 쓰지 않아서다. 그게 내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인데, 그게 없어서 그런 거였다. 좋은 음악, 편안한 공간에서 노트 한 권이면 족하다. 책은 그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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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독서정산


21년 12월 월간독서정산은 21년 연말독서정산으로 갈음했다. 12월은 연말을 정리한다고 책을 거의 보지 않았다. 1월은 인사 이동 후 적응한다는 핑계로 책을 잘 붙잡지 않았고 동기부여도 안 되었으나 사실 이건 다 핑계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제 독서실을 끊었다. 집에서 책 보겠다는 헛소리는 그만해야지, 망할.


① 허먼 멜빌 저, 김석희 역,『모비 딕』, 작가정신, 1판(2011), 완독


  그나마 이 책은 완독해서 다행이다. 멜빌의 『모비 딕』. 멜빌을 처음 알게 된 건 6년 전,『필경사 바틀비』를 통해서였다. 세계문학 단편선에서 왜 멜빌의 그 작품만을 찾아 읽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다만, 문학을 거의 읽지 않던 때에 찾아 읽은 얼마 되지 않는 문학 작품 중 하나였고 이런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소설을 쓴 멜빌이라는 작가를 뇌리에 새기며 독서 일기를 썼던 기억은 난다. 16년 3월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멜빌이 『모비 딕』이라는 대작을 썼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독서 모임이 아니었다면 계속 몰랐을 테다.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네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서사가 약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모비 딕은 서사가 흥미진진하진 않다. 끝내 마주한 결말은 사실 소설 초반부터 충분히 예측 가능할 정도로 멜빌이 힌트를 많이 준다. 서사가 약하니 이야기의 흡입력은 떨어진다. 대중의 관심을 못 받은 이유가 있었다. 두 번째는, 안 그래도 약한 서사의 몰입도를 더 떨어뜨리는, 이야기 중간에 많이 삽입된 고래에 대한 백과사전식 이야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멜빌이 왜 이렇게 많은 고래 이야기를 했는지 명확히 이해하진 못하겠다. 고래를 신비화하면서 이렇게 분석적인 관점에서 고래를 해체해 묘사하는 양가적인 관점을 취한 이유도. 세 번째는, 이렇게 이야기가 전개되는 장들 사이에 백과사전식 이야기를 끼어놓아 장르적 특성이 굉장히 모호해졌다는 점 때문이었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멜빌답게 희극이라는 장르를 상당히 뒤섞기도 했는데, 멜빌이 이렇게 장르를 섞고 뒤틀어 노리고자 했던 효과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이해를 잘 못하겠다. 마지막으로는, 멜빌이 소설에서 중요한 문제의식으로 삼았던 신학적 논제들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소설은 신비주의적, 종교적 상징과 그러한 문제의식으로 가득한데, 그걸 많이 짚어낼 정도의 지식은 없던 탓에 멜빌이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읽기 어렵게 만드는 부분을 뒤집어 보고 논점을 모아 줄기를 잡아보면 어느 정도 퍼즐이 맞춰지기도 했다. 맞춰낸 퍼즐은 뭐랄까, '이 소설은 19세기에 신정론을 다룬 변형된 욥기다.'라고 하면 괜찮을까. 그러면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어차피 서사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고. 신정론에 대한 논제는 핵심인물의 고통이 핵심인 만큼 어차피 그는 고통받았고, 고통받을 운명이니까. 그게 바로 에이해브고. 소설 초반에 펠레그 선장은 에이해브가 "좋은 사람"이며 "위엄있고, 신앙심은 없지만 신 같은 사람", "왕관을 쓴 왕"같은 사람이었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은 뒤 행복한 가정을 꾸리자마자 다리를 잃었다. 갑작스러운 비극을 마주한 대부분의 사람이 그 비극의 불가해함 앞에서 분노하다가 결국 체념하지만, 에이해브는 그렇지 않았다. 미쳐버린 핍이 영적인 지혜를 얻은 것으로 묘사되는 것처럼 에이해브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사실 - 신의 이중적 면모 - 을 보는 인물이었고 그는 그것을 끝까지 파헤치고자 했다. 그 면모가 구체적인 사물로 형상화된 게 고래였던 것이고. (흰색이라는 색깔이 상징하는 것처럼) 하지만 고래에 대한 그 수많은 지식이 있음에도 이슈메일이 고래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신도 멜빌에게 그런 대상이었던 것 같다. 멜빌은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때로는 말이 되지도 않는 신학적 논제를 들춰내고 그에 대해 분노하고 개탄했을 뿐 명료하게 갈무리한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하여튼, 읽기 힘들었지만 말하자면 할 이야기가 많은 소설이었다. 특히, 에이해브가 매력적이었다. 오이디푸스나 욥, 스네이프를 떠오르게 하는 인물이었다. 선과 악의 저편에 있는 그 욕망에 대해 언젠가 구체적으로 더 생각해보고 끼적여 볼 필요가 있겠다.



 필립 로스 저, 김한영 역,『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문학동네, 1판(2013), ~312쪽


  이 작품은 꼭 다 읽었어야 했는데... 흡입력 있는 대단한 작품이지만 생활을 관리하는 내 능력의 부재로 읽다가 말았다. 여기서도 역시나 더 나은 삶을 위해 발악하다가 결국엔 미끄러지는 인물 - 아이라 - 이 나온다. 단상은 완독 후 남겨야겠다.










 김혜령 저,『내 마음을 돌보는 시간』, 가나 출판사, 전자책(2020), 60%정도


  김혜령 상담사는 유튜브 "놀면서 배우는 심리학" 채널에서 나온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됐다. 지니고 있는 심리적 지식, 생각, 말투 등 사람 자체가 매력적이어서 책까지 찾아보게 됐다. 출퇴근 시간에 조금씩 조금씩 봤는데 심리학 전문서와 대중서 사이에서 저울질을 잘 한, 읽기도 쉬우면서 담고 있는 내용의 깊이도 잃지 않은 보기 드문 양서였다. 내가 관심을 두고 공부했던 심리학적 줄기를 가지런하게 정리해 놓은 느낌을 받았는데, 역시나 인용된 책들도 보면 내가 읽거나 관심을 뒀던 저서들이 많았다. 끌린 이유가 있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 부정적 정서에 휘둘리는 사람, 삶이 괴로운 사람이 읽어보면 좋겠다.




④ 김경미 저,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창비, 시요일, 부분독

⑤ 『창작과 비평, 2021년 겨울호』, 창비, ~85쪽

⑥ 김시종 저, 이진경, 카케모또 쓰요시 역 『잃어버린 계절』,창비,1판(2019), 부분독

⑦ 허태연 저,『플라멩코 추는 남자』, 다산책방, 초판(2021), ~45쪽 

⑧ 카라마조프 저, YBM 재구성『The Brothers KARAMAZOV』, The Text, 초판(2008), ~102쪽































두 시집은 제외하고 나머지 세 권은 로스의 책과 함께 이번 달 완독 목록에 올렸어야 했으나 실패했다. 김경미 시집은 창비 스위치에서 참여한 시 필사 모임을 통해 주로 읽었고, 이 과정에서 김시종의 시도 몇 편 필사 했다. 처음으로 구독한 창비 계간지는 무척 재미있게 읽고 있고, 『플라멩코 추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굳굳 bb


한 달을 뒤돌아보며


 할 일이 많이 밀렸다. 일이 밀렸는데 밀린 만큼 하기는 더 싫어져 많은 시간을 딴짓 하며 보냈다. 위쳐라는 재미있는 드라마 본 건 좋았지만... 코로나 이후 2년 동안 집에서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매번 실패하면서도 괜스레 포기하지 않는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해왔는데 이제야 조금 더 확실하게 인정하게 됐다. 나는 집에서 공부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집에서 만화를 보든, TV프로를 보든, 게임을 하든 상관없다, 잠만 잘 자고 시간 나면 무조건 독서실에 가자, 라며 집 근처 독서실 100시간 권과 사물함을 끊었다. 읽어야 하는 책을 아예 사물함에 넣어놓았으니 읽으려면 무조건 독서실에 나와야 한다. 다행히 작심삼일은 넘겼다. 2월엔 좀 알차게 보내보자.


2월에 읽어나갈 책


 우선, 밀린 책들을 처리한다.『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와 『플라멩코 추는 남자』, 『창작과 비평 계간지 2021년 겨울호』, 쉽게 재구성 된『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독서모임에서 토니 모리슨의『보이지 않는 잉크』를 읽을 예정이고, 2월에 읽을 The Text의 영어책은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다. 여기에 필립 로스의『미국의 목가1』정도면 괜찮을 듯하다. 일단 이 정도가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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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1년 독서정산


  올해 붙잡았거나 완독한 책들의 목록을 적어봤다. 대략 130~140권 정도다. 이 중에서 끝까지 완독한 책은 4~50권 정도. 글로 뭔가를 남긴 책은 20권 정도다. 이런저런 내적 고민과 갈등, 좋지 않은 강박으로 시간을 꽤 허비했던 작년과 비교하면 확실히 많은 책을 붙잡고 읽었다. 일단 틈틈이 책을 읽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작년보다 나아졌으니 장하다!!’

  아쉬운 점은 꾸준히 쓰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거다. 작년에 했던 독서 모임을 올 초에 그만둔 영향도 있었다. 직접 운영하던 오프라인 독서 모임이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으로 전환한 후 내 미흡한 운영능력 탓에 동기부여를 잘 하지 못했다. 글쓰기 습관을 유지하게 하는 구조를 만들거나 그런 환경에 나를 욱여넣으려는 시도가 성공적이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블로그 개편한다고 개인 SNS, 알라딘 서재에 썼던 독서 리뷰를 다 지워버려 놓고는 아직까지 갈무리를 못해 규칙적으로 리뷰를 올릴 동기를 마련하지 못했고, 함께 읽고 쓰는 모임에 기웃거리긴 했으나 조금 더 규칙적으로 글을 쓰는 행위까지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내년에는 ‘한 달에 에세이 한 편 쓰기, 한 달에 책 한 권(문학)에 대한 리뷰 쓰기’를 지속할 수 있는 모임에 참여하거나 그런 모임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꾸준히 써야 글에 대한 감을 잃지 않는다는 점도 그렇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가는 내 생각들이 어떤 생산적인 결과물 자체가 될 수도 있고, 그런 결과물로 이어지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도 이런 모임에 참여하는 건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책과 글을 주제로 남과 소통할 때 가장 몰입하고 행복해하는 내 모습을 보면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인가 싶기도 하니까. 올해 유일하게 써낸(써내고 싶었던 독후감 대회가 많았는데 모두 실천하지 못했다…) 한 전국 독후감 대회에서 대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올 초까지 했던 독서 모임 때문이기도 했다. 우연히 대상 도서가 겹쳐 그때 끼적인 2페이지짜리 독후감과 해당 책을 다시 읽고는 2~3배 분량으로 고쳐 쓴 게 수상으로 이어졌다. 미리 정리해둔 생각의 편린이 없었다면 짬을 내 그렇게 글을 써내지 못했을 것이다.

   여하튼, 다짐은 뒤에서 다시 정리하기로 하자. 먼저 올 한 해의 책, 베스트 10을 선정해 봤다. 그다음 올 한 해의 독서활동을 돌아보고 앞으로 읽어가고 싶은 서적이나 다짐 등을 정리해 봤다.  

 

2. 인상 깊었던 책들


1) 나카지마 아쓰시 저, 김영식 역, 『산월기』, 문예출판사, 2016





  올 한 해 한 권의 책을 고르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고르고 싶다. 특히, 나카지마 아쓰시의 이 단편집 중에서 「산월기」 말이다. 단편소설 「산월기」는 당나라의 「인호전(人虎傳)」의 형식을 빌린 작품으로 당 현종기 농서 사람 이징(李徵)을 다룬 짧은 이야기다. 일본 교과서에 60년 이상 실려온 작품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실려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인간이 호랑이로 변했다고 한다. 왜 변했을까? 특별한 능력이 있어 호랑이로 변해 뭔가를 변화시키고 성취하는 방식으로 서사가 진행될 수도 있겠고, 아니면 마음의 어떤 특징 또는 정서적 상처 때문에 호랑이로 변해버린 사람을 다루는 방식으로 서사가 진행될 수도 있겠다.  「산월기」 는 후자다. 이 경우 호랑이로 변해버린 사람은 타산지석의 표본으로 기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이 중요해진다. 마음의 어떤 부분이 이징을 호랑이로 만들었는가? 이징의 어떤 부분이, 그를 인간에서 짐승으로 만들어버린 것인가?

  “외고집에 자부심이 대단히 강한 그는, 자신의 능력에 비해 천한 직위에 안주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이징은 출중한 능력을 갖춘 데다가 박학다식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일찍이 진사시에 급제하여 강남위로 임명되어 관리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급 관리로서 속물 상관 앞에 고개를 숙이는 일을 혐오했다. 그는 곧 관직에서 물러났다. 고향 괵략에서 칩거하며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 그게 원하는 건 하나였다. 시인으로서 문명(文名)을 얻어 이름을 남기는 것.

  문장으로서 이름을 떨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다. 그는 초조해졌다. 눈빛과 용모는 험상궃어졌다. 몇 년 후 곤궁한 생활을 견디지 못한 그는, 처자를 먹여살리고자 어느 지방의 관리직을 다시 얻었다. “과거의 동료는 이미 높은 지위에 올라 있으니, 그 자신이 옛날에 우둔하다고 깔보던 그들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것이 왕년의 준재 이징의 자존심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는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늘 불만에 가득 차 마음이 즐거울 때가 없었”다. 미쳐버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발광했고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졌다.

  어느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 먹고 다니는데 그 호랑이가 이징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자는 진군 사람 원참이었다. 감찰어사인 그는 이징과 같은 해에 진사에 급제한 이징의 친한 친구였다. 사실, 어떤 과정을 거쳐 호랑이가 되었는지 독자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겠다. 어쨌든 그는 호랑이로 변했고, 인간의 마음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원참에게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건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인간의 마음 덕분이었다. 중요한 건 이징이 호랑이로 변한 연유다. 곰곰이 생각한 이징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까는 왜 이런 운명이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지는 않다.” 그가 밝힌 맥락은 바로 그의 내면에서 자라났던, 그리고 그를 잠식했던 부정적 정서였다.



“인간이었을 때, 나는 애써 남들과의 교제를 피했다. 사람들은 나를 오만하다, 거만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거의 수치심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물론 지난날 고향에서 불린 내게 자존심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그것은 소심한 자존심이라고 해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나는 시로써 이름을 떨치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스승을 찾거나 기꺼이 시우와 어울리며 절차탁마를 하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또한 나는 속물들 사이에 끼는 것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이 모두가 나의 소심한 자존심과 거만한 수치심 탓이었다. 내가 옥구슬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애써 각고하여 닦으려 하지 않았고, 또 내가 옥구슬임을 반쯤 믿는 까닭에 그저 줄줄이 늘어선 기왓장들 같은 평범한 속인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나는 점차 세상에서 벗어나고 사람들과 멀어지며 번민과 수치와 분노로써 내 속의 소심한 자존심을 더욱 살찌게 했다. 인간은 누구나 맹수를 키우는 사육사이며, 그 맹수는 바로 각자의 성정性情이라고 한다. 나의 경우에는 거만한 수치심이 맹수였다. 호랑이였던 것이다. 이것이 나를 해치고 처자를 괴롭히며 친구에게 상처를 주고, 결국 내 외모를 이렇게 속마음과 어울리게 바꾸어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내가 가진 약간의 재능을 다 허비해버렸던 셈이다. 인생이란 아무것도 이루지 않기에는 너무나 길지만 무언가 이루기에는 너무나 짧다는 둥 입에 발린 경구를 지껄이면서도, 사실은 부족한 재능이 폭로될지도 모른다는 비겁한 두려움과 각고의 노력을 꺼린 나태함이 나의 모든 것이었다. 나보다 훨씬 재능이 부족한 데도 오로지 그것을 열심히 갈고닦아서 이제는 당당한 시인이 된 자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위의 긴 구절을 잃고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 얼마나 오래갔던지. 나는 이징과 얼마나 달랐나. 나도 내면에 소심한 자존심과 거만한 수치심이라는 맹수를 오랫동안 키워오지 않았나. 적어도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그리고 취업 후 지금까지. 욕심은 있지만 확신의 부족과 부족한 재능의 폭로가 두려워 뭔가에 헌신하지 못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많아 불평불만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시간이 얼마나 많았나. 그러면서 타인의 눈치를 보고 타인을 신경 쓰느라 나를 돌보지 못했던 탓에 쌓였던 피해의식,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성과를 올리던 나에게 만족하여 그저 가능성의 세계에 나를 가둬두고 안전하게만 있으려 했던 소심한 자존심, 속물들 사이에 끼는 걸 수치스러워하면서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나, 타인, 공동체, 세계를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던 거만한 수치심까지. 포효하며 숲속으로 사라진 이징을 보며 나도 그처럼 내면의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게 아닌지 두려웠고, 나카지마 아쓰시가 마치 내가 보라고 쓴 듯한 구절들에 마음이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언제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외치면서도 매번 내면의 다양한 정서, 적절한 나침반을 따라 때에 맞게 행동하고 책임지며 그에 헌신하고 살 수 있을까. 자꾸만 다른 세계를 힐끗거리는 탓에 내가 선택한 삶의 헌신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 애초에 오랜 기간 세상의 속물적 기준에 부합하는 삶과 반대되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차를 한 잔 마실 여유가 있는 삶이면 그것으로 족하다. 서재가 있는 집이 있으면 더 좋겠으나 집 값이 너무 올라서 언제쯤 집을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다른 맥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타인의 삶을 자꾸 나와 비교하지 말자. 나는 나고 남은 남이다. 살아온 맥락이 다른 데 어떻게 비교를 하나. 소심한 자존심과 거만한 수치심으로 나를 방어할 필요도, 나를 드높일 필요도 없다. 나는 내가 마주한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라오는 좋은 것을 잘 누리되, 좋지 않은 게 가져다주는 부정적 정서는 최소화하는 게 내가 할 일이다. 


2) 필립 로스 저, 정영목 역, 『포트노이의 불평』, 문학동네, 2014

3) 필립 로스 저, 정영목 역, 『울분』, 문학동네, 2011

4) 필립 로스 저, 정영목 역, 『굿바이 콜럼버스』, 문학동네, 2014
















  3년 전 필립로스의  『에브리맨』을 처음 읽었을 때가 떠오른다. 사실적이고 담백한 언어에 끌려 술술 읽어나갔지만 한 번 읽고는 이 책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와닿진 않았다. 난해했다고 할까. 하지만 서평을 쓰기 위해 반복해서 읽고 주제와 글감을 뽑아 읽다 보니 그의 문체나 서사의 진행 방식뿐만아니라 소설에 담긴 메시지에까지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다. 흡입력이 있었다. 그때 이후로 ‘필립로스의 책들은 언젠가 전부 보고 말테다.’라는 다짐을 마음으로만 새기다가 4분기쯤에 들어서야 조금씩 실천해나갈 수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신기하게도 내가 올해 읽은 로스의 책들은(이걸 쓰고 있는 게 12월 초니까, 아마 올해가 가기 전에 한 권이 더 추가되기는 하겠지만)은 30년대에 태어난 청년의 성장 문제, 특히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다는 공통점을 지닌 저작들이다. 『포트노이의 불평』은 33년에 태어난 앨릭잰더 포트노이가,  『울분』은 32년에 태어난 마커스 메스너가, 『굿바이 콜롬버스』는 30년대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닐 클러그먼이 주인공으로, 세 명 모두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정체성(젠더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등 다양한 맥락이 복잡하게 교차된)의 문제를 겪고 있다. 『에브리맨』과는 꽤나 다른 주제인데도 이 세 소설을 꽤 인상 깊게 읽은 이유는, 필립로스의 문체나 해학적인 서술 방식 등도 영향이 컸지만, 정체성의 문제가 내 인생의 중요한 화두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게임이나 술로의 도피 등 주로 회피하는 방식을 자주 사용했다는 점에서 저 세 주인공과는 다르지만 나도 저 세 주인공이 느꼈을 정서적인 혼란과 결핍, 허용과 금지의 애매모호한 경계 앞에서의 어리바리함을 공감할 수 있었고, 그런 혼란을 가져다준 가족, 젠더,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맥락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유대인의 미국적인 남성되기’라는 어떻게 보면 특별한 주제를 다루는데 이렇게 많은 독자를 거느릴 수 있게 된 이유도, 그런 특수성을 뭇사람도 공명하게 하는 필립 로스의 능력 덕분일 것이다.

  물론 세 소설 모두 그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로서 희망적인 미래나 이상은 없다. 인식의 확장을 노려볼 순 있겠지만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대답은 독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


5) 캐럴라인 냅 저, 정지인 역, 『욕구들』, 북하우스, 2021





  올 한해 크게 매력을 느낀 두 여성작가가 있다. 한 명은 조앤 디디온,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위의 책을 쓴 캐럴라인 냅이다. 캐럴라인 냅은 『명랑한 은둔자』로 먼저 알게 되었고 사실 이 책이 더 좋지만 완독하지는 않았기에 『욕구들』을 꼽았다. 뭐, 이 책도 서술 방식 등 아쉬운 게 있긴 했지만 인상 깊게 읽은 건 분명하다. 매력적이었다. 작가가, 그리고 문체가.

  이 책은 특유의 정서적 지진계로 자기 신체에 새겨진 상흔을 살피고 내면과 가정, 그리고 나아가 사회의 풍경을 활자로 더듬으며 여성의 욕구와 가부장제를 사유한 결과물이다. 그 상흔은 바로 거식증이었다. 거죽 사이로 앙상하게 튀어나온 갈비뼈와 피골이 상접한 162cm, 37kg이었던 몸. 시작은 코티지치즈였다. 브라운대학 3학년 생이던 어느 추수감사절의 주말, 저칼로리 치즈에서 움틋 씨앗은 6년 간의 거식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표면적인 단순함과 달리 맥락은 복잡했다. 기질과 가정의 영향이 있었다. 정서적 안정감과 충족감을 느끼지 못한 채로 자라난, 완벽주의적 경향이 있는 아이였고, 아버지의 외도 고백과 부모의 별거가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거식증이라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지은 가부장제가 있었다.

  에세이와 학술서 사이의 경계를 오고간 탓인지 난삽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욕구 - 특히 여성의 욕구 - 를 둘러싼 당위 및 통제와의 갈등, 혼란과 강박, 그리고 결핍과 공허의 감정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이고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보여준 자기고백적 진술에 담긴 그 용기가 부러웠고 그 개인적 진술을 유의미한 사회적 진술로 확장한 저자의 능력에 감탄했으며 그 진술을 수려한 문체로 묘사한 저자의 글쓰기에 감동했다.


6) 조앤 디디온 저, 김선형 역,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 돌베게, 2021





 디디온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미국에서는 꽤 유명한 저널리스트이자 에세이트로 2005년에는 The Year Of Magical Thinking으로 논픽션 부문 전미도서상을 받기도 했다. 깔끔하면서도 밀도 있는 문체로 많은 추종자를 양산했고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조앤 디디온의 초상」 이 제작되었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작가다. 그리고 그 영향력의 시발점이 된 게 바로 이 책,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다. 이 책은 1968년에 출간된 논픽션 저서로 1965~1967년에 걸쳐 잡지에 기고한 글을 솎아 출판한 것이었다.

  특이한 제목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재림’이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마음에 드는 시라 전문을 인용했다. 책의 앞 쪽에 실렸다.



“넓어지는 회오리 속에서 돌고 돌고

매는 매잡이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산산이 해체된다. 중심이 버티지 못한다.

그저 무정부 상태가 세상에 풀려 퍼지고

피로 흐려진 조수가 풀리고 사방에서

무구함을 받드는 의식의 물에 잠겨 가라앉는다.

가장 훌륭한 이들은 모든 신념을 잃고, 가장 저열한 자들은 

치열한 열정으로 충만하다.


틀림없이 뭔가 계시가 임박해 있다.

틀림없이 재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재림! 그 단어를 내뱉자마자

‘세계정신’에서 광막한 이미지가 나와

내 시야를 괴롭힌다. 어딘가 사막의 모래 속에서

사자의 몸에 인간의 머리가 붙은 형상이,

태양처럼 무표정하고 무자비한 시선이

느릿한 허벅지를 움직이고, 그 주위로 온통

성난 사막 새들의 그림자가 비틀거린다.

어둠이 다시 툭 떨어진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이십 세기에 걸친 돌 같은 잠이

흔들리는 요람에 동요해 악몽으로 변했다는 걸.

그리고 이제 어떤 거친 짐승들이, 마침내 도래한 그들의 시간을 맞아,

태어나 베들레헴을 덮치려 웅크리고 있는가?”



  샌프란시스코 헤이트 애시베리 지구에서 히피를 취재한 글의 제목이기도 한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는 1968년의 시대적, 서양의 사상사적 분위기와 연결된 글구로서 디디온이 차용한 것이었다. 그것은 시에서 등장하는 해체, 버티지 못하는 중심, 무정부 상태, 잃어버린 신념과 같은 구절이 암시하는 것처럼 개인을 구조화, 조직화하던 당위, 가치, 신념이 해체되고 그 순기능을 잃은 혼돈의 상태를 전제한다. 이 경험을 그녀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원자화의 증거, 만물이 해체되는 물증을 정면으로 직접 다루었다. 샌프란시스코로 갔던 이유는 몇 달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였다. 글쓰기가 무의미한 행위고 내가 아는 세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일하려면 반드시 무질서와 화해해야 했다. 그래서 내게는 그 글이 중요했다.”

   무질서, 혼란과 마주했을 때 그녀에게 늘 중요한 건 글, 언어였다. 예이츠가 스핑크스의 ‘태양처럼 무표정하고 무자비한 시선’으로 ‘세상을 조직화할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을 비유했던 것처럼, 그녀는, 그 자신이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는 스핑크스가 되어, 그 혼란과 무질서를 마주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벼려내 조직화했던 것이다. 나는 디디온의 이런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뚜렷한 자기 주관성, 그리고 그 주관성을 남들도 납득하게 하는 필력, 그리고 그 필력을 돋보이게 하는 문체. 그녀는 이런 능력을 통해 혼란을, 무질서를 극복하려고 했다.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게 어떠했는지 기억하라.”(193)

“글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를 팔아넘기고 있다는 것.”(13)



7) 정세랑 저, 『시선으로부터』, 문학동네, 2020





  소설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드문드문 읽던 소설 중에서도 최근의 한국 문학을 붙잡고 읽었던 적은 더 드물었다. 왜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끌리지 않았달까. 약한 서사 탓인가, 아니면 지나치게 유행을 좇는 경향 탓인가. 비좁은 세계관 및 경험 탓인가, 끊임없이 사방에서 자극이 오는 우리나라의 환경 탓인가, 윤리성이나 도덕주의를 향한 강박 탓인가. 분명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지만 한국소설을 잘 붙잡지 않았던 이유는 그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건 내가 재미있는 한국소설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애초에 한국에 번역된 외국문학은 어느 정도의 작품성이나 시장성이 입증된 것들이 많다. 하지만 내가 소소하게 접한 한국문학은 그런 필터에 걸러진 것들이 아니다. 어느 정도 인기를 끌고 알려진 작품을 읽는다 하더라도 번역된, 유명한 외국 문학 작품에 비해 좋은 작품을 고를 확률은 낮을 수밖에 없다.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조금 읽어본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전하영 작가의 소설만 해도 꽤나 흥미롭게 보지 않았나.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게 한 데에는 이 소설의 영향이 컸다.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말이다.

   처음 읽었을 때 인상은 그다지 좋진 않았다. 많은 인물들과 산만한 에피소드, 입체성이 떨어지는 사건과 캐릭터들, 서사가 약해서 느껴지던 루즈함 등 독서모임 때문에 읽고 있긴 했지만 ‘내가 왜 이 책을 붙잡고 있는거지.’란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하지만 끝까지 읽고 다시 한번 읽었을 때, 정세랑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현재 우리가 마주한 특정 문제를 나름대로 사유해보고자 했던 노력을 엿볼 수 있었고, 생각보다 괜찮은 소설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8) 나쓰메 소세키 저, 송태욱 역,  『마음』, 현암사, 2016





  하고픈 말이 많았는데 기록을 해놓지 않아서 아쉽다. 재미있게 읽었고, 재독하며 발췌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하다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만두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소세키 전집을 조금씩 사 모아야 겠다던 다짐도 이 글을 쓰다가 다시 떠올랐다. 맞다,  『산시로』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다가 그만뒀었다. 

  소세키 입문서로  『마음』을 대개 권하는 이유가 있다. 재미있다.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나도 그랬다. 천천히, 한 달 동안 조금씩 문학에 가까워지려고 펼친 책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소설에 빨려들어가 10일도 채 지나지 않아 다 읽어버렸다. 담긴 생각, 사상은 일단 차치하고 서사의 흡입력이 정말 대단했다.

  이 소설을 완전 독특한 방식으로 읽어내려 했다는 것만 기억난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읽어내고자 했던 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자세히 기억나진 않는다.



 “타인의 마음이란 건 상대방이 ‘나’에게 건네는 미세하고 다양한 감각에 의지해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파악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마음’을 다룬 이 책은 추리소설처럼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얼마 남기지 않은 메모에 의지해서 추후에 다시 읽고 생각을 정리하는 수밖에 없겠다. 분명 나는 이 책을, 굉장히 윤리적인 방식으로 - 도덕적이거나 정치적인 방식이 아닌 - 읽으려고 했다. 

 

9) 이상용 저,  『봉준호의 영화 언어』, 난다, 2021





  흥미로운 생각을 쉬운 언어로 풀어내는 저자의 능력에 감탄하며 읽은 책. 덤으로 이 책을 읽는다는 핑계로 겸사겸사 봉준호의 영화를 거의 다 봤는데, 그 과정도 즐거웠다. 연출한 작품으로 장편(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 설국열차, 옥자, 기생충)은 다 봤고, 단편으로는 백색인, 프레임 속의 기억들, 인플루엔자, 이키를 뺀 세 편을(지리멸렬, 싱크 & 라이즈, 흔들리는 도쿄) 봤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봉준호 감독 영화를 일일이 챙겨 보진 못했을 테다.

   책의 저자는 이상용. 씨네21에서 신인평론상을 받았던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꾸준히 활동해온 사람이다. 그는 이 책에서 봉준호의 영화 언어, 즉 봉 감독의 영화적 원리에 집중해 그걸 키워드로 삼아 영화를 풍부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냈다.


10) 호메로스 저, 천병희 역, 『일리아스』, 숲, 2015





  올 해 큰 업적 중 하나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완독한 일이다. 그것도 매 장마다 발췌하며 참고서적을 여럿 읽으면서. 너무 많은 생각과 방대한 정보에 길을 잃어 독후감이나 서평을 남기지 못한 건 아쉽지만 충분히 농익지 못한 편린이 가득한 탓에 조금 더 길게 곱씹으며 천천히 생각을 다듬어 나가고 싶다. 굳이 이 책을 읽고자 했던 이유나 짤막한 소감은 10월의 월간 독서정산 때 남긴 바 있다.


  [10월에 꽤 노고를 쏟은 책이다. 읽는 데 시간을 가장 많이 썼다. 생경한 고유명사가 많고 따분한 설명이나 묘사가 잦아 초반 가동성이 안 좋았다. 애를 먹었다. 그래도 독서모임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읽었기에 꾸역꾸역 완독할 수 있었다. 10월의 크나큰 성취 중 하나다. 뿌듯하다.

  『일리아스』는 두 가지 뚜렷한 목표를 지닌 채로 펼쳤다. 하나는, 내가 미처 자각하지 못한 자명함을 깨닫게 할(자각 또는 깨달음을 가져다줄), 어떤 이질성을 맛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표현해 볼 수도 있겠다. 『말과 사물』 서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보르헤스가 인용한 어떤 중국 백과사전을 푸코가 접했을 때의 충격을 바랐던 것이라고. 사유가 불가능했던 지점까지 가는 것은 차치하고, 약 3,000년 전의 이질적인 생각이 담긴 이야기를 읽고 내가 뭘 놓치고 살고 있는지 숙고해보고 싶었다. 다른 하나는 유럽인을 만들어 낸 희랍적 사유의 원형을 맛보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동서양 사유의 환경을 노니는 일을 시작이라도 해보고 싶었고 그들의 맥락을 조금이나마 더 잘 이해해보고 싶었다. 예를 하나 들자면, 테레자가 기르던 카레닌이 안나 카레니나의 남편 이름이라는 걸 알 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더 풍부하게 다가오듯, 『오뒷세우스』를 읽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보면 『오뒷세우스를』 모른 채로 『율리시스』를 읽을 때와 울림이 다를 것이다. 동서양 사유의 환경을 노니는 일은 프랑수아 줄리앙이 『운행과 창조』에서 했던 작업이었다.

   많은 걸 느꼈다. 필멸의 인간, 명예를 추구하는 인간, 영웅주의, 분노와 감정의 효과, 책을 읽고 보니 더 관심이 생기는 헥토르라는 인물 등. 이렇게 많은 키워드의 관계가 만들어낸 많은 질문이 있었고, 그에 대한 고민들이 있었다. 핵심은 역시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였다.]



  그리고  『일리아스』를 읽는 과정에서 브루노 스넬의 책과 조대호 교수의 책을 알게 되어 문제의식과 관심사를 더 확장시킬 수 있었다.  『정신의 발견』과  『일리아스, 호메로스의 상상세계』다. 특히, 조대호 교수의 다음 책이 무척 기다려지는데, 다음 책에서  "『국가』를 자세히 읽어 가면서 플라톤이 호메로스에 대한 긴 반론을 어떻게 펼치고, 그에 맞서는 대항 이론을 어떻게 구축하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을 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내 관심사와도 맞닿아 있고 플라톤의 『국가』는 6년 전에 한 학기 동안 강독했던 경험이 있으니까 재미나게 읽을 수 있겠다.
















3. 2021년의 독서를 돌아보며


상반기가 아쉬웠지만 작년보다는 나은 한 해였다.


  작년 말, 한 해의 독서활동을 돌아보며 아쉬움을 많이 느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심하게 놀기만 한 것 같다. 당연히 책도 별로 읽지 않았다. (…) 왜 그랬던 걸까. 루틴을 잡지 못한 것, 내적 갈등이 있던 것,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지 못한 것 등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조금 더 근본적인 건 분명 내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두렵다는 이유로 하지 않고 다른 걸 욕망한 데 있는 것 같다. 즉, 자기중심성이 부족했던 탓이다. (…) 

실용적이지 않아 보이는 이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게 맞는 건지. 그보단 세속적인 성공을 보장해 줄 뭔가를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갈등하고 생각만 하면서 선택하지 못하니 '책을 계획적으로 읽기'는 커녕 놀기만 했다. '당장 내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책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 자꾸 쓸데없이 멀리 봤다. 자격증을 따둬야 하는 건 아닌지, 법이나 경제-경영 공부를 해둬야 하는 건 아닌지, 이런 질문 앞에서 어리바리해 하며 시간만 축냈다.

앞으론 그러고 싶지 않다. 멀리 보려는 건 막연한 불안감, 강박, 초조만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면 늘 이도 저도 아니게 됐다. 어차피 멀리 보고 계획대로 살고자 해도 살아질 삶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반기까지도 그 불안감, 강박, 초조를 버리지 못했다. 경제, 투자 서적 등의 주위만 자주 기웃거렸던 거 같다. 불안, 강박을 가지고 책을 읽으려다 보니 동기부여가 잘 되지 않았고, 게임이나 만화, 드라마 등으로 도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억지로라도 책을 읽으려고 이런저런 리뷰 이벤트를 마구잡이로 신청해 억지로 썼는데, 안 그래도 회사일도 바빴던 터라 번아웃을 겪기도 했다. 거기에 회사일 스트레스로 술까지.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부끄러운 시간이었다.

  조금씩 변화를 주기 시작한 건 상반기가 끝날 무렵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일기를 쓰며 생각을 정리했고 책을 읽고 서평을 써오는 한 달짜리 모임에 들어갔다. 일기를 조금 더 편하게 쓰고자 갤럭시 탭 6 라이트를 사기도 했다. 그러나 습관이 쉽게 변하진 않았는데, 다만, 각성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디스크 초기 증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번아웃, 번아웃 후에 찾아오는 강박의 시간, 그 시간에 지나치게 몰입해 만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탓에 돌보지 않았던 나의 몸, 그리고 예전부터 좋지 않던 자세 습관. 어느 날 오른쪽 팔이 끝에서부터 저리기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디스크 초기 증상이었다.

  덕분에(?) ‘아, 내가 또 개망나니처럼 살고 있었구나.’라며 각성했고 이를 심각하게 생각하며 바뀌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다. 하반기에는, 생활 전반에 대한 점검 및 피드백과 함께, 가능하면 함께 읽는 모임에 들어가려고 노력했고, 구체적인 목표를 지닌 채로 책을 읽으려 노력했으며, 나의 건강한 마음과 평안함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고 그에 대한 글을 쓰고자 했다. 아직도 쓸데없이 유튜브를 보거나 인터넷 정보 홍수 속에서 정처 없이 헤엄치는 시간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작년보다는, 그리고 상반기보다는 많이 좋아졌다. 읽고 쓰는 일이 덜 어색해졌다.


나는 일단은, 읽고 써야 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적어도 작년부터 이런 자기 의심 또는 불안과 계속해서 마주했다. ‘이게 최선인가? 맞는 길인가?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또는, ‘뒤늦게, 급하게 준비해 들어온 직장이라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여럿 있는 만큼 더 괜찮은 곳으로 이직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게 낫지 않은가?’ 뭔가를 선택했으면 그에 헌신하며 꾸준히 밀고 가야 하는데 막연한 불안에 근거한 저런 자기 의심은 계속해서 삶으로의 헌신을 방해했다. 괜히 이런저런 자격증을 찾아보고, 더 좋은 직장에 대해 알아보고, 여태 걸어왔던 길과 완전히 다른 길을 생각해 보고 등등. 정보를 만족스럽게 모으고 정리한다는 건 불가능하지만 판단하기에 충분할 만큼 모았다고 보는데,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제대로 선택하지 못했다는 건, 끝이 없는 욕심과 정말 더 원하는 게 뭔지 세심히 살피지 않는 태도, 그리고 원하는 것을 자꾸만 외면하는 비겁하고도 소심한 태도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가 지금 내린 선택과 결정은 점점 더 무를 수 없는 게 되는 건 맞다. 하지만 이 선택과 결정이 정말 내게 최선인지, 그에 대한 흠결 없는 확신은 사실 죽기 전까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결국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숙고한 끝에 내린 선택이 최선이 되게끔 노력하는 일일 테다. 그렇다면 내가 당장 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무엇을 할 때 행복할까? 간단히 말해, 읽고 쓸 때다. 잘 읽고 잘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능력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읽고 쓸 때 행복과 충만함을 느끼는 사람이었고, 조금씩 더 나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 실제로도 조금씩 더 나아졌던 사람이었다. 올 상반기가 끝날 무렵, 악순환에서 탈출하고자 먼저 했던 게 쓰는 일 아니었나. 읽고 쓰는 일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감정을, 의미를, 성장을 가져다주는 행위였고, 혼란스러운 이 삶에 일시적이나마 구조와 질서를 부여해 주는 행위였다. 적어도, 읽고 쓰기를 현실에 대한 도피처로 삼지 않는다면, 읽고 쓸 때라야 조금 더 사람다워졌다.

  앞으로도 분명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고, 번뇌할 것이다. 일단, 너무 멀리 보진 말자. 적어도 내년은 부단히 읽고 쓰는 한 해로 만들고 싶다.


무얼 읽고 무얼 써야 할까? 어떻게 읽고 쓴 걸 남들과 나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읽고 쓰는 일로 먹고살 수 있을까?


  올 한 해의 독서를 돌아보니, 읽고 써야 한다는 사실은 조금 더 명확해졌다. 그런데 그보다 더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으니 무얼 읽고 무얼 써야 하냐는 것, 그리고 그렇게 읽고 쓴 걸 가지고 남들과 소통하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 나아가 글로 먹고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것, 이런 문제들이었다. 소통과 관련된 문제나, 글로 먹고사는 문제는 개인 브랜딩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나는 이런 분야에 있어서는 특히나 젬병이라 많은 노력이 필요한 만큼 막막함이 크다.

  일단은 ‘독후감, 독서치유, 서평, 평론, 에세이’ 정도에 관심을 두고 있다. 책 자체를 향한 애정과 잡다한 관심사와 어울리는 게 독후감, 서평이니 가장 먼저 손이 가는 분야이기도 했다. 독서치유는 내가 읽고 쓰는 이유이자, 읽고 쓰기를 시작한 이유이기도 해서 파고들면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분야다. 에세이는 읽는 것도 좋아하고 쓰는 것도 좋아한다. 일기처럼 써서 좀 그렇지만… 평론은 서평에 관심이 있는 데다가, 대학원에 가지 않고도 조금 더 아카데믹한 글을 써보기에 좋은 분야라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런 분야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개인 브랜딩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내년에는 알라딘 서재랑 개인 블로그에 꾸준히 글을 써봐야겠다.


4. 2022년의 독서를 생각하며


1) 특히, 2022년에 읽고 싶은 책들


  삶이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지만, 어느 정도 방향을 설정해놓으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전부터 한 해의 독서계획을 대강 세워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실천하게 됐다. 대강의 목표 권수를 적어놓긴 하지만 큰 의미는 없다. 어차피 책이라는 게 무작정 많이 읽는다고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니까.


 (1) 1순위는 문학이다

   2022년의 1순위는 문학이다. 지금 내 삶에 가장 필요하고,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서 그렇다. 가상 현실이긴 하지만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좋고, 다른 삶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좋으며, 매력적이거나 흥미로운 캐릭터를 접하며 위안을 얻거나 나를 돌아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비교적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문학을 읽다 보면, 내가 나를 이해하는데,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언어가 익숙해진다는 점도 좋다. 서평쓰기에 가장 좋은 게 문학이라는 것도 그렇고. 뭐, 핵심은 내가 나로 잘 살 수 있는 힘을 얻는 것.


   ① 필립 로스

    2022년에는 국내에 번역된 필립 로스 전집을 다 읽어볼 계획이다. 글만 안 쓰면 완독 자체는 어렵지 않을 듯하다. 재밌기도 하고 로스가 끈질기게 붙잡는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주제는 내 관심사이기도 하다. 로스의 책들을 읽고, 관련 연구서를 읽다 보면 나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② 나쓰메 소세키

    2022년에는 작년에 읽다가 그만둔 현암사 소세키 소설 전집을 조금씩 다시 읽어볼 계획이다. 왜 소세키냐고 묻는다면 『나의 개인주의 외』에서 읽었던 특정 구절들과 『마음』을 읽을 때 묘하게 나의 내면을 수없이 두드린 그의 글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몇 권이나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소 3~4권 정도는 보고싶다.























   ③ 밀란 쿤데라

    지금까지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소설가를 꼽자면 주저없이 쿤데라를 꼽을 것이다. 쿤데라의 책을 만나지 않았다면, 철학을 공부하지도, 읽고 쓰는 삶을 살지도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런 것치고 쿤데라의 작품을 많이 보진 않았다. 앞서 읽었던 세 소설은(농담, 삶은 다른 곳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다양한 방면으로 해석하며 읽을 수도 있으니 다시 읽고 싶기도 한데, 일단 내년에는 2~3권 정도 그의 새로운 글을 읽어보고 싶긴 하다.

























   ④ 찰스 부코스키, 에릭 호퍼

    호퍼는 4년 전에 만났던 기억이 난다. ‘밑바닥 노동생활, 정서적 불안전, 방황, 상처, 자기 회의, 불안, 죄의식, 수치심’과 같은 키워드에 매료되었고, 한 권의 책을 물류센터에서 노가다하면서 출퇴근 시간에, 대기 시간에, 점심 식사 후 쉬는 시간마다 읽고 서평을 썼다. 집과 관계의 문제로, 그리고 나약한 자아의 문제로 내가 지닌 가치와 믿음이 모두 흔들려 방향감을 상실했던 때, 막연하게만 생각하던 기자라는 직업을 도전도 하기 전에 점점 포기하던 때, 내 삶은 왜 이렇게 괴로운지 이해하고 싶던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말 막막했던 때였다. 그럴 때 적응불능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개척자, 창조자라는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던 호퍼의 글에는 가슴을 후벼 파는 글귀가 많았다. 자신을 구조에 욱여넣지 못해 『울분』의 마커스처럼 울분을 토해내며 내 삶을 여러 번 저 바닥으로 끌어내린 나로서는, 호퍼는 양가적인 존재였다. 닮고 싶은 사람이자, 극복해내고 싶은 사람.

    2~3권 정도가 목표다.

















    찰스부코스키도 호퍼처럼 이력에서 매력을 느낀 작가다. 읽어본 책은 없지만 내력을 보면, 기질적으로 호퍼보다는 덜 가까운 사람이다. 그런 만큼 닮지 않은 부분에서 닮고 싶은 부분이 있어 관심이 가는 작가기도 하다. 보니까 고양이에 대한 책도 썼네. 고양이 덕후로서 꼭 읽어봐야 겠다. 2~3권 정도가 목표다.

























   ⑤ 김경미

    근래에 잘 읽진 않지만 20대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개인적으로 많이 읽고, 많이 필사했던 시를 쓴 작가다. 아직까지 김경미 시인의 시만큼 많은 울림을 주는 시를 쓰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비망록은 필사를 몇 번이나 했던지… 유일하게 시 전집을 모으는 작가기도 하다. 내년엔 절판되고 품절된 도서를 중고 책방에서 찾아보는 게 목표다. 특히,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를. 종종 쓰시는 산문도 너무나 좋아하는데 더 많이 써주셨으면 좋겠다.




















   ⑥ 강석경, 최인훈, 이청준, 기리노 나쓰오

    한 권의 책, 소설이 유독 인상 깊게 남아 다른 소설도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했던 작가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 유사한 점을 묶어볼 수 있는 소설을 쓴 작가들이기도 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극단에 대한 반감이랄까. 『숲 속의 방』이나 『광장』은 직접적으로 그 문제를 다루고 있고 『소문의 벽』은 그런 극단이 가져온 폐해를 다루고 있다. 나쓰오의 『일몰의 저편』은 앞의 세 소설과 다르게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런 극단주의가 가져온 프레임 씌우기의 문제를 언급하는 작품이라고 들었다. 나같은 맥락주의자가 설 자리가 없는 한국 사회에서 느끼는 내 감정과 공명하는 작품들이라고 할까나. 어디가선 빨갱이라는 소리를 듣고, 어디에서는 수구꼴통이라는 소리를 들을, 어디에서는 페미냐는 이야기를 듣고, 어디서는 한남이라는 이야기를 들을까 점점 조심스러워지는 나니까. 앞의 세 소설과 『그로테스크』를 다시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⑦ 기타 : 최근 국내 문학, 문학지, 고전 문학, 기타 에세이 등

    위의 작가와 소설들 외에도 관심 가는 작가, 소설이 많지만, 목표한 정도를 읽는 것도 벅찰 테다. 위의 작품 외에도 특별한 필요나 상황에 의해 다른 책을 읽어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일단은, 문학지를 읽어보기로 했는데 창비만 구독 신청한 상태다. 겨울호는 이미 받았다. 클럽 창작과 비평을 신청해 1월부터 읽어나갈 계획이다. 여력이 되면 문학동네 계간지도 구독하고 싶지만 어떻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문학지 구독과 함께 최근 국내 문학도 조금씩 읽어보려고 한다. 사두고 읽지 않은  『나인』과  『밝은 밤』이 우선이다.

    간간히 독서모임에 들어가면 고전 문학을 읽을 테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나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모모』,  『부바르와 페퀴셰』도 읽어보고 싶긴하다. 여기에 이기호의 소설이나 이성복의 시론, 산문까지 곁들이면 좋을 텐데. 여하튼, 필요에 의한 것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적은 바운더리 안에서 문학 작품을 읽어나갔으면 좋겠다.

































  (2) 2순위는 심리학이다

   2순위는 심리학이다. 문학보다는 덜 읽겠지만 22년 한 해 동안 주로 붙잡고 싶은 분야다. 3~5년 전 배우고 익혔던 좋은 심리학적 지식들이, 방법들이, 습관들이 많이 사라진 지금, 또는 그때 막혀 뚫지 못했던 부분이 나를 괴롭히는 지금, 정서적으로 안정감있게, 평안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자 심리학을 공부하고 거기에서 얻은 도구로 삶을 풍요롭게 하고 싶다.


   ① 문학치유

    문학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다지만 나는 문학의 치유적 기능에 가장 관심이 있다. 작년 연말 독서정산에서 언급한 것처럼 문학이 “세상을 바꾼다거나 누군가를 구원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런 거창한 말 말고 뭐랄까, 글은 다만 ‘계기’를 제공할 뿐이다, 라고 하면 괜찮을까.” 위안받고, 자극받으며, 생각하게 되고, 성장하게 하는 계기 말이다. 그런 계기에 주목해 나를 돌아보면 상황이 급격히 나아지지는 않아도 어제보다는 나은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책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닌, 책이 현재의 이 삶을 더 나아지게끔 하려면 어떻게 읽고 써야 할까? 내가 특히, 문학 치유에 관심을 두는 이유다.











   문학치유, 독서치유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책들이다. 아는 책이 얼마 없지만, 위의 네 책만 2회독 이상씩만 해도 만족이다. 읽다 보면 더 좋은 책도 알 수 있게 되겠지.


















   치유 및 성장의 독서와 쓰기는 분리할 수가 없다. 내 생각에, 책이 내 마음을 건드리는 지점을 끊임없이 파고들며 그것을 구체화하고, 그것을 다시 곱씹으며 적절한 방식으로 갈무리를 해야만 뭔가가 바뀐다. 그래야만 잠깐의 위안이 아닌, 삶에 스며든 위안과 변화, 성장이 찾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꼭 활자화된 글을 읽지 않아도 된다. 활자화된 건 아니지만 내 과거와 현재라는 책이 있지 않나. 사실 문학을 읽는 것도, 문학이 나의 과거와 현재를 건드려 공명하게 해, 그 공명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활자화하고 갈무리하기 위함이니까. 그러니 나 자체에 대해 글을 쓸 수도 있는 것이다. 

   치유와 관련된 글쓰기 책은 찾아보니 꽤나 많았다. 도서관에서 괜찮은 책을 추려 3~4권 정도 읽어보고 싶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은 아니다. 나에 대해 쓰는 게 진짜 품이 많이 드는 일이지…


    ② 감정

    심리학과 관련된 주요 관심 주제가 바로 ‘감정’이다. 감정은 내 철학적인 관심사 내재적인 삶과 인본주의자로서의 삶과도 밀접하게 관련 있고, 행복한 삶을 위해 알아야만 하는 것으로서도, 의미있는 삶을 위한 척도로서도 매우 중요한 키워드다. 그리고 지금 내가 겪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방법들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감정은 다양한 분과학문이 얽혀있는 만큼 관심을 두고 있는 책들도 심리학으로만 한정되진 않을 것이다.











   직접적으로 내 감정을 다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설명한 책들이다. 이지영 선생의 『정서조절 코칭북』이 단연 으뜸인데, 이 책은 어디가서 사람들에게 늘 추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22년에는 이 책을 한 3~5회독 하며 구체적으로 실천만 해도 여한이 없겠다. 기본은 이 책이고, 구체적인 키워드로 주제 삼아 그 주제를 파고든 책들을 더 찾아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예를 들어 관계, 두려움, 불안, 수치심 등과 같이 내 삶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키워드들.



 








    감정 자체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필요하겠다. 조지프 르두 교수를 좋아하는 터라,  『느끼는 뇌』와  『불안』 정도만 읽을 수 있어도 뿌듯할 듯. 


    ③ 행복

    행복도 내 주요 관심사다. 행복이란 개념의 철학적, 형이상학적 의미만 자주 ‘공부’했을 뿐 구체적인 삶 속에서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론이나 노력에 힘을 오래 쏟아본 기억은 없다. 내년엔 구체적인 행복과 관련된 책을 최소 4권 이상은 보고 싶다. 행복과 관련된 책은 너무 많아서 좋은 책 고르는 것도 품이 좀 들듯…


















    ④ 명상

    명상에 목숨이 달려 있다, 는 안희영 교수의 말을 종종 생각한다. 명상을 꾸준히 했을 때의 그 효과를 알아버린 만큼, 명상을 계속 멀리한 요즘 겪는 문제가 명상의 중요성을 다시금 상기시키고 있다. 명상은 책이 그닥 중요하진 않은 것 같다. 나랑 잘 맞는 방법을 찾고 직접 실천하는 게 중요하지. 여하튼, 그래도 골라 보자면, 『8주 마음챙김 워크북』 하나만 읽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명상 자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책도 몇 권 곁들일 수 있으면 더 좋고.











    ⑤ 관계 

    관계라는 단어에 내가 담는 문제는 다양하다. ‘부모, 가족, 연인, 친구, 회사, 지인 등’과 같이 관계를 맺는 대상과의 적절함에 대한 문제라던가 그 문제 속에 내포된 ‘착한 아이 콤플렉스,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 잘 하는 법, 무례한 사람 거르는 법, 내가 관심이 가는 사람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는 법, 호구로 보이지 않는 법 등’과 같은 특정한 주제들이 그런 것들이다. “매력적이고 현명하며 존경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하기”가 내 22년 주요 욕망 중 하나인 만큼 매력적이고 현명하게 관계 맺을 수 있는 연습을 많이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전보다 정체성이 조금 더 확고해지고, 경계를 어느 정도 세울 줄 알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싶지 않은 요즘, 이제는 내게 잘 맞지 않는 관계 맺기 습관을 많이 바꾸고 싶단 생각도 많이 든다. 특히 2021년이 그런 한 해였다.

    이 분야는 그때그때 필요에 의해 정하고 읽으면 될 것 같은데, 일단 인간관계, 회사 동료 관계 부분에 대한 책이 시급하다… 아는 책이 없어서 도서관이나 서점을 좀 둘러봐야 할 듯.

















  (3) 3순위는 자기계발이다

  3순위는 자기계발이다. 쓰고, 읽고, 말하는 능력,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달성하는 능력, 시간 관리, 회사업무 관련 책을 좀 읽어보고 싶다. 이거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읽는 게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쓰기와 관련된 책은 꾸준히 볼 필요가 있겠다. 

  서평이나 에세이 쓰는 법과 관련된 책들은 여러 권을 봐야 할 것 같고, 논증 글은 『논증의 탄생』, 스토리 텔링은 『스토리텔링, 어떻게 할 것인가』면 충분하다. 

























  인사/노무 책도 좀 곁들이고











  (4) 기타

  쓰다 보니 계속 길어져 이제는 적당히 끊어야겠다. ‘내재성, SBNR, 인본주의, 행복한 삶, 의미있는 삶’과 관련된 과학, 철학 책을 두고 고민을 꽤 했는데, 22년에는 조금 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독서를 우선하기로 해서 후순위로 밀렸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나 책은 작년에 어느 정도 정리했고, 큰 틀은 크게 바뀌지 않았으니 따로 다시 정리하진 않았다. 나의 정체성과 관련된 핵심적인 부분인 만큼, 작년에도 말했듯 평생 읽어가야 할 책들이다.


















  필로소픽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Meaning of Life 시리즈 전집에 관심이 있고, 스켑틱 정기 구독에도 관심이 있다. 뇌과학이나 의식, 감정에 대한 관심도 여전하고.































  재테크나 경제 공부는 욕심을 덜 부리기로 했다. 한 달에 한 권 정도로 읽고, 자산관리를 꾸준히 해 안정적인 삶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한다. 부자가 되는 게 목표가 아니다.











  젠더 문제에도 여전히 관심이 많다. 정치적 올바름이나 도덕주의와 관련된 관심은 아니고 순전히 ‘내가 나로 잘 사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잘사는 것’과 관련된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고민에 대한 관심이다.











  정치, 법 공부도 재밌는데 내년엔 거의 들여다 볼 일은 없지 않을까. 굳이 좀 꼽자면, 작년에 정리한 것에 더해서 이민열 교수가 번역하거나 펴낸 책들 정도. 아, 특히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꼭 읽어보고 싶긴 하다. 나오자 마자 샀는데 읽다가 어려워 관둔 기억이 있다.











  사회 쪽은 위에서 말한 젠더와 ‘불평등, 기후’ 정도가 현재 관심사다.











  어차피 많이 소비해봤자 욕심만 더 커지니까, 적게 잘 쓰고, 적당히 소비하며 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마지막으로 ’디아스포라, 경계인.’ 문학 분야에 넣어두는 게 나았을 텐데, 늦게 생각나 여기에 추가한다.











5. 2022년을 맞이하며 하고 싶은 독서 다짐

 12월 초부터 조금씩 썼는데 쓰다 보니 너무 늘어졌다. 내년엔 독서계획 부분을 어떻게 정리할지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다. 올 한 해도 아쉬운 게 많지만 작년보다 더 나아졌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며 새로운 한 해를 맞을 준비를 하자.


 1) 책을 계획적으로 읽는다 : 계획을 세우고 그에 따르는 삶을 사는 데 늘 어려움을 느꼈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도 않았고, 그런 계획을 망가뜨리는 다양한 변수에 노출되다 보니 사실 그때그때 될 대로 산 인생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계획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최근에는 적어도 1~3년 정도의 중장기 계획은 세워놓고 삶에 어떤 흐름과 깊이를 만들어낼 노력은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계획대로 살진 못하지만, 이렇게 세워둔 계획이 어떤 준거점이 될 수 있고, 피드백할 때도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 의식적으로 특정한 부분에 초점을 맞춰 집중적인 삶을 사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굳이 번거롭게 올해 독서정산에는 약간의 독서 계획을 세워본 것이니, 큰 변수가 있지 않은 이상 이 흐름에 맞게 독서 활동을 해나갔으면 좋겠다.


 2) 가능하면 함께 책을 읽는다 : 올해 몇몇 독서모임에서, Zoom으로 읽은 책을 주제로 수다를 떠는 내 모습을 보며, 내가 책을 읽고 수다 떠는 걸 무척 좋아하는구나를 다시 한번 자각했다. 일상에서의 일반적인 관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스몰토크에 재능도 없고, ‘생산적이지 않은 비난을 하는 이야기, 속물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관계가 힘겹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 공간에 놓여있을 때 주위 사람들을 신경 쓰고 함께 하고자 내뱉게 되는 말 등이 나 자신의 자존감이나 자아 정체성을 훼손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다. 특히, 그런 관계에서 어떤 공허함이 크게 느껴진 게 올 해이기도 했다.

 내년엔 좀 달라지고 싶다. 책도 좋고, 영화도 좋고,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미래지향적이고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불완전한 존재로서 이런저런 실수도 하고 남에게 상처도 주지만 그래도 더 나은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을 좀 더 많이 만나 보고 싶다. 아직 몇 년 전에 받은 상처와 관계의 회의로부터 자유로워진 건 아니지만,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는 것 같다. 가만히 앉아서 시니컬해져 있는 것보다는 찾아 나서는 게 좋은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더 강해지는 요즘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이 바로 독서모임이다. 독서모임에 가면 읽고 쓰는 행위의 동기부여도 잘 되고, 자극을 주는 사람도 만날 수 있으며, 나와 다른 상대방의 생각을 듣는 거 자체가 시야의 확장과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니 내년에는 가능하면 함께 책을 읽는 공간에 나를 자주 출몰시켜보자.


 3) 내가 읽고 쓴 걸 어떻게 생산적으로 나눌 수 있을지 고민한다 : 내 활동이나 경험, 생각, 지식이 어떤 쓸모가 되는 느낌을 받거나, 누군가 인정해주거나, 고맙다는 말을 해주면 기분이 무척 좋다. 하지만 대개 그런 건 일상적인 관계에서의 단편적인 활동으로 그쳤을 뿐, 내가 좋아하는 읽고 쓰는 활동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진 않았던 거 같다. 읽고 써온 시간을 생각해 보면, 읽고 씀으로써 돈을 더 많이 벌게 되었다는 건 아니지만, 전보다 나는 정서적으로 더 건강해졌고, 긍정적이게 되었으며,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읽고 쓰지 않았다면 나는 전처럼 불행과 우울에 허우적대고 시간을 허비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과 생각을 어떻게 하면 생산적으로 나누며 살 수 있을까? 22년에는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조금은 실천할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4) SNS에 독서 활동에 대한 기록을 꾸준히 남긴다 : 블로그, 서재를 꾸준히 운영하고 싶다. 18년에는 거의 5년 동안 운영하던 블로그를 닫았는데, 그때는 그 블로그가 별로 상기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블로그로 옮기고 싶은 욕망에 저질러 버렸었다. 그리고 올해는 얼마 전에 블로그를 닫았는데, 글을 잘 올리지 않았고, 올려도 전의 블로그와 다르게 노출이 잘 안 되어서 동기부여도 잘 하지 못했고, 블로그를 너무 일기장처럼 써서 다른 분위기의 블로그를 운영해보고 싶은 마음에 저질러 버렸다. 이제는 이렇게 지우지 말고 꾸준히 좀 운영해보고 싶다. 계속 구상 중이긴 한데 너무 깊이 생각말고 그냥 좀 이것저것 썼으면… 블로그 운영을 시작해야 알라딘 서재에도 독후감이나 서평을 다시 올릴 텐데 말이다.


 5) 규칙적으로 쓸 수 있는 루틴, 또는 구조를 만든다 : 어려운 일이지만 했으면 하는 일. SNS를 하게 되면 규칙적으로 글을 써야 하는데, 그러려면 분량이나 디테일 조절이 필수다. 가령 일주일에 한 편의 서평을 쓴다 했을 때 일반 직장인이 쓸 수 있는 서평의 질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분량의, 어떤 형식의, 어느 정도 깊이의 서평을 써야 일주일에 한 편을 꾸준히 쓸 수 있을까? 에세이도 마찬가지겠다. 그리고 이런 가벼운 서평, 에세이만 쓰면 생각 갈무리가 잘 안 될 수도 있다. 조금은 더 길고 품을 많이 쏟는 글은 어느 정도의 주기로 쓰는 게 나을까? 그냥 되는 대로 하는 게 나을까?

 쉽진 않겠지만 어느 정도 틀, 구조를 만들고 그에 따라 규칙적으로 쓰는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자. 매일 쓰는 시간을 정해놓는 것도 좋고.


 6) 이런저런 글쓰기 대회에 많이 응모해보자 : 대회에 나갈 책과 글은 꼼꼼하게 보게 된다는 점에서 쓰기 능력 향상에 도움이 많이 된다. 받는 상금도 좋고, 이런 것들이 글쓰기 관련 스펙이 된다는 점도 좋다. 내년에는 이런저런 응모 회수를 늘려보자. 쉽지 않겠지만, 불완전한 글이라도 계속해서 내보는 연습이 필요하겠다.


7) 독서정산을 처음 쓴 17년부터 반복되어 온 다짐을 상기하자

 - 할 수 있는 만큼 꾸준히 읽기 

 - 일상 언어를 잃지 않기

 - ‘나’를 중심에 두고 책을 읽기, 머리로만 책을 읽지 말기

 - 정리하지 않으면 안 읽느니만 못하다

 - 책 읽는 데 돈을 아끼지 말자

 - 집에서 책을 읽을 환경을 조성하자. 잘 안 되면 무조건 나가라

 - 이 책을 읽는 이유, 목적을 잃지 말자 

 - 막연한 공허함을 채우고자 강박적으로 책을 읽지 말자

 - 당장 내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책에 관심을 두자

 - 밀도 있게 공부해 기둥을 세우고 싶은 분야를 찾자

 - 불편한 책을 읽자, 성장을 위해


 안녕 2021년. 내년엔 21년보다 알찬 22년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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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독서정산


  정산할 시에 완독한 책만 '상품 넣기' 기능을 사용하기로 했다. 한 권을 여러 달에 걸쳐 붙잡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책 소개 화면의 마이페이퍼란에 지나치게 자주 노출되는 단점이 있는 탓이다.


① 필립 로스 저, 정영목 역,『포트노이의 불평』, 문학동네 출판사, 1판(2014), 완독

 필립 로스 저, 정영목 역,『울분』, 문학동네 출판사, 1판(2011), 완독

 필립 로스 저, 정영목 역,『굿바이 콜럼버스』, 문학동네 출판사, 1판(2014), ~322쪽















  10월부터 붙잡았던 '포트노이의 불평'을 다 읽었고, '울분'은 금방 읽었으며, '굿바이 콜럼버스'도 거의 다 봤다. 1회독인데다가 발췌독도 끝나지 않아서 이 책들이 내게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흡입력이 있었는지 아직 명확하진 않지만 언어화되지 않은 다양한 감각이 내면에 가득 남은 건 확실하다. 그만큼 공명한 부분이 많다는 거겠지. 대략 정체성, 남성성, 배제와 정상성, 종교, 도덕, 정서적 혼란, 이질감 등의 키워드와 연결될 수 있는 편린인 것 같다. 사실 이런 키워드들은 필립 로스의 문제의식, 즉 '유대인으로서 미국에서 사는 것이 무엇인가'와 뗄 수 없는 것들로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 사회에서의 유대담론을 이해하지 않으면 풍부하게 다가오기 어려운 것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유대담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이렇게 많은 감정을 남긴 걸 보면, 로스가 인기가 많은 이유도 납득이 간다. 굉장히 특수한 문제의식을, 구체적인 언어로, 보편적으로 다가가게끔 쓴달까? 

  포트노이의 가족을 보며 역기능적이었던 우리 가족을 떠올렸고, 포트노이증을 보며 윤리적, 이타주의적 충동과 다양한 강박으로 고생했던 나를 떠올렸다. 도착적인 증세를 보이는 포트노이의 모습에서 도덕적, 윤리적인 판단을 잠시 중지하고, 그 맥락을 캐는 방식으로 책을 읽어 보면 생각할 거리가 참 많은 책이다. 그게 잘 되지 않는다면 포트노이를 보며, '뭐 이런 또라이 새끼가 다 있어'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다.'울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커스의 가족과 사촌을 보며 우리 가족과 사촌을 떠올렸고, 다양한(사회적, 종교적, 경제적) 맥락이 얽히고설켜 마커스의 개인적 신념, 판단과 마주했을 때 일어나는 연쇄작용을 보며 지난했던 나의 삶을 떠올렸다. 과거에 했던 아주 사소한 선택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낸 부정적인 결과. 이거만 아니었다면 더 나아질 수 있었을까? (물론 그랬겠지만 별 의미 없는 질문이라고 본다.) '굿바이 콜롬버스'는 아직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명확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다만, 닐과 브렌다를 보며, 닐의 행동과 생각, 그리고 감정을 보며 내가 다른 세계에 산 사람을 볼 때 느끼는 어떤 이질감을 떠올렸다.

 아쉬운 걸 한 가지 언급하자면, '재미도 있고 공감도 많이 되었는데,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에는 이렇다 할 길을 제시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충분히 구체적으로 잘 '보여'주었으니 이 이상 바라는 건 사치인가?

 

④ 안유경 저, 『성리학이란 무엇인가』, 새문사 출판사, 증보판(2021), 38~116쪽

⑤ 프랑수아 줄리앙 저, 유병태 역, 운행과 창조』, 케이시 아카데미 출판사, 초판(2001), ~31쪽


  성리학 자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차라리 불교나 각종 고전(논어, 맹자 등)을 읽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성리학을 좀 이해하고 싶은 이유는, 현재로서는 프랑수아 줄리앙을 읽기 위한 게 가장 크다. 안유경 선생의 저 저작이나 진래 선생의 '송명 성리학'이 입문서의 역할을 아주 잘 해주고 있어서, 내 생각엔 이 두 권과 왕부지에 대한 입문서 또는 연구서 한 두 권 정도만 읽어도 '운행과 창조'를 끝까지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운행과 창조'를 통해 이 질문을 이해해보고 싶었다. "유가의 의식이 그 고유한 논리 속에서 인본주의의 표본일 수 있었던 조건과 그 근본적 특성은 무엇인가?"(16),  


⑥ 장회익 저,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 추수밭 출판사, 1판(2019), 33~131쪽

⑦ LEX 저, 강현정 역,『수학으로 배우는 양자역학의 법칙』, 지브레인 출판사, 초판(2020), ~97쪽 

⑧ 김영건 저, 『이성의 논리적 공간』, 서강대 출판부, 초판(2014), ~48쪽


  물리학과 관련된 '통합적 앎'에 대한 관심으로 장회익 선생의 책을 읽고 있는데, 읽다 보니 이제는 그 '통합적 앎'이라는 게 불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모든 것의 위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 보려는 신적인 관점을 갖고자 했던 건 아닌지, 이 책에서 말하는 통합적 앎이 과연 정말 통합적 앎인지, 그게 우리의 삶에 말해주는 바가 무엇인지 등등. 떠오르는 의문은 점점 구체적이고 커져가는데 충분히 해명되지 못하니, 전체적인 그림을 다르게 그려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뭐, 여튼 아직 명확하지 않은 생각들이다. 다만, 장회익 선생의 책을 읽다 보니 되레 샐라스가 이야기하는 '현시적 이미지와 과학적 이미지' 사이의 관계에 더 많은 관심이 생겼다.


⑨ 이호규 외 저, 『한무숙 문학세계』, 새미 출판사, 초판(2000), ~20쪽

⑩ 한무숙 저, 『한무숙 단편집』, 지만지 출판사, 개정판(2021), ~108쪽


  어렵다. '한무숙 단편집'에 수록된 소설이 초판을 기준으로 해서 그런가 옛말, 한자가 너무 많다. 작가가 담아내는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그래서 썩 가독성이 좋진 않다. 그래도 천천히 완독하고 싶은 책들. 


한 달을 뒤돌아보며


  네이버 블로그를 삭제하며 알라딘에 올렸던 서평도 모두 삭제했었다. 일기장처럼 쓰던 블로그를 조금 바꿔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고, 저품질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서평을 모두 삭제한 이유는, 3년 전 블로그를 옮기는 과정에서 네이버 블로그와 알라딘에 같은 서평을 비슷한 시기에 올렸던 게 저품질에 영향을 준 게 아닌가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그래서 삭제했던 건데, 얼마 전에 다시 찾아 보니 블로그와 알라딘을 동시에 운영하면서도 방문자 수가 꽤 많은 블로거를 여럿 보았다. 갭만 조금 주면 같이 올려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오랜 기간 꾸준히 쓰는 게 중요했지... 다 지워버린 게 좀 후회스럽지만 그냥 전에 썼던 글 다시 읽어보며 천천히 올린다 생각하고, 갭을 어느 정도 두고 다시 올려보려고 한다. 이것저것 많이 생각하지 말고 꾸준히나 해보자.

  글로 먹고살고 싶다는 생각도 더 자주 드는 요즘이다. 잘 하지는 못하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그리고 책과 글을 주제로 남과 소통할 때 나는 가장 안정적이고 행복하다. 하지만 글을 잘 쓰는 것과, 글로 먹고사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고 한다. 솔직히 내가 글을 쓰고 그것으로 소통하는 방식은 글로 먹고사는 것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어떻게 글로 먹고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도 얼마 없는 것 같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역시나 답은 없다. 꾸준히 고민하고, 꾸준히 쓰는 수밖에. 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나아가는 수밖에. 두렵고 무섭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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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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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필립 로스 책은 다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게 3년 전이다. 로스의 책을 하나 둘 읽어가면서, 역시 그 다짐은 틀리지 않았다고, 남은 책도 어서 읽어야겠다고 외치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 울분도 에브리맨처럼 분량은 짧지만 많은 생각을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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