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상승(The Ascent, 1977)'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 강행되었다. 혹한의 벨라루시 무롬(Murom)에서의 촬영 기간 동안 감독과 제작진들은 추위 때문에 동상에 시달렸다. 배우들이 촬영을 위해 입은 옷은 한겨울의 칼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감독은 배우들 보다 옷을 껴입지 않았고, 허약해진 체력을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버텼다. 그 영화는 감독에게 무척 소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는 촬영 허가가 나기까지 무려 4년에 이르는 시간이 걸렸다. 그가 이전에 찍은 영화들은 검열 당국의 전적인 비호감을 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동떨어졌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렵게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었지만, 촬영 내내 감독은 검열을 강제하는 힘들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1977년에 소련의 여성 영화 감독 라리사 셰프티코(Larisa Shepitko)가 만든 '상승(Восхождение, The Ascent)'은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상승'은 2차 대전의 동부 전선, 독소 전쟁의 격전지였던 벨라루시의 겨울을 배경으로 한다. 독일군에 밀려 퇴각하는 파르티잔들의 상태는 처참하다. 추위과 부상, 굶주림에 시달리는 부대원들과 민간인들은 절멸의 위기에 처한다. 두 명의 병사가 근처 민가에서 먹을 것을 가져올 임무를 부여받는다. 콜야와 소트니코프가 길을 나선다. 겨우 찾아낸 마을 촌장의 집에서 양 한 마리를 받아낸 그들은 돌아오는 길에 독일군의 습격을 받는다. 총상을 입은 소트니코프는 포로로 끌려가는 대신 자결을 택하려 하지만, 콜야의 저지로 목숨을 건진다. 도망친 그들은 아이들만 있는 민가에 숨어든다. 남편을 독일군에 잃은 세 아이들의 엄마 돔치카는 내키지 않지만 그들을 숨겨준다. 그러나 독일군의 수색으로 두 병사는 체포되고, 돔치카도 첩자라며 체포된다. 독일군 본부로 이송된 그들에게는 더욱 고통스러운 현실이 기다린다.

  셰프티코는 독소 전쟁의 격전지 벨라루시에서 벌어진 참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것을 바탕으로 쓴 소설 '소트니코프'를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Goskino(소련 영화 촬영 국가 위원회)는 이 영화에 철저히 부정적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영화가 가진 종교적인 상징성 때문이었다. 셰프티코는 성서 속 예수의 마지막 수난과 순교를 주인공 소트니코프에 투영했다. 검열 당국은 위대한 애국전쟁이라고 부르는 전쟁에 종교적 신비주의가 덧입혀졌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셰프티코는 처음부터 소트니코프 역을 맡을 배우의 외모는 예수를 떠올리게 해야한다고 정했다. 당국이 추천한 배우들을 거부하고, 감독이 직접 뽑은 배우는 25살의 신인 보리스 플로트니코프였다. 순수하고 선량한 눈빛을 가진 이 배우의 얼굴에서 수난받는 십자가의 신의 아들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소트니코프는 독일군의 수사 책임자인 포트노프의 심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는다. 자신과 부대원들에 대한 일체의 정보를 주지 않겠다며 버티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양심'이다. 벨라루시 출신으로 합창단 지휘자이기도 했던 부역자 포트노프의 눈에 소트니코프의 그런 선택은 가소로울 뿐이다. 살고 싶지 않으냐고, 네가 지키는 그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고 조롱을 퍼붓는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소트니코프와는 달리 콜야는 굴복한다. 그에게는 살아야 한다는 열망이 더 크다. 어쨌든 살아서 복수를 해야하지 않느냐고 소트니코프를 설득하지만 소용이 없다. 지하 감방에서 세 아이를 두고 온 돔치카, 촌장, 구두장이의 어린 딸, 두 병사는 죽음을 기다린다.

  셰프티코는 전쟁으로 인해 벌어지는 극한의 상황에서의 여러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양심을 지키는 소트니코프, 생존을 위해 배신을 택하는 콜야, 적극적으로 악에 동참하는 포트노프, 아무 이유없이 고통받는 민간인들, '상승'의 인물들은 거대한 수난 잔혹극을 연기한다. 소트니코프와 포트노프의 대화는 빌라도의 예수에 대한 심문을 떠올리게 하고, 콜야의 배신은 유다의 행적에 비유된다. 결국 독일군의 끄나풀이 되어 목숨을 연명하는 콜야는 수치심에 자살을 기도하지만, 그는 다시 비루한 삶 속에 들어간다. 셰프티코는 영화 속 인물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고, 죽음을 앞둔 인물들의 선택의 과정에 집중한다. 얼굴을 부각하는 여러 클로즈업 쇼트를 통해 관객들은 각각의 인물들 내면을 들여다 볼 단서를 얻는다.

  이 영화의 제목은 우리말로 '고양(高揚)'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나는 '상승'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서사적 맥락에서 본다면 '비상(飛翔)'이 더 나은 대안일 수도 있다. 소트니코프는 교수형을 앞두고 두 팔을 벌려 날아갈듯한 자세를 취한다. 고결한 양심과 신념을 지닌 이들에게 죽음의 올가미는 결코 그들의 영혼을 추락시키지 못한다. 원작 소설의 제목 대신 '상승'이라는 제목을 권유한 것은 셰프티코의 남편 엘렘 클리모프였다. 그 또한 영화 감독으로 전쟁의 비극과 고통을 그린 영화 '컴 앤 씨(Иди и смотри, Come And See, 1985)'를 만들었다. 2차 대전 당시의 벨라루시에서 일어난 학살의 참상을 담았다는 점에서 부부의 영화들은 마치 연작처럼 보이기도 한다.

  1979년, 새 영화를 찍고 있었던 셰프티코는 촬영지에서 돌아오는 길에 트럭과의 충돌사고로 유명을 달리한다. 마흔 한 살의 나이였다. 그렇게 영화 '상승'은 셰프티코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흑백 영화 속에서 끝없이 펼쳐진 설원은 결코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거부할 수 없는 엄혹한 전쟁의 현실, 그 속에서 바스라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약함과 유한성이 장대한 자연 풍광에 대비된다. 러시아의 유명한 현대 음악 작곡가 알프레드 슈니트케가 맡은 음악은 영화가 주는 종교적 메시지를 매우 압축적이고 간결하게 전달한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통해 감독 라리사 셰프티코의 자유로운 영화적 숨결이 봉인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진 출처: tcm.com   소트니코프 역의 보리스 플로트니코프


**사진 출처: ru.wikipedia.org    감독 라리사 셰프티코는 VGIK(러시아 국립 영화학교)에 들어가 알렉산더 도브첸코의 가르침을 받았다. 학생 시절에는 도브첸코의 영화들에서 배우로 활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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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멀 그리스(thermal grease)라는 것이 있다. 컴퓨터의 CPU에서는 많은 열이 발생하는데, 그 열을 빼내는 것이 CPU팬이다. CPU의 열이 팬에 잘 전달될수 있도록 접합부에 도포하는 물질이 바로 서멀 그리스이다. 전도성 물질인 알미늄 가루가 주성분인 이것이 없다면, CPU는 넘쳐나는 열로 인해 작동할 수 없게 된다. 서멀 그리스의 가격은 몇 백 원짜리에서부터 몇 만원대까지 다양하다. 기능상에는 그렇게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대다수의 사용자들은 저렴한 것으로 구입해서 쓴다.

  며칠 전부터 컴퓨터에서 거슬리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늘 익숙하게 듣던 소음은 아니었다. 컴퓨터 본체에 먼지라도 좀 쌓였나 싶어서 청소를 하기로 했다. 뜯어서 보니 먼지는 별로 없는데, 작은 플라스틱 조각 2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것이 부품에서 떨어진 조각이라면 골치아프겠다 싶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CPU팬의 조임새 하나가 깨져 있었다. 그 부분이 들뜨면서 낯선 소음을 만들어냈던 모양이다. 다행히 예전에 사놓은 부품이 있었다. 팬을 떼어내 부품을 끼우고 다시 조립하면서 서멀 그리스도 새로 발라주었다. 나는 서멀 그리스를 쓸 때마다 배우 K가 떠오른다. 그 배우는 컴퓨터에 익숙했던 것인지, 언젠가 인터뷰에서 '서멀 그리스'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인생에서 서멀 그리스 같은 것이 있다면, 좀 더 삶을 견디기가 쉽지 않을까? 그것이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좋아하는 취미나 일, 물건일 수도 있다. 오늘 문득, 내 인생의 서멀 그리스는 무엇이었나 떠올려 보게 되었다. 내게는 그것이 '영화'였다. 애정의 존재로서의 영화, 떼어내고 버리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함께 하게 되는 것. 그러나 그 '영화'는 먹고 사는 데에는 사실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얼마 전, 미술 잡지 기사를 읽다가 이런 제목의 글을 보았다. '그 많은 미대 졸업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미술 전공을 살려서 자신의 작품 활동을 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영화의 경우에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비슷한 답을 얻게 될지 모른다.

  예전에 영화 잡지에서 기획으로 낸 기사가 있었는데, 세계의 유명 영화 학교 소개에 관한 것이었다. 기사에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한국 학생들의 인터뷰가 있었다. 아주 오래 전 기사이므로 그 인터뷰의 학생들은 이제 중년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가끔은 기사에 나온 그들의 이름을 한 번 검색해 본다. 어떤 이들은 영화계로 들어와서 일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검색 결과에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땐 마음 속으로 응원하게 된다. 꼭 영화와 관련된 일을 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살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어떤 방식으로든 젊음의 시간을 영화에 바친 이들이 너무 힘들거나 괴롭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이다.

  가끔, 인생의 가정법, 그러니까 시간을 되돌려 내가 했던 선택들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있다. 영화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던 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 선택을 다시 할 수 있을까? 아주 오랫동안 나는 그 순간을 후회했었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세월이 흘러서 돌이켜 보니, 내가 그 때로 여러 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영화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물론 영화는 먹고 살 방편으로는 아무런 효용성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배우 K는 아직 서멀 그리스 같은 이를 만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TV에서 K의 얼굴을 볼 때면 K가 자신의 바램대로 그런 이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때론 스스로를 태워 삼켜버릴 수 있는 삶의 어려움 속에서 서멀 그리스 같은 무엇이 그 열기를 어디론가 빼버릴 수 있다면, 조금은 삶이 서늘해지고 가벼워질 것이다. 영화와 글쓰기, 지금의 나에겐 그 두 가지 서멀 그리스가 있다. 오늘, CPU팬에 서멀 그리스를 펴바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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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름 느와르(Film noir)를 장르로 볼 것이냐, 스타일의 한 유형으로 볼 것이냐에 대해 아직도 영화학자들 사이의 의견은 엇갈린다. 사실 필름 느와르의 본질적 요소를 무엇으로 정의할 것이냐도 쉽지 않은 문제이다. 대체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이 있다면, 범죄와 부조리한 세계에 대한 탐구, 비정형적인 내러티브와 비극적 결말, 촬영 기법에서 두드러지는 명암 대비,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인물들(팜므 파탈을 포함해)이 등장하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일반적 범주에서 하드보일드(hard-boiled) 추리 소설이 초창기 필름 느와르의 원천이 되었던 것도 그런 요소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1947년에 영국의 일링 스튜디오(Ealing Studios)에서 제작한 로버트 해머(Robert Hamer) 감독의 '일요일에는 언제나 비가 내린다( It Always Rains on Sunday)'도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필름 느와르에 속한다. 영화는 런던 동부의 Bethnal Green을 배경으로 범죄자의 탈주를 둘러싼 일련의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 내내 비가 내리는 풍경이지만, 영화는 결코 스산하거나 어둡지 않다. 가족 멜로 드라마의 외양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유지되는 긴장과 스릴은 소시민의 평범한 일상과 결합해 기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로즈는 두 명의 십대 딸을 둔 중년 남자와 결혼해서 자신의 아들을 두었다. 유순하고 착한 둘째 의붓딸 도리스와는 달리 첫째 딸 바이는 사사건건 로즈와 부딪힌다. 자신 보다 15살 연상인 남편 에드워드는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팍팍한 하층민의 삶은 로즈를 지치게 만든다. 비가 내리는 일요일 아침, 남편이 읽고 있던 신문에는 탈옥수 토미 스완의 기사가 실린다. 10년 전, 토미와 로즈는 연인 사이였다. 경찰들은 토미를 잡기 위해 탐문 수사를 진행하고, 그 와중에 토미는 로즈의 집에 숨어든다. 로즈는 가족 모두가 외출한 사이 부부의 침실에서 토미를 쉬게 해주지만, 수시로 드나드는 가족들과 비좁은 집에서의 숨바꼭질은 위태롭기만 하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일상성에 대한 적확한 묘사와 다양한 소시민들의 삶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주부로서 로즈는 식사와 빨래 같은 가사일을 해내느라 주방에서 내내 동동거린다. 로즈의 얼굴에는 생기가 없지만,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로즈의 젊은 시절은 분방함으로 채색되어 있다. 남자 친구였던 토미의 예기치 못한 방문은 로즈의 마음을 뒤흔든다. 부부 침실에서 토미가 자고 있는 동안, 1층의 거실과 부엌에는 계속해서 가족들이 드나든다. 첫째 딸 바이는 거울을 찾는다며 그 방에 들어가려다, 로즈에 의해 제지당하고 둘은 거친 욕설과 몸싸움을 벌이기까지 한다. 이 비좁은 2층 주택에서 벌어지는 숨막히는 소동극이 주된 플롯이라면, 하위 플롯으로는 동네 주민들의 여러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동네 사랑방 같은 작은 술집에서 뒷골목 갱들은 롤러 스케이트를 비싸게 팔아먹을 궁리를 한다. 바이는 드나들던 댄스홀의 유부남 연주자와 바람이 났다. 도리스는 또래의 착한 동네 청년과 사귀고 있지만, 건달 우두머리는 끈질기게 관심을 보인다. 로즈의 아들은 친구와 시끄럽게 하모니카를 불어대며 비오는 거리를 제멋대로 돌아다닌다. 감독 로버트 해머는 마치 Bethnal Green의 일상을 그린듯한 다큐멘터리처럼 고정된 카메라로 우유 배달부와 신문팔이 소년이 다니는 거리,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의 모습을 여러 번 보여준다. 그쳤다 내리기를 반복하는 일요일의 빗줄기는 하층 주거지로 숨어든 탈옥수의 존재와 더불어 잠재된 불안처럼 모든 것에 스며든다. 

  '일요일에는 언제나 비가 내린다'에는 전후 영국이 처한 사회 현실이 드러난다. 전쟁은 끝났고, 사람들은 일상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하층 소시민의 삶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불안와 동요의 징후는 로즈의 집 2층 침실에서 발각의 위험 속에 잠자고 있는 토미처럼 존재했다. 로즈가 꾸려나가는 가정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다. 나이든 남편에 대한 애정은 희박하고, 전실 자식들은 혹처럼 느껴질 뿐이다. 토미의 유혹에 로즈는 무너지지만, 그 둘은 미래를 꿈꿀 수 없다. 결국 토미의 탈주극은 실패로 끝나고, 로즈도 가정을 버리지 못한다. 비가 내리는 이 칙칙한 거리에서 탈출할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영화가 암시하는 전후의 영국 사회는 폐쇄적 침잠에 가깝다.

  이 영화가 밋밋하다고 느끼는 관객들에게 마지막 10분은 짜릿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결코 총을 쏘지 않는 영국 경찰과 토미가 벌이는 기차 역에서의 역동적인 야간 추격장면은 이 영화가 가진 필름 느와르의 본질을 상기시킨다. 로버트 해머는 사실주의와 결합한 필름 느와르의 새로운 변용을 보여준다. '사랑스럽다'라는 표현이 어색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나는 이 영화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개봉 당시, 영화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일요일에는 언제나 비가 내린다'에 드리운 독특한 아우라를 걷어낼 방법은 없어 보인다. 좋은 영화는 그렇게 시간의 힘을 견뎌낸다.   



*사진 출처: bfi.org.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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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편지(The Letter, 1940)'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26년, 영국의 작가 서머싯 몸(Somerset Maugham)은 말레이시아 여행을 했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단편들을 모아 출간한다. '편지(The Letter)'는 바로 그 단편집에 실려 있었던 작품이다. 그는 싱가포르의 한 변호사로부터 1911년에 있었던 악명높은 살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주석 광산 책임자의 아내가 관리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이었다. 여자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곧 사면되었다. 서머싯 몸은 그 실화를 그대로 따왔다. 그가 한 것은 거기에 '편지'라는 소재를 추가한 것이다. 그 단편 소설은 인기가 있었고, 작가는 그것을 희곡으로 다시 썼다. 1929년에 헐리우드에서 처음으로 영화화되었고,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1940년에 베티 데이비스를 주연으로 같은 제목의 영화를 찍었다.

  영화는 충격적인 첫 장면으로 시작한다. 열대 나무 숲 사이에 자리한 저택에서 별안간 총소리가 이어진다. 총에 맞은 남자가 계단을 굴러 넘어지는데, 뒤따라 나온 여자는 남자가 쓰러진 뒤에도 총격을 가한다. 여자가 쏜 총알은 한 발이 아닌, 모두 여섯 발이었다. 침착하고 담담하게 집으로 들어간 그 여자, 레슬리는 집사에게 경찰에 사건을 신고하라고 말한다. 레슬리는 체포되고, 남편 로버트는 부부와 친분이 있는 변호사 조이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레슬리는 자신을 범하려던 해먼드에게 맞서기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진술한다. 그 주장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조이스에게 중국인 비서 옹은 레슬리에게 불리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고 귀뜸한다. 죽은 해먼드의 부인이 레슬리가 해먼드에게 와달라고 쓴 편지를 갖고 있고, 그것을 건네주는 댓가는 만 달러라는 것. 조이스는 로버트를 설득해 편지를 획득할 돈을 타내고, 조이스와 동행한 레슬리는 해먼드 부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아낸다. 과연 그 편지의 내용은 무엇이며, 레슬리는 정당방위를 인정받아 풀려날 수 있을까?

  서머싯 몸은 여행하기를 무척 좋아했던 작가였다. 그는 여행지에서 들은 이야기와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글을 썼다. 영화 '페인티드 베일(The Painted Veil, 2006)'의 원작 소설도 그런 여행의 산물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의 체류를 통해 32편의 단편 소설을 썼고, 그것을 따로 묶어서 단편집으로 펴냈다. 그만큼 말레이는 그에게 인상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그가 소설에 묘사한 말레이의 모습은 현지인들의 기대에 어긋났다. 구습과 전근대성의 상징으로서의 말레이에 대한 묘사는 현지인들에게 실망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영화 '편지'에서도 그런 면모는 선명하게 부각된다.

  레슬리의 현지인 집사는 살인이 있던 날 밤 사라진다. 사라진 그는 해먼드 부인의 수하가 되어 복수를 돕는다. 부인의 외모는 현지 말레이인들과 좀 다른데, 영화 속에서 중국인과 유럽인의 혼혈로 나온다. 게일 손더버그가 연기한 해먼드 부인의 외양은 중국풍의 옷에 치렁치렁한 장신구들, 냉혹한 표정으로 무장하고 있다. 레슬리는 그런 해먼드 부인의 모습을 끔찍하다고 묘사한다. 관객들에게도 해먼드 부인은 기이한 이국성과 비호감의 이미지로 비춰진다. 현지인에 대한 그런 뒤틀린 이미지는 처음으로 편지의 존재를 드러내는 조이스의 비서 옹에게서 더욱 강화된다. 영어를 구사하고, 멀끔한 양장을 입은 옹은 주도면밀하게 편지 거래를 성사시킨다. 편지의 사본으로 조이스에게 레슬리에 대한 의혹과 불안을 심어주고, 결국 레슬리 남편 로버트의 재산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1만 달러라는 큰 돈으로 편지를 사게 만든다. 항상 웃는 표정의, 성실한 비서는 교활하고 파렴치한 거간꾼의 면모를 보여준다.

  '편지'에서 관객들이 만나는 것은 영화 곳곳을 채우고 있는 이국성과 식민지성이다. 레슬리의 재판 장면에서 재판부와 배심원들은 모두 백인들이며, 그들은 결국 레슬리의 정당방위를 영웅적인 행위로 보고 무죄 판결을 내린다. 지배계층으로서의 피식민지인들의 비윤리성은 불륜과 살인을 저지른 레슬리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조이스는 변호사로서의 직업 윤리를 저버리고 증인 매수에 나선다. 그가 레슬리의 남편 로버트를 설득해 편지를 입수하는 데에 쓴 돈 1만 달러는 로버트의 고무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나온 돈이다. 식민지의 자원에서 수탈한 이윤은 그들의 도덕적 타락과 범죄를 은폐하는 데에 사용된다.

  원작 소설에서 해먼드의 여자는 'wife'가 아닌 'mistress(情婦)'로 나온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유라시아 혼혈이 아닌 '중국인' 여성, 그것도 연상의 나이든 여자로 지칭된다. 결국 해먼드 부인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영화 속 레슬리와는 달리, 소설에서는 레슬리가 무죄방면되어 자신의 화려한 생일파티를 여는 장면에서 끝난다. 왜 원작과 다른 그런 각색이 이루어졌을까? 그것은 당시 미국 영화의 검열 제도(The Hays Cord) 때문이었다. 1934년부터 1968년까지 적용된 스튜디오의 자체 검열 제도는 '편지'에도 적용되었다. 특정 국가나 인종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것은 핵심 사항에 속했다. 그런 이유로 '중국 여성'은 '유라시아 여성'으로 바뀌었다. 또한 내연녀의 등장도 바람직하지 못하므로 정식으로 결혼한 부인이 등장했다. 레슬리의 죽음 또한 피할 수 없었다. 불륜에 살인까지 저지른 인물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결말이었다.

  서머싯 몸은 뛰어난 작가였으나, 제국주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그 관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쓴 '편지'는 기묘한 이국성과 함께 식민지주의가 날것으로 숨쉬고 있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그런 원작을 절묘하게 가공한 필름 느와르를 보여준다. 베티 데이비스는 고혹적인 외모에 사악한 열정을 지닌 레슬리를 잘 소화해냈다. 엄격한 검열이 없었다고 해도 '편지'의 결말은 충분히 비극적이다. 레슬리는 자신이 죽인 남자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남편에게 고백한다. 그런 여자를 사랑해서 버리지 못하는 남편에게도 고통의 시간은 이어질 것이다. 실제의 치정 사건은 그렇게 인간 내면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심리물로 재탄생했다.    



*사진 출처: commons.wiki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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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촬영 중이었다. 원래는 40분 정도로 찍으려 했던 대본은 1시간 분량으로 늘어났다. 유대인 강제 수용소의 조사 자료들이 쌓여갔고, 영화 촬영은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이미 찍어 놓은 필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폐기하기도 했다. 수용소 장교 숙소에 머물면서 촬영했던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트럭과 정면 충돌한다. 마흔 살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63년, 그의 동료 감독 비톨트 레시에비츠가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영화를 최종 편집하고 완성한다. 안제이 뭉크(Andrzej Munk) 감독의 유고작 '승객(Pasażerka, Passenger)'은 그렇게 관객과 만나게 되었다.

  리자는 남편과 함께 크루즈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중간 기착지 항구에서 자신이 예전에 알던 여자와 흡사한 외모의 승객이 타는 것을 보고 리자는 놀라서 얼어붙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나치 친위대 감독관으로 복무했던 리자는 수감자 마르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리자는 남편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들려준다. 고통스런 과거로의 여행은 다음 기착지에서 중단된다. 마르타와 닮은 외모의 승객이 내리고, 리자는 비로소 안도한다.

  폴란드의 작가 조피아 포즈미스는 1959년에 라디오 방송 드라마 대본으로 '45번 칸의 승객(Passenger from Cabin Number 45)'을 썼다. 포즈미스는 독일에 항거한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종전과 함께 풀려났다. 아우슈비츠로 이송될 때 포즈미스가 탔던 칸의 번호가 45번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쓴 라디오 드라마에 뭉크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61년에 시나리오를 썼고, 영화 제작에 착수했다. 1963년에 영화가 개봉된 것과는 별개로 원작자 포즈미스는 1962년에 이전의 라디오 대본에 이야기를 추가해 책으로 펴냈다. 소설을 바탕으로 1968년에는 소련에서 오페라 작품이 만들어졌다. 원작 텍스트의 다양한 변용 가운데 영화 '승객'이야말로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극명하게 드러낸 유명한 작품으로 남았다.

  영화는 현실의 리자가 과거를 회상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적 순서에 따른다. 현실 부분은 영화의 스틸컷 사진이, 과거의 회상은 필름 촬영분으로 되어 있고, 리자의 목소리가 보이스 오버(voice-over)로 깔린다. 리자는 남편에게 들려주는 첫 번째 회상에서 과거의 과오를 최대한으로 합리화한다. 마르타가 애인 타데우스와 만나게끔 주선해 주고, 그들의 행동을 묵인하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스스로를 미화한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회상 장면에서 리자는 자신에게 순순히 굴복하지 않는 마르타를 괴롭히고, 애인과의 만남도 금지시켜 버린다. 아무것도 모른채 가스실로 줄지어 들어가는 아이들을 보거나, 경비견들이 수감자들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것에도 무감각한 모습을 보인다. 마르타는 방관자로서의 리자를 비아냥거리면서 리자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든다. 둘 사이의 권력 관계는 겉으로는 명백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르타는 리자와의 심리적 대결에서 결코 무기력하게 밀리지 않는다.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여러 영화들 속의 가해자-피해자 구도와는 달리, '승객'은 학살의 방관자 내지는 동조자로서의 캐릭터를 부각시킨다. 리자는 정말로 사악한 인물인가? 마르타에게 보여주는 리자의 행동들은 양가적(兩價的)이다. 유대인들의 소지품 분류 창고를 담당하는 리자는 압수물품으로 들어온 유모차 속의 아기 울음 소리를 듣는다. 동료 감독관은 아기를 찾아내어 죽이려하지만, 리자는 마르타가 유모차를 확인하게 하고 인형을 건네는 마르타를 추궁하지 않는다. 또한 학살 대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마르타를 제외시켜버리는 결정을 내린다. 관객들은 리자의 독백과 재현된 과거의 기억 속에서 과연 리자의 참모습은 무엇이며, 진실은 무엇인지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리자가 목격한 유람선의 여승객이 진짜 마르타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관객들은 피해자로서의 마르타의 증언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리자와 과거 수용소에서의 일에 대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것은 '유대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비극에 다양하게 접혀진 이야기들이 존재함을 드러낸다. 안제이 뭉크 감독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느꼈던 어려움도 그런 것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영화 속 리자의 기억과 함께, 관객들은 뭉크 감독이 의도한 원래의 이야기도 오로지 추측과 상상으로만 메꾸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는다.

  동시대의 알렝 레네가 다큐멘터리 '밤과 안개(Nuit Et Brouillard, Night And Fog, 1956)'로 학살의 실체적 진실을 보여주었다면, 뭉크는 학살의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기억과 그 이후의 삶을 다룬다. 어떤 식으로든 기억은 왜곡되고 흐려지며, 학살에 개입된 여러 입장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윤리적 도덕적 오점을 덜어내기 위해 애쓰기 마련이다. 그 기억의 가역성과 모호함을 드러내는 예는 압수물품으로 들어온 유모차에 있었던, 또는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되는 '아기'에 대한 것이다. 빠르게 지나간 유모차는 화면에서 사라졌고, 곧이어 마르타는 인형을 가져온다. 리자와 동료 감독관을 비롯해, 관객들도 분명히 아기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 과연 아기는 거기에 있었는가? 마르타가 아기를 숨기고 인형을 잽싸게 찾아 건넨 것인가? 처음부터 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닌가? 영화 속에서 아기의 존재에 대한 정보는 더이상 주어지지 않는다.

  수용소 생존자로서 원작자 조피아 포즈미스를 지칭했던 제목 '승객'은 뭉크의 영화에서는 수용소 감독관 리자를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너무나도 명백한 피해자의 학살의 기억은 방관자의 기억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고 편집되어서 구술된다. 불완전한 리자의 기억 속에서도 참혹한 수용소의 모습과 그곳을 채운 죽음의 자취는 생생하게 재현된다. 영화 '승객'을 통해 안제이 뭉크는 역사적 비극과 그것을 조망하는 인간의 기억과 시간의 문제를 들여다 본다. 



*사진 출처: mini-cinema.org



*다음 글은 월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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