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크맨(Pac-Man)을 해보았던 때가 생각난다. 가정용 컴퓨터가 처음으로 나왔던 때가 1980년대 중반 즈음이었다. 가격도 엄청나게 비쌌는데, 그걸 친구네 집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연초록색 화면에 동글뱅이 녀석이 과일이며 이것저것 먹으며 점수를 쌓는 게임. 동네 오락실은 아이들로 북적였고, 갤러그는 아주 인기가 많은 게임이었다. 그 시절의 오락실 기계들은 아이들의 용돈을 미친듯이 먹어치웠더랬다.


  제임스 스월스키와 리잔 패조의 다큐 '인디 게임(Indie Game: The Movie, 2012)'은 게임 개발자의 일상과 삶에 대해 살펴볼 수 있게 만든다. 이 다큐는 'Braid', 'Fez', 'Super Meat Boy'의 게임이 발매되기까지의 과정을 주로 다룬다. 그 게임을 만드는 이들은 거대 게임 회사가 아닌 독립적인 개발자로 자금난과 이런저런 난관에 부딪히는데, 다큐의 제목 '인디 게임'은 그런 그들이 개발하는 게임을 지칭하는 말이다. 영화계에서도 인디 영화가 있듯, 게임의 세계에서도 인디 개발자들이 있다. 어디서나 자본과 설비가 우세한 거대 기업 보다 개인이 밀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 다큐에 나오는 게임 개발자들도 자신들이 원하는 게임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야말로 악전고투를 치룬다.


  'Fez'를 만드는 필 피쉬는 4년째 게임 개발에 매달리는 중이다. 그는 그 과정에서 동업자가 떠났고, 재정적으로도 파산 직전이며, 개인적으로는 여자친구와도 결별한다. 결국 모든 어려움을 딛고 자신의 게임을 발매하고, 게임은 큰 성공을 거둔다. 'Super Meat Boy'의 개발자 에드먼드와 토미 또한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의 일상은 밤낮이 따로 없다. 모니터 화면에 늘 고정되어 있는 붙박이로, 에드먼드의 아내는 남편의 등만 보고 산다며 푸념을 하기도 한다.


  "난 일상을 잃어버렸어요.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외출을 하지 않아요. 사회활동이랄게 없죠. 가진 돈이 없으니 쓸 돈도 없거든요. 데이트를 한다고 해도 태워줄 차도 없고 식사할 돈도 없어요. 혼자 먹을 밥은 살 수 있겠지만... 내가 희생한 건 인간 관계에요."


  토미는 저녁의 동네 식당에서 혼자 그런 넋두리를 한다. 인디 게임 개발자의 자조적인 독백은 뭔가 짠한 구석이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을 보다 보면 그렇다. 저것이 과연 인디 게임 개발자만의 고민이고 궁상맞은 삶인가? 예술의 다른 분야에서 창작을 하는 이들은 다 그와 비슷한 고민을 하며 살아간다. 글을 쓰는 작가, 영화 만드는 이들, 음악하는 사람들, 그림 그리는 화가, 각양각색의 창작 활동을 하는 이들의 고민은 거의 엇비슷하다. 어떻게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상 사람들과 소통할 것인가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다. 토미의 독백은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는 그에 대해 '징징거리지 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이 다큐에서 아주 불편한 부분이다.   


  일상과 인간 관계를 희생하면서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자신들이 만들어 내는 게임으로 현실의 유저들과 소통하는 일이다. 다큐에 나온 인디 개발자들은 그간의 노고를 보상받는다. 천신만고 끝에 발매된 게임은 성공적인 반응을 얻고, 토미와 에드먼드는 집도 장만한다. 토미의 '징징거림'은 그야말로 과거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이른바 게임이 대박을 치면서, 인생도 순풍을 타고 나아간다. '인디 게임'에 나온 개발자들은 현재도 잘 나가고 있는 중이다. 


  '인디 게임'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게임 개발자의 고충과 삶의 단면을 들여다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다큐는 미시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거대 게임 산업 뒤에 가려진 불합리한 면이나 문제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인디 게임과 그 유통 방식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관객을 위해서 친절한 설명이 필요한데도, '스팀(Steam)'은 새로운 판매 방식이라는 그냥 짤막한 말 한마디로 퉁치고 넘어간다. 다큐멘터리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주는 무수히 많은 창들이라고 본다면, 인디 게임이란 세계를 처음 들여다 보는 관객들을 위한 어느 정도의 배려는 있어야 했다.


  그런 문제점 이외에도 이 다큐는 객관성 면에서도 실패한 지점이 있었다. 다큐에 나온 'Fez'의 개발자 필 피쉬가 동업자와의 결별에 대해 불만과 악감정을 토로하는 부분이 있는데, 막상 그 당사자인 동업자 디그루트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다큐의 개봉 초기에는 동업자가 '인터뷰를 거부했다'고 엔딩 크레딧에 올라갔는데, 그걸 보고 격분한 디그루트가 항의하자 '인터뷰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나중에 고쳤다. 뭔가 실수라고 보기에는 다큐 제작자로서 윤리적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름의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인디 게임'은 자신이 꿈꾸는 것을 게임을 통해 실현하려는 게임 개발자의 인간적 목소리를 잘 담아냈다. 그들은 단순히 큰 돈을 벌기 위해 그 일을 택한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오던 것들을 게임의 세계에 펼쳐놓고, 유저들이 그 게임의 세계에 환호하고 열광하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끼는 이들이다. 창작자로서 그들에게 게임이란 세상을 향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며 희망인 셈이다.


  "인디 게임을 만든다는 건, 제 안에 있는 약함(vulnerability)을 게임 안에 집어 넣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겁니다."


  'Braid'의 개발자 조나단 블로우는 다큐의 마지막에 그런 말을 한다. 나는 그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비단 게임 개발에만 한정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모든 예술 창작의 과정은 예술가 자신이 가진 내면적 약함과 불완전성에 기대고 있다. 그것을 작품 속에 집어넣고 그 어떤 무언가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인내하는 사람. 그 과정에서 '약함'이 빛나는 성취를 이루어내는 것을 '예술 작품'이라고 한다면, 인디 게임 개발자들이 만드는 게임도 어떤 면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예술 작품이다. '인디 게임'은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 '갈아 넣어진'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 다큐의 출연자들은 모두 성공했으나, 세상에는 그렇게 노력하고도 성공하지 못한 이들이 많음을 우리는 잘 안다.



*사진 출처: gameplanet.co.nz('Super Meat Boy'의 공동 개발자 에드먼드와 토미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쩌다가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나카노 스파이 학교(Nakano Spy School, 1966)'을 보게 되었다. 보고 난 느낌은 그렇다. 아, 이 양반은 꽤나 성깔있는 사람이네, 하는 느낌이랄까... 어떤 감독의 영화 한 편을 보고서 그 영화 세계를 헤아려 보는 것은 무리이기는 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야스조의 첫 작품으로 본 사람들은 아마도 결정을 해야할 것이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영화 세계를 탐험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이 한편에서 멈출 것인가에 대해서. 빠르고 명확한 이야기 전개, 독창적인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나카노 스파이 학교'는 감독의 타협하지 않는 근성이 느껴진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38년이다. 사관학교 학생으로 임관을 앞두고 있는 예비 장교인 지로(이치카와 라이조 분)는 뜻하지 않게 스파이 학교 학생이 된다. 그에게는 홀어머니와 약혼녀 유키코가 있는데, 그들에게는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못하고 1년 가까이 소식을 끊은 채 스파이 훈련을 받는다. 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처음으로 부여된 임무는 영국군의 암호 코드 북을 입수하는 것. 동료들과 어렵게 코드 북을 입수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린 영국군은 암호 체계를 바꾸어 버린다. 지로는 어디선가 기밀이 누설되었다고 생각하고 독자적으로 조사를 해나가는 과정에서 약혼녀 유키코가 연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지로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육군 나카노 학교'는 1937년에 극비리에 설립된 스파이 학교였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실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1938년에 처음으로 뽑은 19명의 학생을 시작으로 2차 대전 이후까지 2500명에 이르는 졸업생들이 나왔다. 그들은 일본의 태평양 전쟁의 첨병으로 엄청난 활약을 했는데, 각종 첩보 임무에서부터 일부 아시아 국가의 정보부 창설에 관여하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일본의 침략 전쟁을 지원하는 최전선의 비밀 정예요원이었다.


  '나카노 스파이 학교'는 그런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스파이 학교 설립 초기의 모습을 영화적 가공을 통해 재현해 낸다. 마스무라 야스조는 매우 직설적이고 간결한 대사와 짜임새 있는 연출, 빠른 이야기 전개로 관객의 시선을 잡아끈다. 러닝 타임 1시간 35분이 그야말로 후딱 지나가 버린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었던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불편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야스조는 스파이 학교나 일본의 전쟁을 미화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감독의 시선은 애국심과 명예, 의리라는 허울 뿐인 대의명분에 함몰되어가는 개인의 내면적 변화에 맞추어져 있다.


  "결국 일본이 수행하는 전쟁은 아시아 국가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스파이 학교 학생 가운데 한 명이 설립자 쿠사나기(카토 다이스케 분)가 역설하는 일본이 가진 세계적 책무에 대해 그렇게 반문한다. 여기에서 당시의 일본 지배층과 군부가 가진 시각이 보이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서유럽 제국주의에 맞설 정의로운 전사로 여긴다. 그에 대해 나름의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학생들은 서서히 하나의 집단으로 뭉쳐지면서, 침략전쟁을 돕기 위한 냉혹한 인간 병기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들의 모습은 일본의 제국주의에 동화되는 일본 국민들, 식민지 친일 부역자들의 모습과도 기이하게 겹친다.

 

  야스조의 '나카노 스파이 학교'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아름다운 회고가 아니라, 거기에 희생된 개인의 삶과 인간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결국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스파이가 된 지로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우수한 정예 요원을 얻은 것이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지로 자신이 고백했듯 '죽은 삶'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당시의 일본에서 과거의 세대에게 일본 제국주의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게 만들면서 크게 흥행했고, 속편까지 잇달아 제작되었다.


  주연 배우 이치카와 라이조의 연기를 비롯해 쿠사나기 중위 역으로 나온 카토 다이스케의 연기가 매우 좋다. 이치카와 라이조의 절제된 표정연기와 지로 그 자체를 보여주는 캐릭터 재현은 이 배우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키게 만든다. 명문 가부키 집안에 입양된 배경을 지닌 이 배우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무려 150여편에 달하는 영화에 출연한 명배우였다. 그러나 직장암으로 서른 일곱의 나이에 요절했다. 이 영화는 그가 세상을 뜨기 3년 전에 찍은 영화이다. 가토 다이스케는 일본 영화의 주요 조역으로 나왔는데, '7인의 사무라이(1954)'를 비롯해 온갖 역사물과 현대물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배우이다. 다이스케는 특히 코믹적 면모에 강점을 갖고 있으며, 이 작품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마스무라 야스조의 '나카노 스파이 학교'는 꽤나 흥미있는 스릴러물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여성 캐릭터들의 수동성과 폭력적인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드러나는 감독의 선명한 틀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지는 지점도 있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야스조의 영화 세계에 대한 초대장 같기도 하다. 그러한 점들이 그의 다른 작품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확대되는지 확인하고 싶은 이들은 탐험을 나설 것이다. 나는 그 탐험이 썩 내키지는 않는다. 마스무라 야스조가 평범한 풍속 영화를 만들었다며 비판한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 가운데 아직 못본 것이 있다. 차라리 그걸 볼 생각이다.



*사진 출처: worldscienma.org (상단 사진: 이치카와 라이조, 하단 사진: 가토 다이스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게 스필버그의 영화들은 시쳇말로 '믿고 보는'과 '믿고 거르는' 그 중간 지점에 있다. 딱히 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지만, 또 어떤 작품들은 보고 나면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다. 아마도 '에이 아이'를 개봉 당시에 '걸렀던' 이유도 그 애매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십 년이 지나서 보는 이 영화는 그렇게 참신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스필버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재능(영어로는 'flair'라고 표현할 수 있는)이 돋보인다. 스필버그적 감성, 또는 각인이랄까, 그런 것이 있다. 이 영화의 원안은 스탠리 큐브릭이 만든 것이지만, 큐브릭은 자신보다 스필버그가 제작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해서 넘겼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그 두 감독의 영화 세계가 충돌하는데, 파괴적인 방식이 아닌 스필버그의 융화력에 의해 그럭저럭 봉합되었음을 본다. 솔직히 말한다면, 그렇게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미래의 어느 시점의 인류. 불치병에 걸려서 냉동 상태인 아들을 둔 모니카와 헨리 부부는 인공지능의 로봇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한다. 데이비드(헤일리 조엘 오스몬트 분)는 그렇게 모니카의 아들이 되지만, 아픈 아들 마틴이 병이 나아 집에 오게 되면서 데이비드의 시련이 시작된다. 마틴의 질투와 그로 인해 생긴 오해들로 인해 데이비드는 모니카에 의해 버림받는다. 마틴의 슈퍼 토이(인공지능 곰인형) 테디와 함께 숲에 버려진 데이비드는 '엄마'라고 믿는 모니카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길을 떠난다. 모니카가 읽어준 동화 '피노키오'에 나오는 푸른 요정을 만나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데이비드. 과연 데이비드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미안하다. 너에게 세상이 어떤 곳인지 미처 알려주지 못했어."


  데이비드의 '엄마'였던 모니카는 그 말과 함께 데이비드를 버린다. 데이비드는 그때부터 세상을 배워나간다. 어떤 면에서 '에이 아이'는 로봇 소년 데이비드의 모험담(saga)인 동시에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인공 지능 로봇의 성장은 인간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데이터의 축적'이라는 면에서 차이점이 있다. 데이비드는 애인 대행 로봇 지골로 조(주드 로 분)와 함께 푸른 요정을 찾아가는 길에서 자신의 근원, 즉 정체성에 대한 지식을 배워간다. 사이버트로닉스 사의 하비 교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 자신과 같은 자녀 로봇이 대량 생산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전적으로 로봇 소년 '데이비드'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데이비드의 열망, 즉 인간이 되어 엄마 모니카의 사랑을 다시 받고 싶다는 그 강렬한 소원에 감정을 이입하고 응원하게 된다. 물론 관객들은 그 열망의 실현이 불가능한 것을 알기에 데이비드의 슬픔 또한 같이 느낄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스필버그가 던진 매우 윤리적인 질문은 끊임없는 일렁임을 일으킨다. 과연 인간의 목적대로 로봇을 만들고 이용하는 것은 정당한가? 인간과 로봇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인간의 의지와 감정을 모방한 로봇과 인간은 미래에 어떤 방식으로 공존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이 영화가 만들어진 2001년에서 이십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에이 아이'는 그러한 철학적 의문에 대한 탐구와 함께 영화적 재미도 보여주려고 열심히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시각 효과적인 면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된 미래 세계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또한 존 윌리엄스가 맡은 음악도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러나 '에이 아이'의 내러티브는 매우 평면적이며, 무려 2시간 반에 이르는 러닝 타임은 너무 길다. 물론 스필버그의 재능은 그 시간마저도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들지만, 데이비드의 여행은 지나치게 늘어진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게다가 마지막 부분의 결말도 별다른 감동을 주지도 못한다.


  데이비드 역을 맡은 아역 배우 헤일리 조엘 오스몬트의 연기는 꽤 좋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뿐이다. 감동을 주기에는 뭔가 이상하게 어느 한 부분이 비어있는 느낌을 준다. 오스몬트는 이른 나이에 받은 찬사 때문인지 그 이후 연기자로 성장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주드 로의 연기는 그다지 언급할 정도도 되지 못한다. 내게는 주드 로가 나왔던 영화 가운데 그나마 연기로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클로저(2004)' 정도 뿐이다. '에이 아이'에서의 주드 로를 보고 있노라면, 저 때부터 탈모로 고생했나 보다, 하는 생각만 든달까...


  로봇 소년 데이비드의 인간이 되기 위한 여정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떠올리게 만든다. 오디세우스가 요정 칼립소가 제안한 '영생'의 유혹을 뿌리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데이비드는 로봇의 영생을 포기하고 인간이 되어 엄마 모니카가 있는 집으로 갈 수 있기를 꿈꾼다. 오디세우스에게는 긴 세월을 기다려준 아내 페넬로페가 있었지만, 데이비드의 엄마 모니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슈퍼 토이 테디가 보관하고 있었던 모니카의 머리카락으로 다시 되살려낸 모니카는 오직 하루만 살아있을 수 있다. 그 하루의 시간은 데이비드에게 엄마의 사랑과 보살핌의 기억을 되살려내기에 충분하다.


  어쩌면 데이비드가 그 기억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을 때, 데이비드는 비로소 '인간'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로봇 소년 데이비드는 영생을 포기하고 엄마 모니카와의 행복한 추억을 가지고 잠을 선택한다. 이건 마치 드라마 '겨울 연가(2002)'의 주인공 준상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기억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시력을 잃는 것을 택하게 되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기억'이야말로 바로 인간됨,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본질적인 요소인 것이다.


  스필버그가 보여준 로봇 소년 데이비드의 오디세이아는 가슴 아픈 절절함이 가득하지만, 흥미로운 부분도 여럿 있다. 그러나 이 여정의 결말부에 이르고 나면 밋밋한 감동과 조우하게 된다. 영화가 던지는 철학적 질문은 데이비드가 이천 년의 세월동안 잠겨있었던 물 속에 그대로 남아있고, 스탠리 큐브릭이 구현하고 싶어했던 암울한 미래 세계의 모습 또한 그렇다.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감독의 세계가 아름답게 조화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필버그는 여러 개의 천조각들을 이어 붙인 멋진 조각보를 꿈꾸었겠지만, 내가 본 것은 '각설이 룩'이다. 그에게는 어렵고 난감한 작업이었음이 분명하다. 결국 '에이 아이'는 스필버그의 범작(作)으로 그렇게 남았다.



*사진 출처: theyoungfolks.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EBS에서는 금요일 밤에 'EIDF 걸작선'을 방영해 준다. 지나간 EIDF에서 상영되었던 작품들 가운데 괜찮았던 다큐들을 뽑아서 보여주는 것인데, 지난주 금요일에는 레베카 스턴의 '그루밍(Well Groomed, 2019)'을 방영했다.


  '그루밍'은 미국의 애완견 미용 대회에 참가하는 이들의 모습을 담아낸 다큐이다. 애견 관련 사업이 하나의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에서 애견 미용 시장은 매우 유망한, 그리고 갈수록 커지는 시장임이 분명하다. 그 첨단을 보여주는 애견 미용 대회는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양극단으로 나뉠 수 있다. 개들을 인간의 욕망에 따라 학대하는 것이라는 의견부터, 개를 주제로 한 새로운 창작과 예술의 영역을 개척한 것이라는 시각까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다큐는 어느 쪽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일까? 놀랍게도 '그루밍'은 아무런 관점도 갖고 있지 못하다. 한마디로 작가적 관점을 포기한 매우 실망스러운 다큐이다.


  이런 다큐를 'EIDF 걸작선'이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다면, 그 책임에 대해 편성 담당자는 진지하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지나간 EIDF 상영작 가운데 아무 작품이나 상영해도 이 다큐 보다는 나을 것이다. 문제의식도 부재하고, 그 어떤 작가적 관점도 볼 수 없는 이 다큐가 지난 2019 EIDF에 상영되었다는 것 자체도 어떤 면에서는 EIDF의 수준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루밍'은 미국 애견 미용 대회를 그냥 취재한 화면들의 나열일 뿐이다. 주요 참가자들의 애견 미용에 대한 의견을 '열정'과 '창조적 영감'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이 다큐를 본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매우 불편해할 것이다.


  물론 중간에 애견 미용 대회를 보는 비판적인 관점이 들어가기는 한다. 그런데 이 부분도 문제가 있는 것이, 방영된 어느 토크쇼의 한 대목을 따와서 집어넣었다. 토크쇼 참가자는 애견 미용은 개의 입장에서는 학대이고 인간의 그릇된 욕망의 반영일 뿐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에 대해 애견 미용 대회의 참가자인 캣 옵손은 개들은 자신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좋아하고, 그걸 선택할 수 있다는 말로 강변한다. 감독 레베카 스턴은 그야말로 그 어떤 작가적 입장도 없이 토크쇼 편집 화면 뒤에 숨어있다. 그냥 이런 입장도 있으니 보는 관객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건데, 이는 감독의 매우 비겁하며 무기력한 자세를 입증한다.


  이 다큐는 일견 구스 반 산트가 2003년에 만든 '엘리펀트(Elephant)'를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을 소재로 만든 '엘리펀트'는 그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당시 이 영화를 본 내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둘로 나뉘었다.


  "하나의 사건을 보는 새로운 영화적 관점을 제시했다."

  "작가적 관점을 포기한 아무 의미없는 영화이다."


  '엘리펀트'는 콜럼바인 총기 난사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범행을 저지르기 전까지의 일상을 카메라로 쭉 따라간다. 관객들은 그들이 범행을 저지른 동기나 어떤 마음의 배경을 읽고 싶어하지만, 산트는 그 기대를 철저히 배반한다. 마치 총격전이 이루어지는 비디오 게임 화면처럼 펼쳐지는 범행 장면은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엘리펀트'는 사건을 보여줄 뿐, 그 뒤에 숨겨진 또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 무엇의 존재에 대해 철저히 부정한다. 이것을 현실의 비극적 사건을 보는 새로운 영화적 관점이라고 볼 것인지, 아니면 작가적 관점의 포기로 볼 것인지는 관객의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후자의 입장에 서 있다. 구스 반 산트는 그냥 겉멋 든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EIDF가 시작된 2004년부터 열렬한 시청자였던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EIDF의 작품들에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않게 되었다. 전반적인 다큐 상영작의 수준이 질적으로 하락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마도 기획 전반의 문제와 함께 다른 외부적 요인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특히 특정 국가와 그 나라가 지원하는 다큐멘터리 협회와 관련된 상영작들이 눈에 띄게 진입했는데, 이와 관련된 잡음도 있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주최 측에서는 EIDF의 수익성 문제도 제고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EBS는 공영방송으로서 좀 더 공익적인 목적을 더 우위에 두어야 하며, 그건 EIDF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상업성을 고려하기 보다는 새롭고, 실험적인 다큐 작품들을 대중에게 소개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개방적이고 유연한 자세로 수준 높은 상영작들을 선정해야 한다. '그루밍'과 같은 한심한 다큐멘터리가 상영작으로 선정되는 일은 피했어야 했다.


  지난 주말에 '그루밍'을 보고 나서 큰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꼈다. 적어도 '걸작선'이란 이름만 들어가지 않았어도 분노의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EIDF는 올해 열 여덟 해를 맞이한다. 그 연륜과 명성에 걸맞는 다큐멘터리를 올해는 만날 수 있을까? '그루밍'과 같은 다큐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이라는 주제로 분류되어 상영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작가적 관점을 포기한 다큐는 다큐라고 할 수 없다. EIDF의 분발과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진 출처: hbo.com



   


댓글(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an22598 2021-01-06 07:51   좋아요 0 | URL
동의합니다. 특히 요즘같이 자료 (영상,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그것들을 어떻게 다루고, 바라볼지가 중요한 것 같은데..말이죠.
 

 

  "가족이란, 남들이 보고 있지 않을 때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이다."

 

  기타노 다케시가 어느 인터뷰에서 남겼다는 이 말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아호, 나의 아들(陽光普照, 2019)'에 나오는 아버지 아원에게도 내다 버리고 싶은 가족이 하나 있다. 어려서부터 말썽만 부리고 사고뭉치로 자라난 둘째 아들 '아호'이다. 운전학원의 강사로 일하는 아원은 운전 연수생들이 자녀가 몇이냐고 물으면 하나라고 대답한다. 그에게 자식은 첫째 아들 '아하오' 뿐이다.


  오랜만에 대만 영화를 보았다. 청몽홍 감독은 내게 낯선 이름이다. 오래전에 내가 보았던 대만 영화들은 아시아 영화의 새로운 정전(傳)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차이밍량의 '애정만세(1994)'의 마지막 장면, 여주인공 메이의 긴 울음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구멍(1998)'이 보여준 소외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은 또 어떠한가. 허우샤오센은 '비정성시(1989)'로 유명하지만, 내게는 초기작인 '펑꾸이에서 온 소년(1983)'의 장면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나는 그 두 감독의 대부분의 작품들을 챙겨서 보았지만, 나중에 보여준 그들의 영화들은 꽤 실망스러웠다. 대만 영화는 두 감독의 부침(沈)에 따라 쇠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나는 대만 영화들을 잊고 있었다.


  '아호, 나의 아들'은 그런 나에게 대만 영화의 저력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청몽홍이 보여주는 어느 가족의 초상은 강렬하면서도 세밀한 묘사가 돋보인다. 영화 도입부의 끔찍한 범죄 장면은 이 감독이 보여주는 영화의 세계가 자신의 선배들과는 남다르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 같다. 영화 중간 중간에도 청몽홍이 다루는 폭력의 이미지가 매우 날것으로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본다. 그런 것을 보면 이 감독에게는 매우 거친 야생성 같은 것이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영화 전체를 통해서 청몽홍이 보여주는 인물의 내면 묘사와 연출 방식은 매우 섬세하다. 그 점이 러닝 타임 2시간 35분을 무리없이 이어가는 원동력이다.


  둘째 아들 아호는 자신을 괴롭힌 '오뎅'에게 저지른 폭력 사건으로 소년원에 수감된다. 거기에는 아호의 친구 '무'도 연관되어 있다. 아버지 아원은 법정에서 판사에게 아들을 감옥에 가두어서 정신차리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원의 희망은 의대 진학을 목표로 재수 중인 첫째 아들에게만 있다. 첫째 아하오는 그런 아버지의 기대를 온종일 내리쬐는 강렬한 '햇빛'으로 인식한다. 영화 제목 '陽光普照(양광보조, 영어 제목은 'A Sun'이다)'는 '두루 내리 비치는 태양빛'이란 뜻이다. 


  첫째에게만 쏟아지는 햇빛, 둘째인 아호는 어둠 속에 서있다. 이 가족의 비극은 그렇게 양분된 빛과 어둠에서 기인한다. 아버지는 운전 학원 강사로, 엄마는 유흥업소 여종업원들의 미용일을 하며 아이들을 어렵게 키웠지만, 그 부부는 자신들에게 닥친 예기치 못한 비극을 목도한다. 아원에게는 운전 연수생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대로 결국 한 명의 아들만 남는다. 그런데 그 아들 아호는 출소 후에 친구 '무'의 겁박에 못이겨 범죄에 가담하게 된다. 


  "순간을 잡고 길을 정하라"


  그 말은 아원의 인생 좌우명인 동시에 직장인 운전 학원의 야외 연습장에 크게 써져있는 말이다. 아원은 모범적인 도로 주행을 하는 운전자처럼 성실히 살아왔다고 믿지만, 그에게 닥친 가족의 현실은 고통과 회한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그에게 아내마저 비난을 더한다. 당신이 아이들을 위해서 도대체 무엇을 해주었냐고...


  영화의 결말부. 아원은 아내에게 자신이 하나 남은 아들 아호를 위해 감내했던 일에 대해 털어놓는다. 아내는 남편이 짊어져야 했던 '아버지'라는 이름의 무게에 절규한다. 그 장면에서 두 사람이 보여주는 응축된 감정의 분출은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다. 나는 아내가 남편의 비밀을 알고 오열하는 장면에서 바닥에 주저앉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청몽홍의 연출은 결코 지나침이 없다. 아내는 무너지지 않고, 남편을 감싸 안는다. 부부라는 이름,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그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진 신뢰와 애정을 보여주는 그 장면에서 관객은 두 사람에게 쏟아지는 눈부신 햇살을 본다.


  영화 '테이큰(Taken, 2008)'처럼 격렬하고 빠른 호흡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영화는 상당히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느리지만 치밀한 서사, 진중하고 묵직한 연출이 그려내는 어느 가족의 고통스러운, 그러나 절망으로 향하지 않는 초상화를 보는 일은 꽤 긴 여운이 남는다. 가족이란 어쩌면 '사랑'이란 이름의 태양빛으로 서로를 고통스럽게 태우기도 하고, 그 빛으로 온기를 얻어 살아가게도 만드는 모순적인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의 마지막, 아호가 엄마를 자전거에 태우고 한적한 길을 지나가는 장면에서 나무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엄마의 얼굴에 닿는다. 이 가족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그 빛으로 더이상 다치지 않고,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이제서야 조금씩 배워가는 중인 것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cinemaescapist.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