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에 EBS '세계의 명화'에서 'The Swimmer(1968)'를 방영한 적이 있다. 버트 랭카스터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독특하고 기이한 작품으로 내 기억에 남았다. 아주 가끔씩,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버트 랭카스터가 수영복 차림으로 비를 맞으며 야외 수영장을 배회하는 장면이었다. 그 시절 헐리우드에서 저런 영화도 만들 수 있다니 참 놀랍네,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은 프랭크 페리(Frank Perry)였다. 'Last Summer'는 그가 이반 헌터(Evan Hunter)의 소설을 원작으로 1969년에 만든 영화이다. 1968년, 미국 영화에 새로운 등급 시스템이 도입된다. 'MPA(Motion Picture Association) film rating system'은 기존의 검열 제도인 'Hays Code'를 대체했다. 'Last Summer'는 새롭게 만들어진 등급 시스템에서 'X 등급(Rated X; 16세 미만 관람 불가)'을 받았는데, 이는 TV 방영은 물론 일반 상영에서도 상당한 제약을 받는 등급이었다. 영화가 어떤 장면을 포함하고 있길래 그런 판정을 받았을까? 십대들의 방종하고 타락한 여름을 그린 이 영화는 오랫동안 과소평가되고 잊혀져 있었다.

  영화는 부유한 이들의 여름 별장지인 Fire Island의 해변가를 배경으로 한다. 샌디(바바라 허쉬 분)는 해변에서 낚시 바늘에 목을 다친 갈매기를 발견한다. 마침 지나가던 피터(리처드 토마스 분)와 댄(브루스 데이비슨 분)이 샌디의 갈매기 치료를 돕는다. 피터와 댄은 매력적인 샌디의 호감을 사려고 애를 쓰고, 샌디는 그들을 조종하며 군림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어느 날, 해변가에서 샌디가 갈매기를 끈으로 묶어 애완 동물처럼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본 로다(캐서린 번즈 분)는 샌디를 비난한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외로움을 느끼고 있던 로다는 차츰 그 세 명과 가까워진다. 로다는 피터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피터는 댄과 함께 샌디에게 매혹되어 있다. 제멋대로인 샌디는 로다에게도 지배적인 힘을 휘두르려 한다. 샌디는 전화 데이트 서비스로 만나게 된 푸에르토리코 남자를 골탕먹이기 위한 미끼로 로다를 내세우고, 남자가 동네 불량배들에게 얻어맞도록 내버려 둔다. 로다는 그 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샌디는 그런 로다를 무시하며 비웃는다. 그리고 마침내 샌디의 사악하고 잔혹한 면모는 로다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내몬다.

  영화에서 시종일관 도발적인 비키니를 입고 나오는 샌디는 성적인 매력으로 피터와 댄을 굴복시킨다. 그 세 명은 마치 하나의 몸을 이루어 같은 사고를 하는 유기체처럼 행동한다. 자신의 손을 쪼았다는 이유로 갈매기를 돌로 쳐서 죽여버리는 샌디의 행동은 이제부터 시작될 일탈의 신호탄 같다. 샌디의 어머니는 내연남과 어디론가 떠나서 별장은 비어있다. 그 빈 집은 부유하고 자유분방한 십대들의 방종의 공간이 된다.


  대마초 흡연과 성적인 일탈, 이것은 이 영화와 같은 해에 만들어진 '이지 라이더(Easy Rider, 1969)'와 기이한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마치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에서 무인도에 난파된 소년들이 야만성에 물들어가듯, 샌디의 비도덕적이고 가학적인 성향은 피터와 댄의 내면을 지배한다. 처음에 갈매기에서 시작했던 것이 사람으로 향한다. 야만의 3인조는 중년의 남자를 술 취하게 만들어 불량배들의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온다. 이 막 나가는 십대들에게 브레이크란 없다. 수줍고, 보수적이며, 도덕성을 지닌 로다는 샌디에게 거슬리는 존재가 된다. 샌디는 포식자들처럼 로다를 제압하고 지배력을 과시한다. 그렇게 샌디와 피터, 댄이 로다를 향해 드러내는 포식자의 야만성은 영화의 충격적인 결말을 이룬다.

  이런 영화는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영화가 주는 정서적인 불편함과 충격의 파장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Last Summer'는 당시 히피 세대의 일그러진 부분을 조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가 내포한 계급적 논의 또한 무시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여름 방학에 바다가 보이는 멋진 별장에 머물며, 요트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부유한 십대에게 금지된 것은 없다. 샌디의 저속하고 불온한 언사, 지배적인 성향, 그 모든 것은 샌디가 가진 계급적 특권 속에 포함되어 있다. 샌디는 자신에게 부여된 일탈의 권리를 마음껏 누린다. 그것은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대상(로다)에 대한 폭력으로 확장된다. 영화 'Last Summer'가 보여주는 약자에 대한 지배 계급의 잔혹성은 관객에게 지속적인 불안을 안겨준다.

  'Last Summer'는 영화의 35밀리 필름 프린트가 모두 소실되었다. 2001년에 호주 국립 영상물 아카이브에서 16밀리 프린트가 발견된 것이 유일하다. DVD 발매는 요원한 일이며, 오늘날의 관객들은 화질이 좋지 않은 VHS 영상으로 감상할 수 밖에 없다. 말 그대로 이 영화는 잊혀지고 버려졌다. 프랭크 페리가 자신의 영화들에서 보여준 비주류적 감수성은 지나치게 저평가되어 있고, 그것이 그의 영화의 불운한 현재 상태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는 세월의 우물 밑바닥에서 다시금 끌어올려질 필요성을 느끼게 만든다. 'Last Summer'가 보여주는 시대적 정서, 아울러 1970년대의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세대, 계층간의 갈등에 대한 예언적 상징성은 놀랍다. 부주의하고 나른한 청춘이 가진 포식자의 얼굴을 프랭크 페리는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포착한다.



*사진 출처: cine.nl

 


*다음 글은 월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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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이사(お引越し)'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삼각형의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세 명의 가족들을 비춰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초록색의 이 독특한 모양의 식탁 가운데에는 13살 딸 렌코, 엄마와 아빠가 자리하고 있다. 뭔가 심드렁해 보이는 부부는 서로 엇나가는 대화를 이어가고, 딸은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려고 애를 쓴다. 가족은 이사를 앞두고 있다. 드디어 이사한 새로운 집에서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쌓아가길 기다리는 렌코에게 엄마는 아빠가 주고 간 이혼 서류를 보여준다. 그렇게 다정한 아빠가 이제 더이상 집에 오지 않는다니, 렌코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 엄마 아빠가 따로 살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렌코는 어떻게 해서든 아빠의 마음을 되돌려 예전처럼 같이 살고 싶다. 그러나 어른들의 세계는 렌코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비와 호수로의 가족 여행을 몰래 계획한 렌코, 렌코의 부모는 다시 합칠 수 있을까?

  소마이 신지(相米慎二) 감독의 1993년작 '이사(お引越し, Moving)'는 부모의 결별을 마주한 소녀의 성장담을 그린다. 영화는 히코 타나카(ひこ・田中)가 1990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 속 렌코를 연기한 타바타 토모코는 8200명이 넘는 오디션 지원자들을 제치고 발탁되었다. 요정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게이샤로 가업을 이을 운명이었던 소녀는 그렇게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영화는 타바타 토모코의 연기에 큰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 신인인 어린 소녀의 연기 지도가 소마이 신지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닛카츠(日活) 영화사의 조감독 시절에 신인 여배우들의 연기를 지도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소마이 신지는 타바타 토모코를 렌코로 자연스럽게 만들어 버린다.

  부모의 별거는 렌코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렌코가 보여주는 모습은 마치 죽음을 앞둔 인간이 보여주는 5단계의 심리적 변화와도 비슷하다. 임종학 연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겪는 내적인 과정을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5단계로 정리했다. 렌코는 엄마가 건네준 이혼 서류를 숨기고 내어주지 않는다. 학교 친구들에게도 엄마가 아빠의 머리를 잘라주었다며 화목한 가정의 모습을 지어내 말한다(부정). 그러나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혼 가정의 급우 샐리는 렌코의 변화를 알아챈다. 아이들 사이에서 렌코는 거짓말장이가 되어버린다. 당차고 주목받는 아이에서 놀림거리가 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 힘든 렌코는 그 모든 원인을 부모의 탓으로 돌린다. 아빠에게 돌아와 달라고 매달리지 않는 엄마도, 딸인 자신을 생각하는 것 같지 않은 아빠도 밉다(분노).

  렌코는 적극적으로 부모의 결합을 위해 애를 쓴다(타협). 욕실에서 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는 소동을 겪은 뒤로 렌코의 부모는 렌코를 위해 자주 만나기로 한다. 렌코에게는 희망적인 변화이지만, 그것이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렌코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가족 여행을 통해 부모의 화해를 끌어내려고 한다. 하지만, 비와 호수를 찾은 아빠는 자신은 결혼 생활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딸에게 일러준다. 렌코는 자신의 그 어떤 시도로도 부모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좌절한다(우울). 영화는 변화시킬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고 우울감에 빠진 렌코가 '수용'의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영화의 후반부에 길고, 다소 지루하게 배치한다. 렌코는 홀로 호수 근방과 산 속을 헤맨다. 마침 열리고 있는 마츠리의 불꽃놀이와 호수에 띄워진 용선(龍船)의 장대한 풍경을 보며 렌코의 마음은 조금씩 새로운 삶의 변화에 열리기 시작한다.

  "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축하합니다)。"

  소마이 신지는 호수 위에 띄워진 불붙은 용선을 바라보며 과거의 렌코를 현재의 렌코가 끌어안는 것으로 소녀의 성장을 묘사한다. 렌코는 호수에서 몇 번이고 '축하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예기치 않게 주어진 상처를 견뎌낸 자신에게 렌코가 던지는 축복의 말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다. 렌코는 헤어질 수 밖에 없는 부모의 상황도, 그리고 아버지의 부재를 견디며 엄마와 함께 살아야하는 자신도 기꺼이 수용하게 된다. 

  여행을 마치고 교토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렌코와 엄마는 '숲속의 곰' 동요를 부른다. 훌쩍 자라버린 렌코에게 그 동요는 어딘지 모르게 어울리지 않지만, 렌코는 엄마 앞에서 모처럼 착한 딸을 '연기'한다. 엄마가 먼저 시작한 노래는 나중에 렌코의 선창을 엄마가 따라 부르게 된다. 렌코는 이제 엄마에게 마냥 기대고 바라보는 아이가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초등학생인 렌코가 어느새 교복을 입은 중학생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웃고 있다. 정지된 화면으로 포착된 그 장면은 비로소 렌코의 작은 성장의 여정이 완료되었음을 보여준다.

  교토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약간씩 서로 다른 간사이 사투리를 구사한다. 교토 출신의 타바타 토모코가 쓰는 간사이 사투리는 투박하면서도 귀엽다. 렌코의 부모를 연기한 사쿠라다 준코와 나카이 키이치의 연기도 꽤 좋다. 영화는 아이의 세계를 다루고 있지만, 어른의 세계인 부부가 겪는 갈등과 어려움도 잘 묘사되어 있다. 감독 소마이 신지는 한창 때의 나이인 53세에 폐암으로 세상을 떴다. 올해 초, 일본에서는 그의 사후 20주기를 맞이해서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영화 '이사'는 소마이 신지가 가진 감독으로서의 연출 역량이 집결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보여주는 사춘기 소녀의 성장을 위한 내적 여정은 가슴 찡하면서도 흥미롭다. 과거의 자신을 끌어안으며 성장하게 된 렌코의 모습을 보며 관객은 어린 시절의 자아와 마주하고 화해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 출처: note.com



**사진 출처: kookaimorita.livedoor.blog       감독 소마이 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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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워해야할 이유가 있는 사람을 미워하는 일은 쉽다. 나치 점령기의 프랑스의 어느 시골 마을, 조카딸과 함께 사는 시골 노신사는 자신의 집을 독일군 장교의 숙소로 징발당한다. 뜻하지 않게 적과 동거하게 된 노인과 조카는 독일군 중위 베르너에게 한결같은 침묵으로 대한다. 그들의 침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베르너는 매일 저녁, 노인과 조카가 있는 거실 벽난로에서 대화가 아닌 독백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노인과 조카의 단단한 침묵에 어느새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미워하는 점령군 장교가 매우 예의바른 사람이며, 예술적인 소양을 지닌 교양인임을 알게 된다. 비록 말로 이루어지는 그 어떤 대화도 없지만, 그들 사이에는 미묘한 감정의 교류가 생겨난다.

  장 피에르 멜빌(Jean-Pierre Melville)의 데뷔작 '바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Sea, 1949)'은 1942년에 출간된 작가 베르코스(Vercors)의 동명의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던 멜빌은 자신이 첫 장편으로 반전 문학 작품을 선택했다. 이 짧은 소설에는 그 어떤 거친 폭력이나 살상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노인과 조카의 내면 묘사와 독일군 장교의 혼잣말이 잔잔하게 펼쳐질 뿐이다. 멜빌은 소설의 그 단조로움과 고요함을 오로지 영상과 소리에 의지해서 풀어나간다. 영화의 서사 대부분이 노인의 집 거실 벽난로를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실제 작가의 집에서 이루어진 촬영은 그 비좁은 거실 공간을 다채롭게 제시하고 활용한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교의 발소리, 그가 거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 벽난로의 장작을 뒤적거리는 소리, 등장 인물들의 손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이 영화의 느슨한 서사를 메꾼다. 오히려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용된 영화 음악이 귀에 거슬리게 들린다.

  작곡을 전공했다는 베르너는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자신의 열렬한 애정을 고백한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점령군이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의 우호적 결합을 촉진하는 매개자의 위치에 둔다. 그는 그것을 '결혼'이라는 상징적 은유로 표현한다. 프랑스와 독일의 결혼, 하나의 아름다운 유럽. 베르너가 설파하는 이상은 식민의 역사를 지닌 우리 나라의 관객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다. 내선일체(内鮮一体), 즉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라는 일제 강점기 일제가 내세운 정책적 구호와 다를 것이 없다. 이 예의바른 독일군 장교는 노인과 조카딸에게 가진 인간적 호의, 소통에의 열망도 조심스럽게,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호소한다. '미녀와 야수'의 이야기를 빌어 자신을 '야수'의 외양이 아니라, 그가 가진 부드러운 내면의 덕성을 보아달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그의 그런 바램은 물에 풀린 물감처럼 노인과 조카딸의 마음에 스며든다. 

  이 예의바르고 예술적 교양으로 무장한 점령군 장교를 미워하는 것은 영화 속 노인과 조카딸 뿐만 아니라 관객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 된다. 그가 들려주는 바흐의 프렐류드 연주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의 나라와 광기에 찬 독재자를 미워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를 미워할 수는 없다. 저항의 의미로서의 침묵은 무너지기 직전이다. 베르너가 파리로 떠나있던 기간 동안 노인과 조카딸은 그의 귀환을 기다리게 된다. 노인은 그의 소식이 궁금해져서 사령부 건물에까지 가본다. 그는 이미 돌아와 있었지만, 노인의 집에 가지 않는다. 파리에 체류하면서 만난 동료들을 통해 그는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 소식을 듣는다. 그 충격적인 소식에 더해, 그가 가진 전쟁에 대한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관점은 동료들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베르너는 전쟁의 광기와 비인간성에 절망하고, 비로소 노인과 조카딸에게 했던 자신의 이야기의 허망함을 깨닫는다.

  멜빌은 원작 소설에는 없는 장면을 넣어서 명백한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베르너가 떠나는 날 아침, 노인은 자신이 책갈피에 끼워둔 종이를 베르너가 보게끔 놔둔다. '군인이 국가의 부도덕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미덕이다'라는 문구는 독일군 장교에 대한 노인의 유일한 의사 표현이다. 그러나 그들의 작별은 늘 그랬듯 침묵 속에 이루어진다. 제목의 '바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노인의 침묵이 상징하는 강력한 항전의 의지를 거대한 바다에 비유한 것일까? 그러나 침묵의 바다 아래에서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이 요동치며 들끓는다.


  실제로 나치에 반대하는 이들과 반전주의자들은 원작 소설을 쓴 Jean Bruller(Vercors는 필명이다)가 나치에 우호적인 소설을 쓴 거 아니냐며 거부감과 비난을 표명했다. 그 비판은 일정 부분 타당하다. 원작 소설의 베르너는 매우 양심적이며, 도덕적인 감수성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런 인간적인 나치 장교에 대한 연민과 동정, 점령지 주민이 침략자에 대해 느끼는 열패감과 두려움, 적개심과 호기심이 뒤섞인 모호한 감정들... 전쟁은 눈에 드러나는 파괴와 잔학스런 범죄 뿐만이 아니라 그 상황에 처한 여러 주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갈등을 포함한다. 피와 학살이 드러나지 않고, 포성이 들리지 않는 독특한 전쟁 영화 '바다의 침묵'을 통해 멜빌은 극한의 상황과 마주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 본다.   



*사진 출처: ny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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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사랑과 비둘기(Love and Pigeons, 1984)'는 감독 블라디미르 멘쇼프(Vladimir Menshov)가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1980)'로 대중적인 성공을 얻은 뒤에 찍은 작품이다. 블라디미르 구르킨의 희곡을 각색한 이 영화 또한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개봉 당시 4450만명의 관객이 영화를 보았으며, 이 영화를 아직도 기억하고 다시 보는 러시아 관객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담고 있길래 그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을까? 의외로 영화의 줄거리는 지극히 평범하다.

  강이 흐르는 시골 마을에서 목재 노동자로 일하는 바실리는 비둘기 사육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아내 몰래 생활비를 빼내어 비둘기를 사들이는 그에게 아내 나쟈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차분한 성격의 큰딸 류다,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은 아들 레오니드, 아버지를 이해하는 속 깊은 막내 올리야는 부부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이웃에는 알콜 의존증이 심한 삼촌 미챠와 그런 남편 때문에 속끓이는 숙모 슈라가 산다. 별 다를 게 없는 소소한 그들의 일상에 어느 날 일이 생긴다. 바실리는 일하다 얻는 부상 때문에 휴양지에서 쉴 수 있는 휴가를 받는데, 그곳에서 만난 라이사와 눈이 맞는다. 비둘기와 가족 밖에 모르던 바실리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라이사의 집에 머무른다. 바실리의 아내 나쟈는 상심해서 드러눕고, 자식들은 아버지의 행동에 상처받는다. 부유한 라이사의 생활 방식에 맞추지 못하던 바실리는 가족이 그리워진다. 다시 집에 돌아온 바실리. 과연 아내와 자식들은 그를 받아줄까?

  바람난 남편의 귀환을 둘러싼 가족 소동극은 겉보기엔 아주 흔하고 진부한 이야기 같다.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나쟈는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비탄에 빠진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걸 연기하는 배우 니나 도로시나(Nina Doroshina)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나쟈의 상황이 너무나 심각한데, 보고 있는 관객은 이 가족의 비극이 전혀 비극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멘쇼프 감독은 자신만의 상황에 몰입된 인물이 보여주는 희극성을 뽑아낼 줄 안다. 나쟈와 라이사가 머리끄댕이를 잡고 벌이는 육탄전도 우스꽝스럽게 연출된다. 그 웃음은 집에 돌아온 바실리와 아들의 대립에서 절정을 이룬다. 레오니드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한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며 도끼를 들고 설친다. 이에 바실리는 아들에게 목을 들이대며, '그래, 아비의 목을 쳐봐라'하면서 응수한다. 이 기막힌 소동극은 뭔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지속적인 웃음을 유발한다.

  그저 그런 코미디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 있을 것 같은 이 영화는 원작자 구르킨이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들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써졌다.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에 더하여 바실리의 삼촌 미챠가 보여주는 알콜 의존증의 모습은 당시 소련 사회가 가진 음주 문제의 심각성을 암시한다. 미챠는 늘 보드카를 숨기고, 아내 슈라와 바실리의 가족들은 그것을 막느라 애를 쓴다. 여러 번 반복되는 보드카 숨바꼭질은 관객들에게는 웃음거리일지 몰라도,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브레즈네프 시기의 경제 침체기를 거치면서 소련의 보드카 소비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구 소련의 1970년대 영화들에서도 이런 상황이 에피소드식으로 들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게오르기 다넬리야 감독의 '가을 마라톤(Autumn Marathon, 1979)'에서 보드카에 취한 스웨덴 교환교수 빌이 알콜 치료 센터에 하룻밤 구금되는 상황이 나온다. 그 센터는 마치 거대한 병동처럼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값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보드카는 소련 사람들에게 일상의 위안으로 깊숙이 자리잡았다. 알콜 중독이 노동 생산력의 손실과 조기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국가적 위험 요소임을 공산당 정부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류 판매가 국가 재정에 기여하는 점과 정권에 대한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출구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소련 당국은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85년, 고르바초프의 집권과 함께 상황이 급변한다. 알콜 중독을 국가적 질병으로 규정한 고르바초프는 강력한 알콜 규제 캠페인을 벌인다. 이 영화가 제작될 무렵은 이제 막 그 정책이 입안되려는 때였다. 검열 당국은 영화 속 음주 장면들에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주인공 바실리를 비롯해 미챠가 지나치게 많이, 자주 보드카를 마시는 장면을 삭제하도록 했다. 멘쇼프 감독은 영화의 이야기 진행상 그 장면들을 뺄 수 없다고 버텼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미챠가 보드카를 마시려는 시도는 가급적 실패하는 것으로, 또한 보드카 대신에 맥주로 대체된 장면이 들어갔다. 영화 '사랑과 비둘기'는 술과 관련된 부분 뿐만이 아니라, 불륜을 소재로 한다는 점도 검열 당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는 소재들이 국가가 강제한 사상적, 윤리적 가이드라인의 영향을 받았다. 소박한 시골 가족의 일상을 그린 코미디의 이면에는 그런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영화의 마지막, 등장 인물들은 모두 바실리가 키우는 흰 비둘기들이 하늘로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사랑과 화합을 이야기하며 끝나는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 안정적 체제에 대한 희구, 자기 위안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와 대립하던 아들은 군에 입대한다. 영화는 변경 배치를 자원한 레오니드를 내세워 국방의 의무를 역설한다. 소련 체제는 아직까지는 건재했다. 그러나 이미 체제의 밑바닥에서는 심각한 균열이 진행되고 있었다. 멀지 않은 시일에 소련은 곧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될 예정이었다.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희망의 미소는 잠정적이며 일시적인 것이었다. 영화에 잠재된 소련 사회의 알콜 중독 문제와 함께, '사랑과 비둘기'는 당시의 소련을 이해할 수 있는 영화 사회학적 텍스트로 손색이 없다.



*사진 출처: primemovies.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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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바실리스크(I basilischi)'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61년, 리나 베르트뮬러(
Lina Wertmüller)는 이탈리아 남부를 여행하는 길에 아버지의 고향 Palazzo San Gervasio에 들른다. 남부의 고즈넉한 풍광과 그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베르트뮬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것은 곧 시나리오 작업으로 이어졌다. 일주일 만에 쓰여진 시나리오는 곧 영화가 되었다. '바실리스크(I basilischi, The Lizards, 1963)'는 이탈리아 남부의 낙후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세 젊은이의 이야기를 담는다. 러닝 타임 84분의 그리 길지 않은 이 영화는 시골 청년들의 시시껄렁한 잡담과 일상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후일 이 감독의 영화 작업을 이해할 수 있는 여러 단서들을 내포한다. '귀부인과 승무원(1974)'에서 보여주었던 성과 계급에 대한 전복적 정치학은 베르트뮬러가 자신의 영화에서 끊임없이 성찰했던 주제이다. 베르트뮬러의 데뷔작 '바실리스크'에는 이탈리아 남부 주민의 정서, 토지 개혁을 둘러싼 계급간의 갈등, 삶의 근원으로서의 성에 대한 감독의 관점이 들어가 있다.

  영화는 한낮의 낮잠(siesta)에 빠진 시골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작된다. 모두들 자느라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이 마을의 나른하고 한가로운 풍경은 그들이 낮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별다를 게 없다. 프란체스코는 마음에 둔 아가씨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구애하지만, 그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세 젊은이 가운데 가장 나이들어 보이는 세르지오는 지나가는 여자의 몸매를 훑어보거나 밤의 홍등가를 찾는 것으로 자신의 욕구를 해결한다. 베르트뮬러가 묘사하는 시골 청년들의 성에 대한 이런 관심은 건전한 것이라기 보다는 억눌린 현실에서의 유일한 출구처럼 보인다. 그들은 모두 지겹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자신들의 고향 마을을 떠나고 싶어하지만, 그저 그곳에 매여있을 뿐이다. 부자 친척이 있는 안토니오는 아주 운이 좋게 로마로 떠났다. 영화 속에서 '로마'는 꿈의 도시로 묘사되는데, 그곳은 기회의 땅이며 모든 소원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 로마와 대비되는 그들의 고향 시골 촌구석에서 토지 개혁 문제는 사람들의 주요한 관심사가 된다. 베르트뮬러는 서로 다른 계급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반목하고 갈등하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이탈리아의 현대 정치사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주민들의 대화는 매우 낯설고 이해하기 어렵다. 1940년대부터 추진된 이탈리아의 농지 개혁은 각기 다른 입장의 지주와 소작농의 대립 때문에 끊임없이 난관에 부딪히며 좌초되었다. 두 번의 주요한 개혁이 1950년대 초와 후반부에 이루어졌는데, 영화는 195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개혁에 대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대규모 경작지를 소유한 지주들에게 국가가 일괄적으로 땅을 매입해서 소작농들에게 불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개혁 법안은 땅 대신에 보상금을 받아야 하는 지주에게도, 자신이 받게 될 땅을 협동 조합과 일부분 공유해야만 보조금과 대출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소작농들에게도 반발을 샀다.


  영화에서 '협동 조합'에 가입할 것이냐를 두고 주민들의 의견이 나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공증인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땅도 있는 안토니오의 아버지는 정부가 세금을 무겁게 물리고 농지 보조금을 너무 적게 준다며 불평한다. 전통적 대지주였던 백작 부인은 정부가 소작료를 강탈해 가고 있다며, 1940년대에 죄수들을 농사꾼으로 거저 써먹었던 과거를 그리워하며 회상한다. 베르트뮬러는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도 엄연히 계급적 층위와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배 계급의 착취 문제는 프란체스코가 한적한 시골 들판에서 지주에게 강간당하고 울면서 도망치는 소작농의 딸을 발견하고도 도와줄 방법이 없다며 한탄하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떠나고 싶다는 열망만 있을 뿐,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젊은이들은 무기력하고 나태하다. 프란체스코는 뚱뚱하고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약제사의 딸과 약혼하라는 부모의 뜻을 거역하지 못한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대학생 안토니오는 용돈 타내느라 아버지의 모욕적 언사를 참아내야 한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지겨운 것에서 떠나 로마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감독 자신의 내레이션으로 들리는 '우리를 둘러싼 역사와 주변 환경이 우리 자신을 만든다'는 말은 하나의 단서가 된다. 내레이션은 안토니오가 곧 다시 로마로 떠날 거라는 말은 이루어지기 어려우며, 마을을 떠나는 버스를 타지 않고 계속 놓치게 될 거라고 말한다. 안토니오는 자신이 살아온 시골 마을의 역사, 정서, 환경의 모든 것에 지배당하는 인간일 뿐이다. 이것은 베르트뮬러가 상정하는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나오는 성찰이다.

  영화에서 그것을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은 마을 노파의 자살 장면이다. 며느리에게 모욕과 무시를 당한 시어머니는 뜨개질을 하다 말고, 베란다 난간에 매달린다. 건너편의 이웃 여자는 충격과 공포로 소리를 지르지만, 노파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 같은 일상의 갈등에서 죽음을 택한 노파의 결심은 꽤 놀랍게 보인다. 그러나 명예를 중시하는 남부 시골의 전통적 정서에서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베르트뮬러는 산업화되고 선진화된 북부와 농업 기반의 낙후된 남부와의 근원적 차이를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영화는 실제로 이탈리아 바실리카타(Basilicata)주의 여러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지역 주민들의 협조 속에 촬영이 이루어졌는데, 나중에 영화를 본 주민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전근대적인 후진 곳으로 묘사했다며 감독을 맹비난했다.
      
  영화의 제목 '바실리스크'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백하지 않다. 고대와 중세로부터 유럽의 신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뱀 머리 모양의 괴수인 'Basilisk'에 베르트뮬러가 관심을 가졌던 것 같지는 않다. 지명에서 유래되었다는 추측도 해볼 수 있으나, 그것도 정확하지 않다. 바실리카타 지명의 어원은 로마시대 황제였던 바실레우스(Basileus)의 그리스식 표기인 'basilikos'에서 유래하는데, 그것은 전설 속 괴수의 명칭과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 아마도 별다른 뜻이 없는, 단순히 '바실리카타 주민'을 뜻하는 표기일 수 있다. 영어식으로 번역된 'The Lizards'가 가장 적절한 대안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세 청년들의 모습은 마치 따뜻한 햇살 아래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며 어슬렁거리는 도마뱀들처럼 보인다. 그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을 만든 이는 엔리오 모리코네이다. 그의 초창기 영화 음악을 대표하는 스파게티 웨스턴의 단선율 음악이 이 영화에서도 흐른다. 베트르뮬러의 '바실리스크'는 1960년대 이탈리아 사회에 대한 감독의 성찰과 함께 이후 이어질 영화적 작업에 대한 선언이 들어 있다.



*사진 출처: verocinem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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