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버지는 당의 집단 농장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불순분자의 가족으로 낙인이 찍힌 그의 성장기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강인한 어머니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는 정규 교육의 혜택은 받았으나, 원하지 않은 자동차 기술 학교에 입학해야만 했다. 학업을 마치지도 않은 상태에서 운전사, 엔지니어 같은 직업으로 떠돌았다. 해군으로 병역을 마친 뒤에는 교사 자격증을 따서 문학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다 영화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그는 25살의 나이에 무작정 모스크바로 갔다. VGIK(러시아 국립 영화 학교)에 들어간 그는 배우와 감독으로서 경력을 쌓아간다. 그는 소설도 꾸준히 써냈다. 자신의 고향 알타이와 그곳 사람들의 삶을 그려냈다.

  그가 1972년에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스토브 벤치(Печки-лавочки)'에도 알타이 농민 부부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Happy Go Lucky', 러시아어 원제목인 '스토브 벤치'와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동명의 제목으로 2008년에 나온 영국 영화가 있어서 우리말 제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스토브 벤치'로 쓰기로 했다. 그것은 러시아 주택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스토브(화덕)와 연결된 벽돌 의자를 뜻한다. 감독 바실리 슉신(Vasily Shukshin)은 그곳에 앉아서 보내는 것을 좋아했는데, 고향의 따뜻함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외딴 알타이 시골 마을의 평화로운 일상 풍경에서부터 시작한다. 유유히 흐르는 강가에서 뱃사공이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마을에는 이반 부부의 여행을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지고, 주민들은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즐거워 한다. 우수 농민으로 뽑힌 이반은 흑해 휴양소 입장권을 포상으로 받았다. 그렇게 시작된 부부의 여행은 결코 편하거나 즐겁지 않다. 이반은 촌사람이라며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사업가와 말다툼을 벌이는데, 사업가는 차장을 불러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려고 한다. 차장이라는 인간도 이반을 깔보고 하대하기는 마찬가지. 그들은 서로를 '동무(comrade)'라고 부르지만, '기차'라는 공간은 그들 사이의 명백한 위계 관계를 드러낸다. 촌부를 경멸하는 사업가, 행색과 지위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속물적인 차장, 도둑과 같은 칸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이반을 강압적으로 취조하는 경찰. 어떤 면에서 그것은 소련 사회의 내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부부의 여행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광활하고 유려한 대자연의 풍경과는 다르게 삐걱거리는 소음을 낸다. 이반은 그럴수록 고향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그가 자는 동안 꾸는 꿈에서는 고향의 들판에서 아내와 행복하게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이 나온다. 이반은 고향의 부모님과 아이들 생각을 하며 편지를 보내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껄끄러운 여행을 그나마 상쇄시켜주는 것은 부부에게 호감을 보이는 언어학자 노교수의 친절이다. 그는 모스크바의 집에 부부를 초대한다. 그러나 화려하고 복잡한 대도시 모스크바는 이반에게 피곤함을 가중시킬 뿐이다.

  바실리 슉신에게 자신이 나고 자란 알타이의 풍광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영화의 초반부에 펼쳐지는 시골 마을의 묘사는 마치 민속지학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한다. 가진 것은 없지만 여유롭고 순박한 농촌 사람들에게 결핍과 불행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슉신은 있는 그대로의 알타이를 담으려고 했다. 그러나 Goskino(소련 국가 영화 위원회, 영화의 검열과 제작 전과정을 주관했다)는 좀 더 세련되고 부유한 모습의 농촌이 담겨지길 바랬다. 그때문에 슉신은 영화를 자신의 뜻대로 만들 수가 없었다. 검열 과정에서 여러 장면들이 삭제 되었고, 그 결과 영화는 온전하지 않은 서사를 가지게 되었다. 기차에서 이반이 겪게 되는 갈등을 묘사하는 부분도 당국은 마뜩잖게 여겼다. 제작 전과정에서 당국은 압력을 행사했고, 슉신은 지루하고 치열한 싸움을 이어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만큼은 슉신도 양보할 수 없었다. 마침내 보고 싶었던 흑해의 해변가에서도 이반은 그다지 즐겁지 않다. 그는 탁 트인 고향의 대지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게 다야. 끝이라구."

  영화 속 이반을 연기한 배우이면서 감독이었던 슉신은 그렇게 대담하게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알타이 대지의 일부분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싶었던 슉신의 의지는 그 마지막 장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 '스토브 벤치'는 어떤 면에서는 슉신의 자전적인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속 뉴라 역을 연기한 사람은 그의 아내였고, 그들 부부의 두 딸도 영화에 잠깐 동안 등장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찍은 그 언덕에는 슉신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는 이 영화를 완성하고 2년 뒤, 촬영 도중 갑작스런 심근경색으로 45살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어쩌면 그가 제일 좋아했던 스토브 벤치처럼 고향 알타이의 언덕은 그를 기념하기에 가장 어울리는 장소일 것이다. 



*사진 출처: in-w.ru



*다음 글은 일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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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5-14 11:06   좋아요 0 | URL
푸른별님 영화 리뷰 팬입니다
일요일 포스팅 기대 할께요 ^ㅅ^

푸른별 2021-05-14 15:53   좋아요 0 | URL
scott 님과 같은 독자가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에릭 로메르가 보여주는 담론의 공간; 나무, 시장과 미디어 라이브러리(L'Arbre, le Maire et la Médiathèque, 1993)

  영화는 시골 초등학교의 수업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마크는 아이들에게 '만약(If) ~ 한다면'이라는 조건문의 용법을 열심히 가르치는 중이다. 영화는 7개의 장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매 장마다 조건문이 제시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1장: 만약에 1992년 지방 선거 전날에 대통령의 소속 정당이 소수당이 되지 않았다면... 관객들은 예기치 않은 7개의 '우연'이 인물들의 생각과 그들이 개입된 사건을 어떻게 바꾸어 가는지 보게 된다.


  에릭 로메르 감독의 1993년작 '나무, 시장과 미디어 라이브러리(The Tree, the Mayor and the Mediatheque)'은 시골 마을에 세워질 복합 미디어 센터를 두고 대립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에서 '정치'가 다루어진 적이 있었던가? '나무, 시장과 미디어 라이브러리'는 얼핏 보기에 로메르의 정치적 관점을 담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의 신념과 가치관의 차이, 그것이 가져오는 변화와 파장이다.

  Vendée 라는 작은 마을의 시장 줄리앙은 주민들을 위한 복합 미디어 센터를 세우려고 한다. 비록 그가 속한 사회당이 선거에서 패배해서 소수당이 되기는 했지만, 전에 문화부에서 따온 예산으로 건축은 이미 설계에 들어갔다. 그러나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 마크는 그 건물이 마을의 경관을 해치고, 외지인들의 유입은 환경 오염을 가중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줄리앙은 미디어 센터를 짓게 되면, 외지인들의 방문이 늘어나고 그런 활기가 마을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으로 확신한다. 그는 언론의 도움을 기대하며 친척이 소개해준 저널리스트 블랑딘의 취재에 협조한다. 블랑딘은 마을 사람들과 인터뷰도 진행하는데, 건물 신축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마크의 주장을 흥미롭게 듣는다. 마침내 나온 블랑딘의 기사는 줄리앙의 바램과는 달리 마크의 인터뷰를 부각시킨 것이었다. 과연 줄리앙이 바라는 대로 미디어 센터는 지어질 수 있을까?

  에릭 로메르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들 속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줄리앙이 여자친구 베레니스와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그는 결코 개발지상주의자가 아니다. 줄리앙은 자연을 사랑하고 소박한 시골 생활에도 만족한다. 중앙 정치로 진출해 보라는 베레니스의 권유에도 시장 업무가 우선이라고 말한다. 시장으로서 주민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려는 그의 성실한 자세는 '복합 미디어 센터'라는 꿈과 맞닿아 있다. 설계를 맡은 건축가와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최대한 환경친화적으로 건물을 지으려는 줄리앙의 의도가 드러난다. 그는 시골 마을도 도시화의 추세에 따라 변화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크는 그런 그와 정반대의 지점에 서있다. 마크의 생각은 아내와 딸과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그는 건축 계획이 의회로 진출하려는 줄리앙의 정치적 야심에서 나온 것이며, 결국 그 건물은 마을의 흉물이 될 거라고 본다. 마크는 시골의 풍경은 훼손되지 않아야할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의 생각을 상징하는 것은 건축 부지에 있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이다. 그는 그 나무가 베어지게 된다면 마을을 떠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크는 정작 자신의 의견을 줄리앙에게 직접 말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혼자 궁시렁대는 뒷방 늙은이처럼 단지 부인과 딸에게 자신의 불만을 토로할 뿐이다.

  110분에 이르는 러닝 타임 동안 관객들은 아직 지어지지 않은 가상의 건물을 두고 벌어지는 대화의 향연을 목격한다. 여기에는 환경보호론자와 개발주의자의 관점, 정치와 관료주의, 쇠락해가는 농촌 마을의 현실, 편향된 언론이 특정 사건에 미치는 영향이 마치 옷감의 무늬를 짜듯 촘촘히 배치된다. 로메르의 특기란 그런 것이다. 그는 인물들의 일상적 대화를 통해 문제의 본질을 조망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영화에는 어떤 대단한 정치구호나 시끄러운 시위가 등장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각자가 가진 생각을 말하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비록 타협할 수 없는 신념의 차이를 확인했다 하더라도 그런 대화의 기술은 다양한 관점에서 하나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블랑딘이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농촌의 삶과 신축 건물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는 장면을 통해 관객들은 개발과 자연보호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 알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줄리앙에게 의견을 피력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 마크는 편협하고 독단적인 사고방식에 갇힌 인물처럼 보인다. 그런 아빠와는 달리 10살된 마크의 딸 베가는 대화를 통한 소통과 타협의 가치를 알고 있다. 똑똑하고 야무진 소녀는 줄리앙에게 마을에 미디어 센터가 필요하지 않는 이유와 그 대신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곤조곤 일러준다.   

  영화를 보고나면 그런 의문이 든다. 로메르는 왜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1980년대와 90년대에 프랑스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여러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개발 바람과 함께 신축 건물들이 들어섰고, 현지 주민들의 필요와 의견을 고려하지 않은 쏟아붓기 식의 행정적 낭비라는 지적이 나오게 되었다. 정치인들은 정책을 세우고, 건축가는 그 정책에 따라 건물을 짓는다. 그런 실제적 행위는 사람들의 일상에 때론 돌이킬 수 없는 비가역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로메르는 푸른 잔디밭과 나무 한 그루, 그리고 그곳에 들어설 가상의 미디어 센터를 대비시킨다. 관객들은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고 그 두 풍경 가운데 하나의 것을 선택했을 때를 상상해 보게 된다. 어떤 선택이든 절대적으로 옳고 좋은 것은 없다. 아마도 로메르는 그 선택의 기로에서 다양하게 발생할 수 있는 담론의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대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로메르의 소박하지만 흥미로운 영화 작업은 '나무, 시장과 미디어 라이브러리'로 남았다.  



*사진 출처: filmsdulosang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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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데사 음악 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콘스탄틴은 재즈 연주를 했다는 이유로 자아비판의 대상이 된다. 재즈가 부르주아의 음악이라는 당원들의 비난에 콘스탄틴은 재즈는 억압받는 하층민의 음악이라고 응수한다. 결국 학교에서 쫓겨난 그는 소련 최초의 재즈 밴드를 만들겠다는 꿈을 갖는다. 가난한 길거리 악사로 살아가던 스테판과 조라가 콘스탄틴의 밴드에 합류한다. 그들의 첫공연은 재즈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관객들의 야유로 엉망이 된다. 그럼에도 꺾이지 않는 콘스탄틴의 재즈 열정에 색소폰 연주자 이반도 뜻을 같이 한다. 밴드는 자신들의 큰뜻을 펼치려고 모스크바로 떠난다. 과연 콘스탄틴의 밴드는 성공할 수 있을까?

  카렌 샤크나자로프(Karen Shahknazarov) 감독이 1983년에 만든 이 영화의 영어 번역 제목은 'We Are from Jazz(Мы из джаза)'이다. 우리말로 번역된 제목이 없어서 나는 '우리는 재즈 피플'로 적어보았다. 영화의 배경은 1920년대,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아니, 무슨 소련에 재즈 음악이 있었다는 거야? 그것도 1920년대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할 수 없다. 재즈 음악이 흐르는 이 독특한 소련 뮤지컬 영화는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우리는 재즈 피플'은 약간은 비어있고 엉성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밴드에서 드럼을 맡고 있는 조라가 흑인 분장을 하고 오디션을 보는 장면은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인종주의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영화에는 소련에 공연을 하러 온 쿠바 재즈 가수 클레멘틴이 등장하는데, 그 배역을 맡은 라리사 돌리나도 흑인 분장을 해야 했다. 뭔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분장을 견딜 수만 있다면, 그 인내에 영화는 보답한다. 영어로 연주되는 재즈 송이 정말 멋지기 때문이다(실제로 노래는 라트비아 출신 여가수가 불렀다). 영화에는 1920년대 재즈의 주류였던 래그타임(ragtime) 연주와 탭댄스 장면도 나온다. 콘스탄틴을 맡은 이고르 스클리야는 피아노를 배워야 했고, 다른 배우들도 탭댄스와 악기 연주 연기를 위해 교습을 받았다. 샤크나자로프 감독은 여러모로 영화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애를 썼다.  

  콘스탄틴은 밴드의 성공을 위해 클레멘틴의 환심을 사서 계약을 성사시키려고 하지만 돈만 날린다. 밴드는 당의 프롤레타리아 음악가 협회를 찾아가 어렵게 공연기회를 잡는다. 그러나 재즈 음악에 대한 당국의 전면적인 금지령이 내려지고, 콘스탄틴과 밴드 친구들은 낙담한다. 그 시대는 콘스탄틴의 재즈 음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돈은 떨어지고, 연주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결국 소련 최초의 재즈 밴드는 그대로 사라지고 마는 걸까? 영화의 마지막, 흰머리의 콘스탄틴과 친구들이 빛나는 무대 위에서 공연을 펼친다. 철의 장막 소련에서, 그렇게 재즈는 살아남았다.

  아무리 그래도 소설을 너무 심하게 썼네, 라고 생각할 관객들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그런데 러시아 영화 잡지 사이트를 둘러 보다가, 이 영화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영화 '우리는 재즈 피플'은 허황된 '소설'이 아니었다. 영화 속 배역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실제의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콘스탄틴의 모델은 1930년대에 소련의 재즈 오케스트라를 이끌었고, 많은 재즈 음악을 작곡한 알렉산드르 발라모프(Alexander Varlamov)였다. 그는 샤크나자로프 감독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고, 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시나리오가 쓰여졌다. 영화 속에서 콘스탄틴이 존경하는 재즈 애호가 해군 장교가 나오는데, 그 또한 역사 속의 인물이었다. 대단한 재즈광이며 많은 재즈 음악회를 기획했던 해군 장교 세르게이 콜바셰프(Sergei Kolbasyev)의 실제 삶은 비극으로 끝났다. 1937년에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서 결국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서 등장한 재즈 가수 역도 실제 인물이 있었다. 코레티 아를(Coretti Arle)이라는 미국 출신 흑인 재즈 가수는 러시아 유태인과의 결혼으로 이주한 1900년대 초부터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에서 가수와 영화배우로 활동했다.

  소련에서 재즈는 스탈린 시대를 거치면서 부르주아 음악으로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렇다고 그 명맥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1940년대에 많은 재즈 밴드들은 해체되었지만, 지하 문화 운동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흐루시초프 시절의 해빙기에 잠깐의 자유를 구가했다. 소련의 영화 음악으로도 재즈는 계속적으로 쓰이면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1983년에 소련에서 만든 '우리는 재즈 피플'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던 재즈라는 음악의 질긴 생명력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크게 흥행했고, 1983년 최고의 소련 영화로 뽑히기도 했다.



*사진 출처: paolo-74.live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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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비행기에서 한무리의 승객들이 쏟아져 나오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멋진 옷차림을 한 승객들 사이로 초라한 행색의 사람들이 눈에 띈다. 그들은 외모도 다르다. 말쑥한 승객들은 유럽계 백인들이고, 후줄근한 옷차림에 페즈(fez: 챙없는 아랍 남자들의 모자)를 쓴 남자들과 그 일행들은 아랍계 사람들이다. 백인들은 고급 관광 버스에, 아랍인들은 허름한 트럭에 올라탄다. 그들은 이제 막 새로운 땅에 도착했다. 이곳에 오기만 하면 집도 주고 먹고 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들었다. 정말 이 나라는 그 약속을 지킬까?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인접 아랍국가들에서는 반유대주의의 기운이 커져갔다. 특히 예멘 지역에서 오랫동안 정착해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심각한 박해의 위협에 놓여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른바 '마법의 양탄자 작전(Operation Magic Carpet)'으로 1949년에서 195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약 4만 9천명 가량의 예멘계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수송한다. 에프라임 키숀(Ephraim Kishon)감독의 1964년작 '살라 샤바티(סאלח שבתי, Sallah Shabati)'는 그렇게 이스라엘 땅을 밟게 된 예멘 유대인의 힘든 정착기를 담아냈다.

  털털거리는 트럭을 타고 살라 샤바티의 가족들이 도착한 곳은 이른바 '임시 캠프(ma’abara)'라고 불리는 곳이다. 겨우 비바람이나 막을 것 같은 판잣집들이 모여있는 판자촌. 그곳에서 6명의 아이들에, 이제 곧 태어날 아이를 가진 부인이 있는 중년의 남자 살라는 오매불망 번듯한 새집이 주어지길 기다린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집단농장 키부츠의 막노동과 허드렛일이다. 일하고 받은 푼돈의 임금으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는 현실에 살라는 좌절한다. 그는 술집에서 술과 노래, 주사위 놀이로 시간을 때운다. 정치인들이 온갖 공약을 내걸었던 선거에도 기대를 걸었지만, 판잣촌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주인공 살라 샤바티의 캐릭터는 한마디로 일자무식의, 전형적인 아랍인의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보다는 예멘인, 아랍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살라는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술집에서 사람들과 함께 아랍풍의 민요를 흥겹게 부른다. 그들의 복장 또한 아랍의 전통 일상복이다. 유럽계 백인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아슈케나짐(Ashkenazim, Ashkenazi Jews)'과 구분되는 '미즈라힘(Mizrahim, Mizrahi Jews)'이 그들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그 정착의 과정에서 미즈라힘은 계몽의 대상으로 철저히 관리되고 차별받았다. '살라 샤바티'는 미즈라힘이 겪는 차별의 현실을 보여주지만, 그 묘사는 사실적인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살라가 보여주는 무지와 게으름, 그리고 결혼을 앞둔 딸의 지참금을 남자에게 요구하는 모습은 아랍의 전근대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살아야할 새로운 나라 이스라엘이 요구하는 시민의 덕목에 어울리지 않는다.


  열악한 환경의 판잣집에서 사는 것을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살라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주택 사무국 앞에서 시위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장면은 결코 심각하게 연출되지 않았다. 다소 코믹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시위 장면에서 알 수 있듯, 에프라임 키숀 감독은 영화를 전반적으로 가볍고 활기차게 이끌어 간다. 깨끗하고 좋은 집에 대한 살라의 소망은 결국 이루어지며, 그의 아들과 딸은 키부츠의 아슈케나지 유대인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한 결말은 이 영화가 매우 현실타협적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미즈라히 유대인들이 영화 속 살라의 캐릭터를 마음에 들어할 리가 없었다. 또한 이스라엘 당국으로서도 유대계 내부의 현실적 차별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골다 메이어는 이 영화의 해외 반출을 금지시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영화는 아카데미 영화제와 골든 글로브에 출품되었고,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이스라엘 영화가 해외에서 거둔 최초의 성공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단 1대 밖에 없었던 Arriflex를 가지고 찍었던, 신인 감독의 첫 작품이 거둔 성과였다.

  주로 풍자적 칼럼과 소설 작품을 썼던 키숀은 자신의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적인 것에 대한 별다른 이해없이 만든 이 작품에 어떤 미학적 성취나 서사의 완결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살라 샤바티'가 가진 내적 결함, 즉 미즈라히 유대인 캐릭터의 편향적 묘사와 피상적인 현실 인식이 매우 실망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아랍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정착기의 한 단면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살라 역의 연기로 미국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차임 토폴은 노만 주이슨 감독의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 1971)'의 주연을 맡기도 했다.   



*사진 출처: edb.co.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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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들이 살고 있는 집, 대학 등록금은 다 나한테서 나온 거다. 내가 얼마나 뼈빠지게 일했는지 알기나 해?"

  아버지 톰은 자식들에게 자신의 공덕을 입버릇처럼 내세운다. 가족들에게 독불장군처럼 군림해온 그는 자식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 대학교수인 아들 진은 강압적이고 독선적인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미워한다. 딸 앨리스는 유태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큰 비난을 받은 후 아버지와 소원한 상태다. 그런 자식들은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 이후, 연로한 아버지의 거취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앨리스는 입주 가사 도우미를 두자고 하지만 톰은 완강히 거부한다. 재혼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떠나려는 진은 아버지에 대한 애증과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 사이에서 갈등한다.

  강한 아버지 밑에서 상처받은 아들을 연기한 진 해크먼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프렌치 커넥션(The French Connection, 1971)'의 그 열혈 형사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 길버트 케이츠 감독의 영화 '아버지의 노래(I Never Sang for My Father, 1970)'에서의 해크먼은 매우 위축되어 있고, 많은 감정을 속으로 삭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통불능의 아버지 톰은 자신이 좋아하는 TV서부극을 크게 틀어놓으면서, 아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캘리포니아에 가서 함께 살자는 아들의 제안을 듣고는 자신의 집에서 함께 살면 되는데 왜 그러냐고 말한다. 톰은 자식들이 자신을 짐짝처럼 여긴다고 분노하며, 배은망덕하다고 비난을 쏟아낸다. 결국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해묵은 불화가 독설과 함께 터져 버린다.

  영화는 매우 건조하며, 연출은 밋밋하기 짝이 없다. 오직 미움만이 존재할 뿐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깊게 패인 세월의 상처를 보는 일은 괴롭다. 여기에 자식이 가진 부모에 대한 '부양의 의무'라는 윤리적 가치가 개입되면서 이야기를 더 무겁게 만든다. 진이 아버지의 거취에 대한 대안으로 요양 병원과 양로원을 살펴보는 장면은 마치 공포영화의 장면들처럼 제시된다. 그때에 흘러나오는 음악은 음산하기 짝이 없는데, 이 영화에 쓰인 음악들은 그렇게 단선적이고 조잡스럽다. 그 장면은 그런 곳에 부모를 보내는 행위는 '유기'나 '방치'와 같다는 암시를 준다. 그곳을 돌아보고나서, 진은 미워하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아버지의 노후에 대한 책임감을 더욱 느끼게 된다.

  미국 사회가 고령화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사회학자와 경제학자들은 고령화가 미칠 노동 시장에서의 고용 방식, 연금 수당, 건강 관리 및 가족의 형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영화 '아버지의 노래'는 부모의 사회 경제적 능력의 상실이 가져오는 가족 내의 노후 부양 문제를 부각시킨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립과 갈등은 단순히 가치관과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회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발생한다. 톰은 진과 앨리스에게 키워준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며 부양의 의무를 부각시키지만, 자식들은 그 의무를 부담스럽게 여긴다. 그 의무를 온전히 지는 것은 진과 앨리스에게는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흔드는 일이 된다.

  '아버지의 노래'가 보여주는 그런 고민들은 이미 1937년에 만들어진 '내일을 위한 길(Make Way for Tomorrow)'에서 제시된 바 있다. 레오 맥캐리 감독의 이 영화는 오갈 데가 없어진 노부부가 자식들에게 삶을 의탁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가슴아픈 일을 담았다. 바크와 루시 부부는 은퇴 후 소득없이 지내면서 집을 은행에 저당잡히게 되는데, 부부가 의지할 곳은 5명의 자식들 뿐이다. 서로 헤어져 다른 자식들의 집에서 지내던 부부는 자신들이 짐짝처럼 여겨지는 현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건강이 악화된 남편은 또 다른 자식의 집으로, 아내는 양로원으로 갈 예정이다. 그 부부는 떠나기 전 함께 50년 전 신혼여행지 뉴욕을 돌아본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만남을 끝으로 그들은 기차역에서 헤어진다. 이 영화에 드러난 노부부의 고통은 노후 계획의 실패와 자식들과의 갈등이라는 개인적 차원에 머무른다. 세월이 흘러 1970년에 만든 '아버지의 노래'는 그 부모 부양의 문제가 좀 더 사회적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이 목격한 열악한 수용소와 같은 요양원의 실상은 미국 사회가 직면하기 시작한 고령화 사회의 문제점을 부각시킨다.

  동명의 희곡을 영화화한 '아버지의 노래'는 상처와 증오 뿐인 부자간의 관계를 뻣뻣하고 거칠게, 그리고 전혀 영화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길버트 케이츠 감독은 원작 연극의 제작을 맡기도 했다. 그는 차라리 연극 제작자로 남아있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로 강인한 남성상을 연기했던 진 해크먼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는 점은 새롭다. 해크먼은 1988년 Filmcomment와의 인터뷰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멜빈 더글라스가 자신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촬영 내내 불편했었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 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데에는 좋게 작용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서로를 싫어하는 배우들의 진짜 연기와 함께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당시 미국 사회가 가진 노인 문제에 대한 고민도 엿볼 수 있다.



*사진 출처: filmcomme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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