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의 집 - 1998 제1회 21세기문학상 수상작품집
이청준 지음 / 이수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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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이들 작품 중에서 내가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청준과 최윤의 작품이었다.

- 이청준,「날개의 집」

이청준의 작품은 독자에게 기본적인 신뢰감을 준다. 그것은 그가 지나온 작품 여정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의 작품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匠人, 혹은 藝人들의 모습처럼, 그는 한땀 한땀 느리지만 견고하게 문장을 엮어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서 재기발랄한 감수성을 느낄 수는 없으나, 견고한 사상과 철학을 느낄 수는 있다.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 그가 그려내고 있는 한 화가의 일생은 진부할 수도 있는 소재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청준의 손에 의해서 씌여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받는다. 제목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날개와 집이라는 두 개의 상징물로 대변되는 자유로운 예술혼과 일상적 생활 사이의 갈등과 화해가 이 작품의 주제이다. 그리고 이 두 대립항은 작품 속의 화가에게 있어서 솔개와 소의 이미지로 구체화된다. 결국 이 소설은 소이기를 거부하고 솔개가 되고자 했던 화가가, 결국 소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식하고, 그 인식을 통해서 솔개와 소의 공존과 화해를 찾아내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작품의 제목은 '날개'이거나 '집'이 아니라, '날개의 집'이 될 수 있다.

- 최윤,「파편자전-사물이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 방식」

최윤의 소설은 어렵다. 어려운 소설은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관념적이고 본질적인 주제를 선택하거나, 장문의 의고체 문장을 사용하거나, 서술의 시간을 뒤섞어 놓거나, 혹은 작가의 시점을 미분화시키거나, 이런 경우들이 소설이 어려워지기 쉬운 경우들일 것이다. 최윤의 소설은 이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경우에 해당한다. 그녀의 작품들에 있어서 작가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철저하게 미분화되고 있다. 사물 하나, 사건의 작은 일부분, 기억의 어느 한 조각, 인물 심리의 한 단면 등에 작가의 관심이 놓인다. 그녀의 작품 속에는 전체에 대한 통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혹은 의도적으로 그러한 통괄을 약화시킨다.) 이것이 그녀 소설의 특징이다.

이 작품도 그런 미분화된 시각을 통해서 구성되고 있다. 작품의 전체를 아우르는 시각이나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 사물에 대한 기억들이 모여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그야말로 파편들이 모여 작품을 만들었다. 글쎄, 이런 류의 작품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특히 우리의 지난 소설들이 사물에 대한 인간 중심의 편의적 해석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작업의 필요성은 절실할 정도이다. 그러나 여전히 떠오르는 의문은 감출 수 없다. '이야기가 배제된 소설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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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나날들
무라카미 류 지음 / 동방미디어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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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내가 읽은 류의 세 번째 작품. 글쎄, 아직은 무어라고 정확하게 그를 평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읽은 세 작품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69』,『낯선 나날들』- 이 각자의 작품들이 매우 상이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대중문화, 특히 올드 록에 대한 비상한 관심과 체념적인 어투 정도를 찾아낼 수 있을 뿐. 분명히 이 정도를 가지고 단정지을 만한 작가는 아니다.

그는, 독자들을 대단하게 매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해버릴 수도 없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의 소설을 읽을 때면, 무엇인가 한 부분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작품 구성의 문제만은 아니고, 기본적인 정서나 성향 등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작품 전반에서 찾아지는 결핍감 같은 것. 분명히 그는 현란한 수식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부분에서는 현란한 그 수식들이 전체로 모여지면 비어있는 듯한 인상을 보인다. 풍요 속에서 느끼는 빈곤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아직 정확한 설명은 할 수 없다. 좀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정체성'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 일본 현대 소설에 있어서는 식상할 수도 있는 주제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류와 하루키, 그리고 유미리까지 내가 읽었던 일본 작가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주인공 소리마치 고조와 준코는 모두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특히 여주인공 준코의 질문은 상당한 수준이다. (사실 그녀는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다만 행동할 뿐이다. 하지만 그 행동에 대한 소리마치의 해석에 의해서, 그녀의 문제는 심각하게 부각되고 있다.) 그녀가 표현하는 다른 이들에 대한 관찰, 연기, 그리고 롤플레이 등의 것들은 모두 결국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이들의 질문은 해답을 구하지 못한다. 그들이 정체성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소설을 끝난다. 물론 이것이 현대 사회의 사실적인 반영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안일한 작가정신 때문은 아닐까?

아무리 현대 사회가 복잡해졌다고 하지만, 해답은 (정답이 아니라, 해답은) 여전히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해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해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없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상태에 만족해 버린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만족해 버리고 만다. 결핍을 부족한 상태 그대로 인정해버리는 것이고, 불구를 비정상인 상태 그대로 체념해버리고 있다. 그것은 아무리 변명을 해도 체념이고, 또한 안주에 불과할 뿐이다. (혹시 바로 이러한 체념과 안주에서,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空虛가 비롯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삶이란 단지 그러한 것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다. 삶은 결코 체념과 안주 만으로 가지고 지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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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하우스
장정일 지음 / 산정미디어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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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 길은 내 안에만 있는가? : 장정일의 몰락, 혹은 소진함을 보고 있는 듯하다. 그의 시에서 보여주었던 재기발랄함은 이제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의 첫 소설집 {아담이 눈뜰 때}에서 보여주었던, 나름대로의 기지 넘치는 표현들도 이젠, 없다. 남은 것은 동어반복의 지루함과 과도한 상상력으로 인한 집착뿐이다. 그의 소설이 내포하는 문제점들은 대부분, 그의 관심이 자신의 내면으로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자신에게만 집중되는 관심이 다른 사람들과 통용될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을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소설이 '커뮤니케이션'이고, 그러하기에 소설은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전제로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작품(수용미학적인 표현으로 '낯선 기대지평'만으로 가득한 작품)은, 혼잣말에 불과하다. 장정일이 빠진 함정도 바로 그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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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최인훈 전집 4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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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소설의 결정판. 사실 최근에 나온 '소설가 소설'의 주인공들이 하고 있는 고민은 구보씨의 고민에 따라가지 못한다. 이것도 결국은 私小說이 될 것인데, 사소설이 위력을 가지려면, 그 주인공의 가진 이데올로기나 고민의 진폭이 한 시대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루와 하루가 모인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들을 통해서 그 사회의 단면을 파악할 수 있는 寸鐵殺人의 경지, 그런 점에서 '소설가 구보'씨를 관찰하는 작가의 눈의 예리하고 다각적이며, 순결하다.

최인훈의 구보는 '南·北朝 時代'라고 표현되는, 분단상황을 살아가는 예술가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구보의 고민은 분단상황에서 비롯되었고, 분단상황에 의해 중단된다. 이러한 점은 그만큼 그의 고민이 시대적 무게를 가진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소설가 구보씨의 一日}, 즉 박태원의 작품은 한번 비교를 해볼 가치가 있을 듯하지만, 주인석이 쓴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는, 바로 위의 이유로 인해서, 비교할 가치가 있을 것인지 의심스럽다. 비록 주인석의 구보씨가 90년대 산업화 시대의 예술가의 초상을 그리려 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식민지시대의 예술가(박태원)와 분단시대의 예술가(최인훈)의 초상에 비해서는 너무나 미약한 기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 문학사에서 90년대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분명하고 가시적인 변화가 있었던 시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변화가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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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
최윤 외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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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자칫 소설의 기본기인 허구성을 퇴색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허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다. 일상의 삶이 비루하고 참담할 때, 그것을 위안해줄 환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기능을 소설, 또는 문학이라는 예술이 가지는 낭만성(Romanticism)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 독자들은 현실의 삶이 답답하고 모호할 때에도, 소설을 읽기도 한다. 이 경우 독자들이 소설에 요구하는 것은 낭만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의 直視이거나 해결의 암시, 혹은 아이러니적 정화의 기능이다. 이런 기능을 소설의 현실성(Realism)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자전소설'이라고 불리는 소설들은, 소설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는 小장르라는 점에서, 위에 언급한 소설의 낭만성을 상실할 위험부담을 가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전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A) 다른 사람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는 관음증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준다는 점 B) 가십 기사처럼 작가의 사생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점 C) 아무리 '자전적인 소설'이지만 그것은 자서전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점, 등을 그에 대한 이유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들 중에서도 C)에 주목할 수 있다. 자전소설은 분명히 소설, 즉 허구에 기초를 두고 있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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