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4분의 1
오사키 요시오 지음, 우은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9월의 4분의 2쯤 지났을때 이 책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9월의 마지막 하루를 남겨둔 시점이다.

9월의 4분의 1이라는게 도대체 무엇일까.

무얼 의미하는지 내내 궁금했다.

그래서 9월의 4분의 1쯤 남겨두고 책을 읽었을땐 베시시 웃고 말았다.

9월의 기간을 두고 의미 부여에 총력을 기울인 나의 모습이 부질 없다는 사실과 사연을 알게 된 후련함. 단지 그뿐이였다.

 

문득 내가 이 책을 9월 4일날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을까? 우연의 일치라며 한바탕 사랑을 꿈꾸어 보았을까?

주인공 나는 13년전 약속장소를 알아채지 못했던 파리의 9월 4일역에 서있다. 나오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또한 나오도 그러고 싶었지만 확신이 없었기에 텔레파시를 보낸다. '9월의 4일에 만나요' 라는 메세지를 알아차려 달라고. 그러나 나는 알아 차리지 못했다. 나오를 진정 사랑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렇듯 파리의 9월 4일역에는 나오를, 호수 앞에서 마미를, 영국에서 미나코를, 하코테 미술관에서 요리코를 그리워 하는 네명의 남자를 만난다.

제각각의 추억과 사랑과 고뇌를 간직한 이들은 현실을 직시하기도 하고 과거에 빠져 있기도 하지만 미래는 꾸리지 않는다. 그들이 이야기 하기 전에는 그들의 미래를 알아 차릴수가 없다. 참을성 없는 현대사회에 그들은 긴 시간을 넘나들며 태연히 말을 걸어 온다. 그래서 그들에게 미래를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나는 그들의 수십년전의 과거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래를 감히 꺼낼 수가 없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나는 안타까움이나 절망은 느끼지 않았다.

왜 과거를 그리는 현재를 보면 과거의 안타까움, 현재의 절망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지만 시간과 공간의 넉넉한 틈 속에서도 그들의 덤덤함을 닮았다고나 할까...

 

늘 후회를 하면서 살기에 후회를 없애려 순간의 작는 감정이라도 하고 싶은대로 하려고 애쓴다. 늘 아둥 바둥 거리며 후회를 몰아내고 있는데 그들도 분명 후회를 할만한대도 무언가 할말이 있을텐데도 침묵한다.

그리고 비로소 오랜시간이 지난후에 꺼내어 본다.

후회를 안타까움으로 돌릴 수 없도록 가능성 부여를 최대한 낯춘 시점에서 말이다. 내 내면의 깊은 고뇌는 주욱 늘어 놓으면서 그녀들에겐 왜 그리움이란 여운을 남긴 것일까.

여기서 난 주춤거릴 수 밖에 없다. 범접할 수 없는 차분함이 나의 방종을 잠식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뱅뱅 돌아서 안착하는 그들의 그리움과 추억이 그녀들이 들러리가 아닌 주연임을 인정하기에.

단지 그들은 그 사실을 쉽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세세한 복선을 깔았는지도 모른다.

 

얼핏 보면 그들의 이야기는 사랑이 중심이 아닌 것 같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뱅뱅 도는 듯한 느낌, 그리고 쉽게 인정하지 않고 헷갈리게 하는 그들의 심중을 알아채기 전까지 나도 사랑이 아니라 생각했다.

나는 사랑얘기라 말하고 싶다. 상대를 두고 하는 사랑이 아닌 현재 그 사랑을 지켜가고 느껴가는 현재 진행형인, 그녀들의 존재 여부와는 상관없는 나만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무슨 사랑이냐고 추억으로 분류해 버릴 수 있겠지만 온전히 전해지지 못했을 뿐 그런 사랑이였다.

삶 곳곳에 깃든 사랑. 너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나누었던 모든 것이 떠오른 만큼 소중하다고 느끼는 사랑.

 

그래서 저자는 추억을 곳곳에 뿌려 놓는다. 그러나 배경은 비슷하다.

가장 눈에 띄는 배경은 직업과 음악이였다.

한결같이 주인공들은 출판계에 몸담고 있다. 철자 교정 아르바이트였든, 잡지사를 그만 두었든, 작가였든 말이다.(9월의 4분의 1에서 주인공 나는 글을 쓴다. 그래서인지 그가 했던 아르바이트는 밥통 판매원이였다. 독특함을 주려 했을까?)

그 사실이 억지인 것 같으면서도 이젠 자연스러워진건 오사키 요시오의 작품을 세권째 읽어서라는게 먹힐까?

여튼 그런 직업과 마찬가지로 따라다니는 것이 있다면 음악이였다.

왠지 음악이라고 하면 클래식, 재즈 이런 음악과의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데 과거의 대중 음악이 주류다. 전작의 폴리스 음악이라든가 '슬퍼서 날개 없어서'의 레드 제플린이라든가 그런 음악의 등장이 의외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세삼한 짜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클래식이였다면 고전이라는 전제하에 시간의 뛰어넘음을 무의미하게 했을 테고 재즈였다면 그것 역시 음악의 깊이로 인해 헷갈렸을 테니까. 추억으로의 여행에서 그 시절을 회상시켜 주는게 대중음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느낌으로 이루어진 총 4편의 단편은 마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골라먹듯한 느낌이였다. 비슷하면서도 분명 다른 맛과 느낌. 4가지의 독특한 맛과 함께한 추억 속으로 쉽게 빨려들었다.

9월이기에. 여름과 가을을 넘나드는 그 경계선에서 마치 환절기 감기를 앓듯 쓸쓸함에 몸무림 쳤기에.

이런 나를 달래주는건 추억으로의 회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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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 - 못다 핀 천재 물리학자 청소년인물박물관 3
이용포 지음 / 작은씨앗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중학교때 이휘소를 알았다.

책을 무척 좋아하던 동네 오빠에게서 빌려본 <이휘소>의 강렬함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독후감 노트에 이휘소를 잊지 않겠노라고 가슴 속에 묻어 두겠노라고 다짐했었는데 기억의 언저리에나 묻혀 있을 뿐 표면으로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의 강렬함도 그의 일생을 소설화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충격도 어느새 나는 잊고 있었다. 이휘소에게 내가 했던 약속은 무엇이였을까?

한낱 중얼거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이휘소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 소설이 나오기전에 공석하님의 이휘소를 먼저 읽어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에서의 이휘소는 많은 부분이 와닿지 않았다. 소설화한 작가의 능력이 놀라웠을 뿐이다.(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 소설을 만나고 난 후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이휘소의 삶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휘소 평전이 나왔고 이 책 <이휘소-못다 핀 천재 물리학자>가 나왔다.

무척 반가웠다. 잊고 있었던 이휘소를 다시 떠오르게 해주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무척 기뻤다. 그래서 단숨에 읽어 버렸다.

책을 다 읽고 보니 새벽 3시. 잠깐 읽는다는게 끝까지 일어 버려서 어리둥절 했지만 그만큼 이휘소 생애 대한 나의 갈망은 컸다. 처음엔 이 책이 성인대상으로 나온거라 생각했다.

책을 마주하고 보니 글씨도 크고 부드러운 말투(?)여서 청소년이 읽으면 더 좋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던 이휘소를 청소년판으로 어떻게 엮어갈까 궁금했었는데 여러가지의 느낌들이 있었다.

 

물리학에는 까막눈이지만 그 부분을 조금은 쉽게 분류하고 설명해 줄거라 생각했었는데 미국 생활의 이휘소를 보여줄때 분류를 하며 설명을 해 준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그 부분은 난해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하자는 의도 였을지는 몰라도 읽고 있어도 무슨 말인지 몰라 그의 능력을 많은 부분 알아 챌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또 청소년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 보자면 이휘소의 업적 보다는 그가 어떠한 사람이였는지를 많은 부분 강조해야 겠지만 내가 알고 있던 정치적인 부분은 전혀 나오지 않아 처음엔 의아해했었다.

정치적인 면을 떠나더라도 좀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된 넓은 이휘소의 삶이 아닌 이휘소만의 중점적 삶이여서(당연 이휘소의 이야기니까.) 그의 죽음도 안타까움이 아닌 허망함의 느낌이 짙었다.

가족을 비롯해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이였는지 끈끈한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관계였는지 그 부분들이 강조되지 못해 조금은 아쉬웠다.

깊이 있게 들어가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그거면 됐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삶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가 어떠한 사람이였는지 어느 정도 알린셈이였으니까.

나도 이휘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하지만 그의 자랑이 아닌 삶에 중점을 두었기에 처음에 들었던 생각은 어느 정도 수그러져 있었다.

그가 노력하는 사람이였다는(그것도 엄청나게) 것만 알려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재라고 불렀지만 그가 이룬 업적들을 보면 그렇게 밖에 납득할 수 없지만 나는 그를 노력자라고 기억하고 싶다.

뼈를 깍는 노력, 피나는 노력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그에겐 너무나 잘 어울리기에 그를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싶다. 어느 정도 기본 바탕이 있어야 노력의 성과가 더 눈부신 법이겠지만 그는 너무나 강렬한 빛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였다.

그 빛이 너무 강렬해 눈이 멀어 버렸을 정도였다.

 

어디 태생이든 어떠한 업적을 남기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 이휘소, 그의 눈부심이 다 퍼지지 못해 안타까움이 드는 사람, 그런 모습이 아련히 젖어 들었다. 그런 이휘소를 보면서 내가 포기해 버리는 것들 지나쳐 버리는 것들을 돌아볼때 가능성을 심어주지 못해 미안했다.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한 이휘소.

그런 그가 너무 안타까워서 가슴아파서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려 하는 것일 테다.

그의 업적의 자랑스러움보다 인간대 인간으로 마주했을때 느껴지는 희열감. 그 마음을 전해 주려는 마음일테다.

그런 연유로 나도 이휘소를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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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의 개
캐롤린 파크허스트 지음, 공경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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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녀는 죽었다.

그녀의 죽음을 보았던 증인은 개 로렐라이 뿐이다.

말이 안된다는 건 알지만 로렐라이에게 말을 가르쳐 보기로 한다.

그녀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 분명.

로렐라이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을까?

지금은 로렐라이에게 말이라도 시키지 않으면 그녀를 잃어버린 슬픔을 가눌 수 없을 것 같다. 그녀와의 추억이 사라져 버릴 것 같다.

그렇게 그녀 렉시와의 시간 속으로, 로렐라이에게 말을 가르쳐 보려는 노력 속으로 들어 가려는 한 남자 폴이 있다.

 

그가 느끼는 렉시의 죽음에 관한 의문, 그리고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그녀의 빈자리를 이해한다 치더라도 개에게 말을 가르친다?

공상 소설이 아니고는 현실을 비추는 모습에서 그건 솔직히 허무맹랑했다. 그리움의 흔적을 잔뜩 머금고 있어 서정적인 소설이라 생각했는데 그녀와의 추억이 짙어 갈수록 로렐라이에게 말을 시키기 위한 과정이 현실화 되어 갈수록 '이건 아니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갖었던 그 분위기는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폴의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우리 앞에 한번도 드러난 적이 없는 렉시, 그녀의 이야기였다. 로렐라이도 렉시가 먼저 키우고 있던 개였고 폴이 살고 있는 집은 렉시의 집이였다. 이야기는 흘러 갈수록 렉시와 폴이 함께가 아닌 렉시, 폴 각각의 형상으로 그리고 렉시가 더 짙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녀의 일, 우울증, 그리고 죽음의 의문까지 폴이 아는 한 전부를 털어 놓는다. 물론 그 안에는 폴과 렉시가 함께였던 그들의 소중한 추억이 포함되어 있다. 그 추억을 알아가면 갈수록 렉시를 느껴가고 렉시의 죽음에 관한 의문을 조금씩 풀어나간다.

그녀가 죽던 날 왜 서재 정리를 한 것인지, 스테이크는 구워졌지만 접시와 포크, 나이프는 왜 없는지, 그녀가 왜 사과나무에 올라갔는지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폴이 찾아낸 것들을 가지고 자살로 단정 지을 수 없겠지만 렉시는 폴에게 메세지를 남겼다. 폴은 그것을 알아 차린 것이다.

 

폴의 이야기가 중점이 아니고 더군다나 로렐라이에게 말을 시킨다는 사실이 중점도 아닌, 폴은 렉시와의 짧지만 행복한 순간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녀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처음부터 그녀의 죽음이 나왔지만 만약 폴이 '그녀는 자살했다'라고 말했다면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폴이 그런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그녀의 자살가능성의 복선으로 두가지를 말하고 싶다.

우울증, 그리고 가면을 만드는 그녀의 일.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지만 이것들을 뚫고 나오지 못한 렉시는 결국 자살을 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결론에 이른다.

가면을 만드는 그녀의 일은 처음에는 단순히 독특해 보였다.

예술성을 지니고 있는 그녀는 충분히 고독할 수 있다고 외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면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그녀는 자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다. 오히려 그 숨김을 가면 제작으로 표출하는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녀는 갇혀 있었다.

자신 속에 그리고 그녀가 만드는 가면 속에 동봉한채 그렇게 자꾸 오그라 들어 갓다.

그런 슬픔,분노,우울은 가끔 표출하기도 했다. 폴은 그럭 저럭 받아줬다고 생각하는데 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녀의 밑바닥의 고통까지 감싸주지 못했다는 것을.

그건 곁에서 위로는 해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뿌리 뽑아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나도 그걸 겪어 봤기 때문에 온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는 이해한다.

그러나 렉시의 선택은 폴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더군다나 그 사실을 폴이 찾아 나서야 했을땐 어땠을까.

분명 고통스러운 시간이였지만 그 시간 속에서 폴이 꼭 잃는 것만 있는 건 아니였다. 그녀의 메세지를 찾아가는 과정 동안 폴은 그녀를 온전히 다시 볼 수 있었다. 기억속이 아닌 가슴 속에 있다는 것을.

그녀와 오랫동안 함께 할 순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정말 행복하고 소중했다는 것을.

그녀에게 향하던 분노가 서서히 용서와 사랑이 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켤코 쉽지 않은 과정이였다.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가는 것.

어떤게 과연 더 힘들까 하는 생각.

머리가 아파온다.

가능하면 함께 하는 것이 제일 좋은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없을때 후회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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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 소비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정경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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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엇인가를 사가지고 올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는다.

용돈이 부족한 10대 때는 정말 갖고 싶은 것을 목표를 세운 다음 몇달이고 돈을 모은다. 그리고 그것을 손에 쥐었을때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였다. 그 기분이 평생갈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노력한 결과가 있었기에 뿌듯함은 지금보다 오래갔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만족감이 오래 가지 않는다.

오랜 계획을 세워 무언가를 사본게 언제적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현재 나의 소비는 쉽게 끓어 올랐다가 쉽게 사그라드는 번복이 대부분이다.

'다른 걸 안사면 되지','이건 필요한 거니까' 라는 위로를 던져 보아도 기쁨 보다는 우울함이 금방 파고든다. 무리를 했다는 생각에 그리고 내게 꼭 필요한 것이였던가에 대한 질문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작년부터 책에 빠져 들면서 모든걸 제쳐두고 읽고 싶은 책을 몽땅 샀다. 할인하면 사고 쿠폰이 있음 사고 적립금이 많으면 사고 '책은 많이 사도 괜찮아'란 위로를 던지며 산 책이 엄청 쌓여 버렸다. 언젠가는 읽겠지만 김영하님의 말대로 책을 읽을 시간까지 지불했다는 느낌이 지울 수 없어 나의 미래의 시간들을 너무 맣이 저당 잡힌 것 같아 조금은 불안해 지기도 한다.

'요즘은 시간을 산다'는 본문의 내용과 다르게 나는 반대로 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건 왜일까?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로빈슨 크루소가 사치를 했던가?

자세히 일어본 기억은 없지만 홀로 섬에 갇혀 사치했다라기 보단 오히려 소비의 고립을 만났을 것 같은데.. 사치라... 제목부터 흥미로웠다.

소비의 사회, 현대 사회와 팝아트, 현대성의 풍경 총 세 단락으로 나뉘어진 소비의 행태 속에서 첫 단락 '소비의 사회'를 읽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쇼핑을 하면서도 우울한 느낌이 드는 것, 그리고 나의 소비 안에 감추어진 많은 비밀들, 소비에서 읽을 수 있는 현대상등등 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속속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내 나름대로 나의 수준에 맞추어서 소비를 한다는 어느 정도의 가치 척도를 알고 있다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나는 정해진 상업적 틀 속에서 움직였던 것이였다.

그런 것들을 교묘히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 인간들이 만든 사회였고 그 안에 필요한 구조였던 것이다. 소비라는 단순한 행위가 이렇게 큰 세계를 구축하는지 그리고 각각의 효용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정말 알지 못했다.

문학을 가장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나이니 이런류의 책과의 교류도 부족하고 읽어도 100% 이해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받아들이니 커다란 부담은 없었다.

 

'현대 사회와 팝아트' , '현대성의 풍경'을 통해 '소비의 사회'와 조금은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지만 오히려 우리가 늘상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나 또다른 소비의 모습을 보여주어서 다양함과 광범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단락이 구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의 사회'와 동떨어진 느낌에 이것이 소비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란 제목에만 매여있는 나를 보면서 아직 내가 만들어 놓은 생각의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한편으로는 씁쓸함도 들었다.

좀 더 넓고 틔인 식견을 가지지 못한 내가 2.3단락의 글들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함은 나의 내부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 연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었다. 언어의 다양함과 자극성이었다.

내가 문외한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끝까지 편하게 읽히기에는 내가 모르는 언어의 유희는 넘쳤다.

단 한문장도 이해할 수 없는 책을 만나 보았지만 처음의 매끄러움과 편안함을 유지하지 못해 그 부분이 아쉬웠다.

이쪽 분야의 문외한인 내가 이 정도 읽은 것도 다행이지만 좀 더 욕심을 내고 싶어 드는 생각이였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소비 속에는 즐거움이 깃들어 있기에 우리를 자극할 만한 예시들이 많았다. 최신의 정보와 통계가 읽는 즐거움을 한층 더해준 것은 사실이나 시시각각 변하는 유행을 좇는다는 느낌과 수시로 업데이트가 필요 하다는 걱정도 들었지만 소비라는 다양함의 세계를 맛본 것도 사실이였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들도 많았지만 역시 책을 통한 간접경험과 지식의 전달이 시간을 저당잡혔다고 우울해 할 일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늘 즐거움을 갖고 책을 읽었는데 책의 양에 기가 눌려 있었던 것이다. 그 눌림을 줄이기 위해 쌓여 있는 책의 양을 줄여야 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로빈슨 크루소가 누렸던 사치와 책에 대한 나의 사치가 실은 별반 다를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치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 나 혼자만의 독식이 아닌 즐거움과 나눔의 전환은 개개인의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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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의 원리를 상속하라
강준민 지음 / 두란노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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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제인지 모르지만 내 책 꽃이에 꽂혀 1년이 넘도록 있었던 책일 것이다.

한달에 한권 정도 읽자고 다짐해도 쉽게 손이 가지 않는게 종교 서적인 것 같다.

그런 책을 보다 못해 꺼내들었지만 생각보다 쉽게 그리고 편하게 읽어서 어리둥절 할 정도다.

 

성경구절이 많아서인지 매주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말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형통이 무엇인가..

그 형통을 어떻게 보존하고 퍼트릴 것인가...

성경속의 인물들의 예시를 통해 현실에서 어떻게 쓰임 받을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형통! 형통!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만 믿고 따랐기에 그 믿음에 의심을 갖지 않고 기만하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형통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런 예시들만을 늘어 놓았다면 자칫 흘려들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였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가 현실에서 어떻게 대입할 것인지를 예견해 주기에 한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내가 원하던 형통은 과연 무엇이였을까.

세상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따로 따로 나누어서 생각하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에서의 형통 교회 안에서의 형통을 나는 따로 따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늘 일치되지 못한 나를 발견하고 변화하려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교회 밖과 안에서의 불일치를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며 내 스스로에게 너무나 관대했던게 사실이였다. 그런 불일치가 만들어 지기에 일관성 없는 믿음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느새 그런 일관성 없는 믿음의 주역에 내가 있음을 발견하고 말았다.

 

주님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나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언제나 충만한 나의 모습 긍정적이고 환하고 밝은 모습을 갖고 싶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일치를 분리해 가고 있었다.

형통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

아니 형통이 무엇인지 인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형통을 이루었던 성경속 인물들도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지만 나와 가장 큰 차이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였다.

오로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

그것 밖에는 없었다.

과연 나는 그들의 믿음을 본받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가.

한없이 부끄러워 진다.

형통을 말하기 전에 나의 믿음부터 점검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신앙을 점검해 보고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 것인가를 실행하는 믿음...

그게 가장 이상적인 믿음일테다.

성경에 대한 지식을 잘 모르더라도 내가 알아가는 것들을 실천하는 믿음.

그럴때에 자연스레 성경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생길걸로 믿고 지금껏 방심해 왔지만 이젠 진정으로 내 마음을 다잡아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때 내가 형통을 만들어 가고 있을것이고 나에게도 내가 느낄 수 있는 형통이 내려올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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