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기억 나시는지요? 방망이 깎던 노인... 옛날 생각하면서 잠시 읽어보시면 좋으실것 같아 올립니다.  물론 퍼온것입니다. ^^  수필을 참좋아하는 분들이 많죠. 아마 이런 맛이 있기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로 사람 사는 맛 말입니다.

 

방망이 깎던 노인

                   윤오영(尹五榮)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세간난 지 얼마 안 돼서 의정부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 가는 길에, 청량리역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에서 일단 전차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방망이를 한 벌 사 가지고 가려고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방망이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타야 할 차시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차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는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방망이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다 됐다고 내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방망이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商道德)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동대문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바라보고 섰는 옆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였다.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집에 와서 방망이를 내놨더니 아내는 이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집에 있는 것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니, 배가 너무 부르면 옷감을 다듬다가 치기를 잘 하고 같은 무게라도 힘이 들며, 배가 너무 안 부르면 다듬잇살이 펴지지 않고 손에 해먹기 쉽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엣날부터 내려오는 죽기(竹器)는 혹 대쪽이 떨어지면 쪽을 대고 물수건으로 겉을 씻고 곧 뜨거운 인두로 다리면 다시 붙어서 좀체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새 죽기는 대쪽이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죽기에 대를 붙일 때, 질 좋은 부레를 잘 녹여서 흠뻑 칠한 뒤에 볕에 쪼여 말린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한 뒤에 비로소 붙인다. 이것을 소라 붙인다고 한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접착제를 써서 직접 붙인다. 금방 붙는다. 그러나 견고하지가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며칠씩 걸려 가며 소라 붙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약재(藥材)만 해도 그러다. 옛날에는 숙지황(熟地黃)을 사면 보통 것은 얼마, 윗질은 얼마, 값으로 구별했고, 구증구포(九蒸九 )한 것은 세 배 이상 비싸다, 구증구포란 아홉 번 쪄내고 말린 것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다섯 번을 쪘는지 열 번을 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지금은 그런 말조차 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아홉 번씩 찔 이도 없고, 또 그것을 믿고 세 배씩 값을 줄 사람도 없다. 옛날 사람들은 흥정은 흥정이요 생계는 생계지만, 물건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물건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공예 미술품을 만들어 냈다.

 

 이 방망이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물건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노인이 앉았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동대문의 지붕 추녀를 바라보았다. 푸른 창공에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 때 그 노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방망이를 깎다가 유연히 추녀 끝에 구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 도연명(陶淵明)의 시구가 새어 나왔다.

 

 오늘 안에 들어갔더니 며느리가 북어 자반을 뜯고 있었다. 전에 더덕, 북어를 방망이로 쿵쿵 두들겨서 먹던 생각이 난다. 방망이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다듬이질하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만호도의성(萬戶 衣聲)이니 위군추야도의성(爲君秋夜 衣聲)이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40년 전 방망이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핵심정리>

갈래 : 현대수필(서사적 성격), 경수필

문체 : 우유체, 간결체,

성격: 교훈적, 신변잡기적, 회고적, 서사적(하나의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 형식)

표현

  * 적절한 예와 속담 등을 통해 지은이의 개성을 잘 드러냄

  * 비교, 은유, 인용 등의 표현 기교와 간결한 문체를 통해 경험담을 솔직하게 표현함

주제 : 장인정신의 고귀함

 

<작가소개>

윤오영(尹五榮 1907-1976) 수필가. 교육자. 서울 출생. 호는 치옹(痴翁). 서울 보성고등학교 교사 역임. 주로 토속적인 제재를 사용하여 동양적인 인생관의 가치를, 고전의 세계와 조응되는 한국적 정신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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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되다 2004-12-24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핵심정리, 갈래, 문체, 성격, 표현, 주제.... 얼마만에 보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웃음이 나와 올렸답니다. ^^

혜덕화 2004-12-24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아름답지만, 핵심정리를 보는 순간 웃음이 쿡 터졌습니다.

고맙습니다.
 

도반 여러분 안녕하세요. 요즘 자주 들어옵니다.  예전과는 다르게 할말이 자꾸 생각나서요. ^^



평생 사람이 먹는 양을 계산해보니 한끼에 500g으로 생각할때 100년을 산다고 하면 55톤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이 된다고 합니다. 식후 4시간정도가 되야 위가 음식물을 밀어내며 위장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12시간이나 걸립니다.  놀랍지 않는지요?  위장뿐만아니라 소장, 대장, 십이지장등등 소화관은


하루종일 쉴새없이 움직입니다.  감사하다고 나직히 말해봅니다.  너무감사하다고..


 이렇게 생각해보면 비단 소화관뿐이 아닙니다. 심장도 그렇고 폐도 그렇고 온몸에 셀수조차 없이 많은 세포들이 열심히 내몸뚱아리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구에서 , 우주에서 살고 있듯이 말입니다.


60조의 세포라하면 셀수 있는 수입니까? 셀수없이 많은 세포들이 전부 내 한생각에 영향을 받고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바로 내 몸뚱아리나라에서는 내가 대통령이요, 선장인 것입니다.  흥미로운 근운동역학이라는 분야가 소개된지는 한참 되었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진지는 최근일입니다.  데이빗 홉킨스 박사의 팔운동을 통한 영적인 수치측정도 그 한가지 예입니다만 쉽게 말해 o-ring 테스트와 같이 내 한생각에 따라 몸의 근육힘이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합니다.  한생각에 따라 근력이 달라질정도로 사람의 몸이란 섬세하고 정확한 것입니다. 아..또 딴데로 새었는데요 ^^; 


음... 하루 한끼, 즉 아침을 거르면 지난밤 저녁6시에 밥을 먹고 다음날 점심을 12시에 먹는다고 할때


18시간동안 위장이 쉴수 있게 됩니다. 단순히 생각해서요. 별것 아닌것 처럼보여도 여기에는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하루 1끼를 줄이면 일년이면 365끼를 줄일수 있습니다. 약 182킬로의 음식을 줄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것입니다. 일년의 1/3을 단식하는 것과 맞먹습니다. 위장은 아무리 좋은 것을 먹는 것보다는 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여기서 잠깐, 아침불식에 대한 좋다 나쁘다는 이견이 분분합니다. 하지만 제 경험과 환자분들의 경험, 그리고 제가 존경하는 수많은 의인들이 모두 최고의 건강법으로 아침불식을 권하고 있습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아침불식에 관한 연구가 많으며 건강법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늦게 일어나 입맛이 없을 때,  어젯밤 과식으로 아침밥생각이 없을 때, 피곤할때 등등 몸에서 밥을 원하지 않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습관상, 또는 몸생각한다고 밥을 입에 넣습니다.  그것은 가장 큰 폐해요, 질병을 만드는 지름길이요, 죄입니다. 저의 경우 첫 일주일만 조금 피로감,공복감을 느꼈을 뿐, 2년넘게 아침을 먹지 않고 있으며 이것이 제 건강법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침불식을 하면 절대로 살이 찌지 않습니다. 물론 아침불식후 오후 4식같이 더 많이 먹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구요.


운동은 일주일에 2-3번이 적당합니다. 괜히 목표를 높게 설정하고 몸과 마음을 모두 혹사 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헬스장 다니시는 분들 일주일에 2번만 나가도 스스로에게 칭찬해주세요. 당연한 것이고 그정도로 충분합니다.  운동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중요한 것은 걷기입니다. 걷기만 하루 1시간해도 잔병치레가 없어집니다.  아...다시 먹는 얘기로 돌아와서요 .. 하루 한끼를 줄이게 되며는 중요한 것이 먹는 것의 질이 됩니다. 아주 중요 합니다. 인스턴트나 밀가루는 안돼고요. 반드시 현미잡곡을 드셔야 합니다. 현미 50%이상 콩30%정도 잡곡20%를 배합하셔서 꼭꼭 씹어서 먹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태초부터 해온 식습관이요. 자연스런 식사법이며 지금 서구에서 난리가 나 연구하고 있는 동양식사법입니다.


속이 비면 정신이 맑고 또렷해 집니다. 경험해보면 압니다. 머리가 너무 맑고 투명해 오전이 너무 즐거워집니다. 이때 책을 읽으면 책장이 불나게 넘어갑니다. 그만큼 집중상태가 되는 것이죠. 사람이 하루3끼를 먹은 것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짧은 기간입니다. 요즘 많은 환자들이 영양과잉상태이며 위장질환이 많습니다. 


밥을 먹는 것은 아궁이에 뗄감을 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밥을 연소(소화)시켜서 에너지를 얻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뗄감이 들어가면 연소가 잘 않되고 연기만 많이 생깁니다. 소화가 않되면 흡수도 잘 못합니다. 왜냐하면 작업량이 많기 때문에 대충대충 소화를 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적게 먹게 되면 사람몸의 효율이 높아집니다. 즉 쉰만큼 소화력이 세어지고 적게 먹으니 흡수력도 좋아집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한달은 해보셔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도 먹는 것에 무지합니다.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올바르게 먹는것에 대한 책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는데 좋은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스님들과 수행자들은 적게 먹습니다.  많이 먹어야 할 이유가 하등없기때문입니다.  많이 먹어봐야 많이 싸기밖에 더하겠습니까 ^^;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은 정말 놀랍습니다.  3일에 한끼를 먹으면서도 생활하는데 아무지장없는 분입니다.  수도자도 아니고 일반인입니다.  그것도 여성이지요.  멀쩡하고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체질이 특수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일반인이 차츰 노력해서 그렇게 된것이지요. 얼굴은 너무도 빛이나고 살도 빠짝 마르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인간의 몸은 불가사의하며 무한한 능력을 가졌으며 어떤 상황에도 적응합니다.  



뜬금없이 오늘은 먹는 이야기를 좀 했습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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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비가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덕숭산 자락에 안개가 자욱하며 바람에 산을 타는 그림같은 모습이 이어졌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수덕사에 도착하여 밤중에 산사에 들어가는 경험도 하게 되었습니다.  분향소에서 숭산대선사님을 뵙고 삼배를 올렸습니다.  아주 많은 벽안의 스님들이 계셨었고, 취재진들도 외국인들이 많았습니다. 곁에 서 계시던 아주머니는 분명 우리나라분인듯 했는데 잠시후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모습에 외국인인줄 알아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사진으로만 뵈었던 현각스님, 무량스님, 무심스님, 성광스님등등 많은 제자스님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수덕사는 덕숭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선맥의 대선사님들이신 경허, 만공, 고봉, 숭산스님이 계셨던 곳입니다.  토요일 오전 10시30분에 추모식이 시작하였고, 각계 각층의 조문사절이 추모사를 낭독하였습니다. 존케리 미대통령선거후보자도 추모편지를 보냈고, 노대통령께서도 추모사절을 보내셨습니다.  12시조금 넘어서 다비식장으로 장소가 옮겨졌으며 40여분간 다비장을 쌓고 거화되었습니다.  수많은 인파로 인해 아주 가까이는 아니었지만 산비탈진곳에 위태위태하게 매달려 활활타오르는 광경을 잠시 지켜보았습니다.  만감이 교차함을 뒤로한채 7시간이 넘게 걸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숭산문하에는 법사제도가 아주 특이하고 엄격한 제도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단계의 최고단계는 선사인데,  10여년의 내공뿐아니라 1700공안의 무문관을 돌파하고 숭산스님이하 여러 선사들의 법거량 그리고 미국에 상주하는 다른나라 고승들과의 법대결에서 승리하고 돌아와야 선사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6명의 선사가 배출되었다고 하니 숭산스님의 법맥이 세계로 계속 뻗아나감은 물론이고 한국불교발전에도 큰 이바지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숭산대선사님의 마지막 설법은 불교신문 2086호 12월 7일 화요일자를 참고하여 보시면 좋을 줄로 압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존경하는 대행스님 글중 짧은 한토막 올립니다.


* 일체의 대상으로 흩어지는 마음을 모아들여서 내면으로 던져라.  수행이란 스스로 공부를 가르치고 스스로 공부하고 스스로 항복하고 스스로 항복받는 것이다.


* 이 공부는 자기가 가르치고 자기가 배우는 것이다. 자기가 놓고 자기가 받는다. 자기가 항복하고 자기가 항복을 받는다. 이와 같이 마음을 닦는 일은 결국 자기와 자기의 일인 것이다. 밖을 이야기 하고 밖으로 끄달리지 말라.


* 회개하는 것도 자기요 잘못을 저지르는 것도 자기요 후회하는 것도, 행을 고치는 것도 자기다. 누가 있어서 고쳐주고 회개를 받아 주고 하는 게 아니다.  이리가라 저리가라 일러주는 사람이 있다해도 길 안내자일 뿐이다. 정말로 나를 깨닫는 길을 가려면 부처님도 없다 하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게 무엇이냐 하면 내 마음 근본 주인공에 그대로 상응하는 것이다.


* 나를 깨닫고 나서 안으로 굴리는 수행자가 있고 안으로 굴려서 나를 깨닫는 수행자가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모두 다 안으로 굴린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경계를 마음 안으로 관하라.


* 자기 내면에 일체 제불의 심인이 있다.


* 마음을 증득하지 못하면 자기 안에서 스스로 밝혀져 나오는 빛이 없기 때문에 항상 남의 지식, 남의 생각들만을 자기 머리에 넣어 놓고 있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진정한 대장부, 대자유인으로서 자유스런 자기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부자유한 남의 삶을 사는 것이요, 그래서 속고 사는 인생이요 예속된 삶일 뿐이다. 이래서야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부처님의 제자라고 감히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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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4-12-07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불교 방송으로 숭산스님 다비식 장면을 보고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육신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홀가분하게 가셨을 거라고 머리론 믿지만, 아쉬움과 슬픔은 어쩔수 없었습니다. 가까이서 작별인사 하고 오셨군요. 고맙습니다.....().....
 

늘 잔잔하게 제 서재를 찾아주시는 도반여러분 건강하신지요?


근래에 책을 놓고 수행에 정진하느라 알라딘에 들어와 보질 못했습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들어온 것은 숭산대선사님의 입적을 당하여 몇마디 남기려 왔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동안 찾아주신분들이 많이 계셔서 놀랐습니다.


아무쪼록 도반님들의 자아를 찾는 여정에 조그만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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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 정신세계사에서 발행되는 월간 웰빙라이프가  책상위에 배달되었습니다. 


마음한번 변하면 그리 좋아하던 것도 무감각해지게 보입니다.  예전같으면 신이나서


펼쳤을 잡지인데...그냥 건성으로 훑어보았습니다. 그러다 눈에 딱 들어온사진한장.


바로 숭산대선사님의 사진이었습니다.  사진 옆으로는 짧막한 가르침이 있었구요.


제자가 선사님께 여쭈길 "스승이 꼭 필요한 것인지요?" 하자


" 너는 여기 왜 왔느냐?" ...." 네가 생각이 없다면 스승이 필요치 않다. 하지만 생각을 끊질 못했다면


 스승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마음의 아버지는 숭산대선사님이셨고, 마음의 어머님은 대행큰스님이셨습니다.


사실 두분다 한번도 뵙질 못하고 그저 마음속으로만 존경해오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펼쳐진 페이지의 숭산대선사님의 사진과 가르침을 빤히 쳐다보고 또 보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저의 절친한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숭산대선사님에 관한, 그리고 대행큰스님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었습니다.   태산처럼 우뚝 솟은 양대 산맥 두분이 계시기에 우리같이 복받은 사람들이 있으니 열심히 길을 가자...는 식으로  이야기를 끝맺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전화통화를 한지 몇시간 되지 않아 그 친구로부터 황당한 전화 한통이 걸려왔습니다.


침통한 목소리로 큰별이 떨어졌다....라고 하는데 저는 직감적으로 마음이 싸늘해지면서 무슨소리냐고 다그쳤습니다.  오늘 오후에 숭산대선사께서 입적하셨다....라는 말과 함께 우리는 긴 침묵을 지켜야 했습니다.


몸이 좋지 않으신줄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언젠가 한번쯤 먼 발치에서라도 뵐수 있을줄 알았는데


이렇게 홀연히 떠나실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정말 내 앞날이 막막해지는 걸 순간 느꼈습니다.


오고감이 없고 그대로 계신줄은 알지만 ...  허탈하고 허전한 마음 짝이 없었습니다.


뭐라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남아 계신 대행큰스님의 안위도 걱정되기 짝이 없었습니다. 


두분다 세수도 비슷하시고 건강도 좋지 않으신데.. 한분이 가버리시니 남은 한분마저 가시면


이제 우린 어쩌란 말씀이신지... 뵙지 못해도 살아 계시는 것 하나만으로 든든하게 길을 갈 수 있었는데..


 선사님께서는 "다 걱정하지 마라! 만고광명(萬古光明)이요, 청산유수(靑山流水)니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기셨지만....그리워하는 심정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살아계실때는 못뵌 모습, 돌아가시고 나서야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토요일 충남 수덕사에서 다비식을 하신다고 하니 마침 그날 한달에 한번있는 비번이라.


 갈 수 있을듯 합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숭산대선사님과 대행큰스님과도 같은 큰 선지식들이 생존하던 시기를 살던 사람으로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큰 복이었고, 먼 발치에서나마 뵙지 못한게 못내 아쉽습니다. 


 하지만 이 조그만 나라에서 이 시대에 태어나 두분의 정법을 만났으니 세세생생


제 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디 수많은 중생.... 음으로 양으로 끌어주시기만을 간절히 바랍니다. 


------------------------


도반 여러분들께서도 이리저리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마시고, 이리 저리 방황 마시고,


짧은 인생, 정말 열심히 정진하셔서 때를 벗고 업을 벗어 참주인공으로 거듭나시길


기원합니다.   책은 선지식의 가르침이니 발심과 거울로 삼으시길 바라며 생활에 있어서 물러섬없는


수행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꾸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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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4-12-02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숭산 스님의 입적 소식은 마음 공부하는 우리 모두에겐 충격적이 소식이었습니다.

님의 말씀처럼 그분과 같은 시대에 간접적인 가르침이나마 받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성철스님 가신지 11년이 지나도 아직 그분의 가르침이 생생하게 살아 있듯이, 위대한 스승님의 가르침은 육신의 변화에 관계없이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있어, 늘 우리를 견책해주는 죽비가 되리라 믿습니다. ....().....

하나됨 2004-12-09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마음선원에서 대행큰스님께 가르침을 배우며 마음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도반들 모두 같은 마음입니다 대행큰스님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관하며 매일 향을 피우며 마음을 모으고 있습니다

바람이되다 2004-12-09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개처럼 살면 천상에 태어날까?(견서계경)


각묵(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실상사 화림원)

필자가 좋아하면서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초기경들 가운데 하나가 견서계경(犬誓戒經)으로 옮길 수 있는 『중부』(맛지마 니까야) 제57번 경인 「꾹꾸라와띠까 숫따」(Kukkuravatika Sutta)이다. 여기서 꾹꾸라는 ‘개’를 뜻하며 와띠까는 ‘서계(誓戒, 서원, 맹세)를 지닌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경의 제목은 ‘개처럼 살기로 맹세한 사람에 관한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 되겠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힐릿다와사나라는 꼴리야 족들의 읍에 머무셨다고 한다. 그때 개처럼 살기로 맹세하고 그렇게 사는 고행을 하는 나체 수행자 세니야와 소처럼 살기로 맹세하고 그렇게 사는 고행을 하는 그의 친구 뿐나가 세존을 뵈러왔다고 한다. 그들은 각각 개와 소처럼 사는 참으로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하는 자들이었다. 개처럼 산다는 말은 개처럼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나체로 살고, 개가 음식을 땅에 던져주면 혀로 핥아먹듯이 그렇게 먹고, 개가 길바닥이나 노지나 처마 밑에서 자듯이 그렇게 자고, 개가 네발로 걷듯이 그렇게 다니는 한 마디로 말해서 개와 꼭 같이 먹고 자고 행동한다는 말이다. 소처럼 산다는 말도 소와 같은 행동을 하면서 산다는 말이다.

이들은 부처님께 찾아와서 “세존이시여, 이 개처럼 사는 서계를 지닌 나체 수행자 세니야는 참으로 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합니다. 땅바닥에 던져준 것만 먹습니다. 그는 개처럼 사는 서계를 오랜 세월을 지니고 실천했습니다. 그의 태어날 곳은 어디고 그는 내세에 무엇이 되겠습니까?”라고 여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인도의 고행자들이 고행을 하는 목적은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들은 금생에 고행을 하여 받을 고통을 다 받고 나면 그 과보로 내생에는 행복뿐인 천상에 태어난다고 믿고, 어려운 고행을 한다. 아마 그들은 당연히 부처님으로부터 그대들은 천상에 태어나리라는 격려와 칭송의 말씀을 들을 줄 알고 질문을 드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그만 하라, 뿐나여. 그쯤에서 멈추어라. 내게 이것에 대해서 묻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알고 싶은 마음에 압도된 뿐나는 개처럼 사는 그의 친구 세니야의 내생에 대해서 계속해서 질문을 드렸고, 세 번을 질문을 받자 부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말씀하셨다. 세 번 질문을 받으면 여래는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그들은 덕담을 바랬는지도 모르지만 세존께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대답을 하셨다.

“뿐나여, 완전하고 중단됨이 없이 개의 서계(誓戒)를 닦고, 완전하고 중단됨이 없이 개의 버릇을 닦고, 완전하고 중단됨이 없이 개의 마음을 닦고, 완전하고 중단됨이 없이 개의 행동거지를 닦고 나서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는 개들의 일원으로 태어난다. 만일 그가 ‘이런 버릇과 서계와 고행과 청정범행으로 신이 되거나 다른 낮은 신이 될 것이다.’라는 견해를 가진다면 이것은 그의 잘못된 견해일 뿐이다. 뿐나여, 잘못된 견해를 가진 자에게 두 가지 태어날 곳 중에 하나가 있을 뿐이라고 나는 말하나니 지옥이 아니면 축생이다. 뿐나여, 이처럼 개의 서계가 성취되면 개들의 일원으로 인도할 것이고 성취되지 못하면 지옥으로 인도할 것이다.”

세존의 이런 대답을 들은 개처럼 사는 세니야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가 우는 것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드신 세존께서는 “그러기에 내가 묻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신다. 그러자 세니야는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그처럼 말씀하셔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단지 제가 개처럼 사는 서계를 오랜 세월을 지니고 실천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즉 오랜 세월을 그 힘든 난행고행을 했건만 그 서계를 닦아서는 아무른 향상이 없고 오히려 축생이나 지옥에 떨어지는 퇴보가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셔서 [제 자신이 그렇게 잘못 믿고 힘들게 살아온 것이 너무 처량하고 억울해서] 우는 것이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 소처럼 사는 뿐나는 같은 방법으로 소로 태어나거나 지옥에 태어날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둘 다 뜨거운 눈물을 흘린 뒤 뿐나는 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께서는 제가 이 소처럼 사는 서계를 버리고 개처럼 사는 서계를 지닌 나체 수행자 세니야가 개처럼 사는 서계를 버릴 수 있도록 그러한 법을 설해주소서.”

세존께서는 네 가지로 업의 법칙을 말씀하셨는데 요지는 “중생들은 업의 상속자”라는 것이다. 괴로운(해로운, 검은) 업을 지어 괴로운 과보를 받고 좋은(유익한, 흰) 업을 지어 좋은 과보를 받음을 말씀하신 뒤 이런 검고 흰 업을 초월한 것으로 “검지도 희지도 않은 과보를 가져오는 검지도 희지도 않은 업이 있어서 그 업은 업의 소멸로 인도한다”고 도(道, magga)를 말씀하셨으며 진정한 사문의 길은 바로 이런 업에서 벗어나는 도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세존의 설법을 듣고 소처럼 사는 서계를 가진 뿐나는 세존의 신도가 되었지만 개처럼 사는 서계를 가진 세니야는 다시 부처님 문하로 출가를 감행하여 불교교단의 비구가 되어 바르게 도를 실천하여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으로 경은 끝을 맺고 있다.

필자는 이 경을 접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나는 부처님 법을 만나 꽃다운? 젊은 나이에 남들이 하기 어려운 출가를 감행하였지만 혹시 이 개처럼 사는 세니야처럼 잘못된 견해와 잘 못된 수행법을 움켜쥐고 있으면서도 깨달음을 얻으리라, 해탈열반을 실현하리라고 하고 있지나 않은가 나름대로 크게 반성해보았다. 아니 내가 도대체 해탈열반에 대한 바른 이해라도 하고 있는가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래서 이전에 움켜쥐고 있던 견해와 수행법을 근원적으로 점검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초기경에서 말씀하시는 세존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나의 견해가 잘 못된 것은 과감히 제거하고 부처님이 제시하신 도닦음으로 자신을 바꾸고 개조해나가리라고 결심하게 되었다. ...

각설하고, 이경을 통해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업설(業說)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소박한 인과론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개처럼 살면 개로 태어나고 신처럼 살면 천상의 신으로 태어난다는 논리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이 말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정작 자신은 개처럼 사는지 신처럼 사는지 좀처럼 돌이켜보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천상에 태어날까? 부처님께서는 『장부』 「수바경」에서 범천의 세상(바라문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천국)에 태어나려면 자애로운 마음[慈], 연민하는 마음[悲], 같이 기뻐하는 마음[喜], 평온한 마음[捨]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無量心]을 닦는 길 외에는 없다고 하셨다. 입으로는 자비와 사랑을 외치면서도 자기와는 다른 인종, 다른 종교, 다른 이념을 가진 자에 대해서 증오심과 적개심으로 불타거나 혹은 삿된 우월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천상이나 천국에 가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개처럼 살면서 천상에 나려는 세니야보다도 못한 사람일 것이다. 물론 불교의 궁극은 천국에 태어나는 것까지 벗어나는 해탈의 길이다. 세니야는 부처님의 말씀에서 이것을 알고 개처럼 살기를 그만두고 해탈의 길인 팔정도를 밟아서 아라한이 된 것이다.

나는 개처럼 살고 있는가, 신처럼 살고 있는가. 나는 개처럼 살면서도 천국에 날 것이라고 맹신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개처럼 살면서도 업지음에서 벗어나 해탈하리라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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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4-10-15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씩 올려주시는 글에서 많은 감동 받습니다. 퍼갑니다.

바람이되다 2004-10-15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저역시 혜덕화님께 많은 도움과 힘을 받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