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밖에 나갔다 오는 길에 보니,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이들의 뒤편에 달력이 하나씩 묶어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노인들이었다. 근하신년()이라는 반투명의 흰색 비닐 포장이 된 새해 달력을 얻는 것이 오늘의 주요한 일과였음을 짐작케 한다. 대체적으로 많은 곳에서 12월 1일에 달력을 나누어 준다.


  최근 몇 년 동안 달력 얻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실감했다. 주거래 은행의 벽걸이 달력은 3개월이 한 장에 인쇄된, 아주 실용적인 달력이어서 오랫동안 써왔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인가, 더이상 벽걸이 달력은 만들지 않는다고 해서 난감했었다. 다른 은행도 마찬가지였다. 벽걸이 달력은 비용 때문인지 만드는 곳이 점점 줄어들었고, 탁상 달력들로 대체되고 있었다. 작년에는 그나마 우체국에서 얻은 벽걸이 달력이 참 좋았었다. 지역 우체국 직원들이 찍은 아름다운 풍경 사진들이 달마다 인쇄된 달력이었다. 한 달이 지날 때마다 달라지는 계절의 풍광이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내년도 우체국 벽걸이 달력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내년 달력은 탁상용으로만 배부되고 있었다. 벽걸이 달력은 이제 구하기가 정말 어렵게 되었다. 얼마나 경기가 좋지 않으면 이럴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사실, 그걸 느끼게 된 것은 몇 년 전부터 변하기 시작한 달력의 재질 때문이었다. 부들부들하고 약간의 두께감이 느껴지던 재질이 얇아지고, 다소 거친 질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달력의 단가를 높이는 유명 화가의 그림이나 사진 작품 대신에 그저 그런 그래픽 디자인, 일반인 대상의 공모전에서 뽑은 그림 같은 것들이 실렸다. 예전의 화려하고 멋진 그림과 사진이 있었던 달력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뭐랄까, 달력의 몰락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제는 달력은 공짜로 얻는 것이 아니라 구매하는 것으로 바뀌는 추세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각양각색의 독특한 디자인의 달력들이 연말이면 시장에 나오고 있다. 작년에 내가 받은 달력 가운데에는 달력에 자신이 원하는 필체로 직접 날짜를 기입할 수 있는 '창작' 달력도 있었다. 그걸 일일이 써넣는 것이 귀찮아서 누군가에게 주고 말았다. 나에게는 정말 별로인 달력이었다.


  예전에는 달력 얻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달력 인심'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연말이면 사람들은 이리저리해서 달력을 네다섯개 얻는 일이 보통이었다. 경기가 호황이었던 시절에는 은행들도 실적이 좋았을 터이니 달력 인심도 아주 넉넉했다. 그러나 이제 걸어두면 돈이 들어온다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은행 달력 얻는 것은 VIP 고객에게나 쉬운 일이다. 보통의 예금 잔고를 가진 이에게 은행이 배부할 달력은 없다. 없다면서 나에게는 주지 않는 달력을 바로 옆 고객에게 건네는 것을 겪어 보면, 자본주의의 그 쓰디쓴 뒷맛이 어떤가를 잘 알게 된다.


  달력이 흔하던 시절에는 명절 때 전을 부치는 채반에 흰색의 달력 종이들을 쫘악 펼쳐놓고, 그 위에 각양각색의 전들을 놓았다. 달력 종이들은 기름을 잘 먹었으므로 어머니들의 명절 필수용품이었다. 나중에는 그 종이들에 형광물질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외면당했지만, 그런 시절도 있었다. 요새처럼 요리에 쓰는 기름종이들이 잘 나와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일력()'을 보는 것도 흔했다. 매일 한 장씩 뜯게 되어있는 그 달력을 걸어놓은 집과 상점들도 많았다. 일력에는 열두 간지()에 따른 동물들이 손톱만큼 작게 그려져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말(午, 십이지의 일곱째)의 날에 태어났으므로, '말'자를 넣어 이름을 지으려 했다고 가끔 지나가는 말로 웃곤 하셨다. 물론 말자, 말순이란 이름의 '말'은 '끝()'이라는 뜻이다. 아들을 낳길 간절히 바라던 시대에 원하던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나면 그런 이름을 짓던 시대도 있었다. 드라마 '아들과 딸(1992)'에 나오는 등장 인물인 막내딸 '종말이'의 이름도 역시 그런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일력은 최근에 다시 유행을 타면서 새로운 세대에게도 익숙한 물건으로 자리잡고 있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낼 때, 그 일력들이 주르륵 뜯겨나가는 클리셰가 많이 쓰였었다. 만약에 요새 그런 걸 쓰는 감독이 있다면, 관객들은 감독의 역량에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같은 시대를 거쳐온 이들에게는 그런 클리셰를 보는 것이 정겹고 반가울지도 모른다. 


  지금의 사람들에게 벽걸이 달력 보다는 책상 달력이 더 유용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책상 달력을 얻는 것이 더 수월해진 것이 꽤 되었다. 그런데 책상 달력도 받아보면 마음에 드는 것을 찾기가 참 어렵다. 날짜의 크기가 너무 작으면 보기가 불편하고, 또 나에게는 필요한 음력(曆)이 없는 것들도 많다. 어떤 달력에는 '손 없는 날(사람의 일을 방해하는 귀신이 땅에 없는 날, 이사나 중요한 일을 할 때 이 날을 선택한다)'이 적혀 있어서 정말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달력을 참 좋아했었다. 또한 메모할 공간이 너무 작아서도 안되었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조건들에 부합한 책상 달력을 2년 전에 썼었다. 어느 출판사에서 만든 달력이었다.


  작년에 그 책상 달력을 구하려고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걸 건네준 이에게 물어 보니, 출판사의 사장이 바뀌면서 달력을 없애버렸다고 했다. 새로운 사장은 출판사 창업주의 아들로 유학을 다녀온 이였는데, 자신의 아버지가 공들여서 내놓았던 달력을 쓸모없는 낭비로 여긴 모양이었다. 그가 해외에서 배운 학문이 마케팅이어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적어도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만드는 책과 함께 달력의 의미도 아들인 그 보다는 잘 아는 사람이었을 것 같다. 


  아직 내년도 벽걸이 달력을 구하지 못했다. 그걸 구할 다른 곳을 알아 보는 대신에, 그냥 내 마음에 드는 것을 사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그에 맞추어 사는 수 밖에 없지 하면서도, 오래전 연말이면 서로 달력을 넉넉히 나누어 주고 받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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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지인의 선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선배는 젊은 시절에 점을 본 적이 있는데, 마흔 넘어서 크게 잘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했다. 그 말은 좋은 예언이었지만, 정작 그 선배는 그 말을 믿고 뭔가를 하지 않고 지낸다고 했다. 인생에 큰 한 방이 터질 거라는 그 말에 의지하며 마흔을 훌쩍 넘기는 것을 옆에서 보는 것이 참 답답하다고 했다. 그 선배라는 이에게 결국 '한 방'이 터졌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것도 정말 오래된 이야기다.


  'Searching for Sugar Man(2012)'을 보고 나서 문득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젊은 시절에 냈던 음반 두 장이 자신의 나라 미국에서는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한 무명가수가 이 다큐로 인해 칠순이 다된 나이에 새로운 음악 인생을 열어가게 된다. 그야말로 '인생 한 방'이란 말의 참뜻을 보여준다. 다큐의 주인공 식스토 로드리게즈의 이야기다. 그의 노래는 인종차별이 횡행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저항의 노래로 받아들여졌다. 미국에서는 음반 프로듀서와 그 가족이 단지 6장만을 구매했다는 로드리게즈의 음반은 남아공에서 수백만 장이 팔렸다. 그렇게 그는 남아공 민주화 운동의 음악적 아이콘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로드리게즈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그저 매일매일의 생계를 이어가려고 온갖 일을 전전하며 살아간다. 대부분 몸을 쓰는 일, 우리가 막노동이라고 하는 일이었다. 그런 삶을 오랫동안 이어가던 그에게 누군가 찾아와서, 남아공에서 당신과 당신의 노래는 엄청난 인기가 있으니 와서 공연을 해달라고 한다. 아니, 이럴 수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결국 현실이 된다.


  사실 이 다큐에서처럼 로드리게즈에게 해외공연은 남아공이 처음은 아니었다. 1979년과 1981년에 호주에서 이미 성공적인 공연의 경험이 있었지만, 다큐에서 그 부분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이 다큐는 의도적으로 그 부분을 알리지 않음으로써, 일종의 '영웅 만들기'에 더 촛점을 맞춘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남아공에서 열린 공연 장면에서 의외로 로드리게즈가 차분하고 평온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과거의 그런 공연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는 막노동꾼으로 사는 동안 음악 경력이 단절되기는 했어도, 어느 날 갑자기 꿈같은 콘서트장에 불려나온 초짜배기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아무튼 이 다큐는 로드리게즈의 인생 역전을 가져오게 만든 소중한 선물과도 같았을 것이다. 노년에 접어든 나이이기는 했어도, 결국 그의 인생에 '한 방'이 크게 터졌고, 그는 여러곳에서 초청받는 유명 가수의 반열에 오른다. 뮤지션(musician)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위키피디아를 찾아 보니 2018년까지 공연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남아공에서 수백만 장이 팔렸다는 음반 수익금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로드리게즈와 계약한 서섹스 레코드사의 클래런스 아반트는 이에 대해 묻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어이, 이봐. 대체 로드리게즈의 행방이 궁금한 거야, 아니면 그 음반 수익금이 어디로 샜나가 궁금한 거야? 난 그 일 그만 둔 지가 꽤 되었다고. 이제와서 그런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아반트의 면상을 보면, 정말 노련하고 영악한 음악 장사꾼이 어떤지 잘 알 수 있다. 그는 무수히 많은 인기 가수들을 길러내어서, 일명 'The Black Godfather'라고 불리우는 인물이다. 나중에 이 다큐의 인기로 로드리게즈의 음반이 재발매되는 과정에서 과거의 그 수익금을 놓고 법적 다툼이 있었다고는 하는데, 제대로 정산되지는 못한 듯하다. 어쨌든 로드리게즈는 지난 시절에는 막노동으로 연명을 했을지언정, 이 다큐가 소위 '대박'을 터뜨리고 나서는 음반과 공연 수입이 막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화려하게 살기 보다는 이전의 소박한 삶의 방식을 그대로 이어갔다. 그런 것을 보면 그가 나름의 삶의 철학을 가진 인물임을 짐작케 한다.

 

  이렇게 무명가수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사한 감독 말릭 벤젤룰의 그 뒤의 이야기는 참 슬프다. 이 다큐로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 상을 비롯해 여러 영화제를 휩쓸었지만, 그는 2014년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서른 여섯,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이걸 보고 나니 새삼 느끼는 것이 있다. '인생 한 방'이란 것이 저렇게 있기는 있는데,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많은 이들이 그것을 꿈꾸지만, 그건 복권 당첨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로드리게즈의 경우에는 그가 젊은 시절에 만들었던 음반 2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만들었던 노래를 알아주는 먼 나라의 많은 이들이 노래의 생명을 이어가게 만들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이 세상의 누가 재능을 알아봐 줄 것이며 인정을 해주겠는가. 언젠가 쓸 평론, 언젠가 쓸 시나리오, 언젠가 쓸 소설... '언젠가'라는 말이 있는 한, 그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지금, 여기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창작하는 이들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언젠가'라는 무시무시한 미래 부사이다. 물론, 뭔가를 지금 쓰고 만든다고 해서 그것이 '대박'이 된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인생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인생 한 방'의 행운을 가져다 주는 여신은 결코 공평하지 않으며, 때로 그렇게 찾아온 행운이 어느 순간에는 불행이 되기도 하는 예를 심심치 않게 보기도 한다. 언제 올지 모르는 '고도'를 무작정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처럼, 우리 모두는 '대박'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Searching for Sugar Man'의 관객들은 어쩌면 주인공 식스토 로드리게즈의 그 대박 행운의 결말 보다는, 그가 젊은 시절에 낸 음반 2장의 실패 이후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묵묵히 살아낸 힘든 노동의 시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로드리게즈는 어쨌든 자신만의 삶을 성실히 살아냈다. 비록 그가 원하던 음악의 삶은 아니었지만, 그는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나에게는 그 점이 노년의 그에게 찾아온 행운 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로드리게즈는 엄청난 행운 앞에서도 담담하고 고요하게 자신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 한 방'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터지지 않을 수도 있다. 대개는 그러하다. 다만,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면, 그리고 매일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조금씩이라도 만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은 가치가 있다.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아주 평범한 하루가 선물이며 신비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이 다큐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진실인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telegraph.co.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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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는 영화 보기에 대한 '기벽()'이 하나 있다. 남들 다 보는 영화는 그냥 안 보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오래전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보았던 영화들을 세월이 한참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본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천장지구(1990)' 같은 영화들. 어제 EBS 세계의 명화에서 보여준 '가을의 전설(1994)'도 그랬다. 이 영화의 음악은 라디오에서 그렇게나 많이 들었어도, 영화를 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제 TV 틀다가 나오길래 보았다.


  진짜 음악이 정말 대단했다. 제임스 호너가 맡은 이 영화의 음악은 그냥 영화를 압도해 버린다. 그것이 영화에 꼭 좋기만 한 것인지 모르겠다. 영화 자체는 그저 그랬다.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도 뛰어나다고 하기 어렵다. 다만, 브래드 피트와 줄리아 오몬드의 젊은 시절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 좋았다. 브래드 피트를 처음 영화에서 본 것은 '흐르는 강물처럼(1992)'에서 였는데, 로버트 레드포드의 젊은 시절을 빼다박은 모습이어서 놀랐다. '가을의 전설'에서의 브래드 피트의 얼굴은 그로부터 겨우 2년 지났을 뿐인데도, 뭔가 '거칠고 삭은' 느낌이 났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이 영화에서 그의 얼굴과 함께 연기에서 느껴지는 '폭력성' 때문에 좀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여성 관객들이 그렇게 잊지 못하는 이 영화의 트리스탄 역에 대한 느낌과는 좀 달랐다.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와의 이혼 소송 과정에서 이런저런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안젤리나 졸리는 최대한 언론에 언급을 자제했지만, 브래드 피트가 이혼의 책임을 졸리에게 돌리는 발언을 연이어 하자 반격에 나섰다. 피트가 양아들 매덕스에게 폭력을 휘두른 일이며, 양육비를 제대로 주지 않은 문제도 제기했다. 피트는 알콜 중독의 문제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을의 전설'의 트리스탄에게서 받았던 느낌은 그런 실제적 사실과 어느 정도 중첩되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배우의 얼굴, 그리고 그 연기는 언제나 현실과 전혀 다르게 가공된 것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역시 최근에 본 '유주얼 서스펙트(1995)'의 캐빈 스페이시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 스릴러 영화는 캐빈 스페이시를 일약 유명 배우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가브리엘 번을 비롯해 베니시오 델 토로의 젊은 날의 얼굴도 볼 수 있다. 나는 특히 캐빈 스페이시의 연기를 아주 주의깊게 보았는데, 이 영화에서 그는 매우 교활하고 사악한 인물을 연기한다. 2017년, 배우 앤서니 랩이 자신이 미성년자일 때 스페이시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함으로써 스페이시의 배우 경력은 마감되었다. 그 외에도 다른 여러 건의 폭로가 이어졌다.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이런 일을 볼 수 있다. 미투 운동으로 여성 성악가들에게 저지른 성추행이 드러난 플라시도 도밍고도 평생의 빛나는 경력을 뒤로 하고 혹독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오페라 팬들에게는 늘 최고의 선택으로 여겨지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제임스 레바인은 미성년자 성범죄가 드러나면서 그야말로 그의 전생애에 걸친 음악 경력 자체가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레바인의 경우는 그가 지휘한 오페라들이 당대 최고의 성악가들과 했던 작업이라는 점이 오페라 애호가들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가 지휘했던 오페라가 음반이나 DVD로 더이상 나오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유주얼 서스펙트'로 돌아간다. 이 영화에서 버벌 킨트가 감춘 악인의 얼굴은 실제로 스페이시가 현실에서 저지른 추악한 범죄들(그는 놀랍게도 모든 처벌에서 벗어났다)을 떠올리며 보면 더 소름이 끼친다. 심지어 캐빈 스페이시는 이 영화 촬영 당시에도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같이 출연한 가브리엘 번이 증언했다(2017년 선데이 타임즈 인터뷰 참조). 당시에 영화 촬영이 이틀 동안 중단된 일이 있었는데, 그 이유가 스페이시가 어린 배우들을 상대로 부적절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몇 년 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아직 안본 '아메리칸 뷰티(1999)'를 언제쯤 보게 되기는 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 영화의 주연인 스페이시의 면상을 보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괴로울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어떤 배우들은 그 젊은 날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행복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해리슨 포드가 그렇다. 다음주 EBS 세계의 명화는 '위트니스(Witness, 1985)'를 방영한다. 혹시 이 영화를 안본 이들이라면 한번 보는 것을 추천한다. 피터 위어 감독에 주연 배우로는 해리슨 포드, 켈리 맥길리스가 나온다. 사실 대단한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영화 속 해리슨 포드의 젊은 날 얼굴이 참 아름답다. 포드는 액션을 주로 한 영화들이 유명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감정 연기도 섬세하게 잘 해내는 배우라는 것을 입증한다. 상대 여배우인 켈리 맥길리스도 빛나는 미모가 돋보인다. 누군가 쓴 이 영화의 리뷰 댓글을 읽다가 웃은 적이 있다. 


  '그렇게 영화 속에서 아미시(Amish) 공동체의 경건한 삶을 살던 엄마는 이듬해 아들을 버리고 톰 크루즈에게 가버리는데...' 


  1986년에 개봉한 영화 '탑건'에서 켈리 맥길리스는 미모의 비행 교관을 맡았다. 댓글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어제 밤늦게 '가을의 전설'을 보고 나서 KTV를 돌려 보니, 오래된 한국 영화를 하고 있다. 대갓집 담벼락이 나오는 장면을 보고, '맹진사댁 경사'인가 보네 했다. 그러자 화면 속에서는 배우 구봉서가 나오고, 왼쪽 상단에 '맹진사댁 경사' 타이틀이 떴다. 나는 EBS의 '한국 영화 걸작선'에 나왔던 오래전 흑백, 컬러 영화들은 거의 다 봤다. 간혹 못본 영화들을 KTV에서 볼 때가 있는데, 그건 그동안 영상자료원에서 새롭게 발굴한 영화나 저작권 문제가 해결된 영화들이다. 그렇게 만나는 영화들은 반갑다. 누군가는 그 구닥다리 영화가 무슨 재미가 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단지 영화 공부 때문에 그 영화들을 본 것은 아니었다. 그 영화들은 정말로 재미있다. 그 지직대는 오래된 화면 속의 영화들에는 그 시대의 사람들, 그들의 생각이 들어 있고, 그것을 살펴보면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돌아본다.


  내 영화 공부의 8할은 EBS 영화들에 빚진 것이다. 초창기 EBS에서 보여준 '세계의 명화'들은 정말로 대단했다. 당시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좋은 영화들을 방영해 주었다. 주로 영화 교과서에나 볼 수 있는 흑백 영화들이 많았다. 내 생각에 오래전 그 영화들을 직접 선정한 담당자는 진정한 '영화광'이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그 담당자에게 깊은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 영화들 때문에 나는 영화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EBS에서 보여주는 영화들은 무척 평범하다. 마치 별 특색없는 옛날 비디오 가게 같다. 그 점이 무척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제는 그 오래된 비디오 가게 같은 EBS 세계의 명화에서 '천장지구'도 보고 '가을의 전설'도 본다. 남들 다 본 영화를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보는 것도 생각보다 꽤 괜찮다. 어쩌면 그 배우의 연기와 영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 속에서 변해가는 배우들의 얼굴을 보면서, 내가 살아온 시간들도 돌아본다. 영화는 그렇게 그것을 보는 이의 삶과 함께 흐르고 있다.



*사진 출처: commonsensemedia.org (영화 'Witness'의 해리슨 포드와 켈리 맥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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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비평 수업을 들어갔더니, 누군가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그건 제대로 된 영화인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등등. 가만히 들어 보니 영화 제작 쪽 누군가가 평론하는 이들에게 이런 말을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답답하면 니들이 찍던가..."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가'의 영화 버전이 되겠다. 나도 이렇게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지만, 가끔 어떤 평론들은 읽다 보면 뭔가 가슴이 답답해지고 도대체 이거 쓴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쓴 건가 싶을 때도 있다. 아, 물론 '답답하면 니들이 찍던가'라는 말은 정말 프로 의식이 결여된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진 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들에 대해 수잔 손택이 비평한 글을 읽으면 그런 답답함을 느낀다. '타인의 고통'에서 손택은 살가도의 사진에 대해 아주 신랄하게 비평하는데, 두 가지 관점에서이다. 살가도가 찍은 기아, 난민, 전쟁의 참상을 담은 사진들은 너무나도 미학적으로 아름다운데, 그것이 제 3세계 약자의 고통을 서구인의 시점에서 미화한 작업이라고 비판한다. 또 다른 하나는 그런 불행과 고통을 담아낸 사진들 속의 인물들에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익명화'해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저 연민만을 느낄 뿐 구체적인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대단히 광범위한 까닭에 아무리 특정 지역에 개입을 하고 정치적으로 개입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수잔 손택, '타인의 고통' 중에서)


  '타인의 고통'의 번역은 대단히 불친절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비평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다들 읽어보았을 책이다.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는 사진 비평가들 뿐만 아니라 사진을 배우는 이들에게 경전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1977년에 쓰여진 이 책의 비평적 유효성이 그렇게나 타당한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부분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진 관음주의적 속성, 무기력함, 그리고 정치성을 비판하고 있다. 그의 동성 연인이었던 애니 리보비츠(Annie Leibovitz)가 사진 작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게도 느껴진다. 


  빔 벤더스 감독의 다큐 'The Salt of the Earth(2014)'는 세계적인 사진 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도에 대한 헌사라고 할 수 있다.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999)'와 같이 빔 벤더스는 예술가들의 삶을 담은 다큐 작업에 일가견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Everything will be fine(2015)'같은 극영화는 그에게 맞지 않다. 보고 나서 저런 걸 왜 만들었나 싶을 정도다. 아무튼 이 다큐는 살가도의 평생에 걸친 사진 작업들을 조망하는데, 내레이션을 살가도 본인이 주로 이끌어 간다. 자신의 사진 한장 한장에 대해 말할 때마다, 당시 사진을 찍었을 때의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들려준다. 그걸 보면서, 살가도가 사진을 찍는 대상에 얼마나 깊이 몰입하고 진정성있게 다가갔는지를 알 수 있다. 적어도 손택이 비판한 것처럼 '구경거리'를 찍어서 화제로 만들려는 선정주의적 태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브라질 출신의 이 사진 작가는 젊은 시절, 조국의 독재 정권을 피해 프랑스로 이주했다. 경제학자로서 세계 은행에 근무하기도 했던 그는 아내가 취미로 하려고 산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카메라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카메라를 가지고 그는 전세계를 누볐다. 에티오피아의 기근, 르완다 내전, 세르비아 내전, 걸프전, 아마존 오지와 파푸아뉴기니, 북극... 그는 자신이 본 세상의 모든 것들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했다. 그러나 르완다 내전은 그에게 정신적인 내상을 입히기도 했다. 인간성이 말살된 참혹한 살육의 현장에서 그는 자신의 직업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키갈리(르완다의 수도)에 이르는 150km가 온통 죽음 뿐이었어요. 그건 지옥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황폐해진 고향 땅을 푸른 숲으로 가꾸는 작업은 치유의 시간이 된다. 이른바 '테라 인스티튜트(Terra Institute)' 캠페인을 통해 자연이 가진 무한한 힘에 대해 느끼게 된 살가도는 2004년부터 2011년까지 'Genesis'를 완성한다. 지구 곳곳을 돌면서 담아낸 그 사진들은 자연의 아름다움, 그 광대함,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에게 부여된 보호의 책임을 역설한다.


  이 다큐 한편을 보는 것은 살가도의 인생과 그의 사진 전부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가진 사진에 대한 진정성은 그가 찍은 사진 속 인물들에 대한 밀도있는 접근과 존중에서 나왔음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된다. 물론 그는 소위 거물 사진 작가로 그의 사진 작업들은 늘 세계적인 화제를 담았고, 그것이 그의 유명세를 더하게 했다. 살가도의 아내 렐리아가 유능한 기획자로서 그 모든 사진 작업들을 주관했고, 시대의 요구를 절묘하게 포착할 줄 알았다는 점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가 찍은 사진 속의 대상을 돈벌이와 명성의 수단으로 여겼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나도 인정한다. 살가도의 사진들은 정말로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기아로 인해 뼈 가죽이 드러난 이들, 내전으로 인해 피폐해진 이들의 얼굴,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는 하층민들의 얼굴, 그 모든 참혹한 풍경 속에서도 빛이 나는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 미적인 후광을 보는 것만으로도 곤혹스럽고 괴로웠다. 2005년 7월, 서울 프레스 센터에서 있었던 살가도의 사진 전시회에서였다.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불행과 고통에 처한 이들의 사진이 아름다운 것은 잘못된 것인가' 이런 질문을 살가도의 사진들은 우리에게 던진다. 그 점은 살가도의 사진에 일종의 멍에처럼 남은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 다큐에서 살가도가 보여주는 대상에 대한 진정성과 연민, 공감의 깊이가 남다르다고 느꼈다. 그것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사진에서 보여준 아름다움이 보는 이를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진에 담긴 너머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상상'은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이야기 속 사람들과 '연대(solidarity)'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수잔 손택이 말한 것처럼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책임감을 회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15년 전, 살가도의 전시회에서 아직도 기억나는 작품이 있다. 원주민의 아이였던가, 죽은 아이가 저승길을 갈 때 길을 잃지 말라고 '눈'을 그려주는 풍습이 있는 곳이었다. 아주 평화롭게 보이는 죽은 아이의 감긴 눈꺼풀에는 커다란 '눈'이 그려져 있었다. 꽃다발에 둘러싸인 관에 잠든 소녀는 새롭게 얻은 눈으로 다른 세상을 향해 잘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시회를 나오면서, 출구 쪽에 있는 직원에게 혹시 포스터를 얻을 수 있냐고 문의했다. 직원은 입구에 있는 담당자에게 문의해 보겠다고 하고는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 여직원은 나에게 포스터를 건넸다. 원래 특별 초대 손님에게만 주는 것인데 부탁을 해서 얻어왔다고 했다. 나는 아직도 그 포스터를 간직하고 있다. 그 웃음과 친절은 살가도의 따뜻한 사진들과 함께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았다.



*sal은 포르투칼어로 '소금'을 뜻한다. salgado는 'salty', 그러니까 '짠맛을 내는, 짠맛의' 의미인데, 이 다큐의 제목 '세상의 소금'은 사진 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gettyimages.com(사진 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도와 그의 아내 렐리아, 뒷편에 보이는 사진은 브라질 금광 노동자들을 담은 그의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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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은 매일의 일상에서 생존하기 위한 갑옷(armor)같은 거죠. 그것이 사라진다면, 그건 문명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이의 갑옷은 푸른색 프렌치 워크 자켓(French work jacket)과 투박한 면바지, 어깨에 둘러맨 작은 카메라 가방, 편한 스니커즈였다. 그는 뉴욕 패션 사진계의 거장 빌 커닝햄이었다. 늘 자전거를 타고 뉴욕 시내를 누비면서, 그가 좋아하는 의상을 입은 사람은 누구든 찍었다. 낮에는 거리에서, 밤에는 여러 파티와 행사장을 누볐다. 그렇게 그가 찍은 사진들은 뉴욕 타임즈에 'On the Street'과 'Evening Hours'라는 이름의 포토 에세이로 실렸다.


  리처드 프레스(Richard Press)가 2010년에 만든 다큐 'Bill Cunningham New York'은 빌 커닝햄의 사적인 모습을 담았다. 그는 뉴욕 패션계의 유명인사들을 담는 사진 작가였지만,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커닝햄을 감독 리처드 프레스는 8년 동안 설득했고, 마침내 다큐를 찍을 수 있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그에게 감독이 다큐가 끝나갈 무렵에 묻는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은 있냐고.


  "그러니까, 내가 '게이(gay)'냐고 지금 묻는 거 맞아요?"


  리처드 프레스가 'Yes'라고 외친다. 커닝햄의 대답은 이러했다.


  "난 항상 일하느라 바빴어요. 밤낮없이 일했죠."


  그랬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옷'만이 가득했다. 그는 많은 셀럽(celebrity)들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지만, 그들이 그의 마음에 드는 멋진 옷을 입었을 때만 찍었다. 카트린 드뇌브를 거리에서 보았지만 그는 찍지 않는다. 별로 흥미있는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자신은 파파라치(paparazzi)가 아니며, 시대의 패션을 기록하는 사진 작가라고 말하는 빌 커닝햄의 표정에는 대단한 자부심이 묻어난다. 그가 자신의 직업에 임하는 자세는 '수도승'같다. 그는 자신이 초대되는 연회나 행사장에서 술과 음식은 물론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는다. 그곳에 가기 전에 미리 3달러 안팎의 식사로 끼니를 때운다. 오직 그의 관심사는 사람들이 입은 '패션'이다.


  그가 평생 동안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유명인사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뉴욕 타임즈에 오랫동안 기고한 'On the Street' 칼럼에는 온전히 거리에서 만난 각양각색의 의상 사진으로 채워졌다. 그 기록은 일종의 패션 사회사이기도 했다. 일반인들의 패션에서 다가올 유행의 흐름을 읽어내고, 자신만의 안목으로 시대를 기록했다. 뉴욕 역사 협회에서 빌 커닝햄의 사진 작업들을 소장하고 기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평생을 옷에 미쳐서 산 사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찍는 화려하고 멋진 옷을 입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카네기홀에 딸린 그의 작은 스튜디오는 소박한 침대 하나와 네거티브 필름이 가득한 여러 개의 캐비닛, 패션 관련 서적들이 전부였다. 화장실은 복도에 있는 공용 화장실을 썼다. 그러다 카네기홀 재단에서 리모델링을 진행하면서 입주한 예술가들을 퇴거시키게 되는데, 커닝햄도 어쩔 수 없이 재단에서 마련한 아파트로 옮기게 된다. 그는 새로 입주한 아파트 집주인에게의 주방 시설을 제거해달라고 요청한다. 그에게는 사진을 보관할 장소가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돈이란 건 가장 값싼 거에요. 자유가 세상에서 제일 값진 거죠(Money is the cheapest thing. Liberty is the most expensive)."


  빌 커닝햄은 자신의 사진 작업에 돈이 물드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그가 입은 푸른색 프렌치 워크 자켓은 프랑스 지하 상가에서 파는 작업복이었다. 파리 청소부들이 입는 것과 같은 옷이었다. 그 옷은 그가 타고 다니는 슈윈(Schwinn) 자전거와 함께 그만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다큐에서 그는 자신의 29번째 자전거를 소개한다. 28번째 자전거는 도난당했다. 자전거를 타고 뉴욕을 누비는 패션 수도승, 빌 커닝햄의 삶은 그런 것이었다. 


  이 다큐를 보는 이들은 빌 커닝햄의 눈이 가장 빛나고 반짝거리는 순간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을 때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그때, 그의 얼굴은 설레임과 즐거움이 가득하다. 20대 때 징집되었던 그는 1950년대 프랑스에서 군복무하면서 패션에 눈을 뜬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자신만의 모자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가 파는 모자는 마릴린 먼로와 진저 로저스 같은 유명 여배우들이 쓸 정도로 잘 나갔다. 그러다 우연히 패션 사진 작업을 하게 되면서 그의 일생은 옷에 바쳐졌다.


  오직 '옷' 사진으로만 꽉 채워진 삶.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화려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 옷이나 찍어서 내다파는 인생 아니었냐고. 냉소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그렇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존재한다. 특히 예술 분야는 실제적인 유용성과는 대부분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를 한번 생각해 보자. 영화가 세상에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 영화 감독과 비평가들이 하는 일은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에 얼마나 기여를 하고 있을까? 지나간 청춘의 날들에, 나는 영화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거라 진심으로 믿었었다.


  빌 커닝햄은 2016년, 87세로 세상을 떴다. 죽기 전까지 그의 사진 작업은 계속 이어졌었다. 다큐에 나왔을 때는 80에 가까운 나이였는데도 변함없이 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매일 같은 옷차림에 자전거를 끌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 나이까지 이런 열정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정말로 가능할까? 이 다큐의 마지막 장면에서 커닝햄은 이렇게 외친다.


  "아이구, 이젠 그만 찍읍시다. 나 일해야 한다구요."


  영화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만약에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오직 영화에 대한 열정만으로 평생의 삶을 지탱해나가는 누군가가 만드는 영화 속에 있을 것이다. 그 영화에 들어있는 그 무언가가, 그것이 꿈이든 매혹이든 어떤 이의 삶을 흔들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그의 삶이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그 영화는 구원의 영화가 되지 않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그런 영화를,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열정이 필요하다. 빌 커닝햄의 삶을 담아낸 이 다큐는 그 열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다큐는 archive.org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영어 자막은 제공되지 않는다.


**사진 출처: gettyimag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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