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와 가르페에게 이 말을 들려주던 이치마쓰와 오마쓰는 이를 드러내고 자랑스러운 듯 웃었습니다. 그 표정에는 어딘지 모르게 학대받아온 자의 교활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람이 좋아서인지 익살꾼이어서인지, 뭔가 미워할 수 없는 그런 기분조차 들었습니다.
기도라는 것이 이 지상의 행복이나 요행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알고 있다 하더라고 저는 한낮의 이 무서운 침묵이 마을에서 빨리빨리 사라지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이 혹시 저나 가르페의 얼굴에 조금이라도 겁에 질린 표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에서나 늘 명랑하던 가르페까지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모키치를 바라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음성에나 말투에 위협적인 데는 없었습니다만, 그런 만큼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부락민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애처롭게도 겁 많은 그는 남을 대신하는 역할이 자기에게 떠맡겨지자 완전히 정신을 잃고 눈물을 글썽이더니 마침내는 여러 사람들에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그 두 사람 뒤에서 기치지로는 주인에게 얻어맞은 개처럼 슬픈 눈으로 저희를 원망스럽게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요? 저희들은 나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하나님이 이러한 시련을 아무 뜻도 없이 내리셨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루시는 일은 모두 선한 일이므로, 때가 되면 이 박해와 고난이 왜 저희의 운명에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날이 올 테지요.
기치지로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조금 더 다른 무서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박해가 시작되고 오늘까지 20년, 여기 어두운 일본의 땅에 많은 신도들의 신음이 가득 차고 사제의 붉은 피가 흐르고 교회의 탑이 붕괴되어 가는데, 하나님은 자신에게 바쳐진 너무나도 참혹한 희생을 보면서도 아직 침묵하고 계십니다. 기치지로의 어리석은 원망에 그러한 물음이 깔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얗게 거품을 머금은 파도가 때때로 나무기둥을 넘어 해변까지 부딪쳐 밀려오고, 한 마리 새가 바다에 거의 닿을 듯이 살짝 스치며 멀리 날아갔습니다. 이것으로 모두 끝났습니다.
아아, 바다에는 비가 쉴 새 없이 계속 내립니다. 그리고 바다는 그들을 죽인 다음 더욱 무서우리만치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황폐한 땅에 단 하나, 작지만 경작할 수 있는 삽이나 괭이를 남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의지와는 달리 몸이 마구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섭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입니다. 아무리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육체의 공포는 의지와 관계없이 엄습해 오는 것입니다. 가르페가 있을 때는 빵을 두 개로 나누듯이 공포도 서로 나누었습니다만, 앞으로는 혼자서 이 밤바다의 추위와 어둠을 모두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공포의 떨림은 일본에 온 모든 선교사들이 느꼈던 것일까? 그들은 어땠을까?’라고 생각하자 왠지 겁에 질린 쥐처럼 작은 기치지로의 얼굴이 가슴에 안겨 왔습니다.
매우 오랫동안 부락 한가운데 서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때는 불안도 공포도 없었습니다. 그것보다도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 하는 소리가 감정과는 관계없이 머릿속에서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좋으니 그가 사람이라면 쫓아가고 싶다는 욕망과 그로 인해 일어날 위험이 한동안 마음을 괴롭혔지만 결국 유혹에 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라도 이 유혹을 견뎌 낼 수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도 산에서 내려가 사람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타이르듯이 말했습니다.
오후에는 하늘이 약간 갰습니다. 하늘은 땅에 남아 있는 물웅덩이에 그 희고 작은 구름을 비추었습니다.
실제로 그 사람을 아무도 보지 못했는데 화가들은 모든 인간의 기도나 꿈을 담아 그 얼굴을 좀더 아름답고 좀더 신성하게 나타냈습니다. 아마 그의 진실된 진짜 얼굴은 그 이상으로 성스러웠을 게 틀림없습니다.
이미 일어났던 일은 또 일어나리. 이미 행하여졌던 일은 또다시 행하여지리.
‘만일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이것은 무서운 상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무기둥에 묶여 파도에 씻긴 모키치나 이치소우의 인생은 얼마나 익살스러운 연극인가. 많은 바다를 건너 2년의 세월을 보내며 이 나라에 다다른 선교사들은 또 얼마나 우스운 환영(幻影)을 계속 뒤쫓은 것인가. 그리고 지금,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는 산속을 방황하고 있는 나 자신은 얼마나 우스운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가.
박해의 시기에 사제는 순교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불이, 신앙의 불이 꺼지지 않게 계속 살아남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는 않아. 가령 아내에게 배신당한 남편을 상상하면 알 수 있지. 그는 아직 아내를 계속 사랑하고 있어. 그러나 아내가 자신을 배반한 것 자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그 배신행위에 혐오를 느끼는 남편의 기분, 그것이 그리스도가 유다에게 가진 마음이었을 거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두 종류가 있습니다. 즉 강한 자와 약한 자, 성자와 평범한 인간, 영웅과 용렬한 자. 그래서 강한 자는 이와 같이 박해받는 시대에도 신앙 때문에 불에 태워지고 바다에 던져져도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약자는 이 기치지로처럼 산속을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어느 쪽 인간이냐?’ 만약 사제라는 자존심이나 의무감이 없다면 저 또한 기치지로와 똑같이 성화를 밟았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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