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아주 흥미로운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가출팸(가출 후 함께 생활하는 무리를 지칭)을 이끄는 한 남자에 관한 것이었다. 삼십 초반의 이 남자는 차량 절도의 달인이었다. 어떤 차라도 그의 손기술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는 값비싼 차들을 절도해서 자신의 가출팸 구성원들을 먹여살렸다. 일반적으로 가출팸이 성매매와 연계된 다양한 범죄의 온상인 것과는 달리, 그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청소년 아이들을 그저 부양할 뿐이었다. 아이들은 경찰에게 그가 자신들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으며, 아빠처럼 항상 보살펴주었노라고 진술했다. 아마도 그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가족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양(楊德昌) 감독의 1996년작 '마작(麻將, Mahjong)'에도 그런 가출팸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가출팸에는 의리도 인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거짓말, 사기, 매춘, 폭력으로 점철된 4인조 가출팸의 절망적인 타이페이 생존기를 그린다.

  레드 피시(紅魚), 룬룬, 치약, 홍콩으로 이루어진 가출팸의 리더 레드 피시는 영국인 애인 마커스를 찾아 프랑스에서 온 마르트를 유인해 콜걸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 룬룬은 그런 마르트에게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레드 피시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돈을 뜯어낸 꽃뱀 안젤라에게 복수하려고 한다. 여자 후리는 재주를 지닌 홍콩을 내세워 안젤라를 유혹하고, 치약은 영적 능력을 지닌 승려로 변장시켜 안젤라의 신뢰를 얻어내려고 한다. 레드 피시의 아버지는 거액의 부도를 내고 잠적했는데, 조폭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레드 피시를 납치하려고 한다. 그러나 룬룬을 레드 피시로 오인한 조폭들은 룬룬과 마르트를 인질로 삼게 된다. 한편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극도의 증오에 사로잡힌 레드 피시는 아버지를 찾아내 분노를 터뜨린다. 이 가출팸은 계획한 사기극을 성공시켜서 그럴듯한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타이페이의 4인조 가출팸에게는 가족이 없다. 레드 피시의 아버지는 10년 넘게 잠적 중이다. 룬룬은 외국인들이 사는 허름한 게스트 하우스가 주거지이지만, 그곳은 집이 아니라 잠깐씩 들리는 장소이다. 이 무리 가운데 가장 입이 더럽고 천박한 치약은 전형적인 양아치다. 홍콩은 남창 노릇으로 돈 많은 여자들에게 기생한다. 이들은 서로 형제같은 존재임을 내세워 홍콩에게 반한 알리슨에게 동침을 요구한다. 레드 피시가 알리슨을 어르고 협박하는 모양새는 영락없는 포주의 모습이다. 이 레드 피시는 아버지의 사기치는 능력을 물려받았음에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아버지가 어떤 면으로 레드 피시에게는 생존의 비법을 알려준 셈이다. 4인조는 자신들이 사람들을 조종하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쉽고 만만하지 않다.

  마르트를 매춘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계획은 룬룬의 순정 때문에 좌절된다. 안젤라는 홍콩을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공유하면서 모욕감을 안겨준다. 에드워드 양은 안젤라와 동성 친구들이 홍콩에게 억지로 음식을 먹이며 홍콩을 지배하는 모습을 통해 레드 피시가 알리슨에게 보여주었던 착취적 성적 위계를 정확히 전복시킨다. 돈과 권력을 지닌 이들의 위력 앞에 이 4인조 가출팸이 가진 사기 능력은 그저 조잡스럽고 한심해 보일 뿐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아마도 영국인 건축가 마커스와 외국인 포주 진저로 대변되는 타이페이의 외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쩌리들이겠지만, 이 낯선 동양의 도시에서는 지배자처럼 거들먹거린다. 마커스는 마르트에게 19세기의 제국주의가 21세기에도 지속될 거라며, 타이페이는 곧 자신들의 무대가 될 거라 장담한다. 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레드 피시의 가출팸은 하부 구조에 자리한다.

  가출팸의 초짜이자 막내라고 할 수 있는 룬룬이 보여주는 마르트에 대한 순정은 마르트에게 비웃음을 산다. 홍콩의 애정을 갈구하는 알리슨이나 마커스의 애정을 확인하려는 마르트는 반복해서 '날 사랑해?'라고 묻지만, 그들이 원하는 사랑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비정하고 거대한 도시에서 사랑을 비롯해 그 어떤 따뜻한 인간적 감정은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에드워드 양은 그런 도시의 삶에서 과연 애정과 상호간의 보살핌을 전제로 한 진정한 가족이 존재할 수 있는가 묻는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레드 피시의 가족은 결정적으로 해체되며, 그 여파는 레드 피시의 가출팸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가진 것 없는 밑바닥 청춘들의 유사 가족은 그렇게 붕괴된다.

  레드 피시의 4인조가 머물렀던 곳에 치약은 자신이 그러모은 새로운 구성원들을 데려온다. 그러나 사기 치는 재주도 머리도 없는 치약이 꾸려갈 가출팸의 미래는 불투명해 보인다. 그들은 결코 가족이 될 수 없으며, 머무는 공간 또한 집이라고 할 수 없다. 그저 먹고 자는 합숙소 같은 그 곳에는 그렇게 도시의 떠도는 청춘들이 무수히 들고 나게 될 것이다. '마작'에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청춘들의 비애가 담겨있다. 관객들은 그 청춘들의 초상에서 쉽사리 출구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 룬룬과 마르트가 나누는 입맞춤은 희망의 한 조각이라기 보다는 곧 사라질 도시의 신기루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zh.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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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마치... 내 어깨에 얹힌 커다란 짐짝을 치운 것 같은 기분이었죠."

  시종일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던 여자는 그 말을 할 때는 차분하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여자는 동네의 십대 살인범들에 의해 어머니와 남동생을 잃었다. 두 명의 살인범들은 각각 종신형과 사형을 선고받았다. 약물주사형으로 사형을 받은 마이클 페리의 마지막을 참관한 심정을 여자는 그렇게 대답했다.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의 2011년작 다큐 'Into the Abyss'는 실제 살인 사건의 관련자들을 인터뷰하며 사형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공포 영화를 잘 못보는 사람이라면 밤에 이 다큐를 보는 것은 피해야 한다. 살인 사건 직후 경찰이 촬영한 현장 화면은 꽤나 강렬한 정서적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헤어초크는 십대 살인범들이 저지른 참혹한 범죄를 직접적으로 설명하거나 언급하는 대신, 수사 담당 경찰관의 증언과 경찰측에서 촬영한 현장 화면으로 제시한다. 사실은 때론 영화적으로 가공된 그 어떤 무시무시한 장면 보다 공포스럽다.

  다큐는 사형 집행이 임박한 마이클 페리를 헤어초크가 인터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십대 사형수는 해맑은 표정으로 천국으로 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무고한 세 명의 사람을 죽인 살인범이다. 그런데 천국으로 갈 날을 꿈꾼다고? 페리는 도대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 수 없다고, 마치 살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말을 이어간다. 억울한 누명을 쓰기라고 했단 말인가? 그런데 그의 공범 제이슨 버켓도 같은 말을 한다. 자신은 전적으로 죄가 없으며, 누군가와 술을 진창 마셨는데 일어나 보니 살인범이 되어있었다며 인터뷰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관객들은 에롤 모리스의 '가늘고 푸른 선(The Thin Blue Line, 1988)'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살인 사건의 증거는 너무나도 명백하며, 페리는 검거되어서 자신의 범죄에 대해 인정하고 자백했다. 다큐의 시작부터 헤어초크는 사형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페리와의 인터뷰에서 표명하는데, 그가 고른 이 사건은 결코 관객의 연민과 동정을 끌어낼 수 없다. 헤어초크는 잔혹한 살인자의 존재와 관계없이 사형제 자체의 부당함에 대해 호소하는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Into the Abyss'는 시적이고 은유적인 제목이 붙은 6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다. 50대 가정주부와 그의 아들, 아들의 친구가 살해된 살인 사건의 개요가 먼저 제시된다. 그리고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 살인범의 지인과 그 가족, 살인 집행을 맡았던 전직 교도소 직원들, 종신형을 받은 제이슨 버켓과 옥중 결혼한 여성과의 인터뷰가 이어진다. 모든 인터뷰는 헤어초크가 진행했으며, 그는 화면에 나오지 않고 오직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헤어초크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자신이 원하는 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때론 집요한 면모를 보인다. 제이슨 버켓과 옥중 결혼한 여성에게는 버켓의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 표현해 보라고 한다. 결혼한 수감자라고 해도 포옹만이 허용되는데도, 어떻게 임신이 가능했냐며 그 방법을 캐묻는다. 이 나이들고 노련한 감독은 결코 강압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인상도 주지 않는다. 어머니와 남동생이 죽은 여자는 사건 이후로 전화받는 것이 무서워서 전화를 쓰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헤어초크는 그런 것을 직면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헤어초크의 인터뷰는 정서적인 면에 치중해서 진행되기 때문에 이야기의 본질에서 종종 벗어난다. 특히 자신의 범행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제이슨 버켓에게 그의 인터뷰는 공개적인 영상 탄원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런 버켓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40년을 보낸 죄수로 가난과 범죄가 어떻게 자신과 가족의 삶을 망쳤는지 진술한다. 아버지의 진술은 실제로 법정에서 버켓이 사형이 아닌 종신형을 받는데 기여했다. 헤어초크는 약물과 범죄로 얼룩진 하층민 범죄 가족의 이야기를 사형제 반대의 입장을 구축하는데 영리하게 써먹는다. 그럼에도 관객들에게는 사람을 죽이고도 종신형이 억울하다며 강변하는 이 사이코패스 범죄자를 보는 일은 상당히 역겹다. 이 다큐는 정말로 기이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흉악한 살인범들에게 팬레터를 보내는 열혈 추종자들이 있으며 그들 가운데 일부는 결혼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버켓의 아내도 그런 경우로 이 여성은 버켓과 첫 면회에서 본 무지개를 운명적 계시라고 말하며, 그의 무죄를 믿고 사면을 위해 애쓰고 있다.

  과연 사형제에 찬성하는 사람이 이 다큐를 보고나서 사형제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돌아설까? 어머니와 남동생을 잃은 여성은 모든 생명이 존중받아야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한다. 남동생을 잃은 또 다른 피해자는 사건 직후 여동생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가 눈가에 새긴 2개의 눈물 문신은 잊을 수 없는 슬픔을 보여준다. 정서적으로 피폐해진 피해자들의 삶, 그 어떤 반성도 없는 뻔뻔한 살인범들, 사형 집행인들이 겪는 심리적 갈등과 고통, 'Into the Abyss'에는 이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 엉켜있다. 나는 헤어초크가 도대체 이 다큐를 무엇 때문에 만들었을까 생각했다. 사형제에 반대한다는 감독의 신념은 확고하지만, 그가 이 다큐를 통해 하는 이야기들에는 일관된 방향성이 없다. 다큐의 제목처럼 그 또한 어두운 심연 속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 다큐의 그러한 난삽함은 국가의 사법적 살인 제도인 사형제에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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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녀 망치(Witchhammer)'란 용어는 중세 시대 마녀 사냥의 교본이 되었던 '말레우스 말레피카룸(MALLEUS MALEFICARUM)'에서 나왔다.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란 뜻의 그 책은 마녀와 이단의 색출과 고문에 대한 자세한 방법이 실려있는 책이다. 극단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신념에 의거해서 기술된 그 책은 중세 마녀 사냥 광풍의 중심에 자리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감독 오타카르 바브라(Otakar Vávra)의 1970년작 'Witchhammer(Kladivo na čarodějnice)'는 1670년대 모라비아 지방에서 있었던 마녀 사냥을 다룬다. 영화의 원작은 1963년에 출판된 Václav Kaplický의 동명의 소설로, 감독 자신이 시나리오 작업을 맡았다. 바브라 감독은 원작 소설과 함께 남아있는 실제 재판 기록도 참조했다.

  사건은 거지 노파의 성체(聖體, 사제에 의해 축성된 빵) 은닉 시도가 들통나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거지 여인은 산파가 아픈 소의 우유가 잘 나오게 소에게 먹일 성체를 갖다 달라고 했다며 실토한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 여영주 백작 부인은 다른 신성모독 사건이 있는지 종교재판을 열어 알아보라며 지시한다. 백작 부인의 참모는 종교 재판관 보블리그를 초빙할 것을 권유한다. 여관이나 운영하면서 은거하고 있었던 보블리그는 백작 부인의 승인하에 마녀재판을 시작한다. 보블리그는 가혹한 고문으로 얻은 자백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화형대에 올린다. 처음에는 가난하고 늙은 여자들이 마녀로 몰렸지만, 나중에는 영지의 돈 있는 상공업자와 유력 인사들이 마녀로 고발당한다. 교구 사제 라우트너는 보블리그의 무자비하고 부당한 마녀 사냥을 우려하며 주교와 관리들에게 재판의 중단을 요구한다. 그러나 라우트너의 요청은 거절당하고, 보블리그는 그런 라우트너를 마녀들의 수괴로 몰아간다.

  중세 시대 마녀 사냥은 단지 신앙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 지배계급들에게 꽤나 매력적이고 유용한 돈벌이였다. 제조업과 상업으로 부를 축척한 상공업자들은 주요한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그들이 마녀 사냥으로 화형 또는 추방이 되면 그 재산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회적으로 취약한 지위의 여성을 비롯해 막대한 유산을 받은 부유한 미망인들도 마녀 사냥의 올무에 걸려들었다. 영화 속에서 지역을 다스리는 백작 부인은 보블리그의 잔혹한 고문과 재판에 대한 주변의 우려를 묵살한다. 마녀로 몰린 이들에게서 빼앗은 재산이 그대로 자신의 소유가 되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얼마나 죽어나가든 백작 부인은 관심이 없다. 여영주는 탐욕스럽고 비열한 보블리그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 백작 부인의 의도를 잘 아는 보블리그는 영지의 부유한 이들을 마녀 재판정으로 소환한다.

  바브라 감독은 마녀 재판정의 혹독한 고문과 보블리그와 귀족들의 연회장면을 이어붙여서 그것을 반복해 보여준다. 피와 울부짖음이 가득한 마녀 재판의 일과를 보낸 보블리그와 그 일당들은 무지막지하게 먹어대며 탐식의 극한을 보여준다. 보블리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권력을 맘껏 휘두른다. 자신을 경멸하는 신부 라우트너와 하녀 수잔나를 마녀로 몰아가는 데에도 거침이 없다. 들판에는 점점 더 많은 화형대가 들어선다. 공포와 두려움을 조장하며 영주와 귀족은 대리인 보블리그와 결탁한다. 보블리그가 보여주는 탐욕과 위선, 잔혹성은 수탈자로서의 지배 계급의 본질적 특성을 대변한다. 바브라 감독은 마녀 재판정에서 행해지는 고문과 폭력을 통해 1950년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정권 수립 과정에서 있었던 소련의 지배적 역할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2차 대전 이후 체코는 소련 주도 하에 스탈린 주의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공산화되었다. 그 결과 당시 체코에서는 공산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숙청이 자행되었다. 소련의 체코 지배는 1968년 프라하 침공으로 정점에 이른다. 당시 관객들에게 마녀 사냥을 다룬 이 영화는 소련이 체코에 저지른 만행에 대한 은유적 비판으로 받아들여졌다. 영화를 불편하게 생각한 체코 공산 정권은 이 영화를 20년 넘게 상영 금지시켰다.

  그러나 바브라 감독 자신은 영화가 1968년에 있었던 프라하 침공을 비판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 적은 없다. 체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서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으며, 정권에 영합하는 영화들을 꾸준히 만들었다. 그가 소련에 반대한 일로 일시적 시련을 당했던 것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외세인 소련을 비판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바브라 감독의 존재는 체코 영화계의 빛과 어두움을 보여준다. 그는 결코 체제 저항적인 작가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가진 정치적 은유는 어디까지나 제한적 함의를 갖는다. 

  'Witchhammer'는 중세의 마녀 사냥이란 역사적 사건이 어떻게 오늘날의 계급과 정치적 문제의 알레고리로 기능하는가의 한 예를 보여준다. 아서 밀러의 '크루서블(The Crucible)'이 1950년대 매카시즘에 대한 은유였듯, 'Witchhammer'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현대사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진 소련의 폭압적 지배를 마녀 재판정에 빗대어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또한 일방향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트럼프 정권 시기에 이 영화를 보았던 어느 미국 관객은 'Witchhammer'를 이민자들과 소수인종을 차별하고 탄압하는 정치 권력자들의 횡포로 받아들였다. 2021년의 한국 관객들은 이 영화를 이전의 해석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영화 텍스트의 비평적 지평은 그렇게 새롭게 확장될 수 있다.   



*사진 출처: blueprintreview.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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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타카미네 히데코는 자신의 영화 인생의 대부분을 나루세 미키오와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과 함께 했다. 거의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다고 회고한 나루세 미키오 감독과는 달리,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 감독과는 영화를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서로 상반되는 연출 스타일의 감독들과 작업을 했던 셈이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1955년작 '먼 구름(遠い雲, The Tattered Wings)'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스물 네 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1954)'를 찍은 이듬해에 다시 타카미네 히데코와 함께 한 작품이다. 영화는 일본 중부에 자리한 기후현의 다카야마시에서 촬영되었다. 당시 촬영 현장을 찍은 주민의 사진을 보니, 촬영 현장은 배우들을 구경하러 몰린 마을 주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사진 속에는 촬영장에서 담소하는 배우들, 연출 지도를 열심히 하는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모습도 있었다. 이 감독이 만드는 촬영장의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조금은 엿본 느낌이 들었다.

  '먼 구름'은 구시대적 인습에 갇혀 고통받는 여성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른 한국 영화는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였다. 타카미네 히데코가 연기한 주인공 후유코 역시 딸 하나를 둔 과부이다. 후유코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부모의 바램에 따라 부잣집으로 시집을 간다. 그러나 이 남편이란 작자는 바람둥이에 손찌검까지 하는 무도한 인간이었다. 5년의 결혼 생활 동안 고통받던 후유코는 남편이 죽은 후 딸을 키우며 마음의 평화를 되찾는다. 그런데, 옛사랑 케이조가 먼 곳으로 전근가기 전에 고향에 잠시 들르면서 후유코의 일상은 흔들린다. 케이조는 후유코에게 새출발을 하자며 인생의 행복을 찾아주겠다고 말한다. 한편 후유코의 죽은 남편의 동생 슌스케는 형수를 마음에 두고 있다. 과연 후유코는 어떤 선택을 할까?

  형사취수(兄死娶嫂). 형제의 사후에 그 처를 아내로 삼는 혼인 풍속이다. 우리의 눈에는 무척 낯설게 보이지만, 일본에서는 자연스럽게 통용되던 습속이었다. 후유코의 나쁜 남편과는 달리 동생 슌스케는 따뜻하고 점잖은 사람이다. 그는 후유코와 조카딸을 책임지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케이조의 등장으로 후유코의 선택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

  "이제는 행복합니까?"

  케이조도 슌스케도 후유코에게 그렇게 묻는다. 홀로 딸 키우는 과부에게 행복하냐는 질문은 매우 이상하게 들리지만, 후유코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후유코는 진짜 행복해서 그렇게 대답한 걸까? 옛연인 케이조에게도, 도련님 슌스케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후유코는 홀로 집에 있을 때, 집안을 둘러보며 울음을 터뜨린다. 높은 대들보가 이어진 그 큰 집은 마치 감옥처럼 보인다. 늘 웃는 표정의 후유코가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후유코에 대한 케이조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 케이조의 가족들도 후유코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함께 떠나자는 케이조의 애원에 후유코는 바깥 세상이 두렵다고 말한다. 고통을 주었던 남편은 이제 곁에 없다. 부유한 시댁의 안주인으로 시아버지를 모시며, 딸 하나 키우는 삶은 별다른 재미는 없지만 그럭저럭 괜찮다. 사랑을 찾아 떠나는 새출발이 행복을 줄 수 있을지 후유코는 생각이 많아진다.    

  후유코가 케이조와 잠깐 걸으면서 이야기한 것을 보고 마을에는 온갖 소문이 떠돈다. 남의 입과 눈이 아직은 무서운 시대이지만, 그래도 세상은 변하고 있다. 케이조의 여동생이 보여주는 발랄함과 자유분방함, 마을을 찾아온 재즈 악단과 댄서들의 공연 모습은 1950년대 중반 일본 사회의 서구적 변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오랜 관습과 사고방식의 틀은 견고하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그것을 영화 중간 중간에 넣은 마을의 마츠리를 통해 보여준다. 성대하게 펼쳐지는 마츠리 장면은 자유주의적인 서양의 가치관과 대비되는 일본의 전통을 상징한다. 그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거대하고 단단한 틀 앞에서 후유코는 갈등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다는 욕망과 딸에 대한 모정 사이에서 갈등한다. 케이조가 약속한 새출발에 후유코의 딸 키누코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리고 마침내 케이조가 떠나는 날, 후유코는 작은 보따리 하나 들고 역으로 달려간다.

  마침, 일 때문에 출장을 갔던 슌스케가 역에서 형수를 발견하고 떠나지 말라고 간청한다. 후유코는 망설인다. 이 때 후유코가 느끼는 내면의 극심한 갈등과 고통을 타카미네 히데코는 미세하게 떨리는 눈썹으로 보여주는데, 정말이지 이 대배우의 연기는 기가 막힌다. 그냥 오래된 구식 영화겠거니, 하고 보던 관객들이라도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후유코를 연기한 타카미네 히데코에게 몰입하게 될 것이다. '먼 구름'은 구식의 시대와 그 시대의 고통받는 여성의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그것을 다루는 키노시타 케이스케의 연출 방식은 절대로 후진 것이 아니다. 영화의 영어 제목 'The Tattered Wings'는 번역하면 '해진 날개'이다. 케이조는 후유코에게 더이상 해진 날개로 살아가지 말라고, 자신이 새로운 날개를 달아주겠다고 약속한다. 아직은 남자에 의지해서 행복의 날개를 펼쳐야만 하는 시대였다.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후유코가 자신의 날개로 날아오를 수는 없다는 것을 영화의 마지막에 관객들은 깨닫게 된다.  



*사진 출처: filmarks.com


   
*다음 글은 일요일에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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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제목이 좀 특이하다. 우리말 제목은 '뉴욕의 연인들'이라고 꽤 멋지게 지었다. 원제는 'They All Laughed', 영화 속 인물들이 모두 다 사랑에 빠지고 각자의 사랑을 쟁취한다. 그런데 이 영화 속 실제 배우들의 이야기와 영화의 운명은 결코 행복한 웃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피터 보그다노비치(Peter Bogdanovich) 감독의 1981년작 '뉴욕의 연인들(They All Laughed)'은 영화가 만들어진 지 1년이 지나서야 겨우 개봉되었다. 영화의 완성도는 기대에 못미치는 것이었고, 난무하는 혹평 속에서 흥행은 실패했다. 'The Last Picture Show(1971)', 'Paper Moon(1973)'으로 1970년대 미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떠올랐던 그의 경력은 곤두박질친다. 그는 이 영화 이후 4년 후인 1985년에야 복귀할 수 있었지만, 다시는 이전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져갔다.

  오딧세이 탐정 사무소의 탐정 존(벤 가자라 분)과 찰스(존 리터 분)는 각자 고객의 의뢰에 따라 미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존은 뉴욕을 방문한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 안젤라(오드리 햅번 분)를, 찰스는 남편의 의심을 받고 있는 유부녀 돌로레스(도로시 스트래튼)의 뒤를 밟는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자신들이 미행하는 여자들과 사랑에 빠진다. 컨트리 가수인 존의 애인 크리스티는 존의 변심에 찰스에게 접근하지만, 찰스가 돌로레스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챈다. 크리스티는 결국 돌로레스의 애인 후안과 맺어진다. 안젤라와 존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남편과 함께 안젤라는 유럽으로 돌아간다. 찰스는 돌로레스와 연인이 되어서 행복한 미래를 꿈꾼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게 전부다. 2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 동안 1시간은 존과 찰스의 미행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분명히 로맨틱 코미디라면 즐겁고 행복한 사랑의 기운이 느껴져야 하는데, 이 영화는 지루함과 비현실성으로 관객을 지치게 만든다. 그나마 이 영화에서 건질만한 것은 1980년의 뉴욕의 사람들과 풍경이다.

  찰스가 동료 아서와 함께 롤러장에서 돌로레스를 미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뉴욕의 롤러장과 그곳을 채운 사람들의 모습은 신기하기 짝이 없다. 그 시대의 헤어스타일과 패션, 음악을 비롯해 영화에 찍힌 뉴욕 시민들의 모습은 마치 타임 캡슐을 열어본 듯한 느낌을 준다. 컨트리 가수로 나오는 크리스티의 공연 장면과 클럽 사람들의 이모저모를 보는 것도 즐겁다. 이 영화의 지루하고 맥빠지는 이야기 전개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 뉴욕의 넘치는 생동감이다. 그걸 빼놓고 본다면, 이 영화는 보그다노비치의 무기력함과 바닥난 영화적 재능을 입증할 뿐이다. 찰스 역으로 나오는 존 리터의 코미디 연기는 하나도 웃기지 않다.


  50대에 접어든 오드리 햅번의 나이든 외모를 보는 것도 서글픈 일이다. 햅번에게 이 영화는 공식적으로 마지막 작품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햅번을 힘들게 했던 부분은 상대역인 벤 가자라와의 좌절된 연애였다. 1979년에 영화 'Bloodline'에 출연하면서 알게된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햅번은 남편의 외도로 실질적으로는 별거 상태에 있었고, 가자라도 이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가자라는 햅번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런 감정의 여파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두 배우는 '뉴욕의 연인들'을 찍었다. 보그다노비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걸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 그가 친분이 있는 배우(벤 가자라)의 사적인 삶을 영화로 드러내는 방식은 직업 윤리에 비추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써먹는 것에도 별다른 주저함이 없었다.

  영화 속에서 보그다노비치의 명백한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는 돌로레스와 사랑에 빠진다. 돌로레스 역을 연기한 배우는 도로시 스트래튼으로 이제 스무 살이 된, 플레이보이 모델 출신의 금발 미인이었다. 영화를 찍으면서 보그다노비치는 도로시 스트래튼과 연인 사이가 되었다. 문제는 스트래튼이 결혼한 유부녀였다는 것. 스트래튼의 남편 폴 스나이더는 말 그대로 양아치 포주 출신으로 아내의 미모로 한몫 잡으려고 하는 인물이었다. 영화 속에서 아내의 불륜을 의심해서 뒤를 밟게하는 돌로레스의 남편처럼 스나이더도 사립탐정을 고용했고, 그는 곧 아내가 감독과 새출발을 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내의 결별 통보를 용납할 수 없었던 포주 남편은 아내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영화를 배급하려던 영화사들이 결정을 철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보그다노비치는 스트래튼의 유작이 된 영화를 어떻게든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 결국 사재 5백만 달러를 털어넣은 무리한 배급 결정은 파산과 몰락으로 이어졌다(그는 자신의 이전 흥행작들로 번 돈을 다 쏟아부었다). 오프닝 크레딧에 도로시 스트래튼의 추모글이 가장 먼저 뜨는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막 떠오르는 신인 여배우의 참혹한 죽음에 더해, 이 영화의 완성도는 비평적인 면에서도 너무나 떨어진다. 현실성 없는, 그저 그런 '뉴욕 사랑 찬가'쯤 될까? 어떻게 하다가 보그다노비치는 자신의 영화적 재능의 밑바닥을 보여주며,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파국에 빠지게 된 것일까? 그는 스트래튼의 여동생과 1988년 재혼해서 13년간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스트래튼의 죽음은 그의 영화 경력 뿐 아니라 인생에도 길고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셈이다. 영화 '뉴욕의 연인들'을 보는 것은 그런 면에서 영화적인 것과 실제의 경계에 대한 사색의 공간을 만든다. 존과의 짧은 밀회 후 이별하게 되는 안젤라의 모습은 오드리 햅번의 씁쓸한 사랑의 결말이었다. 반면에 미모의 돌로레스에게 반한 찰스는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지만, 현실의 돌로레스(스트래튼)는 찰스(보그다노비치)와 함께 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웃을 수 없었던 사연을 지닌 이 영화는 2006년에서야 DVD로 발매되었다. 실제 배우들의 슬픈 사랑과 인생의 이야기를 뉴욕의 아름답고 활기 넘치는 풍광은 더욱 선연하게 만든다.  



*사진 출처: slant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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