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생일에 어머니의 집에 모인 삼남매. 어머니는 자신이 곧 세상을 떠날거라는 걸 알고 삼남매에게 그동안 수집한 골동품들을 설명한다. 삼남매는 어머니의 소중한 유품인만큼 절대로 팔지 않겠다는 듯 어머니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호하다. 어머니가 살던 집도 처분하라고 했을때 삼남매는 마치 해마다 어머니를 추억하기 위해 들를 것처럼 가슴 아파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어느날 세상을 떴다. 삼남매는 어머니가 말했던 것처럼 어머니가 남긴 골동품과 집을 알뜰살뜰하게 등분하여 나눈다.   

여름, 이라는 계절을 하나의 정서로 생각해본다. <8월의 길위에 버리다>를 쓴 이토 다카미는 여름이라는 계절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행동을 유도 한다고 했다. 그동안 움츠렸던 어깨, 구부렸던 등을 활짝 펴고 이제 나도 무언가를 즐기고 느끼고 살아야만 할 것 같은 시간이 여름이 아닐까. 여름엔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특히 휴가 라는 정당한 쉼의 날들이 다가오는데 그때 우린 미뤘던 인연들과 해후하고, 그들과 즐거움을 만끽하려 한다. 여럿이 함께여야 마땅할 것만 같다. 명절의 의무감이나 책임감 없이 자유롭게 훨훨. 영화의 어머니는 그들의 말랑한 정서에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자신의 소임을 다하려는 듯 골동품의 가치를 설명한다. 어머니는 옳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삼남매가 알뜰 살뜰 유품을 나눴다고 해서 슬프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정서, 주검이 나설 소관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테니까.  

 

우리 엄마는 4남매를 낳았다. 가을, 겨울, 여름, 봄에 네 아이를 낳았다. 어린 시절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한 조각은 아픈 엄마다. 아이를 낳은 산달마다 어미는 아프다고 하더니 그 말이 정말 맞나보다. 오빠와 나는 저녁을 먹고 약국에서 엄마가 늘 먹던 약을 사오기도 했고, 언니들은 엄마를 대신해 소시지와 달걀 프라이를 만들어 밥상을 차리기도 했다. 내가 열살 때, 엄마는 그 해여름에도 아팠다.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엄마는 오빠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생일마다 수수팥떡을 만들어 이웃들에게 돌렸다. 수수팥떡을 정답게 나눠먹던 그 여름밤, 엄마는 결국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가족은 음식과 과일을 싸들고 가까운 계곡으로 놀러갔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가다가 문득 우거진 수풀 사이로 엄마의 얼굴을 보았는데, 핏기라고는 없는 얼굴색, 버석하게 마른 건조한 입술에 풀이 죽었다. 아이는 엄마의 건강과 울타리를 느끼며 자란다고 했던 것처럼 엄마가 아프니 계곡에 놀러가도 신나지가 않았던 것 같다. 그래도 엄마는 우리가 계곡에서 물장구치고 장난치는 걸 기꺼이 지켜보며 웃곤했다. 엄마가 노란 참외를 깎아 우리들 입에 넣어줬다. 나는 마치 자양강장제라도 먹은 것처럼 신나게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엄마가 수박을 썰어 우리들 손에 쥐어졌을 때 엄마가 이제 아프지 않은 것만 같아 안심했다. 그날 아빠가 찍은 사진에서 엄마는 4남매처럼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 수박 한덩이를 든 둘째 아들은 얼마전 일가를 이룬 아내와 아내의 아들과 집으로 향한다. 어머니는 딸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딸은 호시탐탐 친정으로 들어와 살 궁리를 한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더이상 환자를 볼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가족에겐 무뚝뚝하지만 젊은 시절엔 마일즈 데이비스의 재즈를 들었던 아버지는 장남이 자신의 대를 이어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장남은 바다에 빠진 한 아이를 구하고 세상을 떴다. 둘째 아들은 우월한 형과 늘 비교 대상이었고,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서글픔을 조금씩 터트리고 있다. 그것은 때로 아이같기도 하지만 유치하다고는 할 수 없는 아픔이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지만 이미 깊은 골과 갈등을 갖고 있는 보통의 가족들. 섬세한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적나라할 정도로 뚜렷한 인간의 내면과 맞닥뜨린다. 연약한 인간의 육체에 그렇게 단단하고 깊은 감정들이 숨어있다는 건 슬프고 복잡하다. 어머니의 아픈 추억이 깃든 노래, 홀로 분노를 삭히며 듣곤하던 노래 '요코하마'가 울려퍼지던 밤, 아버지는 얼마나 찔렸을까. 어머니는 해마다 장남의 기일에 방문하는, 장남이 구한 소년 (이젠 어른이 된 그) 에게 겉으로나마 관대하지만 섬뜩할 정도로 분노를 갖고 있다. 둘째 아들이 이제 그만 소년을 불러도 되지 않겠냐고, 소년이 불편해하는 것 같다고 하자 어머니는 말한다. 고통스러우라고 부르는거라고. 미워할 대상이 없으면 너무 괴롭지 않겠느냐며 자식을 잃은 부모의 통한을 나지막이 고백한다.  

이 대목은 가족과 가족이 아닌 자와의 경계선을 드러낸다. 비록 갈등과 골이 패인 가족이지만 그들은 삭히고 감추며 표출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이 아닌 자, 소년에게는 관대할 수가 없다. 그는 내 아들을 잃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결코 세월이 흘러도 내 가족을 잃게 하였다는 죄목을 벗어날 수는 없다.  

  

                                         

잠깐이나마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스물 한살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그땐 정말 무지할만큼 나에 대해서 몰랐던 시절이다. 움츠러들지 말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야무지게 살았어야 했는데.  

마코토처럼 타임 리프가 가능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가끔 생각한다.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 아쉬운 게 아니라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저 자주 돌아보는 시절이 아닌가 싶다. 그땐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며칠전에 지나다 그런 글귀를 보았다. 최선을 다해 잘 살고 있기 때문에 절망스러운 게 아닌가, 라는 뉘앙스의 글. 그러고보니 나, 요즘 참 최선을 다해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는 OST가 아주 훌륭하다. 골든베르크 변주곡을 비롯한 주제가들은 청량한 젊은날의 여름처럼 맑고 선명하다.  

 

 곧 8월이다. 뜨겁고 오싹한 (공포와는 다른 허무의 결정체로서의 오싹함) 고딕 소녀의 프랭키는 열두 살. 프랭키이면서 F재스민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소녀는 오빠의 결혼식을 앞두고 세상과 갈등하고 있다. 프랭키가 바라보는 결혼식은 두 사람이 어떤 멤버가 된다는 뜻이며, 어딘가로 떠나 그들만의 세상을 꾸려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프랭키는 어떻게든 결혼식에 가고 싶어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프랭키와 늘 밥을 먹고 카드 놀이를 하는 배러니스 아줌마와 사촌 동생 존 헨리리는 프랭키를 걱정하기도 하고 무언가를 가르치기도 하며 꾸짖기도 한다. 그래도 프랭키는 자신의 뜻을 굽힐 수가 없다. 여름의 풍경을 다양한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는 카슨 매컬러스는 <슬픈 카페의 노래> 에서 처럼 허무한 사랑, 허무한 계절, 쓸쓸하고 고독한 정서를 노래한다.  

애어른 같은 프랭키, 혹은 F 재스민은 주옥같은 말만 한다. 주옥이, 프랭키가 좋다.  

"싫어. 왠지 설명할 순 없지만, 라디오를 다시 켜는 건 싫어. 지난여름을 너무나 생각나게 하거든." 

프랭키도 매력적이지만 배러니스 아줌마는 더 매혹적이다.  

"때로 나는 차라리 애초부터 루디를 몰랐더라면, 하는 마음이 될 때가 있어. 너무 응석받이가 되거든. 그리고 나중에 너무 외로워져. 저녁에 일 끝내고 집으로 걸어가노라면 작고 외로운 모과열매 한 개가 맘속에 들어앉는 것 같아. 그런 감정을 삭이려고 말도 안 되는 인간들하고 어울리게 되지." 

배러니스 아줌마는 네 번의 결혼 경험이 있다. 아줌마는 지금 한 남자를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그는 자신을 설레게 하지 않으므로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오빠의 결혼식을 상상하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하는 열 두살 프랭키에게 배러니스 아줌마는 이렇게 말한다. 프랭키가 필요한 건 애인이라고. 그러나 프랭키는,  

"애인 필요없어. 어디다 쓰게?" 
"이 바보야 어디에 쓰긴. 영화를 보여달라고도 할 수 있지, 예를 들면. 이제 너 그렇게 거칠고 욕심많고 우악스러운 행동 좀 고쳐야 돼. 드레스를 멋지게 차려입고, 말도 상냥하게 하고, 행동도 여우같이 해야지."  

배러니스의 매력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그녀는 프랭키가 자신의 드레스에 칭송만을 원하자 '분명 잘못된 것에 대해 좋다고 말하라는 거잖아.' 라며 프랭키를 꾸짖을 줄도 안다.  

프랭키 혹은 F 재스민, 배러니스, 존 헨리의 여름 식탁에 초대 받으면 나도 마음껏 미치거나 이상한 사람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다.  

올 여름에 그들이 식사하는 방식은 늘 이렇게 진행되었다. 잠시동안 먹고 나서 음식들이 몸 안에서 퍼져 자리잡을 시간을 좀 주고, 조금 뒤에 다시 먹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163쪽.

  

  

 

 

 

 

 

 

프랑스 태생의 여자들 이야기다. 코코 샤넬, 제인 버킨, 까미유 끌로델, 시몬 드 보부아르, 시몬 베이유, 이자벨 아자니, 세골렌 루아얄, 퐁파두르 부인등... 프랑스 사회, 이 세상을 뜨겁게 산 여자들이다. 그들의 일생을 요약하였으므로 가벼울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페이지가 가볍게 넘어가지는 않는다.          퐁파두르 부인 이야기를 읽다가 지난 겨울에 읽은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이 떠올랐다. 프랑스의 오브제들, 의자, 책상등 가구를 살피며 왕족의 이야기를 실었는데 꽤 흥미로웠다. 퐁파두르 부인은 루이 15세의 그림자처럼, 분신처럼 살았던 여인이었으나 그의 아내가 되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와 얘기를 나누기 위해 책을 아주 많이 읽었다고 한다. 하여 그녀는 철학자들과 토론을 벌이는 일이 자주 있었다. 사랑을 얻기 위해 지식을 습득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잖아요...흑.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직업은 '레모네이드 소년' 이다. 이 소년은 카페 배달원으로 카페에서 초콜릿을 배달 시켜 마셨던 당시의 여유로운 생활을을 드러내는 표상이다. 가끔 상상한다. 레모네이드 소년이 막 내린 원두 커피, 얼음 동동 띄운 레모네이드 한 잔을 가져오는 일.           세노 갓파는 예술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하여 그들의 방을 세밀하게 그렸다. 어찌나 정밀한지 그걸 정말 손으로 그렸을까 싶은데 세노 갓파는 사진을 촬영하고 집으로 돌아와 세밀하게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들 중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의 책상에는 이런 메모가 붙어있다.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유쾌하게.  

 

 

 

 

 '평등 욕망'은 여전히 건재한다. 바탕스는 평등으로의 탈출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감히 넘보지 못했던 것들을 바캉스 때엔 '질러도' 된다. 아니 질러야만 한다. 바캉스는 자신이 모든 위계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적 존재라는 자기 확인의 기회이기 때문에 그 어떤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만끽해야할 그 무엇이다.  -강준만, 고독한 한국인 41쪽.  

 

 

 

무더운 여름, 침몰한 서울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참 안좋다. 거실 마루에 벌러덩 드러누워 서울 생각, 서울 걱정, 서울의 추억을 헤아리다보면 그 끝엔 바다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모아진다. 그래도 여름이니까, 가 아니라 아픈 생각을 지우려는 얄팍한 술수 때문이다. 난생 처음 조리를 샀다. 크림색 조리를 신고 나풀나풀 바다 구경하러 가고싶다. 거실 마루에 벌러덩 누워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여름날의 평온한 오후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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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도착했을 때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의 <비포 선라이즈>가 떠올랐다. <비포 선라이즈>의 두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들에 대해, 나를 중심으로한 이야기로 서로를 끌어들이려 한다. 또한 서로 언쟁을 하면서도 자신의 매력을 잃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워하고 속삭이고 친절하게 대한다. <사랑을 카피하다>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말을 걸고 있다. 가짜 연극을 하면서, 가짜 역할을 하면서 서로에게 말을 걸고 호소한다. 친절과 애정을 쏟기 보다는 쿨하다는 쪽이 더 가깝지만 지금 떠나게 될까봐, 혹은 떠난 나를 방치할까봐 두려워하는 불안이 엿보인다.

시시껄렁한 고민에 깊이 빠져있다가 불현듯 어른들께 조심스레 털어놓고나면 아주 명쾌한 대답을 듣게 될 때가 있다. 어른들은 (마치 나는 어른 아닌 것처럼...) 내 고민의 깊이에 관해서라기 보다는 사건의 액면만을 바라보고 단순한 대답을 툭 던진다. 순간 나는 류현진의 강속구가 글러브에 팍-! 꽂히는 것처럼 올커니 하며 그 대답을 주워 해결한다. 내 질문에 깊이 생각하며 대답하는 어른일수록 엉뚱한 대답을 할 때가 있긴 하다. 그러나 대부분 어른들은 가비얍게 해결해준다. 그게 바로 연륜이다. 예전엔 정말 몰랐다. 꼬꼬마 시절엔 더더욱 어른들의 답이 나를 명쾌하게 해준 적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깨닫는다. 어른들의 대답만큼 나를, 어른인 나를 속시원하게 해주는 물파스도 없다고.  

제임스는 얼마든지 그녀를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엘르가 식당 아주머니의 착각 (두 사람을 부부로 곡해한다) 을 고쳐주지 않았다고 실토한 순간, 그는 얼마든지 벌컥 화를 내고 돌아설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노련한 배우가 하기 싫은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밥 먹는 것처럼 연기를 하듯 엘르의 남편 역할을 받아들인다. 식당에서 나와 골목에서 남편과 아내로 다투는 그들은 몹시 사랑스러웠다. 또한 외로워보였다.  

스탕달은 이탈리아를 '사랑도 있고 증오도 있는 나라' 라고 했다. 제임스와 엘르는 이탈리아 투스카니 골목에서 가짜 역할을 받아들이고 즐기고 앙큼한 연기를 펼친다. 그리고 문득 나는 카피와 진짜의 경계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에 빠졌다. 사랑과 증오의 경계를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 증오의 기원을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있었으므로 증오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미움이라는 것은 관심에서 비롯된 것인데 관심은 마음을 어느 정도 상대방에게 허락하고 풀어놓은 것이니만큼 사랑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엘르와 제임스가 가짜 부부 역할을 능청스럽게 끌어갈 수 있었던 건 진짜의 역할을 해봤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때 누군가를 사랑했었고 증오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실망하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짜란 진짜가 없으면 생길 수 없는 분신이다. 가짜는 진짜에 기대어 있는 셈이다. 오리지널리티의 혐의가 없을 뿐 가짜도 진짜에서 파생된 또하나의 진짜니까.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엘르의 여동생 마리다. 마리는 엘르의 입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마리는, 진품은 잊고 좋은 짝퉁을 사라, 고 조언하는가 하면 아무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심플한 인생을 지향하고 있다. 마리는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지만 그녀의 말은 꽤 파급력이 크다. 마리가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지. 엘르가 그냥 끌어들인 인물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믿게 된다. 엘르가 전하는 마리의 말은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명쾌하게 고민을 해결해주는 어른의 말처럼. 엘르는 마리의 남편이 말더듬이라고 전한다. 사랑하는 아내를 부를 때 마,마,마,마, 마~리~! 라고 부르는데 그건 묘한 러브송처럼 들린다고 제임스가 말한다. 결국 마지막에 엘르도 제,제,제,제, 제임~스~! 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르기 전까지 그들에겐 어떤 복잡한 감정들이 오고 갔다.  

멀리서 종이 울리고 그들은 한 곳에 있다. 더이상 진짜 가짜의 논쟁이 필요하지 않은 곳,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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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1-05-16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므흐흐..암튼 플레져님의 페이퍼는 언제 읽어도 참 좋다니까요..^^
(저언혀 상관없는 댓글이지만. 한화이글스가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나 봅니다. 사장단 등등 수뇌부 싹 갈아치우고 그룹차원에서 전면적인 지원을 한다고 하더군요. 초특급 에이스가 존재하는 팀이 만년꼴찌라니..이제 젊은 이글스가 날개를 펼 수 있겠습니다.)

플레져 2011-05-16 23:38   좋아요 0 | URL
앗. 감사합니다 ^^;;

(류현진 선수를 한번쯤 제 글로 초대하고 싶었어요ㅎㅎ 때마침 머릿속에 툭~ 나타나줘서 고마울뿐 ^^ 제발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저는 한화팬이라고 하기엔 애정의 연륜이 부족하지만 팀에 관심은 많거든요. 묵직하고 믿음직스런 팀이란 이미지에 걸맞게 꼭!)

바람구두 2011-05-17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을 떠나고 좋지 않은 점 중 하나는 세상이 온통 정치와 경제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듯 착각하게 된다는 거였어요. 다른 생물들이 그러하듯 인간 역시 자신을 둘러싼 생태계의 영향을 받기 마련인 듯... ㅋㅋ

플레져 2011-05-17 11:16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 첫정을 들인 이유도 있겠지만
저는 알라딘 페이퍼의 행간, 자간...에 매료된 것 같아요.
그래서 좀 쉬었다가 다시 또 오게 돼요.
돌아오시면...안될까요?
바람구두님의 알라딘 행간을 읽고 싶습니다 ^^;;

stella.K 2011-05-17 13:51   좋아요 0 | URL
엇, 바람구두님이닷!

2011-05-17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7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18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24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11-05-25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인사 드려요.
오랜 서재지기 복순아짐(현 이카루)님이 알려주셨답니다.
지금은 중국이라 판매량에 영향을 못드리지만 조만간 카운터 1 올려드리도록 하지요.ㅎㅎ
건강하시고 또 좋은 소식 전해주시길...

2011-05-25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0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11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7, 때문에 여름 기분 확 난다. 7월, 칠월, 줄라이, july! 줄라이 모닝, 은 줄라이 모닝으로 써야 맛이 난다. july morning 이라고 쓰면 어쩐지 반감되는 느낌. 사랑스러운 모국어는 참말 위대하다. 여름을 준비한다. 책과 음악과 영화들. 어지간히 보고 또 보고 쓸고 닦고 들었던 것들이지만 똘똘한 여름 보내고 싶어서. 허전하고 싶지 않아서.  

  질 나쁜 연애  

 이 여름 낡은 책들과 연애하느니
 불량한 남자와 바다로 놀러 가겠어
 잠자리 선글라스를 끼고
 낡은 오토바이의
 바퀴를 갈아 끼우고
 제니스 조플린의 머리카락 같은
 구름의 일요일을 베고
 그의 검고 단단한 등에
 얼굴을 묻을거야  

 (중략)  

 문혜진의 시집 한권으로 여름을 시작한다.   


연애는 여름에 하면 딱 좋다. 적당히 노출된 몸매 때문이 아니라 더운 날씨 때문에 마음이 조금은 너그러워지고 해이해지기 때문이다. 남편을 가을에 만났다. 초여름 무렵, 칠부 티셔츠를 입고 데이트를 했다. 내 팔에는 보송보송하다 못해 거뭇한 털...이 수북했다. 면도기로 박박 밀다가 어느새 포기해버렸는데 아주 제법, 원시인스러웠다. 그걸 본 그가 건넨 한 마디. "왜 진즉에 말 안했어?" 그의 안경엔 빙글빙글 골뱅이 두 마리가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왜? 진즉 말했으면 데이트 안 했을거야? 결국 지금은 부숭한 털들을 다 면도했다. 여름이면 알러지가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온 몸이 간지럽다. 매일 면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나쁘지 않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화가 덜 됐다는 농담을 들었던 초등학교 때 밀어버리는건데. 지금은 그런 농담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나이잖아.

 

 독일의 휴양지 바덴바덴에 7월의 저녁이 내리고 있었다. 먼 곳, 슈바르츠 발트나 튜링거발트쯤의 하늘에 보랏빛 먹구름이 걸려있고, 그 너머 더 먼 곳 어딘가에는 번갯불까지 번쩍이고 있었다. 좀 더 도시 쪽으로 가까이 오면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언덕이 있으며, 그 언덕에는 빽빽이 초목이 자라고 있었다. 또 붉은 벽돌로 된 알테스 성과 노이에스 성이 보이고, 삐죽이 솟아 있는 탑들과 오래된 기사들의 성도 볼 수 있었다.  

<치프킨, 바덴바덴에서의 여름>  

도스토예프스키와 두번째 아내 안나의 여정을 담았다. 역자 이장욱의 말처럼 '이 소설은 픽션과 다큐의 경계에 있다' 끈질기게 도박에 미쳐있는 도스토예프스키와 그를 위해 숄까지 팔아 밑천을 대준 안나의 이야기는 여름을 진득하게 이겨내는 사랑의 묘안처럼 들린다. 아끼고 사랑해마지 않는 책.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 휴가-  

 섹시해 보이는 소녀가 있고,
 그소녀를 경계하는 어른 여자가 있고, 
 소녀와 왠지 잘 어울리지만 여자가 보기엔 자신과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섹시 가이가 있다. 사랑의 신 큐피드는 누구일까. 결론은 큐피드의 말로다. 큐피드여, 사랑을 전도하고 연결해줄 거라면 힌트라도 먼저 주시길.  

소녀와 여자가 함께 요트를 타고 짧은 항해를 한다. 
그것만으로도 여름이 성큼 느껴진다. 
바다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착각이 느껴지지만
외려 바다와 요트를 보고 있으면 얼른 구명조끼라도 입어줘야 할 것 같은 간절함에 몸살이 날 것 같다. 거실에서 허리에 튜브를 끼고 앉아 있어볼까. 아주 재미있을 것 같지만, 혼자 있을때만 그래야겠다.  

 


 Myrra, Sweet Bossa-  

 두 장의 씨디가 들어있다. 
 로맨틱하고 부드러운 바람같은 음색이 매력이다.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의 햇빛이 휘황찬란할 때
 미라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드라이브 떠나지 않고는 못 배긴다.
 첫번째 트랙 Taxi Driver, 는 사랑 고백을 하러 가야 하는데
 택시 운전사가 아주 느긋하게 운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How insensitive 에선 사랑이 떠나간다. 택시를 타고 사랑 고백하러 갔던 여자가 결국 사랑이 떠나 어떻게 냉담해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 상황인걸까. 고백했으니 아름다웠다고, 그것으로도 되지 않았냐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연애, 사랑인 거 같다. 여름엔 실연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하긴 어떤 계절에도 실연은 위태로운 계절이다.  

 

 차가운 벽, 트루먼 카포티- 

 차가운, 때문에 고른건 아니다. 어떤 여름날엔 짧은 이야기를 빨리 흡수하고 싶을 때가 있다. 단편 소설도 길 때가 있다. 엽편 소설은 흔하지 않다. 단편과 엽편 사이의 이야기들, 그러나 스펀지 흡수의 속도만큼 어떤 이야기가 살갗에 심장에 스며들어 줬으면 할 때, 이 책이다. 그의 명성 <인 콜드 블러드>에 비해 아주 흡족한 소설은 아니지만 아주 실망스러운 소설도 아니다. 나를 툭, 치고 가버리는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여름엔.  

 

 

 

 

 

 

 

 

 

 

 

이윤기가 건너는 강, 이윤기-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아웃사이더 예찬, 마이클 커닝햄-  

이윤기의 에세이가 왜 좋으냐하면 옆에서 나한테 말을 건네고 있는 것 같아서다. 야야, 좀 들어봐, 이런 일 있었는데 난 이렇게 해버렸다, 그거면 됐어. 하고 경상도 사투리로 슬금슬금 말을 걸어오는 느낌. 소나기 같은 이야기들, 소나기처럼 빠르지만 여운이 남는 이야기들.  

존 버거는 언제나 그렇듯 섬세한 사람이다. 사진을 보고 있는 것처럼 글자로 사진을 찍고 있다. 거기에 영혼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활동사진으로서의 글을 썼다. 수변공원 산책로에서 자주 만나는 전형적인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을 연상하게 한다. 유모차의 여인, 자전거를 탄 여인이 그렇다. 풀밭위의 그림, 도 자주 보는 풍경이다. 거기에 나만 포착하고 존 버거는 포착하지 못한 풍경은 -다리 밑에서 고기를 굽는 사람들- 이다.  

마이클 커닝햄! <세월, The Hours> 를 사랑한다. 영화도, 소설도 아주아주 좋다. 그가 말하는 프로빈스 타운에 갈 일이란 까마득한 먼 약속이겠지만 왠지 그와 함께 장도 보고 시청 화장실에들러 본 느낌도 든다. 완벽하게 그 지역색이 도드라져 한참 읽다가 내가 이걸 왜 읽지...하는 느낌은 잠깐 들지만 그래도 좋다.  

 

여름이 왔다. 잘 견뎌내고 싶은 마음이나 잘 지나가리라는 기대는 없다. 봄을 살아왔던 것보다는 조금 더 바지런하게 살아서 옹골찬 가을을 맞이하고 싶다. 그래서 잘 투과하고 싶은 계절이다. 견딘다고, 지나갈거라고 일상의 아픔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저 묵묵히, 그러나 괜찮다는 말은 남발하지 않으면서 잘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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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7-0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점심먹기 전에 장바구니에 들었던 책들을 결재했는데, 만약 결재전에 이 페이퍼를 봤다면 저 위의 시집 [질 나쁜 연애]를 장바구니에 함께 넣었을거에요.


이 여름 낡은 책들과 연애하느니
불량한 남자와 바다로 놀러 가겠어


아! 제대로 여름인거죠.


플레져 2010-07-01 19:0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과 잘 어울리는 시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짜루-.
불량한 남자랑 가더라도
오토바이만큼은 좋은 걸 타야할 거 같아요 ^^

stella.K 2010-07-01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저 시 좋은데요!
글쵸. 역시 줄라이 모닝은 줄라이 모닝이어야 해요.
7월도 행복하게 보내시길! 나의 플레져님.^^

플레져 2010-07-01 19:08   좋아요 0 | URL
그죠? 좋죠?
저 시의 전문을 얼른 옮겨놔야겠어요.
마이 스텔라님...ㅎㅎ

2010-07-01 1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1 1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7-01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박지성이 열심히 선전하는 질레트 면도기 코리아 에디션 리미티드 버젼이 플레져님 서재에서 생각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플레져 2010-07-01 19:11   좋아요 0 | URL
흑.
(이 한마디로 제 심정(?)을 다 읽으셨으리라...ㅋ)

잉크냄새 2010-07-01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라이 모닝, 역시 모닝이 어울리는 달이네요.
노래 제목의 영향도 크겠지만, 님 말처럼 줄라이보다는 줄라이 모닝...

플레져 2010-07-01 19:16   좋아요 0 | URL
노벰버에는 레인이 붙어야 하듯
줄라이에는 모닝이 제격이죠 ^

다리 밑에서 고기굽는 사람들,을 쓸때
잉크님의 오래전 페이퍼를 떠올렸어요.
기억하세요? 다리밑에서 고기 구워먹는 사람들 얘기 하신적 있는데.
다리밑에서 고기 구워먹는 사람들이 아주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러나 지금, 거의 하루에 한번은
다리 밑에서 고기 굽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있답니다.
고기는 여름이 아니어도, 날만 괜찮으면 구워도 될 거 같아요..ㅎㅎ

잉크냄새 2010-07-05 13:14   좋아요 0 | URL
기억력도 좋으셔라.
그 페이퍼를 기억하고 계시다니...
참 오래전의 추억을 들춰내주시네요.ㅎㅎ

플레져 2010-07-06 15:22   좋아요 0 | URL
스토커, 로 오해받을까봐 조금 고민했었어요 ㅎㅎ
다리 밑에서 고기를 굽다니.
생소한 목격담이어서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

2010-07-02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2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9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04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0-07-05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휴가, 재미있어요.
요트를 타는 대리만족보다 (요트 실제로 타보고 싶어라~)
'타인의삶'에 나왔던 그 여배우의 대담함과 반전에 깜짝 놀랐지요.
근데 그게 후련하더라구요.ㅎㅎ
줄라이 모닝, 굿모닝, 플레져님^^

플레져 2010-07-06 15:21   좋아요 0 | URL
아아- 타인의 삶에 그 여인이어서 저도 깜짝- 쿵- 놀랐어요.
몹시 관능적이고 매력적이죠? ㅎㅎ
실제로 요트를 타는 것같은 착각은
현란한 카메라 워크 때문이었던듯 ^^
오늘도 줄라이 모닝하세요, 프레이야님!

2010-07-07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사춘 2010-07-20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플레져님 서재에는 아래로 쭉쭉 보물이 그득그득합니다.
감사의 뜻으로 여름덕담을...
"여름 건강하게 보내세요~!" (싸다, 춘!)

플레져 2010-07-21 21:26   좋아요 0 | URL
다정한 춘님 ^^
너무 덥죠? 벌써부터 찜통이니...큰일이에요.
덕담 감사합니다. 춘님도 더위 조심하세욧!

2010-07-27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지난밤에 쟁여뒀던 영화를 꺼냈다. 서랍에서 안 읽은 편지를 꺼내듯. 무심히, 기대없이 꺼냈다. 마이크 뉴웰의 영화들이 단아하나 격정적이며 뭉클했다는 오래전 소감을 떠올렸다. 타이틀이 참 멋졌다. 엔딩 화면 또한 멋졌다. 영화의 정보는 많지만 일일이 다 주워들을 수 없다. 요샌 한계를 느끼는 일이 많아서 많이 알려고 하기 보다 알았던 것들을 다시 반복하여 깨닫는 일에 집중하는 편이다. 2주전 인상깊게 보았던 <햇빛 찬란한 월요일> 의 하비에르 바르뎀이, 지난 봄 동네친구와 다정하게 보았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의 하비에르 바르뎀이 콜레라 시대의 사랑 남자 주연배우다. 팔색조, 카멜레온, 이런 흔한 수식어 말고 무엇이라 이름 붙여 부르면 좋을까. 하비에르 바르뎀이란 배우는 없고 오로지 그 배역의 이름과 사람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참 좋은 배우라는 걸 <콜레라 시대의 사랑>으로 깨달았다. 그는 정말 멋지고 좋은 배우다. <햇빛 찬란한 월요일>의 노동자 산타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한 여자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침착하게 세월을 살아가는 플로렌티노 아리자였다.  

 

나이든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노년의 사랑' 이라고 콕 집어 부르는 게 일반화된 것 같다. <사랑은 너무 복잡해> <사랑할 때 버리기 아까운 것들> <어웨이 프럼 허> 등...의 영화를 빗대어 말할 때 그 수식어는 지겹게도 따라붙는다. 틀렸다는 게 아니다. 가만히 발음해보면 노년의 사랑이라는 말에는 쓸쓸함과 동시에 연민없는 동정이 느껴진다. 소년소녀의 사랑, 청춘의 사랑, 젊은이의 사랑, 중년의 사랑 등등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이렇게 글자로 적고나니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이건 순전히 나이에 깃들어 있는 나이듦의 슬픔에서 기원하고 있는 것 같다. 소년소녀라고 쓸 때는 파릇파릇하다 못해 귀여웠고, 청춘의 사랑은 서툴지만 뜨겁다. 그래도 우리, 이제부터 노년의 사랑이라고 콕 집어 말하기 보다는 (나이드는 것도 서러운데!) 한 남자의 한 여자의 어떤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라고 말하자. 당신도 곧, 늙는다.     

   

콜레라시대의 사랑, 을 노년의 사랑이라고 콕 집어 말하는 건 조금 더 어울리지 않는다. 이건 순전히 사랑에 대한, 사랑을 위한, 사랑의 영화다. 소설은 읽고 있는 중이라 뭐라고 얘기할 수 없지만 일단 영화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 사랑을 이룬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그저 사랑을 이루느라 기다렸을 뿐인데 은발의 머리와 수염, 굽은 허리를 갖게 되었다. 그는 인내를 알고 지치지 않으려 노력했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주 약간의 스포가 있는 단락 ↓>

대신, 노년의 사랑을 콜레라시대의 사랑 이라고 부르는거다. 어떤 장애물과 생의 굴곡을 다 뛰어넘은 뒤, 비로소 내 품으로 돌아온 그대와 나누는 안전망 모드 '콜레라'. 페리에 콜레라 환자가 타고 있으면 환자 외에 아무도 탑승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콜레라 모드로 설정하고 망망대해를 거침없이 가로지르며 오랫동안 기다려온 사랑을 나누는거다.  

 

하비에르 바르뎀은 완벽한 플로렌티노 아리자다. 영화가 파국으로 흘러갈 때 배우가 바뀐 게 아닐까 의심했었다. 느릿느릿 그러나 여유있게 말하는 그의 음색은 심야의 라틴 음악 디제이로도 손색이 없다. 만약 한밤중 라디오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잠 자는 걸 과감히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팬은 아니다. 이상하다. 팬이라고 말하기엔 마음이 좀 부족하다. 그가 나오는 영화라면 믿음을 갖겠지만 쭉- 챙겨보겠다는 다짐은 아니란건가. 알 수 없는 내마음.  

영화에 반해서 원작 소설을 읽고 있다. 마르께스 선생님은 참 정력가이기도 하지. 필력이 어찌나 좋으신지 비행기를 타지 않았는데도 금세 남미로 슝- 날아가 있는 기분이 든다. 영화와는 다른 느낌이다. 영화는 영화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좋아서 아주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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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6-17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영화로도 나왔군요.
그러고 보면 사랑은 젊음의 전위물도 아닌데 어쩌자고 젊은이의 사랑만 다루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늙어서도 과연 사랑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사랑이 젊을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더 힘든 건지 그걸 모르겠어요.흐흐

stella.K 2010-06-17 16:31   좋아요 0 | URL
오늘 7, 총 100101
그런데 알고 봤더니 님도 이제 10만대를 돌파했구려.
축하해요!^^

플레져 2010-06-17 16:39   좋아요 0 | URL
콜레라..를 보니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나이와 상관없이! 몸매(?)와 상관없이! 사랑할 수 있을 거 같아요 ^^;;

어머. 그러네요.
스텔라님이 1만을 10만으로 착각했나 했더니 10만 넘었네.
내가 없어도 서재는 빙빙 잘 돌아가나봐요..ㅎㅎ
축하 감사!! ㅎㅎ

stella.K 2010-06-17 16:50   좋아요 0 | URL
1만인지 10만인지, 플레져님 이제 서재엔 영 관심이 없으신가 봅니다.ㅋ
너무해요.ㅠ

플레져 2010-06-17 17:01   좋아요 0 | URL
기력이 딸려서 그래요!! ㅋㅋ
스텔라님을 향한 관심은 꺼지지않게 켜두리다~~흐흐...

2010-06-17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8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6-17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비에르 바르뎀...좋은 배우라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판단은 이런 영화에서의 주연과 성격이 정반대되는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의 무시무시한 킬러 안톤 시거의 역활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는데 있다고 보여져요..앞으로 이 배우 영화는 챙겨봐야 할 의무감이 생길 정도로요..^^

플레져 2010-06-18 20:32   좋아요 0 | URL
아. 그 영화를 아직 못 봤어요. (메모하고 있음, 꼭 보자! ^^)
저도 기꺼이 바르뎀의 영화를 볼 거 같아요 ㅎㅎ
 

올해의 시간이 저물고 있다. 잘가라, 2009.   

우리 동네에 익숙해졌고 어두운 밤이 무섭지도 않다. 지난 가을에서야 나는 귀신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났다.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무섭냐는 질문에 나는 늘 귀신이라고 말했다. 머리 풀고 흰 옷 입은 캐릭터로서의 귀신이 나는 제일 무서웠다. 방문을 열고 나가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봐 갑자기 천장에서 거꾸로 매달린채 나타나 메롱할까봐 문 틈 사이로 통통 뛰다 스윽 들어올까봐... 무서웠다. 귀신 캐릭터는 순전히 어린 시절에 주워들은 소문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에서 연유하고 있다. 심장에 찰싹 달라붙어 있을만큼 공포를 느꼈고 공포는 지금까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랬던 귀신을 극복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꿈이나 현실에서 귀신은 내 앞에 나타난 적은 없다. 순전히 내 상상이고 허상이다. 공포 욕망이다.  


올해 가을 나는 조금 성장했다. 스스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쑥스럽지만 귀신에 대한 공포를 물린친것은 내 인생의 수확이다. 한밤중에 문득 귀신이 생각나도 나는 결코 무섭지 않다. 혹 거기 있거든 날 방해나 하지 말아줘요, 라고 속삭이는 경지에 이르렀으니까. 두어달 전엔 끔찍한 귀신 꿈을 꿨는데 곱씹어 생각해보니 재밌다. 귀신은 머리를 풀었으나 긴 생머리가 아니었다. 막 셋팅롤을 하고 온 것처럼 굵은 웨이브진 머리였고 길고 늘씬한 손톱은 네일샵에 다녀온 것처럼 빨간 메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나를 놀래켜주려고 문 뒤에서 스윽 나타났지만 놀라지 않았다. 흰색 셔츠형 잠옷은 섹시했다. 엄마에게 귀신을 말하면서 나는 웃기까지 했다. 내 마음의 어떤 겹을 물리친거였다.  


서울에 살 때는 결혼을 했어도 결혼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부모님이 지척에 있었고 나는 그저 조금 먼 방으로 옮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울을 떠나 이곳에 살다보니 이제서야 결혼한 느낌이 난다. 나, 유부녀구나 싶다. 나, 아줌마라고 불리어도 되는구나 싶다. 나, 독립해야 하는구나 싶다. 처음으로 김치를 담갔던 날 김치 담그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했다. 재도전하기 매우 겁나는 메뉴 중 하나다. 그래도 한겨울에 먹는 동치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엄마가 보내주겠다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고 도전하기로 결정. 동치미 재료를 준비했다. 엄마는 아주 쉽다며 응원했다. 나도 아주 쉬울거라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간을 맞추고 며칠을 돌보고 푹 재웠다. 결과는 '내가 잠든 사이 엄마가 담가놓고 간 것 같은' 엄마표 동치미가 완성되었다. 나날이 점점 더 엄마표 동치미 맛이 난다. 곰소에서 사온 소금도 한 몫 했다. 그야말로 놀.라.운.동.치.미의 탄생이다!   

 



나의 첫, 동치미  



적절한 소금의 맛, 삭히는 소금의 맛은 오묘하다. 놀라운 동치미와 올해의 시간이 가르쳐주었다. 나는 흠뻑 소금의 시간에 들어갔다. 열정열정열정 오기오기오기 질주질주질주... 소금의 시간은 무엇이든 두 배 세 배의 욕망을 요구했다. 나는 서툴렀고 자주 징징거렸다. 소금의 시간은 곧 끝났다. 소금기가 쫙 빠지니 담백해졌다. 무서운 귀신, 지나친 열정과 욕심, 우연한 행운을 소금의 시간에 두고 왔다. 나는 열정적이지만 적당히 뜨겁다. 욕심은 있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연한 행운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다. 만약 행운이 온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필연이 되도록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몹시 다사다난했던 한 해는 진정한 소금의 시간이었다. 새해에는 모두에게 놀라운 동치미의 탄생처럼 잘 삭힌 소금 맛이 나는 시간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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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1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2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1-02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음식 맛은 객관적 평가가 중요하다고 보여집니다 플레져님...
자 주소 불러드립니다...동치미 한 박스 부탁합니다 착불로 보내시면 됩니다.=3=3=3

플레져 2010-01-02 14:03   좋아요 0 | URL
동치마라~~ 후후~
동치미는 있지만 그건 없어서 이를 어쩐다...ㅋ

Mephistopheles 2010-01-02 14:50   좋아요 0 | URL
수정했으니까 이제 보내주세요 동.치.미.

플레져 2010-01-04 12:25   좋아요 0 | URL
항복.
아주 맛있을거라 상상해주세요.
메피님이 먹어봤던 최고의 맛을 상상해주세요. 플리이즈...ㅎㅎ

stella.K 2009-12-31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것 한 사발 후루룩 마셔보고 싶네요.
무는 또 얼마나 아삭할까요? 아흑~
플레져님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플레져 2010-01-02 14:04   좋아요 0 | URL
장담하지만 몹시 아삭합니다 ㅎㅎ
스텔라님, 건필하시고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해피뉴이어 ^^

2010-01-18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8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