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재활용품 수거장의 업라이트 피아노(upright piano)
어린 시절에 피아노 학원을 6년 동안 다녔지만
내 피아노가 없어서 매일 학원에 가서 연습했다
당시의 피아노 가격은 백만 원 정도였다
중국집 짜장면이 육백 원 하던 시절
용돈을 모으고 모으면 언젠가는 피아노를 살 줄 알았다

살림이 어려워지면 엄마는 내 통장의 돈을 빼갔다
살림은 늘 주글거렸고 결코 펴지지 않았다
피아노가 사라졌고 피아니스트도 떠났다

피아노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 있다
나는 뚜껑이 열린 피아노의 건반을 쳐본다
피아노는 멀쩡한데, 손가락이 늙었고
내 집에는 피아노의 자리가 없다
몇 대의 김치냉장고가 거쳐가면서 남긴
새 김치통들이 방 한구석을 차지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나무로 된 피아노와 강철의 줄과 그 안의 펠트를 생각한다
빗물에 버려진 것들과 잊혀진 시간에 대해서도
꿈은 연약하고 녹슬기 쉽다
또각또각 피아노가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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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짜리의 시


당신의 시를 삭제할게요
쓰는 데 한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너무 성의가 없어요
머리에 피고름 나도록 언어를 연마해야죠
위대하신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시 창작 안내서를 펼쳐 기본기를 익혀요
비평가를 위한 시를 써요

고개를 빳빳하게 들면 안됩니다
스승님께 숙이고
독자들에게 숙이고
아, 그건 아닌가
독자들이 알아먹지 못할 시를 써요
그게 시에요
탁자, 위의 테이블(table), 을 걸어가요
문, 을 통과해서 도어(door), 를 열어요

진정성을 비웃어요
흉내내기의 달인이 되는 겁니다
레퍼런스(reference)를 기억하세요

책기둥을 부수고
정신머리를 챙겨요
한 시간 일 분이 지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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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올해의 마지막 미나리를 데쳤다
억센 뿌리가 찡긋, 웃는다
밤새 왼쪽 눈이 퉁퉁 부었다
왜 오른쪽 눈은 멀쩡한지 궁금하다
알레르기 안약을 두 눈에 한 방울씩 공평하게
인생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하루에 한 번씩 까먹는다

못난이 참외가 배송 중이다
얼마나 못생긴 참외가 올지 기대한다
소비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시오
분노의 상품평은 읽지 않은 것으로 한다
잘생긴 참외의 삶도 그 끝은 식탁이다

반팔 티셔츠를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꺼낸다
남색 줄무늬 티셔츠 하나면 충분하다
아프리카의 해변, 인도의 뒷골목, 인도네시아의 강어귀
미어터지게 누군가 버린 옷들은
긴 여행 끝에도 죽지 않는다

앞동 아파트의 커다란 개가 짖는다
세인트버나드가 무서워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조그만 강아지이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불안이
6월의 아침을 까칠하게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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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날씨


머리에는 안개가 끼어있다
눅눅해진 발바닥
한낮의 기온이 오르길 기다린다
불안의 미기후(微氣候)가
삼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예보관(豫報官)의 무능력은 해고되지 않고
TV화면은 우울한 웃음을 송출한다

하수구의 썩은 사과가
부엌의 기분을 측정한다
손바닥만 한 개수대의 창문
벚나무는 미친 여자의 얼굴이다

목이 부러진 선풍기를 켠다
붉은색의 모터는 튼튼하다
회전할 수 없는 삶
수영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어제의 일기장을 펴고
오늘의 날씨를 적는다
잠깐, 너의 안부를 생각한다
남루한 안락함 속에서 울기를 바란다

키보드에 커피를 쏟았다
킬리만자로의 농부가 하늘을 본다
커피나무에서 흉년을 수확한다
아직은 불모(不毛)의 계절
오지 않은 즐거운 일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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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散策)


저 나무는 왜 매실이 열리지 않는가
잠깐 생각하다가
저 나무는 벚나무였다
벚나무에는 버찌가 열리지
매실은 매화나무에
그렇게 살아가도록 되어있는 것

오른발이 2년 동안 아프더니
이제는 왼발이 아프다
고통의 총량은 일정하게 보존된다
나는 그 정밀한 법칙에 경탄한다
왼발을 천천히 끌면서
존재하지 않는 예외를 소망하며

쓸데없이 큰 정원을 가진 정원사
가지치기는 엉성하고
꽃들은 모두 제멋대로
그래도 샛노란 나리꽃은 눈물이 났다

시가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믿음의 법칙에는 배신의 상수(常數)가 
그래도 누군가는 오늘
너의 산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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