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배달부


우편배달부가 배달차의
트렁크를 열고 크게 숨을
내쉰다 참았던 힘든 숨
내가 그를 본지도 어느덧
16년째이다 젊었던 그는
이제 머리숱이 흐릿하며
등은 살짝 굽었고 목소리에는
쇳가루가 섞였다 중간에
몸이 아팠는지 잠깐
한 1년을 쉬었던 것도 같다
그가 등기 우편을 전할 때는
항상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네, 우체부입니다, 라고
기분좋은 목소리로 말한다
매일의 노동과 세월에
서서히 짜부라진 그는
아파트 구석진 곳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급하게 담배를 피우곤 한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휴식
시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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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개장


며칠 전부터 그 자개장은
쏟아지는 햇빛을 하릴없이
맞고 있었다 언제 적 자개장
이냐 엄마가 시집올 때
해왔던 자개장을 버린 게
언제더라 그 자개장하고
비슷하게 생긴 자개장
이제 그렇게 품이 많이
드는 자개장을 만드는
사람도 없다는데 아니,
자개장을 찾는 사람들이
먼 시간 속으로 가버려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은색과 연보라색 회색이
섞인 자개 무늬 공작이
애처롭게 눈웃음을
짓지만 나는 공작새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서 그저 가만히
새의 깃털을 어루만져
주고 뒤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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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누수(漏水)


원대한 꿈을 가진 이는
좌절하기 쉽다 그는
자신의 몰락을 쉽게
예감하지 못한다
미리 알지 못하는 자의
비극은 그 꿈의 크기만큼
버려야 할 것들에 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봄조차
누렇게 뜬 영양실조의
얼굴로 다가온다 누수는
소리 없이 이어지고 마침내
꿈의 물탱크에서는 텅텅
하는 소리만이 들린다
기괴한 메아리는 이명이
되어 쉴 새 없이 괴롭히며
현실의 비감함은 배고픔과
기나긴 침묵을 낳는다
두려움과 분노는 끼익끽
거리는 미닫이문 뒤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그는 차마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앞에서
오랫동안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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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시인의 학익진(鶴翼陣)


내게는 30명의 독자가
있다 못 쓴 시나 잘 쓴 시나
어쨌든 읽는 독자들 나는
12척의 전함으로 적군에
맞섰던 이순신 장군님을
우러러 생각한다 충무공은
구국의 결단으로 이 나라를
구해내셨다 하지만 쉬운 시를
쓰는 무명의 시인은 30명의
독자와 함께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할지 모른다 자신의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월 1만 원의 구독료로 매일
글을 쓴 젊은 작가가 있었다
구독자들을 어찌어찌 모아
쥐어짜 내고 쥐어짜 내어 글을
써서 작가는 빚을 다 갚았다고
한다 글로써 밥벌이를 해야하는
글쟁이의 자본주의적 생존기는
나에게 기묘한 이질감을 준다
내가 30명의 독자에게 매달
1만 원의 구독료를 받고 매일
시를 쓰겠다고 하면 어떠한가
피를 팔아서 빵을 사는 매혈의
심정으로 시를 팔아서 나는
무엇을 사 먹을 것인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다 문학의
자본주의는 독자의 숫자를
돈으로 환산한다 돈이 되지
않는 글은 죽은 문학이며
무익한 것으로 취급받는다
30명의 독자는 무명 시인이
닳아빠진 자본주의적 문학에
대항하는 비장한 학익진(鶴翼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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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횡단보도의 건너편
고개를 수그린
할머니는 침을
흘리고 영감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휴지를 꺼내어
늙은 아내의 입을
닦아준다

느린 낙엽의 속도
잊혀지고
물크러지는
노년의 시간

삐딱하게 고개를
돌리며 걷는다
그것이 내게는
오지 않을 것처럼

저 멀리에서
유모차를 끌고
젊은 부부가
지나간다
그들의 아이는
쉴 새 없이
비눗방울을
불어 날린다

내 얼굴과 옷에서
벌레처럼 터지는
비눗방울들
지 애새끼의
즐거움만 보는
외눈박이의 등신들

시멘트 공원 바닥
홀로 구구구
이기지 못할 봄을
온몸으로 앓는
멧비둘기 하나
짝 찾아 날아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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