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속의 서울 - 한국문학이 스케치한 서울로의 산책 서울문화예술총서 2
김재관.장두식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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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열린책들에서 잠깐 나왔던 도시가 만든 작가 시리즈가 생각이 났다.

프란츠 카프카와 카사노바에 대한 책이였는데 도시 속에서 문학을 만들어 가는 그들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았던 도시는 아름다웠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학은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에서만 나온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은 깨지고 있었다.

카프카의 문학이 그러하듯이 문학 속의 서울을 보며 문학은 다양함을 지니고 있지만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알아가고자 했던 문학은 국내 문학이 아니였다.

국내 문학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알기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오산으로 인해 세계문학을 접하다보니 국내문학이 되려 찬밥이 되고 말았다. 국내 문학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현대 문학의 우울함 때문에 고전만 탐하고 있던 내게 문학 속의 서울은 내가 느끼고자 했던 다양성을 국내로 돌리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문학 속에서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을 만난다는 것이 책을 읽기 전까지 같이 잡히지 않았다. 유명한 소설들을 추렴해 그 안에서 서울의 모습을 짜맞출 거라는 상상을 하고 있었던 것인데 우선 우리 문학의 방대함과 꾸준함, 시대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을 만날 때 마다 나의 허성이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국내의 것은 열등하다는 생각이 문학속에도 내재되어 있어 그 동안 등한시 해왔던 것이다.

고전에 관심이 가면서 우리의 고전의 위대함을 느끼면서도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자화상을 그린 현대소설들은 식상하기만 했다. 이 시대를 즐기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아둔함일 수도 있으나 문학 속의 서울에서 정리해 본 현대 문학은 나의 아둔함을 질책하고 있어다.

단지 내가 우울하다는 이유 만으로 현대 문학을 피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서울이 우리나라의 수도이긴 하지만 문학 속에서 서울의 모습이 이렇게 많이 드러나 있는 줄 또한 서울을 중심으로 그려진 다양함이 수 많은 문학적 텍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문학을 통해 간접경험과 그 시대에 내가 들어가 있다라는 착각이 드는 사례도 많았지만 약 40여년의 서울의 모습을 훑어볼 수 있다는 것은 많은 감흥을 주었다.

서울의 변화된 모습은 기본이고 역사, 시민의식, 경제 등 수 많은 인간군상을 통해 서울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었다. 워낙 문학의 홍수 속에 살고 있어 읽었다 할지라도 그냥 지나쳐을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다른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을 통한 혹은 문학을 통한 그 시절의 모습은 내 가까이에 와 있는 듯 했다.

빈빈촌에도 들어 갔다가 거품 경제 속도 맛보았고 인권의 몰락과 지배 속에서는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을 문학을 빌어 말하고 있었다.

그 드러남으로 위험해 지더라도 나의 생각을 말하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나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있기도 했다. 허구가 뒤섞인 소설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현실은 존재하기에 씁쓸함이 묻어나기도 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삶의 현장을, 우리네 모습을 피하지 말아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에서 보는 것은 단순한 겉모습의 서울이 아닌 서울의 뒷골목, 서울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적나라함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 문학의 힘을 빌었기에 조금은 은유적인 느낌도 있었지만 그 여운은 오래 남았다.

 

2000년대의 문학이 별로 실려 있지 않아 그나마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 아쉬웠지만 문학을 통한 도시의 내부는 실로 방대했다. 나 또한 그 방대한 도시에 잠깐 머물면서 도시의 유인원이 아닌 곁도는 존재의 경험을 해봤지만 그 안으로의 흡수를 바라지는 않았다.

모두들 흡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이용하는 허상이 존재하더라도 그들의 존재만으로 도시는 형성이 되는 것이다.

그 인간군상 속에서 비단 문학만이 서울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리라.

개인 하나하나가 도시의 필요한 요인이 되는 것은 인간미가 떨어지는 바램일까.

그들에게 부속품도 되지 못하는 상실감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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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문라이트
이재익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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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잘 알고 있다. 연애 소설을 대하는 당신의 냉소적인 태도를.>

프롤로그에서 이 소설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과감히 드러내는 문장을 보며 나 또한 그러한 태도를 보일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앞으로 펼쳐질 사랑이 궁금한 것도 사실이였다.

그런 나의 마음을 간파하기라도 한 듯 책장은 질주하듯 넘어갔고 그 자리에서 책을 다 읽어 버린 후 나는 멍하게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읽어내려간 이들의 사랑은 내 마음의 무미건조함을 나타내는 것 밖에 더 이상의 감정이입은 없었다.

사랑에 내 모든 것을 던져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은 제쳐두고라도 왜 이 사랑은 내게 낯설게 다가왔을까.

 

루너틱하게 변해버린 준혁 때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분명 강한 자극에도 끄떡도 하지 않는 나의 감정때문이리라.

내가 겪어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핑계를 대는 것보다 이젠 그러한 감정을 잊어 버렸는지도 모를 내가 두려웠다. 결국, 내가 하는 사랑은 쉽게 질려 버릴 꺼라고 포기가 빠르지 않겠냐고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렸지만 준혁,진영,소원,관의 사랑 앞에 내 자신이 작아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그들이 사랑을 위해 처음부터 존재하려 한 건 아니지만 관의 말처럼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더라도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그랬기에 아프다고 포기해 버리는 절망의 드러남이 적었다.

분명 오랜 세월동안 고통의 시간을 지내왔을 터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들은 사랑만을 갈망한다.

 

엇갈려 버리고 방향이 다른 사랑 때문에 운명의 장난처럼 마음은 분산되어 가지만 그들이 사랑을 하는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우리가 자주 언급하는 그냥 너이기에 좋다는 말을 넘어 '너 아니면 안되겠어'가 되어 버려 오랜 세월 고통 받지만 준혁에겐 그 고통의 시간보다 진영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영이 그토록 좋아하던 달을 보며 매일 밤 기도한다.

자신을 진영이 곁으로 데려가 달라고. 그리고 달이 진영이인냥 바라보며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랜 시간 소원이 자신을 그런 식으로 좋아했다는 것을 모른채. 그러한 준혁의 마음을 알아 준 것일까. 진영을 처음 본 자신의 옥탑방 옆집 옥상에서 진영과 분위기가 비슷한 민희를 만난다.

그리곤 준혁의 눈이 아닌 다른 이의 눈으로 바라 본 민희의 존재여부는 밝히지 못하고 준혁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자신은 진영이를 보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흔적이 없다. 달에게 매일 밤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졌다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듯이. 그 뒤에 남겨진 소원은 준혁의 흔적을 찾지만 아무 것도 좇을 수 없었다. 달이 준혁을 데려 간 것일까. 아니면 정말 진영이 다시 나타난 것일까.

 

그들의 사랑을 순식간에 읽어 버렸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들과 동화될 수 없음에 몸둘 바를 몰랐다.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아, 익숙한 복선이야' 를 되뇌이며 간접경험을 뽐내고 있었지만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 더 강렬한 비극을 원한 것인지 행복한 결말을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엇갈리는 사랑,죽음,변하지 않는 마음등을 지켜 보며 익숙한 스토리라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책을 읽고 난 후 멍하니 그들의 사랑을 생각해 봤지만 더 이상의 진척은 없었다. 그들의 사랑을 이해하기엔 내가 가진 세상에 대한 열정이 떨어졌고 그들의 사랑을 느끼기엔 나는 현재 사랑을 하지 않는다는 바보 같은 변명을 늘어뜨릴 수 밖에 없다. 이젠 사랑의 감정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기억의 순환이 아닌 잊혀짐만이 늘 일상화가 되어버린 것일까.

그들의 사랑을 두고 누구는 불행하고 누구는 행복하다 논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한 사람이 잠재해 있지만 그 한사람과 오래 오래 마주보며 살아갈 수 없으니 그게 안타까울 뿐이였다. 내 곁에 둘 수 없는 사람, 그 사람 때문에 준혁은 매일 밤 달을 보았으리라.

그리고 그 환영을 좇아 자신의 사랑을 찾아갔으리라. 자신의 모든 걸 던진 준혁의 뒷모습이 더 이상 쓸쓸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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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 삶의 여백에 담은 깊은 지혜의 울림
박완서.이해인.이인호.방혜자 지음 / 샘터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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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님과 이해인 수녀님은 익히 알고 있지만 방혜자님, 이인호님은 낯설었다.

그래서 박완서, 이해인 이 두분을 믿고(?) 책을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박완서 이해인의 대화 방혜자 이인호님이 대화는 내가 그분들을 안다고 해서 더 와 닿거나 모른다고 해서 덜 와 닿는 그런 차원을 떠나는 진솔한 대화였다.

물론 박완서님의 몇몇 작품을 읽고 그 분의 개인적인 모습들을 많이 접해 대화 속에서 더 많은 밑 배경을 알고 있어 마치 내가 아는 사람의 일 인냥 읽어 나갔지만 이러한 소소함 보다는 대화의 폭이 넓고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여서 크게 좌지우지 되었던 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이 분들의 배경과 일은 대화의 중심에서 부터 다른 주제로 뻗어나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박완서 이해인 님이 대화는 삶 속에 녹아 들어 인내와 고통 사랑을 얘기 하는 부분이 많은 반면 방혜자 이인호님의 대화는 유학파 답게 여성의 역활, 세계속의 나 등을 말하는 시각이 좀 더 틔인 주제가 많았다. 너무나 유명한 박완서 이해인 님이기에 무슨 대화를 할까 하는 궁긍증이 일었는데 그 두 분의 친분과 명성이 어느 정도 있기에 개인적인 얘기들도 많았다.

방혜자 이인호님도 그러했지만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박완서 이해인 수녀님의 배경에 반해 전혀 아는게 없어 방혜자 이인호님의 대화를 더 재미나게 읽었는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 한 인생을 놓고 볼때 세상을 내려다 보는 위치의 분들의 대화지만 쉽게 수긍할 수 있고 공감 가는 내용들과 그들의 지혜를 빌 수 있는 내용들로 채워져서 어려움 없이 읽은 기억이 난다. 조금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염려 속에서 박완서님의 말처럼 쉽게 읽힌 다고 쉽게 씌여진 것도 아닌 독자들을 위해 아니면 삶의 연륜으로 그렇게 대화를 이끌어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 안에서 얻은 것을 품는 것은 각자의 몫이지만 그 분들의 대화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각자의 처소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늘 자신을 가꾸어 나갔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1945년 생인 이해인 수녀님만 빼고 세 분은 1930년대 생이시다.

60~70년의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격동의 세월을 보낸 분들이라 단순한 나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박완서님도 말씀하셨듯이 70년의 인생을 살면서 몇 백년의 삶을 산 것처럼 개인적으로나 사회 정치적으로 수 많은 변화와 아픔과 기쁨을 맛 보았기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이유를 못 찾을 정도로 그들의 연륜은 깊었다.

이 분들의 대화가 우리들에게 미치는 영향, 사고를 틔워주는 인식을 떠나 인생의 까마득한 선배로써 보여주고 나누어 주는 것들은 많았다.

우선은 자기네들의 경험을 유감없이 뱉어냄으로써 선택의 기로를 매일 걷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좀 더 넓은 시각을 틔워주었던 것 같다.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인생의 기회라고 말할 수 있고 선택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진짜 나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소설가,수녀,화가,역사학자라는 범상치 않은 그녀들의 일은 열정적인 인생을 살아가는데 많은 독려가 되었다. 여성이기 이전에 의지를 가진 한 사람으로써의 그녀들의 모습은 시대를 뛰어 넘어 도전을 가늠해보는 열정이 묻어났다.

더욱이 요즘같이 해외유학이 흔해진 세대의 젊은이도 아닌 50~60년대의 젊은이였던 방혜자,이인호님의 유학은 의미가 남달랐다.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더 큰 세계에서 나를 가꾸기 위해 떠난 유학과 시대가 요구해서 호기심으로 도피하듯 떠나는 유학은 차원이 다른 것이 인상 깊었다.

나이로 보자면 할머니의 대열에 올라선지 오래인 그녀들의(그녀라고 말하기에 송구하지만) 모습에는 세대차이의 고리타분함이 아닌 삶이 지혜와 열정이 숨어 있어 그것을 엿보는 시간은 참으로 진귀했다. 그 분들의 대화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하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닌 그 대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좋았다.

 

자신과의 대화가 없다면 상대방과의 대화는 흐름을 타지 못할 것이다.

그랬기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자신과의 대화를 많이 한 셈이라 상대방과의 대화를 해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아주 진솔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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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 시간을 초월해 나를 만나다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고주영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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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운명이라는 말을 믿지 않게 된 것 같다.

운명이라고 여겼던 만남과 일들이 틀을 벗어나면서부터 불거져 나온 불신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펼쳐진 초원, 푸른하늘, 나를 감싸는 바람의 한가운데 서 있을때면 운명을 꿈꾸어 본다. 이 평안함을 전해줄 사람이 있다면, 어딘가에서 나처럼 똑같이 이 모든 것을 느끼고 있겠지 라고.

그러곤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이러한 생각들을 꺼내보며 잠시 멍해진다.

지금 내 손에는 리셋이 쥐어져 있다. 신기하게도 이 책이 추억 속으로 나를 이끌어 준 느낌이다. 그것도 아주 또렷하게.

 

2005년 봄. 화창한 일요일 오후 심부름을 가기 위해 교회 아이 자전거를 빌려 타고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부터 지나가는 바람이 시원하다는 걸 알았으니 시골길의 달림은 상쾌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상쾌한 바람을 쐬며 달리다보니 내 눈앞에 보리밭이 나타났다.

바람이 보리밭을 일렁이게 만드는 광경을 보며 와~ 하고 탄성을 내지를 수 밖에 없었다. 수확하기 전의 노란 보리였으니 바람이 스칠때마다 사삭거리는 소리는 아직도 귓전에 울리는 듯 하다.

그 보리밭의 느낌이 너무 강렬해 매년 그곳을 다시 찾았지만 그 감동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그러나 무라카미에게는 나보다 더한 감동이 보리밭에서 일어난다.

바로 마짱을 만난 것이다.

 

무라카미에게 나타나는 슈이치와 마치코에게 나타난 마스미를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환생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 슈이치와 마스미가 들어 있지만 무라키미와 마치코의 모습도 존재하기에 그들을 무어라 쉽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슈이치와 마스미의 결합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처럼 동성으로 태어났거나 결혼 상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 마음은 더 애틋하다. 시간의 흐름의 차이가 나서 각자 한 삶을 마치고 비로소 만날 수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어긋나 버린 인연이고 쉽게 지나칠 수 있었을 만남이였지만 마즈미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슈이치와의 몇 안되는 추억과 죽음은 슈이치를 마음속으로 기다리며 살아가게 한 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얼마 안되는 추억이기에 그와 함께 사랑을 한 것도 아니고 서로의 마음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상태에서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리고 마즈미는 슈치이를 만난 것이다. 슈이치가 목숨을 잃었을 즘의 중학생인 무라카미를.

서른이 넘어버린 미즈미 앞에 나타난 중학생의 슈이치를 마즈미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마즈미의 보습을 담고 있는 마치코의 등장도 슈치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중학생의 모습에 세일러복 차림이였다.

서로의 마지막 모습으로 만남을 시작하며 동시에 이별하게 되는 사실은 운명의 장난 같았지만 몇십년도 기다렸다는 마치코의 말처럼 그들의 재회가 중요한 것이다.

같은 하늘 아래서 사자자리 유성군을 보며 33년 더 살아서 또 보자는 마지막 그들의 대화는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고 삶까지 뛰어 넘는 거스를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이였다.

 

이 사랑의 모습을 흩뿌리듯 조급하게 이야기를 끌어 갔더라면 분명 식상했을 것이다. 얼핏보면 간단할 수도 있는 줄거리를 저자의 문체와 구성이 차분해서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나갔다. 1부에서 슈이치와 마즈미가 함께 존재했던 혼란스러운 전쟁시기에 하루 하루의 모습은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비범했고 성장과 동시에 내면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어 문학적인 면모까지 엿볼 수 있었다.

무라카미와 마즈미의 만남이 슈이치와 마즈미의 만남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1부와는 완전히 다른 2부의 내용은 다른 이야기인가 하는 혼란스러움이 있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1부에 대한 조급함을 눌러 주어 책을 덮고 난 후에는 작가의 구성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먼 길을 돌아온 듯한 느낌이지만 슈이치와 마즈미의 재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일관된 분위기를 이끌어 낸 책의 분위기는 충동적인 사색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였고 무한한 환상을 자아내는 것도 아닌 여운을 깊게 주어 인상 깊었다.

가볍고 자극적인 일본 소설을 주로 읽다 보니 일본 소설에 대한 식상함이 밀려와 별 기대없이 읽은 리셋은 일본소설에 대한 편견을 깨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러한 작품의 만남이 자주 이루어 지기를 갈망한다.

한 생을 뛰어 넘은 슈이치와 마즈미의 재회처럼 기다림이 길다해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분명 책을 읽는 즐거움도 삶을 살아가는 기쁨도 흔치않는 만남을 기다리며 설레임으로 마주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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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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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에게 오는 우연의 만남은 어떠한 결과를 낳든 숙명적일 수 밖에 없다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매개물은 사람이 아니라 음악과 책이 더 자주였다. 한 음악가나 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혹평 되거나 난해하거나 지금껏 발표된 분위기와 다른 것을 첫 만남으로 대했을 때 나는 그 음악가와 작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별 느낌없이 지나치는 작품들도 많지만 명성에 비해 나의 만족감을 채우지 못할때는 이런 아쉬움이 든다. 다른 작품을 먼저 만났더라면, 그랬다면 좀 더 포괄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며 그들의 작품을 많이 듣고 읽는 건 깊은 인연이라 생각한다.

 

거창하게 이런 궤변을 늘어놓는 것은 이 책이 성석제님의 작품 중에서 첫 만남이였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전 성석제님의 문체, 이야기에 대해 신선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터라 설레임으로 책장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신선함을 만나기도 전에 이 책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예감했다. 무언가가 내 마음 속에서 꿈틀대는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극과 잔인한 우울함이 깃든 현실의 부분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을 피하는 나의 편독에는 이러한 요소들을 만나기 싫어서였다. 현실을 살고 있으면서 현실을 피한다는 나의 편독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많지만 음지의 한가운데를 살아가기에 양지만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가 많이 덮어버렸다.

책 속의 감정들이 책 밖으로 비져나올라 치면 나는 황급히 도망쳐 버린 것이다. 그 우울의 짙음은 책을 읽어나가는 페이지 수 만큼 두꺼워지고 농도도 짙어가고 있었기에 나의 도망은 자주일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길 곁의 잔상을 그려내고 있다는 관심의 유도 속에서 허우적 댈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책 속의 분위기에 동화되어 가는 것을 책 읽기의 즐거움으로 꼽기도 하지만 인간의 어두운 감정을 계속 드러나게 하는 참말로 좋은 날은 제목과는 상반된 분위기 속에서 극을 달리고 있었다.

7편의 단편이 다 그러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였지만 툭툭 불거지던 꽃이 한꺼번에 와르르 피어나듯 우울함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특히 마지막 작품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는 희망이라곤 눈꼽만큼도 들지 않는 어둠을 그려낸 작품에다 살아 있어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잔인한 몰락을 그리고 있있다. 지나가는 말로 들어도 안타까움에 마음이 무거웠을텐데 그 세세함을 만나야 하는 나는 깊은 어둠을 맛 보고 있었다. 삶이 이래야만 하는 걸까 과연 나는 이들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던져보지만 그들이 그려내는 좌절과 현실의 팍팍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음일터다.

결말을 바꿀 힘도 처음부터 곁길만 존재했던 그들 앞에 그 곁길을 벗어나라고 용기를 북돋워 줄 수 없었다.

행복은 이렇게 먼 것일까, 과연 행복은 큰 것 에서 나오는 것인가 수없이 질문을 던져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귀가 멀어져 가는 아내, 부모와 자식간의 끈이 끊어져 버릴 듯 변해가는 딸, 집을 잃고 갈 곳이 없는 가족,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 작품 뿐만이 아닌 다른 작품 속에서도 나의 우울을 끌어내었던 것은 가족의 불화였고 가정의 파괴였다. 존재감 상실로 이어지는 혈연관게는 예의를 차리지 않은지 오래였고 같은 공간에서 겨우 겨우 형식의 틀을 이어갈 뿐 가족이라는 허울만 겨우 뒤집어 쓰고 있었다.

거기다 저자의 언어는 태연히 그 모든 것을 그려내고 있었기에 잔인한 우울의 탓을 누구에게 돌려야 할지 헷갈릴 정도였다.

저자가 만들어낸 세계의 사람들, 실재로 존재하고 있는 어둠의 실체, 자꾸 엇나가 버리는 그들을 보면서 이것은 나와 상관없다, 난 현실이 싫어 라고 언제까지 외칠 수 있을까. 그 또한 내가 버릴 수 없는 잔인함이로다.

 

이러한 내용이였기에 성석제님에 대한 인상은 이 책으로 관철될 것이다.

다른 책을 읽어 봐야겠다라는 생각은 들지만 이미 맛 본 쓴맛을 단맛으로 잠재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또한 성석제님과 나와의 숙명이고 나는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만나게 될 좋을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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