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그랍스키의 2009년작 다큐 '베토벤을 찾아서(In Search of Beethoven)'는 베토벤의 생애와 음악을 담아낸 작품이다. 러닝 타임이 2시간 20분에 이르는데, 생각보다 꽤 길게 느껴진다. 베토벤의 음악 세계를 충실하게 조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다. 문제는 지루하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 다큐는 클래식 음악 팬이나 서양 음악 전공자들에게만 나름의 매력이 있을지 모른다. 나처럼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이 다큐의 길고 지리한 여정을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2시간 20분이 마치 네다섯 시간은 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큐는 베토벤의 생애를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간 순서대로 풀어낸다. 발음 좋은 여성 해설자가 생애와 작품에 대한 소개를 하고, 중간 중간에 세계적인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견해, 음악 평론가들의 부가 설명도 더해진다. 음반으로만 듣던 유명 음악인들의 실제 연주 모습과 그들이 생각하는 베토벤에 대한 개인적 감상을 듣는 기회가 흔치는 않을 것이다. 뭐랄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귀 호강, 눈 호강하는 다큐일 수도 있겠다.


  지휘자로서는 로저 노링턴의 설명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베토벤의 음악을 베토벤의 성격과 결부해서 해석한다. '폭풍같다'라는 노링턴의 설명대로 젊은 시절 베토벤의 성격은 불같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었다. 그 시기에 만들어진 현악 4중주 '라주모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이 그러한 면을 보여준다. 특히 피아니스트들이 보는 베토벤의 내면에 대한 해석들도 신선하다. 감상자로서 만나는 베토벤의 음악과 그것을 직접 연주하는 이들이 들려주는 느낌과 생각들이 어떻게 다른지도 알 수 있게 된다.


  다큐는 베토벤의 생애에 등장하는 여성들에 대한 설명도 놓치지 않는다. 특히 '불멸의 연인'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도 들려주는데, 어디까지나 음악과 관련해서 짧게 언급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게리 올드만이 베토벤으로 나온 '불멸의 연인(1994)'을 보는 것을 추천할 수는 없다. 영화의 작품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거기에 게리 올드만이 연기하는 베토벤은 견디기 힘들다. 그가 영화 속의 누군가를 연기하면 영화의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게리 올드만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롤랑 조페 감독의 '주홍글씨(1995)'에서 그가 연기한 딤즈데일도 그랬다. 그의 영화 보는 안목이 문제인 것인지 연기력이 문제인 것인지 늘 답답하게 느껴지는 연기자이다.


  '베토벤을 찾아서'는 베토벤의 생애와 음악을 조화롭고 균형있게 살펴볼 수 있는 다큐이기는 하다. 문제는 그 여정이 지루하고 맥아리가 없게 느껴진다는 데에 있다. 감독 필 그랍스키는 2006년에 '모짜르트를 찾아서(In Search of Mozart)'를 만들어서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회심작으로 '베토벤을 찾아서'를 뒤이어 만들었다. 음악가 전기 다큐로서 사실에 충실하고, 여러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담아낸 것은 좋다. 그런데 이 다큐에는 '상상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베토벤의 생애에 대한 무슨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라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관객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영화적 장치에 대한 고민이 없다. 하다못해 재연 배우라도 좀 써서 볼거리를 만들던가. 이런 고지식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다큐는 일반 관객들까지 아우르는 확장성을 갖기 어렵다.


  그런 미진한 부분이 있기는 해도 클래식 음악 팬들에게는 볼만한 다큐이기는 하다. 로날드 브라우티검이 포르테 피아노로 연주하며 설명해주는 베토벤 음악의 세계, 아름다운 외모와 재능이 함께 빛나는 피아니스트 엘렌 그뤼모, 이안 보스트리지가 부르는 아델라이데,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교향곡 9번 '합창'까지 놓칠 수 없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피아니스트들이 실황 연주에서 악보없이 암보로 연주하는데, 브라우티검은 악보를 놓고 연주하는 것이 내 눈길을 끌었다. 잘 정돈된 실황 연주와 함께 리허설 장면들을 비중있게 넣은 것도 생동감을 부여한다.


  이 다큐는 인터넷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데, 영어 자막이 없다. 그런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베토벤을 좀 더 깊이있게 알고 싶은 이들이라면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 재미가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물 없이 고구마를 먹으려면 천천히 먹어야 하는 것처럼, 이 다큐도 참을성있게 보고 나면 나름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감독 필 그랍스키는 이 다큐에 이어 '하이든을 찾아서(In Search of Haydn. 2012)'도 만들었는데, 그다지 볼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사진 출처: laemm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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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영화사 수업을 담당한 선생은 일본에서 일본 영화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였다. 그 선생이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과 동기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들 가운데에는 그런 것이 있었다고 했다.


  "왜 영화를 항상 그런 식으로 봐요?"


  선생은 일본 영화 속에 내재된 전체주의적 사고 방식, 집단주의와 가족주의, 식민주의에 대한 향수와 같은 맥락을 늘 놓치지 않고 보았다고 했다. 그건 식민 지배의 역사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영화 속에서 읽어내는 것이 일본인들의 눈에는 다소 낯설고 불편하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함께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하나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법은 각 사람이 가진 문화적 배경, 그리고 경험의 층위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내가 한국인으로서 일본 영화, 특히 전후의 일본 영화를 보는 것도 서구인들이나 일본인들과 다를 수 밖에 없다.


  오늘, 시미즈 히로시 감독의 1937년작 '바람 속의 아이들(風の中の子供, Children in the Wind)를 보았다. 그 한 편으로 리뷰를 쓰기에는 뭔가 좀 심심하고 모자른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나오는 비슷한 영화를 하나 더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보게 된 영화는 이나가키 히로시의 1948년작 '손을 잡은 아이들(手をつなぐ子等, Children Hand in Hand)이었다. 이 영화는 도저히 자막을 구할 수가 없어서 자막 없이 보았다. 둘 다 흑백 영화이고,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화질과 음질의 상태도 그리 좋지 못하다. 별 다른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본 영화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거나 연구자들이나 볼 법한 영화들을 그렇게 두 편 보았다.


  '바람 속의 아이들'에는 예기치 못한 송사에 휘말린 아버지의 부재를 겪는 어린 두 형제가 나온다. 아이들의 연기는 그렇게 세련되지도 못하지만, 뭔가 날것 그대로의 생생함과 활기가 있다. 주인공 형제들과 동네 아이들은 영화 내내 뛰어다니면서 역동적인 에너지를 보여 준다. 그런데 그걸 보는 것이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1937년이면 조선은 식민지 수탈이 본격화되면서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때인데, 일본 본토의 애들 얼굴 속에는 그 어떤 고통과 괴로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 젠타와 삼페이 형제의 집 앞의 큰 나무 맨 꼭대기에는 일장기가 늘 펄럭이는데, 두 형제는 그 나무에 자주 올라서 동네를 바라본다. 나는 '바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도 영 마뜩잖다. 물론 이 영화는 일본의 아동 문학가 츠보타 죠지의 소설을 영화한 것으로 '가미카제'의 '바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손을 잡은 아이들'도 역시 원작이 있다. 원작 소설은 1944년에 발간되었는데, 이 작품은 특이하게 발달 장애를 가진 아동이 주인공이다. 소설을 쓴 이가 특수 교육에 종사한 교육자였다.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나카무라'는 선생의 무관심과 또래의 이지메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다. 재봉일을 하는 부모는 고민 끝에 아들을 받아주는 다른 학교로 전학시킨다. 나카무라를 맡게된 담임 선생(류 치수 분)은 학급 아이들을 다독여가며 나카무라가 잘 지내도록 만든다. 그런데 '야마다'라는 못된 아이('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를 생각하면 된다)가 전학오면서 나카무라의 신세는 동네북으로 전락한다. 온갖 괴롭힘을 당하는 와중에, 착한 아이들이 힘을 합쳐 나카무라를 보호하고 야마다를 응징한다. 그 과정에서 담임 선생은 약간 방관자적인 위치에 서있다. 결국 영화의 결말은 아이들이 서로 우정을 회복하고, 나카무라는 무사히 중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1948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패전의 굴욕과 고통의 그림자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나카무라의 아버지는 군인으로 참전하게 되는데, 그가 자신의 아들을 생각하며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는 학교의 벽에 붙여져서 아이들이 모두 읽어야 하는 감동적인 편지로 나온다. 영화는 장애를 가진 아이조차도 사랑과 관용으로 대한다는 그 당시 일본의 교육 제도와 교육자에 대한 약간의 자화자찬 같은 느낌도 준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베푸는 국가와 학교, 선생에 대한 보은을 잊지 말라는 훈계의 뜻이 담겨 있다. 나카무라의 어머니는 아들을 재우기 전에 나카무라에게 아버지와 선생님을 생각하며 두 번 인사하게 한다. 마침내 아들의 졸업식 날, 학교를 나오는 길에 나카무라의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학교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한다. 그 장면은 전쟁을 치루는 당시의 일본 사회와 구성원들이 어떻게 기능하고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모습 같다.


  시미즈 히로시는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일련의 영화들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의 영화들에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누군가는 그 어떤 역사적인 배경을 생략하고 그냥 맘편히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것이 어려웠다. '반딧불이의 묘(1988)'가 보여주는 전쟁 피해자로서의 일본 국민들, 그 이기적인 감상주의가 우리 나라의 관객들에게 비판받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이다. 어떤 텍스트들은 그것을 둘러싼 시대적, 사회적 맥락을 지운 채로, 마치 온전한 진공 상태로 보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


  이나가키 히로시는 미후네 도시로 주연의 '미야모토 무사시(1954)'로 유명한 감독이다.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후의 유명한 일본 영화 감독들은 1930년대와 40년대에 일본 정부의 검열 하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선전 영화들도 많이 찍었다. 물론 그런 작품들 속에서도 특유의 예술성과 반전 메시지가 보여는 영화들이 있기도 하다. 그러한 배경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한국인으로 그 시절의 일본 영화들을 그냥 맘 편히 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오늘 본 두 편의 영화들도 그랬다. 분명히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아이들의 세계를 그린 영화들임에도 거기에는 그 당시의 일본 사회와 국가의 모습이 명백하게 투영되어 있다. 그런 맥락을 제거하고 순전하게 영화 그 자체만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피식민지 경험이 없는 서구인들이나 다른 제 3세계의 관객들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나오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사실 그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그려내고 있지는 않다. 어른들과 세상에 상처받거나, 바깥 세상의 권력 관계를 답습하고 어쩌면 더 잔혹해질 수 있는 그들만의 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어른들과 세상은 거울과도 같아서 그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다. 일제 시대의 일본 영화들 속의 아이들 또한 별 다를 게 없다. '바람 속의 아이들'과 '손을 잡은 아이들'에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그 시대를 읽어내는 일은 비평을 하는 이들의 몫으로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영화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다층적 의미와 역사와 이야기가 있으며, 그것을 놓치지 않은 것이 좋은 관객으로 영화와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commons.wikimedia.org 영화 '손을 잡은 아이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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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사람들이 돈에 미친 것 같아요. 오늘 보니 사무실 사람들 점심 먹고 죄다 스마트폰으로 주식 시황 보고 있더라구요. 직원 하나는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은)해서 대출을 받았는데, 마침 20년된 아파트 매물 나온 거 본다고 점심도 못먹고 나갔다 왔어요."


  얼마 전, 가끔 들르는 커뮤니티 사이트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읽었다. 주식과 집값 이야기 빼면 요새 웬만한 사이트 게시판이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1952년 영화 '번개(Lightning)'를 보면서, 문득 그 게시판 글을 떠올렸다. 그의 영화 가운데 이토록 '돈' 이야기가 많이 나온 영화가 있었던가 생각해 보았다. 없었던 것 같다. '번개'의 인물들은 시종일관 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야기한다.


  각기 다른 아버지를 둔 네 명의 남매. 첫째 누이코는 탐욕스럽고 제멋대로이며, 둘째 미츠코는 착하지만 유약하다. 셋째 가스케는 파친코로 소일하는 실업자, 넷째 기요코는 관광 버스 가이드로 그 세 명과는 달리 가장 성실하고 강단있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누이코가 돈푼 꽤나 있는 빵집 주인을 기요코의 신랑감으로 소개하면서부터 그렇지 않아도 번잡스러운 집안이 더 시끄러워진다. 기요코는 남자의 됨됨이가 영 마뜩지 않은데, 돈이 궁한 누이코는 어떻게 해서라도 혼사를 맺게 하려고 한다. 그 와중에 둘째 미츠코는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는데, 아이를 데리고 나타난 남편의 내연녀의 돈 요구에 아연실색한다. 미츠코가 받게 되는 남편의 보험금에 눈독을 들이는 또 다른 사람으로는 언니와 남동생이 있다. 돈벌이가 시원찮은 남편을 팽개치고, 결국 빵집 주인과 눈맞아 살림차린 첫째. 딸에게 버림받은 사위를 어쩔 수 없이 거두는 기요코의 어머니. 이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진 기요코는 시 외곽에 하숙을 얻는다. 이 바람 잘 날 없는 집구석에 평화라는 것이 오기는 올까...


  '번개'를 보는 내내 나는 'こんじょう(根性)'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흔히 하는 말로 '곤조'는 '더러운 성질머리'로 쓰이지만, 원래의 뜻은 '타고난 성격', '성깔'의 의미이다. 아버지가 각자 다른 네 명의 아이를 키운 여자로서 기요코 엄마의 삶도 참 기구하다 싶기도 하다. 네 명의 자식들은 성깔도 제각각이다. 뭐랄까, 그 자식들의 면면을 보고 있노라면 그 아버지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첫째 누이코의 극성스럽고 뻔뻔한 모습, 둘째의 착하지만 근기없는 유약함, 셋째의 게으르고 대책없는 삶, 막내 기요코의 올곧은 품성과 따뜻한 마음. 그것이 그들이 타고난 삶의 조건이다. 그런 바탕을 가지고 자신들에게 닥치는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 그것이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나루세 미키오는 이렇게 제각각의 성격을 타고난 네 명의 동기간에게 '돈'이란 화두를 툭, 하고 던져주는 것 같다. 그리고 나서 그 인물들의 성깔이 어떻게 삶 속에 들어온 돈을 바라보고 풀어내는지 보여준다. 어떤 것이 더 나은지 정답은 없다. 삶의 방식은 다 다른 것이므로. 그렇게 삶을 휘젓는 그 '돈' 앞에서 고요함과 평화를 찾는 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기요코는 호젓한 시 외곽의 하숙집에서 비로소 앞날의 희망과 마음의 평안을 느끼지만, 갑자기 찾아온 엄마의 방문은 그 모든 것을 일순 흔든다. 마치 기요코가 엄마와 언쟁을 한 후 창 밖으로 보게되는 번개처럼.


  "왜 날 낳았어요? 엄만 애정도 없이 우릴 막 낳은 거죠? 마치 고양이 같아요. 살아가면서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어요."


  그렇게 퍼붓는 딸의 언사에 속이 상한 엄마는 흐느껴 운다. 결국 마음을 고쳐먹은 기요코는 엄마를 다시 따뜻하게 위로하고 그 두 사람은 다정한 대화를 나누며 집을 나선다. 그 마지막 장면은 진정한 화해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어설픈 봉합이며, 일시적인 멈춤과도 같다. 기요코의 동기들과 엄마는 여전히 돈에 목매는 삶을 살아갈 것이며, 그 분란에서 기요코는 결코 외따로 아무 영향도 받지 않고 살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요코가 꿈꾸는 화목한 가족의 모습을 하숙집 남매가 보여주지만, 그것에 기요코가 도달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기요코가 관광 버스 가이드로서 늘 아름다운 도시의 풍광을 기계적으로 소개할 뿐, 그 풍광을 마음 편히 감상하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그럼에도 영화의 마지막에서 기요코의 표정에는 자신감과 안정감이 묻어나온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을 모두 다 바꿀 수 는 없지만,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미래에 대해서 만큼은 우직한 걸음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요코의 타고난 천성이다. 기요코는 자신의 아버지가 엄마에게 주었다는 루비 반지가 가짜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진짜였다. 그 사실을 이야기하자, 기요코의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네 아버지는 거짓말을 모르시는 양반이었어."


  올곧고 성실한 성품을 지닌 아버지의 딸로서 기요코는 자신의 삶에 닥치는 어려움을 그만의 방식대로 헤쳐나갈 것이다. 느닷없이 내리꽂히는 삶의 번개는 어찌할 수 없지만, 그것은 순간이며 삶은 어떻게든 이어진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지만, 결코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 영화 '번개'는 그렇게 너저분한 삶의 풍광 속에서도 존재하는 한 줄기 희망을 이야기 한다.


 

*사진 출처: avoir-ali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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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름은 샤오윈. 올해 나이 스물 여섯. 별 볼 일 없는 시골 극단에서 노래를 부르며 웃음을 팔고 있지.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는 유부남인데, 딱히 죽고 못사는 사이도 아냐. 그냥 마음 둘 데가 없어서 그런 거지. 학교 선생인 우리 엄마는 나를 마치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셔. 극단에서 공연하고 버는 돈은 달리 쓸 데도 없고, 그냥 엄마를 드리는데 그걸 싫어하시는 것 같아. 그냥 사는 게 지겹고 그래. 그런데 요새 알게 된 마을의 조그만 녀석 샤오융이 자꾸 날 따라 다니네. 극단 사람들은 걔를 내 '꼬마 애인'으로 불러. 가만 보면, 이 심한 개구쟁이 녀석은 밉지가 않아. 가끔 난 얼굴도 모르는 그 아이 생각을 하곤 하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고 들었어. 어쩌면 내 인생이 이렇게 꼬여버린 건 그 아이가 생긴 이후부터였을 거야...


  중국의 여성 감독 리위의 2005년 영화 '둑길(紅顔, Dam Street)'은 16살에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생의 행로가 뒤틀어져 버린 젊은 여성의 삶을 담아낸다. 리위는 2012년작 '로스트 인 베이징(苹果, Lost in Beijing)'으로 급변하는 중국의 현실과 젊은이들의 모습을 대담하게 담아내었다. 이 작품의 일부 성적인 묘사와 몇몇 장면들은 중국 당국의 심기를 건드려서, 리위와 제작사는 한동안 영화 제작을 할 수 없었다. 그 이전 작품인 '둑길'에서는 도시가 아닌 시골, 그곳의 정체된 삶과 전근대적인 가치관 속에서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로스트 인 베이징'이 치열한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주었다면, '둑길'에서는 여성 감독으로서 인물들의 섬세한 내면 묘사와 깊이있는 연출이 돋보인다.


  샤오윈은 고등학교 시절, 동급생 왕펑과 사귀다 임신하게 되고 그 사실이 알려진 후 공개적으로 퇴학을 당한다. '헤픈 여자'라는 손가락질과 비난을 오물처럼 뒤집어쓴 채로 지난 십 년을 살아왔다. 천극(川劇, 사천 지방의 전통극)단에서 공연을 하며 살아가지만, 관객들은 공연 도중에 유행가를 부르라며 야유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저 매일매일을 겨우 숨만 쉬는 것처럼 살아가는데, 조그만 녀석 샤오융을 알게 된 이후로 웃을 일이 생긴다. '누나'라고 부르면서 자꾸 쫒아다니는 녀석이 귀엽기도 하고, 녀석의 얼굴을 보면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같다.


  영화의 첫 장면은 차가운 시냇물에 누워 있는 샤오윈의 물에 잠긴 얼굴이다. 결국 막달이 되어서 출산을 하게 된 샤오윈. 명예를 중시한 샤오윈의 엄마 쑤 선생은 딸에게는 아이가 죽었다고 하고, 아이는 먼곳의 지인에게 입양시킨다. 샤오윈과 엄마는 그렇게 아이의 존재를 잊고서 살아왔다. 그런데 아이는 그 두 사람 가까운 곳에 있었다. 10년 만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샤오윈과 쑤 선생은 충격을 받는다. 샤오윈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이 영화의 영어 제목 'Dam Street'은 마을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둑방길을 의미한다. 그 길은 샤오융이 사는 집 바로 밑을 지나가는데, 소년은 늘 그 길을 뛰어다닌다. 샤오윈이 남자 친구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도 둑방길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인 둑방길에 원치 않는 삶을 마지못해 살아가는 샤오윈과 어린 소년이 있다. 소년은 샤오윈이 자신을 낳아준 엄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결국 샤오윈은 둑길이 있는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예쁜 누나가 더이상 자신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간다는 것을 알게 된 샤오융은 슬프기만 하다.


  "누나, 저를 잊으면 안돼요."

  "안잊어. 나중에 나하고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그게 바로 너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샤오윈은 소년의 손을 자신의 눈, 코, 입, 마지막으로 이마에 대고 두 사람이 비슷한 외모임을 상기시킨다. 이 장면이야말로 관객, 특히 여성 관객에게 감정적으로 깊은 울림을 준다. 샤오윈과 샤오융의 만남과 이별에 이르는 과정은 말 그대로 '핏줄의 당김'이 어떤 것인지 절절하게 보여준다.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으나 결코 품에 둘 수 없었던 핏줄을 떠나야 하는 어미의 심정이 스크린 너머 흘러내린다. 


  영화의 중국어 제목 '홍안'은 아름다운 젊은 여성의 얼굴을 뜻한다. 극중에서 샤오윈이 분하는 천극의 여주인공 '화단(花旦)'은 요염하고 교태를 부리는 역으로 화려한 의상과 분장을 한다. 단아한 양가집 규수 역의 '정단(正旦)'이 검푸른 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것과 대비된다. '행실 바르지 못한 여자'로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고 살아온 샤오윈. '화단'은 그가 연기해야 하는 원치않는 삶의 배역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삶은 한 인간, 여성으로서의 자존감과 희망이 무너져내린 삶이었다. 내연 관계의 유부남 가족들이 공연 중에 난입해서 샤오윈을 마구 때리고 모욕을 주는 장면에서 샤오윈은 바닥에 내팽겨쳐진다. 누운 채, 슬프고 지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샤오윈의 표정은 영화의 첫 장면, 시냇가의 그 고통스러운 장면과도 겹쳐진다.


  샤오윈 역의 리우이와 샤오융 역의 황씽라오의 눈부신 연기, 리위 감독의 핍진성 있는 연출, 1990년대 개혁 개방의 시기를 지나는 중국 변방의 풍경, 그 모든 것이 '둑길'에 담겨있다. 이런 영화를 만나는 것은 마치 숨겨진 보석 상자를 발견하는 것과도 같다. 둑길에 흘려 보낸 샤오윈의 슬픔과 고통, 눈물과 희망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이들이라면 놓칠 수 없는 영화이다.



*사진 출처: cn.hanx.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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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2월 19일, 뉴욕의 재즈 클럽 Slug's Saloon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린다. 총을 맞고 쓰러진 사람은 유명한 재즈 트럼펫 연주자 리 모건(Lee Morgan). 그에게 총을 쏜 사람은 사실혼 관계의 부인 헬렌 모건(Helen Morgan)이었다. 엄청나게 많이 내린 눈 때문에 구급차는 늦게 도착했고, 모건은 결국 사망했다. 캐스퍼 콜린 감독의 다큐 '나는 모건을 죽였다(I Called Him Morgan, 2016)'는 그 두 사람의 삶과 사건에 얽힌 뒷이야기를 담아낸다.


  이 다큐의 주된 내레이션은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된 헬렌 모건의 음성으로 진행된다. 재즈 칼럼니스트인 래리 레니 토마스(Larry Reni Thomas)는 자신의 강의를 듣던 헬렌 모건에게 인터뷰를 요청했고, 8년 후에 이루어진 인터뷰를 2개의 테이프에 녹음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헬렌은 세상을 뜬다. 다큐에는 그렇게 이미 고인이 된 헬렌의 증언, 리 모건의 여러 지인들, 그리고 그 비극적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리 모건의 여자 친구까지 다양한 목소리가 나온다. 그 목소리들은 리 모건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트럼펫 선율을 배경으로 차분하게 그 사건이 일어난 그날 밤을 향해 흘러간다.


  사실 다큐의 우리말 제목은 상당히 자극적인데, 아마도 강렬한 인상을 주기 위해 그렇게 지었을 것이다. 이 제목은 메리 해런 감독의 영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1996)'을 떠올리게 만드는 지점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명한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에게 총격을 가한 과격한 레즈비언 작가 발레리 솔라나스, 전도 유망한 재즈 트럼페터를 총으로 쏜 부인. 그러나 이 다큐가 보여주는 이야기는 메리 해런 영화처럼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우리말 제목은 상당한 아쉬움을 남긴다.


  사건의 그날 밤. 재즈 클럽에는 리 모건의 여자 친구가 와있었고, 마침 클럽에 들른 헬렌은 그 장면을 보고 격분한다. 그리고 일어난 총격 사건은 어찌 보면 젊은 남편의 애인을 질투한 늙은 마누라(헬렌은 리 보다 13살 연상이었다)의 너저분한 치정 살인처럼 보인다. 다큐 제작자로서 그런 이야기는 '대박 아이템'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캐스퍼 콜린은 아주 좋은 균형 감각을 유지하면서, 결코 욕심을 내지 않고 이야기 뒤에 숨겨진 것들을 탐구해 나간다.


  테이프에 담긴 헬렌의 육성은 그 자신의 인생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 가난하고 불행한 가정 환경에서 나고 자랐지만,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해 나간 헬렌은 리 모건을 만나면서 삶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헬렌을 만날 당시의 리 모건은 잘 나가던 재즈 연주자에서 마약 중독자로 밑바닥 삶을 전전할 때였다. 그런 리를 헬렌은 다시 일으켜 세웠고, 그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다.


  "마치 어린 아들을 입양해서 키우는 것 같더군요."


  헬렌을 잘 알던 이웃은 그 시기의 헬렌의 모습을 그렇게 회고했다. 다시 화려하게 재기한 리 모건과 그의 모든 것을 보살피는 매니저 겸 부인의 역할을 자처한 헬렌. 잘 해나가는 것처럼 보였던 관계는 어느 순간부터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바람'이라는 말은 어떤 면에서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 두 사람은 법적 부부가 아니었으므로. 리에게는 단지 젊은 여자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대화가 통하는 여자 '친구'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 다큐에 나오는 리의 여자 친구는 매우 담담하게 리와 자신의 관계를 증언한다. 어쨌든 헬렌은 그런 리의 '외도'를 배신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향하게 만든다.


  결국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리 모건은 사망한다. 재즈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것은 크나큰 손실이었다. 다큐는 그 비극이 일어난 2월의 눈오는 밤으로 관객을 천천히, 조용하게 이끌어 간다. 배경 음악으로 깔리는 리 모건의 연주는 그 짧은 삶만큼이나 슬프고 쓸쓸하다. 그리하여 이 다큐의 마지막에서 관객이 만나는 것은 인생과 음악과 어떤 사랑의 모습이다. 자극적이고 통렬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캐스퍼 콜린은 다큐 제작자로서의 윤리 의식과 창작자로서의 상상력, 그 둘 사이의 절묘한 균형을 만들어 낸다. 그 결과 영화가 가진 본연의 의미, 즉 타인의 삶을 통해 인생을 성찰하는 데에 이른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음악 다큐의 최고봉은 여전히 빔 벤더스의 '브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1999)'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다큐에 나온 이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 오마라 포르투온도의 나이가 90이 넘었다는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음악 다큐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질 때가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 좋은 음악 다큐를 떠올릴 때, 'I Called Him Morgan'을 가장 먼저 기억할 것이다. 헬렌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성씨로 불렀다. 지극한 사랑으로 인생의 나락에서 일어난 남자는 결국 그 사랑 때문에 삶을 마감한다. 그 끔찍한 비극 뒤에 가려진 어떤 인생과 이야기를 음악에 담아 담담한 시선으로 관조하게 만드는 이 작품은 정말로 좋은 음악 다큐의 모범을 보여준다.



*사진 출처: facebook.com/icalledhimmor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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