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Another Sky'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좋은 교육을 받았다. 옥스포드에서 영문학을 배우던 그는 학위를 따려면 중세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듣고 학교를 떠났다. 재학 중에 그는 훗날 영국 프리 시네마(Free cinema)의 주역으로 떠오른 카렐 라이츠, 린제이 앤더슨과 친구가 되었다. 영화에 대한 흥미는 곧 직업적 경력으로 이어졌다. 편집과 시나리오 작업을 했고, 자신의 영화도 찍었다. 어렵게 찍은 영화는 개봉도 하지 못했다. 그의 영화 경력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이어졌다. '이유없는 반항(1955)'으로 유명한 감독 니콜라스 레이의 개인 비서가 되었고, 레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도 맡았다. 동성애자로서 그는 레이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자신이 보고 들은 할리우드 배우들의 개인사에 관심을 가지고 전기 작가로 책을 펴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개빈 램버트(Gavin Lambert), 'Another Sky(1954)'는 그가 남긴 유일한 영화이다.

  젊고 단아한 영국 여성 로즈는 부유한 중년 여성 셀레나의 비서로 일하기 위해서 낯선 나라 모로코로 왔다. 로즈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흥미롭다. 셀레나가 잘생긴 한량 마이클을 애인으로 두고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모습에도 익숙해진다. 로즈는 나이든 현지인 통역 아흐메드의 안내를 받아 마라케시 곳곳을 탐방하며 이국 생활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어느 날, 셀레나와 마이클을 따라 간 파티에서 로즈는 젊은 악사 타예프에게 반한다. 아흐메드의 도움을 받아 타예프와의 밀회를 이어가던 로즈는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이별을 결심한다. 로즈는 타예프에게 이별을 고하려고 하지만, 타예프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타예프를 꼭 만나야 한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로즈는 셀레나의 돈까지 훔쳐서 타예프를 찾아 나선다.

  이 영화에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모로코의 풍광과 현지인들의 모습이다. 마치 민속지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의 이 영화는 매우 충실하게 1950년대 모로코의 모습을 담는다. 로즈가 둘러 보는 시장의 모습들은 다채롭다. 코브라 쇼, 민속 악기 공연, 미로처럼 얽힌 주거 지역의 골목길, 온갖 토속 물건을 판매하는 상점들은 영화의 이국성을 배가시킨다. 그 이국성의 정점은 로즈가 타예프를 찾아 헤메는 사막에서 절정을 이룬다. 뜨거운 모래 바람이 부는 사막에서 로즈는 길을 잃는다. 영화가 모로코의 풍경을 담아내는 방식은 조화롭게 이루어지며, 그것은 영화의 서사와 유기적으로 결합한다. 셀레나를 비롯해 그 주변인들이 보여주는 현지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우월적 지위는 명백해 보이지만, 로즈는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불편하게 느끼고 결국 거기에서 이탈한다. '사랑'은 로즈가 가진 모든 것을 던져버리게 만든다.

  얼핏 보기에 그 사랑은 제국주의로 대표되는 백인 여성의 젊은 현지 남성에 대한 기묘한 열정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 개빈 램버트의 성 정체성은 그에 대한 다른 해석을 요구한다. 타예프를 로즈의 애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과정에는 분명히 램버트의 개인적 욕망의 투사가 들어가 있다. 로즈의 사랑은 무모하고, 용인받지 못하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타예프와의 밀회에서 로즈는 타예프를 비롯해 만남을 중개하는 아흐메드, 마차꾼에게 돈을 지불한다. 그것은 감정의 교류가 아닌 '거래'일 뿐이다. 그 거래는 죄의식과 수치심을 동반한다. 그럼에도 로즈는 자신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거부할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로즈는 마침내 사막으로 떠난다.

  '사막'이란 장소가 갖는 무국적성은 자유와 해방, 일탈과 모험을 가능하게 한다.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 1996)'의 알마시 백작의 절절한 불륜의 사랑이 펼쳐지는 장소도 사막이었다. 여러 할리우드 영화들이 이 '사막'의 공간성을 정형화된 방식으로 소비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사랑(The Sheltering Sky, 1996)'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결혼 10년차의 권태기에 접어든 미국인 부부 포트와 키트는 알제리로 여행을 떠난다. 이들에게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여행은 그들의 삶을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끈다. 이국의 도시와 사막에서 삶의 새로운 활력을 찾는 것처럼 보였던 부부에게 불운이 찾아온다. 포트는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음에 이르고, 키트는 남편을 떠나 사막을 무작정 헤맨다. 아마도 페미니즘의 시각에서는 극악의 텍스트로 여겨질 이 영화에서 키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현지인의 성적인 착취와 유린을 사랑의 감정으로 혼돈한다. 키트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음에도 스스로 낯선 나라의 '길 잃은 자'가 되기를 택한다.

  '마지막 사랑'은 1949년에 폴 보울스(Paul Bowles)가 쓴 'The Sheltering Sky'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인이면서 모로코 탕헤르로 이주해서 생의 대부분을 보낸 그는 특이한 이력을 지닌 이였다. 현대 음악 작곡가였으며, 작가로서도 활동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The Sheltering Sky'는 출간 당시에 큰 인기를 얻었다. 젊은 부부가 이국의 여행지에서 겪게 되는 비극이 개빈 램버트에게도 영감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영화의 제목 'Another Sky'는 그 소설의 영향력을 드러낸다. '사막'이라는 공간, 그리고 엇나간 일탈의 사랑이라는 보울스의 소설에서 차용한 요소를 램버트의 영화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서사화한다. 원작자 폴 보울스도 램버트와 마찬가지로 동성애자였다. 그들이 선택한, 그리고 매혹된 '사막'이란 장소는 기이한 울림을 준다.

  결국 'Another Sky'의 로즈는 감독 개빈 램버트의 영화적 자아인 셈이다.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편견과 차별의 대상이 되는 동성애자로서 그는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혀 기꺼이 사막에서 길을 잃으며, 그곳에서 남아있기를 원한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로즈의 타예프를 향한 욕망을 죄악시하지 않는 이 세상의 유일한 장소로서 사막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로즈는 자신을 구해준 현지인의 아내가 되어, 그들의 옷을 입고 사막의 흙집에서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영화는 '로즈라는 여자는 5년 전에 이 사막에서 죽었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사막에서의 그 '죽음'은 로즈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한다. 자신을 옥죄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동성애자 감독 램버트의 바램은 그렇게 영화적으로 실현된다. 



*사진 출처: mom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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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엔리코 4세'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는 연극학 전공자들에게 매우 친숙한 이름이다. 희곡 '작가를 찾는 6인의 등장인물'에는 작가가 창조한 희곡 속 등장인물들을 두고 모델이 된 실제 인물들의 싸움이 리허설 장면에서 펼쳐진다. 현실과 허구를 오가는 이 독특한 희곡은 피란델로의 대표작으로 그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진짜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그가 1921년에 쓴 희곡 '엔리코 4세'에도 그런 질문이 동일하게 반복된다. 여기에, 피란델로는 '광기'라는 요소를 추가한다. 작가는 자신이 역사 속 인물 '엔리코 4세'라고 믿는 광인의 이야기를 통해 정상과 비정상, 현실과 환상, 기억과 정체성에 대해 다룬다. 이탈리아 감독 마르코 벨로키오(Marco Bellocchio)의 1984년작, '엔리코 4세(Enrico IV)'는 피란델로의 희곡을 원작으로 만들어졌다.

  영화는 차에 탄 이들이 한적한 시골에 자리한 성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성에는 20년전의 낙마 사고로 정신이상이 된 놀리 후작의 삼촌이 살고 있다. 자신이 '엔리코 4세'라고 믿는 남자는 부유한 여동생의 경제적 지원으로 미친 왕 노릇을 하며 살 수 있었다. 그에게는 시종들과 광대도 있다. 왕관을 쓰고 왕의 복장을 한 엔리코 4세와 중세의 옷을 입은 시종들과 광대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놀리 후작은 삼촌의 정신병을 낫도록 하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실행하기 위해 그곳에 왔다. 정신과 의사, 엔리코 4세의 젊은 시절의 친구 벨 크레디, 젊은 시절 엔리코 4세가 짝사랑했던 마틸다, 마틸다의 딸 프리다가 광인의 치료를 위한 사이코 드라마의 배역을 연기한다. 엔리코 4세에게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의 배역을 맡는다. 엔리코 4세(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하인리히 4세의 이탈리아식 발음)의 정적이었던 카노사의 성주 마틸다를 비롯해 교황의 사절, 수도승, 엔리코 4세의 젊은 시절의 연인, 이렇게 20세기의 현대인들은 중세의 복식을 갖추고 광인 엔리코 4세의 과거와 내면 세계로 들어간다.

  치료를 가장한,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이 희한한 연극은 엔리코 4세(그는 이름이 없으며 '폐하'로 불릴 뿐이다)가 미쳤다는 전제하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연극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들이 배역을 나누고 대사를 외우는 장면이 엔리코 4세에 의해 포착된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진짜 왕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악사들에게 연주를 지시하고, 시도 때도 없이 광기를 표출한다. 왕은 정말 미친 것일까? 엔리코 4세는 자신을 위해 연극하는 이들의 허를 찌른다. 수도사를 연기하는 정신과 의사에게 클뤼니(중세 수도원으로 유명한 도시)로 가는 빠른 길이 어딘지 아느냐고 짐짓 시험하듯 물어 본다. 의사는 쩔쩔매며 대답을 얼버무린다. 이 미친 왕은 그곳에 가는 길에 해산물 식당이 유명하다는 말을 덧붙인다. 악사들에게는 그들이 다 돈 받고 일한다는 거 안다는 말도 한다. 왕은 그들의 중세식 가짜 이름이 아닌, 진짜 이름도 다 알고 있다.

  영화는 원작 희곡을 충실하게 재현해 낸다. 희곡은 현실과 과거가 인물들의 대사를 따라 어지럽고 복잡하게 교차되어 나타난다. 영화는 플래시백(flashback)으로 비교적 간명하게 그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원작이 가진 난해함은 영화 밑바닥에 여전히 깔려있다. 벨로키오 감독은 원작 희곡의 엔리코 4세의 독백을 상당부분 생략했고, 실험적인 시도 대신에 전통적인 서사를 따른다. 엔리코 4세가 보여주는 광기와 정상의 모호한 경계를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는 훌륭하게 소화해 낸다. 여기에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탱고 음악 작곡가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잊을 수 없는 영화 음악까지 더해진다. 영화에 흐르는 '망각(Oblivion)'은 매우 잘 알려진 그의 대표작이다.     

  자신을 진짜 왕이라고 믿는 남자의 광기는 치료되었을까? 시작부터 어설펐던 방문자들의 연극은 실패로 돌아간다. 선글라스를 쓰고, 담배를 피우는 왕은 20년 전, 자신을 말에서 떨어뜨린 사람이 연적이었던 벨 크레디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때부터 그는 광인으로 연기하면서 살아왔다. 광인의 삶은 불행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스스로 광기를 인생에 불어넣은 이 남자는 자신이 구축한 가짜의 세계 속에서 안식을 느끼며,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그 '진짜' 세계를 허물고 부인하려는 방문자들의 시도를 그는 거부하며 좌절시킨다. 엔리코 4세가 아닌 평범한 중년 남자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을 그는 원하지 않는다. 그가 벨 크레디를 칼로 찌르는 것은 단지 과거의 일에 대한 복수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 그는 진짜 광인이 되어, 이제까지 살아왔던 '왕'으로서의 자신의 삶의 방식을 지켜내고자 한다.   

  루이지 피란델로가 '엔리코 4세'를 쓴 것은 1921년, 초연이 된 것은 이듬해인 1922년이었다. 그 해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재자 무솔리니가 집권한 해였다. 피란델로는 파시즘을 지지했고, 무솔리니 정권과 영합하는 행보를 보였다. 어떤 면에서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제시한 거대한 환상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독재자가 설계한 환상의 세계를 진짜라고 믿었던 이탈리아 국민들은 쓰디쓴 배반의 현실로 돌아와야만 했다. 피란델로의 '엔리코 4세'의 주인공은 보잘 것 없고 별 볼 일 없는 현실 대신에 광기와 거짓으로 가득찬 '왕'의 삶을 택한다. 그의 모습은 기묘하게도 기만적인 가면을 쓰고 이탈리아 정치계에 등장했던 무솔리니와 닮아있다. 영화의 마지막, 미친 왕의 칼에 찔린 벨 크레디와 함께 방문자들은 황급히 퇴장한다. 왕은 자신의 성채와 광기 속에 다시 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관객들은 '엔리코 4세'에서 현실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광기와 환상의 견고한 힘을 발견하게 된다.



*사진 출처: it.wikipedia.org   엔리코 4세를 연기한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

 

*다음글은 월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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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 코드 시대(Pre-Code Era)의 두 영화에 나타난 결혼 제도와 여성: 'What Price Hollywood?(1932)'와 'Millie(1931)'의 경우


*이 글에는 'What Price Hollywood?(1932)'와 'Millie(1931)'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이디 가가 주연의 영화 '스타 탄생(A Star Is Born, 2018)'은 꽤 오랜 기원을 가지고 있다. 1976년에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주연을 맡은 영화가 있고, 1954년 영화에서는 조지 큐커 감독이 주디 갈란드와 함께 작업했다. 그 이전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윌리엄 A. 웰먼 감독의 1937년작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 영감을 준, 어떤 면에서 이야기의 원형인 작품은 조지 큐커 감독의 'What Price Hollywood?(1932)'이다. 이 영화는 'Hays Code'라고 불리는 미국의 검열 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이전의 '프리 코드 시절(Pre-Code Era, 1930-1934)에 만들어졌다.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시스템과 스타 산업의 이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이 독특하고 매력적인 작품은 이후에 만들어진 '스타 탄생'의 원석과도 같다.

  배우 지망생 메리는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유명 감독 맥스를 알게 된다. 그는 스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할리우드의 유력 인사로 메리가 영화계로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 재능있는 감독이지만 늘 술어 절어 사는 그는 메리의 빛나는 배우 경력을 함께 한다. 메리는 잘생긴 바람둥이 폴로 선수 로니와 결혼한다. 바쁘게 정신없이 돌아가는 아내의 배우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는 얼마 안가 이혼을 택한다. 한편 술 문제로 경력에 손상을 입은 맥스는 어려움에 처한다. 메리는 맥스를 따뜻하게 보듬지만, 맥스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으로 세상을 뜬다. 그 일로 메리는 스캔들 속에 은퇴를 택한다. 프랑스의 시골에서 은거하던 메리에게 남편 로니가 찾아오면서 영화는 끝난다.

  조지 큐커 감독은 'What Price Hollywood?'로 시작한 할리우드 이야기의 완결판을 1954년의 영화로 마무리지었다. 이 영화는 '스타 탄생'과 다른 몇몇 지점을 보여준다. 어려운 처지의 배우 지망생이 등장하는 것은 기본 설정이지만, 스타가 된 이후에 결혼의 상대자는 '감독'이 아니라 인기있는 유명 '운동 선수'다. 분명히 메리는 자신을 스타의 길로 이끈 감독 맥스에게 고마움과 함께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적인 호감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며, 어디까지나 은인에 대한 마음이 더 크다. 메리와는 달리 맥스의 감정은 모호하고 불분명하다. 그는 제작사의 사장과 함께 메리의 중요한 개인사인 결혼과 임신을 논의하고 그 결정에 함께 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맥스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객들이 알아차리는 일은 쉽지 않다. 다만 그가 술에 취해 한밤중에 메리의 집을 찾아가 부부가 자고 있는 침실에까지 들어가서 주정을 하는 장면은 하나의 단서가 된다. 그는 자신이 발탁해서 키운 배우 메리와 유부녀 메리와의 간극을 극복하지 못한다.

  비록 메리와 맥스 사이의 연애 감정에 대한 그 어떤 암시도 존재하지 않지만, 메리의 태도도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결혼한 메리의 집 거실에는 맥스의 사진이 놓여있다. 스타 배우 메리가 있게 만든 장본인, 메리의 정신적 지주로서 맥스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술로 인해 맥스의 경력이 추락한 것을 메리는 가슴아파한다. 술에 취해 유치장에 갇힌 맥스를 빼내오는 것도 메리이다. 맥스는 '스타 탄생'에서 술 문제를 일으키는 감독 남편의 자리로 치환된다. '프리 코드' 시대에는 남편이 아닌 남자를 인간적인 연민으로 보살피는 여주인공의 행동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검열 규정이 적용되면서 외간 남자의 존재는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영화를 위해서 삭제되어야만 했다.

  반드시 옹호되어야할 결혼 제도의 가치, 결혼한 여성이 어머니와 아내로서 지켜야할 덕목이 1934년 이후의 검열 규정에서 적용된다. 1931년에 만들어진 프리 코드 영화인 존 프랜시스 딜론(John Francis Dillon) 감독의 '밀리(Millie)'는 결혼 제도에서 이탈한 여성의 굴곡진 인생사를 그려낸다. 부유한 사업가 잭과 결혼한 순박한 아가씨 밀리는 곧 남편이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린 딸의 양육은 부잣집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밀리는 과감히 이혼을 택한다. 이 강단있는 여성은 자존심 때문에 위자료도 받지 않고, 혼자서 삶을 개척해 나간다. 호텔 상점의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밀리는 돈많은 중년 남자 지미와 젊고 매력적인 토미의 구애를 받는다. 하지만 그 둘 가운데 누구도 택하지 않고 밀리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밀리는 열여섯 살이 된 자신의 딸에게 지미가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밀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미는 밀리의 딸에게 접근하고, 격분한 밀리는 지미를 향해 총을 쏜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밀리는 이혼 후에 싱글로서 방종하고 타락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남자들과 어울리며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산다. 밀리의 그런 삶은 경제적인 자립에 의해 가능했다. 자신의 직업적 경력(밀리는 나중에 호텔 매니저로 승진한다)에서도 밀리는 인정받는다. 그러나 밀리의 다른 두 친구들은 이른바 'gold digger'로 돈 많은 남자들을 낚기 위해 파티걸로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밀리'에서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여성 캐릭터들의 존재는 죄악시되지 않는다. 물론 연인에 대한 좌절된 애정을 연인의 딸(그것도 미성년자)에게 투사하는 남자가 등장하는 막장 설정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일은 프리 코드 시대에도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남자의 불순한 시도는 죽음으로 댓가를 치룬다. 16년 동안 돌보지 않은 딸을 위해 손에 피를 묻힌 엄마 밀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밀리는 살인죄로 기소당하지만, 딸의 증언으로 배심원들의 무죄 평결을 받고 풀려난다. 자신의 삶을 위해 남편과 딸을 떠나 독립적으로 살았던 이 여자는 그 어떤 비난이나 처벌을 받지 않는다. 아마도 영화 '밀리'의 검열 시대 버전은 킹 비더 감독의 '스텔라 달라스(Stella Dallas, 1937)'가 될 것이다. 딸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하층 계급 엄마의 모성은 충분히 칭송받을만한 것으로 포장된다.

  'Hays Code(정식 명칭 Motion Picture Production Code)'는 1930년에 도입이 결정되었으나, 그것이 실제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1934년부터였다. 검열을 수행할 사무국인 PCA(Production Code Administration)가 설립되기 이전의 4년 동안 할리우드는 마지막 표현의 자유를 누렸다. 이미 1915년에 미국의 대법원은 언론의 자유가 '영화'의 영역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강한 종교적 신념에서 나온 윤리적 가이드라인에 대한 요구는 초창기 영화 산업을 압박해 나가기 시작했다. 미국이 1919년부터 1933년까지 금주법이 시행된 나라였다는 점을 떠올려 보라. 대중을 상대로 흥행 수익을 내야하는 영화사와 제작자들은 전방위적으로 들어오는 대중 계몽을 위한 '바람직한 영화' 제작 요구에 부응할 수 밖에 없었다. 거의 비자발적으로 시행된 'Hays Code'는 그 타협의 산물이었다. 전직 우정사업본부장이었던 헤이스가 검열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실무적인 차원의 진짜 주역은 조셉 브린(Joseph Breen)이었다. 이후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국 영화는 브린의 윤리적 세계가 구현되는 거대한 장이나 다름없었다.

  'What Price Hollywood?'와 'Millie'는 프리 코드 시대 영화의 결혼 제도와 여성의 삶에 대한 느슨하고 허용적인 묘사를 보여준다. 폭력과 외설적인 면에서도 일정 부분 과감했던 그 시기의 유산은 단지 4년동안 제작된 영화들에 응축되었다. 미국 영화가 그 시절의 표현의 자유를 되찾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물론 프리 코드 시대에도 '인종'에 대한 관행적 묘사는 흑인 관객들에게 인내심을 요구했다. 두 영화에서 하녀들은 모두 흑인 배우가 연기한다. 머리에는 하얀 머릿수건을 쓰고, 검은색 드레스에 흰색 앞치마를 두른 흑인 하녀는 백인 여주인의 시중을 든다. 할리우드 영화가 인종 문제에 대한 개선된 사회적 인식을 반영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프리 코드 시대의 영화들은 초창기 미국 영화가 가진 다양성을 탐구하는 좋은 소재가 되어준다. 대공황 시기의 피폐했던 경제 상황 속에서 그런 다채로운 영화들이 당시의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었을 것이다. 검열의 시대가 그 즐거움을 앗아간 것은 미국의 관객들에게도, 영화사적으로도 커다란 손실이었다.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프리 코드 영화들은 닫혀지기 직전의 자유의 문 앞에 선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외침같다는 인상을 준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영화 'What Price Hollywood?'의 로웰 셔먼과 콘스탄스 베넷



**사진 출처 : tcm.com    영화 'Millie'의 헬렌 트웰브트리스와 로버트 에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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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밀루의 어떤 여름'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해외의 영화 블로거들 글을 보게 될 때가 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특이한 블로거가 있었는데, 고양이가 나오는 영화만을 리뷰하는 이였다. 애묘가임이 분명한 그는 리뷰 글에 올리는 사진도 오직 영화 속 고양이만을 캡쳐해서 올린다. '밀루의 어떤 여름'에도 고양이가 나온다. 주인공 밀루(미셸 피콜리 분)의 노모 뷰작 부인이 아끼던 검정 고양이는 의외로 영화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 고양이야말로 주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유일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여주인의 장례식을 앞두고 모인 가족들은 그다지 슬퍼보이지 않는다. 집안의 변호사가 도착해서 유언장을 낭독하기도 전에 노모가 남긴 재산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두고 신경전을 벌인다. 파리에서 일어난 1968년 5월의 시위는 남부의 한적한 시골 저택에도 영향을 미친다. 장례업자들의 파업으로 여주인의 시신은 기약없이 집안에 머무르게 된다. 격화되는 시위 소식과 그로 인한 두려움으로 이 부르주아 가족은 혼란에 빠지고, 마침내 숨겨진 갈등을 터뜨리기 시작한다.

  루이 말 감독의 1990년작 '밀루의 어떤 여름(Milou en mai, May Fools)'은 프랑스 68 혁명을 배경으로 장례식을 앞둔 부르주아 가족의 기이한 풍경을 그린다. 대저택과 넓은 땅을 소유한 밀루의 노모는 이 집안의 실질적인 여가장이다. 밀루는 그런 노모의 그늘에서 유유자적하며 지내다가,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으로 살던 집에서 나가야할 판이다. 동생 조르주, 교통 사고로 죽은 여동생의 딸 클레르와 함께 저택과 땅을 매각해 나누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언장을 뜯고 보니 나눌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하녀로 일했던 아델도 엄연한 상속자의 지위를 차지한다. 할머니의 보석을 몰래 꿍치는 밀루의 딸 카미유, 혁명을 옹호하며 열변을 펼치는 대학생 아들, 레즈비언으로 애인을 데려온 조카 클레르, 그 와중에 제수씨와 불장난을 벌이는 밀루, 여기에 시위대 때문에 도로가 막혀서 잠시 머물게 된 트럭기사는 아무렇지 않게 외설적이고 상스러운 말을 시도때도 없이 내뱉는다.

  화기애애한 가족들처럼 보이는 이들의 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균열에 균열을 거듭한다. 여기에는 저 멀리 파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혁명적 사태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밀루의 동생 조르주는 라디오를 끼고 살면서 뉴스에 나오는 시위의 향방을 예의주시한다. 파리에서 도착한 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 부르주아 가족의 걱정과 근심을 더하기에 충분하다. 당시에 대통령 드골은 파리에서 도피해야할 정도로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체제가 뒤엎어질 수도 있는 혁명의 상황은 이 가족의 윤리, 도덕, 사고의 체계를 흔들고 마비시킨다. 카미유는 어린 시절 친구인 집안 변호사와 눈이 맞고, 밀루의 아들은 사촌 클레르의 동성 애인과 연인이 된다. 화가 난 클레르는 가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트럭 기사를 유혹한다. 그들에게 거실 한 켠에 조용히 자리한 채 자신의 장례식을 기다리고 있는 여주인의 존재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괴상망칙한 가족의 폭주는 시위대를 피해 한밤중에 도착한 이웃 부부의 방문으로 가속화된다. 카미유는 자신들과 같은 부르주아가 폭도들의 먹잇감이 될 거라면서 근처 산으로 피신하자고 주장한다. 마치 전쟁의 피난 행렬처럼 그들은 산을 오른다. 처음에는 유쾌한 피크닉 같았던 도주는 비가 오고 밤이 되면서 긴장과 공포로 물든다. 이 가족들은 서로를 비난하고 욕하면서 위선적인 상대방의 모습을 까발린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성의 해방을 논하면서 희희낙락거리던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며 밑바닥을 드러낸다.

  루이 말은 자신이 보고 겪은 1968년 5월을 그렇게 이 영화에 투영시킨다. 여주인 뷰작 부인의 죽음은 드골로 상징되는 구 체제 프랑스의 죽음을 상징한다. 불어에서 국가 프랑스는 여성형 'la France'로 표기된다. 그가 보기에 68혁명은 정신나간 젊은이들과 기회에 편승한 좌파주의자들의 난동이었다. 루이 말은 시골 마을에 등장한 시위대의 모습을 희화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그들이 내건 잡다하고 시시껄렁한 구호를 조롱하며, 목적도 방향성도 없는 그 혼란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물론 시위대에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기성 세대와 기득권 계층의 무능도 그에게는 경멸의 대상이다. 국가의 일시적 죽음, 그렇게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에서 그 누구도 진심으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슬퍼하는 이들은 없었다. 죽은 뷰작 부인은 그렇게 집안 한 구석에 무관심 속에 누워 있다. 거실에 들어온 트럭 기사는 고인의 시신을 부주의하게 건드리다가 고양이에게 할큄을 당한다. 그랬다. 오직 고양이만이 자신의 주인을 지켰다.

  영화의 마지막, 드골의 파리 귀환과 함께 이 정신나간 가족들도 다시금 이성을 되착고 장례식을 끝마친다. 모두가 떠난 집에 밀루는 홀로 남는다. 그는 매각을 위해 포장된 집기들로 어수선한 거실에서 어머니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바라본다. 연주를 마친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왈츠를 춘다. 루이 말은 5월 혁명 이전의 세계와 그렇게 작별한다. 광기와 난동의 5월은 그렇게 끝났다. 드골은 이후의 총선거에서 대승을 했고, 구 체제는 성공적으로 복원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뷰작 부인은 죽었고, 그 집은 곧 팔리기로 되어있다. 1968년 5월 이후의 프랑스는 결코 이전의 프랑스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가치관, 정치적 신념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밀루의 어떤 여름'은 그 새로운 프랑스가 시작되는 시점의 이야기를 기묘한 부르주아 가족극을 통해 들려준다.  



*사진 출처: culture-vulture.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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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에 MBC에서 방영한 '경찰청 사람들'이란 프로그램이 있다. 1993년부터 1999년 초까지 방영되었던 이 프로그램은 실제 사건을 극화로 재구성해서 보여준다. '경찰청 사람들'이 독특했던 점은 요새 방영되고 있는 '이것은 실화다' 같은 재연 프로와는 달리, 실제 '경찰'들이 출연한다는 점이었다. 약간은 촌스럽고 강렬한 인트로 화면과 음악, 어색하지만 때론 좋은 연기력을 보여준 진짜 경찰들, 다양하고 극적인 실제 사건 이야기가 있어서 프로그램은 꽤나 인기가 있었다. 루마니아의 감독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Corneliu Porumboiu)의 2009년작 '경찰, 형용사
(Police, Adjective)'에도 경찰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2시간 가까운 러닝 타임 동안 긴박한 추격전도, 범인 검거도 없다. 통쾌하고 짜릿한 형사물을 생각하고 이 영화를 보려는 이들은 지루한 롱테이크와 그 어떤 별 다른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영화에 실망할 것이다. 보면서 무언가를 먹고 있다면 그걸 영화가 나오는 화면에 내던져 버릴지도 모른다.

  올해 마흔 다섯인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감독은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루마니아 국립 연극 영화학교에 들어가서 영화를 공부했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Vaslui를 배경으로 영화들을 찍었는데, 그 이유는 그곳이 그에게 영화를 찍기에 가장 친숙하고 알맞은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Cineuropa와의 인터뷰 참조). 역시 '경찰, 형용사'도 Vaslui에서 찍었다. 작은 도시의 경찰 크리스티는 잠복 근무 중이다. 대마초를 피우는 고등학생 세 명을 감시한다. 그의 일과는 잠복과 추적, 경찰서로 돌아와 근무 일지 쓰기, 퇴근 후 집으로 이어진다. 신혼인 그는 아내와 같이 밥 먹을 시간도 없다. 지방 검사와 서장은 고등학생들을 빨리 검거해 버리라고 닥달을 하지만, 크리스티는 체포를 주저한다. 루마니아에서 대마 소지와 흡연은 최대 7년형을 받을 수 있는 중범죄이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는 범죄가 아닌 행위로, 어린 학생들이 감옥에서 썩을 수 있다는 생각이 크리스티의 결정을 미루게 만든다.

  이 영화에서 포룸보이우는 롱테이크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크리스티가 용의자 학생들을 감시하고 따라가는 장면은 일관성을 유지하는 호흡으로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크리스티는 그들이 피우고 버린 꽁초를 수집하고, 눈에 띄지 않게 뒤를 밟는다.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그들의 집 앞에서 끈질기에 기다리고 차량 조회는 물론 누가 드나드는지 기록한다. 관객들은 이런 롱테이크를 응시하면서 크리스티와 잠복 근무를 함께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크리스티의 일상으로 들어온 관객들은 그가 경찰서에서 매일 부딪히는 짜증스럽고 지겨운 관료주의를 곤혹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용의자 가족들의 출입국 기록과 전과 조회가 필요한 크리스티는 무사안일하고 고압적인 타 부서 직원들의 태도를 참아내야 한다. '바쁜 거 안 보여? 지금 못해준다고'말하며 틱틱거리는 여권 담당자, '친구와 약속이 있는데 이걸 지금 꼭 빨리 해야해?'하며 미루는 여직원, 크리스티가 느낄 답답함과 울분에 관객들도 이입된다.

  그렇게 밖에서 일에 치여서 집에 들어왔더니, 아내는 사랑 타령 가사의 유행가를 큰 소리로 계속 틀어놓고 있다. 밥 먹는데 너무 시끄러워서 소리 좀 줄여달라고 했더니, 못들은 건지 하기가 싫은 건지 소리는 여전히 크다. 관객도 견디기 힘든 소음과 같은 노래를 들으며, 이 인내심 있는 신혼의 남편은 꾸역꾸역 밥을 먹는다. 그 와중에도 음식 만들어준 아내에게 맛있다는 인사를 챙긴다. 아내가 듣고 있는 사랑 노래 가사는 크리스티에게 너무 유치하다. 사랑을 들판의 꽃과 바다에 떠있는 태양에 비유한 노래가 도무지 와닿지 않는다. 크리스티에게 단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비유는 낯설고 이해하기 어렵다. 이 경찰관은 자신의 업무와 일상의 모든 것들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하는 사람이다.

  영화의 초반부에 비만한 동료 경찰이 크리스티의 풋살 동호회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를 맘에 들어하지 않은 크리스티가 조깅이나 테니스를 하라고 하자, 그는 그런 운동은 싫증이 났다고 말한다. 크리스티는 그가 풋살을 잘 하지 못할 것이라며, 그런 사람과 같이 운동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한다. 화가 난 동료가 도대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져 묻는다. 크리스티는 조깅도 테니스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운동도 잘 해내지 못한다며, 그것이 자신의 판단 근거라고 잘라 말한다. 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젊은 경찰은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도 깊이있게 성찰하며 그 성찰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린다. 중산층 부모를 둔 고등학생들이 대마초를 좀 피운다고 해서 사회에 커다란 해악이 되지 않을 뿐더러, 그런 그들을 가두는 법은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그의 생각은 경찰관이라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으며, 실제적으로 법을 적용하는 영역에 있는 그의 주변 사람들과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영화의 마지막, 10분이 넘는 롱테이크는 체포를 하지 않고 미루는 크리스티가 서장에게 불려가 질책을 받는 장면이다. 서장은 양심에 꺼려져서 학생들을 체포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크리스티에게 루마니아어 사전을 던져준다. '양심'과 '윤리', '경찰'이란 단어를 차례로 찾아서 큰소리로 낭독하게 한다. '경찰, 형용사'란 제목은 그렇게 루마니아어 사전에 쓰여있다. 명사와 동사로만 쓰이는 영어의 'police'와는 달리 루마니아어에는 '경찰의 업무를 수행하는' 이란 형용사로도 쓰인다. 서장은 크리스티가 생각하는 '양심'과 '경찰'의 의미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전을 이용한다. 크리스티에게 사전에 적힌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정의는 선뜻 와닿지 않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것은 그가 알아먹지 못하는 사랑 타령 유행가 가사와도 같다. 그 모든 언어적 정의는 결국 무용하며, 허섭쓰레기처럼 보인다. 서장은 법을 적용하는 '행동'과 '실천'이 경찰 업무의 본령임을 일갈한다.

  크리스티는 과연 '경찰'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가 수행해야할 경찰 업무는 '비판적 성찰'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각'이란 것을 하게 될수록 크리스티는 현실의 경찰이란 직업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크다.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는 젊은 경찰이 마주한 딜레마를 통해 '합리적 이성'을 배제한 기계적이고 무능한 관료주의의 폐해를 드러낸다. 이 정적(靜的)이며, 느리게 흘러가는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 세계는 통렬하기 짝이 없다. '경찰, 형용사'가 여느 형사물과 달리 탁월한 지점이 있다면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게 포룸보이우가 그려낸 어느 경찰의 초상은 관객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사진 출처: stiri.botosan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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