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라(Lola)'는 필리핀의 공용어인 타갈로그어로 '할머니'란 뜻이다. 브리얀테 멘도자 감독의 2009년작 'Lola'에는 두 명의 할머니가 나온다. 롤라 세파의 손자는 휴대폰을 노린 노상강도에게 죽임을 당했다. 롤라 푸링의 손자는 그 살인범이다. 영화는 롤라 세파의 가슴아픈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향과 초를 사들고 손주가 죽은 장소를 찾은 할머니는 비바람 속에서 초에 불을 붙이는 데에 애를 먹는다. 애도의 순간도 잠시, 할머니는 손주의 장례식 준비를 해야한다. 장례업자를 찾아가 관을 맞추는데 돈이 없어서 제일 싼 것으로 계약한다. 손주가 가입한 생명보험회사에서 나온 돈은 너무 적어서 별 도움도 안된다. 롤라 세파는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살림에 빚까지 내서 손주 장례를 치러야 할 판이다. 경찰에 사건을 신고하러 갔더니 벌써 용의자가 잡혔다고 한다. 경찰서에는 살인범 손자의 끼니가 걱정되어서 밥을 챙겨서 온 롤라 푸링이 있다.

  브리얀테 멘도자는 두 할머니가 사는 도시 마닐라의 그늘진 곳을 보여준다. 롤라 세파가 사는 수로변에 위치한 수상 가옥은 낮은 천장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집안을 다녀야 하는 빈민층의 주거지다. 롤라 푸링은 손주와 노점상으로 먹고 사는데, 집에 누워있는 병든 아들 수발까지 하고 있다. 겨우 잠만 자고 밥만 먹는 공간으로서의 집은 마치 닭장 같다. 변변한 집안 살림살이는 죄다 전당포에 맡기고 남아있는 것은 손자가 좋아하는 TV 뿐이다. 그런데 살인을 저지른 큰손주의 석방을 위해 합의금까지 마련해야하니, 롤라 푸링의 머릿속은 온통 돈 생각 뿐이다. 돈에 찌들리기는 롤라 세파도 마찬가지. 장례식에 돈을 다 써버려서 빚까지 졌다. 같이 살고 있는 딸은 합의금을 받고 고소를 취하하자고 롤라 세파를 설득한다. 죽은 손자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필리핀의 사법제도는 상당히 특이하다. 살인 사건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와 달리 자동적으로 기소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고소인의 고발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지방 검사의 기소 여부에 따라 재판으로 넘겨진다. 필리핀은 오랜 스페인 식민 지배와 미 군정을 거치면서 독특한 사법 체계를 발전시켜왔다(이 부분에 대해서 궁금한 이가 있다면 '동남아시아 국가의 형사법 연구(Ⅰ)(강석구 저, 2011)'의 필리핀 형법을 살펴보길 바란다). 롤라 푸링이 롤라 세파와 합의를 해서 고소를 취하하게 할 수만 있다면, 푸링의 손자는 석방된다. 그러니까 살인죄를 저질러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날 수 있다. 그래서 롤라 푸링은 돈을 모으려고 갖은 애를 쓴다. 손님의 거스름돈을 속여서 건네는가 하면, 시골사는 딸에게서 받은 오리알과 채소까지 팔아 푼돈이라도 그러모은다. 나중에는 사채업자에게까지 돈을 빌린다. 그렇게 모든 5만 페소를 합의금으로 건네고 손주는 풀려난다. 5만 페소를 한화로 환산해 보니 100만원이 좀 넘는 돈이다.

  'Lola'에는 우기의 마닐라 풍경이 담겨있다. 비바람이 부는 칙칙하고 습한 날씨는 가난한 이들의 내면 풍경 같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삶. 정의 구현 따위는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다. 롤라 세파는 검사에게 살인범의 목을 매달아 달라며 고발의 뜻을 밝혔지만, 마지막에 합의금을 주고 받는 자리에서 두 할머니는 자신들의 병고와 죽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게 된다. 롤라 세파에게는 거둬야할 자손들이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생존은 정의 보다 앞자리에 위치한다.

  브리얀테 멘도자는 시종일관 핸드 헬드로 찍은 화면 속에 가난한 이들의 일상을 마치 다큐처럼 보여준다. 영상 미학 따위는 저 멀리 던져버린 것 같은 촬영, 거기에다 온갖 소음이 섞여들어간 사운드는 관객들에게 꽤나 인내심을 요구한다. 언제부터인가 핸드 헬드는 저예산의, 마구잡이식으로 영화찍는 이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인상을 받는다. 시네마 베리떼(Cinema verite)와 다이렉트 시네마(Direct cinema)의 끔찍한 혼종을 보는 것 같다. 이것이 브리얀테 멘도자의 스타일인 듯하다. 2009년에 그에게 깐느 감독상을 안겨준 말많은 피칠갑 영화 'Kinatay'도 그렇게 찍은 모양이다(나는 도저히 볼 엄두가 나질 않는다). 어쨌든 'Lola'는 센 주제의 이야기만 찍는 이 감독의 영화 가운데 '순한맛'쯤 되는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만듦새는 상당히 떨어진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서사에는 힘이 있다. 필리핀의 가난한 이들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점과 더불어 미디어와 필리핀의 빈부 격차에 대한 감독 나름의 성찰도 돋보인다. 롤라 푸링의 손자는 집에서 TV만 보는데, 그 TV속의 화면에는 하층민들의 삶과는 전혀 동떨어진 멋진 쇼와 정치 뉴스가 흘러나온다. 가난한 이들의 삶은 비웃음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롤라 푸링이 시골의 딸에게 가는 기차 안에서 창밖으로 촬영을 하는 젊은 남자 둘은 기차 밖의 빈민가의 삶을 어떻게 하면 더 너절하게 보여줄 수 있을까를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이다. 고소를 취하하는 것으로 마무리짓고 나오는 두 할머니의 가족들은 법원 정문에서 멈춰선다. 고위 관료의 행차로 도로가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지는 검은색 관용차의 행렬이 끝난 다음에 두 롤라는 각자의 길을 간다. 빈자들의 삶과 명확히 경계선이 그어진, 권력을 가진 지배계급의 존재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그렇게 영화 'Lola'는 두 할머니의 예기치 않은 만남과 헤어짐 속에 가난한 이들의 처절한 삶의 속내를 살펴보게 만든다. 영화 속의 두 롤라, 필리핀의 원로 배우 아니타 린다와 러스티카 카르피오의 놀라운 연기가 영화의 사실성을 더한다.



*사진 출처: cineuro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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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시나리오 수업을 같이 듣던 수강생 가운데에는 연극학 전공자가 있었다. 그 친구는 부업으로 연기 학원 강사일을 했는데, 어느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가르치는 아이들 이야기가 나왔다. 수강생 가운데 가장 어린 아이가 몇 살일 것 같으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일고여덟 살 정도가 아니냐고 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4살'이었다. 알렉스 윈터가 2020년에 만든 다큐 'Shobiz Kids'는 아역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유명한 아역 배우로 쇼비지니스 세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 성인이 된 후에 들려주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감독 알렉스 윈터 자신도 아역 배우였다. 그는 키아누 리브스와 함께 '엑설런트 어드벤처(1989)'에 출연했었다. 다큐 속에 나오는 이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E.T.(1982)'의 헨리 토마스, '미세스 다웃파이어(1993)'의 마라 윌슨, 디즈니 채널의 대표 스타 캐머런 보이스, '제 5원소(1997)'의 밀라 요보비치, TV 시리즈 '웨스트월드(2016)'의 에번 레이첼 우드, '스타 트렉'의 윌 휘턴이 그들이다.

  다큐는 성인이 된 그들이 회고하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와 당시의 자료 화면들로 채워져 있다. 아역 배우로서 스타덤에 올랐던 그들이 털어놓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외로움, 상처와 분노를 듣다보면 저 쇼비지니스 세계는 결코 좋기만 한 곳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니, 어떤 면에서 보통의 삶에게 이탈하게 만든, 그래서 한 인간으로서 더 힘들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E.T.'의 헨리 토마스는 유명세 때문에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기도 했다. 캐머런 보이스는 바쁜 스케줄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가 없어서 홈스쿨링으로 대체해야만 했다. 그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의 정상적인 학교 교육과 또래 아이들과의 교류에서 단절된 채 자랐다. 숙소인 트레일러와 호텔, 촬영장을 오가는 일상에서 외로움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매니저 업무를 대행하는 부모는 그런 아이를 잘 보살폈을까? 놀랍게도 다큐에 나온 이들 가운데 부모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한 이는 없었다. 밀라 요보비치는 배우였던 어머니의 등쌀에 못이겨 춤과 노래와 같은 온갖 배우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말하자면 요보비치는 엄마의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주는 대체제였던 셈이다. 타고난 미모와 재능으로 어린 시절부터 모델과 배우로 두각을 나타냈지만, 정작 요보비치 자신은 그 일을 원한 적이 없었다고 회고한다. 결국 스무 살 즈음에 엄마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나서야 자신이 원하는 경력과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윌 휘턴의 경우는 부모에 대해 극도의 적개심을 표현하는데, 휘턴은 부모가 자신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학대했다고 회고한다. '돈 문제'는 그들에게 가장 민감하며 골치아픈 문제이기도 했다. 수입을 관리한 부모와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스타들의 이야기 중간에 현재의 아역 배우 지망생들과 그 부모의 이야기가 끼워져 있다. 매일 연기 수업을 받고, 오디션을 보러 돌아다니고, 배역을 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이들의 일상이 그려진다. 스타의 길에 대한 매혹은 많은 이들을 그렇게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엄청난 매혹의 자기장 속에서 배우로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Showbiz Kids'는 그 길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어두움도 조명한다. 약물과 일탈, 범죄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하나의 조립품처럼 그 성공담에 끼워져 있다. 흑인 아역배우로 이름을 날렸던 토드 브리지스는 마약으로 고생했다. 거기에다 마약상에게 총을 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가 무죄 판결을 받고 겨우 풀려났다. 윌 휘턴은 'Stan by Me(1986)'에서 함께 공연했던 리버 피닉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작업 현장에서 겪었던 성적인 학대 문제도 언급된다. 에번 레이첼 우드와 윌 휘턴은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관객들에게 들려준다.

  그런 이야기들을 들어도 딱히 무슨 명확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역 배우들의 노동 조건과 관련한 법적인 여건이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겪는 문제들은 해결이 쉽지가 않다. 어쩌면 재능을 가진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과도한 욕망의 투사가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도 있다. 엄청난 돈벌이가 되는 쇼비지니스 사업은 그런 부모들의 욕망과 부합하며, 그 속에서 스타가 된 아이들은 갑작스런 부와 명성을 다루지 못해 쉽게 상처받는다. 다큐에 나온 이들은 성인이 되면서 그런 어려움들을 나름대로 다루는 법을 터득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쯤되면 그들에게 과거의 눈부신 아역 스타 시절이 정말 좋은, 행복했던 기억이었을까 되묻게 된다.

  'Showbiz Kids'는 아역 배우들과 쇼비즈니스 산업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는 다큐이기는 하다. 그러나 감독 알렉스 윈터는 이 다큐에서 그 어떤 작가적 관점도 보여주지 못한다. 인맥으로 따낸 배우들과의 인터뷰와 영상 자료 화면들을 열심히 구해서 이어붙인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독이 아니라 편집자 크레딧에 올라야 마땅하다. 안일하고 나태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다큐를 보고 나서 관객들은 도대체 감독이 무엇을 했는가를 궁금해할 것이다. 이 관점 부재의 다큐를 메꾸는 것은 오직 인터뷰를 해준 배우들의 진실된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가 궁금한 이들이라면 한번 찾아서 볼 것을 추천한다.      



*사진 출처: observer.com 좌측부터 순서대로 감독 알렉스 윈터, 제이다 핀켓 스미스, 헨리 토마스, 마라 윌슨, 에번 레이첼 우드, 토드 브리지스, 윌 휘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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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일본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면서 화족(華族)제도를 폐지한다. 메이지 시대부터 이어진 귀족 제도의 폐지는 전후 일본의 새로운 체제 정비의 차원에서도 당연한 일이었다. 요시무라 코사부로 감독의 '안조가의 무도회(安城家の舞踏會, The Ball at the Anjo House)'는 바로 그 해, 화족 제도가 폐지된 1947년에 개봉되었다. 영화는 귀족의 지위에서 평민으로 살아야하는 안조 가문의 시련을 담아냈다. 시나리오는 신도 카네토가 맡았는데, 그는 안톤 체홉의 희곡 '벚꽃 동산'을 참조해서 각본을 완성했다. '벚꽃 동산'은 제정 러시아 말기 몰락하는 귀족 가문을 그려낸 작품이다.

  안조가의 대저택은 빚으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사업가 신카와는 안조 저택의 새주인이 되려는 참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안조 가문의 막내딸 아츠코(하라 세츠코 분)은 이제는 운수업체 사장이 된 전직 운전기사 토야마에게 저택을 넘기려고 한다. 토야마는 아츠코의 큰언니 아키코를 오랫동안 연모해 왔다. 그러나 아키코는 토야마를 천한 신분이라며 멸시하고, 토야마는 그런 아키코에게 실망한다. 아키코의 오빠 마사히코는 탕자로 집안의 몰락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안조가의 마지막 무도회가 열리는 날, 신카와는 딸 요코와 마사히코의 약혼을 파기하며 안조 저택을 삼키려는 야욕을 드러낸다. 과연 안조 가문의 사람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 것인가...

  안조가의 저택을 장식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시대착오적인 장식품들이다. 파리 유학 시절 미술을 배운 안조 백작의 방은 온통 서양화로 가득차 있다. 아들 마사히코의 방에는 고야의 '옷을 벗은 마야' 그림이 걸려있다. 대부분 서양풍인 장식물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물건이 하나 있다. 사무라이의 갑옷이 그것이다. 토야마는 아츠코의 설득으로 저택을 사들이고 새로운 주인이 되지만 자신이 멸시받는 것을 잘 안다. 술에 취해 무도회장을 빠져나가는 그가 갑옷 장식품을 쓰러뜨린다. 이 장면이 상징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귀족 집안의 운전기사였던 그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 부를 축적했다. 몰락해가는 귀족을 대체하는 새로운 신분으로 등장한 신흥 사업가가 안조가의 주인이 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안조 백작이다. 그는 자신의 하인이 안조 저택의 새주인이 되는 것도, 귀족이 아닌 평민으로 살아나가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래서 그가 택하려는 방식은 '죽음'이다. 그는 마치 주군에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할복하는 사무라이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한다. 칼 대신에 총으로 죽으려는 그를 막내딸 아츠코가 막는다. 아츠코는 새로운 시대에 희망을 갖고 살자며 아버지를 설득한다. 하라 세츠코는 안조가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현명한 사람인 아츠코를 연기한다. 세츠코가 영화의 마지막에 발코니에서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보여주는 환상적인 미소는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상징한다. 그 장면은 전후 일본의 패배감을 위로하는 메시지처럼 보인다.

  '안조가의 무도회'를 만든 요시무라 코사부로 감독은 전쟁 시기, 일본의 국책 선전 영화를 꽤나 열심히 찍었던 감독이다. 단순히 의무감으로 찍은 것이 아니라, 전쟁에 찬동하는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담은 영화들을 찍었다. 종전 후, 그도 생존을 위해 변해야만 했다. '안조가의 무도회'는 그런 그에게 변화의 발판이 되어준 영화이다. 그는 이후 1950년대에 주로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을 찍으며 호평을 받는다. '안조가의 무도회'는 몰락한 귀족의 생존기에 대한 영화임에도 어떤 면에서는 요시무라 코사부로 감독 자신의 이야기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새로운 시대에 변화를 받아들이며 발빠르게 적응했던 그는 감독으로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하라 세츠코가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보여준 미소에는 기이한 낙관주의가 엿보인다. 아츠코는 죽으려는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거실 정면에 걸려있는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언급한다. 서양식 군복을 입고 온갖 훈장으로 장식한 초대 백작 할아버지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한다. 안조가는 생존을 위해 자수성가한 하인의 돈에 기대야 했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과거의 황실과 제국에 있음을 보여준다. 안조가는 과거와 결별한 것이 아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종전 후, 일본의 내셔널리즘이 수면아래에 가라앉았다가 1950년대의 냉전 시기를 거치며 서서히 다시 부상하게 됨을 암시하는 장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패전국의 국민으로서의 열패감은 미 군정에 대한 반발심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전후의 현실 인식은 '책임'보다는 '자존감 회복'에 있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후 어떻게든 생존해 나가야 한다는 절박감, 일본은 비참한 현실을 이겨내려고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안조가의 무도회'가 보여주는 것은 당시 일본인들의 내면 풍경인 셈이다.

  '안조가의 무도회'는 그런 면에서 결코 편하게 볼 수 있는 가족 드라마는 아니다. 안조가는 비록 자신들의 저택을 신흥 자본가에게 넘겼지만, 그들의 정신과 정체성까지 포기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후 일본의 역사적 여정과 맞닿아 있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의 재부상, 우익들의 세력 확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아츠코로 분한 하라 세츠코가 영화 속에서 보여준 마지막의 그 환한 미소에는 어쩌면 그 서늘한 미래가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amebl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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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자신의 첫 영화를 보기좋게 말아먹었다. 낙담하고 있는 그에게 한 영화인이 새로운 영화를 만들 것을 제의한다. 남자의 재능을 알아본 그 사람 덕분에 남자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이 쓴 초고에 자신의 경험을 잘 섞어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첫 영화가 망해버린 탓인지 제작비 구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마침내 시작된 영화 촬영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서로 친해진 주연 배우들은 숙소에서 술 먹고 난동을 부리는가 하면, 자동차 경주 촬영 장면을 찍다가 스태프 2명이 사망하는 사고도 있었다. 기껏 영화를 찍었더니, 제작비를 대준 영화사는 어째 흥행이 안될 것 같다며 TV용으로 돌리자는 말을 꺼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가 개봉되었다.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흥행 대박이 터졌다. 제작비의 무려 180배에 달하는 엄청난 수익을 낸 것이다. 그야말로 '인생은 한 방'이라는 것을 남자는 입증해 보였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지 루카스, 그와 함께 영화를 제작한 사람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이 영화로 역대급의 수익을 올린 영화사는 유니버설 픽처스다.


  바로 그 영화, '청춘 낙서(American Graffiti, 1973)'는 네 명의 고교 동창생들이 보낸 하룻밤의 여정을 담아냈다. 내일이면 대학이 있는 도시로 떠나는 모범생 커트(리처드 드라이퍼스 분), 대학 진학을 앞두고 여자 친구와의 이별에 고민하는 스티브(론 하워드 분), 자동차 경주에 목숨을 거는 존(폴 르 맷 분), 여자를 사귀고 싶어서 안달이 난 토드(찰스 마틴 스미스 분)는 하룻밤 동안 모험의 여정을 떠난다. 그들의 여정에는 분신과도 같은 소중한 자동차와 신나는 로큰롤 음악, 그리고 디스크 자키 잭 울프의 라디오 방송이 함께 한다. 그 여정이 끝날 때 즈음, 네 명의 친구들은 새로운 '발견'과 '성장'을 이루어 낸다.


  루카스는 자동차광이었다. 그는 자동차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이 영화에 아낌없이 드러낸다. 온갖 종류의 클래식카들이 등장하는데,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자동차를 매개로 대화하고 소통한다.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서 차는 필수적이다. 차가 없는 토드는 스티브가 빌려준 차를 가지고 비로소 데이트를 할 수 있게 된다. 상대방을 조롱하고 도발할 때 이루어지는 대화들도 창문을 연 차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런가 하면, 마음속 깊은 고민과 감정들을 토로하는 장소도 차 안에서이다. 이쯤되면 자동차는 금속덩어리 기계가 아니라, 마치 생명체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자동차가 영화의 시각을 지배한다면, 1950년대와 60년대를 풍미했던 로큰롤 음악은 관객의 청각을 사로잡는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그 시대의 노래들은 이 영화의 주요한 뼈대를 이룬다. 영화의 포스터 문구 '1962년에 여러분은 어디 있었나요?'라는 문구가 꽤나 흥미롭다. 신나는 로큰롤 음악은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관객들이라 하더라도 영화 속 그 시절로 데려다 놓는다. 영화의 엄청난 흥행에 힘입어 사운드트랙 음반도 대박을 터뜨렸다.


  어떤 면에서 당시의 미국인들에게 이 영화는 지나간 바로 이전 시대에 대한 복기()와도 같았다. 1963년에 케네디가 암살되었고, 이후에 미국은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약물에 절은 히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도 그 즈음이었다. '청춘 낙서'속의 네 명의 친구들 이야기는 마치 그러한 혼란과 격동의 시대 직전에 찍은 인물 사진 같다. 그들이 보여주는 온갖 객기와 자유로움은 1962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새삼스럽게 상기시킨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자막은 그 좋았던 시절의 끝을 가리킨다. 작가가 된 커트, 보험회사 외판원이 된 스티브, 자동차 사고로 죽은 존, 베트남전에서 실종된 토드. 청춘의 낙서가 흐릿해지는 10년 후의 이야기는 그러했다. 이 영화의 대단한 흥행 기록은 어쩌면 과거의 향수로 현실의 고단함을 달래려고 했던 당시 관객들의 열망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청춘 낙서'의 대성공으로 루카스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비로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루카스의 '스타워즈'시리즈는 이 영화의 성공 위에 쓰여졌다.


  이제는 50년의 나이를 먹어버린 영화 '청춘 낙서'는 오늘날의 관객이 보아도 흥미롭고 새롭다. 이 영화는 당시 미국 사회의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어준다. 또한 할리우드 대스타의 아주 젊은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즐거움을 준다. 이십대의 풋풋한 리처드 드라이퍼스(그는 100명의 오디션 경쟁자들을 제치고 캐스팅되었다)와 함께 진짜 젊은 해리슨 포드(당시에 그는 목수일과 배우를 병행했다)가 나온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조지 루카스다. 이제는 디즈니의 대주주가 되어 안락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그의 진정한 인생 역전은 이 영화, '청춘 낙서'에서부터였다. 



*사진 출처: cinemus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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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고 나서 그다지 할 말이 없는 영화들이 있다. 영화가 아주 형편없거나, 반대로 매우 좋거나 하는 경우에는 나름대로 할 말이 많다. 그러나 그저 그런, 딱히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영화들은 뭔가 말문을 막히게 만든다. 브라질 출신의 감독 알레 아브레우가 2013년에 만든 이 애니메이션도 그렇다. '보이 앤 더 월드(The Boy and the World)'는 150여개의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47개의 영화상을 받아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기존의 애니메이션과는 차별화되는 색감과 작화가 눈길을 끄는 것은 사실이다. 작품이 담고 있는 주제도 묵직하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큰 감명은 받지 못했다. 솔직히 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농사를 짓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어린 소년 쿠카는 자연 속에서 자유로움과 행복을 느낀다. 농사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쿠카의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난다. 쿠카는 아빠를 그리워하다 아빠를 찾으러 집을 나선다. 그러니까 '보이 앤 더 월드'의 이야기를 대충 요약하면 '아빠 찾아 삼만리'가 되겠다. 알레 아브레우는 쿠카의 여정 속에 브라질의 근현대사를 펼쳐놓는다. 가난한 농민을 수탈하는 지주,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나는 공장 노동자들, 자연을 파괴하는 개발주의자들, 민중을 억압하는 군부와 독재자... 확실이 이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어느 상영회에서는 이걸 보다 아이가 무서운 나머지 울었다는 이야기도 읽었다. 아이들에게 이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어렵고 상징적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4년이 걸렸다는 제작 과정은 애니메이션의 작화 과정을 모두 수작업으로 했기 때문에 그렇다. 파스텔톤의 아기자기한 색감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캐릭터들의 묘사는 정말 빼어나다. 그런데 담고 있는 이야기들이 꽤 무겁다. 특히 감독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무분별한 소비에 대해 강한 비판적 어조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면직물 공장의 생산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은 마치 거대한 기계의 부품처럼 묘사되고 있다. 자동화 기계를 들여오는 자본가는 악인처럼 등장한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이 전세계로 팔려나가는 장면에는 무수한 컨테이너와 소비와 향락을 조장하는 TV 광고들이 교차 편집된다. 삼림을 불태우고 자연을 파괴하는 장면에서는 실사 자료 화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보이 앤 더 월드'는 결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춘 작품이 아니며, 복잡한 정치적 서사를 품고 있다. 그 모든 것이 매우 무미건조하게 펼쳐진다. 어른들을 위한 본격 잔혹 동화 같다.

  나는 그쯤에서 작은 의문을 품는다. 저렇게 독창적이고 눈길을 끄는 작화 속에 왜 그토록 딱딱한 이야기들을 끼워넣었을까? 우리가 사는 현실에 많은 구조적 불평등과 잘못된 정치 체제, 자본의 횡포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보이 앤 더 월드'는 그걸 요약해서 그림으로 보여준다. 뭔가 다 아는 이야기 다시 한 번 복습하는 기분이 든다. 아이들 교육용으로 만들었다면 전적으로 실패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아이들이 애니메이션에서 원하는 것은 꿈과 희망이지, 고통스럽고 너절한 현실이 아니다. 적절히 순화되고 가공된 현실, 그 편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보이 앤 더 월드'는 그 기대를 깨버린다. 무겁고 과도한 정치적 메시지가 그림을 압도해 버린다.    

  아빠를 찾아 길을 떠났던 쿠카는 노인이 된 모습으로 자신이 사는 세상을 바라본다. 그의 집 밖에는 아이들이 즐겁게 노래하며 자연 속에 머물고 있다. '보이 앤 더 후드'는 어린 쿠카가 바라본 절망과 부조리가 가득찬 현실에 그렇게나마 희망의 씨앗을 던지며 끝낸다. 이 맥아리 없는 애니메이션 대신에 '이웃집의 토토로(1988)'를 한번 더 보며 아련한 추억과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추천한다. 



*사진 출처: commonsense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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