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영화 '스나이퍼(The Sniper, 1952)'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드워드 드미트릭(Edward Dmytryk) 감독은 영화를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운 사람이었다. 영화사에 들어가 잔심부름부터 시작해서 감독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는 타고난 재능과 성실성으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나갔다. 스튜디오가 요구하는 B급 영화들을 잘 만들어내어서 마침내 자신만의 영화를 찍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인생에 매카시즘이라는 시대의 광풍이 불어닥친다. 공산주의자로 찍힌 그는 동료에 대한 고발과 증언을 강요받았다. 영국으로 잠시 피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하려면 미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감옥에서 보낸 짧은 시간 이후, 드미트릭은 결국 동료들을 고발하고 다시 영화계에 돌아올 수 있었다. '스나이퍼(The Sniper, 1952)는 그가 의회 증언 이후 처음으로 찍은 복귀작이다. '변절자'라는 오명이 드미트릭을 힘들게 했지만, 그는 이 영화로 자신의 역량을 입증해 보인다. 정신적 결함을 가진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이 필름 느와르 영화에는 당시 드미트릭 감독이 처한 심리적 압박감도 느껴진다.

  영화는 미국에서 한 해에 발생하는 성범죄 사건들의 통계를 언급하는 자막에서부터 시작한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여성들로, 그런 강력범죄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주지시킨다. 그리고 이어지는 첫 장면에서 총은 든 남자가 창가에서 누군가를 겨누고 있다. 이제 막 연인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여자를 겨누던 남자는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며 총을 내려놓는다. 남자의 이름은 에디(아서 프란츠 분), 그는 왜 여자를 죽이려는 것일까? 남자는 들끓는 살인의 욕망을 견딜 수가 없다. 그것을 억누르기 위해 그는 자신의 손을 전기 스토브에 대고 스스로 화상을 입힌다. 그러나 유예된 살인은 얼마 안가 실행된다. 그의 총에 의해 연달아 나오는 희생자들로 도시는 패닉에 빠진다. 경찰들은 수사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지만, 살인범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그 와중에 에디는 경찰에 편지를 남긴다.

  "제발 날 멈추게 해주시오. 나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난 이 일을 계속 하게 될 테니까요."

  에디의 내면은 병들어 있으며 그의 현실감각은 손상되고 왜곡되었다. 그는 다정한 연인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갖고 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연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특히 젊은 여성에 대한 혐오와 적대적 감정은 에디가 이성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다. 세탁 회사에서 일하는 에디는 고객으로 알게 된 클럽의 피아니스트 진을 좋아하지만, 진은 에디를 세탁부로 대할 뿐이다. 좌절된 욕망은 살인에의 추동으로 이어진다. 그의 범죄에는 총이 수반된다. 영화는 정신이상자가 총기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이 얼마나 가공할만한 위험성을 지니는지 잘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미국의 총기 소유 문제에 대해 비판한 선구적 영화이기도 하다. 유리 파편이 산재한 첫 번째 살인 장면, 유리창을 뚫고 피해자 여성의 머리에 총알이 박히는 두 번째 살인 장면이 관객에게 주는 정서적 충격은 꽤 크다. 아무 이유없이 여성에 대한 적개심만으로 무차별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에디의 모습은 '젠더 증오 범죄(gender-based hate crime)'의 전형성을 나타낸다.

  '스나이퍼'는 범인의 추적과 검거에 시간을 할애하는 여느 필름 느와르 영화와는 달리 '심리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정신의학자 켄트 박사는 형사 반장과의 대화에서 범인이 여성에 대한 분노를 갖게 된 것은 성장과정이나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생긴 문제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전기 스토브에 다친 에디의 손을 보고 하숙집 할머니는 남자들도 어릴 때 요리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데, 에디는 어머니에게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다고 답한다. 에디의 대답은 어머니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분노의 감정이 여성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켄트 박사는 정신적 문제를 지닌 이들의 초기 병력 관리와 치료가 더 큰 범죄를 막을 수 있다며 시장과 시의 유력 인사들을 상대로 설득한다. 정신이상 범죄자에 대한 그의 정책적 제안은 이 영화가 범죄를 사회 병리적 문제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밤의 어둠에 숨어 살인을 저지르던 에디는 이젠 백주 대낮에 여성에게 총을 겨눈다. 결국 자신의 방에서 경찰에 의해 잡히게 된 그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이 냉혹한 연쇄살인범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은 관객에게 기이한 연민과 혼란의 감정을 안겨준다.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에디는 살인에 대한 욕망과 그것을 억제하고자 하는 이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이 남자는 아무와도 소통하지 않으며, 그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능력을 상실했다. 어떤 면에서 드미트릭 감독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는 에디의 모습에서 당시 자신이 겪던 시련을 투사했는지도 모른다. 감독으로서 일거리가 더이상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 자신에게 적대적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원망, 당시 그가 처한 상황은 영화 속 에디라는 캐릭터의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킨다. 영화의 마지막, 에디가 보여준 그 눈물은 후회라기 보다는 안도의 눈물일 것이다. 감옥에 갇히게 되면 더이상 살인의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도시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영화는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촬영되었다. 마지막 살인을 저지른 에디는 한낮의 그 번화한 대도시의 숨겨진 뒷골목과 인적 하나 없는 음산한 거리로 도주한다.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내적 감옥에 유폐된 '외로운 늑대(lone wolf)'로서의 연쇄살인범의 초상을 발견한다.  



*사진 출처: torontofilmsocie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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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내 마음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 1959)'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타카가 평생 그런 부당한 대우를 참으면서 사느니,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나아요."

  누나 마사는 동급생에게 얻어맞아 다리가 부러진 동생을 보며 흐느낀다. 중학교에 다니는 동생 유타카는 자신을 괴롭히고 모욕하는 동급생과 싸우다 다친다. 더러운 피를 가졌다느니, 개(いぬ 이누로 발음, 아이누인들에 대한 욕설)와 닮았다는 수군거림을 듣는 유타카는 아이누(Ainu)이다. 일본의 북쪽 지방에 거주하는 선주민(先住民) 아이누.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1959년작 '내 마음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 Whistling in Kotan, 1959)'은 훗카이도의 코탄 마을을 배경으로 아이누족 남매의 시련과 고통을 그려낸다. 주로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와 그 내면을 다루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작품들 중에서 아이들, 그것도 차별받는 아이누족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거기에다 컬러와 시네마스코프를 채택한 화면은 늘 보던 이 감독의 흑백, 실내 촬영 위주의 영화와도 다르다. 훗카이도의 맑은 호수로 유명한 시코츠호(支笏湖)의 풍경과 그 일대의 모습, 단편적이지만 아이누족들과 그들의 공연 장면이 영화 속에 들어있다. 영화는 동화작가이며 교육자인 이시모리 노부오(石森延男)가 1957년에 발표한 소설 '코탄의 휘파람(コタンの口笛)'을 충실하게 재현한다.

  내가 알기로 아이누족에 대해 다룬 일본 영화는 거의 없다. 재일교포의 이야기는 일찍부터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둘째 오빠(にあんちゃ, 1959)'는 탄광촌을 배경으로 차별받는 재일교포의 아픔을 그려낸다. 재일교포 소녀 야스모토 스에코가 쓴 일기를 원작으로 하는데, 이것을 같은 해 유현목 감독은 '구름은 흘러도(1959)'로 만들었다. 국외자들을 다루는 일본 영화가 드문 당시의 현실에서 나루세 미키오는 일본 내에서 철저히 차별받는 아이누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실제 아이누족 배우들은 나오지 않는다. 일본 배우들이 아이누족 분장을 하고 나오는데, 그 모습은 아이누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관객들에게는 매우 낯설게 보일 수도 있다. 주로 긴 수염에 어두운 얼굴색으로 나오는 성인 남자들과 두꺼운 입술 문신을 한 이웃 할머니 이칸테의 분장은 전형적인 아이누족의 외모를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아이누족의 이미지는 차별적 요소를 띄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아이누족의 생활 방식, 신화와 전설, 장례 풍습과도 같은 민속지학적인 자료에 매우 충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머니를 여의고 알콜중독자인 아버지와 가난하게 살아가는 마사와 유타카 남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꿈을 가지고 살아가려 하지만 남매가 처한 현실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마사는 지갑을 잃어버린 반 아이에 의해 도둑으로 몰리고, 유타카는 공부를 잘하지만 그것을 시기하는 동급생의 괴롭힘과 마주한다. 그래도 이 남매에게는 정서적인 지지와 위로를 보내는 이웃과 선생님이 있다. 미술을 가르치는 타니구치 선생은 마사에게 힘이 되어주고, 마사는 그런 선생님을 흠모한다. 옆집에 사는 이칸테 할머니와 후에 언니도 마음을 나누는 이웃이다. 그러나 후에가 가출하고 이칸테 할머니가 그 충격으로 세상을 뜨면서 남매를 둘러싼 세계는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미군 부대의 철수로 군무원 일자리를 잃게된 아버지는 벌목일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남매의 곁을 떠난다. 그렇게 남겨진 남매에게 비정하기 짝이 없는 삼촌은 남매의 집을 팔아버리고, 일꾼으로 살아갈 것을 종용한다.

  마사와 유타카 남매가 겪는 모욕적이고 부당한 차별의 현실은 아이누족들에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것이다. 몽둥이로 얻어맞아 다리가 부러진 유타카를 보며 남매가 의지하는 이웃 청년은 아이누 남자라면 저렇게 다 맞아본 적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분을 이기지 못하는 마사에게 경찰은 아이누 편이 아니며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달랜다. 문제는 그들이 겪는 이 조직적인 차별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데에 있다. 물론 모든 일본인들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유타카에게는 착한 일본인 친구도 있고, 학교 교장인 타자와 선생은 아이누인들을 인간적으로 존중하며 그들을 평등하게 대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의 아들이 좋아하는 아이누 아가씨 후에와 엮이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이칸테 할머니는 타자와 선생에게 손녀딸의 혼사를 말했다가 거절을 당하고, 그것을 알게 된 후에는 가출해서 돌아오지 않는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루고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되는 남매까지, 이렇게 '내 마음의 휘파람'에 나오는 코탄 마을의 아이누 공동체 구성원들이 가진 꿈들은 모두 냉혹한 현실 속에서 바스러진다.

  나루세 미키오가 보여주는 아이누족 남매의 수난기는 암울하고 슬픔으로 차있지만, 놀라운 흡인력과 핍진성(逼眞性)을 갖고 있다. 사실 남매로 나오는 아역 배우들의 연기는 어색하고 뻣뻣하며, 다른 아역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 또한 실망스럽다. 그러나 배우들에 대한 연출 지시를 최소화하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나루세 미키오의 스타일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나름의 완성도를 성취해낸다. 126분의 러닝타임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고 생각할 만큼, 영화의 내러티브는 잘 짜여져 있다. 영화의 마지막, 인정머리 하나 없는 삼촌을 따라나서는 남매의 모습은 처연하기 짝이 없다. 아직 다리가 낫지 않은 유타카는 절룩거리며 걷고, 마사는 고향 마을을 보며 마음 속으로 작별 인사를 건넨다. 서로를 바라보며 괜찮냐고 묻는 남매. 유타카는 기운을 내려는듯 휘파람을 신나게 분다. 그러한 결말은 일본 사회의 국외자로서 아이누족 남매의 미래가 험한 길 위에 있을지라도 고통을 견디어 내며, 세상에 지지 않을 거라는 희망의 한 조각을 던져주는듯 하다.     



*사진 출처: kookaimorita.livedoor.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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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저녁에 클래식 FM 실황 음악회에서는 올해 조르주 에네스쿠 콩쿨 수상자 특집을 방송해주었다. 요새 떠오르는 젊은 연주자들은 모두 다 뛰어난 기량을 지녔지만, 내게 그렇게 깊은 인상을 준 이들은 없었다. 다들 잘 하네, 하고 듣다가 바이올린 부문 연주에서 깜짝 놀랐다. 무슨 예전 거장의 음반을 틀어놓은 줄 알았다. 3위를 차지한 독일 출신의 타실로 프로브스트란 이름의 연주자는 이제 19살이 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재능, 그것도 아주 순전한 재능을 가진 연주자였다. 저런 연주자가 노력과 성실성을 겸비한다면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다. 아시프 카파디아(Asif Kapadia) 감독의 2010년도 다큐 '세나(Senna)'에도 카레이싱에 놀라운 재능을 가진 이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아일톤(Ayrton), 세나는 그의 어머니가 결혼하기 이전의 성에서 따왔다. 그는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포뮬러 원(Formula One)을 지배했던 카레이서였다. 다큐는 그의 초기 경력, 영광의 순간, 라이벌과의 암투,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생애를 다룬다.

  다큐의 구성은 지극히 단순하다. 106분의 러닝타임 가운데 포뮬러 원의 경기 장면이 40분에 이른다. 나머지 장면은 세나의 가족이 소유한 개인 비디오 화면과 뉴스를 비롯한 자료 화면이 채운다. 내레이션도 없고, 가족과 주변 지인들과의 인터뷰도 대부분 목소리로만 나오는 아주 절제된 구성이다. 자동차 경주에 별다른 관심도 없고, 세나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이 다큐는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다. 감독 아시프 카파디아도 다큐를 만들기 전까지 세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세나'라는 인물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는 대신, 이 인물의 삶을 3막 구조의 서사 영화로 구성하는 데에 촛점을 두었다(2011년 wired.com과의 인터뷰 참조). 그가 보기에 이 인물의 생애는 영화만큼이나 극적이다. 우승을 다투는 적대적 경쟁자 알랭 프로스트(Alain Prost), 정치적이고 편파적인 FISA(포뮬러 원 주관 단체)의 회장 장 마리 발레스트르(Jean-Marie Balestre), 3연속 챔피언을 차지한 후의 내리막길, 경기 중의 사고로 인한 비극적 죽음... 카파디아는 마치 영웅의 신화를 구술하는 음유시인처럼 '세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포뮬러 원의 영웅은 특히 비 오는 날의 경주에서 더 뛰어났다. 세나가 경기 도중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며 손가락을 위로 들어 환호하는 차량 내부 화면은 이 사람이 가진 재능의 특출함을 보여준다.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싫어할 '비'라는 악조건이 세나에게는 축복이 된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편파적인 협회의 결정에도 맞선다. 1989년 일본 그랑프리, 세나는 라이벌 알랭 프로스트와 충돌한 후에 1등으로 들어왔음에도 승리를 취소당한다. 오히려 프로스트에게 반칙을 했다는 이유로 벌금과 자격 정지 6개월의 처분을 받는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프랑스 국적의 프로스트와 돈독한 사이였던 프랑스인 발레스트로 회장의 편파적인 영향력에 항의를 표명하고, 자신에게 부과된 불합리한 경기 조건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된 승리로 포뮬러 원에서의 자신의 역사를 써나간다. 놀라운 능력을 가진 영웅과 그와 반대편에 선 적대자들. 이처럼 이야기의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영화처럼 구성된 흥미진진한 다큐는 흥행에서도 성공했다.

  다큐에서 세나를 괴롭히는 나쁜 경쟁자처럼 나오는 알랭 프로스트 입장에서는 이 다큐가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달성한 포뮬러 원에서의 4번의 챔피언 기록 보다는 세나와의 반목과 갈등이 그를 규정짓기 때문이다. 프로스트는 다큐가 세나와 자신이 동료로서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가며 경력의 마무리를 짓는 과정을 누락시켰다며 불만을 표명하기도 했다. 어쨌든 세나의 장례식에서 관을 운구하기도 했던 프로스트와 세나의 마지막 관계가 어떠했는지 이 다큐의 관객들은 알지 못한다. 프로스트는 마치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의 영원히 미움받는 살리에리처럼 낙인이 찍혀버린 것 같다. 궁정 음악장인 살리에리는 모짜르트와 경쟁 관계가 아니었다. 그는 모짜르트 사후 미망인 콘스탄체와 모짜르트의 아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관대하고 명망 높은 음악가였음에도 셰퍼의 희곡에서는 악의적으로 묘사되었다. 프로스트에게 다큐 '세나'는 오래되고 무거운 짐짝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큐만 보면 세나는 자동차 경주의 영웅으로 암담한 현실의 조국 브라질에 주어진 커다란 희망, 브라질 아이들의 복지를 위해 애쓰는 자선 사업가, F1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는 인물이다. 이처럼 완벽한 영웅은 비극적인 죽음으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신화가 된다. 자동차 부품의 기계적 결함으로 최종적으로 판명이 난 사고의 원인을 다큐는 깊이있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그저 그 모든 비극은 '자동차 경주 산업이 만든 것이다'라는 말로 두루뭉실하게 언급될 뿐이다. 국가적으로 치루어진 세나의 장례식 장면으로 영웅의 죽음은 마무리된다. 이 다큐는 자료 화면을 제공한 포뮬러 원(물론 다큐 제작시 큰 돈을 내고 구매한 것이다), 세나의 일상이 담긴 홈 비디오 화면을 제공한 세나의 유가족들과 사전에 철저히 조율되었다. 과연 그렇게 잘 재단된 한 인물의 다큐가 진실과 근접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세나의 개인 비디오에 함께 나오는 여성들은 매번 얼굴이 다른데 그가 사귄 여성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나는 오히려 '세나'를 보고나서, 진짜 세나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세나'는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관점이 제거된, 영화화된 자동차 경주 영웅의 이야기이다. 아시프 카파디아는 어떤 면에서 자료 화면을 영혼없이 이어붙인 편집자처럼 보인다. 그런 그가 2015년에 만든 다큐 '에이미(Amy)'에서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삶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을 보여준 것은 놀랍다. 적어도 한 인물의 다큐에는 제작자의 어떤 관점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대중의 호응, 또는 극심한 반발을 가져오는 것일지라도 하나의 관점을 채택한다는 것은 다큐 작가로서의 발언인 셈이다. '세나'는 아주 흥미있는 다큐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듯 잘 만들어진 영웅의 신화에는 영웅의 인간적 모습이 들어있지 않다. 그렇게 '세나'는 인간적인 숨결을 제거해버린 영웅의 감동적인 서사로 남았다.



*사진 출처: wire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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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닝 타임 2시간 50분, 노래와 춤이 나오는 인도 영화는 극장 상영시 중간 휴식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게 긴 영화들이 많다. 라지 카푸르(Raj Kapoor) 감독의 1955년작 'Shree 420'은 7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도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았다. 영화는 엄청난 흥행 성적을 거두었고, 그가 만든 영화들은 신생 독립국 인도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감독 자신이 주연을 맡아서 노래와 연기를 소화해내는데, 이 다재다능한 영화인은 찰리 채플린을 모방한 연기로 인도의 채플린으로 불렸다. 채플린의 고유한 연기 스타일인 떠돌이, 부랑자의 이미지를 차용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다지 독창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보여줄 것이 아주 많음을 이 영화로 입증한다.

  고향 알라하바드를 떠나 봄베이로 온 시골 청년 라지는 곧 도시의 삶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학 졸업장을 가지고도 그가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세탁소 일 뿐이다. 착하고 아름다운 비드야를 만나 미래를 꿈꾸던 라지는 클럽 댄서 마야의 유혹으로 사기꾼의 세계에 발을 디딘다. 비드야는 라지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지만, 돈의 위력에 사로잡힌 라지는 부도덕한 사업가 소나찬드의 수하가 되어 도박과 사기 사업에 손을 댄다. 큰 돈을 만지게 되었지만 불행하다고 느낀 라지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소나찬드는 라지의 이름을 팔아 봄베이 빈민들을 상대로 커다란 사기극을 꾸민다. 라지는 사기꾼 생활을 청산하고 비드야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영화의 제목 'Shree'는 힌디어로 호칭 '~씨'에 해당한다. 숫자 '420'은 인도 형법에서 사기와 절도에 해당하는 죄목의 번호를 뜻한다. 인도에서 'Mr. 420'이란 말은 사기꾼을 뜻하는 말로, 경멸의 의미를 포함한다. 정직함으로 메달까지 받았던 라지는 돈이 떨어져 전당포에 그 메달을 맡긴다. 먹을 것도, 잘 곳도 없는 그에게 대도시 봄베이의 삶은 라지를 돈에 목마르게 만든다. 정직을 던져버리고 유능한 사기꾼이 된 그는 소나찬드를 비롯해 사업가와 유력 인사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을 목격한다. 자신의 집을 갖기 원하는 빈민들에게 100루피로 집을 주겠다며 라지의 이름을 내걸어 사기극을 벌이는 소나찬드야말로 진짜 'Shree 420'이다. 귀에 착착 감기는 즐거운 노래와 춤이 있는 이 영화에는 날카로운 사회 비판의 메시지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고, 가난한 이들이 길바닥에서 자는 봄베이의 삶. 제대로 된 사회 안전망도 없는 나라에서 정직한 젊은이는 사기꾼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이 사기꾼은 결국 회심(回心)한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바로잡으려는 라지는 빈민들을 상대로 단합과 연대를 호소한다. 모래알처럼 흩어져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고, 힘을 합쳐 우리의 요구를 정부에 전달해야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라지의 연설은 사회주의적 신념과 맞닿아 있다. 'Shree 420'이 드러낸 인도 사회의 문제점은 매우 통렬하다. 과연 오늘날의 인도는 영화 속 라지가 촉구한 사회적 변화를 이루어냈는가? 지금의 인도가 이루어낸 경제 성장의 이면에 여전히 극심한 빈부 격차가 존재한다. 그 점은 한 사회의 구조적 변화가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하게 한다. 라지가 보여주는 도덕적 타락과 일탈은 하층 계급이 직면하는 윤리적 갈등을 보여준다. 정직한 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라지는 사기꾼이 된다. 그가 나중에 마음을 돌이킨 것은 사기로 고통받게 될 빈민가 사람들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Shree 420'은 계급적 연대와 도덕적 선택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영화는 진중한 사회 비판적 메시지와 함께 영화적 즐거움을 전면에 앞세워 관객들을 유인한다. 선의 상징으로 나오는 비드야와 대척점에 선 마야가 보여주는 도발적인 춤 공연, 여러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군무와 합창, 빼어난 호흡을 보여주는 비드야와 라지의 이중창은 긴 러닝타임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Shree 420'을 만나는 오늘날의 관객들은 현재 인도 영화의 산업적 토대와 그 기원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라지는 비드야와 새로운 미래를 꿈꾸며 길을 떠난다. 인도 영화가 자국 내에서 구축한 독보적 지위는 오랜 전통과 함께 라지 카푸르 같은 재능있는 영화인들이 개척해낸 길 위에 세워진 것이다.    



*사진 출처: discogs.com




*다음 글은 월요일에 올라옵니다. 무더운 여름,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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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붉은 가막살 나무(Калина красная, 1973)'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교도소에서 합창 공연을 펼치는 재소자들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한다. 절도죄로 형기를 마치고 나온 예고르(바실리 슉신 분)는 펜팔로 알게된 여자 친구 류바를 찾아간다. 평화롭고 한적한 농촌 마을에서 류바는 노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류바와의 미래를 꿈꾸는 예고르. 그러나 그는 전과자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냉대와 편견과 마주하고 실망하게 된다. 과연 예고르는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바실리 슉신(
Vasily Shukshin) 감독의 1973년작 '붉은 가막살 나무(Калина красная)'는 구 소련 영화들 가운데 경이적인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개봉 첫해의 관객은 6250만명에 달했다. 소련은 국가가 영화사를 설립하고 운영했으며, 영화의 상영 및 배급도 국가의 관리하에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로 인한 수익은 모두 국고로 귀속되었는데, 소련 영화의 수익률은 대략 900%정도 였다. 당시 소련 관객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렸던 장르는 '코미디'였다. 코미디 영화의 감독들은 높은 수익을 내는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대우도 남달랐다. 그런 현실 속에서 슉신의 영화가 이룬 성취는 특별해 보인다. 출소한 재소자의 귀향이야기를 담은 영화에 왜 소련의 관객들은 그토록 호응했던 것일까? 사실 러시아인이 아닌 외국인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해석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예고르는 류바의 마을에 와서 붉은 가막살 나무 숲속을 거닐며 새들에게 말을 건넨다. 그는 그 나무를 무척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붉은 가막살 나무는 자작나무처럼 흰색의 목질부를 갖고 있으며 작고 붉은 열매들이 열린다. 러시아어로 '칼리나 크라스나야(Kalina krasnaya, 영화의 제목이기도 함)'라고 불리는 이 나무는 러시아 민속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성을 띤다. 특히 열매의 '빨강색'은 사랑과 아름다움, 젊음과 열정, 슬픔과 고통에 이르는 정서까지 폭넓게 포함한다. 영화 속에서 예고르는 붉은색 셔츠를 입고 나온다. 그것은 가막살 나무의 열매색이다. 예고르에게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의미하는 색이며, 농촌 출신인 그의 근원으로서의 자연을 떠올리는 색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붉은색은 예고르에게 슬픔이기도 하다. 그는 류바에게 자신의 별명을 '슬픔(grief)'으로 소개하는데, 이것은 범죄와 이어진 어두운 과거와 정상적인 삶의 경로에서 벗어난 이의 고통과도 맞닿아 있다. 

  그 고통은 예고르가 류바와 함께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간 장면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는 류바에게 사회복지사인 것처럼 위장해서 노파의 안부를 물어달라고 부탁한다. 아들 세 명을 전쟁에서 잃은 노파는 나머지 아들 하나는 20년 동안 만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차마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예고르는 나중에서야 류바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흐느낀다. 원래 예고르의 어머니 역할을 하기로 했던 배우가 있었으나, 늙은 배역의 연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슉신은 마을 주민 가운데 한 명을 섭외했다. 실제로 아들 셋이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노파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했고, 슉신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영화 속에 담았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노인의 연기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소련 당국이 '애국 전쟁'이라는 명칭을 붙이며 영광스런 승리로 포장한 그 전쟁은 많은 소련인들에게 고통스러운 과거였다. 노파는 아들의 죽음으로 자신이 받는 연금에 대해서도 말하는데, 그것은 너무나도 적은 액수였다. 그 장면에 대해 검열 당국은 불편한 심기를 보였고, 슉신은 편집 과정 내내 당국과 지루하고 치열한 싸움을 이어가야만 했다.

  출소한 범죄자가 착실하게 갱생의 길을 가면서 희망적인 미래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당국이 원하는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그러나 슉신은 예고르를 예정된 비극으로 이끈다. 과거 조직원들은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으려는 예고르를 응징한다. 그가 막 트랙터로 씨를 뿌린 밭의 가장자리 풀숲에서 예고르는 피를 흘리며 류바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흰색의 셔츠를 붉게 물들이는 예고르의 피는 그렇게 '칼리나 크리스나야' 열매색이 가진 또 다른 의미인 슬픔과 고통에 도달한다. 슉신의 아내이기도 했던 류바 역의 배우 리디아 페도세예바는 죽어가는 예고르를 안고 통곡하는데, 그 장면이 더 슬프게 보이는 이유가 있다. 이듬해인 1974년, 새로운 영화를 촬영 중이던 슉신이 사고로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붉은 가막살 나무'에는 전쟁의 상처, 좌절된 꿈, 거기에 국경 지대의 소박한 농촌 마을과 자연의 풍광이 더해져 있다. 슉신 자신이 각본을 쓴 이 영화는 경제 불황의 터널을 지나는 당시의 소련인의 감성과 크게 공명했다. 영화의 엄청난 흥행에는 당시 관객들의 관객성, 거기에 러시아인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근원적 정서도 작용했다. 그런 이유로 이 영화를 외국인의 시선으로 단지 영화적 의미만을 분석하는 것은 피상적인 작업에 그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영화 속 예고르를 통해 슉신이 보여주였던 자연과 땅, 농촌의 소박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은 언어와 민족성의 장벽을 뛰어넘어 전달된다. 그렇게 오늘날의 관객은 시인이며 소설가, 배우이며 감독이었던 바실리 슉신의 유작 '붉은 가막살 나무'를 통해 러시아의 정신과 만난다. 



*사진 출처: mosfilm.itcenter.pro   영화 '붉은 가막살 나무' 촬영 현장의 바실리 슉신(붉은색 셔츠)과 아내 리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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