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아마도 '직장 로맨스'의 아나톨리에게는 루드밀라의 눈물을 보았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영화는 통계청 직원 아나톨리가 자신의 직장 동료들을 소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통계청의 수장으로 오로지 일 밖에 모르는 구닥다리 옷차림의 노처녀 루드밀라, 무한긍정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아나톨리의 대학 동창 올가, 루드밀라의 비서로 멋내기가 취미인 패션 리더 베라, 마당발로 직장 내 대소사를 챙기는 노조위원장 슈라. 이런 이들과 함께 일하는 아나톨리는 바람난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홀로 아들 둘을 키우고 있다. 어느 날, 그의 대학동창 유리가 부청장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평온했던 직장에는 예기치 않은 로맨스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게 된다.

  엘다르 랴자노프(
Eldar Ryazanov) 감독의 1977년 영화 '직장 로맨스(Служебный роман, Office Romance)'는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일벌레 직장 상사와 사랑에 빠지는 소심남 아나톨리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 '가을 마라톤(Осенний марафон, 1979)'에서 흔들리는 가을 남자를 연기했던 올레그 바실라시빌리가 이 영화에서는 철벽남 유리로 나온다. 그는 돈에 쪼들리는 친구 아나톨리에게 새로 생긴 부서장 자리의 승진을 위해 상사 루드밀라를 꼬드겨 보라고 한다. 유리의 부임 축하 파티에서 아나톨리는 루드밀라에게 시와 노래를 불러보며 호감을 보여주려 애를 쓰지만, 루드밀라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그런 루드밀라에게 아나톨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일벌레라며 모욕을 주고, 루드밀라는 당혹감 속에 자리를 뜬다. 다음 날, 사과를 위해 찾아간 자리에서 아나톨리는 상처받은 루드밀라의 눈물을 보고 연민을 갖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의 직장 로맨스가 시작되는 가운데, 올가는 유리에 대해 가졌던 대학 시절의 연애 감정이 되살아나서 편지 공세를 시작한다. 이 어지러운 직장 로맨스는 어떻게 끝날 것인가...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음악이다. 구 소련 시절 모스 필름 제작의 많은 영화에서 안드레이 페트로프의 음악은 독보적이었다. '나는 모스크바를 걷고 있네(1964)'와 '가을 마라톤(1979)'에서의 서정적인 선율은 모두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 '직장 로맨스'에서도 페트로프의 눈부신 실력이 발휘된다. 랴자노프 감독이 가사를 쓴 여러 곡의 노래들이 영화에서 흘러나오는데, 모스크바의 가을 풍경과 매우 잘 어울린다. 주인공들의 심정을 잘 나타내는 시적인 가사들은 랴자노프가 시인들의 시에서 인용한 구절들이 포함되었다. 그 노래들이 흐르는 '직장 로맨스'는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는 1977년의 모스크바, 그곳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는 풍속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직장 로맨스'의 캐릭터들은 구시대의 도식적인 젠더 관념을 명백하게 반영하고 있다. 사회적 경력에서는 나름의 성취를 이룬 루드밀라는 남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여자로 묘사된다. 루드밀라는 자신이 일에 매진하는 이유가 외로움을 잊기 위해서라고 아나톨리에게 말한다. 삼십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중년의 여자처럼 보이는 촌스러운 옷차림과 딱딱한 매너를 지닌 루드밀라를 직원들은 '우리의 할멈(our hag)'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흉을 본다. 이런 루드밀라가 사랑에 빠지게 되자 심정의 변화와 함께 외모를 가꾸기 시작한다. 오직 '사랑'만이 이 가엾은 처지의 노처녀를 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올가의 처지는 루드밀라 보다 더 나쁘다. 가정을 가진 유부녀임에도 대학 동창 유리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올가는 그런 자신을 추스리지 못한다. 올가가 유리에게 보낸 편지들은 곧 직장 동료들에 의해 웃음거리가 되고, 결정적으로 유리는 노조에 공식적으로 올가의 문제 해결을 의뢰함으로써 모멸감을 안겨주기에 이른다. 랴자노프 감독이 그려낸 '직장 로맨스'의 여성들은 사랑의 감정에 말할 수 없이 약하고 흔들리는 그런 존재로 그려진다. 이것은 영화 초반부에 통계청의 여직원들이 출근하자마자 화장이며 외모 치장에 열을 올리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에서도 부각된다. 여성은 나이에 관계없이 끊임없이 외모를 가꾸고, 타인의 시선과 관심을 갈구하는 존재임을 각인시킨다. 여성에 대한 관음적 시선은 음흉한 눈길로 여직원들의 몸매를 훔쳐보는 중년의 남자 직원 표트르가 대변한다.

  '직장 로맨스'는 그렇게 당시 소련 여성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관점을 투영한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서도 여전히 여성은 전통적 가정의 안주인 역할을 수행해야 했고, '직장'은 '가정'의 하위 범주에 속했다. 루드밀라의 비서 베라는 멋진 패션 리더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틈만 나면 얼마전 이혼한 남편에게 다시 돌아와줄 수 없냐고 전화를 걸어 애걸한다. 루드밀라는 아들 둘을 혼자 키우느라 힘들다는 아나톨리의 푸념에 그래도 당신은 아이들이 있으니 행복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런 루드밀라는 얼마 안가 자신의 꿈을 실현하게 된다. 영화는 마지막의 자막에서 9개월 후, 아나톨리에게 세 번째 아들이 태어났다고 알려준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에 소련에서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고,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었던 영화였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본 오늘 날의 젊은 러시아 여성은 영화가 매우 구시대적이며, 아나톨리의 세 번째 아기가 아들이라고 분명히 알려주는 자막도 우습기 짝이 없다고 짧은 감상평을 썼다. 그렇다. 시대가 변한 것이다. 2011년에 러시아에서 개봉된 리메이크 영화가 혹평 속에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럼에도 '직장 로맨스'가 보여주는 로맨틱 코미디의 서사는 매우 부드러우며 관객을 즐겁게 만든다. 직장 내의 위계 관계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 마음을 열고 사랑에 빠지는 루드밀라와 아나톨리의 사랑 이야기는 결코 억지스럽지 않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는 관객들을 매료시킨다. 아나톨리 역의 안드레이 미야코프, 루드밀라 역의 알리사 프로인드리치는 구 소련 시절을 대표하는 국민 배우들이었다. 브레즈네프 시절의 경제적 침체기에 소련의 관객들은 이런 즐거운 영화라도 보면서 삶의 시름을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 쏟아져 나온 코미디 영화의 유산 가운데 랴자노프 감독의 '직장 로맨스'는 빛나는 보석과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러닝 타임이 꽤 길다. 155분의 길이로,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다.


**구 소련 시절의 영화사 모스 필름(Mosfilm)은 유튜브에 전용 채널을 개설해 놓았다. 무료이며, 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번역이 간결하고 아주 좋다.


***사진 출처: newperexo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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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5-21 17:11   좋아요 1 | URL
오! 푸른별님
유툽으로 당장 달려 갑니다~@@@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구든 자신의 과거로부터 벗어난다는 일은. 왕 샤오슈아이의 2014년작 '틈입자(闖入者, Red Amnesia)는 어느 노부인의 길고 어두운 과거의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베이징의 낡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덩 부인의 일상은 늘 바쁘다. 결혼한 큰 아들 가족을 비롯해 혼자 살고 있는 막내 아들의 먹을거리를 챙기고, 요양원에 있는 노모를 방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버거워 보이는 핸드 카트를 끌고 다니며 악착스럽게 자식의 삶에 관여하는 덩 부인에게 본인의 삶이란 없어 보인다. 집에서 혼자 식사할 때, 죽은 남편을 떠올리며 대화하는 것이 덩 부인의 가장 개인적인 시간이다. 그런 변함없는 일상에 어느 날부터 걸려온 장난 전화가 균열을 일으킨다. 아무 말도 없이 끊어버리는 전화는 계속 이어지고, 창문으로는 돌이 날아온다. 큰 아들의 집 문 앞에는 쓰레기가 투척된다. 도대체 누가, 왜 그런 장난을 하는 것일까?

  '상하이 드림(靑紅, 2005)', '11송이 꽃(我十一, 2011)'에 이어 나온 왕 샤오슈아이의 '틈입자'는 그의 문화대혁명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사실 이 영화를 그 연작의 마지막으로 보기도 어려운 것이 그의 2019년작 '아들(地久天长)'에서도 문혁은 변주된 주제로 이어진다. 문화대혁명이 이 감독에게 그토록 중요한 영화적 주제가 된 이유는 왕 샤오슈아이의 어린 시절에서 찾을 수 있다. 문혁 시기의 '하방(下放)'은 대도시 출신의 지식인과 중산층들에게 지방과 시골로의 집단적 이주를 강제했다. 그의 가족도 상하이에서 귀주 지역으로 이주했고, 그는 13살이 되었을 때에야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그 시절의 궁핍하고 고통스러웠던 가족의 삶은 왕 샤오슈아이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그는 '청홍'에서는 상하이로의 귀환을 꿈꾸는 시골 마을 일가족을, '아들'에서는 문혁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화해하는 오늘날의 구세대를 그린다. 어떤 면에서 '틈입자'는 그 가운데에 자리한 연결 고리와도 같은 작품이다.

  영화는 계속된 장난 전화에 불안과 혼란을 느끼는 덩 부인의 마음을 따라간다. 발신자 추적 전화기나 경찰에 신고하는 것으로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덩 부인은 문득 얼마 전에 들은 짜오의 죽음을 떠올린다. 귀주에서 살았던 문혁 시기, 둘째를 가지고 있었던 덩 부인은 상하이 이주권을 두고 짜오의 가족과 경쟁했다. 그것은 단지 원래 살던 고향으로 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중국의 '후커우(戶口)' 제도는 출생지에 따라 학교와 직업, 주택 소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대판 신분제도나 다름없다. '청홍'에서 청홍의 일가족이 상하이로 필사적으로 귀환하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덩 부인은 태어날 둘째의 미래를 위해서 이주권을 얻으려 애를 쓴다. 열심한 당원이었던 짜오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방하는 서한을 당국에 써보냈고, 결국 이주권은 덩 부인의 차지가 된다. 덩 부인의 자녀들이 누리고 있는 대도시에서의 안온한 일상은 그런 과거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제 덩 부인을 불안하게 만드는 전화는 더이상 '장난'이 아닌 것이 된다. 덩 부인은 그것이 죽은 짜오의 혼령이 과거의 과오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기 위해 걸어온 전화라고 생각한다. 그런 덩 부인의 주변에는 젊은 청년이 그즈음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고장난 족욕기를 고치는 길을 동행해준 그 청년에게 덩 부인은 식사를 대접하지만, 청년은 덩 부인의 사진첩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달아나 버린다. 덩 부인은 마침내 과거로의 여행을 결심한다. 귀주에 남아있는 짜오 가족을 찾아가서 용서를 빌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고통스러웠던 과거로의 여행은 2019년작 '아들'에서도 반복된다. 어린 아들의 죽음을 잊고자 다른 도시로 떠났던 부부는 노년이 되어 그곳을 방문한다. 그들은 아들을 죽게 만든 가해자의 가족을 용서하고 화해한다. 그러나 '틈입자'의 덩 부인의 여행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사죄와 화해의 시도는 거부당한다. 왕 샤오슈아이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옥상의 열려진 창문을 오랫동안 보여준다. 그것은 한 개인의 과거의 기억과 역사는 열려진 통로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현재와 이어짐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망각하고 부인하려고 해도 과거는 현실 속에 흘러내리며 영향을 끼친다. 왕 샤오슈아이는 문혁이라는 길고 어두운 그림자가 오늘날의 중국인들에게 드리워져 있음을 그렇게 '틈입자'의 덩 부인을 통해 보여준다.

  이 영화는 베니스를 비롯해 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 덩 부인 역을 연기한 류종의 연기가 아주 좋다. '틈입자'가 가진 나름의 묵직하고 성찰적인 메시지가 호소력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왕 샤오슈아이의 문혁 연작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이 가진 의미를 계속된 영화 작업으로 충분히 보여주었다.


  '청홍'과 '아들'에 이어 '틈입자'는 내가 왕 샤오슈아이의 영화를 보고 쓴 세 번째 리뷰이다. 이제 왕 샤오슈아이는 과거의 '문혁'이 아니라 현재의 중국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북경 자전거(Beijing Bicycle, 2001)'를 만들었을 때의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창작자로서 오늘날의 중국인들의 삶과 그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북경 자전거'가 북경의 지저분한 뒷골목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중국 당국의 탄압을 받았던 기억 때문일까? 왕 샤오슈아이는 공인된 역사적 과오인 '문화대혁명'으로 회귀해서 도통 현실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과거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끊고, 열려진 창문으로 오늘날의 중국을 볼 수 있기를, 그리하여 다음 작품에는 그 현실의 풍경이 담겨져 있기를 기대한다.



*사진 출처: en.hkcinem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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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헐리우드 영화의 자기 복제, 'Sirocco(1951)'와 'The Garment Jungle(1957)'의 경우'


 *이 글에는 'Sirocco(1951)'와 'The Garment Jungle(1957)'의 결말이 들어 있습니다.

 

  소설을 쓰는 데는 세 가지 법칙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게 뭔지 아무도 모른다 - 윌리엄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 영국의 작가)

  흥행이 잘 되는 영화를 만드는 법칙이란 것이 있을까? 그 비밀을 아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아직까지 듣지 못했다. 다만, 망해버린 영화에 대해서라면 언제든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차고도 넘칠 것이다. 이 글에서는 1950년대 헐리우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과거의 영화를 베끼려다 쓴 맛을 본 두 편의 영화를 다룬다. 커티스 베른하르트 감독의 '시로코(Sirocco, 1951)'와 빈센트 셔먼 감독의 '패션 전쟁(The Garment Jungle, 1957)'이 그것이다.

  "우리의 보기(Bogie)는 슬프고 늙어 보였어요."

  영화 '시로코'를 본 험프리 보가트의 어느 팬은 리뷰에 그렇게 썼다. 'Bogie'는 팬들이 보가트를 부르는 애칭이기도 하다. 그랬다. 영화 '카사블랑카(Casablanca, 1942)'를 베낀 티가 역력한 '시로코'에서 보가트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에는 활기와 열정이 부족했다. 보가트의 팬들로서는 정말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짠할 만도 하다. 영화는 서사의 엉성함과 총체적인 부실로 마치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 같다. 1925년에 프랑스가 점령한 시리아 다마스커스에는 아랍 토후 에미르 하산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 투쟁이 벌어진다. 해리(험프리 보가트 분)는 아랍 측에 무기를 밀매하면서 꽤 큰 수익을 내고 있다. 무기 밀매상을 찾아내려는 페로 대령(리 J. 콥 분)과 해리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다. 거기에 페로의 애인 비올레타(마르타 토렌 분)가 해리와 도피를 시도하게 되면서 상황은 복잡해 진다.

  '시로코'의 대본을 본 보가트는 뭔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는지 이 영화의 제작자로 뛰어들었다. 시나리오 작가 11명이 달라붙어서 보가트를 부각시킬 최선의 각본을 만들려고 애썼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는 시종일관 '카사블랑카'를 떠올리게 만든다. 무기 밀매로 얻은 수익으로 불안한 정세의 다마스커스에서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해리는 '카사블랑카'의 도박장 운영자 릭과 병치된다. 페로가 해리의 정체를 의심하고 그의 정보 파일을 들여다 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해리의 전직은 '도박장 운영자'였다.


  실소를 자아내게 만드는 그런 베끼기는 '카사블랑카'의 보가트를 상징했던 담배와 모자, 트렌치 코트가 똑같이 재현된다는 점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배우조차도 잉그리드 버그먼을 연상케 하는 외모를 지녔다. 마르타 토렌은 버그먼과 같은 스웨덴 출신의 금발 미녀 배우였다. '시로코'가 '카사블랑카'와 다른 점이 있다면 타락한 캐릭터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도박장을 운영하면서 해외로 도피하려는 이들에게 통행증을 얻어주는 댓가로 돈을 챙기는 릭과는 달리 해리는 무기 밀매로 이득을 보는 비도덕적인 인물이다. 비올레타는 자신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페로를 증오하고 그의 죽음까지 간절히 원하는 여자다. 잉그리드 버그먼이 보여주었던 가슴저린 사랑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개연성이 떨어지는 '시로코'의 서사는 관객들에게 그 어떤 설득력도 갖고 있지 못하며, 감동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심드렁하게 볼 수 밖에 없는 관객에게도 마지막 장면은 좀 놀라울 수 있다. 해리가 죽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이 영화의 결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왜 무기 밀매상 해리가 죽어야 했을까? '카사블랑카'의 결말은 미국의 2차 대전 참전과 연합국과의 관계를 상징하지만, '시로코'의 결말은 당시의 미국 상황과 연관해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미국을 휩쓸던 매카시즘 광풍은 영화계에까지 밀어닥쳤다. 이른바 헐리우드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의회에서 증언을 강요당했던 해당 영화인들은 극심한 고초를 겪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증언을 거부하고 매장되거나, 적극적으로 협조하거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타협하거나, 그 세 가지 가운데 하나였다. 영화 '시로코'에서 페로 대령 역을 연기했던 리 J. 콥은 마지막의 경우였다. 공산주의자로 찍힌 그는 증언을 내내 거부하다가 영화 경력을 이어가기 위해 협조했다. 어떤 식으로든 그 시대에는 중간 지대란 존재할 수 없었고,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해야만 했다. 무수한 인명 피해를 내는 무기 밀매를 하면서 프랑스 군와 아랍 게릴라 사이에서 생존을 모색했던 '해리'라는 캐릭터는 박쥐와도 같은 회색 분자나 다름없었다. 배신자, 변절자는 처단해야 마땅한 존재였다. 결국 해리는 자신들의 존재를 밀고할까 두려워하는 아랍 세력 측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익에 따라 그 누구와도 협력했던 '카사블랑카'의 닉에게 허용되었던 관용이 해리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시로코'의 페로 대령으로 나왔던 리 J. 콥은 영화 '패션 전쟁'에서 이윤에 눈이 먼 악덕 기업가 월터 역으로 나온다. 영화 '워터프론트(On the Waterfront, 1954)'의 패션 업계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로버트 알드리치가 영화 촬영 도중 제작사 컬럼비아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것으로도 유명한 영화이다. 영화를 좀 더 부드럽고 등장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로 끌어가기를 바랬던 제작자 해리 콘과의 극심한 갈등은 알드리치의 하차로 이어졌다.


  알드리치는 노조 탄압을 위해 폭력 조직과 손을 잡는 사업가와 의류 산업계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영화 제작 과정에서 늘 강한 목소리를 냈던 컬럼비아의 창업주 해리 콘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알드리치 대신에 투입한 셔먼의 '패션 전쟁'은 월터와 노조와의 투쟁 보다는, 월터의 아들 알란과 노조 지도자의 미망인 테레사의 관계가 더 부각되었다. 알란 역을 맡은 배우 커윈 매튜스는 컬럼비아 소속의 신인 배우로 컬럼비아에서 밀고 있는 배우이기도 했다. '워터프론트'가 보여주었던 사회적인 메시지는 '패션 전쟁'에서는 좀 더 희석되었다. 매우 현실타협적인 이 영화에서 부도덕한 사업가와 그가 손잡은 갱의 우두머리는 처벌받는다. 빈약한 서사와 신인 배우들의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한 연기는 이 영화가 '워터프론트'의 작품성과 흥행 성공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음을 입증한다.

  1950년대에 제작된 두 편의 영화, '시로코'와 '패션 전쟁'은 흥행에 성공한 앞선 영화들을 모방했다. 플롯과 캐릭터의 유사성을 최대한 강조함으로써 관객들의 기호를 맞추려고 애썼다. 그러나 독창성과 예술성이 결여된 모방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그럼에도 두 영화는 헐리우드의 흥미로운 자기 복제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관객들은 이 글에서 언급한 세 편의 영화에 나온 리 J. 콥의 다양한 연기도 볼 수 있다. '워터프론트'에서 그는 부두의 무법자 조니 프렌들리를 연기한다. 그 영화의 감독은 엘리아 카잔, 그는 공산주의자 동료들을 적극적으로 밀고하며 헐리우드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했다. 그런 카잔과 함께 작업하면서 리 J. 콥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슬프고 늙은 Bogie를 볼 수 있었던 '시로코'의 서늘한 결말 또한 그 시기의 미국 사회를 보여준다. 이렇듯 두 영화 속에는 제작 당시의 시대적인 사건과 분위기, 제작사와 감독과의 갈등, 배우의 개인사가 들어있다.



*사진 출처: en.wikipedia.com  배우 Lee J. Cobb


**사진 출처: tc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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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앳된 얼굴의 소녀가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15살 와카에는 주정뱅이 아빠와 계모가 있는 집이 싫다. 밀린 공납금을 내라는 채근 때문에 학교에 가는 것도 내키지 않는다. 여인숙을 하며 뚜쟁이 노릇을 하는 고모는 와카에를 일꾼으로 부려먹으며 게이샤로 만들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 와카에를 유일하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은 착한 동네 오빠 사부로다. 21살의 사부로는 도쿄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 때려치우고 고향 호쿠리쿠로 돌아왔다. 와카에의 딱한 상황에 연민을 갖게 된 사부로는 학업을 이어가라며 공납금도 보태주고 공부도 도와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직업도 없고 불안정한 처지의 사부로도 마음이 힘들기는 마찬가지. 와카에와 사부로는 각자의 삶의 길을 잘 찾아갈 수 있을까?

  우라야마 키리오(浦山桐郎) 감독의 1963년작 '비행소녀(非行少女)'는 2개의 영어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일본 사이트에서는 'Each Day I Cry'로 병기하고 있고, 해외 사이트에서는 'Bad Girl'로 검색된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면 'Bad Girl'의 영어 제목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 와카에(이즈미 마사코 분)를 '비행소녀'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병마로 일찍 세상을 뜬 어머니, 그 슬픔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와카에의 현실은 비참하기만 하다. 술꾼 아버지는 돈이나 벌어오라며 내몰고, 뚜쟁이 고모와 마을 야쿠자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와카에를 이용해 먹을 궁리만 할 뿐이다. 음주와 흡연, 상습적인 도벽을 가지고 있는 와카에의 모습은 불행한 환경에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엇나가는 소녀에 가깝다.

  사부로(하마다 미츠오 분)는 와카에를 올바른 길로 이끄려고 애를 쓰지만, 사부로의 처지도 괴롭다. 참의회 의원으로 입후보해서 한창 선거운동 중인 형은 사부로를 한심하게 생각한다. 형에게 게으르고 쓸모없는 놈으로 취급받지만, 사부로에게도 형은 속물적이고 위선적인 존재다. 마을 사람들이 합심해서 일으켰던 시위에서 그의 형은 방관자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출세를 위해 정치인으로 나서려고 하는 모양새가 영 마뜩잖다. 이 영화에서 기록 영화의 한 장면으로 나오는 그 시위는 1952년에 일어났던 '우치나다 투쟁(内灘闘争)'이다. 한국 전쟁으로 포탄 수요가 늘어나자 미군은 해안 사구가 있는 우치나다에 포탄 사격 시험장을 만든다. 그에 반대한 마을 주민들은 1952년부터 1957년까지 철거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우치나다의 주민들은 물론이고 일본 내의 시민, 정치 단체들이 집결한 총력적인 투쟁이었다. 결국 미군은 사격 시험장을 철거했다. 일본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한 미군 기지에 대한 반대의 움직임이 처음으로 거둔 성과였다.

  영화 속에서 '우치나다 투쟁'이 비록 삽화적 기억으로 언급된 사건이기는 해도, 감독 우라야마 키리오는 풋풋한 사랑 이야기 속에 일본 사회의 내면을 투영시킨다. 영화는 사부로가 집에 들어오면 보게 되는 형의 선거운동을 여러 장면으로 넣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음식과 술 접대를 하며 혈연과 지연에 호소하는 형은 결국 참의원에 당선된다. 실제로 1953년에 우치나다의 참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은 미군 기지 철거를 외친 후보가 아니라 백화점을 소유한 돈 많은 지역 유지였다. 그것은 외적으로는 외세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준 일본 사회가 내부적으로는 끈끈한 가족주의의의 그림자에 매여 있음을 입증한다. 기회주의자로 묘사된 사부로의 형은 당시의 기성 세대를 대변한다. 그들은 전후 혼란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사부로와 같은 젊은 세대에게 변혁의 이상을 설파하기 보다는, 사회로의 빠른 정착과 체제 순응을 요구했다. 그러므로 사부로의 형은 사부로에서 실제적인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벌라고 야단친다. 사부로는 형에게 반발해서 집을 뛰쳐나가도 봤지만,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술집의 웨이터였을 뿐이다. 결국 사부로는 동네 양계장의 관리인으로 취직한다.

  와카에는 사부로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부로는 책임을 질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안다. 돈을 벌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 와카에와 결별을 택하지만, 와카에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결국 와카에가 실수로 양계장에 일으킨 방화는 두 사람을 더 멀어지게 만든다. 와카에는 교화원으로, 사부로는 기술 직업 학교로 간다. 재봉일을 배우며 진정한 자립과 갱생을 위해 노력하던 와카에는 오사카의 일자리를 소개받고 떠나려 한다. 그런 와카에를 사부로가 붙잡는다. 와카에는 어떤 선택을 할까?

  영화의 원작은 모리야마 케이가 쓴 소설 '사부로와 와카에', 부제는 '푸른 구두(青い靴)'이다. 영화 초반부에 와카에는 술집 여종업원의 하이힐 구두를 훔친다. 멋진 구두를 신고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했던 와카에는 오사카로 떠나는 길에 그 구두를 강물에 내던진다. 괴롭고 힘든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와카에를 태운 오사카행 기차는 끝없이 이어지는 선로를 달린다. 비행소녀에서 진정한 어른으로 향하는 그 여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영화는 말해주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와 슬픔을 딛고 용기있게 일어서는 와카에의 모습에서 관객은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긴다. 그것은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일어서는 것이며, 결코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 그 모든 것과 직면함을 의미한다. 그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매일 울었던 와카에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우라야마 키리오는 15살 소녀의 재생을 위한 고통스러운 마음의 여정을 '비행 소녀'에 담아냈다. 관객은 그 여정 속에서 전후 혼란기의 상처를 봉합하고 현실에 매진하는 일본 사회의 단면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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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blog.cinema1900.yokohama 와카에와 사부로를 연기한 이즈미 마사코와 하마다 미츠오. 와카에를 연기한 이즈미 마사코의 당시 나이는 열 다섯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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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음악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의 초연은 1913년 5월, 파리에서였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안무와 생소하기 짝이 없는 음악에 관객들은 극심한 반감을 표출했다. 관람을 했던 비평가의 기록에 따르면 관객들은 '던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무대로 내던졌다'고 했으며, 분노에 휩싸인 이들의 난동으로 경찰이 출동해서 40명에 이르는 이들을 쫓아내야만 했다. 마니 카울(Mani Kaul) 감독의 1969년작 '그의 로티(Uski Roti, A Day's Bread)'를 보고 나서, 나는 '봄의 제전' 초연 때의 파리 관객들을 떠올렸다. 아마도 이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 본 인도 관객들의 반응도 그에 못지 않았을 것 같다. 영화를 본 어느 인도 의회 의원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라고 혹평했다. 대중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도 없고, 아무 재미도 느낄 수 없는 이 영화에 국가의 세금이 지원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그랬을까?

  '그의 로티'는 인도 작가 모한 라케시의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버스 운전사 수차 싱의 아내 발로는 매일 남편의 먹을 거리 로티(인도의 빵)를 만드는 것을 중요한 일과로 여긴다. 남편은 아내가 있는 시골 마을에 정차할 때 그 빵을 가져가는데, 발로는 매일 먼 거리를 걸어와서 정류장에서 남편을 기다린다. 어느 날, 아내가 늦게 와서 빵을 받아가지 못하자 수차 싱은 화를 낸다. 도시에서 방을 얻어 사는 그는 1주일에 한 번 아내를 찾아오는데, 그것도 발을 끊겠다고 말한다. 내연녀를 두고 도박이나 일삼는 남편이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발로. 밤늦게까지 로티를 가지고 버스 정류장에서 남편을 기다린다.

  "나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에 반대한다."
 
  25살의 마니 카울은 기존의 영화 문법과 관습 전부를 배반하기로 결심했다. 우리가 흔히 '영화'가 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소들, 또는 '영화'가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것들을 젊고 야심만만한 신인 감독은 내던져 버렸다. '그의 로티'를 보는 관객들은 분절되고 파편화된 이미지들, 시간 순서를 무시하는 서사, 때론 제각각인 장면의 속도를 견뎌야만 한다. 관객들은 발로의 마음 속 불안과 고통, 걱정이 만들어낸 환영들을 보게 된다. 거기에는 '조화'나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신체의 일부분, 특히 '손'을 몽타주로 편집한 장면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마니 카울이 로베르 브레송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브레송의 '소매치기(Pickpocket, 1959)'에서 손이 영화의 서사 그 자체가 되는 것에 카울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로티를 만드는 발로의 손, 자신의 머리와 수염을 정리하는 수차 싱의 손, 그의 외투에서 돈을 빼가는 내연녀의 손, 이 밖에도 이 영화에서는 여러 다양한 '손'의 활약을 볼 수 있다.

  마니 카울은 이 영화에서 자신이 이야기를 듣고 떠올린 이미지를 마치 그림을 그리듯 한 장씩 보여주는 것을 원했다. 그가 재현한 머릿 속의 이미지들은 사실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영화가 보여주는 방식, 즉 배우들과 그들이 나누는 대사,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카메라의 원근법이 존재하는 영화와는 전혀 다르다. 그런 이유로 '그의 로티'의 내러티브는 기존의 영화 문법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매우 낯설고, 기이하며, 이해하기 어렵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이 영화는 마치 끊임없이 관객들로부터 서사를 격리시키는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므로 관객은 영화가 만들어낸 서사의 거리를 어떤 식으로든 메꾸어야하는 짐을 짊어지게 된다.

  이 난해하기 짝이 없는 영화적 실험에 동시대의 관객들은 냉담했다. '그의 로티'는 인도 영화 산업의 육성을 위해 만들어진 정부 기관 FFC(Film Finance Corporation)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는데, 대중성이 결여된 이 작품에 '세금 낭비'라는 일반의 비난이 쏟아진 것은 당연했다. 오히려 카울이 보여준 새로운 영화 문법에 주목한 이들은 서구의 비평가들이었다. 이 영화가 던지는 근원적 질문, 즉 '과연 영화적인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카울이 제시한 답에 시간이 갈수록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였다.

  리트윅 가탁(Ritwik Ghatak), 사티야지트 레이(Satyajit Ray)로 대변되는 인도 평행 영화(Indian Parallel Cinema, 1950년대에 주류 상업 영화인 볼리우드를 거부하면서 일어난 새로운 영화 운동)에서 마니 카울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색채를 보여준다. 그는 사실주의적인 영화 문법을 거부하고, 그것에 균열을 일으키고 흔드는 것에 흥미를 가졌다. '그의 로티'가 좋은 영화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그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엉성하고 조악한 내장재로 지어진 건물 같은 이 영화는 분명히 '새로운 그 어떤 것'이다. 감독 마니 카울은 관객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그의 로티'의 관객들은 이 영화에 접근할 자신만의 모험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지루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미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screendaily.com


**사진 출처: pintere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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