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도입부, 시끄럽게 돌아가는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의 모습이 강렬한 비트의 음악과 함께 나온다. 오프닝 타이틀에 찍힌 'Directed by Paul Schrader'가 보인다. 내가 감독도 아닌데, 왜 그걸 보고 가슴이 뻐근해졌나 모르겠다. 아마도 영화 비평과 시나리오 작가로 글만 쓰다가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을 찍게 된 폴 슈레이더의 심정에 뭔가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이겠지. 1978년에 찍은 영화 '블루 칼라(Blue Collar)'는 폴 슈레이더의 영화 데뷔작이다. 각본은 그와 그의 형 레너드가 공동으로 썼다. 주연 배우로는 하비 카이텔, 리처드 프라이어, 야펫 코토가 나온다. 영화는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세 명의 친구들의 어긋난 우정과 파국을 그려낸다.

  지크(리처드 프라이어 분), 제리(하비 카이텔 분), 스모키(야펫 코토 분)는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서로 허물없이 지내며 삶의 고민을 나누는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돈'이다. 3명의 아이를 둔 지크는 소득 탈세로 국세청 직원이 찾아와서 체납 세금을 내라고 닥달을 받았다. 제리는 딸의 치아 교정기에 들어갈 돈을 마련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한다. 2번의 전과 경력이 있는 스모키의 관심사는 오로지 유흥이다. 여자와 마약으로 찾은 삶의 탈출구를 제리와 지크에게도 가끔씩 선사한다. 스모키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지크는 노조 사무실의 금고를 털자고 제안한다. 어설프게 결성된 3인조 강도는 사무실 금고를 탈취하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금고를 뜯어보니 돈이라고는 600달러뿐. 허탕을 쳤나 싶었는데, 지크는 노조의 비밀 장부를 발견한다. 장부에는 노조가 노조원들 몰래 기금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이자를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돈 대신에 그걸로 노조에 협박 편지를 보낸 지크. 지크가 노조 임원으로부터 간부 자리를 약속 받은 반면, 제리와 스모키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과연 이들의 앞날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영화는 시종일관 거칠고 고단한 하층 노동자의 삶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이른바 영어의 욕설 'F word'가 이렇게 많이 나오는 영화는 나도 처음 봤다(영화 전체를 통털어 158번이라고 한다). 영화에서 가장 많은 대사와 배역 비중을 가진 지크 역의 리처드 프라이어가 욕설의 절반은 담당한 것 같다. 당시 스탠드 업 코미디언으로 인기를 끌었던 리처드 프라이어는 자신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영화로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는 중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 출연하기 전에 찍은 1인 3역의 코미디 'Which Way is Up?(1977)'에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블루 칼라'의 배역에 더 의욕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 의욕이 너무 지나쳤다는 데에 있었다.


  그는 대본에도 없는 대사를 길게 만들어서 자기 비중을 높이려고 애를 썼다. 촬영 현장에서 그걸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영화 속에서 티격태격하는 캐릭터였던 세 명의 주연 배우들은 실제로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냥 말로만 싸운 것이 아니라 치고 박는 육탄전까지 벌어졌다. 이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바로 감독 폴 슈레이더였다.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첫 영화를 찍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진상 배우 하나가 나대서 난리를 치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 프라이어와 제일 많이 대립했던 하비 카이텔은 촬영 그만두고 중간에 가버리려고까지 했다. 골칫덩이 프라이어는 심지어 슈레이더에게 총을 들이대며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슈레이더의 정신적 고통이 극심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 진상 배우 프라이어는 영화의 연출까지 지가 해보려고 했던 모양이다. 영화가 흑인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강한 목소리를 냈다. 카메라에다 재떨이 던지고 난리치는 폭력이 난무했던 촬영 현장에서 폴 슈레이더가 어떤 모습으로 있었을지 생각해 보면 참 마음이 짠해진다. 초짜 감독의 드높은 꿈과 이상은 쪼그라들다 못해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영화에는 세 명의 주인공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과 적대감이 여실히 드러난다. 스모키의 죽음 이후 서로 대립하는 제리와 지크.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 속에서 고조되는 하비 카이텔과 리처드 프라이어의 갈등은 매우 사실적이다. 지크와 갈라서기 전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는 제리의 얼굴 표정은 진짜 더러운 뭔가를 응시하는 것 같다. 오로지 자기 분량 늘리기, 배역 돋보이기에 집착하는 프라이어에 카이텔이라고 별 수 있었을까? 심지어 이 영화는 포스터 마저도 리처드 프라이어의 얼굴만이 양쪽으로 나온다. 다른 배우들이 그렇게 쩌리 취급되었던 것은 '흥행' 때문이었다. 제작사는 인기 있는 프라이어의 이름에 기대어 돈을 벌고 싶었을 것이다.

  '진상 배우를 상대하는 법'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할까? 감독 폴 슈레이더는 그저 참고 견디는 수 밖에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슈레이더가 오죽이나 고생을 했으면, 이 영화를 개봉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보살 감독 슈레이더는 어쨌든 자기 몫을 해냈다. 촬영장에서는 지지고 볶고 난리를 쳤어도, 영화 속 이야기에는 모든 것이 온전하고 충실하게 담겨있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노조와 노조원 사이의 갈등, 권력을 가진 이들이 획책하는 노동 계층 내의 분열, 노동 현장의 문제, 이런 묵직한 주제들을 개연성 있는 서사로 풀어낸다. 진상 배우에게 그토록 시달리면서도 그런 완성도를 보여준 슈레이더는 분명 대단한 감독임에 틀림없다. 나에게 이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에 올라간 그의 이름이 유독 크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그런 데에 있었을 것이다. '괜찮아요, 폴, 당신의 이 영화는 정말 좋은 작품이에요!'라고 이 글을 끝맺고 싶다.       



*사진 출처: artforum.com 가운데가 리처드 프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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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 여배우 머틀은 오랜만에 연극 공연의 배역을 맡았다. 시범 공연을 끝내고 나오던 비오는 날 밤, 십대 여학생 팬이 사인 요청을 하고 머틀은 흔쾌히 수락한다. 머틀은 곧 차에 타고 떠나려는데 그 여학생이 길에서 차 사고를 죽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는다. 사건 이후, 머틀은 제대로 연기도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태가 된다. 이 때문에 연극의 연출가, 극작가, 제작자가 나서서 머틀을 어떻게든 도우려 하는데, 머틀의 상태는 갈수록 엉망이 된다. 마침내 연극이 정식 상연되는 오프닝 나이트 날, 주연 배우인 머틀은 공연 시작 전까지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 공연, 시작이나 할 수 있을까?   

연출가 메니(벤 가자라 분): 난 어떻게든 이 연극을 무대에 올려야 해. 골칫덩이 머틀이 말만 잘 들어주면 좋을 텐데...

  그냥 열성팬 여자애 사고로 죽은 일 가지고 왜 저러나 몰라. 원래 배우라는 인간들이 제멋대로인 건 잘 알고 있지만 말이야. 새벽 4시에 불안하다고 전화를 하지 않나, 마누라가 눈총 주는 것도 참아가며 징징거리는 소리 들어주었다구. 그렇지 않아도 마누라가 머틀하고 내가 무슨 사이가 아닌가 싶어서 잔뜩 신경 곤두서 있어. 대사를 제대로 외우지도 못하고 자기가 만들어 내질 않나, 힘들다고 술 퍼마시고, 도대체 머틀 쟤를 어떻게 하면 좋냐고. 프로의 세계에서 저런 모습을 보게 되다니, 내가 연극학과 학생하고 공연하는 건가? 진짜 돌아버리겠네...

극작가 사라(조안 블론델 분): 저 정신나간 여배우가 내 연극을 망치고 있어. 늙은 여자 배역이 싫다니, 자기 나이도 인정 못하고 정말 한심하네...

  작가가 목숨 걸고 쓴 대본이 우스운가 보네. 지 멋대로 대사를 바꾸다니. 자기는 폐경기 여자 역에 어울리지 않는다길래, 나이를 물었어. 대답을 못해. 내가 보기엔 몇년 있으면 그렇게 되겠구먼. 늙은 여자 역을 잘 해내면 진짜 늙어버릴 것 같대. 말이 되는 소리야? 대체 배우를 왜 하는 거야? 아무래도 그 사건 이후로 상태가 많이 안좋길래 귀신이라도 씌운 거 아닌가 싶었지. 아는 영매(靈媒)에게 데려가기까지 했는데 그냥 나와버리는 거야. 그러더니 한밤중에 내 집에 찾아와서 얼굴을 짓찧고 난리를 치더군. 진짜 미친 거야. 내가 이제까지 쌓아온 명성이 저 미친 여자 때문에 무너져버릴 것 같아. 이걸 어쩌면 좋냐구...

배우 모리스(존 카사베츠 분): 이 공연을 잘 해내고 싶어. 그런데 머틀이 계속 문제를 만들고 있어.

  그냥 난 연기에만 몰두하고 싶을 뿐이야. 우린 이미 끝난 사이야. 왜 자꾸 개인적인 감정으로 무대를 엉망으로 만드냐구. 뺨 때리는 연기가 기분이 나쁜지 나를 후려치고, 뺨 맞고 쓰러져서 난리를 쳐. 대본에 있는 걸 어쩌란 말이야. 여자애 죽는 걸 보고나서는 충격을 받은 것 같기는 해. 내가 뭐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술 취해 나한테 찾아와서 다시 시작하자고 하는데 이게 뭔가 싶네.

연출가 메니의 부인(조라 램퍼트 분): 남편 연극이 잘 되어야 할 텐데, 여배우가 속을 어지간히 썩이는 모양이네.

  새벽 4시에 전화하는 거 보고 좀 신경이 쓰이기는 했어. 저 세계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하긴 1년 전에 19살짜리 계집애하고 바람난 남편이란 인간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지. 싹싹 빌고 용서해달라길래 하는 수 없이 받아주기는 했지만 말야. 극장에 가서 볼 때마다 남편에게 허물없이 친하게 굴더군. 어휴, 그냥 공연 끝날 때까지만 내가 참자. 메니도 연극 때문에 잘해주고 그러는 거겠지. 근데, 어째 저 여자, 많이 불안해 보여. 저 상태로 간다면 연극이 제대로 올라갈지나 모르겠네.

여배우 머틀(지나 롤랜즈 분): 난 늙지 않았어. 왜 이딴 배역을 내가 연기해야되는지 모르겠네. 그래도 어떻게든 잘 해내려고 하는 내 맘을 아무도 몰라줘.

  죽은 여자애 장례식에 갔었어. 그 아버지가 나한테 그러더군. 아이가 있다면 여기 올 생각을 못했을 거라고. 그래. 난 결혼도 안했고, 아이도 없지. 17살 때부터 연기로 살아온 인생이야. 난 아직도 내가 젊고 괜찮다고 생각해. 그런데 늙은 극작가 여편네가 쓴 자기 이야기를 내가 연기해야 되는 거야. 이걸 내가 하는 게 맞는 걸까? 난 프로니까 어떻게든 해낼 거야. 내 방식대로 연기할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인데, 메니는 날 다그치기만 해. 왜 그걸 이해해 주지 못하냐고. 그렇지 않아도 죽은 여자애가 나타나서 날 괴롭히고 있어. 진짜 걔한테 맞았다니까. 무섭고 놀라서 집에서 뛰쳐나왔어. 결국 극작가 할망구가 소개해준 영매 찾아가서 그 애를 불러낼 수 있었어. 또 나를 때리길래 나도 죽기살기로 덤벼들었지. 이 연극, 그냥 그만두고 싶다.

       
  존 카사베츠의 1977년작 '오프닝 나이트(Opening Night)'는 연극 공연을 하게 된 여배우의 심리적 혼란과 두려움을 담아낸다. 이 영화에서는 'The Second Woman'이라는 연극이 매우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이런 이야기 속의 이야기, 극중극(劇中劇)의 형식을 통해 주인공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며 무엇이 '진짜 자신'인가를 찾아나간다.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카사베츠가 공포 영화의 장르적 속성을 차용했다는 점이다. 여배우 머틀이 목격한 죽은 십대 팬 낸시는 어떤 혼령이나 기운의 형태가 아니라, 실재하는 인물로 머틀에게 나타난다. 이 영화를 별다른 생각없이 보고 있던 관객들에게 그렇게 등장하는 낸시는 갑자기 '훅'치고 들어오는 주먹처럼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공포 영화, 심령 스릴러의 장르로 분류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여러 다양한 이야기의 얼개가 겹쳐있다. 중년 여배우가 겪는 심리적인 어려움, 연기와 경력에 대한 강박, 그 주변 인물들이 보여주는 쇼 비지니스 세계의 면면들, 이런 것들이 아주 흥미있게 펼쳐진다. 러닝타임 2시간 24분이 그리 길지 않게 느껴지는 속도감과 짜임새 있는 이야기 전개, 그리고 주연 배우 지나 롤랜즈의 경이로운 연기가 이 영화를 놓칠 수 없는 명작의 반열로 밀어올린다. 카사베츠는 'Faces(1968)', 'The Woman Under the Influence(1974)'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나는 이전에 감상한 두 작품 보다 이 영화가 그의 진정한 걸작이라고 느낀다. 카사베츠도 그 스스로 이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았다. 아내이자 예술적 동반자이기도 했던 지나 롤랜즈의 눈부신 연기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지나 롤랜즈에게 베를린 영화제 여우 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사진 출처: filmkuratorium.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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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생각엔 당신이 일 그만두고 아버지를 모셨으면 좋겠어."

  남자는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 간호를 위해 아내가 직장을 그만 두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 말에 순순히 '그래요, 여보'라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손씨 부인(소방방 분)은 어림없는 소리라며 남편의 요구를 일축한다. 손 부인은 마흔 살 생일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 시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그 혼란스런 와중에 시아버지는 치매 진단을 받는다. 남편은 아버지 문제라면 손을 내젓는 자신의 동생들에게는 별 말을 하지도 못하면서, 아내에게 그 일을 미루고 싶어한다. 화장지 회사에서 잔뼈 굵은 실무자로, 집에서는 남편과 대학생 아들 뒤치다꺼리, 이제는 치매 시아버지 수발까지 해야한다. 손 부인은 그 일들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홍콩 출신의 허안화 감독의 1995년작 '여인 사십(女人四十, Summer Snow)'은 갑작스럽게 주어진 커다란 삶의 과제와 씨름하는 중년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오늘날에도 나이든 부모의 병수발이 자식들에게 어려운 문제라는 점은 26년전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요새는 대부분 요양원과 요양 병원을 1차적인 선택지로 생각하고, 비용 분담이 자식들 사이의 갈등 요소가 되는 정도가 차이라고나 할까. 물론 '여인 사십'의 손 부인에게도 그 선택지가 있었고, 치매 증상이 심해진 시아버지를 어쩔 수 없이 시설에 맡긴다. 영화는 그 선택을 하기까지 손 부인이 겪는 일상의 힘듦을 마치 세밀화처럼 보여준다. 아무 데나 소변을 보고, 한밤중에 고래고래 지르는 시아버지를 어르고 달래는 일은 손 부인만이 할 수 있다. 남편도 아들도 별 도움이 안된다. 시아버지 수발도 힘든데, 직장에서는 컴퓨터를 잘 다루는 신입 여직원에게 밀려서 찬밥 신세가 되어가는 중이다. 어쩔 수 없이 주간 보호 센터에 시아버지를 보냈는데, 맘대로 밖으로 나가 길을 잃어버리는 일을 겪는다. 결국 요양 병원에서 지내게 된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집에 가고 싶다며 울먹인다.

  손 부인은 직장을 때려친다. 그 선택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것이 아니다. 함께 늙어가고 고통받는 한 인간으로서의 시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해야할 중요한 의무라고 자각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영어 제목 'Summer Snow'는 시아버지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꽃비를 시아버지가 눈이 내린다고 좋아한 장면에서 따온 것이다(히로스에 료코가 주연한 같은 제목의 일본 드라마가 하도 유명해서 이 제목으로는 영화 검색이 잘 안된다). 가족이 모두 모여서 주말 농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시아버지가 손 부인을 불러서 조용히 말한다.

  "인생이란 건 말이다, 기쁨으로 가득차 있는 거란다."

  그 부분의 영어 자막이 아마 'Life is full of joy'였을 것이다. 그 말을 하려고 감독 허안화는 손 부인의 고단한 사십을 그려냈단 말인가? 갑자기 말문이 턱하고 막히는 느낌이었다. '여인 사십'은 분명 가부장제 질서에 여성을 순응시키거나,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여성이 치루어야 하는 일방적인 희생을 옹호하는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영화는 손씨 부인이 내리는 결정의 배경에 자신의 소망과 욕구 대신 '가족'과 '화합'이라는 전통적 가치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애써서 감추는 느낌을 준다.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내는 책임감 있는 직장 여성, 좋은 아내와 엄마, 시아버지 병수발을 기꺼이 떠맡는 며느리, 이 모든 역할을 손 부인은 해낸다. 슈퍼우먼이 따로 없다. 손 부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슬리퍼는 여자가 신겨주어야 한다고 믿는 제왕적이고 독선적인 시아버지를 가장 잘 알고 챙겼던 시어머니, 치매 걸린 성질 고약한 남편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한 여사,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묵묵히 성실하게 감당한다. 그렇다고 해서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위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 한 여사는 남편에게 그렇게 말한다.

  "저 세상에서 만나면 난 당신 아내 노릇 안해요. 남편 역을 내가 할게요."

  섬김과 보살핌의 대상으로서의 '남성'. 이 전통적 가치관은 손 부인의 윗세대가 충실히 따른 것이다. 손 부인은 현대 여성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가부장제의 영향력 하에 놓인 인물이다. 그러므로 손 부인에게 사십 인생의 위기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은 '가족의 안정'이다. 직장을 그만 둠으로써 남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인생 살이에 미숙한 아들에게는 조언자로, 시아버지에게는 좋은 간병인이 되고자 한다. 이 선택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고 불편해 보인다. 그럼에도 손 부인의 결정은 시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말에 의해 보상받는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삶이야말로 기쁨 그 자체라는 말로 들린다.

  이 영화를 2021년에 다시 만든다면 손 부인은 어떤 선택을 할까? 동일한 선택을 한다면 이 영화를 보던 여성 관객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릴지도 모르겠다. 지금 시대의 손씨 부인은 자신의 직장을 그만 둘 일도 없으며, 치매 병증이 심한 시아버지는 가족과 상의하여 선택한 요양원에 보내며, 비용은 형제들 간에 공정히 분담하도록 할 것이다. 오래전 영화를 보는 일은 이렇게 시대와 가치관의 간극을 느끼게 만든다. '여인 사십'의 손씨 부인은 스스로 고달파짐으로써 가족의 문제를 떠안는 '해결사'의 면모를 보였지만, 2021년을 살아가는 어떤 손씨 부인에게는 삶의 '균형'과 책임의 '분담'이 중요한 가치이다. 허안화의 '여인 사십'은 그런 면에서 본다면, 가족주의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구시대적이며 진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hkmd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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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당신이 날 속이지 않기를 바랬어. 난 늙었다구. 만약 내가 17살 때 이런 사기를 당했다면, 까짓거 돈은 다시 벌면 그만이야.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 당신은 날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내가 모은 돈을 모두 털어간 거라구."

  여자는 자신을 등처먹은 사기꾼 놈팽이에게 그렇게 말한다. 허안화 감독의 2007년작 '이모의 포스트모던 라이프(姨媽的後現代生活, The Postmodern Life of My Aunt)'의 주인공은 중년 여성이다. 영화는 상하이에 살고 있는 이모 예루탕(사금고와 분)을 찾아가는 어린 조카 콴콴의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콴콴이 바라본 이모는 지독한 구두쇠로 꽤 괜찮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음에도 온갖 궁상에 찌든 삶을 살아가고 있다. 비록 사는 모습은 구질구질해 보여도, 이모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은 유일하게 자신 뿐이라며 돈푼깨나 있는 이웃들을 경멸한다. 그런 이모에게 답답함을 느끼며 가출해서 자작 납치소동을 벌이는 콴콴. 골칫덩이 조카 보내고 나서 좀 조용하게 사나 싶었는데, 계속해서 이상한 사람들만 꼬인다. 아픈 딸이 있다는 여자를 불쌍해서 집에 데려왔더니, 여자는 딸 병원비 마련한다고 자해공갈일을 벌인다.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 친해진 판지창(주윤발 분)은 알고 보니 사기꾼이다. 예루탕은 평생 모은 돈을 다 털린다.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서 발을 헛디뎌 큰 부상까지 입은 예루탕에게 화려한 도시의 포스트모던 라이프는 이어질 수 있을까...

  나에게 홍콩 출신의 허안화 감독의 작품은 이 영화가 처음이다. 감독의 다른 작품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영화 세계를 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면, 허안화 감독의 영화적 뿌리가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모의 포스트모던 라이프'의 시작은 매우 코믹하다. 돈을 아끼려고 한여름에도 냉장고를 쓰지 않고, 온집안의 전기 코드를 빼놓고 사는 이모. 그뿐인가? 준법 정신은 얼마나 투철한지, 동네 가게에서 길바닥에 생선 찌꺼기 버리는 것을 보고 공안에 즉각 신고한다. 그런 이모의 도시 생활은 꽤나 팍팍하다. 이웃의 소개로 얻은 부잣집 아이의 영어 과외 자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영국식 억양이라며 잘린다. 구두쇠이기는 해도 따뜻한 품성을 가진 이모를 그 도시의 사람들은 이용해 먹으려 든다. 이모의 삶은 전혀 '포스트모던'스럽지 않다. 가치관은 시대에 뒤떨어져 있고, 삶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으며, 사기꾼이 등처먹기 쉬운 어수룩한 중년의 여자일 뿐이다. 빛처럼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도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에 멈춰있는 나이든 여자, 이 영화의 외피는 코미디이지만 그것을 한꺼풀 벗기면 관객은 곧바로 엄혹한 현실로 진입한다.

  낙상 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예루탕에게 딸이 찾아온다. 너절한 놈을 남자 친구라고 데려온 딸은 엄마 간호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자신과 아빠를 버린 비정한 여자라면서 맹비난을 퍼붓는다. 예루탕의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어보니, 예루탕은 10년 전에 시골에 어린 딸과 남편을 내버리고 상하이로 와서 자신의 삶을 꾸려갔다. 영화 속에서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대학을 나온 예루탕이 일자무식의 노동자 남편과 결혼한 건 아마도 문혁 시기의 하방(下放)운동으로 인생이 어긋나서였을 것이다. 무지렁이 남편과 그 사이에서 낳은 딸을 인생에서 지우고 새출발을 하기 위해서 온 도시 상하이. 그나마 이어가던 도시의 삶은 사기꾼에게 돈을 털리고 나자 산산조각이 난다. 딸과 함께 시골로 돌아가는 예루탕이 차 안에서 바라보는 상하이의 밤은 화려한 불빛으로 어지럽다. 도시의 눈부신 밤과 늙은 여자는 더이상 함께 할 수 없다.

  이 영화에 흐르는 정서를 젊은 관객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영화는 중년의 여인에게 닥친 위기를 통해 늙어감과 그 비애를 담고 있다. 감독 허안화는 급변하는 도시와 그 삶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구세대가 겪는 혼란과 어려움을 상하이라는 고도로 상업화된 도시와 대비해서 보여준다. 영화 초반에는 그렇게 나이들어 보이지 않던 이모는 사기를 당하고, 온몸이 부서지는 부상을 겪으면서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리며 확 늙은 모습으로 변한다. 젊음과 영악함, 냉정함을 갖추지 못한 이모는 애초부터 거대한 도시의 삶에 맞는 이가 아니었다. 도시에 처음 왔을 때 품었던 꿈들은 사라졌으며, 몸은 늙어버렸고, 어렵게 모은 돈은 사라졌다. 어떻게 할 것인가? 여자는 자신이 버렸던 그 시궁창과 같은 과거의 삶으로 다시 돌아간다. 나이든 관객들에게 이모의 포스트모던 라이프의 몰락은 공포 영화처럼 보일 법도 하다. 그들에게 이 영화는 늙어감에 대한 고통스러운 성찰을 선사한다.

  이모 역을 연기한 사금고와의 연기가 매우 좋다. 젊음과 미모가 없이도 화면을 장악하는 꽉 찬 감정의 연기가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사기꾼 역으로 나온 주윤발의 연기는 뻔한 듯 하면서도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유들유들하고 뻔뻔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저 사람은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천하의 사기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싶기도 하다. 마지막에 떠나는 장면에서 트렌치 코트 휘날리는 뒷모습까지 매력이 흘러넘친다. 배우들의 충실한 연기와 함께 히사이시 조가 담당한 영화의 음악도 흘려버릴 수 없다.    



*사진 출처: itpworldword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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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동안 시사 주간 잡지를 구독한 적이 있었다. 그 잡지들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영화는 중간부터 보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잡지는 그것이 가능하다. 이런 미니시리즈도 뭔가 처음부터 보는 것이 답답해서 전번에 3, 4편을 먼저 봤다. 그리고 이번에 1편과 2편, 5편과 6편을 몰아서 봤다. 각각의 제목은 이렇다. 1편 'Gumbo(To 1917)', 2편 The Gift(1917-1924) , 5편 Swing: Pure Pleasure(1935-1937), 6편 Swing: The Velocity of Celebration(1937-1939). 1편과 2편은 재즈의 기원과 초창기의 이야기, 5편과 6편은 스윙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뉴올리언스(New Orleans), 재즈의 시작과 그 전설적인 도시를 떼어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870년대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 노예들이 향유하던 음악이 있었다. 이른바 '슬레이브 뮤직(Slave Music)'. 그 음악은 재즈의 기원을 이루는 하나의 물줄기이다. 거기에 여러 다른 물줄기들이 합쳐진다. 캐리비안 출신의 크리올(Creole)들의 음악, 흑인 영가, 노동요가 섞인다. 1편의 제목 'Gumbo'는 미국 남부 지방에서 먹는 온갖 종류의 식재료를 넣은 잡탕 수프를 의미한다. 그것처럼 재즈는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섞인 곳에서 시작되었다. 재즈 초창기에 크리올 음악가들의 역할은 매우 컸다. 크리올은 흑백 혼혈로 옅은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고, 꽤 높은 생활 수준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흑인들 보다는 우월하다고 느꼈던 그들의 정체성은 남북 전쟁(Civil War)을 거치면서 변화가 생긴다. 백인들에게 크리올들은 흑인과 같은 열등한 이들이었다. 그렇게 크리올 음악가들이 재즈 음악계에 편입되면서 재즈는 원시적이고 단순한 가락에서 음악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재즈는 시간이 갈수록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다양한 재즈 밴드들이 쏟아져 나온다. 마치 재즈 밴드의 춘추전국시대처럼 다양한 밴드들이 활동하게 되는데, 그것은 재즈가 하나의 거대한 음악 산업으로써 자리잡았음을 의미한다. 밴드들은 레코드 녹음을 비롯해 미국 전역을 순회 공연하며 돈을 끌어모았다. 물론 밴드를 운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기에는 사업적인 감각이 필요했는데, 그걸 제대로 해내는 음악가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백인 재즈 악단을 이끌었던 클라리넷티스트 베니 굿맨(Benny Goodman)과 뛰어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의 밴드는 양대 산맥처럼 자리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시대의 재즈 언어, 스윙을 만들고 이끌어 간다.

  인종(Race) 문제는 재즈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주제를 형성한다. 재건 시대를 거치면서 흑인들에게 주어졌던 자유와 권리는 서서히 박탈되고, 1896년에는 흑백 분리가 법제화되었다. KKK단의 창설을 시작으로 흑인에 대한 린치가 공공연하게 자행된다. 그 시기를 거치면서 재즈 뮤지션들은 흑백 차별이 심한 남부에서 벗어나 시카고와 뉴욕으로 진출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빌리 할러데이(Billie Holiday)가 부른 'Strange Fruit'이다. 린치로 죽은 흑인의 시체를 나무에 달려있는 '이상한 열매'로 비유한 이 노래는 재즈로 외친 강한 정치적 목소리였다. 그 시절, 흑인 뮤지션들은 백인 뮤지션들과 같이 공연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베니 굿맨은 뛰어난 흑인 뮤지션들과 같이 공연하기도 했지만, 그런 그의 의지는 외부의 시선과 압력에 의해 좌절되었다. 대중은 흑인과 백인이 같은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흑인 뮤지션들이 백인들 보다 적은 출연료와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그런 시대의 어려움 속에서 재즈는 위대한 천재 뮤지션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을 영접한다. 2편 'Gift'는 이 순전한 재능의 대스타를 다룬다. 1901년에 태어난 암스트롱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온갖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세계를 보고 듣고 자랐던 거친 꼬마는 자신의 생애 전체를 재즈의 언어를 만들어 나가는 데에 바친다. 그의 삶이 재즈의 역사 그 자체가 되었다. 젊은 시절, 마피아 매니저에 혹사당하기도 했던 암스트롱은 유능한 새 매니저 조 글레이저를 맞이하며 연주와 음반 제작을 순조롭게 이어간다. 다큐에서 트럼펫 연주자 윈튼 마살리스의 인터뷰가 무척 돋보이는데, 그는 암스트롱에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마살리스는 입담도 좋을 뿐 아니라, 트럼펫으로 연주도 직접 보여줌으로써 다큐를 보는 재미를 더한다.

  강렬한 비트와 춤에 적합한 재즈 음악, 스윙 시대를 이끌었던 대표적 밴드 리더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는 스윙의 심장처럼 자리하고 있다. 부드럽고 편안하며 듣기 좋은 재즈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카운트 베이시는 완벽하게 구현해낸다. 내가 재즈를 처음 접하게 된 것도 카운트 베이시 악단의 연주였다. 일반인들이 재즈 음악에 바라는 모든 것을 담아낸 그는 스윙 재즈의 중심에 자리한다. 그리고 이 시대의 빛나는 여성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를 빼놓을 수 없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딛고 재즈 가수가 된 엘라 피츠제럴드는 유명한 칙 웹(Chick Webb)의 악단에서 자신의 음악 경력을 쌓아간다. 밴드 리더 칙 웹은 피츠제럴드의 재능을 무척 아꼈는데, 그는 안타깝게도 34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엘라를 잘 보살펴 달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엘라는 보살핌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칙 웹 밴드는 곧 엘라 피츠제럴드 밴드가 되었고, 그 인기는 갈수록 커져갔다.

  클래식 음악팬들에게 잘 알려진 조지 거슈인도 잠깐 등장한다. 그의 '랩소디 인 블루(Rhapsody in Blue)'는 재즈와 클래식의 절묘한 조화로 여겨진다. 이렇게 다양한 뮤지션들이 재즈의 언어를 계속해서 변용해가는 가운데 재즈의 역사는 더욱 풍성해지며 그 영역을 확장해 간다. 물론 재즈 음악의 진화는 시대와 맞물려 있었다. 이제 어두운 시절이 다가온다.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려는 시점이었다. 풍요와 번영의 시기를 함께 했던 스윙의 열풍은 사그라든다. 충격과 혼돈의 시대를 재즈는 어떻게 지나갈 것인가? 다큐는 아직도 4편이나 더 남아있다.     



*사진 출처: pbs.org 가수 빌리 할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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