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멜리사 레오 분)에게는 꿈이 있다. 지금 살고 있는 거지같은 트레일러 집에서 벗어나 크고 멋진 새 트레일러 집을 장만하는 것. 어느 날 아침, 레이가 어렵게 모은 목돈을 들고 도박 중독자 남편은 집을 나가 버린다. 동네 천냥마트에서 파트 타이머로 일하며 아들 둘을 키우는 레이에게는 새 집이고 뭐고 당장 하루벌이가 급하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된 원주민 릴라(미스티 업햄 분)가 밀입국자를 캐나다 국경 근방에서 데려오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명백한 범죄행위이지만 한번에 1200달러를 받는 일에 대한 유혹은 레이를 혹한의 얼음강으로 내몬다. 차 트렁크에 밀입국자 2명을 싣고 얼음강을 가로질러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돌아오는 여정이 결코 쉬울 리가 없다. 릴라가 국경 수비대의 요주의 인물로 찍혀서 릴라도 일을 그만두려는데, 레이는 마지막 한탕을 제안한다. 그러나 악덕 중개업자의 농간으로 일은 틀어지고, 국경 수비대의 추격을 받는다. 레이와 릴라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코트니 헌트 감독의 2008년작 '프로즌 리버(Frozen River)'는 삶의 어려움과 맞닥뜨리게 된 두 여성간의 연대를 그려낸다. 레이와 릴라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은 '엄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레이 얼굴의 주글주글거리고 깊게 패인 주름은 지난한 삶의 여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도박 중독자인 남편과의 지긋지긋한 전쟁과도 같은 삶. 레이는 먹을 것 살 돈마저 도박에 가서 탕진한 남편을 향해 총까지 쏜 적이 있다. 릴라의 남편은 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시체도 찾지 못했다. 하나뿐인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시어머니가 빼앗아서 키우고 있다. 릴라의 꿈은 아이를 데려올 돈을 모으는 것이다. 그렇게 돈에 절박한 두 엄마는 동업자가 된다.


  두 명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모성성'과 '연대'의 이야기를 그려낸 '프로즌 리버'는 나름대로 괜찮은 영화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서사는 빈약한 뼈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을 메꾸는 것은 레이와 릴라를 연기한 두 배우의 열연이다. 멜리사 레오는 자식을 위해 목숨을 걸고 얼음강으로 나서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강인함을 보여준다. 원주민 출신의 배우 미스티 업햄은 아이를 빼앗긴 엄마의 슬픔과 어떻게든 혼자서 삶과 직면하려는 용기있는 모습을 잘 표현했다. 두 여성이 처음의 적대적 만남에서부터 동업자,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은 영화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

  코트니 헌트 감독은 모호크족 원주민들이 캐나다 국경을 오가며 담배 밀수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나리오를 쓰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편 영화로 구상했던 것이 살을 붙여가며 장편 영화 제작에 이르렀다. 문제는 영화 제작비를 어떻게 조달하는가였다. 헌트는 투자자들을 설득하려고 영화의 시나리오를 긴장감있게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어떻게든 관객을 영화가 끝날때까지 붙잡아두는가에 촛점을 맞춘 것이다(출처 2008년 huffpost.com과의 인터뷰). 밀입국 과정의 몇몇 장면, 수비대의 검문 검색이라던가 파키스탄 밀입국자 부부와 아기의 사연 같은 장면이 그래서 덧붙여졌을 것이다. 백만 달러라는 초저예산의 독립 영화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비롯해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덕분에 6백만 달러라는 흥행 수익도 낼 수 있었다.

  영화의 현실 후일담은 이렇다. 첫 영화의 성공이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일까? 코트니 헌트는 2016년에 'The Whole Truth'를 찍었으나, 말그대로 쫄딱 망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무려 키아누 리브스와 르네 젤위거를 내세운 영화였다. 내 생각에 헌트가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더 이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레이 역의 멜리사 레오는 TV와 독립 영화를 비롯해 워낙 다작에 출연하는 배우로 자신의 경력을 충실히 쌓아가고 있다. 그리고 미스티 업햄이 남았다.


  이 영화로 촉망받는 배우가 된 업햄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을 이어갔지만, 서른 둘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떴다. '프로즌 리버'를 찍은지 6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였다. 원주민 보호 구역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업햄의 사인은 부검으로도 밝혀지지 못했다. 하비 와인스틴 프로덕션 소속 직원들에게 성적 괴롭힘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중에 흘러나왔다. 신인 여배우가 영화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치뤄야할 댓가 치고는 너무나 잔혹한 결말이었다. 그 누구도 삼키지 않았던 영화 속의 얼음강과는 달리 업햄은 인생의 얼음강에 빠지는 불운을 겪었다. '프로즌 리버'에서 릴라를 연기했던 미스티 업햄은 그 강에서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아마도 나는 이 영화를 비극으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사진 출처: nziff.co.nz  릴라 역의 미스티 업햄과 레이 역의 멜리사 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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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만약에 한창 잘 나가고 있는 배우라고 하자. 들어오는 시나리오들 가운데에는 찍으면 영화도 잘 되고 돈도 더 잘 벌게 만들어 줄 것 같은 영화가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배역은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고,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어째 흥행은 담보하기 어려워 보이는 것들도 있다. 아마도 대부분은 '될 것 같은 영화'를 선택하지 않을까? 그런데 스티브 맥퀸은 좀 달랐던 모양이다. 1969년작 '멤피스로 간 세 도둑(Reivers)'은 스티브 맥퀸이 주연한 영화들 가운데 좀 의외의 선택으로 보인다. 그는 주로 강한 남성성을 드러내는 액션 영화들에 출연했고, 관객들이 그에게 기대한 이미지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11살 소년이 주인공인 성장영화다. 노벨상 수상 작가인 윌리엄 포크너의 동명 소설이 영화의 원작이다. 'Reivers'에서 스티브 맥퀸은 소년의 여행을 이끄는 충실한 안내자 역할이다. 

  영화 제목 'Reivers'는 '훔치다'는 뜻의 'reive'에서 따온 것으로, 그 의미는 영화 속의 내레이션을 맡은 노년의 루시어스가 알려준다. 포크너의 마지막 소설인 'Reivers'는 어떤 면에서 작가의 소년 시절에 대한 회고담처럼 보인다. 소박하고 따뜻한 원작의 이야기는 영화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영화의 배경은 1905년 미시시피의 어느 마을이다. 부지런함과는 거리가 먼 일꾼 분은 집안의 큰어른 보스가 사들인 자동차 윈턴 플라이어에 눈독을 들인다. 차를 몰고 싶어서 안달이 난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주인 일가가 친척 장례식 때문에 며칠 집을 비우게 된 것. 이내 새 자동차로 주인집 도련님 루시어스(미치 보겔 분), 루시어스의 친척 네드(루퍼트 크로세 분)와 멤피스로 짧은 여행을 떠난다. 그런데 멤피스에서 네드는 몰래 자동차를 경주마로 바꾸고, 말주인과 내기를 하게 된다. 경마에 참여해서 이기게 되면 차를 돌려받을 수 있다는 것. 말 한 마리를 얻는다는 생각에 차를 넘긴 네드에게 화가 치밀지만, 분은 하는 수 없이 루시어스를 기수(騎手)로 내세워 경마에 뛰어든다. 과연 신출내기 소년 기수는 경주에서 이길 수 있을까?

  영화는 20세기 초반 미국의 풍요롭고 낙관적인 삶의 풍경을 담아낸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은 평화롭게 흐르는 강물과 목화를 따는 흑인들이 나오는 장면들이다. 작가 포크너는 미시시피 출신으로 자신의 작품 속 대부분의 배경은 미시시피를 중심으로 하는 남부였다. 남부가 어떤 곳인가? 남북 전쟁(Civil War)이 끝나고도 흑백 차별의 잔재가 뿌리깊게 남아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영화 속 흑인 네드가 보여주는 여유로움과 뻔뻔함은 뭔가 좀 특이하다. 그도 그럴 것이 네드는 부잣집 보스 일가의 친척이다. 윗대의 백인 농장주와 흑인 사이에 태어난 후손으로, 그는 루시어스에게는 엄연히 일가붙이인 셈이다. 네드가 영화 초반부에 자동차를 빼앗아 몰며 분과 큰 소동극을 벌이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마을에서도 네드의 행동에는 그 어떤 거리낌도 없으며, 마을 사람들도 그를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마을에서 좀 떨어진 멤피스에서 그는 'nigger'로 취급될 뿐이다. 그것은 흑인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단어이다. 안온했던 고향에서 조금만 떨어진 곳에 가도 네드가 받는 취급은 그렇게 달라진다. 포크너는 어린 소년 루시어스의 눈으로 인종 차별의 시대적 분위기를 그려낸다. 흑인을 '검둥이'로 부르는 도시, 부잣집 도련님 루시어스는 자신이 자라온 세상과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목격한다. 분의 매춘부 애인 코리를 통해서는 어른들의 타락한 모습도 보게 된다. 그렇지만 올곧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이 소년은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다. 루시어스가 분과 네드에게 보내는 신뢰와 우정은 짧고 강렬한 여행의 체험을 성장으로 이끈다.

  영화는 소박하고 담백하다. 소년의 성장담은 안전한 귀환으로 끝난다. 포크너 연구자들에게도 'Reivers'는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그저그런 소품으로 넘겨 버리는 것은 뭔가 아쉬운 느낌을 준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인종 차별이 격화되기 이전, 마치 미국의 '좋은 시절(belle epoque)'을 보여주는 것 같다. 부잣집 백인 도련님, 흑인 친척, 백인 일꾼이라는 기묘한 조합의 3인조가 함께 떠나는 밝고 신나는 모험은 관객들을 미소짓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이 영화는 비정하고 냉혹한 미국의 현대사로 진입하기 직전을 그려낸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KKK단이 구국의 영웅처럼 활개를 치고 다니며, 린치당한 흑인들이 나무에 시체로 매달리는 시대와 마주하게 될 터였다.

  순수하고 활기 넘치는 소년 루시어스를 연기한 미치 보겔, 생에 대한 넘치는 에너지로 가득한 일꾼 분을 연기한 스티브 맥퀸은 아주 잘 어울린다. 네드를 연기한 루퍼트 크로세도 그 두 배우들과 좋은 케미를 선보인다. 이 영화를 보면 스티브 맥퀸이 얼마나 즐겁에 영화를 찍었는지를 저절로 알게 된다. 자동차 광이였던 맥퀸은 영화에 나온 차 윈턴 플라이어를 영화 끝나고 나중에 사들이기까지 했다. 어쩌면 맥퀸은 자신이 좋아하는 자동차가 나오고, 남자를 넘어서는 여성 캐릭터도 없고, 아들같은 귀여운 소년도 나와서(그에게는 당시 9살된 아들이 있었다)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루시어스를 바라보는 맥퀸의 눈빛은 딱 아버지가 아들을 바라보는 그 눈빛이다. 스티브 맥퀸이 선택한 의외의 영화 'Reivers'는 그렇게 후대의 팬들에게는 작지만 빛나는 선물로 남았다.       



*사진 출처: goldderb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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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님 전 상서(上書)'

  칠흑같은 새벽에 도서관으로 나온 남자는 무거운 표정으로 만년필을 꺼내 고향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고리대금업자를 동생이 흠씬 두들겨 패고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언제적 드라마인가? 1987년 MBC에서 방영된 김수현 극본의 드라마 '사랑과 야망'의 초반부 이야기다. 시청률이 무려 70%를 넘었던, 드라마 작가 김수현에게는 경력의 최전성기를 열어준 작품이다. 이 34년 전 드라마를 KTV에서 다시 틀어주고 있다. 그 시절에 이 드라마를 열심히 보았던 이들에게는 꽤나 반가운 일이다.

  드라마는 춘천이라는 소도시를 배경으로 방앗간 집 아들 태준과 태수, 사진집 딸 미자, 그 주변 인물들을 둘러싼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그려낸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을 가지는 이 드라마는 억척스러운 어머니(김용림 분) 밑에서 자란 상반된 성격의 두 형제가 중심인물이다. 태준(남성훈 분)은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의 소유자로 성공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실현해 나간다. 가난한 집안 환경을 딛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 사법고시에 합격하지만 법조계가 아닌 회사에 취직해서 기업인의 길을 걷는다. 태수(이덕화 분)는 불같은 성미로 배운 것은 없지만 강한 의지와 돈에 대한 타고난 감각으로 자신의 사업을 일군다. 태준이 사랑하는 여자 미자(차화연 분)는 단신으로 상경해서 여배우로 명성을 얻지만, 태준 어머니의 반대로 두 사람의 사랑은 헤어짐과 만남을 이어간다. 결국 태준과 결혼하게 되지만, 일 중독인 태준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경력을 이어가지 못했다는 좌절감에 우울증과 알콜 중독에 시달린다. 이들의 얽히고 설킨 사랑과 야망의 대서사시가 대략 이 드라마의 줄거리가 되겠다.

  이 드라마를 오랜만에 다시 TV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의 느낌은 반가움이었다. 그 시절, 이 드라마는 중장년층에게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회고하게 만들면서, 강렬하게 대비되는 캐릭터들과 흡인력 있는 서사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지금처럼 다양한 매체의 볼거리가 있는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시청률 70%대는 거저 나온 것이 아니다. 34년이나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이 드라마를 보아도 인물과 대사, 이야기들이 나름대로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적어도 그 당시의 시청자들이 볼 게 없어서 그 드라마 나오는 시간에 TV 앞에 앉아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가난한 하층 계급의 인물들이 저마다의 성공 서사를 써내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창 경제 개발의 호황기에 접어든 중산층은 드라마 속에서 자신들의 과거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특히 태수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성공기는 굴곡있는 한국 현대사의 한 부분을 조망하게 해준다. 아무 가진 것도 없는 인물이 어려움 속에서 맨손으로 일구어낸 기업의 과거에는 1970년대의 석유 파동(Oil Shock)이 있는가 하면, 건설 산업 붐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태준이 보여주는 엘리트 기업인의 서사에는 그 어떤 집안의 뒷받침없이 자신만의 노력으로 얻어낸 성공이 그려진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의미의 '개룡남'의 선구적 캐릭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의 계층 상승은 자신의 노력과 약간의 운을 필요로 하는, 충분히 실현 가능한 목표였다.

  남성 시청자들에게 태준 태수 형제의 서사가 흥미있게 느껴졌다면, 여성 시청자들에게는 '미자'라는 캐릭터가 있었다. 사진집 딸로 알콜 중독자 아버지에게 구박덩이 취급을 받던 미자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며 인기 여배우라는 스타의 자리에 오른다. 이 또한 당시 여성들에게는 매력적인 성공의 서사였다. 그러나 직업적 의미에서의 성공이 인생의 성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다. 태준과의 순탄치 않은 사랑, 결혼 이후 불거진 갈등과 증오, 그런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적인 공허와 우울에 시달리는 미자는 화려한 성공 서사의 이면을 보여준다. 미자처럼 가부장제에 순응하지 못하는 또 한 명의 여성 캐릭터는 태수의 첫번째 부인 '정자'라고 할 수 있다. 전당포 집 딸로 태수를 쫓아다니며 자신의 사랑을 쟁취한 정자는 결국 태수의 외면으로 이혼에 이른다. 아이 둘을 놔두고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려 했던 정자에게 두번째 결혼은 삶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다.

  그들과 대비되는 여성 캐릭터들로는 태준 태수 형제의 여동생 선희(임예진 분)와 태수의 두번째 부인 은환(김청 분)이 있다. 선희는 차분하고 심지깊은 성격으로 자신의 삶을 일구어 가며, 결코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거나 가족의 뜻에 거스르는 법이 없다. 태준의 친구인 홍조와 결혼 생활을 순탄하게 이어가는듯 보이지만, 선희라고 마음의 괴로움이 없을까? 미자에 대한 연민과 애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편의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하며 사느라 속이 타들어간다. 과수원집 딸 은환은 좋아하는 태수와 결국 결혼에 이르지만, 전처 소생의 자식들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심지어 은환은 의붓 자식들 잘 키우기 위해 아이 갖는 것도 포기한다. 이런 인내와 희생의 여성 캐릭터들은 어쨌든 가부장제 하에서 보호받고, 그나마 덜 고통받는다. 

  이 드라마의 놀라운 점은 결말에 있었다. 태준은 기업의 회장으로부터 차기 후계자로 지명되는데, 이를 두고 미자는 일과 성공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야망으로 질주하는 태준을 비아냥 거린다. 그런 미자에게 태준이 주먹을 날리는 것이 이 드라마의 결말이었다. 쓰러지는 미자의 모습이 잡힌 정지화면에서 끝나는 이 결말은 당시로서는 정말이지 파격적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아니, 도대체 이게 뭐야?'하는 탄식을 했을 것이다. 그 장면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태준과 미자의 애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너무나도 화려했던 자신의 과거를 복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김수현은 2006년에 리메이크 드라마로 '사랑과 야망'을 다시 선보였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도 원작에 미치지 못했고, 원작에서 수정되고 덧붙여진 이야기들은 아귀가 맞지 않고 너덜거렸다. 무엇보다 리메이크 드라마의 실패는 이전과 달리 '시대가 변했다'는 데에 있었다. 2006년의 시청자들은 1987년의 시청자들이 아니었다. 리메이크 드라마는 마치 김빠진 맥주처럼 외면당했다. 오래전 원작 드라마의 시청자들은 리메이크작을 보면서 머릿속에서 1987년의 드라마를 자동재생시켰을 것이다.

  이 드라마로 배우 경력의 정점에 오른 차화연은 이듬해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떠났다. 은환 역의 김청은 청순하고 순종적인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었다. 홍조의 여동생 역으로 나온 김도연은 귀엽고 발랄한 이미지로 자신의 얼굴을 알렸다. 그리고 이 드라마로 성공적으로 안방 극장에 복귀한 배우가 하나 있다. '윤여정'이다. 미자의 후원자인 패션 디자이너 역으로 나온 윤여정은 조영남과 이혼한 직후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오랜 미국 생활을 끝내고 자신의 경력을 이어가려고 고군분투했던 윤여정에게 이 역은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중요한 기회였다. 김수현과 오랜 친구 사이로 윤여정은 이후로도 김수현 드라마에서 고정적인 배역을 맡았다. 이후에 이어진 너무 많은 드라마 출연으로 이제는 진부하게 느껴지는 윤여정의 연기는 '사랑과 야망'에서는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준다. 큰 인기로 온갖 화제를 몰고 다녔던 전설의 드라마 '사랑과 야망'은 KTV에서 평일 저녁 9시에 방영된다.  



*사진 출처: ksilbo.co.kr  미자 역의 차화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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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세상이 싫어!"

  두 딸들 앞에서 이렇게 악다구니를 쓰는 엄마 베아트리스(조안 우드워드 분)는 결코 좋은 엄마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집안은 정리되지 않는 물건들로 가득하고,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아서 더럽기 짝이 없다. 술과 담배를 입에 달고 사는 정서불안의 이 엄마는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도 버겁다. 그런 엄마를 부끄러워하고 경멸하는 첫째 딸 루스는 타고난 불안한 성정에 뇌전증(간질)까지 앓고 있다. 막내 마틸다(넬 포츠 분, 폴 뉴먼의 딸)는 조용하고 침착한 성품으로 그런 어두운 집안 분위기 속에서도 과학 과제에 흥미를 붙이며 스스로 마음을 다독인다. 영화의 제목 '감마선은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The Effect of Gamma Rays on Man-in-the-Moon Marigolds, 1972)'는 마틸다가 해낸 과학 과제물에서 따왔다. 퓰리처 상을 받은 폴 진델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만든 이 영화는 폴 뉴먼이 자신의 부인 조안 우드워드와 함께 본 연극에 깊은 감명을 받고나서 제작되었다.

  영화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여성이 딸들과 함께 살면서 일으키는 현실의 파열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경제적으로 곤궁한 베아트리스는 집안에 병든 노인들을 보살피는 하숙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자식들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이 여자가 노인 환자들이라고 제대로 보살피겠는가? 노환으로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려운 내니 할머니는 마치 생기없는 인형처럼 그 집안에 자리하고 있다. 첫째 루스는 죽어가는 노인들이 거쳐가는 자신의 집과 엄마를 부끄럽게 여길 뿐만 아니라, 학교 수업시간의 연극에서 조롱거리로 흉내내기까지 한다. 정신없는 엄마와 불안한 언니 사이에서 오직 마틸다만이 자신의 삶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키우는 토끼와 금잔화 과제가 마틸다에게는 질식할 것 같은 집에서의 작은 숨구멍이 되어준다.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그런 마틸다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퍼붓고 상처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조안 우드워드는 베아트리스 역을 미친 여자처럼 연기하지 않았다. 우드워드는 불안정한 삶 속에서 어긋나 버린 마음 때문에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없는 여자의 비애에 촛점을 맞추었다. 이 영화의 연기로 우드워드는 칸느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정작 우드워드는 베아트리스 배역이 지닌 어둡고 이그러진 면들 때문에 그 역을 진저리나게 싫어했다. 아내가 싫어하든 말든 폴 뉴먼은 뚝심있게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 자신이 연극 배우로도 여러 작품에 참여했던 뉴먼에게 연극은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고, 이 영화 제작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문제는 이 영화가 대중성을 확보하기에는 상당히 동떨어진 지점에 있었다는 데에 있다.

  같은 배우 출신의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상업성에 놀라운 감각을 보여준 것에 비해, 뉴먼은 그런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감마선은 금잔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의 인물들은 어둡고, 흔들리며, 현실의 괴로움 속에서 몸부림친다. 그나마 마틸다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희망의 느낌이 그 칙칙하고 무거운 영화의 분위기를 상쇄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너무나 약하다. 관객이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을 이해하기도 쉽지가 않은데, 이는 캐릭터의 불명확성에서 기인한다. 혹시 원작 희곡에 단서가 있을까 해서 희곡까지 찾아서 읽어보았지만, 희곡은 영화 보다 더 암울하다.

  다시 처음 대사로 돌아가 보자. 마틸다는 영화의 마지막에 이렇게 혼자 답한다. 

  "엄마, 난 세상을 싫어하지 않아요."

  원작 희곡에서는 이 부분이 다르게 나온다.

  베아트리스: 난 세상이 싫어, 이런 내 기분을 너도 알지?
  마틸다: 응, 엄마.

  마틸다는 감마선을 쬔 금잔화가 피어난 다양한 모습을 보면서 먼 우주에서부터 쏟아진 원소에 대해 생각한다. 그 심원한 기운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에 대해 자각한 마틸다는 세상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세상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마틸다의 대사는 마틸다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힘을 얻었음을 보여준다. 폴 뉴먼이 돈 벌 생각하지 않고, 이 영화를 제작하고 감독한 데에는 삶의 불안정성을 견디는 힘으로서의 희망을 말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진 출처: fromthefrontrow.net 베아트리스 역의 조안 우드워드와 마틸다 역의 넬 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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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1-04-09 16:39   좋아요 1 | URL
아, 저 이거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영화인데 여기서 또 만나네요.
원래 연극으로 공연되었다는 것도 영화를 보고나서 훨씬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암울한 환경 속에서도 토끼키우기와 금잔화 실험으로 자기 세계를 지켜나가던 마틸다를 보면서 이 영화가 희망을 말하는가 절망을 말하는가 혼란스럽기도 했었어요.

푸른별 2021-03-30 18:57   좋아요 1 | URL
hnine님은 이 영화를 보았군요. 전체적으로 무거운 분위기의 영화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마틸다가 세상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마지막 장면은 희망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들더군요.
 

 

  소년원에 수감중인 악바르는 이제 18살 생일을 맞았다. 친구 알리는 깜짝 생일 파티를 열어주지만, 악바르는 그런 알리에게 오히려 주먹을 날린다. 16살에 여자친구를 죽인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알리에게 18살은 바로 그 형이 집행되는 나이를 뜻하기 때문이었다. 그제서야 악바르의 상황을 알게된 알리. 사형을 앞둔 살인자라도 피해자 가족의 탄원이 있으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알리는 방법을 찾는다. 가깝게 지내는 교도관에게 부탁을 해서 잠깐의 휴가를 얻어 나온 알리는 악바르의 누나 피루제와 함께 그 집을 찾아간다. 지난 3년 동안 피루제가 온갖 노력을 해도 소용없었던 그 일을 알리는 해낼 수 있을까?

  이란의 감독 아쉬가르 파라디의 2004년작 '아름다운 도시(Shahr-e Ziba, The Beautiful City)'는 관객들을 낯선 이란의 현실로 안내한다. 종교가 모든 일상을 지배하는 이 나라에는 외부자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무척 많다.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영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The Separation of Nader from Simin, 2011)'를 한번 보자. 늙은 환자를 돌보기 위해 고용된 가정부는 여자인 자신이 남자 환자의 몸을 씻기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지 이맘에게 전화를 걸어서 묻는다.


  이 영화 '아름다운 도시'에서는 그 종교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살인자가 무슬림 남성인 경우 피해자 가족이 용서를 하면 사형을 면할 수 있다. 단, 피해자 가족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금전적 댓가(Blood Money)를 치루어야 한다. 말하자면 남자에게는 목숨을 건질 방도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 무슬림 여성이 살인자일 때에는 그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 여성은 어떤 경우에도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 그런 기준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널리 통용되는 Qisas, 코란을 바탕으로 성립된 관습적 처벌법에 명시되어 있다. 영화 속 악바르가 사형을 앞두고도 피해자 가족과 합의만 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알리는 친구가 죽인 여자친구의 아버지 집을 찾아간다. 죽은 딸에 대한 정의로운 처벌을 원하는 아버지 아블로카셈에게 사면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오히려 아블로카셈은 빨리 사형이 집행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악바르의 가족에게 목숨값을 지불하면 사형은 더 빨리 집행될 수 있다. 이 또한 Qisas에 명시된 것으로, 피해자가 여성인 경우에 사형을 받을 남자의 가족에게 돈을 지불해야 한다. 남자가 살인 피해자라면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이 사형이 집행된다. 이슬람 율법에서 여자의 목숨은 남자에 비해 덜 중요하다. 아블로카셈은 집까지 팔아서 그 돈을 마련해 얼른 악바르의 죽음을 보려고 애를 쓰는 판국이다. 그의 뜻이 완고하다는 것을 알지만, 알리와 피루제는 어떻게든 마음을 돌리려 애를 쓴다. 그런 그들에게 조력자가 생긴다. 아블로카셈의 아내는 다리가 불편한 딸을 데리고 그와 재혼했는데, 그 딸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남편에게 합의를 종용한다. 합의금으로 엄청난 돈을 요구받은 피루제는 세탁부 일로 겨우 먹고 사는 처지이다. 악바르의 사면은 아직 멀어 보인다.

  그런데 집을 드나들던 알리를 좋게 본 아블로카셈의 아내는 돈 대신에 알리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킬 궁리를 하게 된다. 알리는 친구의 목숨을 살리려면 원하지도 않은 결혼을 해야할 판이다. 알리는 피루제와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고,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피루제를 어떻게든 돌보고 싶어한다. 알리의 고민은 깊어간다. 아쉬가르 파라디는 아주 단순하게 시작한 알리의 여정을 촘촘하고 복잡하게 짜가면서 관객들을 이야기 속으로 확 밀어버린다. 정말 대단한 솜씨다. 자, 당신이 영화 속의 알리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친구를 위해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해서 평생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이 가장 소중하므로 그런 선택은 할 수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친구는 더이상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무려 '목숨'이 걸린 문제다. 그것을 모른 척 하고서 살아간다면, 알리는 남은 생애 동안 자신의 그 선택을 기억해야만 한다.

  자신의 여자 친구를 아무도 차지하지 못하게 하려고 살인을 저지른 악바르. 그런 악바르에게 딸을 잃은 아버지의 정의에 대한 절규, 살인자일지라도 소중한 동생의 목숨을 살리려는 피루제, 친구의 목숨값으로 자신의 인생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의 알리, 장애인 딸의 인생을 위해서 온당치 못한 요구를 태연하게 하는 아블로카셈의 아내. 그들이 갇혀있는 복잡한 윤리적인 딜레마는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들의 마음을 쉴 새 없이 헤집어 놓는다. 영화 속 인물들 모두는 자신들의 행동에 각자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다. 그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현실은 선과 악, 흑과 백처럼 명확하게 분리될 수 있는 영역에 자리하지 않는다.
 
  아쉬가르 파라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처럼 관객들을 불러모은다. 그 이야기 속에는 잘 알지 못하는 이란이라는 나라의 현실과 거기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모습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영화는 그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다. '아름다운 도시'에서 그는 윤리적 딜레마에 처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의 마지막, 알리는 피루제의 집 대문을 세차게 두들기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관객들은 알리가 어떤 선택을 했을지 결코 알 수 없다. 이 열린 결말은 놀라운 재능을 지닌 이야기꾼 감독의 그 이후로 이어질 영화들에 대한 예고편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iranianfilmempire.word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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