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볼 일 없는 작은 도시의 음악학교 성악 강사로 일하고 있는 왕차이링(장웬리 분)은 아주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파리 오페라단에서 프리마 돈나로 노래를 부르겠다는 것.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추녀까지는 아니지만 왕차이링의 외모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지저분한 피부와 작달만한 키, 살집있는 몸매는 오페라의 여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오로지 목소리만큼은 곱고 아름답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은 베이징으로 거주지를 옮기려고 애를 쓴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주증(居證)이 필요한데, 이미 거액의 돈을 건네준 베이징의 브로커는 늘 기다리라는 말만 한다. 그런 왕차이링의 주변에 모여든 이들의 인생도 허섭하기는 마찬가지. 시시한 재능을 가진 화가 지망생, 그곳 사람들에게 냉대받는 게이 발레리노, 왕차이링의 목소리에 반해서 쫒아다니는 공장 노동자까지. 과연 왕차이링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빛을 볼까...


  꾸창웨이 감독의 2007년작 '입춘(立春)'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주변부에 자리한 이들이다. '예술가병'에 걸린 그저그런 인생들이 현실에서 바스라지는 모습을 담아냈다고 할 수 있다. '예술가병'과 비슷한 '영화병'이라는 것도 있다. 자신이 가진 예술과 영화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병. 그 병에는 별다른 치유책이 없다. 성공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개는 청춘의 시간을 내던지다 망가지고 잊혀진다. 어쩌면 '입춘'의 주인공 왕차이링도 그 '예술병'에 걸린 사람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병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다. '세월'과 '현실'이 그것이다. 흘러가는 시간과 엄혹한 현실이 어설픈 기대와 희망을 깨부수어 버린다.


  왕차이링이 가진 재능이 보잘 것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부르는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Tosca)의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듣다 보면, 그 절절함이 마음을 울린다. 사랑하는 연인을 구하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비운의 여주인공이 신 앞에서 애절하게 부르는 노래. 신실한 믿음으로 착하게만 살아온 토스카는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토스카처럼 왕차이링은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비통함을 드러내듯 그 아리아를 자주 부른다. 사랑했다고 믿은 남자에게는 모욕적으로 차이고, 게이 발레리노에게서는 위장 결혼을 제안받는다. 왕차이링의 인생에 도무지 볕들 날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꾸창웨이 감독은 시련과 좌절의 연속인 왕차이링의 인생에 섣불리 희망을 선사하지 않는다. 누구 하나 이 여자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꿈을 제대로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고, 여자는 주변의 비웃음과 멸시의 대상이 된다. 그 와중에 사기까지 당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예술에 매혹당한 것이 잘못인가? 그리고 그것에 인생을 바쳐서 살겠다는 꿈이 무모하기만 한 것인가? 왕차이링이 영화 속에서 부르는 성악곡 가사는 한결같이 아름답다. 노래의 날개 위에 연인을 태우고 가고 싶다는 멘델스존의 '노래의 날개 위에', 봄에는 가난한 마음의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는 슈베르트의 '봄의 찬가'. 그 고결하게 빛나는 가사들과는 달리 왕차이링의 현실은 그야말로 '시궁창'이다.


  어디 왕차이링 같은 낙오자가 한둘이겠는가? 화가 지망생은 너절한 사기꾼이 되고, 게이 발레리노는 감옥에 갇힌다. 그렇게 주변부를 맴도는 시시껍절한 인생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짠해진다. 예술이 그들의 인생을 망친 것인지, 삶이 예술을 버리게 만든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당신들 말야, 그 정도의 재능으로는 어림없지'라고 조롱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러한 꿈을 가진 이들의 마음 깊이 흐르는 열정마저 폄하할 수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은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고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추어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부르는 왕차이링이 나온다. 그건 꾸창웨이 감독이 극중의 왕차이링에게 보내는 선물이었다. 현실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꿈을 그렇게나마 이루게 해주고 싶었던 감독의 따뜻한 연민은 마음을 울린다. 자신의 딸에게 나방의 짧은 삶에 대한 동화를 읽어주던 왕차이링은 사람은 그 보다는 행복하지 않냐고 말한다. 왕차이링에게 예술은 짧았고, 살아야할 인생은 길었다. 매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지나가버리는 봄이 늘 슬펐던 왕차이링에게 딸과 함께 하는 삶이야말로 인생의 봄인지도 모른다.


  장예모, 첸 카이거 영화의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꾸창웨이 감독은 2005년작 '공작(Peacock)'으로 주목을 받았고, 이 영화에서도 아주 좋은 연출력을 보여준다. 여주인공 역을 맡은 장웬리는 그의 아내로, '입춘'으로 2007년 로마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 속의 왕차이링은 '박색(色)'에 가깝지만, 그것은 영화를 위해 일부러 살을 찌우고 분장한 모습이다. 영화제 수상 사진을 보고 다른 사람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실제로는 매우 아름답다.  

 


*사진 출처: moviedoub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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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말이지, 아버지의 일생을 한번 생각해 봤어. 결국 부모로서의 성공은 자식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사느냐로 판가름 나는 것이지. 우리 아버지는 어떤지 모르겠네."


  아들 슈이치(우에하라 겐 분)는 아버지(야마무라 소 분) 앞에서 태연하게 그런 말을 늘어놓는다. 그 말을 듣는 아버지의 속이 편할 리 없다. 아들 슈이치는 며느리 키쿠코(하라 세츠코 분)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고, 시집간 딸은 남편과 불화가 심해서 툭하면 보따리 싸들고 친정에 온다. 시아버지 싱고는 아들에게 냉대받는 며느리가 안쓰럽고, 어떻게든 아들 내외의 결혼 생활을 이어가게 하려고 애를 쓴다. 과연 그의 바램대로 아들 내외는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산의 소리(The Thunder of the Mountain, 1954)'는 한 가족의 일상에 내재된 균열과 상처를 담아낸다. '안즈코(1958)'에서 딸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감싸주는 아버지로 나왔던 배우 야마무라 소가 이 영화에서는 사람 좋은 시아버지로 나온다. 며느리를 아끼다 못해 자식 보다 더 예뻐한다는 불평을 딸과 아내가 쏟아낸다. 그런 아버지를 아들도 못마땅하게 생각할 뿐이다. 영화 속에서 싱고가 자신의 가족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그렇게 살갑지 않다.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가장 걱정하는 동안, 시어머니는 아들 내외에 무관심하며, 친정으로 애들 데리고 온 딸은 속 긁는 소리만 하고, 아들은 밖으로 나돈다. 이 집안 사람들의 가족으로서의 유대와 정서는 여기 저기 균열이 가 있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그들 내면의 풍경은 황량하다.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내는 이런 가족 드라마는 결코 편하게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떤 문제 하나만 해결하면 잘 풀릴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그 속에는 구불구불하게 얽힌 길이 있으며, 도무지 출구를 찾기가 어려워 보인다. 삶이 가진 복잡성, 그것이야말로 이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서 진중하고 치열하게 탐구하고자 했던 주제였다. '산의 소리'에서 주인공 싱고가 맞부닥뜨리는 집안의 문제는 며느리에게 따뜻하게 대해주고, 아들의 바람기를 잡으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싱고에게 며느리 키쿠코의 유산(産) 소식은 예기치 못한 충격을 준다. 그것이 전적으로 키쿠코의 의지로 결정한 일이라는 점은 키쿠코와 이 가족의 결별을 의미한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키쿠코의 그런 주체적이고 강단있는 결정은 오늘날의 관객에게도 나름의 충격을 준다. '자식이 있으면 밖으로 나돌던 남자는 언젠가 돌아온다'고 믿던 시대에 키쿠코는 어렵게 생긴 아이를 스스로 버린다. 더군다나 늘 순종적이고 웃는 얼굴을 보이던 키쿠코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점이 놀라울 뿐이다.


  남편 슈이치는 늘 아내를 '아이 같다'며 못마땅해 하고 비웃는다. 그 말의 뜻은 '순진무구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자로서 그 어떤 매력도 없고 아이처럼 세상물정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런 '아이 같은' 여자를 자신의 아버지는 마음에 들어해서 며느리로 삼았다. 그 시대의 혼사는 대부분 부모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싱고의 딸이 자신의 괴로운 결혼 생활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불만을 터뜨리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싱고가 친구의 미망인이 팔아달라고 부탁한 '노(能, 일본의 전통 연극)'의 가면을 흥미있게 들여다 보는 장면이 나온다. '노멘(能面)'이라고 부르는 가면은 표정이 없다. 연기하는 배우들은 오로지 고개의 움직임만으로 인물의 내면을 표현해 낸다. 싱고가 매혹된 '노멘'은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는 며느리 키쿠코의 항상 웃는 모습이 순진무구한 아이 같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의 첫사랑이었던 아내의 언니와도 닮았던 것은 아닐까?


  "당신은 미인이었던 내 언니와 결혼하려고 했죠. 언니가 일찍 죽지만 않았다면 말이에요. 불쌍한 언니..." 


  좌절된 첫사랑과 별다른 애정없이 이어진 결혼 생활, 아내의 애정은 과도하고 무분별하게 아이들에게 투사되었고 제멋대로 자라났다. 결국 그의 노년에 그가 목도하는 가정의 균열은 당연한 것이다. 키쿠코는 그 근원을 들여다 보면서 자신의 결심을 굳혔을 것이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그 어떤 것으로도 지탱해 나갈 수 없는 것이라고.


  여름에 해바라기를 보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던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스산하고 메마른 겨울 공원에서 만난다. 어쩌면 그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서로 못다한 말들을 가슴에 꾹꾹 눌러담으며, 대화의 끝무렵에 싱고는 공원의 경치가 좋다고 말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겨울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사라진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로 만났지만, 가장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그 둘의 마지막은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웠다. '설국'으로 유명한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나루세 미키오가 가장 좋아하는 자신의 작품이기도 했다. 절제된, 그러나 좌절된 정념(念)의 여정을 '산의 소리'는 담담히 그려낸다.



*사진 출처: fand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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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자 위에 놓인 귤 하나, 그 작은 것으로부터 상상하지 못했던 생활을 꾸려가는 거야."


  결혼을 앞둔 딸에게 아버지는 너무 경제적인 조건에 얽매이지 말고 소박한 것에서 출발하라고 그렇게 충고한다.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어린 시절 '안즈(살구)'라는 애칭으로 불리웠던 안즈코(가가와 교코 분)는 유명한 소설가 아버지(야마무라 소 분)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안즈코에게 아버지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고 현명한 인생의 상담자이기도 하다. 여러 구혼자들을 만나 보다가, 결국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같이 자란 료키치(기무라 이사오 분)와 결혼하게 된 안즈코. 그러나 결혼 생활은 생각보다 어렵고 마음의 갈등은 커져 간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안즈코(Little Peach, 1958)'에는 결혼의 풍경, 그것도 꽤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내면의 풍경이 펼쳐진다. 마치 접힌 부채가 펼쳐지면서 보이는 그림처럼, 접혔을 때는 알 수 없었던 결혼의 실체가 안즈코에게 다가온다. 자신의 부모처럼 서로를 아껴주고 존중하며 사랑으로 살아가는 결혼 생활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남편 료키치는 소설가로 성공하기를 꿈꾸며 글을 쓰지만, 가진 재능은 턱없이 부족하고 오직 자존심만이 하늘을 찌른다. 장인의 명성에 대한 질투는 아내에 대한 온갖 짜증과 트집잡기로 이어진다. 이 남자의 행동은 그야말로 찌질함의 극치를 이룬다. 그럼에도 안즈코는 어떻게든 결혼 생활을 이어가려고 애를 쓴다. 여성 관객들에게 '안즈코'는 고구마 백 개쯤 먹은 답답함과 울분을 선사하고도 남음이 있다. 


  안즈코와 장인에게 돼먹지 못한 언사와 행동으로 일관하는 남편 료키치. 그의 찌질함과 무례함은 영화 내내 스크린을 뚫고 나올 기세이지만, 속 깊은 이 부녀()는 묵묵히 감내할 뿐이다. 도대체 왜, 안즈코는 결혼 생활을 쉽사리 그만 두지 못하는 것일까? 그토록 곱게 키운 딸의 시련과 고생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묵묵히 딸의 결정을 기다리기만 하는가? 그것은 어쩌면 그 시대가 다 그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흠은 남자에게는 순간이지만, 여자에게는 평생을 가지."


  여기에서 흠이란 '이혼'을 뜻한다. 아버지는 딸의 이혼 가능성을 언급하는 아내에게 그렇게 말한다. '이혼녀'라는 사회적 낙인(烙印)이 평생을 가던 시절에 지지고 볶으며 살더라도 결혼이라는 울타리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건 마치 딜레마 같다. 서서히 말라 죽으나, 남은 생애 동안 엄혹한 비바람 속에 서 있거나. 물론 지금 시대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결혼 생활의 본질, 즉 상대방을 배려하고 인내하면서 매번 새롭게 닥치는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함이 없다. 그것이 힘든 사람에게 출구로서의 '이혼'이 안즈코가 살던 시대 보다는 좀 더 쉽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3년여의 짧은 결혼 생활 이외에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 결혼 생활의 끝은 그에게 깊은 우울감을 남기기도 했다. '안즈코'에서 그가 그려내는 결혼의 풍경은 지독한 혐오의 감정까지는 아니지만, 근본적인 회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남편과 친정을 오가는 어정쩡한 생활을 이어가면서 안즈코의 내면은 더욱 더 피폐해질 뿐이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결혼 전, 여유있고 평안한 표정으로 피아노를 치던 안즈코의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곤궁한 결혼 생활은 피아노마저 팔게 만든다. 궁기 가득한, 생기 잃은 안즈코에게 결국 결혼이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과연 안즈코는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있을까? 영화의 결말은 그 대답을 유보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결혼의 풍경이 칙칙한 회색의 것이기는 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대사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유머 감각이 가득하다. 이 영화는 원작이 있는데, 1956년에서 이듬해까지 '동경신문'에 연재되었던 무로우 사이세이의 동명 소설이 그것이다. 원작이 가진 탄탄한 구조와 뛰어난 문장을 영화 속에서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안즈코가 아버지의 군대 시절 이야기를 듣다가 결혼을 평생 복무해야 하는 지겨운 군대 생활로 비유하는 부분이 그러하다. 그런가 하면, 남편 료키치가 안즈코에게 좋은 소설이란 어떤 것인지 의견을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에 대한 안즈코의 답이 걸작이다.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어. 소설은 미인과 같다고. 뭘해도 예쁜 사람이 있잖아. 목소리나 걷는 모습 같은 거 말야. 소설도 그렇게 완전한 것이 되었을 때 편집자가 사려고 한다고."


  글에 대한 재치있는 비유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찌질한 남편은 그럼 내 소설은 추녀인가 보군, 하며 이죽거린다. 그런 생동감 있는 대사들이 이 영화의 우울함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한다.


  '안즈코'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일본인이 쓴 리뷰를 읽게 되었는데, 그는 이 영화의 영문 제목 'Little Peach'에 이의를 제기했다. 원래 '안즈'는 '살구(apricot)'에 해당하는 단어이고, 영어 자막에서도 그렇게 표기하면서(안즈코가 구혼자와 통성명을 하는 장면에서 단 한번 언급된다) 왜 제목을 '작은 복숭아'로 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일본인의 시각에서는 그런 것이 살짝 걸리는 부분인가 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렇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 아이에게 '살구 같다'라는 표현 보다는, '복숭아 같다'라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영어 단어 'peach'가 가진 의미도 '예쁜 아이, 멋스러운 사람'이란 뜻이다. 그 어여쁜 안즈코가 결혼으로 인해 생고생을 하면서 망가지는 모습을 보아야 하는 괴로운 영화. 나루세 미키오가 그려낸 결혼의 풍경은 그러했다.



*사진 출처: tiff-j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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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해당 영화의 스포일러가 '약간' 들어있습니다.


 

  20분. 그것은 내가 영화를 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최소 감상 시간이다. 대개 괜찮은 영화들은 그 시간 기준에 그럭저럭 들어온다. 아주 좋은 어떤 영화들은 그 시간을 넘기는 인내심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흔하지는 않다. 그런데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One Cut of the Dead, 2018)'는 그 20분을 넘겨서 무려 37분을 인내할 것을 요구한다. 이 영화의 시작은 그저 그런 좀비 영화의 어느 장면에서부터이다. 도무지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이 조잡한 좀비 영화에는 한가지 특색이 있다. 원 테이크(single take)로 끊김없이 이어진다는 것. 좀 지루하다, 라고 생각할 즈음에 제목과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One Cut of the Dead'는 이 영화 속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영화 속의 영화. 이런 액자 구조 형식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구조를 택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느냐이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엄청나게 긴 '한 컷'의 영화 뒤에 숨겨진 세상을 보여주고자 그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효과적인 성공을 거둔다. 이 영화를 보려는 이들은 우선 초반의 37분을 견뎌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인내는 충분히 보답받는다.


  빠르게 찍고, 저렴한 비용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영화를 뽑아내는 것을 신조로 삼고 사는 삼류 감독 히구라시는 어느 방송국으로부터 황당한 제안을 받는다. 요새 유행하는 좀비 영화를 원 테이크로 찍어서 생방송으로 내보낸다는 것. 쉽지 않을 것 같은 이 좀비 영화는 준비 단계에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쥐뿔도 없는 주조연 배우들의 오만가지 요구를 들어주는 것도 골치 아픈데, 급기야 촬영 당일 두 명의 배우가 약속 장소에 오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생방송은 곧 예정되어 있고 당장 배우 둘을 구하기도 어렵다. 삼류 감독 히구라시는 자신의 '원 컷' 좀비 영화를 무사히 찍을 수 있을까...


  마침내 시작된 'One Cut of the Dead'의 촬영 현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오로지 '원 컷'을 이어가기 위해 온갖 임기응변을 쏟아내는 스탭들과 배우들에게 그것은 악몽과도 같지만 그 광경을 보는 이들은 폭소를 참을 수가 없다.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채플린의 명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감독 우에다 신이치로는 하나의 영화 뒤에 숨겨진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들을 이 장르를 타파한 요절복통의 영화 속에 담아낸다. 'ENBU 세미나' 영화 학교의 장편 영화 워크숍의 결과물인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빛난다. 이 재미난 영화에 할리우드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2020년에 리메이크 판권이 팔려서 제작이 예정되어 있다(Variety지 기사 참조).


  이 영화에서 삼류 감독 히구라시에게 닥친 난관을 극복하게 돕는 가장 큰 조력자는 그의 가족이다. 아내는 극중 영화의 분장사 배우 역으로, 딸은 제작 스탭으로 뛰면서 전심전력을 다해 돕는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무엇보다 빛나는 가족애와 더불어 영화 촬영 현장의 모든 사람이 하나로 뭉치는 동료애는 뭔가 소박하지만 뭉클한 감동도 준다. 하나의 완성된 결과물을 위해 협력하고 그 어떤 희생도 감내하는 이러한 정서는 어쩌면 지극히 일본적인 것과도 맞닿아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한 정서를 미타니 코키 감독의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1997)'에서도 볼 수 있다. 생방송 라디오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다루는 이 영화에서 PD는 제멋대로인 성우들을 달래가며 어떻게든 끌어가려고 한다. 그러다 가장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직면하는데, 그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되어준 것은 방송국에서 오래 일한 나이든 소품 담당 직원이었다. 연장자가 가진 지혜와 오래된 것에 대한 존중, 그것이야말로 엉망이 될 뻔한 라디오 방송을 구한다. 이 코미디 영화는 관객에게 보편적 웃음을 선사하지만, 그 근저에 흐르는 정서는 매우 일본적이다. 집단주의, 그 집단의 소속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역할을 해내며 연장자와 지도자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일본의 드라마와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는 한 컷 뒤에 숨겨진 세상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준다. 비록 누군가에게는 우스꽝스럽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영화일지라도 그것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애를 쓰는지 관객은 새삼 깨닫게 된다. 즐거운 코미디 영화이지만,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가족주의와 집단주의, 그 견고한 정서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정서가 미국에서 제작되는 리메이크 영화에서는 어떻게 재현될 것인가도 궁금해진다.



*사진 출처: empireonl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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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밍량의 '데이즈(子, 2020)'를 보고나서 나는 그의 '애정만세(1994)'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주인공 메이는 홀로 공원을 걷다가 갑자기 처철하게 목놓아 운다. 그 영화를 본 지가 꽤 오래되었는데도 나는 아직도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메이의 울음은 소통에 대한 갈망과 결코 해소할 수 없을 것 같은 외로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데이즈'를 보고 메이의 울음을 떠올린 것은 그와는 다른 의미에서이다. 나는 차이밍량의 창작자로서의 마지막을 보았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슬픔을 느꼈다. 이 영화는 그의 영화에 대한 종언()이나 다름없다.


  강(이강생 분)은 지독한 목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통증 때문에 꽤 견디기 힘든 침술 시술을 받기도 한다. 방콕에 사는 젊은 청년 논은 옷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지만, 마사지 일도 부업으로 하고 있다. 강은 방콕의 호텔에서 논에게 마사지를 받는다. 둘은 거리의 음식점에서 같이 식사를 하고 헤어진다. 이것이 '데이즈'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러닝 타임 2시간 6분을 어떻게 채운 것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지루하고 진부하며 보잘 것 없는 롱 테이크(long take)들의 연속이라고. 적게는 1~2분, 길게는 6~7분에 이르는 쇼트들이 계속 이어진다. 내가 각각의 쇼트들을 세어본 것이 아니라서, 추측하건대 이 영화 전체의 쇼트들은 50개 미만일 것이다.


  이 영화의 비극은 영화를 본 관객이 '게이 포르노'라고 쏟아놓는 독설을 듣는 것에 있지 않다. 이것은 창작자의 종말과도 같다. 한때 눈부신 재능으로 빛났던 영화 감독이 이렇게나 망가질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참담한 기분이 들게 한다. 나는 '흔들리는 구름(2005)' 이후로 차이밍량의 영화를 끊었다. 뭔가 그의 영화 세계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데이즈'를 본 것은 그의 현재를 한 번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롱 테이크는 낡아빠진 구닥다리 유물의 반복적 재현이며, 극도로 절제된 대사로 의도적으로 무성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시도는 자기 기만일 뿐이다. 차이밍량은 베를린 영화제 상영 때에 자막 없이 상영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영화의 대사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부수적인 것이며, 영화의 시원(原)인 무성 영화로 돌아갈 필요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강은 논과 관계를 마치고 호텔에서 선물로 오르골을 건네는데,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채플린의 '라임라이트(Limelight, 1952)' 주제곡이다. 물론 '라임라이트'는 유성 영화다. 그러나 '채플린'이란 인물은 무성 영화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차이밍량은 '데이즈'를 통해 지금 시대 영화의 모든 것을 조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그런 비웃음은 공허하게 울리며 흩어진다.


  차이밍량의 초기 영화들, '애정만세(1994'), '하류(1997)', '구멍(1998)'이 그토록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던 것은 그 영화들이 가진 보편성에 있었다. 현대인의 고독, 상실감, 소통에 대한 갈망을 자신만의 영화 언어로 그려낸 그에게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영화적 영감을 소실한 것 같다. 창작자는 작품으로 관객, 또는 독자와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겪은 고통과 슬픔을 일방적으로 늘어놓으며, 공감과 연민을 '구걸'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길가의 걸인을 떠올리게 만든다. 차이밍량은 '데이즈'로 자신의 고통을 위무받고 싶어하며, 더 나아가서 걸인처럼 관객에게 그것에 대한 동의와 연민을 구걸하고 있다. 참담한 일이다.


  이 영화를 좋은 영화이며 온갖 미사여구로 포장하려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건 그 사람들의 말이고, 해야할 일일 것이다. 나는 내 글을 쓰며, 나의 일을 할 뿐이다. '데이즈'는 결코 좋은 영화가 아니다. 마치 아마추어가 어설프게 찍은 퀴어 영화 같은 인상을 준다. 이 영화의 간단한 요약은 '늙은 게이의 그저 그런 나날들'이 될 것이다. 이강생이 분한 '강'은 젊은 게이 '논'의 미래이다. 늙고 아픈 육체와 젊고 매끈한 육체는 같은 시간대, 공간 속에 위치하고, 그 둘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차이밍량이 보여주는 이런 대비는 영화적으로 하등 새로울 것이 없다. 나는 이것을 비평적으로 포장할 그 어떤 의지도 갖고 있지 않다.


  어쩌면 차이밍량은 더이상 영화를 찍고 싶어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좋은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흘러갔다. '데이즈'는 그의 나태함과 영화적 상상력의 부재를 여실히 입증한다. 차이밍량은 이제 은퇴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창작자로서의 그의 진정한 종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끝을 보는 것은 그의 영화를 아끼고 사랑했던 이들에게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나는 '애정만세'의 메이처럼 목놓아 울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사진 출처: hollywoodrepor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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