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첼(pretzel)'이라는 과자가 있다. 원래는 독일에서 유래한 패스추리 빵의 한 종류인데, 미국으로 건너가서 과자로 재탄생했다. 매듭 모양의 과자로 표면에 뿌리는 굵은 소금이 특징이다. 아들 부시 대통령이 이 과자 먹다가 목에 걸려서 크게 고생했다는 일화도 있다. 아무튼 이 과자의 특징은 나름 중독성이 있다는 것인데, 그 짠맛과 단단한 식감에 매료되면 프레첼을 끊을 수가 없게 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레첼 과자 브랜드는 미국 S사의 프레첼이었다. 주로 소포장 용량으로 나오는 제품을 구입해서 먹곤 했다. 그 독특한 식감과 짠맛은 잊을 만하면 생각이 났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 단단한 과자가 치아에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먹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얼마전, 마트에 갔다가 미국 과자를 하나 사왔는데 땅콩 버터가 든 프레첼이었다. 땅콩 버터가 소로 들어서 뭔가 특이한 맛이겠거니 생각은 했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과자에 뿌려진 소금이었다. 짜도 너무 너무 짰다. 조그만 칩 같이 생긴 과자 서너개를 먹고 나면 더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과자는 마치 장식품처럼 큰 유리병에 담겨져 식탁에 보름째 놓여 있다. 종종 새로운 과자의 맛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이다.


  어린시절부터 나는 과자를 무척 좋아했다. 명절이나 제사 때에 친척 어른들이 집에 꼭 사들고 오는 알록달록한 포장지의 종합선물세트는 가장 좋아하는 선물이었다. 상자를 열면 각양각색의 과자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나눌 것인지가 문제였다. 극성맞은 나와 둘째 사이에서 막내는 자신이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들을 받았는데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그 착한 막내 동생은 아직도 과자를 끊지 못하는 나를 위해 맛있거나 새로 나온 과자가 있으면 사서 보내준다. 


  'B-29'라는 이름의 과자는 1980년대 초를 풍미했던 과자였다. 그 독특한 카레 맛은 나름 인기가 있었다. 1991년에 단종되었다가 그 맛을 잊지 못한 사람들의 재발매 요구로 2009년에 나왔으나, 3년만에 단종되었다. 다시 나온 그 과자를 먹어 보았더니, 그 맛은 내가 예전에 먹었던 '그 맛'이 아니었다. 뭐랄까, 가루 날리는 약간 싸구려 카레 맛이 그 과자 맛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새로 나온 과자는 세련된, 순한 카레 맛이었다. 88올림픽 때 선수촌 식당에서 있었던 일화가 떠올랐다. 인도 선수들이 카레 음식을 먹어 보고 이게 무슨 음식이냐고 물었다는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신문에 실렸다. 재발매된 B-29는 예전의 그 맛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본질을 잃은 맛'이었을 것이다.


  '아폴로' 과자도 기억이 난다. 작은 빨대 안에는 단맛의 카라멜 같은 것이 들어있었는데, 나는 포도맛을 좋아했다. 아마도 그 단맛은 내 치아의 크라운과 금 인레이 보철물에 작게나마 일조했을 것이다. 당시에도 먹으면서 '아, 이건 무서운 단맛이다' 싶어서 그렇게 많이 먹지는 못했다. 그런가 하면, 학창 시절에는 '치토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옥수수분을 재료로 한 그런 계열의 과자로는 '썬칩'도 있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정말로 과자없이 못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서 그 어떤 과자 보다도 잊을 수 없는, 최고의 맛으로 남아있는 과자는 '딱따구리'라는 과자다. 1980년대 초반 가격이 50원이었는데, 나는 피아노 학원 가는 길에 꼭 이 과자 두 봉지를 사서 먹으면서 가곤 했다. 내가 살았던 3단지 아파트에서 피아노 학원이 있는 4단지 상가로 가려면, 작은 언덕길을 넘어야 했다. 과자를 다 먹을 무렵에는 피아노 학원에 다다랐다. 나는 그 과자를 먹으며 걷는 그 길이 무척이나 행복했었다.


  백원 크기의, 윤곽선에는 작은 홈들이 파여있는 그 과자의 맛을 표현하라면 쉽지가 않다. 그것은 '중용의 맛'이었다. 짜지도, 달지도 않았고, 느끼한 맛도 아니었다. 질리지 않는 은근한 맛이었는데, 나는 이제까지 먹어본 그 어떤 과자에서도 그 맛을 다시 느낄 수는 없었다. '쌀로별'이라는 과자가 아마도 그 형태나 맛에서 좀 근접했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다. 그 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과자가 80년대 중반에 단종되어서 다시 나오지 않는 것이 아쉬울 법하다. 내가 추측하기로는 딱따구리 만화와 관련된 저작권 문제가 걸려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딱따구리'와 함께 했던 그 아파트에서 2년을 보낸 후 우리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내 유년의 삶은 유랑극단 같았다. 국민학교 시절에만 무려 5번의 이사를 다녔다. 어느 도시에서는 6개월을 머물기도 했다. 주로 아버지의 직장 발령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집안 사정도 있었다. 정주(定住)하지 못하는 삶. 이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부모님을 이해했지만, 나에게는 그 시절의 기억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나에게 그 아파트는 마치 고향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을 떠난 후, 다시 그곳을 찾은 적이 없다. 언제나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던 그 아파트는 몇년 전, 재건축을 위해 철거되었다. 나는 댐 건설로 고향이 수몰된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딱따구리'를 먹으며 행복을 느끼며 걸었던 그 작은 언덕길은 그 과자를 나에게 '고향의 맛'으로 각인시켰다. 


  '모든 견고한 것은 공기 속에서 사라지고...'. 아주 오래전 읽었던 칼 맑스의 '공산당 선언' 가운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이제는 그 작은 책자의 내용의 무엇이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그 글귀에는 인생의 자명한 진리가 담겨져 있었고, 또 그 표현도 문학적이라 좋아했던 것 같다. 영문본에는 '녹아버리고(melt)'라는 단어로 되어있지만, 나는 '사라지고'를 쓰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풍화'의 의미를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번에 녹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결국은 삭아져 가루가 되고 그 형체를 알 수 없게 되는 것. 나의 고향도, 그 고향의 맛도 이제는 사라졌다.


  대형 마트의 과자 코너를 돌아다니다 보면, 나는 아직도 그 '딱따구리'를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어떤 과자도 그 맛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조미료가 적당히 든, 유탕처리 식품에 불과한 50원짜리 그 과자는 그렇게 지나간 그 모든 것, 다시 되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좋은 추억의 집합체로 내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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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저녁, 뉴스를 보다가 20대 택배 노동자 사망 소식을 들었다. 내용을 더 들을 수가 없어서 TV를 그냥 껐다. 그런 소식은 여러번 듣게 되어도 익숙해지지 않으며, 마음이 아픈 것도 무뎌지지 않는다.


  오래전, MBC 무한 도전의 어느 회차에서 박명수가 새벽 버스에 탑승했던 장면이 있었다. 마침 버스에는 고등학생이 타고 있었는데, 박명수에게 응원의 말을 부탁했었다. 


  "지금 공부 열심히 안하면,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한다."


  박명수는 나름의 통찰력 있는 말솜씨 덕분에 따로 '박명수 어록'까지 만들어져서 인터넷에서 떠돌아 다닌다. 나는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더울 때 더운 데서 일하고, 추울 때 추운 데서 일하는 직업이라... 택배 기사들을 볼 때마다 그 말이 떠올랐다.


  택배 기사들은 직영의 경우를 제외한 대다수가 자신이 소유한 배송 차량을 가지고 택배 회사와 계약한 '개인 사업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자영업자로 인식하기 보다는 '택배 노동자'로 본다. 엄청난 노동 강도에 비해서 그들의 실질 수입이 크다고 보기도 어렵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택배 노동자 과로사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지난 7월에는 노동계와 시민 단체가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대책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8월까지 올해 들어서만 공식적으로 확인된 과로로 인한 사망자 수는 5명이다. 택배 노동자들의 과중한 업무의 핵심은 '분류 작업'이라고 하는 과정이다.


  '분류 작업'이 이루어지는 열악한 작업 환경과 과중한 업무 강도는 과로로 이어진다. 그래서 대책위원회는 그 과정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대략적으로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1)분류 작업의 자동화 시스템 도입, 2) 대체 인력의 채용. 2가지 모두 돈이 든다. 자금 여력이 있는 기업은 1번을 택했다. 택배사 가운데 오직 한곳만이 이 방법을 택했고, 나머지 중소 택배회사들은 원가 상승을 이유로 난색을 표시한다. 임시방편으로 분류 작업 과정에 대체 인력을 더 투입하고 있다고 들었다.


  어제 뉴스에 나온 20대 노동자 사망 사건의 경우, 유가족과 대책위원회 측이 '과로사'라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사측은 과로사는 사실과 다르다며 반박하고 있다. 사측의 주장은 이렇다. 사망한 노동자 A씨는 '택배 노동자'가 아닌 '택배 지원업무 일용직'이며, 그 업무는 과도한 업무와 거리가 먼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택배 지원업무'란 택배 포장에 필요한 노끈과 박스 등을 나르는 일을 의미한다.


  유가족과 대책위원회 측은 A씨가 물류 센터에서 1년 반을 일해왔으며, 그 기간 동안 75kg의 체중이 60kg이 되었으며, 야간 작업시 5만보를 찍을 정도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다고 말한다. 2년의 근무 기간을 채우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견뎠다는 유가족의 증언도 있었다.


  당진 용광로 추락 사고로 사망한 청년의 10주기가 지난 9월이었다. 이십대 청년이 작업장의 허술한 난간에서 떨어져 비극적으로 사망한 그 사건 이후로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 기사 댓글에 달린 '그 쇳물 쓰지 마라'는 제목의 추모시는 노래로도 나왔다. 청년의 뼈 일부만 수습하고 남은 '그 쇳물'은 구형의 상징물이 되어 철강회사 뒷편 녹지에 보관되어 있다. 


  우리는 그러한 죽음을 기억할 유형, 무형의 상징물을 얼마나 더 보아야 할까? 자본주의는 그 탄생부터 이윤을 위해 달리는 폭주기관차와도 같았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얼굴을 가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괴물이 되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있어야 한다. 법과 제도, 상식과 합의가 제대로 작동하기만 한다면 노동 현장의 가슴 아픈 죽음은 막을 수 있다. 누군가의 생명과 안전의 희생으로 굴러가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며, 오히려 그 사회는 소수자, 약자, 하층민에 대한 야만성과 폭력이 내재된 사회일 것이다. 


  어제, 그 뉴스를 듣고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잠들기 전 기도에서 청년의 명복을 비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쓴다. 일상과 영화 같은 소소한 글을 쓰는, 방문자 수도 얼마 되지 않는 블로그이지만, 이 곳에 오는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그 청년의 죽음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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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EBS 방송에서 눈길을 끄는 프로그램이 하나 있다. '가만히 10분 멍 TV'라는 이 프로그램은 10분 동안 고정된 카메라로 어떤 한 대상을 '가만히' 보여준다. 예를 들면, 아궁이에서 장작 타는 장면이라든지, 한옥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63빌딩 표면에 비친 풍경과 하늘을 그냥, 무작정 보여주는 식이다. 저런 것이 영상 ASMR인가 싶은 생각도 든다. 엊그제는 수족관의 줄무늬 정원장어를 보여주었는데, 처음에는 모래 속에서 꿈틀거리며 나오는 장어 모습에 기겁했다가 그 징그러운 귀여움(!)에 10분을 웃으면서 보았다.


  무언가 생각과 감정을 요구하지 않는 그 10분은 마치 명상의 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때론 그 가만히 있는 짧은 시간을 참지 못하고 채널을 돌릴 때도 있다. 어떤 대상을 그저 가만히 응시하는 그 자체가 참으로 쉽지만은 않은 일이구나 새삼 느끼게 된다. 그걸 보다 보니, 오래전 보았던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어느날, 수업 대신에 틀어준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는 시작부터가 범상치가 않았다. 낯선 선율과 대사로 시작되는 그 영화는 초반부까지는 어느정도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야기는 흩어지고, 알 수 없는 목소리들이 화면에 겹쳐서 계속 흘러갔다. 중반부에 이르러서는 그냥 영화를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아무 생각없이 스크린을 응시하고는 있었지만, 견딜 수 없이 지루했고 도대체 언제 끝날까를 계속 생각했다. 영화는 마치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영화의 개념, 그 자체를 무너뜨리려 합니다. 이야기 따위는 나한테 중요하지 않답니다.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억지로 꿰어 맞추려는 시도는 하지 말아요. 나는 그대의 영화에 대한 그 모든 기대와 고정관념을 배신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니까요."


  그 영화의 모든 것들은 스크린 밖으로 탈주하고 있었고, 내 인내심도 바닥날 대로 바닥이 난 상태였다. 영화가 끝날 무렵이었던가, 여자가 부르는 노래가 들렸는데, 유일하게 그 노래만 좋았다. 영화가 끝나자 오랜 구금 상태에서 풀려난 것 같았다. 상영시간도 알지 못하고 보았던 그 영화는 나중에 보니 고작 2시간 짜리였는데도, 4시간을 본 듯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영화의 제목은 '인디아 송(India Song, 1975)',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영화였다. 그 영화를 떠올릴 때마다 그 때의 기억이 나서 뭔가 진저리가 쳐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싫은 감정이 그리움의 감정으로 변모했다는 점이다. 다시 보라고 하면 절대 다시 볼 수 없는 영화인데, 그 영화의 무언가가 마치 기억의 연금술을 거치며 매혹의 성질을 획득한 것이다. 도대체 그렇게 만든 본질적 요소가 무엇인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가끔, 잔느 모로가 부른 그 노래 'India Song'이 라디오의 음악 프로에서 흘러나올 때가 있다. 그 노래를 들으면, 어떤 의미로는 그 엄청난 영화를 내가 견디면서 본 것이 대단하기도 하고, 혼자서는 도저히 못보았을 영화를 수업 시간에 보았던 것이 행운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무려 120분 동안 '멍을 때리며' 보아야 했던 영화를 아련한 그리움으로 추억할 수 있을 거라고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 영화와 관련된 자료를 찾다보니 'mesmerizing'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진짜 그러하다. 끊임없이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결국에는 영화적 최면을 걸어버리는 영화였다. 그래서 내 기억 속 그 영화는 그때의 지루함을 그리움의 감정으로 윤색시켜 버렸다. 마치 '가만히 10분 멍 TV'의 수족관 편 Splendid Garden Eel 들의 기이한 군무를 내가 다시 보고 싶어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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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학교에서 들었던 교양 수업 가운데 '영화의 이해'라는 수업이 있었다. 꽤 많은 학생들이 듣는 대강의 수업이었다. 어느날, 강의 끝무렵에 한 학생의 질문이 있었다.


  "교수님에게 '내 인생의 영화'는 무엇이었습니까?"


  "야, 그런 질문 좀 하지 말아. 난 그 질문이 제일 웃기고 한심한 것 같더라. 자신이 보는 영화가 다 자기 인생의 영화가 되는 거지, 무슨 그런 걸 꼽아 보고 있어?"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교수는 나가버렸다. 그 질문을 던진 학생은 멋쩍게 웃고 말았다.


  내 인생의 영화. 그건, MBC 라디오에서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FM 영화 음악'의 아주 유명한 코너였다. 매주 청취자들이 보내오는 '내 인생의 영화' 5편에 얽힌 사연을 선정해서 들려주는 그 코너는, 영화팬들에게는 어쩌면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코너일 것이다. 늦은 새벽에 나오는 그 방송을 매일 청취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 코너가 나오는 요일에는 꼭 챙겨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코너에 흐르던 음악, 영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1993)'에서 나왔던 그 음악도 참 좋았다. 음악 때문에 앤디 가르시아와 맥 라이언이 주연했던 영화까지 찾아서 보았었다.


  아마 그 코너 사연에 선정되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 힘들지 않았을까? 당시에 그 프로의 인기가 대단하기도 했고, 막상 선정된 영화들 이야기 듣다 보면 대개는 작가주의 예술영화 제목들이 줄줄이 나오기도 해서 때로는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평범한 영화를 언급한 정도로는 선정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어쨌든 유명인이 아닌, 영화를 사랑하는 일반 청취자들의 인생 영화들 이야기에는 뭔가 마음을 울리는 지점들이 여럿 있었다. 나는 내 사연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 5편에 무얼 넣어야할까 하는 생각은 많이 했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정은임 아나운서의 그 마지막 방송을 들었던 것도 기억난다. 정은임 아나운서의 '내 인생의 영화'도 그제서야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영화였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 마지막 방송은 좀 많이 가라앉았었고, 방송이 끝나자 먹먹한 느낌이 들었다.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많은 영화를 소개하기도 했던 정은임 아나운서는 여러모로 나에게도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겼다.


  이제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영화를 보았을까? 가장 많이 보았던 시절은 영화 공부할 때였는데, 1년에 대략 사백편에서 오백편, 그 보다 더 많이 보았을 것 같기도 하다. 공부를 잠시 쉬었을 때도 영화는 계속 보았으니까 학교 다닌 기간에만 대략 삼천편 가까이 될 것 같다. 누구는 1만편을 보았고, 누구는 2만편을 보았다는 소리도 들어서, 내가 본 것은 영화를 많이 본 축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그냥 평균 수준 같았다. 나는 영화가 너무 좋아서, 죽을 때까지 내가 볼 수 있는 영화가 과연 몇편이나 될까를 헤아려 보기도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의 좋은 영화란 영화는 다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으로 영화관에서 보았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2009)' 이후로 영화와는 거의 멀어졌다. 뭐랄까, 그 영화는 내 영화 사랑의 종언 같은 영화였다. 3D영화라니, 그런 영화는 내가 알고 있었던 이전의 영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는 변화하는 영화와 그 산업 전반을 바라보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그 이후로 나오는 어떤 영화를 보아도 시들했다. 마치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뒤처진 영화 꼰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영화책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영화의 제목을 적어두었다가 꼭 찾아서 보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제는 케이블 영화 채널을 돌리다가 어쩌다 보게 되는 영화들도 별로 없다. 최근작들 위주로 나오는 그런 채널 보다는 국회방송(NATV) 명화극장에서 보여주는 1970, 80년대 할리우드 영화들, 국민방송(KTV)에서 보여주는 예전의 오래된 한국 흑백 영화 같은 것을 본다.


  내가 상업영화 감독이라며 그냥 외면했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도 그렇게 보았다. 그걸 보면서 내 영화를 보는 눈의 편협함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혹평을 받았던 그의 '우주전쟁(2005)'도 내게는 남다르게 보였다. 미디어에 대한 스필버그의 통찰도 괜찮았고, 특히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오래전 보았던 존 포드 감독의 영화 '수색자(1956)'의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울컥하기까지 했다.


  가끔 해외의 젊은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을 보게 될 때도 있다. 그러나 보고 나면, '아니 고작 저 이야기를 하자고 영화를 저렇게 끌고 간 거야?' 하면서 허탈할 때가 있다. 이야기의 깊이는 얕아졌고,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들은 한없이 미시적이다. 시대가 바뀌었고 세대가 바뀌었으니 영화도 그에 맞게 바뀌어가는 것이 당연한데도, 내게는 그 영화들이 고전 영화들의 끝없는, 그다지 의미없는 변주같다. 마치 필립 글래스(Philip M. Glass)의 음악을 듣는 느낌이다.

 

  오늘 문득 이문세의 오래된 노래 '사랑이 지나가면'을 떠올려 보았다. 영화에 대해 그렇게 뜨거웠던 사랑은 추억으로만 남은 것 같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지나간 사랑을 되돌리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그래도 '내 인생의 영화'의 맨 마지막 편은 아직 쓰지 않고 남겨두었다. 미련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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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KBS '다큐멘터리 3일' 공무원 기숙학원 편을 본 적이 있다. 다양한 사연을 지닌 수험생들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계속 떨어지니까 결국은 그만 두고 다른 길을 찾는 사람도 있었고, 마침내 시험에 합격해서 공무원이 된 이도 있었다. 그 사람에게 공무원 합격하고나서 가장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삶의 안정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그 점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삶의 안정감'이라니, 나는 이제까지 살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어서 조금은 놀랍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삶의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공무원이 되면 저런 감정을 느낄 수가 있는 걸까?

 

  학교를 휴학하고 잠시 공공 기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뭐랄까 '공무원의 세계'를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른바 '칼퇴근'이 보장되고, 이런저런 수당도 괜찮게 주어지며, 자기 업무만 잘 해내면 그렇게 싫은 소리 들을 일도 없는 나름대로 좋은 직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조직사회의 특성상 나로서는 좀 견디기 어렵겠구나 하는 점도 있었다. 그 세계는 철저한 상명하복의 사회, 개인의 창의성 같은 것은 전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막힌 사회로 보였다.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있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어느날 아침에 출근을 하는 길이었다. 마침 그곳 기관장의 관용차가 정문 앞에 도착했다. 그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직원들이 양쪽으로 도열해서 기관장에게 인사를 하는데, 그 장면이 마치 영화 같았다. '출근하셨습니까?'하고 외치자, 기관장은 차에서 내리며 손을 흔들며 웃어 보였다. 그 '구역'의 왕은 그 기관장이었다. 속으로 '대체 뭐하는 거야'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내게는 무척이나 생경스러운 풍경이었다. 날더러 저렇게 하라고 하면 나는 할 수 있을까 스스로 물어보기도 했다. 못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공무원이 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공부를 그만 두고 무얼 할까 생각하다가 공무원 시험이 떠올랐다. 그런데 알아보니 나는 시험을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공무원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연령에 제한이 있었다. 나이가 좀 들었다고 해서 시험도 치루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무 부당한 것이 아닌가? 그 말도 안 되는 법령이 폐지되려면 그로부터 몇년이나 더 있어야 했다. 마침내 공무원 응시 연령 상한제가 폐지되고 나자, 40대부터 50대에 이르는 합격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뉴스에서 '늦깎이' 합격자들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 즈음에 나는 공무원으로 살아가기에는 이제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며칠 전, 동생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일찍 공무원이나 될걸 그랬어." 


  "공무원도 5급 이상은 월화수목금금금, 이렇게 산다고 하더라. 일이 그렇게 많고 힘들대. 그래도 공무원 연금 보면서 그냥 견디는 거지 뭐."


  동생은 그렇게 대답했다. 동생에게는 정부 부처의 5급 공무원 친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그 삶도 녹록하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만난 영화 쪽 사람들의 삶은 대개 안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런저런 일을 하며 살아가고는 있지만, 무슨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경우는 드물었고, 말못할 밥벌이의 괴로움을 다들 떠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아마 가장 안정적인 자리라면 대학의 교수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시절에는 열정만으로도 자신의 작품을 만들던 이가 교수 자리에 안착하고서는 아무런 작품을 만들지 못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것을 보면서 '삶의 안정성'이라는 것이 창작하는 사람에게는 '양날의 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흔들리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버티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 어쩌면 내가 살아가는 동안 안정적인 삶이란 도달하기 힘든 이상인지도 모르겠다. 흔들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어설프게 무언가에 의지하려 한다거나, 한 자리에서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 '흔들리다'라는 동사를 내 인생의 동사로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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