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이스라엘의 서안 지구(West Bank)에 살고 있던 72살의 노파는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샤울 모파즈(Shaul Mofaz)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장관의 집과 25미터 거리에 있는 노파의 과수원을 군부에서 없애 버리려 했기 때문이었다. 노파는 사는 곳이 맘에 안들면 장관이 이사가면 될 것을, 먼저 살고 있는 자신의 땅 근처에 이사와서 땅을 빼앗으려 한다고 말했다. 과수원에 심어진 오렌지와 레몬 나무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전부라고도 덧붙였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안보상의 이유로 나무들을 베는 것은 정당하다고 판결을 내렸다(출처 Al Jazeera). 이스라엘의 감독 에란 리클리스(Eran Riklis)는 그 사건에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영화 '레몬 트리(Etz Limon, Lemon tree, 2008)'를 만들었다.

  영화 속 과부 살마가 제기한 소송 변론에서 변호사는 나무를 베는 것이 성서에도 어긋난다는 말을 한다. 그 부분이 흥미로운데, 실제로 구약 성서의 신명기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한 성을 함락시키려고 포위 공격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리더라도, 거기에 있는 나무를 도끼로 마구 찍어 내지는 말라. 나무에 여는 것을 따 먹어야 할 터인데 찍어 내면 되겠느냐? 들에 서 있는 나무가 사람처럼 너희를 피하여 성 안으로 들어 갈 리 없지 않느냐?" (공동 번역 성서 신명기 20:19)

  과연 성서가 살마의 목숨과도 같은 레몬 나무들을 보호해 줄까? 개인의 재산권은 가볍게 깔아뭉개고 나무를 베어버리려는 군부에 대항해 힘겨운 싸움을 하는 살마. 마을의 촌장은 이길 수 없으니 포기하라고 하면서도 팔레스타인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보상금 따위는 받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팔레스타인 당국은 과부의 레몬 나무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이 없다. 결혼한 딸과 미국에 가서 정착한 아들도 심드렁하기는 마찬가지. 사위가 소개해준 젊은 변호사 지아드만이 살마의 싸움을 지지하고 격려해 준다.

  그런데 그런 살마를 심정적으로 응원하는 이는 또 있다. 살마에게는 적대자라고 할 수 있는 장관의 아내이다. 온정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을 가진 미라는 살마의 처지를 연민을 가지고 바라본다. 미라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앞두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안보와 관련된 이스라엘의 과도한 규제를 비판한다. 그 인터뷰는 살마에게는 호재이지만, 남편의 입지를 흔드는 일이다. 왜 미라는 장관인 남편과 이스라엘 편에 서지 않는가? 얼핏 보기에 미라의 존재는 '레몬 트리'가 가진 정치적 올바름을 대표하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대로 과수원을 가꾸며 살아온 이의 땅 옆에 이사와서는 테러리스트가 숨을 위험이 있으니 나무를 다 베어버리겠다고 하는 국방 장관의 처사는 분명히 온당치 못하다. 그러나 그것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엄연한 정치적 현실이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일방적 정치적 구호는 프로파간다로 전락하기 쉽다. 감독 에란 리클리스는 그런 위험을 매우 영리하게 비껴간다. '레몬 트리'는 첨예한 정치적 갈등을 개인의 차원으로 끌여들이는 전략을 구사한다. 레몬 나무 소송전의 뒤에는 중년 여성의 고독과 슬픔, 가부장제의 억압적 면모가 숨겨져 있다.

  살마에게 레몬 나무는 베어버려도 괜찮은 그냥 '나무'가 아니다. 그 나무에서 나오는 레몬들로 살마는 홀로 아이들을 키워냈다. 남편은 어린 레몬 나무를 심어놓고 세상을 떴다. 이제는 자식들도 제 살길을 찾아 떠났다. 자신이 직접 담근 레몬차를 마시며 바람에 흔들리는 레몬 나무를 보는 것이 살마의 유일한 낙이다. 그런 살마에게 생의 근원이며 버팀목이었던 나무를 잃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나무들이 삶의 전부라고 말한 진짜 뉴스 속 팔레스타인 노파의 이야기는 그대로 살마의 대사가 된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살마는 노파 보다는 좀 더 젊은 사십대 중반의 나이라는 점이다. 집 근처 계곡에서 들리는 늑대 울음소리를 들으면 같이 울고 싶다고 말하는 살마의 내면적 고독은 젊고 야심에 찬 변호사와의 만남으로 공명을 일으킨다.

  촌장을 비롯해 남편의 친구였던 마을 주민들은 살마의 감시자로 등장한다. 그들은 살마에게 죽은 남편의 명예를 생각해서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거실 벽에 음울한 표정으로 걸려 있는 사진 속 남편의 가부장적인 힘은 그렇게 살마에게 출몰한다. 장관의 아내 미라도 그런 가부장제의 영향력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남편과는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졌음에도 그것을 공적으로 드러내서는 안되는 처지의 장관 부인은 마음 기댈 곳이 없다. 남편은 젊고 매력적인 비서와 바람이 난 것 같고, 미국에서 유학 중인 딸은 항상 바빠서 통화하기도 어렵다. 딸과의 대화가 유일한 위로이지만, 그 딸은 혈육이 아니라 입양한 딸이며 미라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미라의 인터뷰는 결정적으로 남편과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다. 이렇게 가부장제의 서로 다른 처지의 두 여인은 인생에서 내적인 위기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레몬 트리'를 여성주의적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매우 손쉬운 해석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그리 좋은 도구가 아닐 수도 있다. 두 여인은 명백한 연대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단 한 번, 경호원의 눈을 피해 살마의 집에 들어가려고 했던 미라는 살마가 우는 모습을 엿보게 된다. 살마가 울었던 이유는 베어질 '레몬 나무' 때문이 아니라 '젊은 남자' 때문이었다. 물론 미라는 그걸 알지도 못하고, 미라의 시도는 경호원에 의해 좌절된다. 살마에게도 미라는 재수없는 이웃의 아내이지만, 그렇게 나빠보이는 것 같지 않은 여자일 뿐이다. 둘 사이의 유일한 연결 고리라고 할 수 있는 미라의 인터뷰 또한 살마의 입장을 옹호했다기 보다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관찰자적 시선에서 나온 것이다.  

  개봉 당시 이 영화는 이스라엘 관객들에게 그다지 우호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아마도 이스라엘 감독이 만든 영화가 확실하게 '이스라엘 편'에 서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깟 나무 베어버릴 수도 있는 거지, 뭐 저걸 가지고...' 하는 반응이 아니었을까? 분쟁 지역에서 테러의 위험을 안고 사는 이들에게 적과 우리 편의 구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 정치적 갈등이 진행되는 현실은 개개인의 실제적 삶에 지속적이고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레몬 트리'가 보여주는 것은 정치와 개인의 삶이 맞닿는 지점에서의 예기치 못한 파열음과 반향이다. 에란 리클리스는 레몬 나무를 둘러싼 소송을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현실, 중년 여인의 내면적 풍경을 펼쳐놓는다. 이 영화는 좋은 균형 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이 영화를 그저 그런 이스라엘 영화가 될 수 있는 위험에서 구해낸다. 영화 감독이 가져야 할 덕목은 탁월한 정치 감각이 아니라, 인간과 현실에 대한 탐구심이어야 함을 '레몬 트리'는 일깨운다.    



*사진 출처: he.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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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고베이, 죽음을 각오해라!"

  사무라이는 한 무리의 자객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고향 사바이를 떠나 에도에 머물던 그는 3년 만에 사바이 땅을 밟은 참이었다. 그는 에도에서도 자신을 죽이려는 자객들을 물리쳤다.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도대체 그는 무슨 이유로 그 땅을 떠났으며 왜 다시 돌아올 결심을 한 걸까? 고샤 히데오 감독의 '어용금(御用金, 1969)'은 1830년대를 배경으로 양심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가길 택한 어느 사무라이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어부의 딸 오리하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돈을 벌러 도시로 떠났던 오리하는 폐허로 변한 마을을 발견한다. 그 어떤 인적도 없이 오직 까마귀 떼만이 을씨년스럽게 울어댄다. 가족도, 결혼을 하기로 한 정혼자도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3년의 시간이 지났다. 오리하는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는 청년과 주사위 도박으로 도박꾼들의 돈을 뜯어내며 살아간다. 속임수가 들통나서 쫓기는 오리하를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의 마고베이가 구해준다. 그 두 사람은 3년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다.

  사건의 시작은 막부의 무지막지한 조공 요구였다. 번의 가신 타테와키는 막부의 금 수송선을 탈취한다. 그 일에 동원된 어부들과 마을 주민들은 입막음을 위해 몰살당했다. 마고베이는 타테와키에게 부당한 일이라며 항의하지만, 타테와키는 번의 생존이 달린 일이라며 정당화한다. 낭인이 되어서 떠도는 것을 택한 마고베이. 그는 또 다시 번에서 벌일 어용금 탈취극을 막으려고 고향에 돌아온다. 더이상의 무고한 죽음을 그는 용납할 수 없다.

  사무라이는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주군의 안녕을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해낸다. 마고베이는 어용금을 탈취하는 것까지는 이해하지만, 아무 죄없는 어민들을 잔혹하게 죽인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타테와키는 마고베이와는 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그에게 무사도란 주군과 번의 안위를 위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양민을 학살하는 것도 마땅히 해야할 의무였다. 마고베이와 타테와키, 그 둘의 대결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지난 3년의 시간은 나에게 죽은 삶이었어."

  마고베이는 또 다시 일어나게 될 학살극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돌아온다. 고샤 히데오는 마고베이를 통해 사무라이와 무사도의 본질에 대해 묻는다. '무사도'란 결국 주군의 개가 되어 죽기까지 충성을 바치게 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닌가? 도덕적 각성을 한 사무라이는 비로소 인간의 길로 들어선다. 그에게 주군이니, 번이니 하는 것은 더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 무고한 양민의 피를 보는 일은 정의롭지 못하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막부의 세력이 저물어갈 무렵이다. 가상의 사바이 번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시대극에서 번에 무리한 조공을 강제하는 막부도, 그에 대항하기 위해 어용금을 탈취하는 번도 양민들에게는 가혹한 수탈자들일 뿐이다. 마고베이는 수탈자의 부하 노릇인 '사무라이'를 그만 둔다. 영화의 마지막, 그는 사무라이에게 목숨과도 같은 칼을 버리고 길을 떠난다. 무사가 아닌 인간으로서 그의 삶은 순탄했을까? 일본의 근대사는 그 질문에 비관적인 답을 제시한다. 1850년대부터 시작된 막부의 몰락과 왕정 복고,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역사에서 사무라이들은 칼을 버려야 했다. 빼앗겼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천황 체제로 재편된 새로운 나라에서 더이상 사무라이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축적된 무(武)의 힘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무라이들은 자연스럽게 총을 든 군인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갔고, 그 결말은 자명한 패망이었다.

  고샤 히데오 감독은 정격의 무사 활극을 보여준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눈 쌓인 숲 속에서 벌어지는 대결은 빼어난 영상미를 자랑한다. 영화 속에서 마고베이가 잠시 머무르는 여인숙이 눈길을 끄는데, 그 주변은 온통 진창길이다. 그 설정은 프랑코 네로 주연의 영화 '장고(Django, 1966)'에서 결투가 벌어지는 진흙밭 마을을 떠올리게 만든다. 장고가 자신을 옥죄는 과거의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복수를 결심했듯, 마고베이 또한 어두운 과거를 지우기 위해 칼을 빼든다. 개인적인 복수를 완성하는 장고와는 달리, 양심에 따른 도덕적 결단을 실행한 마고베이는 결국 칼을 버린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대는 사무라이의 정체성을 버리고 평범하고 주체적인 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무라이들의 주군은 다이묘에서 천황, 그리고 국가가 되었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그렇게 오랜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 '어용금'은 그 기원이 되는 시점의 한 사무라이의 선택을 그린다. 그는 지배 계급에 굴종하는 대신, 내면의 도덕적 각성을 이룬 인간이 된다. 진정한 의미의 '시민'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일본이 그 시민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진 출처: 2017.kiff.kyot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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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프랑스인의 미국 만화경(萬華鏡), America As Seen by a Frenchman

  '도미(渡美)하다'라는 단어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희망과 성공을 상징하는 결말로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오래 전 드라마라 제목이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시골 마을의 돈푼깨나 있는 여자는 자신의 아들 이름을 그 '도미'로 지었다. 반드시 미국에 가서 성공한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 주인공이 미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공항 장면은 그냥 그 자체로 장밋빛 미래를 뜻했다. 1980년대까지도 한국인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유효했다. 그런데 1960년, 어느 프랑스인에게도 미국은 신기하고 놀라운 나라였던 모양이다. 프랑수아 라이헨바흐(François Reichenbach) 감독이 미국을 둘러 보고 찍은 다큐멘터리 'America As Seen by a Frenchman'은 당시 미국의 다양한 사람들과 풍광을 담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프랑스인의 미국 탐방기는 미국의 엄청난 소비주의에서부터 시작한다. 상업용 광고 사진을 찍는 사진 작가와 모델들의 작업 과정을 비롯해 곳곳에 넘쳐나는 관광객들이 화면을 장식한다. 이 나라는 그 무엇이든 스케일 면에서 보통을 뛰어넘는다. 꼬마 아이가 주문한 밥솥 크기의 그릇에 담겨 나온 아이스크림(녀석은 그걸 혼자서 맛있게 다 먹는다), 수박 먹기 대회의 아이들, 엄청나게 큰 피자, 너른 마당을 채운 바비큐 화덕... 먹거리에서부터 풍요로움이 넘치는 미국을 보여준다. 먹을 거리 구경은 뭐 별 것도 아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는 볼 거리도 넘쳐난다. 항공 모함에서 이착륙하는 전투기들은 세계의 경찰이라는 미국의 위상을 부각시킨다. 도처에서 벌어지는 축제와 군악대 행진은 당시의 미국에 '황금기(golden age)'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여성과 남성이 번갈아 가며 들려주는 내레이션은 결코 정적이거나 무미 건조하지 않다. 그들은 놀라움과 찬탄을 담은 목소리로 미국을 이야기 한다. 그런 내레이션과 함께 쓰인 다양한 음악들은 이 다큐에 즐거운 운율을 부여한다. 얼핏 보기엔 미국 관광청에서 만든 홍보 영상물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냉철한 프랑스인 관찰자는 부드러움 속에 뼈를 감추고 있다. 미국의 빛을 보여주고는, 이내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뒷골목도 살펴 본다. 교도소의 죄수들이 참가하는 로데오 경기에서 우승을 하는 이는 1년의 형기를 감면받는다. 죄수복을 입고 경기하는 그들을 보며 로데오 경기장을 찾은 많은 시민과 군인들은 열광한다. 폭주족과 스트리퍼들, 라스베가스의 도박장을 둘러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미국의 또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향락이 넘쳐난다.

  다큐는 미국의 여러 다양한, 시시콜콜한 면면들까지 담아낸다. 개와 고양이들의 천국, 쌍둥이 축제, 아이들의 훌라후프 대회까지, 그걸 보고 있노라면 당시의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져만 간다. 도대체 저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끝없이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는 화수분처럼 프랑스인 감독의 관찰기는 그렇게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확실히 특권을 의미합니다."

  정말 그럴까? 자유분방하게 춤추고 노는 해변가의 젊은이들, 눈부신 캘리포니아 해변의 서퍼들, 온갖 놀이기구를 타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꿈의 나라 미국의 시민으로 사는 것은 꽤나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노는 장면이 자아내는 기묘한 파열음은 이 나라가 갖고 있는 인종 문제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백인 아이들은 잘 정돈된 공원 풀밭에서, 흑인 아이들은 구질구질한 빈민가 공터에서 지들끼리 논다. 경범죄를 저지른 젊은이들은 경찰서 유치장에서 머그샷을 찍고 있고, 정신없이 춤추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무도장처럼 보이는 곳은 교회이다.

  마침내 이 프랑스인 관찰자는 마천루의 도시 뉴욕에 다다른다. 풍요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자신의 탐방기가 20년 안에 닥칠 유럽의 변화를 예견하는 데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 다큐 속에 나온 것들은 상품과 군수 물자를 비롯해 미국이 유럽과 전 세계에 다양한 방식으로 수출한 하위 문화들의 집합체였다. 과연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웠던 나라와 사람들이 있었나?


  그럼에도 라이헨바흐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어두운 심연을 주저없이 드러내 보인다. 어느 저수지에 줄지어 물에 잠긴 차들의 음산한 풍경은 결코 알 수 없는 미국의 숨겨진 일면을 드러낸다. 위험을 무릅쓴 자동차 묘기에서 차들은 뒤집혀지고 찌그러지기를 반복한다. 폐차장에 산처럼 쌓인 고물차들 사이로 허리가 굽은 노파는 유모차를 끌고 무언가를 찾는 것인지 헤매고 있다. 도금칠된 화려한 뉴욕의 빌딩 숲을 거니는 관광객들은 절대로 볼 수 없는 장면일 것이다. 그렇게,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프랑스인 감독은 관객들에게 1960년의 미국을 담아낸 만화경(萬華鏡)을 선사한다. 



*사진 출처: acedmagazine.com



*다음 글은 월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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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어버린 커피와 김빠진 맥주. 흘러간 옛 영화를 보는 것이 가끔은 풍미를 잃은 커피와 맥주를 들이키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카렐 라이츠(Karel Reisz) 감독의 데뷔작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 1960)'을 보면서 느낀 감정이 그러했다. 이 영화에서 카렐 라이츠는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영국의 새로운 영화 사조 '프리 시네마(Free Cinema)'의 주역으로서 현실에 천착하는 사실주의와 영화의 결합을 보여준다. 이른바 '싱크대 사실주의(Kitchen Sink Realism, 표현주의 화가 John Bratby가 주방 싱크대, 쓰레기통과 같은 일상적 소재로 그린 그림에서 유래)'의 영향은 당시 영국의 문화 영역 전반을 아우른다. 그것은 하층 노동자 계급의 실제적 삶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성과 낙태, 범죄에 대한 소재까지 다루었다.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은 어떤 면에서 그 사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자전거 공장에서 선반공(旋盤工)으로 일하는 청년 아서는 고된 노동을 주말의 여흥과 음주로 달랜다. 그는 직장 동료의 아내 브렌다와 불장난 같은 밀회를 이어가고 있다. 우연히 알게 된 도린과 진지한 연애를 시작하지만, 아서는 결혼 생각은 하고 싶지가 않다. 그 즈음, 브렌다는 임신 사실을 알리고 아서는 낙태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아서의 뜻대로 되어가지 않는다. 브렌다의 낙태는 여의칠 않고, 아서와의 관계를 알게 된 남편의 군인 동생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다. 고된 육체 노동으로 부모와 자신의 생계를 겨우 해결하는 삶, 결혼은 멀고 답답하게만 느껴지고 그렇다고 별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서의 청춘에 볕들 날은 있는 걸까?

  혈기왕성한 이십대의 청년 아서에게 현실의 모든 것은 불만족스럽다. 그가 하는 공장일은 위험하고 고된 것이다. 기계에 손이 끼여서 절단되는 산재 사고는 일상적인 일로 여겨지고, 쥐꼬리만큼 받는 주급 14파운드에서 3파운드는 세금으로 뜯긴다. 부모와 함께 사는 그의 수입 대부분은 먹고 사는 데에 쓰인다. 남는 돈 몇 푼은 주말의 폭음으로 낭비된다. 한마디로 아서에게는 삶의 낙이 없다. 그런데 나이든 윗 세대들, 그 꼰대들은 '옛날이 좋았어'라든지, '인생을 즐기고, 착실하게 살라구'라는 소리를 걸핏하면 해댄다. 아서는 그런 말이 제일 듣기 싫고 역겹다. 꼰대들의 좋았던 시절이 어땠는지는 모르겠고, 지금의 현실은 수채구멍처럼 역겹고 냄새날 뿐이다. 전쟁과 혁명이 젊은 세대들에게 변화의 역동성을 가져다 주었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아서는 현실에 순응해야하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아서는 자신의 화를 폭음과 욕설, 장난으로 해소한다. 아서가 사는 하층 주거 단지는 벌집처럼 이어져 있는데, 이웃의 수다쟁이 벌 부인과 아서는 사이가 좋지 않다. 유부녀를 만나고 다닌다는 험담을 떠들고 다니는 벌 부인에게 공기총을 쏘아 골탕 먹이고 조롱한다. 공장에서는 쥐의 사체를 부품 상자에 두어 늙은 여직원을 기겁하게 만드는 장난을 친다. 몸뚱이는 어른인데, 하는 짓은 애들 같다. 아서의 이런 미성숙하고 제멋대로인 행동은 그가 자신의 진지한 인생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무지한 청춘은 낙태 문제를 상담하러 고모에게 달려간다. 그는 어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서는 어른이 된다는 건 기성 세대와 지배 계층이 깔아놓은 판에서 비굴하게 사는 일이라 생각한다. 사촌과의 대화에서 아서는 체제에 고분고분하게 길들여진 부모처럼 살기는 싫다고 말한다. 그가 마음에 들어하는 도린과의 결혼을 주저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So what?"

  영화가 보여주는 아서의 답답함과 울분은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야?'로 끝나고 만다. 그 시절에 영국에서 만들어진 소설, 연극, 영화, TV는 노동자 계급의 일상과 현실의 부조리를 가지고 참 많이도 울궈먹었다. 아마도 특정 '사조(思潮)'의 흥망성쇠는 그 우려내 먹는 기간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토니 리차드슨(Tony Richardson)이 그 무렵에 만든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59)', '꿀맛(1961)', 린제이 앤더슨의 'This Sporting LIfe(1963)' 같은 영화들. 결국 그런 영화들이 보여준 것은 영국이란 사회의 견고한 계급적 폐쇄성이었다. 표현과 비판으로서의 예술은 그 사회가 굴러가는 방식에 별 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오히려 하층 계급의 문화적 소비재가 되어, 불만의 적당한 분출구를 만들어 줌으로써 안정적 체제의 윤활유 같은 역할을 했을 뿐이다.

  현실의 'Angry young man'도 먹고 사는 것에 매여 살다 보면 '착실하고 온순한' 기성 세대가 되어 버린다. 아서가 짜증스럽고 역겹게 생각하는 기성 세대를 '욕받이' 꼰대로 취급하는 것은 매우 쉬운 방법이다. 불만족스럽고 힘든 현실에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아서는 그런 변화를 위한 그 무엇도 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아서는 도린과 함께 교외의 언덕에서 주택 단지를 바라보며 자신들이 살 집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이제 진짜 '어른'이 되려는 걸까? 영화 속에서 술 취해 거리의 가게 유리창에다 돌을 던진 늙은이처럼 아서는 멀리 있는 그 집들을 향해 심통이 나서 돌을 던진다. 잔뜩 화가 난, 답답한 청춘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난다. 그의 짜증과 분노는 아무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짧게 쉬고 즐길 수 있는 주말이 지나가면 다시 일해야 하는 지겨운 월요일이 돌아온다. 영화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의 정서는 일요일 저녁에 직장인들이 느끼는 긴장과 우울감과 맞닿아 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사진 출처: eastman.org    아서 역의 배우 알버트 피니(Albert Fin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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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영화 '광란의 오후(One False Move)'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약간 들떠있다. 아칸소 주 스타 시티라는 작은 시골 마을의 경찰 데일 딕슨은 LA 경찰국으로부터 마약상들을 잔인하게 죽인 3인조 강도가 자신의 마을에 들를 수 있다는 연락을 받는다. 매일의 일상에서 별 일이라고 해봐야 술 취한 남자가 집 문짝을 도끼로 부수는 걸 말리는 정도인 딕슨에게 그것은 진짜 경찰 업무를 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진다. LA에서 파견된 경찰 콜과 맥필리와 함께 딕슨은 범죄자들을 기다린다. 이 마을 출신의 환타지아와 애인 레이, 뛰어난 지능을 가진 냉혈한 플루토는 마약상들에게서 탈취한 마약을 거래하기 위해 휴스턴으로 향하는 중이다. 그들이 기대한 거래는 결렬되고, 환타지아는 고향집에 있는 어린 아들을 보기 위해 이탈한다. 레이와 플루토는 환타지아를 찾기 위해 스타 시티로 향하고, 어리버리해 보이는 시골 경찰 딕슨에게 그렇게 위기의 시간이 다가온다.

  칼 프랭클린(Carl Franklin) 감독의 '광란의 오후(One False Move, 1992)'는 잔혹한 살인 장면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불안하고 흥분하기 쉬운 레이(빌리 밥 손튼 분)와는 달리 플루토(마이클 비치 분)는 뛰어난 두뇌와 침착성으로 서슴없이 마약상들을 죽이고 마약을 탈취한다. 이 장면을 보는 것은 꽤나 곤혹스럽다. Pluto(그리스 신화에서 저승의 신 Hades의 영어식 명칭)라는 이름처럼 그는 자신에게 방해되는 것은 칼을 사용해 무엇이든 저승으로 보낸다.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냉혹한 살인마로 실질적인 강도단의 리더인 그는 흑인이다.


  이 영화에서 '인종'이란 요소는 매우 중요하고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레이의 부주의하고 다혈질적인 성향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것도 플루토이다. 마약에 절은, 팔에는 지저분한 문신으로 도배한 레이는 전형적인 백인 루저의 모습을 보여준다. 레이의 흑인 애인 환타지아는 이 강도단에서 제일 하부에 위치하고 있다. 새된 목소리로 우는 소리나 하고 약하게 보이지만, 자신이 가진 성적 매력으로 레이를 조정하며 마약 탈취극에서 자신의 몫을 해내는 대범함을 가졌다. 영화에서 이 기묘하고 불안정한 3인조 강도단의 이야기가 서사의 한 축을 이룬다.

  빌리 밥 손튼은 시나리오 작가 톰 에퍼슨과 함께 공동으로 작업에 참여했다. 남부 아칸소 출신인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남부의 정서와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광란의 오후'에 밀어 넣었다. 빌 팩스턴이 연기한 시골 경찰 딕슨은 남부인의 한 유형을 보여준다. 현명하고 따뜻한 성품의 아내와 8살 난 딸이 있는 그에게는 시골 사람의 순박한 정서가 엿보인다. 딕슨은 LA에서 온 경찰 콜과 맥필리를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하고 환대한다. 그는 콜에게 시골에서 벗어나 LA 경찰이 되고 싶다는 꿈을 털어놓지만, 그의 이런 솔직함과 순진함은 콜과 맥필리에게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 된다. 딕슨이 없는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진 두 경찰의 대화는 도시인이 시골 사람에게 가진 편견과 우월의식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 도시 경찰들은 뭐 좀 대단한가? 백인인 콜은 알콜 문제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커피를 달고 사는 것은 물론 수시로 술을 마신다(아침 해장술로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흑인 동료 맥필리는 비만으로 탐식하는 성향이 있음을 드러낸다. 이 영화가 그렇게 삽화적으로 묘사하는 경찰의 모습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그렇게 또 다른 한 축으로 진행되는 경찰들의 서사는 강도단의 도착을 기다리며 이어진다. 처음의 강렬한 도입부에 비해 이후의 이야기들은 좀 늘어진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추격전도 총격전도 없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만 나누고 있을 뿐이다. 영화는 얼핏 보기에 싸구려 B급 영화, 마약과 범죄가 등장하는 그저 그런 exploitation 영화 같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도시와 시골의 격차, 인종 갈등 같은 다층적인 문제들이 드러난다.

  "난 감옥에 갈 만한 죄를 짓지 않았어. 경찰의 말은 거짓이야. 흑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거라고 보는 그 시각이 유죄라고."

  고향에 도착한 환타지아는 마중하러 온 동생이 경찰에게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묻자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오는 길에 이미 순찰 경찰을 쏘아 죽인 환타지아는 결코 무죄가 아님에도 뻔뻔하게 그런 말을 뱉는다. 이런 인종 문제는 환타지아의 어린 아들이 딕슨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암시에 이르면 기이한 울림을 준다. 환타지아의 동생은 자신의 조카를 'half-mixed'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옅은 피부색의 그 아이를 보며 딕슨은 죄책감과 고통을 느낀다. 경찰로서 환타지아를 체포해야한다는 의무감과 인간적인 감정 사이에서 딕슨은 갈등한다. 딕슨이란 캐릭터는 그렇게 미국의 역사, 노예제의 본산지였던 남부의 원죄와 부채의식을 상기시킨다.

  레이와 플루토의 도착은 결국 광란의 혈투로 이어진다. 플루토의 칼에 찔린 딕슨은 구급차를 기다리며 땅에 누워있다. 칼 프랭클린은 해가 내려쬐는 뜨거운 한낮의 참혹한 풍경 속에 미국이 가진 근원적 문제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딕슨이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남부의 그 땅에는 인종 차별과 내전, 폭력의 기억이 드리워져 있다. 오래 전의 피냄새는 사라지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진다. '광란의 오후'를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칼 프랭클린이 보여주는 응집된 캐릭터 묘사, 역동적이고 경제적인 화면 구성과 주제 의식은 이 영화가 가진 장점이다. 영화의 제목 'One False Move'는 백척간두의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 수 있는 한 끗의 실수를 의미한다. 피와 폭력의 세계에서 one false move는 죽음과 같다. 매우 음울한 영화이지만, 살아남은 딕슨과 아이의 존재는 희망의 빛을 옅게나마 드리운다.



*사진 출처: listal.com   딕슨 역의 빌 팩스턴(Bill Paxton)은 아주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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