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결말은 똑같다. 다만 어떤 징검다리를 거쳐 그 결말에 이를지는 각자가 선택할 수 있다.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 달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만 있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는 달까지 걸어가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다.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꽉 막힌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제게 그 말씀들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나는 인간에게 숨겨진 진심이 따로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부활한 구세주를 몰라본 도마를 질타하겠지만, 기독교에서 그는 뜻밖의 대접을 받고 있다. 도마가 없었더라면 예수의 부활은 증명받지 못했으리라. 그러니까 도마의 의심은 예수의 신성을 확인하는 도구였다. 그렇다면 나의 의심은 사람들이 흔히 진심이라고 말하는 그 마음의 무게를 재는 저울이다.

나는 가능한 거의 모든 인간들의 진심을 나의 저울에 올려본다. 이 저울의 반대편에는 사실의 세계가 놓여 있다.

나는 인간을 연민한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 자명한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인간들은 쉬지 않고 헛된 이야기를 만든다.

그녀의 표정이 점점 더 밝아질 수 있었던 것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 더 힘을 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곧 있을 파국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요?"

오랜 세월 동안 쌓인 감정이 마그마가 터지듯 일시에 분출되기 때문에 동기는 아주 사소한 경우가 많습니다. 친족 간의 가정폭력에서 흔히 발견되는 양상이죠.

여관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자신에게 반말을 했다는 이유로 처음 보는 투숙객을 토막 내 죽이고, 마약에 취해 환청으로 비웃음을 듣고 귀갓길의 여학생을 난도질한다.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얼굴 정도나 알 뿐인 여자의 가족들을 그녀가 보는 앞에서 살해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평생 모은 투자금으로 억대의 외제차를 몰고 다니며 결혼 사기를 저지른다.

모든 글‘쓰기’는 글‘짓기’라고 말하는 부분이 그녀의 귀에 쏙 들어왔다.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글을 써대는 저를 보고는 이상한 애야, 라고 간단하게 이해해버렸겠지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 역시 기만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저의 수많은 모습 중에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것들만 모아 저라는 이미지를 만들었으니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앞뒤가 척척 맞겠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그것은 기만입니다. 실제의 제 삶은 앞뒤가 척척 맞아떨어지지 않거든요.

아까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우리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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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 시간은 아주 유용하고 유익하게 채워졌다.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심히 공부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즐거웠다. 잘되어가고 있다는 느낌, 정체되어 녹과 곰팡이가 스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능력을 사용하며 갈고 닦아서 날카롭게 벼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코 좁다고 할 수 없는 경험이 내 앞에 펼쳐졌다.

단지 귀족들은 오만과 기만이 교묘하게 균형을 이룬 태도를 보이는 반면, 평민들은 훨씬 더 솔직하고 깍듯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귀족들에게는 종종 냉정하면서도 성마른 프랑스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싱싱한 체액은 유창하고 번드레하게 늘어놓는 아부나 거짓말, 가볍고 발랄하면서도 아주 매정하고 가식적인 태도로 나타났다.

그들은 거짓말을 꾸며대는 것을 미덕까지는 아니지만 아주 가벼운 잘못 정도로 여겼다. "거짓말을 여러번 했습니다"1는 모든 소녀나 여자 들이 고해성사에서 늘 하는 말이었다. 사제도 전혀 놀라지 않고 쾌히 용서해주었다. 만일 미사에 가지 않거나 소설을 좀 읽었다면 문제가 달랐다. 그런 것은 마땅히 비난받고 참회해야 할 범죄였다.

나는 성공하기로 확고하게 결심했다. 내 일생에 최초로 주어진 기회를 제멋대로 날뛰는 여자아이들의 적개심과 버르장머리 때문에 망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학생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그녀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쫓겨나길 자청하는 꼴이었다.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베끄 부인은 유쾌하고 사랑스럽고 호감을 살 만한 역할은 독차지하고, 성가신 위기가 닥치면 선생들에게 알아서 하라고 했다.

위기 상황에서 적절하고 신속하게 대응해봐야 인기만 떨어질 뿐인 걸 부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믿을 사람은 나 자신뿐이었다.

어떤 학생이라도 영혼 속에 바람직한 경쟁심을 일으키거나 정직한 수치심을 느끼게 하면 그날부터 내 편이 되었다.

한번은 예배에 가끔 빠지는 것과 거짓말하는 것 중 거짓말이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는 말도 무심코 했다.

"하늘나라에서 확실히 구원을 받을 수 있게, 신교도는 지상에서 산 채로 화장하는 게 낫대요."7
나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웃고 말았다.

그녀의 다른 감정들도 대부분 아주 약하게 표출됐다. 좋고 싫고도, 애증도 거미줄 정도로 가늘고 가벼웠다. 그러나 지속적이고 강력한 게 단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기심이었다.

그녀는 이런 약점들과 더불어 언급조차 할 필요가 없는 다른 결점들이 있었고, 고상하지도 않고 품위도 없었지만, 정말 아름다웠다!

베끄 부인은 아주 일관성 있는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을 참아냈지만 누구에게도 다정하지는 않았다. 자식이라고 해도 한결같은 그녀의 금욕적인 평정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가족을 걱정하고 그들의 이익과 건강에는 늘 신경을 쓰지만, 아이를 무릎에 앉히거나 발그레한 입술에 입맞춤을 하거나 다정하게 포옹하고 온화하게 쓰다듬으며 사랑 가득한 말을 쏟아붓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어느날 피핀은 돌계단의 꼭대기에서 아래로 굴러떨어져보기로 마음먹었다. 베끄 부인은 아이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그녀는 무슨 소리든 다 들었다) 식당에서 나와 아이를 안아올리더니 조용히 말했다.
"팔이 부러졌군."7

그는 현명한 선택을 했다. 나는 짐짓 태연한 양 억지로 용감한 척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꾸미거나 억지로 강한 척하는 게 아니었다.

전반적인 외모, 즉 목소리와 얼굴과 태도에 부인이 호감을 느낀 것 같았다. 정말이지 독자 여러분도 그를 봤다면, 저녁이고 차츰 어두워지고 있어 불빛까지 밝힌다면, 베끄 부인도 한 사람의 여자인 이상 이 의사에게 호감을 느끼는 게 당연하리라는 것을 이해하리라.

피핀이 그의 손에서 풀려나자마자 데지레가 아프다고 나섰다. 이 악마 같은 아이는 흉내의 천재인데다 병상에서 받는 사랑과 관심에 매료되어 병이 자기 취향에 딱 들어맞는다는 결론에 이르자 몸져누웠다. 이 아이는 연기를 잘했으며 그 어머니의 연기는 그보다 한수 위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뻔히 알면서도 베끄 부인은 놀랄 정도로 뻔뻔스럽게 그 말을 믿고 걱정하는 시늉을 해냈다.

그 말인즉, 나는 눈에 띄지 않는 가구나 목공이 만든 평범한 의자나 화려한 무늬가 없는 카펫 정도의 존재였다는 의미다.

오해를 받는데도 화가 안 나고 오히려 안심이 되는 수도 있다. 제대로 이해받지 못할 바에야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 편하다. 정직한 사람이 우연히 가택침입자로 오인된다면 당황하기보다는 오히려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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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가 신체 조직의 가장 은밀한 곳에 숨어들어 몇 년에 걸쳐 쌓이는 끈질긴 암살자인 데 반해 시안화물은 일시에 당신의 숨을 멎게 한다.

시안화물은 살인자들에게만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다. 천재 수학자이자 컴퓨터의 아버지 앨런 튜링은 동성애라는 죄목으로 영국 정부에 의해 강제로 화학적 거세를 당해 가슴이 커지는 부작용을 겪은 뒤 시안화물을 주입한 사과를 깨물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속설에 따르면 그의 자살은 좋아하는 영화 〈백설공주〉의 한 장면을 모방했다고 한다.

이는 일상의 모든 것을 독특하고도 개인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남자의 마지막 기행이었을 것이다.

그는 전쟁중에 블레츨리 파크의 암호 학교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 자전거로 통근했다. 체인이 자꾸 빠져도 수리를 거부했다. 자전거를 수리점에 가져가지 않고, 체인이 감당할 수 있는 회전수를 계산하여 체인이 늘어지기 직전에 자전거에서 내려 조정했다.

물리학은 종이 위의 숫자에 지나지 않는 것, 현실의 사물을 표상하지 않는 추상, 단순한 계산 착오로 가득하지 않던가. 그의 결과에 들어 있던 특이점은 실수, 기현상, 비현실적 환각 중 하나가 분명했다.

종이호랑이, 중국의 용일 뿐이라고.

군의관들은 천포창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것은 인체가 제 세포를 인지하지 못하고 격렬히 공격하는 질병이다.

전쟁이 시작된 뒤로 마치 세상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듯 모든 것이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느낌은 그 자신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성자, 광인, 신비가처럼 전체를 보아야만 우주의 진정한 조직 원리를 해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장 작은 아이조차 손가락 하나로 태양을 가릴 수 있다니 우주는 얼마나 신기하고 광학과 원근법의 법칙은 얼마나 변덕스러운가!"

"그의 공격은 가장 예상치 못한 곳을 겨냥했으며 그의 기쁨은 지식의 초원을 자유롭게 누비는 것이었다."

"나는 종종 하늘에 온전히 충성하지 못했다. 나의 관심은 결코 달 너머 우주에 있는 것들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사이로 누벼진 실들을, 인간 영혼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좇았다. 그곳이야말로 과학의 새로운 빛이 비쳐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엘제가 첫번째 청혼을 거절한 것은 자신에 대한 그의 관심이 오로지 지적인 것일까봐서였다.

혜성의 긴 꼬리가 언제나 태양의 반대 방향을 향한다는 사실은 슈바르츠실트에게 매혹적이었다. "천국에서 추방당해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는 천사처럼 맹렬하게 저 꼬리가 끌어당겨지는 것은 어떤 바람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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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페타민은 독일의 파죽지세 전격전을 가능케 한 연료였으며, 많은 병사들은 쓴맛 나는 페르비틴 알약을 혀에 녹여 맛보다가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다.

헤르만 괴링 같은 나머지 사람들은 머뭇거리다 생포되었으나, 이것은 필연적 결과의 유예에 불과했다. 건강 상태가 재판을 받기에 적합하다는 의사들의 발표가 있고 난 후 괴링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한낱 범죄자가 아닌 군인처럼 죽고 싶다며 총살형을 요청했다. 최후의 요청이 거부됐다는 말을 듣고서 그는 포마드 병에 숨겨둔 시안화물 캡슐을 짓씹어 자결했다. 병 옆에 놓인 쪽지에는 자신이 "위대한 한니발처럼" 제 손으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쓰여 있었다.

괴링, 괴벨스, 보어만, 힘러는 이 캡슐만으로 자결했으나 그 밖의 많은 나치 지도자들은 캡슐을 깨무는 동시에 머리에 총을 쏘는 방법을 선택했다.

누군가 자결을 방해하고자 캡슐에 고의로 불순물을 섞어 자신이 바라는 고통 없고 즉각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느린 고통으로 죗값을 치르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휘발성이 매우 강하다. 섭씨 26도에서 끓으며 연한 아몬드 향을 내는데, 인류의 40퍼센트는 해당 유전자가 없어서 이 냄새를 맡지 못한다.

디스바흐가 새로운 색깔을 ‘프러시안블루’로 명명한 것은 고대의 영광을 능가할 제국과 자신의 우연한 발견 사이에 끈끈하고 꾸준한 연관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디스바흐는 그런 지고한 상상력이 결여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창조물로부터 금전적 이익을 뽑아낼 상거래와 사업의 가장 기초적인 기술도 갖추지 못했다.

누에는 끓는 물에 세 시간 이상 담가두어야 했는데, 이것은 고치의 귀중한 원료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누에를 죽이기 위한 최소 시간이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디펠은 사람들에게서 신앙심을 빼앗고 모든 지성과 선의를 박탈하는 재능이 있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퍼부은 가장 맹렬한 비판 중 하나에서 디펠을 다름 아닌 사탄에 비유했다. "그는 가장 사악한 악마다. 어떤 원칙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실로 모든 원칙을 적대시한다."

그의 목표는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영혼을 이식한 최초의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이었으나, 결국에 가서는 희생물의 부스러기를 짜맞추는 데서 변태적 쾌감을 느끼는 극도의 잔인함으로 악명을 떨쳤을 뿐이다.

상한 피, 뼈, 가지뿔, 뿔, 발굽을 섞은 이 영약의 유일한 쓰임새는 살충제였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악취 덕분이었다.

디펠의 영약에 들어 있던 성분에서 탄생한 파란색은 결국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호쿠사이의 〈가나가와의 파도 아래〉에서뿐 아니라 마치 이 색깔의 화학 구조에 들어 있는 무언가가 폭력을 유발하기라도 하는 듯 프로이센군의 제복에서도 빛난다.

그 무언가는 저 연금술사의 실험에서 이어져내려온 과오, 그늘, 실존적 얼룩이었다.

이 괴물은 메리 셸리에게 걸작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의 영감을 선사했다. 소설에서 그녀는 인간의 모든 능력 중에서 가장 위험한 능력인 과학을 맹목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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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한 고용 상태는 두려움을 부추기고 진료실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든다. 해마다 계약이 갱신되는 직종에 일하는 노동자들은 더욱 건강검진 결과에 민감하게 마련이다. 노동자가 자기 몸이 어떤지 검사를 받고 싶은데, 이 결과로 인해 일자리가 위태로워질까 봐 회사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해야 하니… 좀 억울하다.

아프기 시작한 초기에 그들은 아프다고 말을 할 수 없었다. 아파서 쉬게 되면 동료들이 더 높은 강도로 일해야 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며 같은 동작을 수천 번 수만 번씩 반복하다가 결국 관절이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모기는 우리 피부에 침을 꽂는데, 그 침에는 흡혈관과 타액관이 있다. 흡혈관으로 피를 빠는 동안 타액관을 통해서는 타액을 흘려 넣어 피가 굳는 것을 방지해 손쉽게 피를 빨게 된다. 타액을 흘려 넣지 않으면 피는 금방 굳어서 모기가 계속 빨 수가 없다. 이렇게 타액관을 통해 들어온 모기의 타액을 우리 면역 체계는 외부 침입 물질로 인식하고 공격해, 일종의 알레르기 면역 반응이 나타나 가렵고 붓게 된다. 그래서 모기에 물려 가려운 곳에 알레르기 반응을 억제하는 성분의 약(항히스타민, 스테로이드 등)을 바르는 것이다.

성인들의 경우 이미 수없이 모기에 물려왔기에, 모기의 타액에 대해서는 몸의 면역 체계가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뭐, 전에도 겪어봤는데 별스럽게 문제되진 않더구만’ 하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면 알레르기 반응이 덜 나타나게 되고, 이것을 ‘면역 관용Immune Tolerance’이라고 한다.

원래대로라면 성인은 모기에 물려도 많이 붓지 않아야 하지만, 늘상 물리던 지역의 모기가 아닌 새로운 모기에 물렸을 때는 ‘면역 관용’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심하게 부을 수 있다. 산모기, 바다모기 무섭다는 말이 이 뜻이다.

이런 면역 관용이 모든 알레르기 질환에 생기면 참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아토피 피부염이나 알레르기 비염·결막염에는 면역 관용이 잘 생기지 않는다.(사실은 그래서 ‘알레르기 질환’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다.) 집먼지진드기에 알레르기가 있는 아이를 집먼지진드기에 지속적으로 노출하면 피부염과 비염이 심해질 뿐이다. 면역 관용을 일으키려면 아주 특수한 방식(항원을 피부 아래에 주사로 주입하거나 혀 밑으로 넣어주는 등)으로 알레르기 항원에 노출시켜야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면역 관용에 대해서는 다른 재미있는 의견도 있다. 오스트리아 의사인 비스친거 박사는 콧구멍을 후벼 코딱지를 먹는 아이들이 면역력이 더 좋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내용이 인터넷에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코털에 걸러진 여러 가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알레르기 항원을 먹어서 장을 통해 흡수하게 되면, 면역 관용을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 콧구멍을 팠는데(그리고 그 코딱지를 좀 먹기도 했는데), 코 파기는 지위 고하, 성별, 인종, 문화적 차이와 나이를 막론하고, 무릇 콧구멍이 있는 사람이라면 거의 누구나 하는 행위라고 한다. 심지어 인간과 유사한 유인원들도 코를 판다!

코털에 외부에서 들어온 이물질이 걸려서 붙고 코 점막의 점액질까지 더해져 생기는 코딱지는, 인간이 생존해 있는 이상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어떻게 하면 코 점막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잘 파느냐가 관건이다.(실제로는 코를 후비는 과정에서 코 점막에 무조건 상처가 생기기 때문에, 면역력을 높이기 위해 코딱지를 일부러 파 먹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나는 면역 관용이란 말에서 관용(똘레랑스)이라는 단어가 좋다. 면역 반응은 없어도 문제, 너무 심해도 문제인 셈이니, 관용이라는 용어가 주는 ‘적당함’에 마음이 끌린다. 어쨌든 해가 지날수록 모기 물린 자리는 덜 간지러워질 테고, 그렇게 조금 더 관용이 생겼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성장하는 느낌에 뿌듯하기도 하다.

한 의료기관에서의 충분한 상담, 이후 우선적으로 의심되는 질환을 배제해나가면서 이루어지는 진단 과정, 필요하면 적절한 상급 병원에 의뢰가 되고, 치료 약물이 나타내는 부작용까지도 주치의와 모두 상담할 수 있는, 이런 주치의-환자 관계는 정말 꿈같은 이야기가 된다.

불편한 얘기를 하는 건, 당장은 산처럼 큰 부담이지만, 그 산을 넘으면 서로를 더 신뢰할 수 있는 다른 장이 열린다.

결국 ‘팀 주치의’로 가야 한다고 본다. 단 한 명의 주치의는 환자에게도, 주치의에게도 부담스럽다. 서로 긴밀히 소통할 수 있고 진료기록을 공유할 수 있고 신뢰할 수 있는 몇몇 의료인들이 팀을 이루어 연속적인 진료를 할 수 있어야 ‘주치의제’의 진짜 장점을 살릴 수 있다.

서로 믿되 적절하게 의심하고, 이전 진료기록을 충분한 근거로 삼되 문제를 처음부터 되새겨볼 수 있는 사람, 우리는 그런 ‘주치의들의 팀’이 필요하다.

언니의 말대로 우리 의료인들에겐 ‘VIP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다. VIP 신드롬은 ‘VIP 환자들의 거들먹거리는 병’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공주병이나 왕자병처럼 ‘실제로는 아닌데 자기 스스로를 VIP라고 착각하는 병’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잘해드리고 싶은데 계속 일이 꼬이는 상황’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VIP 신드롬은 무릇 접객을 기본으로 하는 모든 산업 영역에 있을 것 같은데, 의료계에서 특히 유명하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의료인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의료인의 실수는 치명적인 의료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각별히 주의하여 실수를 예방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한 사람의 실수를 다른 사람들이 커버할 수 있도록 이중 삼중으로 체크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만 한다.(이런 의미에서 사실 모든 의료는 ‘팀플레이’일 수밖에 없다.)

전공의 시절 대학병원에서 일할 때 ‘교수님의 어머님’, ‘대기업 회장님’ 같은 환자분들이 입원을 하시면, 병동의 전공의나 간호사들이 긴장하여 안 하던 실수도 하던 일들이 생각난다. 실수를 커버하기 위해 마련해놓은 이중 삼중의 시스템들은 작동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손발이 꼬이는 상황이 되곤 했다. 이런 상황이 우리 의료인들이 얘기하는 VIP 신드롬이다. 더 잘해드리려고 하다 보면, 통상적으로는 문제없이 진행하던 일들에서 치명적인 실수가 발생한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에 종사하는 우리 모두는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돈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잘해야 한다고 배우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 때부터도 ‘환자를 차별하지 말라. 경제력, 직업, 인종, 장애 유무, 성별, 종교,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 등 그 어떤 것으로도 차별하지 말라’고 배웠다.

모든 환자를 똑같이 대하고, 다만 질환의 중하고 경함에 있어서, 의료 자원의 분배에 있어서 더 필요한 환자에게 의료진의 관심이 집중되는 정도가 다를 뿐이어야 한다고 배우고 훈련받는다.

크리스틴 포래스가 지은 『무례함의 비용』이라는 책에 따르면 무례함은 전염된다고 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자신도 무례하게 행동할 수 있고, 업무 효율도 떨어진다고 한다. 직접 무례한 행동을 당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상황을 옆에서 보기만 했을 뿐인 사람에게도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일이 나타난다니, 의료기관 안에서 직원과 환자 모두를 위해 정중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실력이 없어진 것인가, 아니면 대학병원의 아우라를 벗고 나면 원래 그리 특별할 게 없는 의사였던 것인가. 그도 아니면 동네 의원에 다니는 사람들이 특히 부작용 호소가 많은 편인 것인가. 혹시 의료협동조합의 조합원이나 우리 조합원 중 많은 수를 차지하는 페미니스트들은 불만이 많은 사람들인 것인가…. 알 수가 없었다. 자괴감에 빠지고 의기소침해졌다.

나는 직원들과 함께 ‘비폭력대화 워크숍’에도 참여했다. 환자의 격렬한 항의와 불만이 ‘충족되지 못한 욕구에 대한 안타까운 표현’이라는 비폭력대화 지도자 선생님의 얘기는 많은 위안이 되었다.

의사는 환자의 신뢰를 필요로 한다. 감기에 항생제와 주사제를 처방하지 않아도 나를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 처방약을 먹다가 부작용이 생겨도 다시 와서 상담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 증상이 빨리 사라지지 않더라도 원인을 따져보기 위해 나의 말에 따라 기다려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소신껏 진료할 수 있다. 그러지 않고 환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닥터 쇼핑’을 할 거라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진료가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환자도 의사의 신뢰를 필요로 한다. 아프다고 하면 믿어주고 공감해주는 의사,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의사, 약의 부작용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도 되고 잘 낫지 않는다고 마음 편히 털어놓을 수 있는 의사를 필요로 한다.

환자들이 부작용을 호소하거나 상급 병원에서는 다른 설명을 들었다고 얘기할 때, 자신을 질책하는 건가 싶어 지레 방어적이 되는 의사 말고, 자신에 대한 환자의 신뢰를 ‘신뢰’하는 그런 의사 말이다. 의사-환자 사이의 피드백들이야말로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

진료실에서 알레르기 비염이나 결막염, 천식, 아토피 등 알레르기 질환을 가진 분들을 진료하다 보면, 해가 갈수록 증상이 심해진다고 호소하는 분들을 많이 만난다. 본인과 배우자는 알레르기가 없는데 아이들은 왜 아토피가 있는지 궁금해하는 보호자들도 있고, 어렸을 때는 분명히 없었던 알레르기 비염이 왜 이제야 생기는지 의아하게 여기기도 한다.

첫 번째는 기후 변화이다. 기후 변화에 따라 식물의 개화 시기가 달라지면서 예전과는 달리 알레르기 증상이 이른 시기에 시작하여 늦은 시기까지 지속되는가 하면, 식물의 북방한계선·남방한계선이 달라짐에 따라 원래는 남부 지방에서만 서식하는 식물들이 점차 북상하면서 새로운 알레르기 항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똑같은 꽃가루라도 대기 온도가 높으면 항원성(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성질)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두 번째는 세계화이다. 외래종 동식물들이 들어오면서 한국인의 유전자에 이전까지 노출된 적 없던 새로운 알레르기 항원들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집먼지진드기 검사를 해보면, 한국 토종 집먼지진드기에는 알레르기가 없는 사람들도 미국이나 유럽에서 들어온 집먼지진드기에는 알레르기가 있는 경우가 아주 많다. 사실 나도 유럽 집먼지진드기에만 알레르기가 있다. 이런 분들에게 나는 농담으로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아토피가 없었을 체질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세 번째는 환경오염의 영향이다. 꽃가루, 곰팡이 등의 전통적인 알레르기 항원들이 미세먼지, 공기 중 금속 물질과 같은 대기오염 물질과 결합하여 새로운 알레르기 항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네 번째는 식품 첨가물의 영향이다. 식용색소, 유화제 등 각종 식품 첨가물들은 장 점막세포의 결합 상태를 변화시켜 음식물의 알레르기 항원성을 높이게 되고, 설사를 일으키거나 아토피 피부염을 악화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인류의 유전자가 사실 점점 알레르기에 약해지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항생제와 다른 약품들이 발명되기 시작한 후로 인류는 알레르기에 점점 약해져왔다. 심한 아토피, 천식이 발현될 만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어렸을 때 폐렴으로 사망하지 않고 많이 살아남아 후손을 남기게 되어, 몇 세대 만에 인류 유전자 풀 내에서 알레르기 유전자의 비율이 올라간 것이다.

알레르기 질환을 치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어찌할 수 없는 문제와 어찌할 수 있는 문제를 잘 나누어, 할 수 있는 문제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식품 첨가물이 들어간 음식을 피하고 집먼지진드기 관리를 위해 침대 청소를 자주 하거나 이불을 삶아 빠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적으로 기후 변화, 세계화, 환경오염, 건강하지 않은 먹거리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것도 필요하겠다.

나는 진료실 안에서 알레르기 질환을 통합적으로 보려고 하는 편이다. 알레르기 비염이 있으면 재채기를 많이 하게 되니, 요실금도 잘 생기고 역류성 식도염도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아토피 피부염이 있는 아이들은 바이러스에 대한 피부 면역이 낮으니 사마귀가 잘 생길 수 있다고 보고, 이렇게 사마귀가 잘 생기는 친구들에게는 ‘자궁경부암 예방주사’를 권하는 식이다. 자궁경부암도 결국 인간유두종바이러스(사마귀바이러스)로 인해 생기는 암이니까.

비단 알레르기 질환만일까. 이거 하나로만, 저거 하나로만 나타나는 질환은 잘 없다. 인류의 역사와 지금의 내 건강이, 전 지구적인 환경오염과 내 피부가, 내 재채기와 요실금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연결성 안에서 우리의 건강을 통합적으로 사고하려는 노력을 같이 해나가고 싶다.

환자들은 나의 인상 좋은 미소에 진료실을 찾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내 목소리가 다정해서이거나, 항생제를 조금이나마 덜 써서, 설명을 그래도 좀 더 잘해주는 것 같아서, 협동조합의 조합원이라서 찾는 걸 수도 있다. 집이 가까워서, 의원 인테리어가 예뻐서, 친절한 직원이 마음에 들어서, 의원 아래 약국의 약사님과 친해서일 수도 있다.

물론 일을 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의 일의 핵심 부분은 진료니까, 중요한 최신 연구들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책과 논문들로 열심히 공부하는 등 근거 있게 진료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무엇보다 진료실에서 환자들을 통해서 배우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저절로 ‘진료를 잘하는 것’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다른 인증 평가들은 더 믿기 어렵다. 수많은 평가들이 서류를 얼마나 잘 쓰느냐로 결판나곤 하는데, 현실에서는 진료나 간호에 필요하지도 않은 기상천외한 서류 작업을 하느라 정작 환자에게 집중할 시간이 부족해진다는 결말은 누구나 짐작 가능한 상황이다. 의사들만 처한 상황도 아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비슷한 호소를 한다. 각종 인증, 평가에 대비하고 서류를 작성하느라, 정작 학생들을 돌보고 학생들과 대화할 시간이 없다고 말이다.

‘미안’은 그야말로 환자에게 죄송한 거. 내가 아니라 다른 의사가 했다면 결과가 달랐겠지 싶은 거. ‘안 미안’은 불가항력적인 거. 누가 하더라도 이 이상의 결과는 내기 힘들었을 거야 싶은 거. 누구도 실수하지 않았고 잘못하지도 않았지만 결과가 어쩔 수 없는 거.

의사는 면허증을 가진다. 면허증은 자격증과 다르다. 자격증은 그 일을 할 수 있는 적절한 자격을 갖추었음을 증명해주는 서류이고, 면허증은 면허가 없이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해주는 서류이다. 그게 없어도 할 수 있는 것과 그게 없으면 해서는 안 되는 것의 차이는 크다.

그래서 조리사는 자격증이고 영양사는 면허증이다. 변호사는 자격증이고 의사는 면허증이다.

운전도 면허증이다. 운전자는 면허증이 없으면 운전할 수 없지만, 면허증이 있다고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운전자가 잘못하거나 부주의해서 사고가 날 수도 있고, 운전자의 실수가 없어도 다른 운전자의 잘못이나 도로 상황, 행인의 돌발 행동, 날씨 등의 문제로도 사고가 난다. 사고가 나면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다칠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기도 한다.

아직도 우리는 인간의 신체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고, 다만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 노력이 항상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의료 사고가 날 때 우리는 모두 정말 속상하다.

영어에서는 "I’m sorry"라고 하면 속상하고 안타깝다는 표현도 되고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표현도 되니까, 그 둘이 한꺼번에 되니까 미국 의사들은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는 ‘I’m sorry’라고 뭉뚱그리지 말고 ‘안타까움의 표현’과 ‘제대로 된 사과’를 구별하자는 움직임도 있다고 한다.

이 말을 하다가 문득 내가 정말 감기밖에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나는 감기밖에 모른다. 그래도 의대 다닐 때에는 감기조차 몰랐는데, 이제 감기는 조금 아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계절의 감기와 저 계절의 감기를 알고, 이 사람의 감기와 저 사람의 감기를 알지. 감기의 첫째 날과 감기의 둘째 날도 알아. 그러고 보면 그동안 많은 것을 배운 것 같기도 하네.

감기를 진료하려면 감기를 진단할 수 있어야 한다. 폐렴이나 천식, 중이염이나 부비동염 같은 감기의 합병증으로 생길 수 있는 질환이 아니고 감기로 초기에 오진될 수 있는 질환도 아니며, 알레르기 비염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동네에 요즘 무슨 호흡기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하고, 감기가 이 가족과 그 어린이집에서 어떻게 퍼지고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3~4일 쉬면 나을 감기인데도 학교나 직장을 쉬지 못하니 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환자의 사정도 이해해야 한다.

단순한 감기에는 항생제가 필요 없다지만 감기로 인해 합병증이 항상 생겨왔던 아이니까 항생제를 복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도 파악해야 한다. 왜 독감 예방접종을 받아도 감기에는 걸리는지, 그럼에도 왜 여러 가지 예방접종은 필요한지, 왜 대체 감기 예방접종은 개발되지 못하는지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감기도 모르던 내가 이제 감기는 조금 알겠네 싶은 것은, 우리가 진료실에서 함께 보내왔던 지난 시간 덕분이다.

예전엔 교과서와 논문을 통해 배우는 줄 알았다. 교수님들과 선배님들에게 물려받는 것이 의학 지식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모두 환자들에게서 다시 배운 거다.

당신이 혹시 나의 진료를 마음에 들어했다면, 그것은 내가 페미니스트 주치의이기 때문입니다. 살림의 조합원들이 자주 하는 말마따나, 페미니즘만으로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힘들지만 페미니즘 없이 건강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차별과 혐오가 얼마나 건강을 해치는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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