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너의 오랜 시원(始原)은
아마도 불운이었을 게다

날개를 펴면
하늘은 불온함으로 물든다

가끔은
매에게도 쓸데없이
달려드는
병신같은 패기
무법천지의 산적

아따, 저놈의 새 좀 보게
뭔 날개가 저리도 길어
시커먼 죽지는 저승사자 맨치로
목구녕에 피가 나도록 처우는구먼

아스팔트에 흐물흐물
스며드는
혐오와 찬탄

고압 송전선에
두려움 한 방울 없이
오도카니 앉아있는
까마귀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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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線)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불편하다
자전거를 탈 줄 모른다
선 안쪽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이탈한 궤도
작고 볼품없는 협궤 열차는
자기만의 경로를 가지고 있다

저 멀리서
거대하게 울리는 기차의 출발음
하지만 그저
고개만 주억거릴 뿐

나뒹굴어진 침목(枕木)
협궤 열차는 한참 동안 멈췄다

철로가 얼어붙을 무렵의
겨울 동지(冬至)
저절로 가속도가 붙어
일각고래의 뿔이 북극을 향할 때
너의 침침한 눈이
선 밖으로 내달리며
땅 밑의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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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tronychia


작년 이맘때의 일이다
발톱이 겨우내 자라지 않았다
피부과 의사를 찾아갔다

그냥 놔두면 됩니다
는 개뿔,
더 붓고 아파서 두 달 만에
다시 갔더니
어머니,
정 답답하면 대학병원
가시던가요

이봐, 난 당신 엄마가 아냐
돈벌이에 환장한 건 알겠는데
그럴 거면 돈 안되는 환자를
받지 말든지, 응?
돌, 팔, 이.

Retronychia
뿌리 쪽으로 자라는 발톱은
발가락을 먹어치운다
발가락을 자를 수 없으므로
발톱을 뽑아야한다
그 대신에 나는
3겹의 발톱을 갈아내고서
이제 1년이 지났다

그냥 뽑아버릴 걸
인생의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선택을 생각한다
시간의 지층이 꾸덕꾸덕하게 쌓이고
나는 그걸 걷어낼 수 없다
불가능한 Retro

부서지지도
망가지지도 않았다
어쨌든 살아있다
작고 이상한
나의 왼쪽 엄지발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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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자네는 꿈이 뭔가
평론가요

교수는 알 듯 말 듯
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는 평론가가
평생 직업으로 딱
이라고 생각했다
너 늙어
요양원에 가서도
자판을 두들길 수 있다면

언제고 견고할 것만 같았던
언어의 집은 무너져 내리고
너의 몸과 정신은
시간의 풍화에 바스러지고
평생 백수의 기이한 자긍심은
심해의 열수구에서
아직도 보글거리며 끓고 있다

청춘의 글들이 너덜거리며
거리를 행진할 때
비웃거나 침을 뱉지 말지어다
그래도 한때는
눈부신 미래를 품고 있었으니

작은 심해 상어는
자신의 동족만 알아볼 수 있는
형광 무늬를 반짝거린다

언젠가
평론가의 무덤 앞에서
너의 동족을 향해
푸른 신호를 보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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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히스타민제


등을 피가 나도록 긁다가
의사를 찾아갔다

잘 듣는 약이 있어요
항히스타민제
부작용이라면 좀 졸립죠

약을 먹은 지 사흘째
와,
우,

하나도 가렵지 않다
이것은 분명
기적의 약이로구나

곁다리로
알레르기성 결막염
만성 편도염까지
해결해 준다

편,
안,
하,
다.

하지만 갑자기 무서워졌다
이 기적의 약을 어떻게 끊지?

기가 막히게 좋은 것은
고통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약을 안 먹기로 결심한다

다시 등에는 딱쟁이가
눈은 벌겋게
목은 염증으로 미어진다

잠이 오지 않아
약병의 항히스타민제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흰색의 작은 다이아몬드
너의 이름은
씨잘(Xyzal)

살이 에이는 그리움으로
나지막이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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