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비평 수업을 들어갔더니, 누군가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그건 제대로 된 영화인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등등. 가만히 들어 보니 영화 제작 쪽 누군가가 평론하는 이들에게 이런 말을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답답하면 니들이 찍던가..."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가'의 영화 버전이 되겠다. 나도 이렇게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지만, 가끔 어떤 평론들은 읽다 보면 뭔가 가슴이 답답해지고 도대체 이거 쓴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쓴 건가 싶을 때도 있다. 아, 물론 '답답하면 니들이 찍던가'라는 말은 정말 프로 의식이 결여된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진 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들에 대해 수잔 손택이 비평한 글을 읽으면 그런 답답함을 느낀다. '타인의 고통'에서 손택은 살가도의 사진에 대해 아주 신랄하게 비평하는데, 두 가지 관점에서이다. 살가도가 찍은 기아, 난민, 전쟁의 참상을 담은 사진들은 너무나도 미학적으로 아름다운데, 그것이 제 3세계 약자의 고통을 서구인의 시점에서 미화한 작업이라고 비판한다. 또 다른 하나는 그런 불행과 고통을 담아낸 사진들 속의 인물들에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익명화'해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저 연민만을 느낄 뿐 구체적인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대단히 광범위한 까닭에 아무리 특정 지역에 개입을 하고 정치적으로 개입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중에서)
'타인의 고통'의 번역은 대단히 불친절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비평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다들 읽어보았을 책이다.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는 사진 비평가들 뿐만 아니라 사진을 배우는 이들에게 경전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1977년에 쓰여진 이 책의 비평적 유효성이 그렇게나 타당한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부분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진 관음주의적 속성, 무기력함, 그리고 정치성을 비판하고 있다. 그의 동성 연인이었던 애니 리보비츠(Annie Leibovitz)가 사진 작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게도 느껴진다.
빔 벤더스 감독의 다큐 'The Salt of the Earth(2014)'는 세계적인 사진 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도에 대한 헌사라고 할 수 있다.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999)'와 같이 빔 벤더스는 예술가들의 삶을 담은 다큐 작업에 일가견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Everything will be fine(2015)'같은 극영화는 그에게 맞지 않다. 보고 나서 저런 걸 왜 만들었나 싶을 정도다. 아무튼 이 다큐는 살가도의 평생에 걸친 사진 작업들을 조망하는데, 내레이션을 살가도 본인이 주로 이끌어 간다. 자신의 사진 한장 한장에 대해 말할 때마다, 당시 사진을 찍었을 때의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그걸 보면서, 살가도가 사진을 찍는 대상에 얼마나 깊이 몰입하고 진정성있게 다가갔는지를 알 수 있다. 적어도 손택이 비판한 것처럼 '구경거리'를 찍어서 화제로 만들려는 선정주의적 태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브라질 출신의 이 사진 작가는 젊은 시절, 조국의 독재 정권을 피해 프랑스로 이주했다. 경제학자로서 세계 은행에 근무하기도 했던 그는 아내가 취미로 하려고 산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카메라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카메라를 가지고 그는 전세계를 누볐다. 에티오피아의 기근, 르완다 내전, 세르비아 내전, 걸프전, 아마존 오지와 파푸아뉴기니, 북극... 그는 자신이 본 세상의 모든 것들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했다. 그러나 르완다 내전은 그에게 정신적인 내상을 입히기도 했다. 인간성이 말살된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서 그는 자신의 직업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키갈리(르완다의 수도)에 이르는 150km가 온통 죽음 뿐이었어요. 그건 지옥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황폐해진 고향 땅을 푸른 숲으로 가꾸는 작업은 치유의 시간이 된다. 이른바 '테라 인스티튜트(Terra Institute)' 캠페인을 통해 자연이 가진 무한한 힘에 대해 느끼게 된 살가도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Genesis'를 완성한다. 지구 곳곳을 돌면서 담아낸 그 사진들은 자연의 아름다움, 그 광대함,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에게 부여된 보호의 책임을 역설한다.
이 다큐 한편을 보는 것은 살가도의 인생과 그의 사진 전부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가진 사진에 대한 진정성은 그가 찍은 사진 속 인물들에 대한 밀도있는 접근과 존중에서 나왔음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된다. 물론 그는 소위 거물 사진 작가로 그의 사진 작업들은 늘 세계적인 화제를 담았고, 그것이 그의 유명세를 더하게 했다. 살가도의 아내 렐리아가 유능한 기획자로서 그 모든 사진 작업들을 주관했고, 시대의 요구를 절묘하게 포착할 줄 알았다는 점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가 찍은 사진 속의 대상을 돈벌이와 명성의 수단으로 여겼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나도 인정한다. 살가도의 사진들은 정말로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기아로 인해 뼈 가죽이 드러난 이들, 내전으로 인해 피폐해진 이들의 얼굴,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는 하층민들의 얼굴, 그 모든 참혹한 풍경 속에서도 빛이 나는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 미적인 후광을 보는 것만으로도 곤혹스럽고 괴로웠다. 2005년 7월,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있었던 살가도의 사진 전시회에서였다.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불행과 고통에 처한 이들의 사진이 아름다운 것은 잘못된 것인가' 이런 질문을 살가도의 사진들은 우리에게 던진다. 그 점은 살가도의 사진에 일종의 멍에처럼 남은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 다큐에서 살가도가 보여주는 대상에 대한 진정성과 연민, 공감의 깊이가 남다르다고 느꼈다. 그것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사진에서 보여준 아름다움이 보는 이를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진에 담긴 너머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상상'은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이야기 속 사람들과 '연대(solidarity)'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수잔 손택이 말한 것처럼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책임감을 회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15년 전, 살가도의 전시회에서 아직도 기억나는 작품이 있다. 원주민의 아이였던가, 죽은 아이가 저승길을 갈 때 길을 잃지 말라고 '눈'을 그려주는 풍습이 있는 곳이었다. 아주 평화롭게 보이는 죽은 아이의 감긴 눈꺼풀에는 커다란 '눈'이 그려져 있었다. 꽃다발에 둘러싸인 관에 잠든 소녀는 새롭게 얻은 눈으로 다른 세상을 향해 잘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시회를 나오면서, 출구 쪽에 있는 직원에게 혹시 포스터를 얻을 수 있냐고 문의했다. 직원은 입구에 있는 담당자에게 문의해 보겠다고 하고는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 여직원은 나에게 포스터를 건넸다. 원래 특별 초대 손님에게만 주는 것인데 부탁을 해서 얻어왔다고 했다. 나는 아직도 그 포스터를 간직하고 있다. 그 웃음과 친절은 살가도의 따뜻한 사진들과 함께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았다.
*sal은 포르투칼어로 '소금'을 뜻한다. salgado는 'salty', 그러니까 '짠맛을 내는, 짠맛의' 의미인데, 이 다큐의 제목 '세상의 소금'은 사진 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gettyimages.com(사진 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도와 그의 아내 렐리아, 뒷편에 보이는 사진은 브라질 금광 노동자들을 담은 그의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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