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르 이오셀리아니(Otar Iosseliani)의 영화를 처음으로 본 것은 러시아 영화사 시간이었다. '노래하는 검은 새가 있었네(Once Upon a Time There Was a Singing Blackbird, 1970)'를 수업 시간에 보았었는데, 영화가 참 독특했다. 소련에서 저런 영화도 만들 수 있다니 놀랍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오셀리아니 감독의 작품들을 찾아서 본 기억이 난다. 그의 작품들은 모두 개성이 넘쳤고, 생각할 거리들이 많았다. 그렇게 좋아했던 감독을 잊고 있다가, 오늘 '달의 연인들(Les Favoris de la lune, Favorites of the Moon)'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프랑스 영화다. 그는 소련에서 찍었던 자신의 작품들이 연이은 검열로 냉대를 받자, 1982년에 프랑스로 건너갔다. '달의 연인들'은 그가 파리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만든 영화로, 어느 정도는 낯선 나라에 대한 관찰자적 시점이 들어가 있다.

  영화는 시작부터 복잡하다. 시대가 왔다 갔다 하고, 컬러와 흑백이 교차된다. 서로 연관이 없는 인물들이 번갈아 보여진다. 이런 영화들을 만나면 제대로 봐야지 싶은 마음에 긴장하게 된다. 대개의 영화들은 2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윤곽이 파악이 되는데, 이 영화는 그때까지도 내러티브의 조각들을 툭툭 던지기만 한다. 1) 첫 장면에서 도자기 접시가 깨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도자기 공방의 모습이 비춰진다. 장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세브르(유명한 도자기 산지였다) 도자기 세트는 단단한 나무 상자에 포장되어 어느 저택에 배송된다. 시대적 배경은 18세기이다. 2) 그 다음에는 19세기 화가의 공방이 나온다. 화가는 여인의 상반신 누드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3)다음 장면의 시대적 배경은 현대, 현악 4중주단이 연습하고 있다. 다시 과거로 돌아온 영화는 흑백 화면에 귀족의 일상 생활을 비춰준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싶을 때, 영화는 1983년의 프랑스 파리로 돌아온다. 처음에 봤던 그 도자기와 여인의 초상화가 파리의 여러 사람들의 삶과 뒤엉켜 이야기가 진행된다. 마치 목공이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부분 부분을 나누어 자르고 모양을 만들어 붙이는 것처럼 이오셀리아니도 처음에 던진 내러티브의 조각들을 차례대로 맞추어 나간다.  

  '달의 연인들'의 구조는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The Player, 1992)'를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들이 있다. 각각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물들이 우연히 만나고 그렇게 합쳐진 내러티브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경매장에서 도자기 세트를 낙찰받은 이는 돈많은 무기판매상 라플라스의 아내이다. 라플라스는 폭발물 제조업자 구스타브와 함께 테러리스트들에게 폭탄을 판다. 구스타브는 라플라스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고 있고, 구스타브의 여자 친구 클레르는 경찰 서장 뒤포르 파케와 몰래 만나고 있다. 파케는 경매장에서 여인의 초상화를 낙찰받은 사람이다. 이 초상화를 훔치는 도둑 부자(父子)가 있다. 도둑의 아내는 매춘부로 클레르의 아버지와 친구이다. 학교의 음악 선생인 클레르의 아버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 공원 조각상을 사제 폭탄으로 날려 버린다. 여기에 펑크락 여자 가수, 노숙자들, 청소부들, 테러리스트들이 더 나온다. 이오셀리아니는 여러 등장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을 기획하고 기가 막히게 조율해 내어 자신만의 이야기 작법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부에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흑백 화면으로 나왔던 귀족의 저택이 컬러로 바뀌면서, 포탄과 총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무너진 집으로 말이 들어와 그릇을 밟아서 깨버린다. 그 장면 뒤에 시대적 배경이 현대의 프랑스로 바뀌는데, 그것은 시대적 변혁과 그에 따른 새로운 계급의 등장을 암시한다. 귀족이 쓰던 도자기 식기와 초상화는 현대의 부르주아의 소장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도자기와 초상화들은 가치와 형태가 자꾸만 변해간다. 라플라스 부인이 낙찰받아 손님 접대용으로 과시하려던 그릇은 요리사의 실수로 깨져버린다. 경찰 서장의 집에 걸렸던 초상화는 도둑들의 칼질에 원래 캔버스 크기에서 줄어든다. 펑크락 가수 집에 있다가 다시 절도당한 그 그림의 크기는 나중에는 얼굴의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크기가 된다. 고가의 깨진 도자기 그릇은 매춘부의 손에 들어가 복원되고, 그것은 도둑 아들의 재떨이로 전락한다. 오타르 이오셀리아니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가치의 마멸과 변형을 도자기와 초상화의 이미지를 통해 재현한다.

  '달의 연인들'은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비판적으로 통찰하지만, 그 방식은 부드럽고 유머가 섞여있다. 무기상 라플라스 부부는 유력 인사들을 초대해서 저녁 식사를 대접하는데, 휠체어에 탄 아버지가 식당에 들어오자 다른 방으로 밀어서 내보낸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존재는 그렇게 은폐된다. 라플라스 부인은 도자기를 깬 요리사에게 모욕을 주지만, 현대의 요리사는 귀족의 하인이 아니다. 그는 깨진 그릇을 쓰레기통에 내던져 버리고 나간다. 귀족의 초상화를 낙찰받은 경찰 서장은 그림을 도둑맞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예기치 못한 비극이 닥쳐온다. 포크레인으로 해체되는 귀족의 저택은 부르주아에 대한 이오셀리아니의 짖궃은 농담의 마지막 조각이 된다.

  영화의 제목 '달의 연인들'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에서 따온 것이다. "밤의 사람들은 낮의 아름다움을 훔치는 도둑이 아니라, 다이아나(달과 사냥, 숲의 여신)의 숲지기, 어둠의 신사, 달의 하인으로 불려야 합니다."는 문구가 영화의 시작 부분에 제시된다. 영화 속 다양한 인물들이 펼치는 무질서와 혼란, 절도와 파괴, 거짓말과 속임수는 서양 문화권에서의 달의 이미지와 부합한다. 그러나 오타르 이오셀리아니는 달과 그것에 속한 이들의 모습에서 생성의 힘과 기묘한 조화를 발견해 낸다. 영화의 마지막, 도둑의 아들은 자신의 방에서 장인처럼 열심히 자물쇠를 분해하며 절도 기술을 연마한다. 그는 결코 도자기 장인이나 화가처럼 아름다움을 창조하지는 못하지만, 영화는 '달의 사람들' 또한 우리가 사는 세계의 한부분으로 존재하고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films.oeil-ec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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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흐르다(流れる, Flowing, 1956)'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다리를 보여주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강물은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비춰진다. 일본의 작가 코다 아야(幸田文)가 1955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 영화의 원작이다. 영화 속에서 게이샤 츠타의 집에서 일하게 되는 가정부 오하루는 어떤 면에서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오하루는 게이샤 집에서 일하며 그네들의 삶의 속내를 들여다 보게 된다. 극중에서 오하루는 남편과 아들이 죽은, 혈혈단신의 40대 후반의 과부로 나온다. 작가는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이혼하고 홀로 자식을 키워야 했던 어려운 형편 때문에 46살에 게이샤 집 가정부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는데, 그 소설이 '흐르다'이다. 실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소설은 꽤 인기를 끌었고, 코다 아야에게 작가로서 살아갈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리카는 직업 소개소의 추천서를 들고 츠타노야(츠타의 집이란 뜻)를 찾는다. 리카는 집주인 츠타와 그 딸 가츠요, 조카 요나고와 그 어린 딸 후지코, 오십 줄에 들어선 게이샤 소메카, 제멋대로 행동하는 젊은 게이샤 나나코, 그리고 수시로 집에 드나드는 츠타의 큰언니를 만나게 된다. 리카라는 이름 대신 오하루로 불리우게 된 가정부는 성실하고 따뜻한 마음씀으로 곧 이 집안 사람들의 호감을 산다. 그러나 오하루는 이 집안이 빚 때문에 몰락해가고 있으며, 여러가지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츠타는 남자에게 속아 집이 저당잡혀 있고, 큰언니에게 진 빚도 갚아야 한다. 돈 떼먹고 달아난 게이샤의 삼촌은 조카 데리고 번 돈을 내놓으라며 툭하면 와서 행패를 부린다. 사람좋고 유약한 성품의 이 집주인은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가 벅차다. 큰언니는 돈 많은 철강회사 임원을 소개해줄 테니 만나보라고 떠밀지만, 마음에도 없는 자리에 나가고 싶지는 않다. 선배 게이샤 미즈노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예전의 정인(情人)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한다. 공들여 단장을 하고 약속 장소에 나갔지만, 바람만 맞고 들어오는 츠타. 과연 츠타노야는 그 자리에 계속 남아있을 수 있을까?

  영화는 츠타노야에 들어오게 된 오하루(타나카 키누요 분)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게이샤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오하루의 시점은 곧 관객의 시점이 된다. 이 예의바르고 분별력 있는 가정부는 모든 행동거지에 나름의 품위가 있다. 무도하게 행패를 부리는 게이샤 삼촌에게도 공손한 말로 응대하며, 배탈이 나서 아픈 꼬마 후지코가 주사를 잘 맞을 수 있도록 달랜다. 불러주는 데가 없어서 궁색하고 기가 죽어있는 소메카의 입장도 잘 헤아려 배려해준다. 츠타노야의 유일한 일반인이면서 가장 인간적이고 따뜻한 품성을 지닌 오하루는 몰락해가는 게이샤들의 모습을 연민으로 바라본다. 오하루가 바라본 그 세계는 화려한 외양 뒤에 돈의 무게에 짓눌려 있으며, 한없이 외롭기 짝이 없는 여자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에게 낙이라고 해봐야 술과 노래, 의지할 남자를 찾는 것이다. 오하루가 머물게 된 츠타노야의 칸칸이 구획된 방과 비좁은 복도는 매우 폐쇄적이며, 그곳 사람들의 일상과 삶은 거기에 매여 있다. 그 공간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존재가 있다면 츠타가 애지중지 키우는 고양이 푼토일 것이다. 이 느긋한 고양이는 집안 곳곳을 돌아 다니며, 아무에게나 가서 앵긴다.

  예능인(게이샤, 藝者)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지만, 매춘과 연계되어 있는 이 직업은 츠타노야처럼 쇠락의 길에 접어들고 있다. 영화 속에서 그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나나코가 기모노 대신에 양장을 하고 일하러 나갈 때이다. 연회 공연 없이 곧바로 여관방으로 직행하는 것을 나나코는 내켜하지 않지만, 급변하는 일본 사회에서 더이상 예인의 전통은 존중받기 어려워졌다. 그러므로 츠타의 딸 가츠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기를 거부한다. 가츠요는 오하루에게 자신의 굽히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잠깐 게이샤 일을 하고 그만 두었다고 말한다. 어려서부터 그 세계에서 자란 가츠요는 어떻게 하면 그곳에서 나올 수 있을까 고민한다. 직업 소개소도 가보고, 이력서도 써본다. 친구로부터 봉제일을 배우면 취업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미싱 돌리는 연습도 한다. 남자에게 의탁하는 삶을 살아왔던 엄마와 다른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가츠요의 머릿속에 결혼이란 선택지는 들어있지 않다. 그렇게 '흐르다'에서 전통과 현대는 충돌한다.

  그러나 츠타노야에서 가츠요의 선택은 유별난 것이다. 남자가 살지 않는 이 집은 그 어느 곳보다 남자를 필요로 한다. 막돼먹은 게이샤 삼촌이 수시로 와서 행패를 부릴 수 있는 것도 이 집에 남자가 없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츠타의 조카 요나고는 딸이 아프자 애아빠를 찾아 다닌다. 츠타는 행패부리는 게이샤 삼촌의 고발 건으로 경찰서까지 가게되는데, 그 일을 해결하는 것은 딸 가츠요가 아니라 선배 게이샤 미즈노의 조카 사에키이다. 오십 줄에 들어선, 게이샤로서는 일하기 힘든 소메카는 연하의 젊은 남자와 동거하다 차이자 울음을 터뜨린다. 사랑도 삶도 남자에게 기댈 수 밖에 없는 그 세계의 돌아가는 방식에 가츠요는 냉소를 보내지만, 소메카는 남자없이 사는 삶이 가능하냐며 오히려 그런 가츠요를 비웃는다. 어쩌면 소메카의 그 말은 돈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하냐로 치환될 수 있을지 모른다. 츠타노야의 사람들에게 남자만큼 필요한 것이 돈이기도 하다. 요나고의 남편은 아픈 애는 안보고, 약값이나 쓰라고 현관 문앞에 돈만 놓고 돌아간다. 일감이 없는 소메카는 맨밥에 간장을 비벼먹는다. 츠타는 과거의 후원자에게 경제적 지원을 바라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한다. 큰언니는 동생인 츠타에게 돈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내고, 돈은 언제 갚냐고 채근한다. 돈과 남자가 등치되는 이 게이샤의 세계에서 젊음과 아름다움의 상실은 몰락을 의미한다. 츠타노야의 미래는 점점 어두워진다.  

  결국 츠타노야는 팔린다. 츠타는 샤미센 교습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오하루는 여전히 그 집에 머무른다. 그러나 집을 산 츠타의 선배 미즈노는 그 집을 요릿집으로 바꿀 생각을 갖고 있다. 일 잘하는 오하루에게 넌지시 자신과 함께 일하자고 하지만, 오하루는 편치 않은 마음에 거절한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츠타는 다시 찾아온 소메카와 함께 평화롭게 샤미센을 연주하고 있다. 비감하고 처연한 샤미센 소리는 오랫동안 관객의 귓가에 머문다. 사라질 운명의 츠타노야와 함께 그 집을 스쳐 지나간 많은 게이샤들의 젊음과 아름다움, 슬픔과 기쁨, 온갖 비밀과 노랫소리도 사라질 것이다. 원작자 코다 아야는 자신이 늘 즐겨찾던 스미다 강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곤 했다. 그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이 늘 마치 자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사라지는 것 같았고, 그것은 마음 속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었다고 적었다. 영화 '흐르다'의 나루세 미키오는 어느 게이샤 집안의 쓸쓸한 뒤안길을 통해 스러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수를 담는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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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 출류킨(Yuri Chulyukin) 감독의 1961년 영화 '아가씨들(Девчата, The Girls)'의 주인공 토샤를 보고 있으면, 영화 '애니(Annie, 1982)'의 귀엽고 당찬 꼬마 애니가 떠오른다. 토샤가 애니 보다 나이가 더 많기는 하지만, 작은 키에 하는 행동은 순진무구한 아이 같다. 토샤와 애니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고아원 출신이라는 것. 요리 학교를 졸업한 18살의 토샤는 우랄의 목재 회사에 조리사로 일하기 위해 왔다. 토샤의 기숙사 룸메이트들은 모두 연애 중이다. 그곳은 무슨 사랑이 꽃피는 목재회사 같다. 젊은 남녀 직원들은 수시로 열리는 댄스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즐긴다. 과연 천진난만한 장난꾸러기 같은 토샤에게도 남자 친구가 생길까? 영화 '아가씨들'은 빛나는 젊음의 에너지와 청춘의 사랑이 흘러 넘친다.

  원작 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만들어진 이 영화는 주인공 토샤를 두고 여배우들의 치열한 물밑 경쟁이 있었다. 출류킨 감독은 배우인 아내에게 그 역할을 주려고 애썼지만, 결국 그 역할은 나데즈다 루미안체바(Nadezhda Rumyantseva)에게 돌아갔다. 당시 루미안체바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이 서른 살 여배우는 나이 따위는 잊어버린 것처럼 18살 소녀 토샤 그 자체를 보여준다. 슬랩스틱에 가까운 연기 동작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며, 울고 웃는 모습은 천상 아이 같다. 영화는 외국 영화제에도 출품되어서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루미안체바를 두고 '여자 찰리 채플린', '소련의 줄리에타 마시나'라는 호칭이 붙었다. 정말이지 '아가씨들'은 루미안체바를 위한 영화처럼 보일 정도이다.

  영화는 주인공 토샤와 연인 일리야의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소련의 국가 기간 산업에 종사하는 목재 노동자들의 모습 또한 비중있게 담는다. 일리야와 한 팀을 이루는 3명의 동료들은 틈만 나면 나무를 가장 효율적으로 벌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다. 일리야는 뛰어난 능력으로 인정받는 직원으로, 신문에 일리야의 사진과 함께 작업 성과가 실리기도 한다. 이는 영화가 한창 성장하고 있는 소련의 산업 발전을 부각시키고, 그 중심인 노동자들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노동자들의 연애는 어디까지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 위한 건전한 사전 작업이어야 한다. 일리야는 토샤의 룸메이트인 안피사와 사귀고 있었는데, 안피사는 진정한 사랑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잘 나가는 남자와 사귈까 궁리한다. 안피사는 일리야 대신에 새로 부임한 감독관과 교제를 시작한다. 일리야는 결국 토샤의 진정성과 순수함에 반해서 사귀게 된다. 안피사는 일리야가 토샤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말에 좌절하는데, 이 여성 캐릭터가 느끼는 불행은 사랑과 결혼의 가치를 비웃는 것에 따른 결과이다.   

  안피사와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인 토샤가 보여주는 긍정적인 삶의 에너지와 순수함, 그리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소련이 바라는 이상적인 여성상에 부합한다. 일리야는 자신이 거만하다며 춤 신청을 거절한 토샤를 골탕먹이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토샤의 음식을 혹평하며 내다 버린다. 식사 시간에 나타나지 않는 일리야와 동료들을 위해 토샤는 직접 음식통을 들고 벌목장으로 찾아간다. 터무니 없는 냉대에도 끄떡하지 않고 투철한 직업의식으로 기꺼이 음식을 대접하는 토샤의 모습에 일리야의 마음도 움직인다. 일리야는 어쩌면 토샤에게 '충실한 아내'의 모습을 본 것인지도 모른다. 고집세고 제멋대로인 남자는 비로소 토샤와 함께 할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아가씨들'은 그렇게 성실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소련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담는다. 봄이 되자 목재 회사의 직원들은 새로 결혼할 부부 직원들을 위해 집을 짓느라 분주하다. 열심히 노동하고, 건전하게 연애하며,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서 국가에 기여하는 것. 그렇게 고아 출신의 요리사 토샤가 성취하는 사랑 이야기에는 소련의 국가적 이상이 깔려 있다. 알콩달콩한 청춘 남녀의 연애담에 알렉산드라 파흐무토바가 담당한 영화 음악은 정겨움을 더한다. 영화는 개봉 첫해, 35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구 소련 시절의 대표적 흥행작으로 남아있는 '아가씨들'은 경제 성장의 동력을 얻어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던 당시 소련의 자신감이 반영되어 있다. 이 영화는 어떤 면에서는 국가가 젊은 관객들에게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호소하는 노동과 연애, 결혼에 대한 강력한 프로파간다였을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oxvo.ru     토샤 역의 배우 나데즈다 루미안체바


**사진 출처: in-w.ru


    

***다음 글은 목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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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여자의 자리'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카미네 히데코가 나오는 대담 프로그램을 보는데, 나루세 미키오 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와 19편이나 되는 영화를 함께 찍었는데, 거의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나루세 미키오는 늘 촬영장 어딘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고, '자, 액션'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냥 자신은 연기를 했다고. 나중에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따로 인사를 하고 집에 간 적은 없었고, '모두 수고하셨습니다'하는 것이 전부였다고 회상했다. 이 여배우에게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엄청 어렵고 무서웠던 존재였던 것 같다. 아니, 그럼 함께 찍은 영화 가운데 나루세 미키오의 연기 지도라는 것은 없었던 것일까? '야성의 여인(Untamed Woman, 1957)'을 찍을 때는 어려운 영화여서 어떻게 연기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아, 그거 금방이면 끝날 거야'하고 대답해서 당황했다고 한다. 아역 배우 때부터 출중한 재능을 보여줬던 연기 천재인 타카미네 히데코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까? 아무튼 그 인터뷰를 본 이후로, 타카미네 히데코가 나오는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아무 말 없이 착착 돌아가는 그의 영화 촬영 현장을 떠올리게 된다. 그의 1962년작 '여자의 자리(女の座, A Woman's Place)'는 1962년 신년 특집으로 개봉한 가족 영화로 당시 활동했던 쟁쟁한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저런 배우들을 어떻게 다 데리고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영화를 찍을 수 있었는지,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오는 영화이다.

  도쿄에 자리잡은 이시카와 집안의 가장(류 치수 분)의 갑작스런 병환을 계기로 그의 자녀들이 집에 모인다. 그는 첫 부인에게서 아들 켄타로와 지로, 딸 마츠와 우메코를, 재혼한 아내 아키에게서는 미치코와 나츠코, 유키코를 두었다. 장남 켄타로가 전사하고 며느리 요시코(타카미네 히데코 분)는 아들을 키우며 시부모와 함께 산다. 여관을 운영하는 욕심많은 딸 마츠, 꽃꽂이 교실을 운영하는 미혼의 독립적인 딸 우메코, 무능하고 속이기 잘하는 남편과 닮은 미치코, 결혼 적령기로 남편감을 찾는 나츠코와 유키코, 이렇게 바람 잘 날 없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잡화점을 하며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가는 요시코가 중심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영화는 이시카와 일가 구성원 각자의 삶을 고루고루 돌아가며 보여준다. 나루세 미키오의 특기란 이런 것이다.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치우치거나 부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이 없다. 마치 바느질 자국이 보이지 않게 옷을 만드는 장인 같달까? 그런 감독의 솜씨 덕분에 관객들은 일가 구성원들 각양각색의 삶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게 된다.
 
  이 가족의 주요한 관심사는 혼기가 찬 딸들의 혼사 문제이다. 나츠코는 여동생 유키코의 지인 아오야마를 좋아하게 되지만, 동생의 마음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중매 결혼을 받아들인다. 영화에서 나츠코와 유키코는 양장을 하고 나오는데, 젊은 세대의 여성이 구시대적 관습을 선선히 받아들이는 것은 의외의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츠코와는 달리 기모노를 늘 입고 있는 우메코의 사고 방식은 현대적이다. 결혼에 대해 언급하는 부모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찾겠다고 말하는 우메코는 감정 표현도 직설적이다. 우메코는 첫 눈에 반하게 된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까지 생각한다. 신구 세대의 복식과 삶의 방식이 뒤엉켜 있는 틈 속에서 과부 며느리 요시코는 집에서는 앞치마를 두른 평상복으로, 외출할 때는 기모노를 입는다. 요시코의 유일한 관심사는 중학생 아들 켄짱의 학업이다. 그 아들이 요시코의 뜻대로 공부에 뜻이 있으면 좋으련만, 아들은 어머니를 비롯해 가족의 기대 때문에 힘들다. 그러던 어느 날, 요시코는 기차 사고로 아들을 잃는다. 그 일은 요시코의 삶 전체를 뒤흔든다.

  남편이 죽은 뒤로도 시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아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돌아갈 친정이 없고, 여동생이 하나 있는 요시코에게 유교적 가치인 '삼종지도(三從之道)'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기대던 아들이 죽자 요시코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에 들어선다. 이시카와의 자녀들은 요시코가 시댁을 떠나 재혼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나츠코와 유키코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부모의 넓은 집을 두고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각자 머리를 굴리느라 여념이 없다. 서글프게도 노부부는 이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자식들은 하나같이 다 쓸모가 없구려."

  영화는 일견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1953)'의 쓸쓸한 노부부와 그런 부모에게 무심한 자식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결국은 혈연이 아닌 며느리에게 깊은 신뢰와 애정을 보내는 '동경 이야기'의 노부부처럼, '여자의 자리'의 이시카와와 아키 부부도 며느리 요시코에게 집을 팔아 셋이 같이 살 작은 집을 찾아보자고 말한다. 그들이 길에서 이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집에서는 자식들이 모여서 초조하게 부모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나루세 미키오는 요시코가 선택하게 될 인생의 새로운 자리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다. 사실,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서 자식의 죽음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보는 일은 드문 일이다. 나츠코는 중매 결혼을 받아들이고, 유키코는 좋아하는 남자와 미래를 꿈꾼다. 우메코는 실연을 당하지만, 이전처럼 독립적인 자신의 삶으로 다시 돌아온다. 오직 요시코만이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을 겪는다. 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잃은 요시코는 어떤 삶의 자리를 선택할까? 그렇게 '여자의 자리'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들은 여자의 삶을 둘러싼 결혼과 가정이라는 촘촘한 그물망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드러낸다.



*사진 출처: aozoramusme.tumbl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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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다보면 가끔은 감독 자신에 대한 사실을 추론 내지는 직감으로 알게 되는 때가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의 '오늘 또 오늘(今日もまたかくてありなん, 1959)'을 보는데, 유부녀인 여자 주인공이 알게 되는 퇴역 군인과의 관계가 영 부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은 동네 주민으로서 서로 예의를 깍듯하게 차리는, 전혀 이상한 사이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어떤 성적인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튼 뭔가 어색하고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감독에 대한 자료를 읽다가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의 관계에서 내가 느꼈던 그 이질감은 감독의 성 정체성에서 나온 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테렌스 데이비스의 1992년작 'The Long Day Closes'의 경우에도 그런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1950년대의 영국 리버풀을 배경으로 12살 소년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영화에서 감독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암시하는 주요한 장면들이 있다.

  말수가 없고 내성적인 소년 버드는 주로 집안에 머물면서 창밖으로 사람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느 때처럼 밖을 내다 보던 버드는 집 건너편의 공사 현장에서 젊은 인부와 눈이 마주친다. 청년은 버드에게 윙크를 하고, 소년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창문 안쪽 벽으로 얼른 돌아선다.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꾸준히 영화 속 소재로 다루었던 테렌스 데이비스의 작품들을 본 이들에게 그 장면은 명백한 암시일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감독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도 없고, 처음으로 보는 그의 영화에서 나의 눈길을 끌었던 장면은 버드가 목욕하는 형의 등을 닦아주는 부분이었다. 소년은 씻고 있는 형의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형이 부탁하자 작은 수건으로 등을 닦는다. 고요하고 매혹적으로 포착된 그 장면에서 그것이 감독의 성 정체성과 관련이 있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감독에 대한 글을 읽다가 내가 생각한 것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The Long Day Closes'는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만든 영화이다. 영화는 엄밀히 말하자면, 감독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의 초반부, 교실에 앉아서 필기를 하던 버드의 모습에서 갑자기 어둑한 하늘의 흰색의 돛이 휘날리는 배가 등장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뒤이어 교실에 혼자 있는 버드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고 있다. 이런 식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점프컷은 이 영화가 시간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닌 비선형적 구조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관에서 엄마와 함께 나와 길을 걷던 버드는 어느새 집의 거실에 들어와 있다. 그제서야 관객들은 이 소년의 이야기가 아닌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을 비로소 인지하게 된다.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지 않지만, 덩어리지어진 여러 작은 기억의 파편들이 버드의 어린 시절과 소년의 내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소년 버드에게 영화는 매우 중요한 일상이며 탈출구이다. 교사가 가하는 체벌이 일상화된 강압적 분위기의 학교, 여리고 내성적인 성향 때문에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는 버드에게 영화관은 평온한 안식과 위로를 준다. 영화관과 더불어 집도 버드에게 온기를 주는 곳이다. 넓은 바다와 같은 품을 지닌 엄마, 다정한 두 형과 누나, 그리고 친숙한 이웃. 그럼에도 모두 연애 중인 형들과 또래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누나에게 버드는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소년의 일상은 홀로 보내는 시간으로 더 많이 채워진다. 창가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관찰하거나, 학교 생활의 고통을 잊기 위해 교회에서 기도하는 버드. 수업시간에 교사가 설명하는 '침식(erosion)'이란 단어는 버드의 어린 시절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버드의 내면에 생채기를 내는 냉혹하고 무지막지한 교사들, 괴롭히는 아이들... 소년은 자신을 침식시키는 모든 것들을 마주하고 견뎌낸다. 영화관에서 교회, 그리고 학교로 이어지는 하이 앵글 쇼트는 소년 버드의 일상인 동시에, 전후 폐쇄적이고 변화없는 영국 사회의 단면을 축소시켜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의 끝부분에 이르면, 소년의 집은 무너져 내린다. 그 집을 떠나지 못하고 헤매는 버드의 모습은 이 소년에게 유년기의 기억이 훗날 계속적으로 변주되는 창작의 소재가 됨을 암시한다. 거미줄이 쳐진 어두운 심연 같은 집으로 들어가 버린 소년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진 장면에서 버드는 친구와 함께 달을 가린 구름이 흘러가는 저녁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버드의 소년 시절, 정확히 말하자면 테렌스 데이비스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소년은 자신을 견디게 해준 영화를 만들게 되고, 관객들은 그가 만든 영화를 통해 소년 테렌스를 만난다. 냇 킹 콜, 도리스 데이, 데비 레이놀즈의 오래된 노래와 아카펠라로 연주되는 성가들이 그 과거로의 여행에 함께 한다. 베르메르의 인물화 구도를 차용한 쇼트들에서 느끼는 평온함과 따뜻함 또한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criter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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