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선(未當選)


거지 같은 옷을 입은 계집애 하나가
죽어버리겠다고 질질 짜고 있더군
아이고 그럼 못써 어떻게든 살아야지
나는 아이를 잘 달래어 밥을 먹였다
그래그래 잘 살거라

오늘 받은 편지함에 꽂힌 메일 하나
평론상 응모 결과입니다
미당선(未當選)

심사위원 이름을 보니
아, 언제 적 고인 물이야
고이고 고이다 못해 썩은물
이 인간들 아직도 평론 쓰고 있어
그래 당신들 눈에 안 차니까 안 뽑았겠지
동종교배 열심히들 하셔

죽어가는 계집애를 겨우 살려놨더니
미당선이라는군
개꿈도 유분수지
다음에 그 아이가 다시 나타나거든
강물에 밀어 넣을 참이다

알아먹지도 못할 허섭쓰레기가
산처럼 쌓여있는 공터
바보들의 이어달리기
관중석에서 뛰쳐나온
나의 객기를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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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장원에 갔었다


시장 후미진 골목길의 끝
점집과 횟집 가운데
그 미장원이 있다

뒷머리는 짧게 해주세요

바리깡이 지이징
울리는 소리를 듣는데
두 명의 일행이 들어온다

엄마와 딸
딸은 자꾸만
내 옆의 미용실 의자에 앉겠다고
성화다

허연 머리에 마흔은 넘은 딸
엄마는 아기처럼 어른다
자그맣고 늙은 어미 새

마침내 내가 일어난 자리에
여자가 앉는다
엄마는
미용실 원장에게
딸의 머리를 이렇게 해달라고
한참 설명한다

며칠 전 내린 눈이
구정물처럼 흐르는
시장통을 지나간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친 야채 가게의 남자는
미쳐버린 뇌수를 쏟아내듯
오만 욕지거리를 퍼붓는다

시장 초입의 순댓국집에서는
늙은 영감이
젊은 베트남 여자에게
철 지난 수작을 걸고 있다

밖은 춥지 않다
비가 잦고 흐린
이상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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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習作)


정말로 시를 쓰고 싶은 거
맞아?
성의 없는 습작을 읽어줄
독자는 그 어디에도 없어
요새 나온 시집들 좀 읽어보구
치열하게 언어를 탐구하라고

습작을 어떻게 쓰면
성의가 있는 거니?

야, 내가 살아보니까 그래
인생은 그저 운이 8할이야
재능이 있지만
앓다가 굶어 죽은 사람을 알아
걔 나이가 서른 즈음이었지 아마

난 너무 오래 살은 것 같아
이토록 오랜 침묵과
잊혀짐
견뎌내는 것도
단단한 근육이 필요하지

늘어지고 찢어진
그리하여 너덜더덜해진

이명으로 멍해진 오른쪽 귀로
지나간 생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우우웅
우우울
우울음

속을 헤집으며
말이 마비된 얼굴 신경을 타고
왼쪽 뺨에 흘러내린다

습작이라고 쓰고
수치심이라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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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시


시가 쉽게 쓰여지는 건
부끄러운 일인가

시에 목숨 걸다가
아프고
미쳐서
그저 목숨줄이나 연명하는데
더러는
굶어 죽기도 하지

그래도
오늘은 뭐 쓰지

엄마에게
김밥을 드렸다

성의 없는 계란 쪼가리
잘게 바수어진 당근
그리고 싸구려 햄 조각

네가 말은 거니

아뇨
새로 나온 냉동 김밥이요

개당 4천 원짜리 이 김밥은
그 맛있는 꼬다리가 없이
매우 단정하게
단 9개의 김밥만 있을 뿐이다

나는 김밥 공장에서
어디론가 가버렸을
김밥 꼬다리를 생각해 본다
엄마가 젊은 날 산처럼 말았던
그 많은 김밥도

이제 기억의 끈을 놓아버린
엄마는
당신이 하루 종일 굶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김밥 한 줄
따뜻한 물
단감 하나

게으른 식탁
게으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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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소시지


소시지가 너무 맛있다고
마약 소시지라고 쓴 사람을
누군가 고발했다
졸지에
마약 의심 사범이 된 남자는
검찰청 화장실에서
머리카락을 쥐어뜯어야 했다

반드시 54가닥

왜 그러냐고 수사관에게 물어보니
말이 많다고 면박을 줬다는군
뜯어오라면 뜯어올 것이지

생으로 머리카락을 뜯어내며
남자는 마약이라는 말을 쓴
자기 손가락을 똑 분질러 버리고
싶었다

아니 자신을 마약 의심 소지자로
고발한 미친 또라이를
쥐어패 주고 싶었다

그것도 아니다
마약 소시지의 뜻을
알아처먹지 못하는 돌대가리
검찰을
고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저 54가닥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어서 얌전히 내어놓고
검찰청 정문 앞에서
두부를 사서
으깨어 먹으며
인증 사진을 찍었다

절대로 마약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마시오

그걸 본 사람들은
전율에 몸을 떨며
각성했다

그가
마약 대신에
마냥
만냥(萬兩)
망량(魍魎)을 썼다면
어떠했을까

옳거니, 그게 가장 좋겠군

만약 소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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