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샨 마카베예프(Dušan Makavejev) 감독의 'WR: 유기체의 신비(W.R.-Misterije organizma, 1971)'를 영화사 교과서에서 글로만 보았던 적이 있다. 그 시절에는 희귀한 예술 영화 자료들은 구하기가 힘들어서, 책 속에서 영화 제목을 읽고 마치 신화 속의 황금 양털을 상상하듯 그렇게 생각만 했었다. 이제는 그 영화를 보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는데도, 영화를 보려는 마음이 나지 않는다. '저주받은 걸작', 시놉시스만 봐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영화, 아마도 'WR: 유기체의 신비'는 영화 보기의 전위적 모험을 하려는 사람에게 적합한지도 모른다. 그럼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데뷔작은 어떨까? '인간은 새가 아니다(Čovek nije tica, Man Is Not a Bird, 1965)'는 의외로 점잖다.

  마치 제정 러시아 말기의 혹세무민의 상징이었던 수도승 라스푸틴을 연상케 하는 최면술사의 등장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그는 관객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최면술' 공연을 하고 있는 참이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서사 구조에서 벗어나 있다. 주된 플롯이 광산 마을 보르(Bor)에 파견된 발전기 엔지니어 루딘스키와 젊은 여성 라이카의 연애담이라면, 하위 플롯으로 무식하고 천박한 공장 노동자 바르뷸로빅과 아내의 이야기가 자리한다. 거기에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촬영된 공장의 모습과 노동자들의 일상, 황량하고 건조한 광산 마을 일대의 풍경, 마을을 방문한 서커스 장면들이 중간 중간 들어가 있다. 이런 서사의 불균일성은 관객에게 낯설음과 불편함을 선사하지만, 소화못할 정도는 아니다.

  1960년대를 휩쓸었던 새로운 영화 사조 누벨 바그(Nouvelle Vague)는 동유럽 국가 유고슬라비아에도 도착했고, 그것은 'Black Wave'로 탄생했다. 개인주의적인 경향, 정부에 대한 비판적 성향을 지닌 영화 창작의 흐름에 두샨 마카베예프도 동참했다. '인간은 새가 아니다'를 통해 마카베예프는 자신만의 영화 문법을 제시한다. 다다이즘(Dadaism)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은 최면술사의 공연 장면을 비롯해, 마을 주변부의 황량한 풍경을 촬영한 것에서 엿볼 수 있다.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 풍경처럼 보이는 갈라진 진흙길을 걷는 연인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선전 도구로 제작된 노동자의 커다란 손들이 그려진 공장 벽의 걸개 그림과 제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에서는 네오 리얼리즘(Neorealism)이 보인다. 마카베예프는 거기에 통속적인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를 끼워 넣는다. 촌스럽다고 생각될 정도의 극적인 영화 음악이 등장할 때는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광산 마을에 발전기 설비 제작을 위해 잠시 파견된 중년의 엔지니어 루딘스키는 동네 이발소의 매력적인 아가씨 라이카의 구애를 받는다. 루딘스키는 처음에는 그 접근을 거부하지만, 결국 라이카와 연인 사이가 된다. 한편 공장의 일꾼 바르뷸로빅은 음주와 불륜 문제로 아내에게 고통을 준다. 루딘스키가 이끄는 설비팀은 성공적으로 공사를 마치고, 정부에서는 그 공로로 훈장을 수여하고 축하 음악회까지 열어준다. 라이카는 곧 떠날 루딘스키를 버리고, 트럭 운전 기사 보리스와 사귄다. 루딘스키는 라이카에게 분노하지만, 늙은 남자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아니, 이런 줄거리로 러닝 타임 81분을 어떻게 채우는가 궁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파편화된 내러티브들로 매우 산만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마카베예프와 영화 제작팀은 영화 제작 전에 광산 마을에 머물면서 다양한 주민들의 실제 삶에 대한 이야기를 취재했다. 마카베예프는 거칠고 팍팍한 하층 노동자들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노동력을 쥐어짜내기 위해 국가의 정치적인 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국가는 계속적인 프로파간다로 노동자를 산업 역군으로 치켜세우지만, 그들의 실제 삶은 음주와 폭력, 태업과 절도(공장에서 철근을 훔쳐내는 장면이 나온다)로 채워져 있다. 또한 노동자라고 다 같은 노동자가 아니다. 고급 엔지니어 루딘스키의 노동은 국가의 인정을 받고 치하의 대상이 된다. 그의 훈장 수여식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4악장 '환희의 송가'는 기묘한 이질성을 풍긴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의 송가'는 전 인류의 화합과 단결을 촉구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평등하다고 외치는 이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엄연히 불평등과 차별이 존재한다. 마카예프가 영화 속에서 등장시킨 최면술사와 서커스 공연은 그런 현실로부터 노동자들을 차폐시키고 사회주의의 환상 속에 가두는 국가 권력의 기만성을 상징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우리말로 '남자는 새가 아니다'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Man을 '사람'이 아닌 '남자'로 번역한 명백한 오역이다. 영화에서 설비 작업 도중 공중에 걸린 밧줄 사다리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인부를 보고 루딘스키가 소리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은 새가 아니라구!' 루딘스키의 말은 마치 국가가 노동자들에게 강제하는 명령처럼 들린다. 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을 버리고, 지상에서의 노동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땅에 매인 노동자의 삶에서 탈출과 비상은 허락되지 않는다. 마카베예프는 그런 현실에서 성 정치학을 반영한 영화로 새로운 출구를 꿈꾸었다. '인간은 새가 아니다'는 마카베예프의 첫 영화적 비상(飛翔)으로 이후에 이어질 그의 영화 여정에 대한 여러 단서들이 내포되어 있다. 
  


*사진 출처: janusfilm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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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슈가랜드 특급(The Sugarland Express, 1974)'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의 미국 영화를 관통하는 소재가 있다면 아마도 '자동차'일 것이다. 몬티 헬만의 '자유의 이차선(Two-Lane Blacktop, 1971)', 조지 루카스의 '청춘 낙서(American Graffiti, 1973)'에서 차는 영화를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 시절의 자동차가 등장하는 영화들을 보면, 그것이 미국인들에게 자유와 정체성 그 자체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장편 영화 데뷔작 '슈가랜드 특급(The Sugarland Express, 1974)'에도 차가 나온다. 경찰차 박람회장이라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기동순찰대 차량이 등장한다. 그뿐인가? 경찰을 인질로 삼은 납치범들을 취재하기 위한 방송용 차량, 그들을 구경하기 위해 나온 시민들의 차도 있다. 스필버그는 아예 중고차 판매장을 불꽃튀는 총격전의 장소로 선택했다. 이 영화에는 차가 너무 많이 나온다. 주인공이 면회하러 온 동료 죄수 부모의 고물차를 타고 감옥에서 도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의 죽음까지, 영화는 차에서 시작해 차에서 끝난다.   

  절도 혐의로 감옥에 있다가 풀려난 루(골디 혼 분)는 어린 아들을 아동보호국에서 데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출소를 4개월 앞둔 남편 클로비스(윌리엄 애서튼 분)를 찾아가 아이를 되찾아 와야 한다며 탈옥을 부추긴다. 차를 탈취해 경관을 인질로 잡고, 아들이 있는 슈가랜드로 향하는 이 어중띤 납치범 부부는 곧 경찰과 언론의 추적 대상이 된다. 그 와중에 보니와 클라이드의 마일드 버전 같은 납치범 부부와 인질 슬라이드 경관(마이클 삭스 분)은 마음을 터놓는 친구 사이처럼 되어버린다. 경찰 추적팀을 이끄는 온화하고 합리적인 태너 반장(벤 존슨 분)은 어떻게든 인명 피해를 막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어설픈 납치범 부부에게 파국의 시간은 점점 다가온다.

  반짝반짝 빛나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지닌 루 역의 골디 혼은 영화 내내 안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버적거리는 소리를 낸다. 스물 일곱 살 초짜 감독 스필버그가 배우들의 연기 지도에 애를 먹었다는 티가 역력히 난다. 주로 코미디 영화에서 두각을 보여주었던 골디 혼에게 이 영화는 의외의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골디 혼은 몸부림을 쳐가며 자신의 역을 해낸다. 4개월만 참으면 풀려날 남편을 꼬드겨 탈주범으로 만드는 루의 무모함과 충동적인 기질은 사악하게까지 보인다. 이 철없는 여자는 아이를 되찾아야 한다는 모성애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매우 이기적이며 분별력이 없는 자기애(自己愛)와 다를 바 없다. 도주 행각 중에도 골드 스탬프(Texas Gold Stamps, 텍사스 지역에서 발행되던 일종의 상업적 할인 쿠폰)를 악착같이 그러모으는 것이며, 외모 치장을 위해 헤어스프레이와 립스틱을 사는 모습은 루의 철없고 정신 나간 모습을 부각시킨다. 이 여자는 결국 남편을 죽음으로까지 내몬다. 아들이 입양된 집에 도착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저격수들이다. 낌새를 눈치챈 슬라이드는 나가서는 안된다고 말리지만, 루는 클로비스에게 아들을 되찾아 오라고 성질을 피운다. 그리고 클로비스는 총에 맞아 죽는다.

  1969년에 있었던 실제 사건 속의 아내 일라 페(Illa Fae)는 남편의 도주를 부추기지 않았다. 친정에 있는 아이들을 보러 가던 부부는 경찰의 예기치 않은 검문에 당황해서 경찰을 인질로 잡고 추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남자는 아이들이 있는 여자의 부모 집에 도착하자마자 사살되었고, 여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슈가랜드 특급'은 실화의 많은 부분을 변형시키고 왜곡했다. 언론의 광적인 보도 행태, 범죄자를 미화하며 영웅과 동일시하는 군중 심리, 공권력을 대신해 자신들의 손으로 탈주범을 처단하겠다는 자경단의 광기, 그 모든 것들이 사건에 덧입혀졌다. 철저히 스필버그의 상업적인 감각으로 선별된 그런 장식 쪼가리들은 정교하게 구현된 차량 스턴트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여기에 문제의 발단이 된 영화 속 여성 루에게 비난과 책임을 몰아넣는 오명도 씌운다.

  루가 보여주는 즉흥성, 무분별함, 비도덕성과 대비되는 캐릭터는 경찰 추격팀을 이끄는 태너 반장이다. 주로 서부극에서 연기한 벤 존슨이 보여주는 무게감 있고 강단 있는 18년 경력의 경찰 태너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재직 중에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그는 루와 클로비스의 목숨을 살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가 보여주는 직업적 윤리와 강직함, 합리적인 태도, 온정과 연민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모습은 미국이 지향하는 시민으로서의 이상을 보여준다. 그는 방향을 잃은 납치범들의 멘토에서 더 나아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도주 중인 루에게 경찰은 루의 아버지를 데려가 무전으로 회유 방송을 하게 한다. 말할 기운도 없어 보이는 너무나 늙은 부친은 딸을 향해 무전 방송을 하지만, 치킨 사러 나간 딸은 듣지 못하고 차에 있던 슬라이드가 듣는다. 수갑을 찬 채로 구금 중이던 그는 돌아온 루에게 무전기를 꺼달라고 말한다. 더이상 아버지, 국가 권력으로 대변되는 목소리는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그것은 1970년대의 미국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반복되는 석유 파동, 달러화의 약세 속에서 이어진 경제 침체와 더불어 포드와 카터로 이어지는 정권은 유약한 모습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미국의 중산층은 점점 보수 쪽으로 기운다. 허약해진 미국을 다시 되살릴 정치 권력, 지도자에 대한 열망은 레이건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그의 선거 문구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은 그러한 1970년대를 지나오면서 분출된 보수의 목소리였다.

  영화의 마지막, 태너는 클로비스의 죽음을 확인하고 허리춤에서 피범벅이 된 권총을 빼낸다. 그 총은 클로비스가 슬라이드에게 뺏은 총이었다. 피를 닦아 낸 총을 슬라이드에게 건네주는 태너는 납치범들에게 동화된 경관에게 다시금 직업적 의무와 윤리를 일깨운다. 영화 초반부에 잡범을 검거해서 순찰차에 태우고 심문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었듯 슬라이드는 매우 깐깐하고 직업 의식이 투철한 경찰이다. 그런 슬라이드에게 태너는 권위와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대선배, 미국의 아버지로서 비춰진다. 그가 대변하는 모범적 부성은 미국의 보수적 가치와 정확히 부합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스필버그의 영화 세계를 이루는 주축이 된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의 톰 행크스가 연기한 존 밀러 대위를 떠올려 보라. 그가 보여준 도덕성과 인간성은 라이언 일병에게 생의 귀감이 된다. 완벽한 부성에 대한 열망, 가족과 국가를 지키는 가부장의 서사, 이것은 '우주 전쟁(2005)'에서도 재현된다. 여기에서 톰 크루즈는 외계인에 맞서 딸을 지켜낸다. 이 영화 속 아버지 레이는 생활력이 없어서 이혼당한 별 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딸을 구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무사히 구해낸 딸을 아내에게 데려다 주고, 그는 집 밖에 서있다. 비록 딸을 생환시켰음에도, 그는 그 과정에서 손에 피를 묻혔고 그런 하자 있는 부성은 집으로 귀환할 수 없다. 그것은 존 포드의 '수색자(1956)'의 결말에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존 웨인을 떠올리게 만든다.

  미국의 영화 평론가 폴린 카엘은 이 영화를 일컫어 '영화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데뷔작'이라고 극찬했다. 나는 거기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이 영화는 아주 잘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well-made film'이 좋은 영화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슈가랜드 특급'은 영화 속 황량한 텍사스 도로처럼 텅 비어있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1970년대 미국의 내면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스필버그의 이 영화에는 깊이있는 성찰 대신에 철저히 상업적인 마인드와 보수적인 미국의 가치가 투영되어 있다. 1974년, 미국은 이제 자신들의 영화 산업적 역량을 극대화시킬 감독을 하나 얻은 참이었다. 번지르르한, 그렇지만 그 속은 공허한 데뷔작, '슈가랜드 특급'에는 그런 양면성이 존재한다.        
 
 
*사진 출처: bostonhass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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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거 쓰면, 읽을 사람은 있어?"

  안데르스의 여자 친구가 그렇게 묻는다. 여자 친구 엘지는 이웃에 산다. 허름한 빈민가 공동 주택에서 사는 안데르스에게는 알콜 중독자 아빠, 세탁부로 생계를 유지하는 엄마가 있다.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진 그는 틈만 나면 글을 쓴다. 책상도 없는 그는 식탁을 창가로 끌어다 서재를 대신해 거기에서 글을 쓴다. 안데르스에게는 오직 글만이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기댈 수 있는 희망의 빛이다. 쓴 글을 출판사들에 보내고 답신을 기다리는 것이 일과인 그에게 어느 날, 스톡홀름의 출판사에서 답장이 날아든다.

  영화 '엘비라 마디간(Elvira Madigan, 1967)'으로 잘 알려진 보 비더버그 감독의 '콜펜 마을에서 생긴 일(Kvarteret Korpen, Raven's End, 1963)은 하층민 청년의 자아 찾기를 그린다. 흑백으로 촬영한 이 영화는 1963년에 제작한 그의 두 번째 작품이다. 역시 같은 해 만든 첫 영화에서 함께 작업했던 배우 토미 베르그렌이 안데르스 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이 작품은 종종 감독 자신의 자전적 요소가 반영된 영화라고 알려져 있지만, 보 비더버그는 그에 대해 부인했다. 오히려 안데르스 캐릭터의 유사성은 그 역을 연기한 토미 베르그렌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하층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다. 자신의 삶과 비슷한 배역이어서 그랬을까? 베르그렌은 신인이었음에도 아주 안정적이고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의 배경은 1936년의 스웨덴의 말뫼, 안데르스의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온다. 전단지 돌리는 일이라도 하라고 아내는 다그치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별로 없다. 이 가족은 세탁부로 일하는 엄마가 벌어오는 돈으로 겨우 먹고 살아갈 뿐이다. 안데르스는 자신이 잘 하고,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인 글쓰기에 몰두한다. 축구 선수인 그의 절친한 친구 식스텐은 출세해서 파리의 매춘부를 만나는 것이 꿈이지만, 안데르스는 작가가 되고 싶다. 변함없는 지긋지긋한 일상, 공동 주택 앞의 공터에는 선거 유세 방송으로 시끄럽다. 출판사에서 날아온 답장에 잔뜩 기대를 걸고 스톡홀름을 방문했지만 뜨뜻미지근한 답변에 안데르스는 실망한다. 글쓰기도 시들해지던 안데르스에게 여자 친구 엘지는 임신 소식을 알린다. 안데르스는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갈까?

  되는 일은 하나도 없는 이 괴로운 청년은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서 무슨 쓸모있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자포자기한 상태로 살아온 무기력하고 한심한 가장은 자기 변명으로 일관한다.

  "난 가라앉고 있어. 삶을 견디기 위해 잠수종(潜水鐘, diving bell)에 들어가는 거야. 늘 그래왔다구."

  안데르스는 비좁은 집도, 부모도, 여자 친구도 넌더리가 난다. 마음 둘 데 없는 불운한 청춘은 괴롭기만 하다. 안데르스만 길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의 스웨덴의 상황도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전세계로 확장되었고, 스웨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층민과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보 비더버그는 이 영화에서 선거와 정치를 비중있게 다룬다. 영화 초반부에 히틀러의 연설 방송이 들린다. 스웨덴 선거에서 나치 당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우파 정당이었던 농민당은 히틀러의 이념과 노선에 경도되어 있었다. 1932년의 선거에서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좌파 정당 사민당이 승리하기는 했지만, 정치적으로 확실한 우세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 보이는 1936년의 선거는 사민당과 스웨덴의 운명을 가르는 선거이기도 했다. 안데르스가 엄마에게 히틀러 추종자가 의회에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투표를 독려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콜펜 마을에서 생긴 일'은 혼란의 시대 속, 방황하는 청춘들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 안데르스를 비롯해 여자 친구 엘지, 식스텐에게 현실은 출구없는 복도 같다. 빈곤에 허덕이면서 그저 삶을 견딜 뿐이다. 그런 현실에서 안데르스의 아버지는 술에 절어서 인생을 회피하면서 살아왔다. 아들은 잠수종의 삶을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는 아버지처럼 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어떻게 이 진창과도 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무겁고 암울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영화에 쓰이는 음악은 매우 경쾌하고 아름답다. '엘비라 마디간'에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썼던 비더버그의 음악적 안목은 이 영화에서부터인지 모른다. 바로크 시대 이탈리아 작곡가인 주세페 토렐리(Giuseppe Torelli)의 '트럼펫 협주곡 D장조'가 주요한 장면에서 흐르는데, 이 밝은 곡은 영화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안데르스는 작가가 되었을까? 영화는 안데르스의 청춘에서 멈춘다. 나는 그가 작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응시하는 사람, 인생을 견디기 위해 그것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 작가란 그런 사람이다. 매력적인 서사와 동적이고 감각적인 촬영이 돋보이는 '콜펜 마을에서 생긴 일'은 1995년에 스웨덴 관객들이 뽑은 역대 최고의 스웨덴 영화였다. 잉그마르 베르히만은 서운했을까? 그 또한 이 영화를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다. 영화 속 주인공 안데르스와 함께 보 비더버그를 영화 작가로 탄생시킨 영화였다.



*사진 출처: avxhm.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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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닌그라드의 명망있는 과학자 스레텐스키 교수의 일상은 단조롭다. 오직 연구에만 시간을 쏟는 그에게 그나마 말 상대가 되어주는 이는 무뚝뚝한 성격의 가정부 엘자이다. 여느 날처럼 엘자가 차린 저녁을 먹고 있는 교수의 집에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아가씨가 들어온다.

  "난 아빠의 딸 타샤에요. 엄마가 그러는데, 아빠가 대학 시험 준비를 도와줄 테니 가보라고 하더군요. 앞으로 이 집에서 살려구요."

  결혼한 지 1년 만에 헤어진 아내는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딸은 아내가 키웠는데, 그 딸 타샤가 그를 찾아온 것이다. 이 제멋대로인 딸은 스레텐스키 교수에게 커다란 숙제처럼 느껴진다. 시험에 실패하고 돌아가는 딸과의 짧은 만남 이후, 교수는 다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몇 년 후, 그 딸은 다시 아기를 안고 찾아온다.

  "아빠, 난 새로운 사랑을 찾았어요. 아기는 여기다 두고 갈게요. 아빠는 잘 키울 수 있을 거에요."

  그렇게 골때리는 딸 타샤는 교수에게 손녀딸 니나를 안겨주고 떠난다. 세월이 흐르고, 니나는 멋진 아가씨로 자란다. 스레텐스키 교수는 이제 연구는 접고 은퇴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젊고 야심에 찬 과학자 코티코프는 교수의 이전 연구가 매우 가치가 있으니 후속 연구를 해보자며 제안한다. 그 즈음, 남편과 헤어진 타샤가 다시 찾아온다. 교수의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에는 예기치 못한 흔들림이 이어진다.

  일리야 아버바크(Ilya Averbakh) 감독의 1972년 영화 '독백(Монолог, Monologue)'은 평생을 과학 연구에만 헌신한 노교수의 삶의 이면을 들여다 본다. 모스필름, 고리키 필름 스튜디오와 더불어 소련의 3대 국영 영화사 가운데 하나였던 '렌필름(Lenfilm)'에서 제작한 이 영화는 소련 영화에서는 드문 심리 드라마를 보여 준다. 매우 조용하고 건조하게 흘러가는 서사는 익숙지 않은 방식으로 관객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면, 스레텐스키 교수와 타샤가 기차역에서 이별하는 장면에 바로 뒤를 이어 타샤가 아기를 데리고 등장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 그렇다. 이 영화에서 시간은 별로 명확하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된다. 아기였던 니나는 16살의 생일 파티 때 소녀의 모습으로 어느새 나타나고, 타샤는 등장할 때마다 이혼과 재혼 같은 삶의 새로운 사건을 몰고 온다. 그런 외부의 변화와는 달리 교수의 옷차림이나 외모는 거의 변한 것이 없다. 흰머리도 별로 늘어나지 않았고, 늘 입는 갈색의 양복은 마치 교수의 하나뿐인 외출복처럼 보일 정도이다.

  아버바크 감독은 '독백'의 서사적 구획을 교수의 유일한 취미인 조립 모형 장난감을 번갈아 비춰주는 것으로 대체한다. 칼싸움을 하는 구식 병정, 코끼리에 탄 전사, 낙타와 유목민, 다양한 모습의 소형 장난감들은 교수가 천착하는 연구와도 같이 내면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을 조립하고 바라보면서 보내는 평화롭고 충만한 시간과는 달리, 교수가 가족과 맺는 외적 관계는 끊임없이 물결이 일렁인다.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며 툭하면 남자를 갈아치우는 타샤는 딸로서도, 엄마로서도 낙제점이다. 16년 동안이나 자신을 대신해 니나를 키워준 교수에게 애를 버릇없이 키웠다며 비난을 퍼붓는다. 새 남편과 결혼해 아빠 집에서 얹혀 살면서도 미안한 기색은 조금도 없다. 이 뻔뻔하고 이기적인 딸에게 스레텐스키 교수는 한결같은 인내와 사랑을 보여준다. 그의 이런 태도는 손녀딸 니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가정사의 어려움 속에서도 스레텐스키 교수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과학 연구에 대한 집념과 헌신이다. 학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명성을 얻었음에도 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진실 추구라는 과학자의 본분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남들은 현업에서 은퇴해 평안한 노후를 보낼 때에 교수는 후배 과학자와 새로운 연구에 몰두한다. 교수는 직설적이고 외골수인 후배 코티코프를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포용력도 가지고 있다. 그의 연구 주제가 가진 혁신성 때문에 연구소 측과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마침내 원하는 연구 결과를 얻고 명성은 더 커져간다. 그러는 동안, 손녀딸 니나의 연애 문제가 교수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이별로 아파하는 손녀딸을 위로하지만, 손녀딸은 꼴도 보기 싫다며 폭언을 퍼붓는다. 그는 충격을 받고 인생의 허망함을 느낀다.

  그는 바람 불고 스산한 레닌그라드의 네바 강가와 거리를 하릴없이 헤맨다. 영화 제목 '독백'은 교수의 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 최선을 다했지만, 자신이 가깝다고 생각한 가족의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했던 교수의 쓸쓸하고 공허한 내면에는 오로지 혼잣말이 가득할뿐이다. 과학이라는 진리 추구의 세계에서 살아온 그는 세상과 인간사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연애를 시작한 손녀딸에게 '남자를 조심하려므나'라든가, 이별에 대한 위로도 '시간이 가면 다 잊혀질 거야'라는 평범하고 뻔한 조언을 해줄 수 밖에 없다. 그런 그가 보여주는 인간 관계에서의 순진함과 미숙함은 상처와 고통으로 돌아온다. 그가 유일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존재는 홀로 헤매다 어스름이 깔린 공원에서 보게 된 14살 때 첫사랑의 환영
()이다. 그는 비로소 응어리진 마음 속 외로움과 슬픔에 대해 털어놓는다.

  영화 '독백'은 학문적인 업적을 쌓은 노교수의 개인사를 통해 관객에게 삶의 의미를 묻는다. 어떤 식으로든 인생의 진실을 보여주는 영화는 좋은 영화이다. 과학자로서 쌓은 명성과 지위, 그럼에도 한 인간으로서는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고 고독한 내면에 유폐된 교수는 누군가의, 또는 우리 자신의 초상이기도 하다. 과연 인간은 타인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소통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인생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일리야 아버바크 감독이 레닌그라드의 풍경 속에 풀어놓은 고독한 노교수의 이야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내면과 인생을 응시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kino-teatr.ru  스레텐스키 교수 역의 미하일 글루즈스키, 그가 이 영화를 찍을 당시의 나이는 54세였다. 자신 보다 더 나이 든 연배의 노교수 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다음 글은 화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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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수록 오래전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 난다. KTV(국민방송)에서 요새 방영해주고 있는 드라마 '토지(1987)'를 다시 보고 있다. 햇수로 무려 34년 전의 드라마이다. 어제는 최 참판 댁의 재산을 노린 김평산의 음모에 동참한 참판 댁 하녀 귀녀의 비참한 말로, 귀녀의 아들을 거두는 강 포수 이야기가 나왔다. 어찌나 조연 배우들이 연기를 잘하는지 이미 다 본 것을 또 보게 된다. 많은 등장 인물이 나오는 대하 드라마의 경우, 주연 배우들의 연기를 받쳐주는 조연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야말로 극을 이끌어 가는 주요한 동력이 된다. '토지'는 당시 KBS의 드라마 제작 역량이 총집결된 작품으로, 박경리 원작의 치밀한 서사와 당대의 대표적 TV 출연 배우들의 열연이 빛난다.

  '토지'는 하동의 평사리를 배경으로, 구한말에서 광복 전까지 만석꾼 최 참판 댁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소설이 완간된 것은 1994년이어서, 이 드라마는 당시까지 출간된 부분까지만 다루었다. KBS에서는 주인공 '최서희' 역의 최수지를 드라마의 간판으로 내세워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최수지의 사진이 인쇄된 KBS 엽서를 홍보물로 받았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신인 배우로 연기력이 미흡하다는 평이 있기는 했었지만, 최수지가 보여주는 서희의 이미지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최수지를 비롯해 이 드라마는 신인 배우들의 등용문이기도 했다. 서희의 아역으로 나왔던 이재은과 안연홍은 이 드라마의 출연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서희의 몸종 봉순이의 소녀 시절을 연기했던 전미선의 고왔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서희와 길상의 큰아들 환국 역으로는 김민종이 나왔다. 그의 첫 드라마 출연작이었다.      

  '토지'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하다. 김평산의 사악한 계략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서희는 할머니마저 돌림병으로 잃은 후, 일가붙이인 조준구에게 재산을 강탈당한다. 할머니가 숨겨놓은 금괴를 가지고 연변의 용정에 자리를 잡은 서희는 조준구에게 복수할 계획을 진행시켜 나간다. 한편 조선의 국운은 기울어 일본의 압제에 놓이게 되고, 조준구는 친일파가 되어 하동의 권력자로 군림한다. 송노인을 내세워 광산 투자를 미끼로 조준구를 망하게 만든 서희는 평사리의 집과 땅을 되찾고 마침내 귀국한다. 종의 신분으로 서희의 남편이 된 길상은 독립 운동에 투신하고, 서희의 두 아들도 시대의 격변 속에 어려움을 겪는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서희는 길상의 빈자리, 뜻대로 되지 않는 자식들을 보며 인생의 회한을 느낀다. 일제의 폭정이 심해지는 가운데, 조선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커져 가지만 그 날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된 정서는 혈연주의이다. 평사리 만석꾼 최 참판 댁의 가계(家系)는 최치수의 딸 서희에게 이어진다. 최치수가 비명횡사한 이유는 집안의 종손 자리를 넘 본 김평산 일당의 계략 때문이었다. 조상 제사를 모시는 아들에게 가문의 모든 재산이 상속되는 유교적 전통에서 딸 서희가 가진 지위는 무의미하다. 할머니의 일가붙이 조준구가 최씨 집안의 재산을 강탈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서희는 아들들에게 남편의 성씨인 김씨 대신 최씨를 부여함으로써 단절될 위기의 가문을 복원시킨다. 핏줄을 타고 이어지는 것은 성씨뿐만이 아니다. 박경리가 그려내는 '토지'의 등장인물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외모와 기질, 성격에 더해 부모의 인생과 비슷한 삶을 살아간다.

  사악한 김평산의 아들 김거복은 일제 시대의 밀정이 되어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성품을 보여준다. 김평산과 대비되는 그의 착한 처 함안댁은 남편의 악행에 절망해 자살하는데, 함안댁의 성품을 닮은 거복의 동생 한복은 길상의 독립 운동을 돕는다. 강직한 용이가 후처 임이네와의 사이에서 얻은 홍이는 아버지의 성품을 물려받는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삶까지도 빼닯는데, 무당 월선에 대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 했던 용이의 젊은 날처럼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한다. 대체적으로 '토지'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의 자식들은 부모의 태생을 따라간다. 동학당의 우두머리 김개주와 서희의 할머니 조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김환의 일생은 체제 저항적인 삶이었다. 그것은 결코 교육이나 주변 환경에 의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경리가 보여주는 인물들은 철저히 결정론적인 세계관에 갇혀 있다.

  타고난 운명에 순응하며 그저 살아갈 따름인 인물들에게 출구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여정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직 죽음의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김평산의 처 함안댁의 자살 말고도 '토지'에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인물들이 여럿 나온다. 서희의 몸종에서 기생이 되어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했던 봉순은 결국 딸을 남기고 강물에 몸을 던진다. 김환은 자신이 몸담은 동학 잔당 내의 분란 때문에 체포되는데, 동료를 밀고할 위기에서 조직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다. 박경리가 보여주는 등장인물들의 '자살'이라는 삶의 종결 방식은 다소 미화되어 있으며, 윤리적인 결단에 의한 측면이 강하다. 격동의 시대를 헤쳐나갈 수 밖에 없었던 민초들의 고통스러운 삶은 죽음, 그것도 순탄치 못한 여러 죽음의 방식으로 재현된다. '토지'에서 타고난 자신의 명줄대로 살아가는 인물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다양한 인물들이 각자 타고난 운명대로 변혁의 시대와 맞서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 '토지'는 무려 2년에 걸쳐서 방영된 대장정의 드라마였다. 그런 엄청난 제작비와 인력이 투입된 드라마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공영방송으로서 KBS가 가진 장점이었고 의무이기도 했다. 이 드라마를 빛나게 만들었던 것은 주 조연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였다. 김평산 역의 이치우, 그 아들 김거복 역의 백인철이 보여준 사악하기 짝이 없는 연기는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2004년에 SBS에서 리메이크로 방영된 '토지'에서 김거복 역은 유해진이 맡았는데, 그의 연기도 백인철의 연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악랄한 조준구 역의 연규진과 조준구의 처 홍씨로 나온 김성녀의 연기는 또 어떠한가? 어떤 면에서 연규진의 배우 경력의 정점을 보여주는 그 연기는 아직도 많은 이들의 뇌리에 깊게 남아있다. 용이 역으로 나왔던 임동진, 강청댁 역의 연운경, 월선 역의 선우은숙, 임이네로 나온 박원숙의 연기도 명불허전이다.

  토속적이고 장중한 주제곡이 흐르는 가운데 소가 쟁기질을 하는 '토지'의 인트로 화면을 잊는다는 것은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덧 34년의 세월이 흘렀고, 좋지 않은 화질의 드라마 속에서도 변치 않는 감동과 재미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이런 대하 사극을 만드는 일은 어렵게 되었다. 드라마는 외주 제작의 형식으로 바뀌었고,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간접 광고들로 범벅이 된 드라마들이 쏟아질 뿐이다. 사극 장르 조차도 판타지 사극으로 생존하는 마당에 '토지'같은 대하 드라마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희망사항으로만 남을뿐이다. 공채 시스템 하에서 기용할 수 있었던 실력있는 조연 배우들의 인력 풀도 무너진 지 오래다. 오래전 사극 속의 중견 배우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프로그램은 '인생 다큐 마이웨이'에서 인데, 은퇴한 그들은 시골의 전원 주택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KTV에서는 평일 저녁 10시 반부터 11시 반까지 '토지'를 방영하고 있다. 박경리 작가의 필생의 업적 '토지'를 드라마로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이 드라마의 시청자들은 혼란의 구한말과 엄혹한 압제의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민초들의 이야기, 그리고 흘러간 시대의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를 만나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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