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산 -하 을유세계문학전집 2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원, 천만에요." 베렌스가 대답했다. "그런 생각을 할 여자가 아니지요. 첫째로는 게을러서 그렇고, 둘째로는 대체 어떻게 글을 쓴단 말입니까? 나는 러시아어를 읽을 줄 모릅니다. 정 부득이할 경우에는 엉터리로 어떻게 해 낼 수는 있겠지만, 러시아 말은 전혀 읽을 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리고 그 새끼 고양이는 프랑스어나 표준 독일어도 귀엽게 야옹야옹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막상 글로 쓰려고 하면 당황해 어쩔 줄 말라 하겠지요. 그 정서법이라는 게, 이보시오! 그래요, 그러니 우리 서로를 위로하도록 합시다, 젊은이! 그녀는 늘 잊을 만하면 다시 돌아옵니다. 이미 말했듯이 그건 기법의 문제이자 기질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걸핏하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또 어떤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도록 처음부터 장기간 머물지요. 당신의 사촌이 지금 떠나려고 한다면 그가 다시 장엄하게 입성하는 것을 당신이 여기서 체험하기 쉬울 거라고 그에게 좀 말해 주십시오."(26∼27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6장》, <변화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의 산 -하 을유세계문학전집 2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다. 실체가 없으면서 전능한 것이다. 현상계(現象界)의 하나의 조건으로 공간 속에 존재하는 물체와 그것의 운동과 결부되고 혼합된 하나의 운동이다. 그러면 운동이 없으면 시간도 없는 걸까? 뭐든 물어 보라! 시간은 공간이 행하는 기능의 하나인가? 또는 그 반대일까? 또는 두 개가 동일한 것일까? 얼마든지 물어 보라! 시간은 활동적이고, 동사적인 속성을 갖고 있어, 그것은 '낳는' 힘을 지닌다. 그러면 시간은 무엇을 낳을까? 변화를 낳는 것이다! 지금이 당시가 아니고, 이곳이 저곳이 아닌 것은, 이 두 개 사이에 운동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을 재는 운동은 순환적이고, 자체적으로 완결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운동과 변화는 거의 정지와 정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당시는 부단히 현재 속에, 저곳은 이곳 속에 쉬지 않고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한한 시간과 한정된 공간이라는 개념은 아무리 필사적인 노력을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영원하고 무한하다고 '생각'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분명 이게 사리에 맞을 거리는 믿음에서, 딱히 옳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좀 더 나을 거라는 믿음에서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과 무한한 것을 확실하게 정한다는 것은 한정된 것과 유한한 것을 논리적으로나 수학적으로 부정하고, 상대적으로 그것을 영(零)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닐까? 거리, 운동, 변화 같은 개념들이나, 또는 우주 속의 한정된 물체라는 존재가 영원한 것과 무한한 것이라는 임시적인 가정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좌우간 얼마든지 물어 보라!

  

한스 카스토르프는 머릿속에서 이런 것을, 이와 유사한 것을 물어 보았다. 그의 머리는 이 위에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고 꼬치꼬치 캐묻는 것에 적합한 본성을 드러냈다. 그 후로 점잖지 못하지만 강력한 욕구를 충족하고 난 후 어쩌면 특히 이런 것에 예민해지고, 이것저것 따지는 데 대담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러한 질문을 자기 자신과 선량한 요아힘에게 했고, 아득히 먼 옛날부터 눈에 잔뜩 뒤덮여 있는 골짜기에게도 했지만,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그럴듯한 대답을 기대할 수 없었다.(9∼10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6장》, <변화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7-09-02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마스 만의 이야기가 일전에 oren님께서 말씀하신 베르그송의 시간과도 연계되지 않을까 조심럽게 추측해 봅니다...

oren 2017-09-02 14:00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마의 산』 속에 나오는 ‘시간과 공간 이야기‘를 들으면 흡사 베르그송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베르그송이 직접 영문으로 번역한 책의 제목은 『시간과 자유의지』)을 ‘복습‘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9-02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렇군요.. 후에 <마의 산>을 읽기 전 베르그송에 대해 미리 공부해야겠습니다. oren님 덕분에 학습 계획을 세우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oren 2017-09-02 23:56   좋아요 1 | URL
철학자 베르그송은 여러모로 참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그의 철학 사상도 몹시 흥미롭지만, 그가 구사하는 문장도 여간 매혹적인 게 아니어서요.
 
마의 산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1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아! 사랑이란…… 육체, 사랑, 죽음, 이 셋은 원래 하나야. 육체는 병과 쾌락이고, 육체야말로 죽음을 낳기 때문이지. 그래, 사랑과 죽음, 이 둘은 다 육체적인 것으로, 거기에 이 둘의 공포와 위대한 마술이 있지! 그러나 죽음은 한편으로는 미심쩍고 후안무치하며 얼굴을 붉히게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주 장엄하고 존엄한 힘으로 ㅡ 돈을 벌고 즐기며 희희낙락하는 삶보다 훨씬 더 고귀해 ㅡ 시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진보보다 훨씬 더 존경할 만하지. 왜냐하면 죽음은 역사적인 것이고 고상함이자 경건함이고 영원함이며 신성함이기 때문에, 우리가 모자를 벗고 발끝으로 조심조심 걸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육체도, 육체에 대한 사랑도 음란하고 난처한 성질을 띠고 있어. 육체는 스스로를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여 피부를 붉게 물들이기도 해. 하지만 또한 육체는 숭배할 만한 위대한 영화(英華)이고, 유기 생명의 기적과도 같은 형상이며 형태와 아름다움의 불가사의한 신성함이야. 그리고 이에 대한 사랑, 인체에 대한 사랑은, 이 역시 아주 인문적인 관심이며, 세상의 온갖 교육학보다 더욱 교육적인 힘이야! 아, 이 매혹적인 유기체의 아름다움은 화구(畵具)나 돌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부패성 물질로 되어 있고, 생명과 부패라는 열을 내는 비밀로 가득 차 있어! 자 그럼, 인체 조직의 불가사의한 대칭 구조를 봐! 양 어깨와 허리, 양 가슴의 꽃 같은 젖꼭지, 그리고 양쪽에 두 개씩 나란히 달리는 갈비뼈, 부드러운 복부와 가운데의 배꼽, 다리 사이의 검은 보고(寶庫), 등의 매끄러운 피부 아래에서 견갑골이 움직이는 모양을 봐! 그리고 싱싱하고 풍만한 두 엉덩이를 향해 내려가는 등뼈의 모양, 몸 기둥에서 겨드랑이를 통해 사지로 뻗어 나가는 혈관과 신경의 굵은 가지, 두 팔이 두 다리의 구조에 대응하는 모양을 봐! 아, 팔꿈치와 무릎 관절 안쪽의 부드러운 부분, 그리고 그 살의 쿠션에 쌓인 부분의 유기체가 지닌 수많은 비밀! 인체의 이 감미로운 부분을 애무하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희열일까! 아,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환희! 아, 정교한 관절 주머니가 지방을 분비하고 있는 네 무릎의 피부 냄새를 맡게 해 줘! 너의 온 허벅지에서 고동치고, 훨씬 아래에서 두 개의 경부 동맥으로 갈라지는 대퇴부 동맥에 경건하게 내 입술을 닿게 해 줘! 너의 털구멍에서 나는 분비물을 냄새 맡고, 너의 부드러운 털을 애무하게 해 줘! 물과 단백질로 이루어져 무덤에서 분해될 운명을 지닌 인간의 형상이여, 너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대고 영원히 죽게 해 줘!"(651∼652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상권』, 《제5장》, <발푸르기스의 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7-09-02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육체, 사랑, 죽음이 하나라는 구절이 인상적입니다. 삼위일체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그리고, 육체와 상대되는 정신의 짝은 무엇일까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신-냉정-영원이 상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oren 2017-09-02 13:57   좋아요 1 | URL
<육체, 사랑, 죽음이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정신, 이성, 삶이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신이 죽어 있으면 그 자체로 ‘삶‘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을 테니까 말이죠.

겨울호랑이 2017-09-02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렇네요. 죽음의 대칭은 삶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oren 2017-09-02 23:57   좋아요 1 | URL
그냥 즉흥적으로 써 봤지만, 곰곰 따져보면 조금 이상한 느낌도 듭니다.^^
 
마의 산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1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나는 알아, 내 몸의 열, 몹시 지쳐 있는 심장의 고동, 팔다리의 오한, 이런 것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 한스 카스토르프는 입술을 떨면서 창백한 얼굴을 더욱 깊숙이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이것은 다름 아닌 너에 대한 사랑 때문이야. 그래, 이 눈으로 너를 본 순간 내 마음을 사로잡은 사랑 때문이야. 아니, 그보다도 너라는 걸 알아본 순간 내 마음속에 다시 살아난 사랑 때문이야. 그리고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온 것도 그 사랑이야."

 

"말도 안 되는 망상이야!"

 

"아, 사랑이 망상이 아니라면, 무모한 짓이나 금단의 열매가 아니고 죄악 속의 모험이 아니라면 그것은 보잘것없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사랑은 평지의 한가하고 하찮은 노래에 알맞은 기분 좋게 진부한 것에 불과하겠지. 하지만 네가 그라는 것을 알고, 너에게 다시 사랑을 느낀 것은 …… 그래, 실은 내가 너를 옛날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너를, 이상야릇하게 기울어진 너의 눈을, 너의 입술을, 네가 말하는 목소리를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어. 오래전에도, 언젠가 학창 시절에 나는 너한테서 연필을 빌린 적이 있었지. 마침내 너와 세속적인 의미에서도 알고 싶었기 때문이야. 이성을 잃을 정도로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베렌스가 내 몸에서 발견한 흔적, 내가 이전에도 병을 앓았음을 증명하는 흔적, 이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그 때문에 남아 있는 거야. 너에 대한 나의 해묵은 사랑이 남긴 흔적인 거지.".(649∼650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상권』, 《제5장》, <발푸르기스의 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의 산 -상 을유세계문학전집 1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밑줄긋기)

 

 

"그러면 됐어." 한스 카스토르프는 말을 계속했다. "말한다는 것은 가련한 일이지. 영원 속에서는 말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아. 영원 속에서는 새끼 돼지를 그릴 때처럼 하는 거야. 말하자면 머리를 뒤로 젖힌 채 두 눈을 감고 하늘을 쳐다보는 거야."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네! 너는 영원에 대해 잘 알고 있구나. 정말이야. 아주 잘 알고 있어. 네가 귀여운 몽상가이고 참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해야겠어."

 

"게다가 또. 내가 좀 더 일찍 너와 대화를 나누었다면 너를 당신이라고 불렀을 거야."

 

"아니, 그럼 이제부터 나를 영원히 너라고 부를 작정이야?"

 

"응. 지금까지 그렇게 부르고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부를 거야."(641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상권』, 《제5장》, <발푸르기스의 밤>

 

(나의 생각)

이 장면이야말로 『마의 산』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짜릿한 장면이다. 먼 훗날 '어느 시인'이 이 대목을 '시'로 읊었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 * *

 

 시인은 죽지 않지만

 진실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당신은 아시죠.

 이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에서

 무엇으로 시에 불을 밝힐까요?

 카스토르프가 마담 쇼샤에게 그랬듯이

 오늘 밤 서로에게 불을 밝혀요.

 

 - 아틸라 요제프,  <토마스 만을 환영하며>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