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그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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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지리멸렬한, 그야말로 '마이너리그'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인생역정을 그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장악하고 관장하는 요소는 바로 '제목'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곧 삶을 메이저와 마이너로 구분하여 판단하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이와 같은 인식 태도 자체도 문제가 될 소지를 가지고 있지만, 작가의 역량에 의해서 충분히 상쇄될 수 있는 부분인 것도 또한 사실이다. 좀 극단적인 예가 될 지도 모르지만, 성석제의 작품들 중의 많은 경우에서도 기본적으로는 같은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소설들은 항상 삶의 마이너리그에 속하는 인물, 예를 들어 동네 건달, 무지한 아이, 혹은 실패한 인생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은희경과 성석제의 인식론적 출발점은 유사하지만, 그를 다루는 솜씨에서는 전혀 다른 면모를 나타낸다. 요컨대 그것은 '태도'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문제인데, 보다 상세하게 구분하자면 1) 어떤 리그에 스스로를 위치시킬 것인지에 대한 판단력 2) 그러한 판단에 대한 가치평가 및 적응태도 등이 차이를 형성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은희경의 <마이너리그>부터 살펴보면, 작품의 제목이 '마이너리그'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은 스스로를 마이너리그에 속한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메이저리그를 동경하며, 거기에 합류하기 위해서 발버둥친다. 그들의 인생이 몰락하고 몰락하여 마침내 스스로의 지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그 순간까지도, 그들은 그래도 저 친구보다는 몰락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해버린다

자신보다 못난 인물을 설정하고 위안을 얻으려는 태도, 이 작품의 인물들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한, 그들은 자신들이 마이너리거가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을 발견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신과 비슷한 무리들을 경멸하고 비아냥거리며 혹시 나보다 못난 저 녀석이 앞서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서 성석제의 인물들은 훨씬 홀가분하다. 스스로를 낮추고, 자신이 마이너리그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다소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시궁창에 빠져버린 자의 자유로움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이너만이 느낄 수 있는 천박하지만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마음껏 즐긴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해학이 발생한다.

해학이란 결국 가치 뒤집기, 그렇다면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절대로 즐길 수 없는 감정이다. 오직 낮아지려는 자만이 가치를 뒤집을 수 있다. 높아지려는 자는 가치를 지키려고 할뿐이다. 바로 이 점에서 다시 한 번 은희경과 성석제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사실 이번 작품의 문체는 은희경이 구사해오던 것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기존의 것은 다소 스타카토적이고 냉정한 느낌을 주었다면, 이번은 날카롭지도 않고 제법 유장한 맛도 내보이고 있으며, 능청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유장함과 능청스러움이야말로 성석제 문장의 주특기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유사한 문체를 구사하고 있지만, 은희경의 작품 속에서는 해학이 발견되지 않는다. 성석제가 삶의 씁쓸한 장면을 뒤집어 한판 웃음마당으로 만들어버린다면, 은희경은 킬킬거리기도 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씁쓸함이다. 물론 이때의 감정은 절대로 슬픔은 아니다. 슬픔이라고 하기에는 밀도가 너무 낮고 천박한 감정이다.

논의를 뒤집어서, 결국 이런 식의 이율배반적인 면모를 가진 것이 인간이라고 주장한다면, 반박할 수 있는 마땅한 논리를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의 추악한 면을 그대로 내보이는 소설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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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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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소설은 이야기를 꿈꾼다. 산업사회의 눈으로 현실에 대한 냉정한 비판을 가하는 근대적인 양식인 소설이 아니라, 농경/유목사회의 눈으로 현실을 조롱하고 풍자하는 전근대적인 양식인 이야기를 동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기괴하고 범상치 않은 인생역정을 가지고 있다. 이는 근대적인 '캐릭터(character)'와는 다르다. 사실 성석제의 인물들에게는 '성격'이나 '개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록 비틀어져 있을망정 전형적인 도박꾼, 깡패, 도둑, 허풍선이의 성격을 그대로 그러낸다. 그들은 독특한 '전형성'을 가진 인물들이지, 결코 '개성'과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아니다. (바로 이 점도 작가가 근대적 서사가 아니라, 전근대적 서사를 동경한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文體의 측면에도 이러한 동경은 그대로 드러난다. 성석제의 문체는 근대적인 이성의 문체가 아니라, 전근대적인 감성의 문체에 가깝다. (이것을 신수정은 '시니피앙의 연쇄가 불러일으키는 즐거움'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탁월한 지적이라고 파악된다.) 그가 구사하는 문체는 사랑방의 입담 좋은 아저씨나, 할머니의 문체와 유사하다.

이와 같은 성석제의 시도, 혹은 특색은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이것에 대한 확답은 유보하기로 한다. 그의 현란한 입담에 휘둘려 작품의 재미에 빠져있을 뿐, 아직 성석제의 작품을 냉정하게 판단할 거리를 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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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밭 엽기전
백민석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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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獵奇)'의 사전적인 의미는 '괴이한 것에 흥미가 끌려 쫓아다니는 일'인데, 이 작품은 그러한 정의에 충실하다. 일단 그 소재에서부터 괴이한 것들이 등장하는데, 시체 유기·포르노그래피·신경쇠약·폭력·유괴·SM플레이·살인·방화 등이 난무한다. 무엇보다 섬뜩한 것은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그러한 괴이한 일을 행하는 주체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점이 그의 前作 {내가 사랑한 캔디}와 구별되는 점이다. 그 작품에서도 역시 주인공이 선하지만은 않지만, 적어도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폭력을 전면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간의 순결성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시대성/사회성을 배제했기 때문에 주인공은 전혀 동정할 수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물론, 주인공과 그의 아내의 심리에는 적지 않은 트라우마(trauma)가 포함되어 있으며, 표면적으로 내보여지는 성격에도 적지 않은 이중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점들은 이 소설이 흥미위주의 탐정소설이나, 도덕과 교훈이라는 사탕발림을 한 악한소설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흥미로운 장치이다. 즉,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서, 두 주인공은 善과 惡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前作에 비해서) 감추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시대적/사회적인 폭력성에 대한 비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비판은 야성을 잃어버린 동물들이 갇혀 사는 '동물원'이라는 공간과 야성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대리만족을 주는 '서울랜드'의 '모험의 나라'라는 공간을 통해서 제시된다. 그런 점에서 주인공이 벌이는 마지막 싸움이 '서울랜드'의 '킹 바이킹'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은 다소 시사적이다. 제도적인 울타리에서 제도에 벗어난 자의 마지막 몸부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런 장치들로 치장을 한다고 해서, 두 주인공의 행동이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책무라는 명제는 낡아버린 것에는 틀림없으나 여전히 유효하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는 그 시대에 편승할 수 있는 자유와 그 시대를 변화시켜야 할 책임을 가진다. '엽기'가 하나의 문화코드로 제시되고 있는 요즘, 이 작품은 그런 흐름에 편승하고 있는 자유를 누렸다. 그 자유 속에는 그러한 흐름을 비판해야 하는 책무도 함께 들어있다는 것을 작가는 잊은 것이 아닐까? 작품의 어디에도 비판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부분은 없다. 백민석이라는 작가가 이를 언제 드러낼지, 기다려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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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 세계문학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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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 세기 전의 작품이니 그 감각이나 정서에 동감할 수는 없었지만, 중간중간 드러나는 재기 넘치는 비판과 풍자는 주목할만한 부분이었다. 그러한 비판/풍자는 인간의 속물성에 화살을 겨냥하는데, 가령, '이 정도 일로 만일 웃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라는, 발이 두 개가 모자란 멍청이임에 틀림없다'라는 구절이 그 좋은 예가 된다. 이처럼 이 고양이에게 사람이란 멍청하고 추악한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는, 서구 세력에 대한 일본의 열등감도 나타나 있다. 이것은 '근대화'라는 변혁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동양의 정신'을 이야기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는 있으나, 그들은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로 희화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러한 희화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동양의 정신'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 그것이 식민지배를 받지 않고 근대화를 수행할 수 있었던 나라의 특권이 아닐까?)

나체 신봉자만 해도 그렇다. 그렇게 나체가 좋은 것이라면 자기 딸을 벌거숭이로 해서, 덩달아 자기 자신마저 벌거숭이가 되어 우에노 공원을 산책이라도 해보란 말이다. 못하겠다고? 못하는 게 아니고, 서양인이 하지 않으니, 자신도 하지 않는 게 아닐까. 사실상 이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예복을 입고 테이코쿠[帝國] 호텔 같은 데로 출입하지 않느냐. 그 사연을 물어보면 별 것이 아니다. 그저 서양인이 입으니까 나도 입는다는 것뿐일 테지. -p.288.

이외에도 눈에 걸렸던 것은, 작품 속에 녹아있는 군국주의적인 요소이다. 물론 이는 이 작품만의 특징이라고 하기는 힘들고, 당시 일본이라는 사회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인 정신병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은 피해망상일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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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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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라고 모든 작품을 잘 쓸 수는 없다. 그리고 객관적인 눈에서 보자면, 이 작품이 그리 떨어지지 않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그 동안 그의 다른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접했기 때문에 이 작품에 만족을 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우선, 아쉬웠던 점은 'Leviathan'이라는 거창하고 상징적인 제목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개인적인 관계와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다루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개인의 삶을 다루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문제는 개인적인 삶은 그에 합당한 표현으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창한 제목은 자칫 실망을 안겨주기 쉽다.

조금만 더 인내를 발휘해보자. 작가에 대한 믿음을 조금 더 유지하고, 우선 이 작품의 내용과 제목을 파악해보자. 소설의 나레이터는 피터 아론, 주인공은 벤자민 삭스. 소설 속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제목에 대한 암시는 벤자민이 쓰던 미발표 소설의 제목이라는 것.

그렇다면 당연히 이 제목에 대한 주도권은 벤자민에게 있다. 피터는 충실한 기술자에 불과하니까. 그는 쾌활하고 활력 있는 젊은 소설가이지만, 그의 주변에는 보이지 않는 위험이 포진해 있다. 겉으로는 단정하고 세련된 모습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금이 가있는 상태, 그래서 미세한 충격에도 쉽사리 무너져 버리고 마는 상태, 이것이 벤자민과 피터를 둘러싸고 있는 위험의 징조 - 즉, 괴물이다(벤자민에게나 피터에게나 모두 같다. 다만 벤자민이 이 괴물의 접근에 더욱 민감할 뿐이다). 특히 벤자민과 그의 아내의 관계는 이러한 괴물을 잘 드러내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그리고 적어도 어느 정도는) 더할 나위 없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둘의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불신과 모든 측면을 자신의 시각에서만 파악하려는 아집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제목 '리바이어던'은 현대인의 생활에 숨어있는 폭력성, 일상의 허위성에 관한 상징이 아니겠는가?

이런 식으로 제목에 대한 이해는 얻어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폴 오스터의 다른 작품들에서 보였던 기발한 이야기의 전개와 거침없는 상상력 등에 비해서 이 작품의 이야기는 너무 평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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