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삶은 핸들이 무거운 차와 같아서, 아무리 고민하고 생각해 봐야 방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되는 ‘비비디바비디-시크릿’은 TV와 베스트셀러에만 있는 얘기일 뿐. 정말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앉아, 어김없이 넘긴 마감시간에 괴로워하며 원고를 쥐어짜고 있진 않았을 테니까.

  처음 회사를 그만 두겠다 마음먹은 것은 입사 1주년이 채 되지 않을 무렵이었다. 두 가지의 상반된 감정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곧 그만두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하나, 매달 나오는 월급에 길들여져 평생 이대로 고분고분하게 살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 또 하나. “나는 살 수 없어. 네가 있어도, 네가 없어도”라던 누군가의 노랫말처럼, 그 사이데 끼어 한참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는 그 문제가 발생한 당시의 의식 수준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게 아인슈타인이었던가. 필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 그래서 내가 떠올린 생각은 유예기간을 두는 것이었다. 매주 보던 주간지가 100권이 모이면 그만두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한 것이다. 걱정과 불안을 모두 깨끗이 씻어준,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 '심플 플랜'이었다.

  90권이 모였을 때, 문득 찾아 온 어머니께서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 말씀하셨다. 고민하지 않을 수 있나. 내가 생각하는 삶은 이런 것이 아니었고, 사는 대로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그래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방황하며 한 달이 흘렀고, 잡지는 94권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결단을 미루고 있었다. 100권이 되기를, 그리하여 직관적으로 결단이 내려지기를.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잡지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폐간된 것이다. 잡지의 이름은 다름 아닌 필름 2.0. 벌써 지난 2월의 일이다. 그 이후에는? 보시다시피. 무너져버린 100권의 상징 아래에서 가정경제의 압박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박인환도 노래하지 않았던가. 아, 인생은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굿바이 스바루>는 그런 나의 통속을 철저하게 비웃는 책이다. 스탠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분쟁 지역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워싱턴 포스트’, ‘월드 리포트’ 등에 기사를 쓰던 덕 파인은 어느 날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생활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고 월마트에서 쇼핑을 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돈을 벌되,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탄소 마일리지를 소모하는 뉴요커의 삶”에 안녕을 고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덕이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향한 곳은 뉴멕시코의 농장. 언젠가 유기농 아이스크림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들인 새끼염소 두 마리와 함께 뉴욕 촌놈 덕은 좌충우돌 농장생활을 시작한다. 가뭄과 홍수를 견뎌내고, 범람한 강을 자동차로 도강하고, 코요테로부터 염소와 닭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깐풍기 냄새가 나는 폐식용유 트럭을 운전하고, 목숨을 걸고 태양열 전지판을 설치하면서. 사서 고생도 가지가지다 싶다가도, 이 남자가 신나서 늘어놓는 이야기를 계속 보고 있자면 어느새 웃음이 터지고 만다. 친환경적인 삶을 살아야겠다는 열망 하나로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가 건네는 웃음은 건강한 웃음이지만, 동시에 웃는 자신을 부끄럽게 만드는 웃음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의 첫 문장을 다시 생각한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그 말 어디에도 ‘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된다’는 부분은 없음을 새삼, 그리고 내가 여전히 생각하는 대로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한다. 그리 허황된 생각은 아니다. 다만 남들과 조금 다를 뿐.

  그렇지만 아직 준비는 필요하고, 그 전까지는 우리 사장님이 이 글을 보시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끝.


-  월간 인물과 사상 2009. 10
('주간지 100권이 쌓이면…')




처음 이 카테고리를 만든 것은 다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비디오 테이프를 다 감아 반납하는 것이 매너이듯.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옛 서랍을 들추는 일이 언제나 그렇다는 것을 왜 잊었을까. 이건 그냥 독후감 수준의 글인데,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썼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2009년에 내가 한 일의 상당수가 그렇듯이. 특히 4번째 문단은 지워버리고 싶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다. 촌스러운 형식 탓이다. (<굿바이 스바루>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정말, 필름 2.0은 왜 망한거지? 박인환 전집도 품절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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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0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30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09-12-30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비슷하게 생긴 집에서 자고, 비슷한 철깡통속에서 일하며, 비슷한 회의를 하면서 나이를 먹어가는 걸까요?

활자유랑자 2009-12-30 15:41   좋아요 0 | URL
바야흐로 21세기인 거죠. 2020 원더키디까지 앞으로 10년!
 

  고작 10년 남짓한 인터넷 서점의 역사에도 나름의 전설은 있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무용담들이 있다. 읽는 순간 장바구니 버튼을 클릭하게 했다는 리뷰의 달인, 출판사도 몰랐던 책의 미덕을 짚어내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는 선책選冊의 달인, 할인 쿠폰과 1+1 신공의 발명으로 무림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는 이벤트의 달인…. 제각기 자신만의 비기로 업계를 주름잡았던 이들이지만, 강호를 떠나며 남긴 말은 한결같았다. “이제 책을 읽고 싶다”는, 조금 쓸쓸한 그런 말.

  물론 이 자리에서 업계의 현실을 개탄할 생각은 없다. 사장님이 보실까 두려워서… 라기 보단, 책이 탄생한 이래 어느 시대나 상황은 마찬가지였음을 알기 때문이다. 비독서의 전통이 고고하게 흐르는 나라, 프랑스의 모리스 블랑쇼는 언젠가 “비평가란 비非독자다”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피에르 바야르는 한 술 더 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까지 썼다. (이에 비해 윤 모 선배가 쓴 <2주에 1권 책읽기>는 어찌나 순진한 기획인지!) 세계적 고수들의 사정이 이러한데, 하물며 일개 MD야 말할 것도 없겠다.

  물론 선량한 독자제위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접하고 크게 놀랄지도 모른다. 책을 추천하는 MD가 실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속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런 태도는 너무 데카르트적인 것이 아닌지? 악명 높은 심신이원론처럼 물物로서의 책보다 내용이 우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그렇다면 사르트르의 저 유명한 명제를 떠올려 보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이를 업계 용어로 다시 쓰면 다음과 같다. “(내용과 상관없이) 우리 앞에 책이 있다” MD는 바로 그 책을 파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윤리란 책 자체와 관련된 것이지, 내용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의 거성 롤랑 바르트는 이런 상황을 절묘하게 표현한 바 있다. “그들은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재빨리 덧붙인다. “나로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여기 하나의 실례가 있다. 형형색색의 표지 속에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 작업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을 보라. 제작비 4억, 제작기간 5년, 원고지 3만 6천여 매로 이루어진 명실상부한 ‘블록버스터’ 기획을 앞에 두고 나는 묻는다. 도대체 이 시리즈를 몇 명이나 온전히 읽어낼 수 있을까? (심지어 소설은 단 한권도 포함되지 않았는데!) 그렇지만 또, 이토록 어여쁜 표지를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이 스물다섯 권의 책을 책꽂이에 일렬로 꽂아 넣는 호사를 뿌리칠 자신이 내게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좋은 책은 보기에 좋은 책이다!

  아직 의심을 버리지 못한 당신은 물을지 모른다. 영화 속 졸부들이 하드커버 껍데기로 서재를 채우는 일과 무엇이 다르냐고. 그런 당신을 위한 에코의 일화 : 수많은 장서로 가득 찬 그의 서재를 방문한 사람이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렇게 묻는다. “와, 시뇨레 에코 박사님! 정말 대단한 서재군요. 그런데 이 중에서 몇 권이나 읽으셨나요?” 에코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아니요. 저 가운데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을 무엇 하러 여기에 놔두겠어요?” 이런 현답이 있나!

  그래서 우리는, 서점을 서성이고 인터넷을 뒤지며 읽지 않은 책이 가득한 책장에 오늘도 몇 권의 책을 꽂는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꿈꾸며, 즐거운 독서를 상상하며. 그러니 읽는 속도보다 책을 사들이는 속도가 빠르다고 움츠려들지 말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한 권의 책을 사는 일이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하물며 우리의 책꽂이는 넓고, 종말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 무비위크 403호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무용담은 물론 뻥이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이 업계는,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으니. 과거의 유산 따위 있을리 없다. 지젝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정도 될까. 저렇게 서두를 뗀 것은 순전히 저널리즘적인 접근 방식이라고... (ㅋㅋ)

그럼에도 여전히, 이 자리에서 업계의 현실을 규탄할 생각은 없다. 사장님이 보실까봐 두려워서는 물론 아니다. (ㅋㅋ) 출판연감에 따르면 2008년 한 해 동안 출간된 책의 종수는 4만 여종. 블랑쇼의 "비평가는 非독자다" (위에서는 생략 되었지만) 모리스 나도의 "잡지나 신문사의 편집장은 제곱의 비독자다"라는 말에 절절히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 부분은, '책'으로 밥먹기를 선택한 자의 업보다. 아무 도리 없는.

그렇다면 MD란 무엇일까. 이 지점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패러디한 것은, 조금 우스운 선택이었다. 그러니 그냥 농담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사실 어떤 책이 좋은 책이냐라는 문제는, 책을 파는 사람에게 언제나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는 문제다. 잘 팔리는 책이 좋은 책인가? 좋은 책을 잘 팔리게 해야 하는가? 답은 요원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가장 그럴듯한 답은 그것이다. 우리 앞에 닭이 있으면 삼계탕을 먹고, 계란이 있으면 계란 후라이를 먹으면 된다! 이 지점에서 실존주의는 탄생한다....... (농담이라고 쓸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A4 1장이 채 안되는 글임에도 수없이 많은 외국 이름과 인용이 등장한다. 이 블로그에 '인문MD'라는 타이틀을 걸고 글을 쓰게 된 이후 갖게 된 버릇. 불평도 많이 듣고, 잘난 척 하지 말라는 얘기도 들었지만... 중요한 점은 나 역시 제대로 알고 하는 소리는 아니라는 거다. 어쨌거나 잘난 척은 아니라는 얘긴데... 이런, 글쓰기의 윤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나?

이를테면 벤야민의 몽타주 기법 같은 것. (ㅋㅋㅋㅋㅋ) 역사적 맥락에 의해 쓰여진 무엇을 아무 설명 없이 끌고 들어 오는 것. 쓰는 이는 물론 읽는 이 역시 정확하게 그것이 뭔지 몰라도 '흐흥, 재미있네' 하고 넘어가는 것. 이쯤 되면 재미 없다, 라는 반론이 나올 텐데... 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진심입니다. 그런데 정말.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재밌다. 따라서 나는 <2주에 1권 책읽기>라는 윤 모 선배의 기획이 여전히 너무 나이브하다고 말하는 바. 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데카트르 이야기는 내가 생각해도 조금 오바인 것 같다. 하지만 마지막을 스피노자로 맺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중간에 데카르트가 등장해야 할 것 같았다. 마지막 부분은 마음에 든다. "하물며 우리의 책꽂이는 넓고, 종말은 아직도 멀기만 한데." 이것이야말로 대인배의 자세! 물론 현실은 시궁창. 중고샵에서 긁어 버린 수십권의 책들이 우리 집 마루에는 여전히 쌓여 있고... 마야인에 의하면 종말도 머지 않았다고 하는데... 여러모로 고민 되는 요즘이다. (급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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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12-21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열권 동시에 읽기>도 위 리스트에 끼워 넣고 싶군요.

무튼, 내가 책을 못 읽는 이유가 그거였나봐요. 나는 책팔이근성이 너무 강한거죠! 막 사는 속도는 자동찬데, 읽는 속도는 마차에요. 달그락달그락

활자유랑자 2009-12-21 13:36   좋아요 0 | URL
문화지체라는 말이 생각 나네요. 도덕 시간에 배웠던 거 같은데... 네이버를 찾아 보니 "급속히 발전하는 물질문화와 비교적 완만하게 변하는 비물질문화간에 변동속도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사회적 부조화"라고.

그렇다면 그것은, '독서지체'?

우연아닌우현 2009-12-21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토록 솔직한 글 완전 사랑합니다. 저도 알라딘에서 많이 사긴 했는데! (억울해요!!!) 그래도 여느 인터넷 쇼핑 품목과 마찬가지로, 몇 번 책을 사고나면 소개글에 현혹되지 않는 나름의 요령이 생긴다는 겁니다. 다만, 그 때까지 초기 장벽에 부딪혀 책과 멀어지는 안타까운 중생들이 있다지요 'ㅂ'

활자유랑자 2009-12-22 15:14   좋아요 0 | URL
음, 적절한 말씀이세요.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습니다.

2009-12-21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활자유랑자 2009-12-22 15:15   좋아요 0 | URL
혹시 문학MD님하고 헷갈리신 거 아닌가요? (농담)
기회가 닿으신다면... 말씀 좀 더 해주세요. 좋은 지적 고맙습니다. :)

2009-12-30 1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활자유랑자 2009-12-31 15:45   좋아요 0 | URL
그래도 다행(?)이에요. 약간 안도. ㅎㅎ
2010년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세요 :)

아람 2009-12-21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ㅋㅋㅋㅋㅋㅋㅋ글이 무척 재밌군요. 저널리즘적인 접근방식으로부터 시작하여 스피노자로 끝나는 글, ㅋㅋㅋ 누가 이러저러한 말을 했습니다, 라는 해석이 뒤따르지 않으면 전혀 이해 못 할 글이지만, 재밌어요. :-)

활자유랑자 2009-12-22 15:1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갑자기 부끄럽네요...;
좀 더 깊이 들어가야겠어요.

하이드 2009-12-2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도대체 이 시리즈를 몇 명이나 온전히 읽어낼 수 있을까? "

이 페이퍼가 자꾸 보여서, 결국 들어와 다시 한 번 댓글 남깁니다. ^^
도대체 이 시리즈를 몇 명이나 온전히 읽어낼 수 있을까요? 진짜 궁금해졌어요. 사는 사람 말고, 읽어내는 사람이요. 설마 손꼽을 정도는 아니겠지요? 우리나라 인구가 얼만데 (죄송합니다. 인구드립;ㅎ)


활자유랑자 2009-12-23 16:11   좋아요 0 | URL
기간을 정해 놓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향후 3년 간을 기준으로 놓고 생각하면... 손에 꼽을 수 있을지도? ; (일단 저는 읽을 생각이 없고요;)

엘 우즈 2010-02-16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솔직하고 재미있네요 *

활자유랑자 2010-02-16 19:15   좋아요 0 | URL
'현실적으로' 일주일에 수십권씩 출간되는 책을 읽을 수 없는 MD의 진심...입니다. T.T

valeria 2010-03-2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니홈피에 출처 밝히고 퍼가겠습니다. ^^ 좋네요.
www.cyworld.com/valeriah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8월 6일 새벽. 원고마감은 2시간을 넘겼고, 한 줄도 쓰지 않은 또 다른 원고들이 줄지어있으며, 온도계는 32도를 가리키고, 선풍기는 더운 숨을 뱉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주저 없이 “해도 너무 한다”는 말을 내뱉었을 상황. 그렇지만 나는 입을 다문다. 그것이 언어의 오남용임을 깨달은 것이다. ‘해도 너무함’의 정수를 몸소 보여주시는 높은 분들 덕분이다. 이제 알았으니까 제발 그만하셨으면, 바랄 뿐. 이대로라면 언젠간 이 지면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해도 (무한 반복) 너무 한다”로 채워야 할 것만 같아 두렵다. 어휘가 부족한 탓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글은 무력하다고. 김훈 선생은 한 인터뷰에서 <근사록>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공자의 논어를 읽어서, 읽기 전과 읽은 후나 그 인간이 똑같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아마, 나는 구태여 할 필요 없는 독서를 해온 모양이다. 읽어 온 것과 현실을, 아니 나 자신을 도무지 조화시킬 수 없으니. 그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마치 자일리톨을 소화시킬 수 없는 충치균이 계속해서 자일리톨을 먹듯. 그리하여 충치균은 굶어 죽고, 아직 살아있는 서점 직원은 여전히 무력한 독서를 한다. 

  <괴짜사회학>의 저자 수디르 벤카테시 역시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었다. 시카고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그는, 설문조사를 위해 무턱대고 찾아간 흑인빈민가에서 갱단 보스 제이티를 만난다. 우연한 만남. 박사 논문 주제를 찾고 있던 수디르와 자신의 말에 귀기울여줄 외부인을 찾던 제이티는 학생과 갱이라는 신분차를 넘어 의기투합한다. 경찰도, 구급차도 오지 않는 빈곤의 섬. 어떤 이론도, 어떤 논문과 통계도 설명할 수 없는 땅에 제이티의 도움으로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빈민가의 경제는 마약과 섹스를 기초로 돌아간다. 갱단은 마약을 파는 동시에 일종의 경찰 노릇, 보호자 행세를 한다. 투표로 선출된 주민대표는 부패한 주택공사와 결탁해 중간에서 이익을 챙기지만, 그들 역시 국회의원 노릇을 한다. 그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주택공사의 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여자들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섹스와 식료품, 공산품을 교환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지만, 정작 주민들은 그 상황을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그런 생활을 강요하는 것은 결국 국가의 무관심이기 때문이다. 도시의 한 구석, 마치 경계선처럼 커다란 공터 가운데 세워진 흉물스러운 고층 공영주택단지에 빈민들을 몰아넣은 것은 바로 정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갱단과 주민대표마저 사라진다면 그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철저한 혼란뿐임을, 그들은 아는 것이다. 일종의 차악次惡인 셈이다.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주민대표 베일리 부인과의 대화다. 수디르는 최근 통계자료를 들먹이며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다면 빈곤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25퍼센트라는 것. 그러자 부인이 말한다. “만약 자네 가족이 굶주리고 있고 내가 자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어쩌겠나?” 당연히 가족들이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때까지 학업을 미루고 돈을 벌어야 한다고 대답하는 그에게 부인은 되묻는다. “하지만 자넨 학교에 다녀야 하잖아, 안 그런가? 그게 자네를 빈곤에서 벗어나도록 도울 테니 말이야.” 이토록 책은, 막연한 일반론과 비정한 현실 사이에 낀 수디르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그것은 물론 그만의 딜레마는 아닐 것이다.

  외부의 시선으로 들어간 수디르는 10년의 세월을 함께하며 마침내 내부의 시선을 이해하게 되지만 마지막까지 그 둘을 조화시키지는 못한다. 물론 빈민가에 대한 그의 논문은 호평을 받는다. 그리하여 수디르는 촉망받는 연구자가 되고, 빈민가는 고급주택단지를 조성하려는 주정부에 의해 철거되며 막을 내리는 것이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근본적인 문제들과 약간의 희망, 커다란 부채의식만을 남긴 채.

  그리하여 책장을 덮은 나는 불평한다. 아, 대체 어쩌란 말이지. 뉴스에선 끊임없이 말도 안 되는 소식들이 들리고, 나는 촉망받는 연구자가 될 일도 없는데, 답도 없이 책이 끝나버리다니. 하지만 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만병통치약은 없고, 정답으로 보이는 것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아무런 답도 내놓지 못하는 수디르의 고민은 정직하고, 약점을 숨기지 않는 이 책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김훈 선생의 말처럼, 책에서 기대해야 할 것은 답이 아니라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엇임을. 그래서 나는 마음을 고쳐먹기로 한다. 나는 훌륭한 독서가는 아닐지 모르지만, 훌륭한 독서가들에게 좋은 책을 권할 수는 있을 거라고. 이것이 얼마만큼의 ‘타협’인지는 아마 결코 알 수 없겠지만. 세상에 얼마만큼 도움이 될지도 솔직히 모르겠지만.

  목구멍은 포도청이고, 어느덧 해가 밝아 온다. 가자, 출근 시간이다.


- 월간 인물과 사상 2009. 9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은 12월 21일 오전, 마감 시간이 임박한 원고를 겨우 넘겼고, 한 줄도 쓰지 않은 다른 원고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수은주는 영하를 가리키고 있고, 설상가상 온풍기는 서늘한 바람을 뱉어내고 있다…. 워낙 많은 일들이 끊임 없이 일어나는 사회인지라 글을 쓸 당시 무엇 때문에 '해도 너무함'의 정수라는 표현을 썼는지는 잊었지만(나랏님들 얘기다). 여전히 해도 너무한 일들은 차고 넘치시니 상관은 없겠다.

한 때는 모든 일에 답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답이 중요할 뿐 과정은 별 소용 없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잘 모른다. 답이 있는지, 과정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기에 말 할 수 없고, 말 할 수 없기에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김훈이 말하는 끔찍한 동어반복이다)

<괴짜사회학>은 재미있는 책이지만, 아무래도 사회학이라고 하기엔 좀 억지스럽다. 사회학자가 쓴 논픽션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리라. 미국식 서지사항을 따르자면 실제로 그렇다. 원제는 "Gang Leader For A Day" 하루만 갱단 두목이 되어 보기. 실제로 수디르는 일일 갱두목 체험을 한다. ㅋㅋ

나는 여전히 저 책의 마지막이 속상하다. 어린 시절 무라카미 류의 <69>의 에필로그를 보고 불편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작가가 된 류는, <69>의 공동 주인공인 친구가 찾아오자 차갑게 식은 커피 한 잔을 대접하고 별 말 없이 앉아 있다가 돌려 보낸 후 그 커피를 한 모금 마셔보고 후회한다) 물론 그 시절 <괴짜 사회학>을 읽었다면 그다지 불편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처음 <69>를 읽었다면 불편해하지 않았으리라.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문장은 장기하의 가사에서 따온 것이다.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고작해야 한탄할 것이 '밥벌이의 지겨움' 뿐이라는 사실은 조금 민망하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조건. 그런 면에서 밥벌이의 지겨움과 그 도리 없음을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김훈은 위대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차피 세상 다 산 어른의 것이 아닌지. 그런 의미에서 (나를 비롯한) 김훈에 감탄하는 젊은 세대는 너무 조로했다. 살아보지도 않고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는 건 참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그것을 이제야 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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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 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랴,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현대 그리스의 ‘문제적 인간’ 조르바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고, 내가 그 말을 들은 것은 공교롭게도 동원훈련 기간 중이었다. 그것은 담배 피고, 툴툴대고, 벌렁벌렁 아무 데고 드러눕기만도 짧은 2박 3일 일정에 책을 붙잡고 있는 인간한테 하는 말이 틀림없었으니 그저 뜨끔, 할 수밖에. 돌아온 사무실, 책상 위에 높다랗게 쌓여있는 책들을 바라보며 아마 나는 주머니속의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던가.

하지만 끝내 불꽃은 피어나지 않았으니, 다름 아닌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위태롭게 쌓여있는 책들 사이에서 한 녀석이 불쑥, 이렇게 말했다. “기왕에 덜 된 인간, 이왕이면 좀 더 책과 뒹굴어 보는 건 어떻소?”라고. 저자는 칼 폴라니, 제목은 <거대한 전환>이란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몽환적인 그림이 표지로 쓰인 탓일까? 그 말에 홀딱 넘어간 귀 얇은 짐승은 그리하여 이렇게 서툰 글을 끼적이고 있다. 인간이 되기를 잠시 포기한 채. (미리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았고, 인간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

푸릇푸릇하던 스무 살 시절에 이미 “꿈이 뭐냐”던 여자아이의 물음에 “놀고먹는 거”라 답하고, “그래도 돈은 필요하지 않냐”는 말에는 “안 벌고 안 쓰면 돼”라고 말하던 내가 폴라니의 이름에 반응하게 된 것은 사회 탓이다. 일종의 반복학습. 평생가도 들을 일 없던 그 이름이 어느 순간, 레알 마드리드에 영입된 호나우도라도 되는 양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폴라니가, 오늘 우리에게 폴라니는, 폴라니에 따르면……. 마치, 이번에야말로 우리 팀의 우승을 확실하게 견인할 ‘킬러’ 스트라이커의 이름을 말하기라도 하듯. 일개 팬에 불과한 사람으로서는 무의식중에라도 그 이름을 새겨놓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거대한 전환>을 바라보며 ‘드디어’와 ‘과연?’, 두 개의 부사를 떠올린다. 절판되어 직접 확인할 수 없었던 그의 사상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그것이 정말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동시에 드는 것이다. 물론 의구심이 더 클 수밖에. FA 선언을 한 홍현우와 진필중을 어마어마한 돈으로 영입해서 말아먹었던 역사를 생생히 기억하는 LG의 팬들이라면, 아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꽤나 세차게.

폴라니를 탓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그가 소비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어떤 이론도 완벽할 수는 없고, ‘거대한 전환’은 ‘소소한 전환’들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니 폴라니 그 자신이 바로 ‘거대한 전환’일 수는 없는 것. 그의 이름이 아무리 신문지상에 오르내린다고 해도, 진보와 보수가 함께 입 모아 소리쳐도, 단지 그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지는 않을 테니까.

물론 그것은 자신에 대한 책망에 더 가깝다. 괜히 ‘과연?’이라며, 끝까지 읽지도 않고 건방을 떠는 모습이 스스로도 같잖은 모양.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름의 ‘소소한 전환’을 마음먹어 본다. 귀동냥으로만 듣던, 남들의 필터로 걸러 보고 그래서 오해했을 폴라니를 이번 기회에 찬찬히 읽어 볼 것. 그래서 ‘과연?’이 ‘과연!’으로 변하(전환 되)는 과정을 스스로 지켜볼 것. 물론 ‘과연?’이 ‘역시~’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지만, 어찌되었건 그것이야말로 대부분의 우리가 바로 지금 폴라니와 함께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94쪽) 같은 근사한 문장을 읽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결코 책을 팔아먹으려 하는 얘기는 아니다. 물론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책을 산다면 기쁘겠지만, A서점에서 산다면 더더욱 기쁘겠지만. (쿨럭) 아마 나는 인간이 되기는 그른 모양이다…….)


- 월간 인물과 사상 2009.8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무엇? '소소한 전환!')




동원 훈련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들고 간 것은 정말 잘 한 일이었다. 작년, 재작년에 들고 간 <금각사>와 <인 콜드 블러드>를 생각하면 두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남들 다 쉬러 오는 예비군 훈련, 어두컴컴한 막사 불빛 아래에서 3일 내내 책을 들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겠지만... (burn after reading 하려고 했다는...)

인문MD를 맡은 이후로 뿌듯한 일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다시 나온 <자본>을 메인 프로모션 한 일이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거대한 전환> 역시 메인 프로모션을 했지만, 그만큼 뿌듯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하도 폴라니 폴라니 해대서 짜증이 좀 났달까? 그런 짜증이 좀 담겼다.

중간에 나온 "과연?"과 "역시"는, "아직?"과 "아직도?" 농담을 변형한 것이다. 90년대 중반, 모던 소년/소녀들 앞에 혜성 같이 나타난 벨 엔 세바스챤. "불길한 느낌이 든다면 가서 목사님을 만나봐"(If you're feeling sinister, go up and mee minister)라는 우아한 라임을 구사하던 그들이었지만, 너무 유행을 타버렸다. "아직 벨엔세바 안들어봤어?"와 "아직도 벨엔세바를 들어?"의 간극이 그만큼 짧았던 것. 뭐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마지막에 교훈조로 흘러간 것은, 실은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아이디어는 한마디로 완전히 유토피아이다. 그런 제도는 아주 잠시도 존재할 수가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이라는 내용물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되어 있다.”

이 문장은 언제 봐도 멋지다. 이에 비견할 만한 것으로는 프로이트 <꿈의 해석>의 첫 문장이 있다.

"다음에서 나는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심리학적 기술이 존재하며, 이 방법을 적용하면 모든 꿈은 깨어 있는 동안의 정신 활동에 포함시킬 수 있는 뜻 깊은 심리적 형성물로 드러난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아, 나는 여전히 <거대한 전환>을 읽지 않았다. 실은, 이제야 조르바의 말을 절절히 깨닫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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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2-21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거대한 전환이 나온걸 보고, 그 이후에 같은 주제로 더 쉽고 명쾌하게 쓴 책이 많이 나오지 않았을까? 이제사 이걸 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고민했고, 아직도 보관함 대기중 --;;
(그러나 왜 이 페이퍼를 읽으며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까요? ㅎ
인문md님의 능력은 탁월하고도 높아라!!)

활자유랑자 2009-12-21 13:37   좋아요 0 | URL
이쯤에서 같은 주제로 더 쉽고 명쾌하게 쓴 책을 후루룩 읊는다면 폼 나겠죠.
그러니 하지 않겠습니다... (응?)
실은 어제도 원고 하나 붙잡고 낑낑 대느라 오늘은 컨디션이 영 꽝이네요 ㅜㅜ


드팀전 2009-12-21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 품목 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군요. ^^ 벨앤 세바스천도 처음에 나온 음반들이 레드음반, 그린음반 등이 좋았어요... 조르바는 10년에 한번씩 읽기로 한 책이어서 내년이 되면 3번째 읽을 생각입니다...이윤기 역이 너무 지배적이라..고려원에 이어 출판사만 계속 바꾸고 있으니...흐.. 새해에는 맘 고생 덜하는 MD가 되시길..사는게 다 그렇습니다.

활자유랑자 2009-12-22 15:12   좋아요 0 | URL
아직도 벨앤세바를 들으시나요? (웃음)
얼마전 나온 BBC SESSIONS 앨범도 좋아요. 옛 추억에 잠시...
사는 게 다 그렇다는 얘기는 슬퍼요. 고맙습니다. :)

mong 2009-12-22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대한 전환은 책 표지가 뜰때마다 묘한 감정으로 저를 괴롭히는 군요
(저걸 읽어 말어)
조르바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중 한권이고 벨앤세바는
어느 동생 녀석이 사줬는데 몇년만에 들어봐야겠어요
새해에는 책얘기(읽으시라는게 아니라!) 더 많이 해주세요 :)

활자유랑자 2009-12-22 15:13   좋아요 0 | URL
회오리 바람 속의 여인들 때문 아닐까요? ㅎㅎ
책 이야기라... 결국엔 이야기가 우리를 구원할까요?

Mrs.M 2009-12-28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아 벨엔세바 이퓨어필링시니스터 앨범 표지. 오랜만에 봅니다. 대학시절에 참 많이 들었었는데요...

활자유랑자 2009-12-29 14:25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가서 미니스터를 만나실 시간? ㅎㅎ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황지우 시인의 ‘뼈아픈 후회’는 이렇게 시작한다. 인터넷서점 인문MD에게 폐허는 좀 더 구체적인 담론으로 다가온다. 문학의 종언, 인문학의 몰락, 영화의 위기, 출판의 불황…

  문학은 잊고, 인문학은 버리고, 영화는 끊고, 출판계를 떠난다고 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 촉발된 금융위기는 여전히, 모호하지만 강력하게 우리의 일상을 흔든다. 지구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삶은 황폐해지며, 문화는 빈곤해진다. 설상가상 마야인이 예언한 지구멸망은 2012년. 전세계가 폐허를 목전에 둔 셈이다.

  ‘모두 알다시피’ 철학계의 마돈나 슬라보예 지젝은 이런 상황을 가리켜 “파국과 함께 살아가기”라 표현한 바 있고, (‘모두 알다시피’ : 고대 그리스의 수사법에서 전승된 표현의 하나로, “그러려니 하고 넘어 갑시다”란 뜻) ‘두 말 할 필요 없이’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먼은 ‘유동하는 공포’라는 개념을 제시하기도 했다. (‘두 말 할 필요 없이’ : “꼬치꼬치 캐물어봤자 더 이상 아는 게 없다”라는 의미의 시크한 제스쳐 혹은 지친 가장의 언어)

  물론 지젝과 바우먼의 ‘탁월한’ 분석 외에도 수많은 담론들이 존재한다. (‘탁월한’ :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럴듯해 보임”을 뜻하는 현대 저널리즘 용어) 근거 없이 떠도는 소문에서부터 상당한 신빙성을 갖고 이야기 되는 담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온갖 고담준론으로 가득한 세계를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담론도 오늘, 우리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 단군 이래 최저학력이 나날이 갱신되는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너무 똑똑하다. 낯선 이론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평론가들과, 그들의 말에 코웃음 치는 대중 모두. 그렇기에 우리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뿐. 그것은 물론 깊은 냉소주의의 언표다.

  그리고 여기, 김훈이 있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김훈이다.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일 수 있다고,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김훈은 굳이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김훈을 읽으며 아름답지 않은 자신에, 나은 세상에 손을 보태지 못함에 자책하지 않을 수 있다. 그는 가르치지 않는다. 냉소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의 삶을 통해 몸으로 배운 것을, 비루함과 치사함과 던적스러움에 대해, 들려줄 뿐이다.

  펜으로 꾹꾹 눌러 뒷장에까지 자국이 남아있는 <공무도하> 사인본을 앞에 두고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우리는, 강 이편의 폐허를 단지 외면하기만 한 것은 아닐까, 하고. 그러니 우리는, 공허한 말을 내뱉기를 그치고 먼저 김훈이 그려낸 풍경을 껴안아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김훈의 정치성’ 혹은 ‘김훈 소설의 성취’ 따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나는 인간 삶의 먹이와 슬픔, 더러움, 비열함, 희망을 쓸 것이다”라던 그의 말은 그래서 내게, 자신이 써 올린 먹이와 슬픔과 더러움과 비열함 위에 누군가 희망을 써주기를 바라는 늙은 작가의 간절한 바람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또한, 아무 도리 없는 희망일 것이다.

- 무비위크 401호



무비위크에서 격주로 글을 쓰게된 건 사실, 좀 신나는 일이었다.
여기 이 서재나, 인물과사상과는 달리 '인문/사회'라는 카테고리를 벗어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문제도 있었다. 도무지 무엇을 써야할지 알 수 없었다는 것.
제가 알라딘에서나 인문MD죠...

그래서 생각난 게 김훈. 나도 모르게 100% 직설적인 제목을 쓰게 되었다.
(책 소개가 정말 아닌 걸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이 글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일단 인문MD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고(웃음), 김훈에 대한 팬심(?)도 넣고 싶었다. 
물론 제대로 맞아 돌아갈리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냉소주의의 언표다'와 다음 문단 '그리고 여기, 김훈이 있다' 사이의 비약이다.
사실 어느 정도는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뭐랄까, '목숨을 건 도약' 같은 느낌으로 (ㅋㅋ)

'뼈아픈 후회'로 시작해서 '도리 없는 희망'으로 끝나기 위해, 내겐 꼭 그만큼의 도약이 필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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