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만나자는 전화를 걸어왔다. 그가 전화하기를 백 번도 더 기다렸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고통스러운 긴장감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그 사람의 진짜 목소리마저도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사랑을 나누는 순간이 아니면 모든 것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더구나 나는 언젠가 그 사람이 떠나는 순간이 올 거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나는 고통스러운 미래의 쾌락 속에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의 일정을 알면 안심이 되었다. 그 사람이 어떤 시간, 어떤 장소에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면서 그 사람의 부정(不貞)에 대비했다.

하지만 떠날 날짜가 다가오자 오래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전혀 준비하지 못한 시험을 앞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가 나를 짓누르는 듯했고, 쓸데없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의 침대칸에서 나는 일주일 후에 같은 기차편을 타고 파리로 돌아오고 있는 내 모습을 끊임없이 그려보았다. 그러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감은 이내 불안으로 바뀌었다.

내가 예술작품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그것이 열정과 관계가 있을 때뿐이었다.

나는 바디아 성당에 다시 갔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난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반쯤 닳아서 지워진 산타크로체의 프레스코 벽화를 바라보다가 우리의 이야기도 나와 그 사람의 기억 속에서 언젠가는 저 빛바랜 그림처럼 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자 몹시 혼란스러워졌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앞에서는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남성의 육체가 가진 아름다움을 여자가 아닌 남자가 그토록 뛰어나게 표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워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같은 경우로 나는 쿠르베의 그림만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이 여자에 의해 그려진 적이 없다는 사실이 유감스러웠다. 〈세상의 근원〉이라는 제목이 붙은 쿠르베의 그림은 누워 있는 여인을 그린 것인데, 여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전면에 성기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원주)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내가 마치 글을 쓰듯이 피렌체에 나의 열정을 새겨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한 이야기를 읽으려면 피렌체로 다시 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상태가 상당히 심각해지자, 나는 카드점 치는 사람을 찾아가 상담을 받고 싶어졌다. 그것만이 내게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줄 것 같았다.

어느 날 밤, 에이즈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내게 그거라도 남겨놓았는지 모르잖아.’

내가 그 사람을 떠올리는 행위와 환각 사이에,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기억과 광기 사이에는 차이점이 전혀 없는 듯했다.

한번은 침대에 누워 자위를 했는데, 그 사람도 내 배 위에서 같은 것을 느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더이상 나를 의미 있는 곳으로 이끌어주지 못했다. 단지 나를 늙게 할 뿐이었다.

만약 이달 말까지 그 사람이 내게 전화를 해온다면 자선단체에 500프랑을 기부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그 사람이 하지도 않은 말에 대답하고, 보내지 않을 편지에 답장을 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나의 생각, 나의 행동들은 모두 과거를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현재를, 행복을 향해 열려 있던 과거로 바꾸어놓고 싶었다.

나는 하루하루를 시간을 헤아리며 지냈다. ‘그 사람이 떠난 지 이 주일째야. 이제 다섯 주가 지났구나.’ ‘작년 오늘에는 내가 거기 있었지. 나는 이러이러한 일들을 했어.’ 쇼핑센터가 새로 문을 열었다거나 고르바초프가 파리를 방문했다거나 마이클 창이 롤랑 가로스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거나 하는 화젯거리가 있어도 내게 떠오르는 건, ‘예전엔 그 사람이 여기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었다. 나는 특별할 것도 없었던 그 당시의 순간들을 돌이켜보았다. 소르본 대학의 자료실에 들르고, 볼테르 거리를 거닐고, 베네통에서 스커트를입어보던 그때를. 그렇게 과거를 되새기다보니, 왜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가듯 지금 현재에서 그 시절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A가 떠난 지 두 달쯤 지난 후부터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나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시간은 열정의 시간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부터 계속해서 반과거 시제를 쓴 이유는,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예전의 기다림이나 전화벨 소리, 만남을 대신하고 있는 나의 고통을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오직 한 남자에게 엽서를 보낸다는 구실 하나만으로 코펜하겐까지 간 셈이었음을 새삼 확인했다.

나는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일과 허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가늠해보았다. 소설 속 인물에 대해서는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그때 내가 여길 지나갔지’ 하는 구절이 나오더라도 미심쩍은감정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원고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쓰였으므로 이미 읽을 만한 글로는 손색이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쓴 원고가 아직 내 손 안에 있는 한, 글쓰기의 가능성은 아직도 열려 있다. 내게는 형용사의 위치를 바꾸는 일보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덧붙이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사람들은 연합군의 지상 공격과 화학무기를 이용한 사담후세인의 반격전, 그리고 라파예트 백화점 테러 등 이미 예고되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을 가슴 졸이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사랑의 열정을 겪을 때 생겨나는 것과 똑같은,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불가능한 욕망과 고뇌이다. 그러나 그 둘 사이의 유사성은 여기서 그친다. 이런 기다림에는 꿈이나 상상이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낭테르에서 퐁드뇌이까지 가는 동안 빨간 신호등에 걸릴 때마다 우리는 뜨겁게 껴안고 애무했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옛날 같으면 죽을 때까지 볼 수 없었던 성기의 결합 장면이나 남자의 정액을, 수 세기가 흐르고 여러 세대가 지난 요즈음엔 거리에서악수를 나누는 장면만큼이나 쉽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줄곧 매달리게 될 것 같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끔찍스럽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문에서 그 사람의 나라에 관한 기사를 읽는다(그 사람은 외국인이었다).
옷과 화장품을 고른다.
그에게 편지를 쓴다.
침대 시트를 갈고 방에 꽃을 꽂아놓는다.
다음 만남을 위해 그에게 잊지 않고 말해야 할 것과 그의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들을 메모해둔다.
함께 보낼 저녁을 위해 위스키와 과일, 각종 음식을 사둔다.
그 사람이 오면 어느 방에서 사랑을 나눌지 상상한다.

마찬가지로, 책을 읽을 때 나의 마음을 휘어잡는 문장은 남녀관계를 묘사한 대목이었다.

가령,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포옹할 때 눈을 지그시 감는다"라는 구절을 읽으면, A가 나를 안을 때 그렇게 하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씌어 있는 그 밖의 다른 내용들은 그 사람과다시 만날 때까지의 빈 시간을 메워주는 수단일 뿐이었다.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 사람의 전화 외에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

나는 내가 기다리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는 종종 내가 저지르거나 당할 다소 비극적인 사고나 질병을 상상해서 그것으로 내 욕망을 저울질해보는 버릇이 있었다. 이는 상상을 통해 내가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아봄으로써 내 욕망이 운명에 대항할 만큼 큰지 그 정도를 측정해보는 방법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을 완성할 수 있다면 내 집이 불에 타버려도 괜찮아’ 하고 상상하는 식이다.(

나는 나를 관통하여 지나가는 시간 속에 살고 있을 뿐이었다.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 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통보받지 못한 채 시간이 계속 흐르면 시험에 떨어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듯이, 그의 전화를 받지 못한 채로 여러 날이 지나면 그 사람이 나를 떠난 게 틀림없다고 단정 짓곤 했다.

하지만 똑같은 옷을 다시 입고 그 사람 앞에 나선다는 것이 내겐 그 사람과의 만남을 일종의 완벽한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는 일처럼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가끔, 이러한 열정을 누리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써내는 것과 똑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완성해야 하는 필요성, 세세한 것까지 정성을 다한다는 점이 그랬다. 그리고 몇 달에 걸쳐서 글을 완성한 후에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열정이 끝까지 다하고 나면─‘다하다’라는 표현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겠다─죽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슈퍼마켓의 계산대나 은행 창구 같은 곳에서 많은 여자들 틈에 끼여 서 있을 때면, 저 여자들도 나처럼 머릿속에 한 남자를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주말 약속이나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헬스클럽의 미용체조 강습, 아이들의 성적표 따위나 기다리며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금의 내겐 그런 종류의 모든 일들이하찮고 무덤덤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요즘은 ‘한 남자와 미친 듯한 사랑’을 하고 있다거나 ‘누군가와 아주 깊은 관계’에 빠져 있다거나 혹은 과거에 그랬었다고 숨김없이 고백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고 공감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사라지고 나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었더라도 그렇게 마구 이야기해버린 것을 후회했다.

부모와 자식은 육체적으로 너무도 가까우면서도 완벽하게 금지되어 있어서, 서로의 성적 본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무척 불편한 사이이기 때문이다.

한 소녀는 원망에 가득 찬 말투로 "엄마의 애인은 엄마가 허황된 꿈만 꾸게 만들어요"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외로운 엄마에게 그보다 더 위안이 되는 일이 있을까?

그 사람과 사귀는 동안에는 클래식 음악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가요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런 노래들은 솔직하고 거리감 없이 열정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말해주었다.

대중가요는 그 당시 내 생활의 일부였고, 내가 사는 방식을 정당화시켜주었다.

평소의 생활습관과 다르게 나는 그런 식으로 돈을 마구 썼다. 하지만 내게 그런 일은 A를 향한 나의 열정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지극히 필요한 정상적인 지출로 생각되었다.

내 지출 목록에는 그 사람을 기다리며 꿈꾸듯 보내버린 시간과 매번 그것이 마지막인 것처럼(마지막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몸을가누지 못할 정도로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며 쇠잔해져버린 내 육체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언제나’와 ‘어느 날’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사실을 열거하거나 묘사하는 방식으로 쓰인 글에는 모순도 혼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글은 순간순간 겪은 것들을 음미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것들을 돌이켜보며 남들이나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인 것이다.

글을 쓰는 데 내게 미리 주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열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주는 시간과 자유일 것이다.

그는 외국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프랑스의 지적이고 예술적인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실제로 그다지 매료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술 취한 모습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 사람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거나 나를 끌어안으며 트림을 해도 말이다. 반대로 꾸밈없고 조금은 천박한 모습으로 그 사람과 내가 화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내심 행복했다.

나는 나와의 관계가 그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친구들로부터 꽃이나 책을 선물받게 되면 나는 기쁘기보다는, 그 사람은 내게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선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였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일 테니 말이다. 그사람이 나를 욕망하느냐 욕망하지 않느냐 하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성기를 보면 당장에 알 수 있는, 유일하고도 명백한 진실이었다.

그 사람은 프랑스어를 어느 정도 할 줄 알지만 나는 그 사람의 모국어를 전혀 못 한다는 것 때문에 실망은 더욱 컸다. 나는 우리가 서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환상일 뿐임을 깨달았다.

나는 그가 하려고했던 말을 추론해본 후 그 사람이 한 말을 상황에 맞는 다른 말로 바꿔주었다.

나는 그 사람이 내 집에서 떠날 때 미리 써둔 편지를 직접 그에게 건네주곤 했다. 한 번 읽고 나면 조각조각 찢어서 고속도로에 날려버릴 것이 뻔하지만, 그렇다고 편지 쓰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손안에 있는’ 아내와 나누는 정사에 대해 그가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아봤지만, 그런 장면을 연상할 때 느껴지는 고통은 어찌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제약이 바로 기다림과 욕망의 근원이었다.

(반대로 영화로인해 우리 관계가 그 사람에게 위험하게 생각됐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애써 떨쳐버렸다. 혼외정사를 다룬 영화*는 한결같이 비극으로 끝나게 마련이니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내 태도가 옳은 건지 그 사람이 옳은 건지 굳이 가려낼 필요는 없다. 그저 그사람보다 내가 더 운이 좋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내가 그 사람과 거리감을 느끼는 순간은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일시적으로 오는 것일 뿐, 나 스스로 애써 그런 것들을 찾아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완벽한 한가로움을 갈망했다.

내 열정이 불러일으키는 느낌과 상상의 이야기에 자유롭게 전념하지 못하도록 나를 방해하는 것들에 맞설 권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RER이나 지하철, 혹은 대합실, 그리고 잠시 한눈을 팔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 나는 앉기만 하면 이내 A를 생각하며 몽상에 빠져들었다. 이런 상태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온몸에 경련이 일어날 만큼 행복해졌다.

이런 이야기들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을 나는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이 쓰이는 때와 그것을 나 혼자서 읽는 때,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읽는 때는 이미 시간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테고, 어쩌면 남들에게 이 글이 읽힐 기회가 절대로 오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남들이 읽게 되기 전에 내가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전쟁이나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런 시간상의 차이 때문에 나는 마음놓고 솔직하게 이 글을 쓸 수가 있다. 열여섯 살 때 일광욕을 한답시고 하루 종일 몸을 태우고, 스무 살 때는 피임도 하지않은 채 겁없이 섹스를 즐겼던 것처럼 나중 일을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노출증이란 같은 시간대에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병적인 욕망이니까.

프랑스에서의 A의 직위나 역할은 뭇 여성들의 숭배를 끌어내기에 충분해 보였다. 반면 내게는 그 사람을 내 곁에 붙들어둘 만한 별다른 매력이 없는 것 같았다

파리 시내에 나가게 될 때면 나는 어느거리에서든 그 사람이 옆자리에 여자를 태운 채 차를 몰고 가는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만약 그런 경우를 당하더라도 오만하고 무심하게 보이기 위해 짐짓 태연한 척 똑바로 몸을 펴고 걸었다.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데도 나는 결코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그가 분명히 다른 곳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이탈리앵 거리를 진땀을 흘리며 걸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오늘 아침 7시부터 일을 했는데 수술이 6개만 있어서 환자 두 명을 돌보고 일찍 집에 와서 거의 8시까지 잤다. 아직 몸이 많이 회복이 안 되어 그런가? 병든 닭처럼 자꾸 꾸벅거린다. 그나마 일을 하면 집중할 대상이 있으니까 그런 일은 없지만. 다른 직업(행동을 하는 직업이라도 혼자 하게 되어 졸다가 손가락이 잘리어 병원에 오는 사람도 있는데)과 달리 간호라는 직업은 행동을 해야 하는데 상대가 있는 직업이라 꾸벅꾸벅 조는 일은 없다. 없을 수밖에 없겠지?


내가 맡은 두 번째 환자는 또 스페인어만 하는 할아버지 (82세)였다.(하루에 적어도 한 환자는 스페인어만 한다.ㅠㅠ) 오른쪽 무릎 수술을 2달 전에 받고 오늘은 왼쪽 무릎 수술을 받았다. 노인 환자를 돌보게 되면 늘 걱정을 하는 편이다. 잘 회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섬망이 오는 것뿐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회복이 어려운 경우가 젊은 사람들 보다 많기 때문인데. 하지만, 이 할아버지는 잘 회복하셨다. 그런데 잠이 드시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눈을 확 뜨시고는 좀 놀라는 표정을 짓고 뭔가를 노려보는 표정을 반복하는 거다.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못하는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통역기를 사용하고 했을 때 할아버지의 대답은 다 괜찮다는 것이었다.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 몰라서 답답했는데 마침 청소하는 M이 왔길래 통역을 부탁했다. 왜 그러시냐고. 그랬더니 본인이 수술을 하고 나온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좀 놀랐다. 아프다고 해서 약도 드렸는데 그럼 왜 아픈지 몰랐다는 것인가? 아무튼, 할아버지에게 수술이 잘 끝났다고 하니까 갑자기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할렐루야!"라고!!! 아 놔~~~~.ㅎㅎㅎㅎㅎㅎㅎㅎㅎ 귀여웠다.ㅋㅋ


회복이 잘 되시고 다른 유닛으로 이동을 하기 전에 할아버지의 와이프가 방문하실 수 있게 해드렸다. 할아버지가 82세라서 나이가 비슷한 할머니일 줄 알았더니 젊으셨다. 나중에 할아버지 다리 엑스레이 찍을 때 잠깐 그 와이프와 얘기를 했는데 자기가 40대였을 때 자녀가 6명이었단다! 하지만 남편의 도움을 하나도 받지 못하고 혼자 힘들게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이 할아버지가 자기 집의 문을 고치러 왔다가 어떻게 정이 들어 결혼을 하고 6명의 아이들을 다 대학에 보내줬다고. 와이프는 영어를 잘 했는데 더 놀라운 것은 내가 "두 사람이 만날 운명이었나 보다."는 말을 했더니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아닌가!!! "There is a tide in the affairs of men!"라고. 내가 또 사람의 겉만 보고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니까 교육을 많이 안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부터 나이가 많으니까로 이어지는 선입견. 


그런데 좀 전에 소노 아야코의 <약간의 거리를 둔다>를 읽는데 역시 '때'에 대한 글이 나왔다. 그녀는 구약성서에 있는 내용을 아래와 같이 인용했다.



매사 때가 있다. 구약성서 코헬레서(전도서) 중에는 중에는 다음과 같은 훌륭한 구절이 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돌을 던질 때가 있고 돌을 모을 때가 있으며 껴안을 때가 있고 떨어질 때가 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간직할 때가 있고 던져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의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 P 59-60





겉모습은 보잘것없어 보였던 아주머니였지만, 그 안에 저런 교양이 들어있다니,, 좀 놀라웠고, 책 좀 읽는다고 거들먹거리는 나는 정작 인용할 수 있는 문장 하나 없는 것이 부끄러웠다. 덕분에 셰익스피어의 저 구절은 잊지 못할 것 같다.
















2. 오늘은 할로윈데이이다. 아침에 출근했더니 마취과 의사가 Outpatient 쪽으로 가기 위해 내가 있는 PACU를 지나가면서 한국에서 생긴 일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한 시간 후에 나와 같이 일하는 PACU 직원이 오자마자 뉴스를 봤다고. 너무 슬픈 일이라고. 너무 슬픈 일이다. 여전히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더구나 어린 자녀들의 죽음이 대부분이라 그 부모들의 황망한 억장은 또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지 마음이 너무 아프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안타까운 죽음이 결코 허무한 죽음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syche 2022-11-01 15: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정말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믿을 수가 없어요. 이렇게 쉽게 시스템이 무너질 수가 있나 싶고요.

psyche 2022-11-01 15:27   좋아요 5 | URL
그런데 저 할아버지 정말 대단하시네요. 싱글맘과 결혼해서 6명을 모두 대학에 보내시다니! 그리고 저 말이 셰익스피어에 나온다는 걸 알아들은 라로님도 대단하세요. 저는 들었다면 이게 뭔 소리다냐 했을 걸요.

라로 2022-11-02 14:5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정말 다른 사람들이 물어보는데 뭐라고 대답할지... 휴

저 할아버지 정말 존경스러웠어요,,
근데 수술 끝났는데 많이 안 아프셔서 그런가 너무 좋아하시더라구요!!ㅎㅎㅎ
저는 예전에 영문학 수업 들었거든요, 그떄 셰익스피어의 비극 공부하면서
저 문장 유명하다고 해서 배운 기억이... 제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저도 뭔 말이냐 했을 거에요,,ㅋㅋ

아참! 프님 잘 지내시죠??
댓글 폭탄을 봤는데 제가 일하고 자야 해서 (방금 영화보고 왔거든요.)
내일 댓글 달게요. 댓글과 좋아요, 넘 감사합니다!!! 항상!!! 프님 최고!!!^^;;

레삭매냐 2022-11-01 20: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매사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
격렬하게 동의하는 바입니다.

무슨 일에는 자각과 그에 따른
필연적 행동이라는 삶의 법칙
이 적용되지 않나 싶습니다.

31일 할로윈 당일날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들이 홍대 거리
에 다수 출몰해서 아랑곳하지
않고 좀비처럼 떠돌더라는 뉘
우스가 너무 무서웠습니다.

타인에 대한 공감대가 없는 이
들과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
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습니다.

라로 2022-11-02 14:54   좋아요 1 | URL
오늘 블랙 아담 보면서
그 말을 또 깊이 느꼈어요!!

맞습니다 매냐님,,
나이들수록 그런 것이 더 느껴지네요.

아~~ 말씀을 들으니
이 세상이, 젊은이들이
많이 두렵습니다...
그래도 다 그렇지는 않으니
여전히 희망을 얘기하고 싶어요.

coolcat329 2022-11-01 2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감동적이에요.
세상에 할아버지 참 멋지고 좋은 분!
정말 할렐루야~~
근데 저 셰익스피어 대사를 알아들으신 라로님도 멋지세요.
몰라서 찾아봤는데 줄리어스 시저에 나오는 대사군요~

라로 2022-11-02 14:56   좋아요 1 | URL
진짜 어떻게 그렇게 하셨는지
저도 얘기들으면서 참 부럽고(응? 왜??;;;)
좋았어요. 할렐루야도 넘 웃기고요,,
그런 분 첨 봤거든요.ㅎㅎㅎㅎㅎㅎㅎ
저 예전에 영문학 수업 들으면서
교수님이 인용하셔서요,,
보통 기억력이 무지 나빠서 기억이
안 나야 하는데 그분이 넘 잘 인용을 하셔서
그랬는지 제가 이런 글을 쓰려고 그랬는지
똭 기억이 나더라구요.^^;;;
네,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 하나인 쥴리어스 시저에
나오는 대사에요. 모르면 찾아보는
쿨캣님도 멋지세요!!^^
 

불행은 엄연한 사유재산이다. 불행도 재산이므로 버리지 않고 단단히 간직해둔다면 언젠가 반드시 큰 힘이되어 나를 구원한다. - P46

이었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곳이므로 그러려니 참고견뎌내자는 나약한 소리가 아니다. 이 세상에 완전한 평등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인간 사회의 이런 특성을 이해하고 일일이 상처받지 말자는 각오였다. 나아가 불공평을 이겨낼 수 있도록 정신을 단련시키자는 제안이기도했다. 억울하게 생명을 잃거나, 오랫동안 앓아눕거나, 직장에서 이유도 없이 왕따를 당하는 상황에서도 웃어넘기자는 것은 아니다. - P48

고뇌가 없는 인간은 인간성을 상실한다. 고뇌하지 않는 인간에겐 신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 P51

살다보면 의욕을 잃은 때도 있다는 걸 허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때론 융통성이 없어보여 다가서기가 꺼려진다.
마찬가지로 늘 도망만 치는 사람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 P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군가에게 ‘약간의 도움‘을 남기고 죽는다면 대성공이다. - P30

길에서 처음 만난 아기 엄마를 도와 함께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것은 ‘약간의 도움‘이지만, 상대방에겐 뜻하지 않은 행운이다. 나는 행운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되는 것이다. - P30

S아내에 대해, 또는 남편에 대해 이 사람과 결혼해서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사소한 감동이 전해져서다.
사회적으로 큰일을 하는 남자들이 정작 자기 아내에게 평생토록 미움을 받아 불행하게 살아온 예를 많이 알고있다. 반려자마저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사람이 국민의 행복을 담보로 정치가가 되고, 사원들의 목숨줄을 쥐고 경영에 나서는 것이다. 이처럼 웃기는 상황이 또 있을까 싶다. - P31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고작 저녁찬거리 정도다. 찬거리라고 해도 막상 마트에 들러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되면 예정한 품목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다. - P32

운명은 마트에서 장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 중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것은 없다. 우리가 20세기 종반에 지금의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 운명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 P32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미의식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기 전까지 막연히 흘러가는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저항하기보다는 당당하게, 그리고 묵묵히 주변 사람들과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고Goo싶다. - P33

않더라도 그 자체로 훌륭하게 완결되어 빛난다. 자기 행위를 타인에게 평가받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은버둥거릴 수밖에 없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삶을 보내고 있다면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행복하다는 자신감이 중요하다. - P33

어차피 내 인생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은 절대로 벌어지지 않는 법이다. - P33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결과에서 신의 깊은 배려를 찾아내는 것. 여기까지 생각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 P34

아내를 살리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것보다 더 큰 영광이며, 무거운 임무다. 왜냐하면 신께서는 ‘그것은 나를 살리는 일이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 P36

재미나게도 신앙에서는 실패한 인생이란 없다. 신을 믿기만 하면 무슨 일을 하든 실패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의 삶이 신의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에서는, 가령 약간의 좌절은 있더라도 그런 좌절에서조차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찾아낸 의미가 인생의 빛이 된다. 이 빛은 세상에 널린 흔한 빛이 아니다. 세상이라는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도 눈부시게 빛나는 나만의기쁨이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역전되는 것이다. 이는 어떤 정치가, 심리학자, 극작가도 해내지 못할 역전극이며, 해방이다. - P37

어렸을 때 우리 집은 가정 폭력이 있었다. 내가 선택할 수만 있다면 평화로운 가정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하sam지만 운명은 나를 평화롭지 못한 가정의 외동딸로 선택했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고, 적극적으로 이를 개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소녀 시절에 매일같이 이런저런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 바람에 무척 이른 나이에 인생은 비참하고 어둡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나이에 인생의 밑바닥을 체험한 덕분인지 작은 도움에도 한줄기 빛을 만난 것처럼 감사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무리어두운 터널 속에 있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알게되었다. - P41

세상이 살기 어렵다지만 매년 조금씩이나마 좋아지는 모습도 있다. 나는 그 작은 변화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어려서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겪었기 때문이다. 별것도 아닌 일에 고마움을 느끼는 현재의 내 모습이야말로 그 시절 나를 괴롭혔던 쓰라린 운명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 P42

최선보다 차선으로 성공한 사람이 더 많다는 게 그 중거다. - P44

"이런 자그마한 회사는 싫어. 세상이 알아주는 대기Mal업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라고 한탄하기보다는 "나를 써줘서 감사합니다." 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 나름대로 보람된 성과를 얻게 될것이다.
인간에겐 운명이 강제로 부과된다. 우리가 바꿀 수 없으므로 운명이다. 또 억지로 바꿔본들 부자연스럽고 아름답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감수하고 그 운명을 토양삼아 인생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위대함이다. - P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