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다큐는 마치 '레스트레포(Restrepo, 2010)'의 후속편 같다. Danfung Dennis의 'Hell and Back Again(2011)'은 아프간 전에서 부상으로 제대한 해군 나탄 해리스 중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리스는 교전 중에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 때문에 제대로 걷질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만성적인 통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린다. 여러가지 진통제를 비롯해 다양한 약들을 복용하고 있는데, 거의 한 뭉텅이에 가깝다.


  Danfung Dennis는 자신의 경력을 전쟁 사진 작가로 시작했다. 그러다 아프간 전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좀 더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이 다큐의 제작을 기획했다. 이 다큐는 해리스가 속한 부대를 따라 다니며 그가 직접 찍은 전투 장면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한마디로 그는 총알이 날아다니는 격전지에서 목숨을 걸고 촬영했다. 나중에 해리스가 제대하고 나서는 해리스와 그의 아내 애쉴리가 어떻게 힘겹게 일상을 이어가는지를 약 1년에 걸친 시간을 함께 하며 화면에 담아냈다.


  이 다큐는 전쟁에서 귀환한 병사가 겪는 PTSD가 어떤 것인지를 영상으로 구현해낸다. 아무런 위협도 존재하지 않는 해리스의 일상 속에서도 고통과 불안, 두려움이 상존한다. 관객은 해리스가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끊임없이 아프간에서의 기억을 복기하고 있음을 다큐 내내 교차 편집되어서 등장하는 아프간 전투 화면들을 보면서 알게 된다. 집에서도, 마트에서 장볼 때에도, 아내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도 해리스의 내면에 수시로 침입하는(intrusive) 외상의 기억들은 마치 떼어낼 수 없는 망령 같다. 감독은 그렇게 해리스의 일상에서 전투의 기억으로 전환되는 부분에서는 의도적으로 기이한 효과음을 넣는다.


  대놓고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항상 무언가를 숨기고 있고 결코 조력자의 위치에 있지 않는 주둔지의 아프간 주민들의 모습은 미군들에게 탈레반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지휘관은 주민들에게 자유와 평화를 주기 위해서 이렇게 싸우는 것이니 협조해 달라고 하지만, 냉랭한 표정의 현지인들은 미군이 와서 더 힘들다며 차라리 떠나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출구없는 긴 전쟁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다쳐서 돌아왔다. 해리스는 살아남았지만, 그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 것은 버겁기만 하다. 부상의 후유증은 어쩌면 평생을 갈지도 모르고, 정신적인 고통도 그의 몫으로 남았다. 


  "결국 이렇게 걸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나마 좋은 점 하나는 그 빌어먹을 전장터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해리스는 다큐 끝 무렵에 그렇게 독백한다. 그는 자기 전에 침대 옆에 총을 두는데, 언제든 침입자에 대비해서 쏠 준비를 해놓아야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그의 곁에서 이내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해리스는 과연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까? 다큐는 그 질문에 대해 해리스가 부상을 입은 실제 전투 장면을 마지막 장면에 넣음으로써 답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리스는 총을 맞았을 때를 회상하면서 하늘을 보며 천천히 숨을 쉬었다고 되뇌인다. 그렇게 지옥에서 귀환했건만, 그곳에서의 기억은 그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감독 Danfung Dennis는 이 다큐로 2011년 선댄스 영화제의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과 촬영상을 수상했다. 다큐를 보고 나서 감독에 대해 자료를 찾다가 의외의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비디오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려서 CEO가 되었다. 물론 명시적으로는 사진 작가와 다큐멘터리 제작자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는 이전의 경력을 더이상 이어가지는 않는 것 같다. 사실, 그의 원래 전공도 응용 경제학과 경영이었다.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비며 사진과 다큐 작업을 했던 것은 한 시절의 경험으로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결국 이 다큐는 그의 유일한 작품이 되었다. 어쩌면 'Hell and Back Again'의 해리스처럼, 그도 한 때 자신을 사로잡았던 다큐라는 열정의 전장에서 냉엄한 현실로 귀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진 출처: filmmakermagaz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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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서 TV를 틀었는데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좀 있으니 화면 우측 상단에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이란 설명과 함께 '퍼스널 쇼퍼'란 제목이 뜬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영화인가 궁금해서 보았다. 그래도 칸에서 상까지 주었을 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나에게 매우 낯선 감독이다. 어떤 영화들을 만들었나 살펴보니, 필모그래피에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Clouds of Sils Maria, 2014)'가 뜬다. 아, 이 영화... 우연히 보다가 너무 재미없어서 중간에 꺼버린 영화였다. 줄리엣 비노쉬의 나이든 모습도 내게는 정말로 충격이었더랬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블루(1993)'의 비노쉬는 얼마나 빛났던가. 아무리 세월 앞에 장사 없다지만, 늙어가는 여배우의 얼굴을 보는 것은 때론 가슴 아프고 견디기 힘들다. 그 영화에서 나이든 비노쉬와 대비되는 젊은 여배우가 나왔었는데, 바로 크리스틴 스튜어트였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내게 유부남 감독하고 바람난 철없는 여배우로 각인되던 참이었다. 결국 헤어지기는 했지만, 저 여배우가 앞으로 어떻게 자신의 영화 경력을 이어나갈 것인가 궁금하기는 했다. 그러다 어제 '퍼스널 쇼퍼(2016)'에서 스튜어트를 다시 만났다. 이 영화에서 스튜어트는 퍼스널 쇼퍼 모린 역을 맡아서 아주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어느 정도냐 하면, 망해버린 영화를 심폐소생시켜서 다시 되살릴 정도로 좋은 연기다. 영화는 솔직히 말해서 공허한 껍데기 같다.


  모린은 쌍둥이 오빠 루이스를 얼마 전 잃고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상태에 있다. 영매(媒)였던 루이스가 죽은 이후에도 자신의 곁을 떠돈다고 생각하는 모린은 루이스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다 루이스의 집에서 심령체(ectoplasm, 죽은 영혼에서 발산되는 유동성 물체)를 발견하고 공포에 질린다. 그것이 루이스인지 아니면 다른 제 3의 존재인지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어느날 모린의 휴대폰으로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 문자가 온다.


  "난 널 알아, 너도 날 알고."


  그때부터 그 'Unknown'과 문자로 소통하기 시작한 모린. 그렇게 문자를 주고 받으며, 모린은 자신의 내면 안에 감춰진 욕망과 두려움을 바라보게 된다. 이 영화에서 사실 주목할 부분은 모린과 Unknown이 주고 받는 문자 대화들이다. 모린에게 끊임없이 각성과 관심을 요구하는 Unknown의 문자들은 마치 글로 뭉쳐진 공포의 덩어리 같다. 안보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는 눈을 뜨고 보게 되는 공포 영화의 가장 무서운 장면처럼 모린도 그 문자들의 공격에 강박적으로 매여 있다. 어쩌면 이 영화의 관객들은 모린이 목격한 심령체나 또는 허공에 떠있다 저절로 떨어져 깨지는 컵이 나오는 반복된 장면들 보다 더 무섭다고 느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 모린은 자신의 고객인 키라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면서 더 큰 혼란과 두려움에 빠진다. 이렇게 이어지는 내러티브들은 전체적으로 매우 불균일하고, 툭툭 끊어지며, 여기저기 빈 구멍들이 나 있다. 이 영화가 칸에서 상영되었을 때, 다 보고 난 관객들이 야유를 보낸 것도 무리가 아니다. 도대체 칸에서 아사야스에게 감독상을 안겨준 이유가 뭘까 궁금해진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매우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있다. 현대사회의 양면성과 고독하고 불안한 인간의 내면을 그려낸 수작이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그저 조잡하고 실없는 소리들의 나열(spooky hokum)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 나는 후자의 편에 서겠다.


  물질과 영혼, 이승과 저승, 돈이 넘쳐나는 화려한 고용주와 그를 대신에 물건 사다 나르는 고용인 퍼스널 쇼퍼. 뭐 이렇게 이분법적인 세계 속에서 자신의 참자아를 탐구하는 한 인간의 내적 여정이라고 해야할지, 겉포장지는 그럴듯하다. 막상 뜯어본 상자 속에는 '커다란 벽돌' 하나가 터억 하고 놓여있어서 그렇지. 중고 거래에서 사기꾼들이 주로 쓰는 수법이다.


  이 영화에서 오직 볼 것이라고는 여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 밖에 없다. 지극히 예민하고 불안과 공포에 흔들리는 한 인간의 내면을 매우 섬세하게 포착해낸 이 여배우의 연기를 보았다는 것만이 이 영화에 대한 실망을 상쇄한다. 화려하고 매우 여성스러운 옷을 입었을 때에도 결코 관능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가죽 재킷에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스튜어트에게서는 중성적인 매력이 넘쳐난다. 어쩌면 영매로서의 재능을 루이스와 나누어 가진 모린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남성도 여성도 아닌 그 중간의 영역에 서있는 모호한 존재일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출연작들을 한번 살펴 보았다. 혹평을 받은 것도 있고 아주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도 있다. 적어도 스튜어트는 이 영화를 통해서 자신이 배우로서 가진 역량과 가능성을 관객에게 충분히 입증해낸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자신이 칸에서 받은 감독상을 전기톱으로 잘라서 절반은 스튜어트에게 주어야할 것이다. 길 잃고 헤매는 이 영화의 분열된 이미지와 의미들을 힘겹게 이끌고는 결국에 종착지에 이르게 만드는 이 여배우의 저력은 정말 대단하다. 나는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나오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를 조만간 볼 생각이다.



*사진 출처: filmcommen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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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이었던 것 같다. TV를 틀었는데,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유태인들이 막 독일군에게 끌려가는 혼란과 공포가 가득한 장면이 이어지고 있었다. 영화는 이제 막 초반부를 좀 넘어서고 있었다. 그 영화에는 무언가 사람을 잡아끄는 마력이 있었다. 아무튼 그때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해서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보았다. 영화가 끝났을 때에는 먹먹함마저 느꼈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정말 저주받은 재능이네. 영화를 저렇게 기깔나게 뽑아내다니..."


  '기깔나다'는 사전에도 없는 비속어이다. 보통 '기가 막히게 대단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때깔'이 그 어원이라는 말도 있는데, 아무튼 그런 표현을 써서 말할 수 밖에 없는 영화였다. 그 영화는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2002)'였다. 나는 그 영화를 오랫동안 외면해 왔었다.


  '물속의 칼(1962)'을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난다. 흑백 화면 속에서 펼쳐지던 그 팽팽한 긴장감과 물 위의 '요트'라는 좁은 공간을 다루는 폴란스키의 탁월한 감각에 감탄했었다. 그 영화는 그의 첫 장편 영화였다. 한마디로 뛰어난 신인 감독의 세상을 향한 포효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어지는 영화 작업들을 통해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해 나갔다. '악마의 씨(1968)', '차이나 타운(1974)'을 보았을 때의 전율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그런가 하면 '진실(Death and the Maiden, 1994)'은 또 어떠한가? 우리나라에서는 '시고니 위버의 진실'로 알려진 그 영화에는 두 명의 주인공, 시고니 위버와 벤 킹슬리가 나온다. 그 두 사람의 진실을 향한 치열한 대결의 여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극도의 몰입감과 집중력을 요구한다. 폴란스키는 그런 대단한, 엄청난 영화를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


  내가 그 모든 영화들을 보았던 때는, 아직 폴란스키의 아동 성범죄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이었다. 나중에 그의 추악한 범죄 행위가 드러났을 때, 나는 한편으로는 이미 그의 영화들을 다 봐두었다는 사실에 안도했었다. 더이상 그의 영화들을 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피아니스트'를 작년에서야, 그것도 우연히 틀었던 TV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감탄하면서 약간의 거리낌도 느꼈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받는 것은 괜찮은 것일까, 하고...


  클래식 음악계의 거장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자신의 음악 경력을 피아니스트로 시작했다.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지만, 그의 아내는 더 유명했다.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였다. 이십대 후반에 다발성 경화증으로 더이상 연주 경력을 이어갈 수 없었던 아내를 외면한 바렌보임은 러시아 피아니스트와 딴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아들 둘을 두었다. 자클린이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후에 그가 세간의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지휘자로서의 경력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나는 바렌보임의 연주를 듣지 않는다. 라디오에서 그의 피아노 연주나 지휘곡이 나오면 그냥 꺼버린다. 싫기도 하지만, 듣는 자체가 괴롭기 때문이다. 어쩌다 그의 음악인 줄 모르고 듣는 때가 있는데, 듣고 나서 그렇게 말하기는 한다. 연주는 괜찮네...


  바렌보임의 경우는 그것이 도덕적인 흠결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그의 경력에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그것이 직업 윤리를 어기거나 명백한 범죄 사실에 해당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는 동료 여성 성악가들에 대한 성추행으로, 지휘자 제임스 레바인은 미성년자 성추행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서 그것이 그들의 경력과 명성에 먹칠을 했다. 폴란스키는 그런 면에서 본다면 궁지에 몰릴 정도의 박한 대우를 영화계에서 받고 있지는 않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천재적인 영화적 재능에 대해 영화계와 동료 영화인들이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초, 프랑스 세자르 영화제에서 그에게 감독상을 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고도 미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직접 수상하지도 못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미국을 갈 수 없는 불편이야 좀 겪겠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영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개인의 사생활과 예술 작품은 별개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과연 타당한가? 오래전 시나리오 수업을 들을 때의 일이다. 그 강의를 맡은 백발이 성성한 칠순의 소설가 선생님(수강생들끼리는 '영감님'이란 별칭으로 불렀었다)이 어느 날, 분노에 차서 성토한 일이 있었다. 당시에 시인 서정주의 문학 작품에 대한 학계와 문단계의 비판과 함께 문학사적 '삭제'에 대한 논의들이 많이 있었다. 영감님은 그런 일련의 일들에 대해 모두들 '정신나간 짓'을 하고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근본도 모르는 것들 같으니..."


  영감님은 서정주의 후배였다. 문단의 그 누구도 서정주의 그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자들은 없었다. 서정주의 후배, 제자들이 한국 문학을 이제까지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근본()'은 생물학적 근본이 아니라, 문학적 근본의 의미였다. 서정주를 부인하는 것은 문인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한국 문학의 '호로자식'이 됨을 자처하는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서정주는 명백한 친일 행각 이외에도, 5공화국 시절의 전두환 찬양시까지 만들어 바쳤던 이로 평생을 권력에 영합하면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런 그의 생애와 별개로 '시'만큼은 문학적으로 인정받고 칭송받아야 마땅한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뛰어난 감성의 시들을 만드는 '시인 서정주'와 시대의 권력에 순응하고 영합하는 '인간 서정주'는 전혀 다른 개체인가? 예술가의 작품을 예술가의 생애와 별개로 분리해서 봐야 한다는 논리는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떠올리게 만든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하나의 육체에 깃든 한 명의 사람일 뿐이고, 결국 그것의 분리는 정신 장애와 파멸을 의미할 뿐이다. 예전에는 다중 인격 장애로 알려졌지만, 그 질병의 정의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는 '해리성 정체성 장애(Dissociatvie Identity Disorder)'가 바로 그것이다. 


  무엇보다 '예술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건 어떠한가? 어느 연쇄 살인범이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복역 중에 자신의 살인 행각에 대한 책을 써냈다. 그 책은 나름의 문학성을 인정받았고, 문단에서 그를 문인으로 인정하는 이들까지 생겼다. 그가 쓴 소설은 '문학상'까지 수상했다. 그는 정식으로 문예가 협회에 입회를 신청했지만, 당연히 그 신청은 거부당했다. 그러자 협회의 문인들이 탈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문학성만 뛰어나다면 그의 소설은 그가 저지른 살인들과 달리 평가할 수 있는가? 그 소설을 여러분은 읽을 수 있겠는가?


  실제로 일본의 연쇄 살인범 '나가야마 노리오'의 이야기다. 가리타니 고진과 같은 유명한 문예 평론가,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작가 츠츠이 야스타가가 그의 편에 서서 협회를 탈퇴했다. 살인범이 쓴 책은 도저히 읽을 수 없다면, 사기범이나 절도범이 쓴 뛰어난 소설은 읽을 수 있다고 용인할 수 있겠는가? '예술성'이 그렇게 만능의 '투명 망토'내지는 '마법 탄환'으로 기능하는 것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논쟁의 주제이기도 하다.


  아마도 예술이 인간 세계의 그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그 가치를 잘 보여주는 소설은 김동인의 단편 '광화사()'와 '광염(炎) 소나타'일 것이다. 두 작품 모두 예술의 궁극성에 도달하기 위해 미쳐버린 예술가의 이야기이다.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결국은 사람을 죽이는 화가, 영감이 떠오르지 않자 불을 지르는 방화범이 된 작곡가가 주인공이다.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가의 초상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오래전, 학교에서 있었던 연극 세미나에 갔었다. 어느 미국 연극 연출가가 자신의 연극과 연출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세미나가 끝날 무렵에 질문을 받는 시간이 있었다.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의 삶, 그리고 함께 하는 가족입니다."


  나는 좀 놀랐다. 그의 입에서 '연극'이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던 것이다. 그것이 아닌, '삶과 가족'이라는 답을 듣게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대답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 남았다. '예술'을 최우선으로 하는 삶은 때론 그것을 하는 이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파괴하기까지 한다는 것을 나이들수록 인정하게 된다. 예술은 삶에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며,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이가 만드는 예술이 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폴란스키의 나이가 올해 87세이다. 그가 죽기 전에 어떤 걸작 영화를 만들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 영화를 구태여 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 '피아니스트'처럼 우연히 TV에서 보게 될 수도 있겠지. 또 다시 감동을 받고, 불편한 마음을 알아챌 것이며, 그렇게 말할 것 같기도 하다. 저주받은 재능, 이라고. 그것이 영화를 좋아하는, 그리고 '예술'이라는 이름에 매혹된 많은 이들의 괴로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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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탁 위의 소금통이 엎어진 것을 치워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 일이 얼마나 곤혹스럽고 귀찮은 일인지. 여기 저기 흩어진 소금들을 깨끗이 치웠다고 생각해도 며칠 동안 그 근방에서는 자잘한 소금 알갱이들이 밟히곤 한다. 소피 피엔스의 2006년 다큐 '지젝의 기묘한 영화 강의'를 보는 일은 마치 그 소금통 치우는 일 같다. 난감하고 번잡스럽다.


  우선 이 다큐를 보기 위해서는 지젝이 예시로 드는 영화들을 대부분 다 알고 있어야 한다. 무려 40개에 달하는 영화들은 할리우드 고전 영화부터 2000년대의 영화까지 아우른다. 그걸 다 보았다는 전제하에 지젝이 하는 영화 강의를 듣는다 하더라도 결코 쉽지가 않다. 영화들을 분석하기 위해 지젝이 쓰는 이론적 틀은 정신분석학이다. 이드(Id), 에고(Ego), 수퍼에고(Superego), 리비도(Libido), 이런 용어들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대한 대강의 이해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익숙한 용어일 것이다. 지젝은 그 용어들을 자주 사용해서 설명하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낯선 느낌이 든다. 어, 이건 내가 알던 정신분석학적 개념이 아닌데.... 그렇다. 지젝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아닌 라캉의 프로이트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라캉 철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대략적인 이해가 있어야 이 다큐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있다.


  내가 영화를 공부하던 때에는 이제 막 라캉의 인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국내에 소개된 라캉 저작이 한권도 없었을 때였다. 그러니까 라캉의 원전 번역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지젝의 책들은 정신없는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라캉 이론 갖다 설명하고 뭐 그런 혼돈의 세계가 연출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라고나 할까. 나에게 라캉은 너무 난해했고, 그의 이론이 가지는 학문적 유용성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그때에도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은 이미 한물갔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아무튼 열렬한 라캉 주의자인 지젝의 영화 강의를 듣기 위해서는 그렇게 40개의 영화들, 라캉 철학에 대한 개요 정도의 이해가 필요하다. 자, 그럼 다큐를 보기로 하자. 나는 다큐의 초반부 대략 10분 동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젝의 영어 발음이 너무 독특해서 관객이 그것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좀 시간이 걸린다. 사실 다큐 내내 귀에 거슬리기는 하는데, 중간 부분에는 그의 강의에 집중하느라 잘 모르다가, 마지막에 끝날 때쯤 그 억양이 심하게 튀는 느낌이 든다. 아무튼 그의 진짜 특이한 영어 발음과 억양을 다큐 내내 인내해야 한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충분히 있다고 말하겠다. 그의 기묘한 영화 강의는 재미있고, 요모조모 신기한 구석이 참 많다.


  막스 브라더스(Marx Brothers)의 '스파이 대소동(Duck Soup, 1933)'을 한번 보자. 지젝은 막스 브라더스 3형제, 그루초, 치코, 하포가 연기하는 캐릭터를 초자아, 자아, 원초아로 설명한다. 그런가 하면, 정신적 에너지의 발현으로서의 '목소리'라는 개념을 가지고 '엑소시스트(1973)', '위대한 독재자(1940)'를 설명할 때는 무릎을 치게 된다. 저렇게도 영화를 볼 수도 있구나, 하면서 어느새 지젝의 '팬'이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지젝이 다큐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영화는 데이비드 린치의 작품이다. 아마도 린치의 영화들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라면 좀 심드렁하게 볼 수도 있는데, 이해하기 어렵다는 린치의 영화도 지젝이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을 보는 자체로도 재미있다. '블루 벨벳(1986)', '로스트 하이웨이(1997)',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그 세 편 보는 것도 오랜전의 나에게는 버거웠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그때 봤으니 지젝 강의 들을 때 써먹는구나 싶기도 하다. 아, '광란의 사랑(1990)'도 나오는데, 그건 못봤다. 아마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것 같다.


  지젝의 히치콕 사랑도 빼놓을 수가 없다. 주로 언급한 '현기증(1958)', '싸이코(1960)', '새(1963)', 이외에도 히치콕의 4개 작품이 더 나온다. 이쯤되면 '히치콕 빠돌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 다큐는 흥미있는 점이 하나 더 있는데, 지젝이 설명하는 영화들의 촬영 장소들을 대부분 다 가본다는 것이다. '새'의 배경이 되는 보데가 만을 수상 보트를 타고 설명하고, 코폴라의 '컨버세이션(1974)'은 진 해크만이 투숙했던 호텔에 가서 방과 욕실을 둘러 보며 설명한다. 그런 깨알같은 디테일과 설정들이 이 다큐가 가진 매력을 배가시킨다.


  그렇게 무려 2시간 반 동안 지젝은 아주 열정적인 영화 강의를 들려준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다. 영화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욕망'을 구현해낸 효과적인 도구였으므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동시대 사람들의 내면과 그 넘쳐나는 욕망을 읽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 물론 지젝이 보는 방식대로 영화를 볼 필요는 없지만, 그가 제시하는 '기묘한' 영화 보기가 신선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요즘 만들어지는 영화 가운데, 그렇게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과 욕망을 잘 드러낸 영화가 있었던가? 솔직히 딱히 떠오르는 영화가 없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직면한 사회적 현실과 그 뒤에 가려진 이야기들에 대해 치열하게 탐구하고 보여주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영화가 있는가? '작가'로서의 감독은 가고, '흥행사'로서의 감독이 더 열렬한 박수를 받는 시대에 영화가 가진 예술적 위상은 이제 낡은 개념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젝의 말마따나 우리가 사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가 너무나도 필요하기 때문에 영화는 이제까지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사진 출처: thepervertsgui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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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때, 방송반 애들이 1교시 수업 시작 전에 했던 '명상의 시간'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5분 정도의 짧은, 뭐 별 의미없는 미사여구의 나열 같은 원고를 읽었더랬다. 요새 시쳇말로 하자면 뭐랄까, '영혼 없는' 대본 읽기 같은 그런 거. 아무튼 그 프로그램의 배경 음악은 당연히 '타이스의 명상곡'이었다.


  '타이스의 명상곡'은 프랑스 오페라 작곡가 쥘 마스네의 3막 오페라 '타이스'에 나오는 곡이다. 오페라는 그다지 인기가 없어서 오늘날에도 그다지 많이 상연되지는 않는다. 오직 이 음악만이 유명한데, 이 곡이 가진 서정성과 평화로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오페라는 원작이 있다. 아나톨 프랑스의 장편 소설 '타이스(Thais)'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환락의 삶을 사는 아름다운 무희 타이스는 수도승 아타나엘을 만나 회개하면서 수도자가 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아타나엘은 타이스에게 반하게 되고... 그 뒤의 이야기는 책을 직접 읽으면서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아무튼 오래전에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랬다. 


  "아니, 이거 생각보다 꽤 재밌는 걸."


  재미있는 글이 반드시 좋은 글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좋은 글은 재미가 있다. 어제, 무슨 다큐를 볼까 검색하다가 '지젝의 기묘한 영화 강의(2006)'가 걸려 들었다. 러닝 타임이 무려 2시간 반. 너무 길다. 우선, 다른 사람들은 이 다큐를 어떻게 보았나 검색해 본다. dvdprime 사이트에 2010년에 누군가 쓴 감상기가 있었다. Figure8, 이라는 아이디를 가진 이가 쓴 리뷰가 있었는데, 참 글이 재미있었다. 지나치게 무겁지도 않았고, 좋은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큐의 내용에 대해 잘 이해하고 쓴 글이었다. 나에게는 없는 좋은 문체를 볼 수 있는 글이었다(괜찮은 리뷰 글이므로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그렇다. 글쓰기에서 문체(style)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이를 잘 나타낸다.


  내 문체는 진정성에 있어서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좋은 편이지만, '재미'라는 요소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고, 다소 건조(dry)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정도의 자기 객관성도 없이 글을 쓰지는 않는다. '재미'라는 요소를 갖지 못하면 글의 확장성은 제한될 수 밖에 없다. 그 점이 늘 고민되고 마음에 걸린다. 그런데 '나'라는 사람 자체가 그다지 재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 도대체 그 '재미'를 어떻게 뽑아낼 것이냐, 그게 참 어렵다.


  '재미'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떠오르는 이가 있다. B는 참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소설 창작 수업에서 알게 된 B는 나와는 꽤 나이 차이가 있었다. 비록 이십대 초반의 어린 친구였어도 그 생각의 깊이는 좀 남다른 데가 있었다. B는 지독한 골초였다. 자기 말로는 전에는 두 갑씩 피웠는데, 줄어서 한 갑이라고 했다. 학교에서 지나가다 보게 되는 B의 모습은 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다 학기 중에 폐렴에 걸렸었다.


  "이렇게 담배 피우다가는 일찍 죽어요."

  "그럼, 그냥 죽을게요."


  의사의 말에 그렇게 말했다는 B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막 웃었다. B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B는 부잣집 딸로 백화점에서 몇십만원 하는 옷만 입고 다녔는데, 그건 B가 직접 이야기해서 알게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참 밉상이었을 텐데 내게는 그런 것조차 B의 솔직함으로 보였다. 그 B의 진면목을 알게 된 것은 그 창작 수업의 종강 모임에서였다. 강의를 맡은 소설가 선생이 고깃집에서 밥을 샀다. 수강생들이라고 해봐야 10명 안팎이었고, 뭐랄까, 문학 수업과 그쪽 사람들에게서는 인간미 같은 것이 있었다. 아무튼 수업을 마무리하는 자리였는데, B가 마침 내가 있는 테이블에서 고기를 굽게 되었다.


  나는 B가 고기를 굽는 것을 보면서, 회식 자리에서 고기 굽는 것은 이른바 '핵인싸'가 해야하는 일임을 실감했다. 우선 고기를 잘 구워야 했고, 잘 익은 고기를 나름대로 균형있게 배분해 줘야 했으며, 또 중간중간 이야기를 끌어가며 사람들이 고기에만 집중하는 '지루한 순간'을 메꾸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B 자신은 고기를 거의 먹지도 않았는데, 나는 먹는 내내 B의 그 신기(技)에 가까운 고기 굽는 솜씨를 보면서 감탄했다. 그랬다. B는 진정한 '인싸'였다. 사람들의 관심사를 꿰뚫는 통찰력, 집중력, 배려, 유머, 그 모든 것은 아웃사이더의 감성으로 살아온 '아싸'인 나에게는 머나먼 것들이었다. B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그런 감각을 지닌 B라면 잘 살고 있을 것 같다. 나는 B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친구가 되지는 못했다. 우린 너무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었다.  


  이런, 명상의 시간에서 어쩌다 고기 굽는 이야기까지 왔을까. 이런 것을 영어로는 'red herring'이라고 한다. 시선을 돌리는 의미없는 단서나 이야기 같은 것. 스릴러 영화나 오래된 흑백 '필름 느와르' 영화를 보다 보면, 배우들 대사에서 가끔 그 단어가 튀어나온다. 말하자면,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의미없는 단서, 시선을 빼앗는 쓸데 없는 것이란 뜻이다. 이 말의 어원에 대해 쓰자면 좀 길다. 관심있는 이들은 찾아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다시 명상으로 돌아와서, 내가 요새 명상을 하게 되면서 느낀 것들에 대해서 써보려 한다. 약간의 불면증이 있어서, 명상을 하면 좀 나아질 수도 있다기에 시작한 것이다. 불교 단체인 정토회에서 온라인으로 주말에 한번, 지도법사인 법륜 스님이 일반인 대상으로 명상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누구나 무료로 참여가 가능하다. 나는 불교 신자도 아니고, 정토회와 아무런 이해 관계도 없다. 다만, 그 명상 프로그램이 초심자가 접하기에 가장 좋고,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추천할 뿐이다. 요새는 무슨 상품명 언급하는 것도 '뒷광고'니 뭐니 너무 말이 많아서, 글을 쓸 때도 항상 신경을 쓴다. 일종의 자기 검열 같은 거랄까, 그런 부분에 철저한 것이 좋다고 생각도 하지만 답답할 때도 있다.


  명상을 하게 되면 가장 크게 느끼는 불편함은 몸의 감각, 예를 들면 가려움증과 다리 통증, 졸음과 같은 것들이다. 특히 '가려움증'이 가장 신경이 쓰인다. 가만히 있으면 여기 저리 가렵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안가렵다가 명상을 시작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가려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바쁘게 사느라 평소에는 몸의 감각에 대해 잘 인지하지 못하다가, 명상을 하면서 고요해지는 순간 몸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10년도 더 된 이야기인데, 우연히 '가려움증'에 대한 1시간 짜리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미국 컬럼비아 의과 대학의 교수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였다. 일종의 '시민대학'이라고나 할까, 미국은 그런 좋은 프로그램도 많은 모양이었다. 어떻게 하다가 웹사이트를 타고 들어가서 듣게 되었는데, 물론 자막은 없었다. 그런데 그 교수 아재는 적당한 속도로 말을 했고, 화면에 뜬 파워포인트 자료들이 있어서 그럭저럭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강의를 듣는 일반인들의 수업 태도도 아주 좋았다. 필기를 해가며 열심히 들었다. 아, 미국이란 나라에 저런 모습이 있구나, 감탄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 교수 아재는 '가려움증(Pruritus)'를 강의하는데, 그리스 철학자들부터 시작해서 데카르트까지 감각 지각에 대한 나름의 철학적 역사부터 훑는다. 내게는 그 점도 참 신박했다. 교수 아재는 가려움증의 원인의 95%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해서, 또 한번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나머지 5%가 특정 질병과 연관된 가려움증이라고 했다. 그의 강의를 듣고 나니, 뭔가 '가려움증'에 대한 작은 소책자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가려움증 치료에 쓰이는 약부터 일반 영양제 이야기도 했는데, 아마도 우리나라 같으면 영양제 회사에서 돈 받은 거 아니냐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나중에 질문 답변 시간에 수강생 시민 한명이 진지하게 영양제 브랜드 좀 알려달라고 했는데, 교수 아재는 좀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참 재미있는 강의였다.


  나는 자기 전에 명상을 하는데, 보통 25분 정도 한다. 하다보면 졸음이 말도 못하게 쏟아진다. 가려움, 다리 저림, 졸음, 이렇게 3단계를 겪고, 온갖 생각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치기 때문에 마음은 무슨 시장통 같다. 법륜 스님이 했던 비유 가운데 재미있는 말이 있다. 명상할 때 떠오르는 잡생각들을 시장통을 지나가는 사람에 빗댄 것이다. 시장통을 지나가다 보면 이곳 저곳 가게에서 호객 행위를 하면서 사람을 잡아 끄는데, 명상을 하는 이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일도 그와 같다는 것이다. 끌려서 가게에 들어가지 말고, 그냥 쭉 가던 길을 가라고 했다. 설사 어느 가게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더라도, 다시 나와서 가면 된다고. 나는 그 비유가 참 마음에 들었다.


  사실, 명상할 때 가장 많이 하는 생각들은 글쓰기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 나 자신을 감동시키고 다른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명상의 시간에는 그조차도 집착이고 망상이 된다. 나는 글쓰기에서도 그런 욕심과 나 자신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좋은 글이란, 그런 비움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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