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향


겨우내 추운 날
베란다의 천리향을
못 본 체했다
추위를 견뎌야만
봄에 꽃을 피우므로

애면글면
보름도 넘게
꽃봉오리는
덜 익은 고기마냥
허여멀건하게

향기를 토해내는
미친 여자
그래도
살아야만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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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시


트렌드를 읽으라구요
요즘 시들은 어떤지
그 시를 누가 읽고
어떻게 소비되는지
그걸 알구
시를 쓰라는 거예요
뭣도 모르면서
뭔 시를 쓴다고

그래서
전문가님의 침이
고이는 시인들의
시를 읽었다

음, 이게 요즘의 시군요
조물딱조물딱
애들이 밀가루 반죽놀이하는
아니 솜사탕 먹다가 남겨놓은
침 묻은 덩어리인가

이렇게 따라 쓰지 않으면
그쪽 패거리에
들어갈 수 없는 모양이죠
그렇죠

세상살이가 다
그렇죠
한번 해먹은 사람들이
울타리치고
징하게 울궈먹죠

억울하면 출세하면 되죠
그렇죠
알아주지 않으면 어때
라고 말하는 건
죄다 거짓말인 거
우린 다 알잖아요

어디다 내 걸 간판이
있어야지
벌어 먹고살죠
그렇죠

무딘 언어의 끝을
벼리며
뻐개지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렇죠
그냥 쓰는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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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탱고


여가수는
이제 눈을 감았다

자신의 전성기가
시작되려는 순간
불운과 병마가
강철의 거미줄로
침착하게 여가수를
돌돌돌 감쌌다

언제고 다시
노래를 부르겠노라
17년을 견디며
도돌이표처럼

2월 마지막 날
라디오에서는
피아졸라의 탱고가
내 머릿속 턴테이블에는
여가수의 서울 탱고가
눅눅한 바늘을
긁으며 가만히 운다


*가수 방실이(1959-2024)의 히트곡 '서울 탱고'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TMkJrL5W8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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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철을 줍는 노인


아파트 분리수거장을
순례하는 영감
매일 같은 시간
지팡이 하나 들고
나선다

이 시대의 연금술사는
허비적허비적
지팡이로 연신
들쑤시며
커다란 고철 덩어리
하나 건져낸다

손주 녀석의 과자
영감의 막걸리와 파스
비닐 망태기에서
달그락달그락

그 뒷모습에
슬그머니 조소(嘲笑)를
늘어뜨리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배송된 버섯 상자를
열어 본다

갓이 피고
거뭇거뭇하게 변한
파치(破치)
상 중 하 그 어디에도
끼지 못한 떨거지들

high-end와 low-end
천국과 지옥보다도
더 먼 삶의 간극
파치만 사다 먹다
죽을지도

생각보다 괜찮네
파치 버섯 한 상자
주문 버튼을 날렵하게 클릭
고철 더미의 지박령(地縛霊)
눈앞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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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재능


손을 꼽아 헤아려 보니
예술학교 졸업한 지
어느덧 열여섯 해

영화 공부 계속하면
성공할 수 있나요
타로 점집에서
키득거리던
1학년 애송이들

바람결에 실려 오는
이름을 들어보려 해도
흐린 날 아픈 귀에는
이명이 흐르고

누구는
밥벌이에 뼈를 깎고
또 누구는
몇 명이나 보았는지 모를
영화 한 편 찍고
그리고
일찍 세상을 뜬
멀고 먼 너도 있다

애매한 재능으로
경계를 기웃거리며
시간의 톱밥을
꾸역꾸역 삼키는
이른 봄날의 저녁

오랜 가려움증이 도진
왼쪽 목덜미를
긁으며 생각한다

그래도
미치지 않고
살아있다는 게
어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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