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경험 있지 않아? 내러티브가 나를 밀어낸다는 느낌 받을 때 말야. 진짜 그런 때가 있다니까."


  언젠가 비평 수업 시작 전에 수강생 누군가 그렇게 하는 말을 들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러티브가 보는 사람을 밀어낸다는 거, 그게 가능해? 참 희한한 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 말의 뜻을 새벽에 EBS 금요극장에서 방영해준 '칠드런 오브 맨(Children of Men, 2006)'을 보고서 깨달았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만든 이 SF 영화는 서기 2027년, 인류가 불임의 시대를 맞이하며 겪는 비극을 담아냈다. 영국을 배경으로 이민자와 타종교에 대해 무차별적인 폭압으로 대응하는 정부, 그에 반대하는 '피시당(Fish Party)'이라는 무장 정치 단체가 대립의 축을 이룬다. 기적적으로 아기를 가진 흑인 이민자 소녀 '키'를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대강의 줄거리이다.


  영화는 정부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데, 벡스힐 이민자 격리구역을 묘사하는 장면을 보면 마치 나치 수용소를 연상케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민자들을 위한다는 피시당의 실체도 그리 정의로운 것이 아니다. 태어날 아기를 대중 봉기의 상징으로 내세우기 위해 빼돌리려는 피시당의 리더 루크는 폭력만이 유일한 항거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주인공 테오(클라이브 오웬 분)는 그 와중에 어떻게든 키와 아기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애를 쓰느라 고군분투한다. 말하자면 인류의 희망인 '아기'와 아기 엄마를 무사히 구출해내는 임무를 맡은 셈인데, 중세시대 기사의 여정처럼 보인다. 테오와 기사가 다른 것이 있다면, 테오는 변변한 무기도 없고 오직 아기를 지켜내겠다는 신념과 진심만 있을 뿐이다.


  '칠드런 오브 맨'은 거창한 정치적 구호로 가득차 있으며, 음악은 종교 음악처럼 지나치게 장중해서 관객에게 그러한 미래 세계의 대서사에 감동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뭔가 대단한 메시지를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공허하고 진부하기까지 하다. 이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어쩌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마지못해 동조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를 담아냈기 때문이다. 타자를 배척하고 차별하며 폭압적으로 대하는 정치 체제, 또는 그런 사람들의 신념 체계를 잘못된 것으로 규정하는데 그렇게 명백하게 드러내는 영화의 방식 또한 투박하고 거칠기 짝이 없다. 한마디로 정치적 프로파간다(propaganda)와 별다를 바 없다. 이 영화가 칭찬받을 수 있는 부분은 촬영과 미술에 한정될 뿐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썩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테오의 부인 역으로 나온 줄리앤 무어인데, 그렇게 괜찮은 배우를 데려가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극 초반에 아웃시켜 버리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2008년작 '이글 아이(Eagle Eye)'에서 거대 인공지능 컴퓨터 아리아 역을 맡은 줄리앤 무어는 얼굴 한 장면 나오지 않고, 오직 목소리만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런 대단한 배우를 알폰소 쿠아론은 찬밥 취급해버린다. 내가 줄리앤 무어라면 이런 영화 안나온다. 클라이브 오웬은 열심히 뛰어다니기는 하지만 영 겉도는 느낌이다. 무성의한 것은 아니고, 배역에 몰입한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나마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테오가 키의 통행증을 발급받기 위해 사촌 나이젤을 방문하는 장면이다. 나이젤은 정부의 막강한 관료로서 미술품 관리청장을 맡고 있는데, 전세계에서 소멸 위기에 처한 유명 예술품들을 닥치는 대로 모아들인다. 그의 집에 있는 한쪽 다리가 없어진 '다비드 상', 피카소의 '게르니카' 같은 것도 흥미롭지만, 나이젤의 저택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돼지 풍선 또한 놓쳐서는 안된다. 핑크 플로이드의 1977년 앨범 'Animals'의 앨범 표지에 나온 돼지 풍선을 그대로 따온 것으로, 탐욕스럽고 부패한 정치인과 지배 계급을 상징하는 은유로 쓰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감독 알폰소 쿠아론이 미술과 세트에 공을 들였다는 것은 알겠다 싶은 정도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의 내러티브가 나를 밀어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계속해서 그 내러티브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은 실패했다. 클라이브 오웬의 겉도는 연기처럼, 나도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엄청난' 영화이기는 하다. 관객이 영화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영화라니...


  "난 그냥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


  테오가 나이젤에게 100년 후면 그렇게 모아놓은 예술품들을 볼 인류도 남아있지 않을 텐데 뭐하러 그리 열심히 모으냐고 하자 나이젤은 그렇게 대답한다. 나도 이 영화는 그다지 더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생각할 건덕지가 그다지 많은 영화도 아니다. 쿠아론은 자신의 영화에 거창한 신념을 투사하고 싶은 것이겠지만, 그런 이유로 나는 그의 '그래비티(2013)'를 보고 싶은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는다.



*음악이 좀 독특한 것 같아서 누가 맡았나 찾아보니, 영국 작곡가 존 태브너(John Tavener)이다. 그는 현대 종교 음악 작곡가로,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명성이 있는 사람이다. 역시, 이 영화의 음악은 '종교적'이었다.

**사진 출처: indiewi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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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연달아 영화 2편을 이어서 봤다. '프로포즈 데이(Leap Year, 2010)'과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1993)'. 영화 케이블 채널에서 크리스마스 특집이라고 편성한 영화들이었다. '프로포즈 데이'를 보는데, 뭔가 예전에 본 영화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이 영화는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1945)'와 '어느 날 밤에 생긴 일(1934)'를 묘하게 섞어놓았다. 식상하게 옛날 영화 베낀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가장 큰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 점이다. 괜찮은 배우들 데려다가 영화를 이렇게나 못 뽑아낼까, 하는 생각만 든다. 이 영화에서 그나마 볼거리는 아일랜드의 수려한 풍광 뿐이다. 뭐랄까, 보고 나면 참 허무하다.


  그 시시한 영화를 보고 났더니 새벽 1시였다. 하단에 뜬 다음 영화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어차피 잠도 안오는데 저거나 또 봐야지 했다. 도대체 몇 번을 봤는지 기억도 안나는 영화다. 영화 중간중간에 얼마나 맥주 광고를 때려대는지, 냉장고에 맥주가 없는데도 냉장고를 한 번 열어봤다. 아무튼 그렇게 또 영화를 보는데, 볼 때마다 재미있다. 정말 '완벽한 영화'다. 도무지 흠잡을 구석이 하나도 없다. 이번에 볼 때는 음악과 대사를 신경써서 들었는데, 이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있어서 나름대로 좋았다. 다만, 케이블 채널에서 엔딩 크레딧 올라가는데 그냥 화면 잘라버린 것이 좀 황당하기는 했다. 셀린 디옹이 부른 'When I fall in love'가 얼마나 좋은데 그걸 중간에서 뚝 끊어버리는 이 영화 채널의 무지막지함이란, 참...


  그 영화 속의 눈부시게 빛나던 맥 라이언과 톰 행크스는 이제 노년에 접어들었다. 톰 행크스는 진지하면서도 저렇게 코믹한 역할이 어울리는데, 나중으로 갈수록 내가 보기엔 뭔가 잘 맞지 않는 진중한 역들만 줄구장창 찍었다. '로드 투 퍼디션(2002)' 같은 것은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시쳇말로 그의 진정한 '띵작'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다. '터너와 후치(1989)'도 그가 가진 희극적 재능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화다. 그런 영화들을 좀 더 찍었어야 했는데, 아마도 톰 행크스는 아카데미 상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었나 보다 싶다.


  그렇게 영화 2편을 보고 났더니 성탄절이 지나가고 있었다. 올해의 성탄 분위기는 조용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어서 모두에게 참 많이 힘든 해였다. 내년에는 좀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으로 다들 견디고 있는 듯하다.


  블로그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석 달이 좀 넘었다. 매일 글을 쓴다는 일과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쓰기 시작한 글이 생각보다 꽤 쌓였다.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이 때, 이곳을 기억해주고 찾아주는 독자들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새삼 전하고 싶어진다. 가급적 매일 영화나 미디어 관련 글을 올리려고 노력하지만, 좀 힘에 부칠 때도 있다. 글이 잘 써지는 날도 있고, 잘 써지지 않아서 난감한 날도 있다. 그래도 무언가를 매일 만들어 낸다는 것, 그리고 내 글을 읽어주는 독자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독자 여러분들 마음에 평화가 기쁨이 함께 하는 성탄절, 그리고 새해가 되길 바랍니다.

   Me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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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시대는 뭔가 나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


  이렇게 말하는 중학교 3학년인 마코토.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 자살을 시도했다가 죽음에 이르렀던 마코토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그 마코토의 내면에 깃든 영혼은 이전의 마코토가 아니다. 마코토와는 다른 영혼으로, 그는 6개월간의 새롭게 부여된 삶의 유예기간 동안 자신이 지은 전생의 죄를 기억해낸다면 환생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게 마코토로 살게 된 가짜(?) 마코토는 천상계의 안내자 프라프라의 도움으로 낯선 지상의 삶에 안착하려고 애를 쓴다.


  하라 케이이치의 '컬러풀(Colorful, 2010)'은 애니메이션이지만, 이야기의 전개방식이나 연출이 굉장히 영화적이다. 무려 2시간에 이르는 이 장편 애니메이션은 도입부에서부터 관객의 시선을 잡아두기 시작해서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게 만든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청소년 자살'이라는 소재가 가진 무거움도 만만찮은데, 거기에다 원조 교제와 이지메 같은 일본 사회의 어두운 이야기도 들어있다. 


  마코토가 자살을 하기로 결심하기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프라프라는 병원에서 퇴원해서 집에 온 '가짜' 마코토에게 자살 당일의 일을 설명해 준다. 마코토는 학우인 히로카가 원조 교제하는 남자와 모텔에 들어간 것을 보게 되는데, 마침 그곳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춤 선생과 같이 나오는 것도 목격하게 된 것. 다시 살아 돌아온 마코토는 그런 어머니에 대한 증오, 학교에서 친구 하나 없는 자신의 외로운 상황을 끌어안고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를 쓴다. 그런 마코토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는 곳은 미술실. 그림에 재능이 있는 마코토는 오직 그림을 통해서만 자신의 마음을 담아냈다. '진짜' 마코토가 그려놓은 미술실의 그림을 바라보며, '가짜' 마코토는 진짜 마코토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한다. 마코토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하고...


  6개월간의 유예 기간 동안 '가짜' 마코토가 전생의 자신의 죄를 기억해내지 못하면, 환생의 기회도 얻지 못하는 것은 물론 지상의 마코토의 삶도 끝나게 된다. 과연 '가짜' 마코토는 영혼의 그 수습기간 동안 과업을 완수할 수 있을까? 그가 지은 전생의 죄는 무엇이며, 다시 살아난 마코토가 또 죽게 된다면 마코토의 가족은 어떻게 그 고통을 견뎌낼 것인가? '컬러풀'은 2시간 동안 그 이야기를 아주 우직한 방식으로 풀어나가면서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매우 잔잔하면서 섬세하게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 연출이 돋보인다.


  억지로 주어진 새로운 삶이 영 마뜩잖은 마코토는 새롭게 사귄 반 친구 사오토메에게 지금의 시대가 자신과 맞지 않다며 불평을 한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지만 사오토메는 마코토에게 그렇게 말한다.


  "잘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인생은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거겠지."


  '진짜' 마코토가 그려놓은 그림을 바라보면서, 오로지 아름다운 색의 물감만을 써서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가짜' 마코토. 그는 어두운 색의 물감도 그림에 쓰이는 것처럼, 한 사람의 인생에는 다양한 색들의 일들이 있다는 것도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여러가지 색을 써서 그리는 그림처럼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마코토의 기억도 같이 끌어안으며 현재를 살아가야 함을 깨닫는 것이다. 


  '컬러풀'의 메시지를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어려움을 겪는 청소년들에게 '자살하지 마' 라고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는 이 애니메이션은 말못할 여러 고민을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하는 어른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준다.


  "삶은 원래 다 그런 거에요. 힘든 날도 좋은 날도 있는 거죠. 밝고 화사한 색의 물감을 써서 그리는 때도 있고, 어둡고 칙칙한 색이 쓰이기도 하구요. 그렇게 그리는 그림이 당신의 인생이에요."


  다 보고 나면, 마치 어깨를 조용히 두드리며 누군가 건네는 그런 따뜻한 위로를 들은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사진 출처: movieforum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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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르 시몽의 다큐 'Le Concour(2016)'는 프랑스 영화학교 페미스(La Femis)에 들어오려는 학생들의 입시 과정을 담아냈다. 우리말 제목은 '프랑스 영화 학교 입시 전쟁'이다. 이 다큐는 영어 제목이 'The Competition'과 'The Graduation'으로 알려져 있는데, 학생 선발 과정을 다뤘다는 점에서 'The Competition'이 더 적절한 제목이다. 제목 그대로 2시간 가량의 이 다큐는 그야말로 프랑스 최고의 영화 학교에 들어가려는 학생들의 치열한 입시 과정을 보여준다.


  다큐의 첫 부분, 입시 서류를 제출하고 나서 학생들이 모인 강당에서는 필기 시험이 진행된다. 시험 문제로 나오는 영화 화면을 보니 일본 영화인데, 아오이 유우가 나오는 영화이다. 그런데 나는 다큐 보다 말고, 아니 저 영화는 무슨 영화인가 궁금해진다. 아무튼 그 많은 학생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머리를 쥐어짜며 답안지를 작성한다. 그러고 나서는 각자가 지원한 분야의 실기 시험과 제출한 포트폴리오에 대한 면접 시험이 이어진다.


  사실, 이 다큐의 진정한 주인공은 학생들을 뽑는 면접관들이다. 페미스는 학생 선발에 있어서 학교 교수들 뿐만 아니라,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분야의 실무자들을 초빙해서 의견을 듣는다. 영화 평론가, 제작자, 다큐 감독, 배급 회사의 책임자 같은 이들이다. 필기 답안지를 채점할 때도 한 사람이 채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평가를 공개적으로 청취한다. 그래서 더러 의견이 갈리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학생을 정말로 뽑아야 한다구요."

  "아니, 우리가 같은 답안지 본 거 맞아요? 그건 정말 형편없는 글이에요."


  그런 과정들은 모든 입시생들에게 '평등'한 입시를 보장 하기 위한 것이다. 불어로는 egalite, 영어로 equality는 프랑스 대혁명의 구호에서 나왔다. '자유, 평등, 박애(Liberte, Egalite, Fraternite)'가 그것이다. 그러한 공화국의 이상은 영화 학교의 입시 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음을 이 다큐에서 보게 된다. 면접관들은 학생들을 평가할 때에 무엇보다 영화적 재능을 우선으로 하지만, 학생들이 가진 다양한 사회 문화적 배경도 면밀히 살핀다. 평가의 과정에서 서로 다른 관점을 지닌 면접관들의 충돌은 당연한 것이다. 지원자 하나를 두고 극과 극을 달리는 관점차가 존재한다. 


  "이런 미친 학생은 페미스에 들어오면 안됩니다. 만약 이 학생이 들어온다면 나는 절대로 안 보고 피해서 다닐 겁니다."

  "그래도 영화적 재능이 있잖아요. 의사 소통 능력(communication skill)이 부족하다는 점은 인정해요. 영화 감독 가운데도 미친 인간들 많아요. 그들이 좋은 작품을 찍기도 한다구요."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의사 소통 능력이에요. 그게 없으면 말짱 꽝이에요. 영화 촬영 현장은 엉망으로 돌아가는데, 감독이 그걸 외면하고 장난감 가게로 도망가서는 장난감 사는 인간도 있어요. 정말 미친 거죠."

 

  다큐 내내 그렇게 학생들을 두고 이어지는 면접관들의 다양한 토론과 의견 청취 과정은 마치 하나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특히, 후반부에 눈길을 끄는 지원자가 등장하는데 그에 대한 두 여성 면접관의 의견 대립은 너무나도 맹렬해서 한 치의 양보도 없다. 그 지원자는 직업이 호텔 도어맨이었다. 그는 힘들게 일하면서 어떻게 하다 영화에 매료되었다. 촬영 장비를 사서 이것저것 찍어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나간 뒤에 면접관들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그 '도어맨' 지원자를 두고 이어지는 토론(이라고 적었지만 말로 하는 전투같다) 과정을 보는 것이 참 놀랍고 재미있다. 지원자의 계층적 배경까지도 고려하면서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려는 면접관들의 모습은 '진짜 프랑스적인 가치'가 무엇인가를 헤아려 보게 만든다.




*다큐의 엔딩 크레딧을 유심히 보다가, 필기 시험 출제 영화가 무엇인지 알아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속죄(2012)'였다.

**사진 출처: unifranc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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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학기 동안 연기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무슨 특별한 뜻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그냥 맨날 영화나 파고 있으니 답답도 하고 그래서 이런 저런 잡다한 강의들을 들었더랬다. 예를 들면 선무도나 택견, 도예 수업 같은 것들. 아무튼 연기 수업이라고 해서 막 연기하는 거 배우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몸의 움직임과 관련된 여러 동작들을 해보는 것이라, 어떻게 보면 스트레칭과 요가 수업 같다고 보면 된다.


  나는 워낙 몸치에 가까운 사람이라 연기과 사람들이 하는 동작을 따라가기는 커녕 그 근처에 가기도 힘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이삼일은 근육통에 시달렸다. 참, 수업을 듣기 위해 처음으로 쫄쫄이 타이즈도 샀다. 당시에는 인터넷 쇼핑의 초창기라 그런 옷은 인터넷으로 살 수도 없어서, 동대문 평화시장까지 갔었다. 무슨 스판덱스 쪼가리가 그렇게 비싼지, 내 기억에 3만원인가 했던 것 같다. 뭔가 무용이나 예능과 관련된 그런 특수 의상에는 특별한 가격이 책정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 쫄쫄이 타이즈를 입고 한 학기 동안 연기 수업을 들었다. 내가 그 수업을 들으면서 느낀 것은 그랬다. 아, 연기를 하는 사람들은 몸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소통하는구나... 흔히 '연기'라고 하면 얼굴 표정을 짓거나 대사를 하는 것을 떠올리지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부분일 뿐이다. 좋은 연기를 하려면 자신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며, 몸을 어떻게 쓰느냐가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그 수업은 마치 연기의 세계를 아주 짧게, 잠깐 동안 들여다 본 느낌이었다.


  그런데 내게도 연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국민학교 때, 다니던 동네 교회의 크리스마스 연극 공연에서였다. 그 교회는 아주 단촐한 개척 교회였는데, 당시에 나를 가르치던 피아노 선생님이 집사로 있었다. 피아노 선생님이 억지로 다니게 했던 것은 아니고, 어떻게 하다 보니 다니게 되었는데 분위기가 나름 좋았다. 교회는 침례교파에 속했는데 목사님은 40대 초반이었던 것 같다. 교회의 벽면에는 목사님이 수영장인지 아무튼 허리까지 몸을 담그고 목사 안수를 받는 커다란 사진이 있었다. 신자 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따뜻한 느낌으로 나는 기억한다. 아파트 상가 2층에 자리한 그 작은 교회를 나는 1년 가까이 다니다가 이사가면서 그곳을 떠났다.


  1980년대 한국 교회는 '부흥의 시대'였다. 여기저기 교회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었다. 경제 개발과 호황에 맞물린 개신교의 확장세는 거침이 없었다. 내가 느끼기엔 사람들이 뭔가 대단한 신앙심으로 교회를 다녔다기 보다는, 서양의 새로운 신이 자신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줄 것 같다는 희망과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조차도 전도 열풍에 휩쓸렸다. 특히 크리스마스는 그 정점이었다. 아, 여름 성경 학교도 그러기는 했다. 애들은 그런 특별한 시기에 또래 친구들을 따라 교회를 순례하면서 설교 듣고 과자와 여러가지 선물을 받아왔다.


  아무튼, 크리스마스에 교회에서 공연하기로 한 연극은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성탄 전날에 머물게 된 여관에서 일어난 일을 담아낸 것이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공연했는데, 나는 여관 주인을 맡았다. 여관 주인은 아주 속물적이고 못된 사람으로 돈이 없는 요셉과 마리아 부부에게 방이 없다며 거짓말로 내쫓는 역이었다. 나는 그 역할이 싫었다. 요셉과 마리아 역도 있고, 천사 역도 있었다. 아, 여관 주인 마누라 역도 있었구나. 아무튼 주일학교 선생님은 나에게 여관 주인 역을 하게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 연극에서 가장 대사가 많았다. 그렇게 대본을 받고나서는 진짜 열심히 외웠다. 의상도 있었다. 선생님이 가져온 흰색 보자기인지 이불 커버인지 그걸 머리에 쓰고 검은 색 띠를 둘렀다. 중동 지방의 남자 의상을 어설프게 흉내낸 의상이었다. 상연 당일에는 선생님이 분장도 해주었는데, 수염도 붙였다.


  마침내, 성탄절 저녁에 공연이 시작되었다. 무대라고 해봐야, 설교가 이루어지는 빨강색 카펫이 깔린 강단이었지만 오직 그곳만이 불이 켜졌다. 주일 학교 애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서 공연을 했다. 나도 그 어떤 막힘 없이 대사를 해냈고, 특히 요셉과 마리아 부부를 구박하는 밉살스런 연기를 아주 잘 해냈다. 연극이 끝났을 때, 우리는 모두 손을 잡고 객석을 향해 인사를 했으며 아주 큰 박수를 받았다. 나는 그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뭔가를 완벽하게 해냈다는 느낌은 매우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아마도 배우들이 하나의 작품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해냈을 때의 느낌도 그러하리라 생각해 본다.


  어쩌면 내가 연기 수업을 들었던 것도 그 성탄절 공연에 대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몸에 붙는 타이즈는 움직이기에는 편했지만, 내게는 꽤나 민망하게 느껴지는 의상이었다. 그렇게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수업은 열심히 들었다. 한 학기 수업을 들었다고 해서 몸치였던 내가 좀 더 유연해졌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나는 예술의 어떤 분야든 재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을 뿐이다. 그 타이즈는 택견복과 함께 창고의 박스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문득, 성탄절을 앞두고 그 타이즈와 연기 수업과 어린 시절의 성탄절 연극 공연이 떠올라서 이렇게 글을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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