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산 -하 을유세계문학전집 2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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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우리는 시간을, 순전히 시간 그 자체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아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짓이다. '시간이 지나갔고, 시간이 경과했으며, 시간이 흘러갔다.' 건전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결코 이야기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음이나 화음을 한 시간 동안 미친 듯이 계속 울려 대고는 이를 음악이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야기는 시간을 채우고, 시간을 '품위 있게 메우며', 시간을 '잘게 나누고', 시간에 '내용을 부여하여', 언제나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점에서 음악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인이 된 요아힘이 어떤 기회에 입 밖에 낸 말, 망자가 된 사람의 말을 추억하는 의미에서 슬프고도 경건한 기분으로 인용해 본 것이다. 아득히 오래전에 잊힌 이 말이, 얼마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는가를 독자가 과연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간의 삶의 기본 요소이듯이, 시간은 이야기의 기본 요소이다. 시간이 공간 내의 물체와 결부되어 있듯이, 시간은 이야기와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시간은 시간을 재고 나누며, 시간을 짧게 하기도 하고 동시에 값지게도 하는 음악의 기본 요소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방금 말했듯이 음악은 이야기와 유사하다. 이야기도 음악과 마찬가지로 (조형 예술 작품처럼 단번에 눈에 들어오며, 물체로서만 시간에 결부되어 나타나는 것과는 달리) 연속적으로만, 시간이 경과해야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전체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한다 하더라도 이야기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는 누구나 다 아는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야기와 음악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는 것도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음악의 시간적 요소는 단 한 가지뿐으로, 그것은 인간의 지상의 시간을 잘라내 구분 짓는 일이다. 구분된 부분에 음악이 흘러 들어가, 그것을 말할 수 없이 고상하게 드높이는 것이다. 반면에 이야기는 두 가지 종류의 시간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이야기 자신의 시간, 이야기가 진행되고 나타나는 데 필요한 음악적이고 현실적인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서술 시점과 관련되는 이야기의 내용에 따른 시간이다. 그런데 이 경우는 아주 달라서, 이야기의 허구적인 시간이 음악적 시간과 거의, 아니 꼭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서로 아주 판이하게 다를 수도 있다. 「5분 왈츠」라는 음악 작품은 5분간 지속되는 곳이다. 이런 점에서 시간에 대한 그 왈츠 곡의 관계는 그것밖에 없다. 하지만 내용 시간이 5분인 이야기, 그 5분 동안 일어난 이야기를 나름대로 극단적으로 세세하게 이야기한다면 5분의 천 배도 걸릴 수 있다. 그리고 이때 허구적인 내용 시간 5분에 비해 그 시간이 무척 지루하겠지만, 아주 짧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야기의 내용 시간이 엄청 길게 지속되는 바람에 이야기를 대폭 줄여서 말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우리가 '줄여서' 말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환상적인 요소, 아주 명확히 말하면 여기에 분명히 관련되는 어떤 병적인 요소를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즉 이야기가 연금술적인 마술이나 시간을 초월하는 시점을 사용하는 경우가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들은 현실적인 경험의 어떤 비정상적인 사례나 분명히 초감각적인 것을 나타내 주는 사례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 아편 복용자의 수기를 살펴 보기로 하자. 아편에 취한 자는 황홀경에 빠져 있는 짧은 시간 동안에 온갖 환상을 두루 겪는다고 한다. 그 환상의 시간적 범위는 10년, 30년, 아니 60년에 달하거나, 또는 심지어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를 넘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환상의 허구적인 시공간은 실제로 이야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엄청 초과하여, 시간 체험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대폭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마약인 하시시 복용자의 말에 따르면, 그것에 도취된 자의 뇌에서 '망가진 시계의 태엽마냥 무언가가 제거되기라도' 한 것처럼 눈부신 속도로 온갖 상념이 밀려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아편 복용자의 환상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시간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시간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시간을 '다룰'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기본 요소인 시간이 이야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지나친 말이긴 해도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생각은, 처음에 그래 보였던 것과는 달리 결코 이치에 어긋나는 시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대 소설'이라는 명칭에는 독특하게 몽상적인 이중적 의미가 담겨 있다. 사실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은 현재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정말 시간을 이야기하려는 생각이 있음을 고백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는 사이에 고인이 된, 명예를 중히 여기는 요아힘이 언젠가 대화 중에 음악과 시간에 대해 불쑥 꺼낸 말이 (아닌 게 아니라 그러한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이 착실한 요아힘의 본성에 맞지 않으므로, 그의 본질이 어떤 연금술적인 고양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언제 적 이야기인가를, 우리 주위에 모인 독자들이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지 하는 문제를 언뜻 언급한 적이 있었다. 사실 현재 그것을 독자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다지 화내지 않을 것이다.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만족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는 모든 독자가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체험에 동참하도록 하는 일이 우리의 관심사인데, 정작 한스카스토르프 자신은 앞에서 언급한 문제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것도 벌써 아득히 오래 전에 깡그리 잊어버렸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시대 소설'이면서 '시간 소설'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379∼382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7장》, <해변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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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의 죽음은 우리 자신의 문제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우리가 이제 제대로 인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떤 재기 있는 현자가 한 말은 어쨌든 정신적으로 전적으로 타당하다 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가 존재하는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와 죽음 사이에는 어떠한 현실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와 하등 관련이 없으며 기껏해야 우주와 자연하고만 약간 관계가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모든 생물체들은 죽음을 아주 태연하고 무관심하며 무책임하게, 이기적으로 천진난만하게 바라본다.(360∼361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6장》, <군인으로 용감하게>

 

(내 생각)

 

이 대목에서 작가가 말한 '어떤 재기 있는 현자'는 아마도 몽테뉴가 아니었을까 싶다. 토마스 만이 '몽테뉴'를 얼마만큼 좋아했는지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마의 산』에는 '몽테뉴의 사상'이 꽤나 깊게 침윤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혹시라도 토마스 만이 말한 '어떤 재기 있는 현자'가 '몽테뉴'가 아니라면, 그는 틀림없이 '쇼펜하우어'다. 쇼펜하우어가 쓴 글 가운데 이와 닮은 글이 여럿 있다는 것도 명백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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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정신은 정신 그 자체이며, 분석과 형식이 결합된 기적입니다. 문학 정신은 온갖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해력을 일깨워 주어, 어리석은 가치 판단과 신념을 약화, 해소시키며, 인류의 교화, 수놔 및 향상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문학 정신은 최고의 도덕적 세련성과 민감성을 유발하면서, 광적으로 만드는 대신에 회의, 정의 및 인내의 정신을 함양시켜 줍니다. 문학의 정화 작용과 순화 작용, 인식과 언어를 통한 열정의 억제, 이해와 용서, 사랑으로 이끄는 길인 문학, 언어가 지닌 구원의 힘, 무릇 인간 정신의 가장 고상한 션상인 문학적 정신, 완전한 인간이자 성자인 문사." 이렇게 찬란한 어조로 세템브리니는 문학을 옹호하는 송가(頌歌)를 계속 늘어놓았다. 아, 하지만 상대방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보존과 생명을 편들고 천사의 탈을 쓴 해체의 정신에 반대하면서, 천사의 송가를 신랄하고도 멋지게 반박하여 방해할 줄 알았다. "세템브리니 씨가 목소리를 떨면서 말한 놀라운 결합이란 사기이자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학 정신이 탐구와 분류의 원리에 형식을 결합시키려 한다고 자랑하지만 그 형식은 기만적이고 사기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하고 성숙하며 자연스러운 형식, 생명의 형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인간 개선자는 인류의 정화와 순화를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지만, 사실 그가 노리는 것은 생명을 거세하고 빈혈에 허덕이게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습니다, 정신이며 열정적인 이론은 생명을 능멸할 뿐이며, 열정을 파괴하려고 하는 자는 무(無), 순전한 무를 원하는 자입니다. 물론 순전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어쨌든 무에 덧붙일 수 있는 형용사는 사실 '순전한' 이라는 형용사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 진보와 자유주의, 그리고 시민적 혁명의 문사인 세템브리니 씨의 본령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진보란 순전한 허무주의이며, 자유주의적인 시민은 엄밀히 말하면 전적으로 무와 악마의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보란 악마적이고 절대자에 반하는 것을 신봉하고, 죽음과 다름없는 평화주의를 대단하도고 경건하게 여기면서, 보수적이고 긍정적인 의미에서 절대자, 즉 신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주의는 결코 경건하지 않으며, 생명을 파괴하는 중죄인으로, 생명의 종교 재판, 엄중한 비밀 재판에 회부하여 호된 맛을 보여 줘야 할 겁니다."(347∼348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6장》, <군인으로 용감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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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삶, 병과 건강, 정신과 자연, 이런 것이 서로 모순되는 것일까? 그런 게 과연 문제가 되는지 묻고 싶어. 아니야,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고, 어느 것이 고귀한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아. 죽음의 모험은 삶 속에 포함되어 있고, 그러한 모험이 없으면 삶이 아닐지도 몰라. 그리고 인간의 상태가 신비스러운 공동체와 미덥지 못한 개별 존재 사이에 있듯이, 신의 아들인 인간의 본성은 그 한가운데, 모험과 이성의 한가운데에 있어. 이 돌기둥 아래서 바라보니 그런 생각이 들어.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우아하고 정중하게, 친절하고 공손하게 자기 자신을 대해야 해. 인간만이 고귀한 존재며, 대립은 고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인간은 대립을 다스리는 주인이고, 대립이란 인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므로, 인간이 대립보다 더 고귀한 거야. 인간은 죽음에 종속시키기에는 참으로 고귀한 두뇌의 자유를 가졌기 때문에 죽음보다 고귀한 존재야. 마찬가지로 인간은 삶에 종속시키기에는 참으로 고귀한 정신의 경건함을 가졌기 때문에 삶보다도 고귀하다. 이렇게 나는 하나의 시를, 인간에 관한 꿈결 같은 시를 지었다. 나는 이를 잊지 않을 것이며, 선하게 살고자 한다. 나의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넘겨주지 않으련다! 착한 마음씨와 인간애의 본질은 이런 것에 있지, 다른 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하나의 위대한 힘이다. 죽음 앞에서는 우리는 모자를 벗고, 발끝으로 걸으며 살금살금 앞으로 나아간다. 죽음은 과거 위엄을 나타내는 장식 깃을 달고 있으며, 인간 자신은 죽음에 경의를 표하며 엄숙하게 검은 옷을 입는다. 이성은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이성이란 덕에 지나지 않지만, 죽음은 자유이자 방종한 모험이고, 무형식이자 색욕이기 때문이다. 나의 꿈에 의하면 죽음은 색욕이지 사랑은 아니다. 죽음과 사랑 ㅡ 이것은 배합이 맞지 않으며, 얼토당토않은 잘못된 운이다! 사랑은 죽음에 대립하고 있으며,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죽음보다 강한 것이다. 이성이 아니라 사랑만이 선한 생각을 갖게 한다. 형식도 오로지 사랑과 착한 마음씨에서 생기는 것이고, 분별력 있고 우호적인 공동체와 인간의 아름다운 나라의 형식과 예의바름은 피의 향연을 조용히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 이렇게 나는 선명하게 꿈을 꾸고, 멋지게 '술래잡기'를 했다! 나는 이를 잊지 않을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죽음을 성실하게 대하겠지만, 죽음과 과거의 것에 대한 성실성이 우리의 생각과 술래잡기를 지배한다면, 그 성실성은 악의와 음산한 육욕과 인간에 대한 적대감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기억해 두기로 하자. 인간은 착한 마음씨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자, 이제 눈을 뜨기로 하자. 이것으로 나는 꿈을 끝까지 다 꾸고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나는 이 말을 찾고 있었다. 히페가 내 마음속에 나타난 장소와 발코니에서, 그 어디에서도 말이다. 눈 덮인 산 속에 들어온 것도 그 말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여 나는 결국 찾아내고 말았다. 내가 그것을 영원히 잊지 않도록 내 꿈이 더없이 선명하게 제시해 주었다. 그렇다, 그 말을 찾은 나는 환희에 사로잡혀 몸이 완전히 따뜻해졌다. 내 심장은 세차게 고동치고 있으며, 왜 그런지 알고 있다. 가슴이 뛰는 것은 신체의 손톱이 자란다고 하는 단순히 생리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이유, 행복한 기분 때문이다. 내 꿈의 말은 포도주나 흑백주보다 더 달콤한 음로수다. 그 음료수는 사랑이나 생명처럼 나의 혈관을 타고 흘러 나를 잠과 꿈에서 깨어나게 한다. 잠과 꿈에 빠지면 내 젊은 목숨이 치명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아, 일어나라! 눈을 뜨라! 너의 다리와 팔이 여기 눈 속에 빠져 있다! 다리를 끌어당기고 일어나라! 자, 보렴, 날씨가 얼마나 좋은가를!(293∼295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6장》, <눈>

 

(나의 생각)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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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꽃눈이 진짜 눈으로 덮여 버려 크로커스 다음에 핀 푸른 앵초와 노랗고 붉은 앵초도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다. 봄은 이곳의 겨울을 제압하고 뚫고 나아가기 위해 얼마나 악전고투를 했던가! 봄은 이곳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 수도 없이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그러다가 하얀 눈보라와 살을 에는 추위 그리고 난방 장치와 함께 다시 겨울이 찾아오는 것이다. 5월 초(우리가 눈꽃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벌써 어느덧 5월이 되었다). 이때만 해도 발코니에서 평지의 고향에 보낼 엽서를 쓰는 일은 말도 못하게 고통스러웠고, 11월의 습한 강추위 때처럼 손가락이 얼어붙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얼마 안 되는 활엽수들은 평지에 자라는 1월의 나무들처럼 벌거벗은 모습이었다. 연일 비가 내렸고, 일주일이나 계속 쏟아졌다. 이곳과 같은 편안한 접이식 침대가 없었더라면 자옥한 구름 속에서 축축하고 굳은 얼굴로 여러 시간 동안 야외에서 안정 요양을 한다는 것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밖에서 소리 없이 내리는 비는 봄비가 분명해서, 비가 오랫동안 계속해서 내릴수록 그러한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봄비에 거의 모든 눈이 봄눈 녹듯 사라져, 흰눈은 이제 어디서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다만 군데군데 회색으로 더럽혀져 얼음이 된 눈이 있을 뿐, 이제야말로 정말 풀밭이 녹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만날 흰눈만 보다가 녹색의 풀밭을 보니 눈이 얼마나 즐거웠던가! 그리고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녹색이었고, 섬세함과 사랑스러운 부드러움이라는 면에서 새로운 녹색이 풀밭을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낙엽속의 어린 침엽수였다. 한스 카스토르프는 규정된 산책을 하는 도중에 그것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볼에 문지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의 부드러움과 신선함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다. "식물학자가 되어도 좋겠어." 젊은이는 자신의 길동무에게 말했다. "이 산 위에서 겨울이 지나고 만물이 소생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다 보니 식물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 이봐, 저기 산비탈에 보이는 저것은 용담이야. 그리고 여기 이것은 작고 노란 제비꽃의 일종인데 나도 처음 보는 거야. 이것은 미나리아재비인데 평지에서 보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이것은 꽃잎이 여러 겹으로 겹쳐 피는 것이 주목할 만해. 이것은 특히 매력적인 식물로, 게다가 자웅동체야. 여기에 많은 화분 주머니와 몇 개의 씨방이 보이지. 내가 알기로는 그게 수술과 암술일 거야. 이런저런 식물학과 관련된 흥미로운 책을 사서 생명 분야와 이런 학문 분야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어. 그래, 이제 온 세상이 그야말로 울긋불긋해졌어!"(44∼46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하권』, 《제6장》, <변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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