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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우울
안드레이 쿠르코프 지음, 이나미.이영준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러시아 문학이라면 환장을 한다.
도스또예프스끼를 통해 러시아 문학에 빠지게 된 후로 미친듯이 러시아 문학만 찾아서 구입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관심을 갖게 된 러시아 문학은 19세기의 문학이였고 그 이후의 문학도 만나긴 했지만 19세기의 매력에 듬뿍 빠져서 많은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무조건 러시아 문학만 찾다가 접한 20세기의 러시아 문학은 19세기의 문학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때문이다.
결국 19세기에만 머물러야 하는 건가 하며 구입해놓은 러시아 문학을 읽고 있을때 '펭귄의 우울'을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러시아 문학이긴 하나 우크라이나 태생의 작가로 러시아로 씌여진 문학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소련의 해체 이후 그렇게 분류가 되었으니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영향하에 씌여진 '펭귄의 우울'은 나의 예상을 뛰어 넘었다.
19세기는 지나 갔다고 20세기, 21세기의 러시아 문학에서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억측스러운 비교에도 이 책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내가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좋아했던 이유중의 하나는 책을 통해 그 시대의 많은 것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탓이였다.
'펭귄의 우울'은 90년대 러시아를 어느정도 잘 반영하고 있는 소설 같았다.
이런 분위기의 소설이 계속 나오고 진보된다면 사람들은 21세기 혹은 19세기를 잊는 러시아 문학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펭귄의 등장, 미리 씌여진 조문이 주류가 되는 내용이 시대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겠으나 그 안에 풍자된 의미를 알아간다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자연스레 등장하는 펭귄이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러시아가 추운 나라이긴 하지만 동물원에서 분양한 펭귄을 집에서 키울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펭귄과 함께 살아가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엉뚱하면서도 의미를 담고 있었다. 펭귄의 검은색과 흰색 때문에 양복을 입은 것으로 많이 비유를 하게 된다.
양복의 의미 중에서 펭귄과 같은 색이라면 장례식에서의 검은 양복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 빅토르는 우연한 계기로 유명 인사들의 예정된 조문을 쓰는 일을 맡게 된다. 장례식하면 검은 양복, 즉 펭귄의 등장은 드러나는 암시라는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빅토르는 단순한 조문을 쓰는 '십자가' 기자가 아니였다.
편집장에게서 받은 정보로 씌여지는 빅토르의 조문은 미리 씌여진다는 특징 외에 그 조문이 통과되면 그 유명인사는 살인을 당하거나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단순히 과거의 깨끗치 못한 행동 때문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미심쩍다.
그러나 그로 인해 위험도 겪고 회의를 느끼면서도(빅토르는 글을 쓰고 싶었다.) 두둑한 보수를 받고 소냐와 나나를 만나게 되는 과정에서는 순간 평범한 행복을 꿈꿔보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이 기르는 펭귄 미샤와 소냐의 아버지 미샤를 만나면서 복선은 깔리기 시작한다. 그게 앞으로 다가올 위험일수도 있고 이름이 같은 펭귄과 사람의 운명일수도 있다.
저자는 괜히 이름을 같이 넣진 않았을 것이다.
사람 미샤가 살해된후 빅토르는 소냐를 떠안게 되고 유모 나나를 만나는 과정까지 순조롭지만 빅토르를 둘러싸고 있는 음모는 훨씬 컸다.
빅토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속시원히 드러내놓진 않지만 소설속에 나오는 암시만으로도 커다란 음모의 심각성은 충분했다.
오히려 빅토르가 평상시에 워낙 차분했기에 아무렇지 않은 듯이 느껴졌을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예견치 못한 반전 앞에서도 태연한 빅토르를 보며 '펭귄의 우울' 속편을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은 추리소설에 버금가는 맛이였고 열려 있는 결말은 그래서 더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소련의 붕괴이후 혼란을 담고 있는 90년대의 러시아는 빅토르르 통해 그렇게 비춰지고 있었다. 고독과 불안정 태연함.
또 우울증이 걸린 펭귄, 심장이 좋지 않은 펭귄의 등장이 그래서 낯설지가 않았을 것이다.
빅토르 또한 고독햇고 미래를 예견할 수 없는 불안 가운데서도 안정하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도 불안을 뗄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이 어떻게 90년대만의 특징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도 그런 고민과 불안으로 그득한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오히려 미샤 같은 펭귄의 등장이 새로운 활력소가 될지도 모르겠다.
머나먼 남극에서 온 낯선 펭귄.
그에 비견되듯 엉뚱한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빅토르의 주변을 돌아다니던 펭귄 미샤의 우울한 눈빛이 오히려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독후감을 쓰는 가운데 고개를 돌리면 펭귄 미샤가 서 있을 것 같은 기분. 낯설지가 않다.
내게도 미샤가 필요한 것 같다.
p.s: 오타 발견
p. 198 칠백오심 달러만큼 -> 칠백오십 달러만큼
으로 바꿔야 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