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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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2 권


1. 우리 행동의 줏대 없음에 대하여



한 공장 351

인간의 행동을 검토하는 자들은, 그 행동을 하나의 동일한 전체 모습으로 맞추어 보려고 할 때 가장 당혹하게 된다. 왜냐하면 행동들은 이상하게도 대개 서로 모순되어, 도무지 그것이 한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가짜 간판 357


우리의 행동은 여러 조각을 모아서 꾸민 것에 불과하며 '탐락을 경멸하지만 고통을 받으면 비굴해지고, 영광은 모멸하나 세평이 언짢으면 용기가 꺾여지고'(키케로), 가짜 간판을 세워 놓고 영광을 얻으려 한다. 도덕은 오직 그 자체를 위해서만 추종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끔 다른 목적으로 그 가면을 빌려 오면, 도덕은 바로 이것을 벗어 내던진다.


우연의 힘 357


어느 옛 사람(세네카를 말함)은 우리는 우연 속에 살고 있으니, 우리에게 미치는 우연의 힘이 크다는 것에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라고 하였다.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 358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는 우리와 남들 사이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항상 동일한 인간으로서 행세하기는 대단히 어려움을 명심하라."(세네카) 


2. 술주정에 대하여



마지막 쾌락 364


노령에 이르면 몸이 불편해져서 어디건 의탁하고 싶어지며 마실 것이 필요하게 되는 법이니, 내가 이런 재미를 찾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생의 흐름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마지막 쾌락인 까닭이다. 좋은 친구들의 말로 인간 천성의 열기가 처음으로 발에 오른다고 하나, 그것은 어릴 때의 일이다. 그 열기는 몸의 중허리로 올라가며, 오랫동안 거기에 박혀서 내가 보기에는 육체 생활의 유일하고 진실한 쾌락을 지어 준다. 다른 쾌락은 거기에 비하면 잠자는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 종말에는 그것이 올라가서 날아가는 김과 같이 열기는 목구멍에 도달하며, 거기서 마지막 자리를 잡는다.

플라톤은 18세 전에 술 마시는 것을 금하고 40세 전에 취하도록 마시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40세가 넘은 자들에게는 취하기를 즐기며, 식사 때 인간에게 쾌활을 주고 노년에게 청춘을 돌려 주며, 마치 쇠가 불에 물러지는 것처럼 심령의 정열을 무르고 부드럽게 해 주는 착한 신 디오니소소의 영향을 많이 받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그의 《법률편》에서는 술 마시는 모임을(그 집단에 우두머리가 있어 전부를 통제하고 조절한다면) 유익하다고 본다. 술에 취함은 각자의 본성을 다루기에 좋고 확실한 시련이며, 그와 아울러 나이 먹은 사람들에게 제정신을 가지고는 해 볼 생각도 못하는 춤과 음악을 즐기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는 술이 마음에 절도를 주고 신체에 건강을 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부분적으로 카르타고 인들에게서 빌려온 다음의 제한 규칙을 마음에 들어했다. 즉, 전쟁에 나갈 때는 삼갈 것, 모든 재판관들이 직무를 처리하는 때나 국무를 토의할 때는 술을 들지 말 것, 일을 보아야 할 낮 동안에는 거기에 시간을 허비하지 말 것, 또 어린애를 만들기로 작정한 밤에도 들지 말 것을 권한다.


광증이라고 불러도 옳은 일 368


우리의 마음은 그 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높게까지 도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때에는 마음이 자리를 떠나서 올라가며, 이로 재갈을 악물고 자기 육신을 빼앗아 너무 멀리 실어가며, 다음에는 자기 자신이 이 사실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전쟁에서 용감한 병사들이 공훈을 세울 때에 싸움에 열이 올라 무의식중에 가장 위험한 경지를 돌파하고 나서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자신도 놀라서 그의 용기에 소름이 끼치는 격이다. 그리고 또 시인들이 자기가 지은 작품에 스스로 감탄하며, 어떤 방법으로 그만큼 아름다운 줄기를 좇게 되었는지 알아보지 못하는 식이다. 그들은 이것을 자기들 속의 열기이며 광증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플라톤은 침착한 인간은 시가의 문을 두드려 보아도 헛일이라고 말한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도 역시 탁월한 심령에는 광기가 섞이지 않는 예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 고유의 판단력과 사고력을 초월하는 모든 비약은 그것이 아무리 칭찬할 만하여도, 광증이라고 불러도 옳은 일이다.


5. 양심에 대하여


양심 387

우리는 보이지 않는 채찍으로 매질하며

그 자체가 우리의 형리가 된다.               (주베날리스)

이것은 아이들의 입에 잘 오르는 이야기이다. 파이오니아 인 베소스는 장난으로 참새 집을 부수고 새를 죽였다는 책망을 받고, 이 작은 새들이 자기가 부친을 죽였다고 줄곧 비난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자기가 한 일이 옳다고 하였다. 부친을 죽인 범죄는 그때까지 드러나지 않아서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양심의 복수 신들은 누가 죄를 받아야 할 것인가를 드러나게 시켰던 것이다.


6. 실천에 대하여


탁월한 경지에 이르고자 원하는 자들은 391

사색과 교양은 기꺼이 신임하는 것이지만, 그것 외에도 경험에 의해서 우리 마음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훈련시키지 않으면, 이 사색과 교양이 우리를 행동하게 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심령이 실제 행동에 들어선 때에, 탁월한 경지에 이르고자 원하는 자들은, 싸움에 서투른 상태에서 경험 없이 세파에 뜻하지 않게 습격당할까 봐, 혹독한 운명에서 은신하여 편안하게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운명의 앞에 나가서, 진짜로 어려운 시련에 뛰어들기도 하였다. 어떤 자들은 자진하여 춥고 배고픔에 단련받기 위해서 부귀를 버렸고, 어떤 자들은 불행과 노고에 몸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힘든 노동과 혹독한 고생을 찾아 행동하였고, 또 어떤 자들은 신체의 어느 부분이 너무 유쾌하고 즐겁기 때문에 그들의 심령이 해이해질까봐 두려워하며, 시각이나 생식기관 같은 신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끊어 버렸다.


내 사색의 목표 399

벌써 여러 해 전부터 내 사색의 목표는 나 자신밖에 없었고, 나는 나 자신만을 살펴보고 연구해 본다. 그리고 내가 다른 일을 연구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에 적용해 보기, 또는 적절히 말하자면, 내 자신 속에 적응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쓸모가 많지 않은 다른 학문에서와 같이, 내가 내 배움의 깊이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배운 바를 남에게 전해 준다고 해도, 그것이 실수하는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만큼 어려운 묘사도 없으며, 그만큼 유용한 일도 없다. 이것을 밖에 내놓으려면, 그만큼 더 맵시 있게 잘 그려서 더 질서 있게 정리해야만 한다. (399쪽)

 


실제 있는 것보다 401


실제 있는 것보다 더 못하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음이지, 겸손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자기 가치보다 못한 짓을 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고 겁쟁이의 짓이다. 어떠한 도덕도 거기에서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 진리는 결코 잘못의 재료가 되지 못한다. 실제보다 더하게 자기를 말하는 것은 언제나 교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어리석음에서 나온다. 실제 있는 것보다 지나치게 잘났다고 생각하곤 분별 없이 자기 자랑에 빠지는 것이, 내 생각으로는 이 악덕의 실체이다. 그것을 고치는 최상의 치료법은 자기의 말하는 버릇을 금지케 하여, 그 결과로 더욱 자기 생각하기를 중지하는 자들이 명렬하는 바를 거꾸로 행하는 데 있다. 자존심은 사상 속에 있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402


자기가 가진 수많은 불완전하고 허약한 소질들과, 마지막에는 인간 조건의 허무함까지 동시에 고려해 넣는 자는, 어떠한 특수한 소질을 가지고도 자만심을 낼 수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홀로, '너 자신을 알라'는 그의 신의 교훈을 성실하게 이해하였다. 그리고 이 연구로 자기를 경멸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혼자만이 '현자'라는 별명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었다. 그렇게까지 자기를 이해하는 자는 용감하게 자신을 자기 입으로 말하며 알려 줄 일이다.


7. 명예의 포상에 대하여



명예는 희귀함이라는 특권 403


도덕적인 인물이 자기에게만 고유하게 독특한 것, 아주 고상하고 관대하고 후덕한 것 외에는 이런 따위 평범한 재물을 즐겨 욕심내고 받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명예는 그 주요 본질이 희귀함이라는 특권이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가 이 자격을 주기를 재물보다 훨씬 더 아끼고 인색했던 것은 지당한 일이다. 도덕도 마찬가지다.


8. 아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에 대하여



늙어 꼬부라져서 반은 죽어 가는 아버지 409


늙어 꼬부라져서 반은 죽어 가는 아버지가 집 안 한구석에서 재산을 혼자 누리며, 여러 아이들의 발전과 교제에 지장을 주고, 그러는 동안에 아이들이 젊은 나이에 공공 사무에 참여하며 세상 사람들에 관한 지식을 얻을 기회를 잃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 때 아이들은 아무 희망이 없으니, 부당한 방법을 써서라도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하게 됩니다. 나는 우리 시대에 많은 훌륭한 가문의 청년들이 도둑질하는 버릇에 빠져서, 어떠한 징벌을 받아도 고치지 못하는 것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그 형이 대단히 점잖고 가문도 좋은 호탕한 귀인인데, 그분이 내게 와서 간청하기에, 언젠가 나는 그 청년에게 말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고백하며 대답하기를, 자기 부친이 너무 엄격하고 인색했기 때문에 그가 이런 더러운 짓을 시작하게 된 것으로, 이제는 버릇이 골수에 박혀서 그짓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고 했습니다.


인색은 노년뿐 아니라 모든 허약에서 나옵니다 410


여기서는 어느 날 이해력이 깊은 한 귀인이 했던 것과 같은 대답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절약해서 자기 재산을 관리하는 것은 더 소득을 보아서 쓰자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존대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며, 나이가 많아서 다른 힘은 모두 없어졌으니, 이것만이 자기 집에서 그의 권위를 유지하고 남의 경멸을 면하는 유일한 힘이라고 말했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색은 노년뿐 아니라 모든 허약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어떤 방편은 됩니다. 그러한 치료법이 필요한 병은 발생하기 전에 막아 두어야 할 일입니다. 어떤 부친이 아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는 방법으로밖에 자식의 애정을 받을 수 없다면, 그는 참 가련한 인물입니다. 이런 것도 애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 도덕과 그의 능력으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착하고 행세가 점잖아서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풍부한 물질은 불탄 재에도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을 받던 인물들의 유해와 유물까지도 경의와 숭배를 받는 것은 늘 있는 일입니다. 노년이 되어 아무리 노쇠하고 썩은 냄새가 나더라도, 젊었을 때 영광을 받고 지낸 인물은 그 아이들에게 존경받지 않는 일이 없으며, 그는 그들의 마음을 이치에 맞게 의무를 지키도록 지도한 것이고, 궁하거나 필요에 못 이겨서, 또는 강제와 억압으로 존경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35세 결혼설 412


나는 33세에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는 35세 결혼설에 찬성합니다. 플라톤은 30세 전에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55세 뒤에 결혼을 하려는 자들을 조롱하며, 그들의 소생은 먹여살릴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은 옰습니다.

탈레스는 여기에 진실한 한계를 두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에 그에게 결혼하라고 재촉하는 모친에게, 아직 때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넘은 다음에는 이미 때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귀찮은 행동에는 좋은 기회를 거절해야 할 일입니다.


늙은 말을 풀어 놓을 양식 413

그대가 여정의 말기에 실족하여 허덕이며
조소의 대상이 되기를 원치 않거든

 

때맞춰 그대 마차의 늙은 말을 풀어 놓을 양식을 가져라.      (호라티우스)


삼밭에 세운 허수아비로밖에는 415∼416


부친과 친하게 지낼 나이가 된 아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고, 그들에게 엄숙한 경멸조의 존대풍을 지키며, 그렇게 해서 자기를 두려워 하고 자기에게 복종하기를 바라는 것은 옳지 못하고 어리석은 수작입니다.

이것은 아주 쓸데없는 광대짓이며, 자녀들에게 부친을 권태로운 인물로 느끼게 하고, 더 나쁜 일로는 웃음거리로 만들게도 합니다. 그들은 젊음과 힘을 가졌으니, 세상의 풍조와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장에도 혈관에도 이미 피가 말라붙은 인간의 오만하고 횡포한 얼굴을, 진짜 삼밭에 세운 허수아비로밖에는 안 보며 경멸합니다. 나는 나를 두려워하게 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그보다는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노인에게는 너무 결함이 많고 기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경멸받기에 알맞기 때문에,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식구들의 애정과 사랑입니다. 명령과 두려움은 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에 이런 성질이 대단히 강하던 인물을 보았습니다. 그는 나이가 많아지자, 아무리 건전하게 지내 보려고 해도 그저 때리고 물어뜯고 욕질하며, 프랑스에서 가장 야단법석을 치는 주인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조심해서 두루 살피느라고 속을 썩입니다.

어런 모든 것이 광대짓에 지나지 않으며, 가족들은 저마다 딴 수작을 합니다. 천장·다락에서부터 지하실에 이르기까지, 그의 돈주머니 속까지도 딴 자들이 가장 좋은 몫을 이용해 먹고 있습니다. 자기는 절약하며 검소한 식사에도 만족하고 있는 동안 집안 구석구석은 잔치판입니다. 노름판이고 돈을 물쓰듯 하고 늙은이의 헛된 분노와 조심성을 헐뜯기에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모두가 그에 대해 경계를 합니다. 어쩌다가 마음이 약한 어느 하인이 노인에게 애착심을 느끼게 되면, 그는 바로 의심을 받게 마련입니다. 이 의심이란 늙은이들이 즐겨 갖는 성질입니다. 얼마나 여러 번 그는 자기 가족들을 잘 통솔한다고 하며, 정확한 복종과 존경을 받고 있다고 내게 자랑하던지요. 얼마나 그는 자기 일을 잘 살핀다고 말하던지요.

그 혼자만이 아무것도 모른다.                (테렌티우스)

나는 이 인물만큼 천성적으로, 그리고 배워 얻은 바로 지배욕을 보존하기에 알맞으며, 그러고도 어린아이와 같이 거기에 속고 있는 자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이런 사정에 빠진 사람들 중에서 그를 가장 재미나는 예로 택한 것입니다.

이래야 좋을지 저래야 좋을지, 이것은 소콜라 학파가 문제삼을 만한 소재입니다. 그의 앞에서는 모두가 그에게 양보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권위 앞에서 이 헛된 수작을 합니다. 그들은 그에게 결코 저항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믿어 줍니다. 그를 두려워합니다. 실컷 그를 존경해 줍니다.


남편들과는 반대 의견을 갖게 되는 경향 417

여자들은 언제나 남편들과는 반대 의견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녀들은 남편에게 반대하기 위해 두 손을 내밀며 모든 구실을 잡습니다. 한 꼬투리라도 변명할 재료가 있으면, 그녀들이 하는 모든 일이 정당하다는 증거가 됩니다. 헌금을 많이 내려고 남편에게서 잔뜩 훔쳐 내는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참회사에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런 경건한 헌금의 분배를 말대로 믿어 보세요! 어떠한 행동도 남편의 양보를 얻어서 한 것이라면 충분한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

이런 행동에 우아미와 권위를 세우려면, 농간을 부려서건, 무례한 수작으로건 언제나 부당하게 남편들의 권한을 빼앗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여기서 다루는 문제에서와 같이 가련한 늙은이에 대항해서 아이들 편을 드는 경우에는, 여자들은 이것을 구실로 삼고 영광으로 여기며, 자기들의 성정(性情)을 만족시킵니다. 그리고 모두 같은 노예 상태에 있는 것처럼, 여자들은 아이들과 결탁해서 걸핏하면 그의 지배와 지휘에 반항하려고 음모를 꾸밉니다. 사내아이가 성장해서 기운이 차면 그들을 강제로 매수해서, 요리사·회계원, 기타의 가족들을 손아귀에 넣어 버립니다.

 아내도 자녀도 없는 사람들은 이런 불행에 빠지는 것이 드문 일이지만, 더 잔혹하고 부당한 대접을 받습니다. 대 카토가 말하기를 "하인의 수가 많으면 그만큼 적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순결하던 그의 시대와, 지금 이 시대의 차이를 생각해 보세요. 그는 아직 아내와 아들과 하인의 수만큼 적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노쇠한 경우에 일을 알아차리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고 잘 속아 넘어가는 것은 우리가 받는 달콤한 이득입니다. 여기에 악을 쓰며 대들어 보았댔자, 특히 재판관들이 우리의 분쟁을 해결해야 할 때에는 대개 젊은이들과 같은 꿍꿍이속이며, 젊은이의 편을 드는 바에 우리는 어쩌란 말입니까?


싹수는 마찬가지, 마음이 착한 여자가 최고  420

나는 번성하는 집안의 남자가 많은 지참금을 짊어지고 들어올 아내를 찾아 돌아다니는 꼴은 그렇게 잘하는 일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부채 가운데 이보다 더 집안에 파멸을 가져오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충실하게 이 의견을 좇은 것은 잘한 일이고, 나도 역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부잣집 딸들은 다루기가 힘들고, 고맙게도 여겨 주지 않을 우려가 있으니, 그런 데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고 권하는 사람들은 그런 경솔한 추측 때문에 속아서 실질적인 이익을 잃는 수가 있습니다. 지각 없는 여자는 이런 이치를 눈감아 주거나 저런 이치를 눈감아 주거나, 싹수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들은 옳지 못한 일에 이끌립니다. 그것은 마치 착한 여자들이 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명예에 이끌리는 식입니다. 마음이 착하면, 신세가 부유할수록 마음이 더 너그럽고, 얼굴이 예쁠수록 더 영광스럽게 정숙한 몸가짐을 즐깁니다.


마지막에 해 준 행위 421

마침 숨이 넘어갈 무렵에 비위를 맞춰 주는 자가 요행을 얻지요! 마지막에 해 준 행위가 승리합니다.


우리가 영혼으로 생산하는 것, 영생 불멸의 아이들 423∼424

헤로도투스가 리비아의 어느 지방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바에 의하면, 거기서는 여자들과 무분별하게 육체관계를 맺으며, 어린아이가 걸음마할 때가 되면, 군중 속에 데려다 놓고 첫걸음이 향하는 자를 아비로 삼는데, 잘못 잡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를 낳았다는 단순한 인연으로 그것을 또 다른 자신이라고 부르며 그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생각해 보건대, 그러면 우리에게서 나오는 다른 생산물들이 있으니 그것도 못지 않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혼으로 생산하는 것, 우리의 정신·마음·능력으로 생산하는 것은 우리 육체보다도 더 고상한 부분으로 생산되는 것이며, 더 우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생산물에 대해서 동시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됩니다. 그 생산은 아이낳기보다 훨씬 더 힘들고, 거기에 무슨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더 큰 명예를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다른 아이들의 가치는 우리보다도 차라리 여자들의 것이며, 거기서 우리의 몫은 아주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의 생산에서는 그 본래의 미와 우아성과 가치가 우리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작품이 다른 작품들보다 더 생명있게 우리를 대표하며 알려 줍니다.

플라톤은, 이런 산물은 영생 불멸의 아이들이며, 그 부친(작가를 말함)들을 영생 불멸케 하고, 진실로 리쿠르고스나 솔론이나 미노스의 경우와 같이 그들을 신격화한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애정 424∼427


로마에 라비에누스라는 자가 있었는데, 용기가 장하고 권세 있는 인물로 다른 소질보다도 문장에 능하였습니다. 그는 갈리아 전쟁 때에 카이사르 휘하에서 으뜸가는 장수로 있다가, 다음에 저 위대한 폼페이우스 편으로 넘어 가서 카이사르가 스페인에 진격하여 그를 격파하기까지 너무나 용감하게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던 위대한 라비에누스의 아들이라 생각됩니다. 내가 지금 말하는 라비에누스에게는 그의 덕성을 시기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 황제들의 궁신이나 총신들은 그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솔직성과 폭군 정치에 반항하는 기질을 좋게 보지 않았을 법한 일로, 그런 기분은 그의 문장이나 작품에 배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의 적들은 그를 관청에 고발해서 출판한 여러 작품을 불태우라는 판결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방식의 형벌은 그로부터 시작되어 로마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계속 실시된 것인데, 그것은 문장과 연구 논문까지도 사형에 처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는 잔혹한 것을 할 방법과 재료가 부족해서 우리들 정신의 고안과 명성 같은 고통을 느낄 감각이 없는 사물에까지 미치며, 시신(詩神)들의 학문과 업적에까지 물질적 고통을 적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라비에누스는 이런 손실을 참고 지낼 수도 없고 그렇게도 소중한 작품을 잃은 뒤에 살아남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조상들의 무덤에 자기를 실어가게 해서 그 속에 들어가 산 채로 파묻혀 자살과 매장을 동시에 감행했습니다. 자기 작품에 대해서 이보다 더 맹렬한 애정을 보여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카시우스 세베루스는 대단한 웅변가로 이 사람의 친구인데, 그의 책이 불태워지는 것을 보고 같은 판결문으로 자기도 함께 산 채로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고함질렀습니다. 왜냐하면 작품 속에 있는 것이 그의 머릿속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렌티우스 코르두스도 그의 작품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칭찬했다고 고발당하여 같은 처단을 받았습니다. 저 티베리우스보다도 더 나쁜 상전을 섬겼던 저 천하고 비굴하고 부패한 원로원은 그의 문장을 화형(火刑)에 처했습니다. 그는 자기 저서와 동행하기에 만족하고, 음식을 끊고 자살했습니다.

저 선량한 루카누스는 극악무도한 네로에게 처단을 받아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바로 죽으려고 의사에게 끊게 한 팔뚝의 혈관에서 피가 대부분 흘러 나와 사지의 끝은 이미 싸늘해져 가고 찬 기운이 생명의 심장부에 접근해 오기 시작하자, 그의 뇌리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파르살리아 전쟁에 관한 자기 작품의 시 몇 구절을 낭독했습니다. 그리고 이 시구를 마지막으로 소리쳐 읊으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아이들에게 주는 애정에 찬 정다운 작별 인사였으며, 죽어 가면서도 자기 가족에게 주는 굳은 포옹과 고별이었고, 이 최후의 순간에 살아 있는 동안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물들을 회상케 하는 타고난 경향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에피쿠로스는 그의 말처럼 담석증의 극심한 아픔으로 괴로워하며 죽어 갈 때에, 그가 세상에 남겨 두고 가는 학설의 아름다움이 그의 모든 위안이었습니다. 그에게서 태어나 잘 자란 아들들이 있었다 해도, 그들에게서 그가 풍부한 저작을 완성했을 때만큼 만족을 얻었겠습니까? 잘못 성장한 못난 아이도 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후자보다도 전자의 불행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도(예로 들자면), 우리 종교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그의 작품을 땅에 파묻거나 그에게 자식이 있는 경우에 그 아이들을 파묻든지 하라고 제안했을 때에, 그가 차라리 아이들을 묻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불경건한 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내 아내와 관계해서 잘난 아이를 얻는 것보다, 시신(詩神)과의 관계에서 완벽하게 잘생긴 작품을 하나 얻기를 훨씬 좋아할지 어떨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을 생긴 그대로 내가 여기 내놓은 것은 마치 육체적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고칠 수 없이 내놓은 것입니다. 이 작품에서 얻은 작은 재산은 이미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내가 아는 것보다도 더 충분히 사물들을 알고 있으며, 내게서 자신이 담아 두지 못한 것을 가져갔으며, 아무 관계 없는 딴 사람처럼 필요할 때에는 그에게서 빌려 와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내 작품보다 더 현명할지 모르나, 그는 나보다 더 부유합니다.

시에 열중하는 사람치고 로마에서 가장 으뜸가는 미소년을 낳기보다는 《아에네이스》를 내놓기를 원하지 않을 자 없고, 전자보다도 후자를 잃는 것을 슬퍼하지 않을 자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작가들 중에서 특히 시인들은 자기 후손으로는 딸들만 남겨서, 그녀들이 다음에 조상들에게 영광을 주리라고 자랑하던 에파미논다스(이 딸들이란 그가 라케데모니아 인들에 대해서 두 번 얻은 고귀한 승리를 의미하였습니다)가 그녀들을 그리스 전국의 화사한 미녀들과 바꾸었으리라고는 믿어지기 어렵습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가 자기 아들과 상속자가 아무리 완벽하고 완성된 인물이라고 해도, 그들을 얻기 위해서 자기들이 전쟁에서 얻은 영광스럽고 위대한 공훈들을 갖지 않아도 좋다고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나는 피디아스나 다른 탁월한 조각가들이 오랜 노력과 면학으로 예술적으로 완성해 놓은 탁월한 조각상이 잘 보존되어 영원히 남아 있기를 바랐을 만큼, 그가 낳아 놓은 아이들이 계속해서 보존되기를 원했을까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가끔 부친들이 자기 딸들에게 보이는 사랑이나, 모친들이 자기 아들들에 열중하던 악덕스런 미치광이 같은 태도의 사랑으로 말하면, 그런 예는 이 다른 종류의 부자 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 피그말리온에 관해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특별한 미를 갖춘 여인의 조각상을 만들고 나서, 자기 작품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사랑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미친 듯한 열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신들은 이 조상에 생명을 넣어 주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 상아를 만지니
그것은 단단함을 읽고 유연해지며
그의 손가락에 눌려 들어간다.                    (오비디우스)


10. 서적에 대하여

 

내가 빌려다 쓰는 것 431

나는 글을 좀 읽었다고는 하지만 기억력은 아주 약한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가진 지식이 어느 정도로까지 뻗은 것인가를 알려 주는 수밖에 아무런 확실성도 보장하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내놓는 재료에 기대하지 말고, 내가 내놓는 형태에 유의할 일이다. 내가 빌려다 쓰는 것을 가지고 내가 취급하는 문제를 빛내 볼 거리를 택할 줄 아는가를 살펴볼 일이다. 나는 어법이 서툴러서, 때로는 내 지각이 빈약하여 자신이 잘 말하지 못할 것을 남을 통하여 말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빌려 온 것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저울질한다. 수량으로 가치를 올릴 생각이었던들 몇 갑절은 내놓았을 것이다. 내가 차용해 온 곳은 모두가 옛날의 너무나 유명한 이름들이기 때문에,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아주 잘 알려져 있다.



판단력을 가졌다는 증거
432


사실 자기의 무식을 인정하는 일은 판단력을 가졌다는 가장 아름답고도 확실한 증거라고 나는 본다.


옛날 책 433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딴 책을 집어든다. 그리고 결코 새로운 책을 탐하지 않는다. 옛날 책이 내용적으로 더 충실하고 진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서적에 대하여 433∼434

내 판단력은 내 스승이며 지도자로 생각하는, 그렇게 많은 다른 유명한 분들이 판단한 바의 권위에 대항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그들에 대해서는 차라리 내 판단이 실수한 것으로 만족한다. 판단의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므로, 나는 내 이해력이 그 속까지 침투해 보지 못해서 피상적으로 머무르거나 또는 가짜 광채에 현혹된 것이라고 자기를 책망한다. 내 판단력은 다만 동요와 혼란에 빠지지 않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 이해력이 박약한 바는 기꺼이 인정하며 고백한다. 내 판단력은 그것이 파악한 개념이 그 자체에 지시하는 겉모습에 정확한 해석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허약하고 불완전하다.

이솝 우화는 대부분이 여러 가지 의미와 해석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도덕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그 이야기와 격이 맞는 어떠한 모습을 골라낸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유치하고 피상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 속에는 더 살아 있고 본질적이며 내면적인 의미가 있으나 거기까지는 뚫어보지 못한다. 나 역시 그 꼴로 읽는다.

그러나 내 방식대로라면 시가(詩歌)에서는 베르길리우스·루크레티우스·카툴루스, 그리고 호라티우스가 유달리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가운데 전원시는 완벽한 시가 작품이라고 행각한다. 여기에 비교해 보면 그의 《아에네이스》의 어느 구절은, 작가에게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면 조금 더 손질해야 될 점이 있다는 것을 쉽사리 알아볼 수 있다. 내게는 《아에네이스》의 제5권이 가장 완전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또 루카누스를 좋아해서 즐겨 읽는다. 문체보다도 그의 고유한 가치와 사상과 판단의 진실함을 즐긴다. 저 선량한 테렌티우스로 말하면 그 라틴어의 애교와 우아미가 우리 심령의 움직임과 풍습의 조건들을 탄복할 만큼 잘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어느 시각에나 우리 행동을 살펴보면, 나는 그의 시가 생각난다. 아무리 자주 읽어도 그에게는 새로운 미와 아담한 풍치가 발견된다.

베르길리우스가 살던 시대 가까이에 생존했던 사람들은 루크레티우스를 그에게 비교하는 자들이 있다고 불평하고 있다. 내 생각에도 이 비교는 공평한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의 좋은 시구에 부딪히면 이 신념을 고집하기가 힘들다.

우리 시대에 희극을 써 보려고 하는 자들은 (이 방면에 재간이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테렌티우스와 플라우투스에 나오는 재료를 서너덧 합쳐 자기 것 하나를 만들고 있다. 그들은 단 한 편의 희극에 보카치오의 이야기 대여섯 편을 합쳐 놓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여러 재료를 한 편에 실어 놓는 것은 자기 고유의 묘미로 작품을 지탱해 나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의지할 본체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구상만으로는 우리의 흥미를 끌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이야기나마 재미나게 하려고 한다. 우리가 이 작가를 두고 보면 일은 반대로 나타난다. 그의 말하는 방식이 완벽하게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재료에는 관심이 끌리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그 말투의 얌전하고 애교 있는 맛에 이끌린다. 그는 어디서나 재미난다.

청명하기가 흐르는 맑은 물과 같다.                                                                                       (호라티우스) 

그리고 그 문장의 매력이 너무나 우리 마음을 채우기 때문에 이야기의 맛은 잊어버리고 만다.
 

 

 

그들은 자기를 간질일 필요가 없다 435∼436

나는 고대의 우수한 시인들이 뽐내거나 따지고 파고드는 일을 피하는 것을 본다. 그들은 스페인이나 페트라르카식의 높은 음조의 광상적 노래뿐 아니라, 다음 세기에 오는 모든 시적 작품의 장식을 이루는, 좀더 보드랍고 조심스런 익살까지도 피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명한 비평가로서 이 고대 시인들에게 흠을 잡는 이가 없고, 마르티알리스의 시구의 톡 쏘는 맛보다도 카툴루수의 풍자시에 연마되고 줄곧 상냥하고 화창하게 아름다운 맛을 비길 바 없이 감탄하지 않는 자 없다. 마르티알리스가 자신에 관해서 "그는 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작품 재료는 재주가 있는 기질이 대신된 것이다 "라고 말하듯, 내가 금방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먼저 말한 작가들은 흥분하지도 분발하지도 않으며, 충분히 감명을 준다. 그들은 아무 데서나 웃음을 찾아 낸다. 그들은 자기를 간질일 필요가 없다. 그 다음 작가들은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들은 재주가 부족하기에 더욱 육체가 필요하게 된다, 그들은 다리로 걸어갈 만큼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에 말을 타야만 한다.


 

풋내기들 436

그것은 마치 무도회에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우리 귀족들의 점잖은 행세를 모방할 수 없으니까, 무도 학교를 세워 가면서 배운 위험한 뜀박질이나 익살스런 동작의 색다른 잡술을 가지고 장기를 삼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리고 정식 무도회에서 부인들이 천연스런 걸음으로 순진한 자세와 타고난 우아미를 보여 주기만 해도 되는 것을, 몸뚱이를 비꼬아 뒤흔드는 무도회에서는 그녀들의 자태를 값싸게 보여 준다. 나도 역시 본 일이지만, 탁월한 배우들은 일상적인 옷을 입고 화장기 없는 용모로도 그들이 예술이 줄 수 있는 모든 쾌감을 주는 데 반해서, 풋내기들은 공부가 거기에 미치지 못하므로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옷을 괴상하게 입고는 우리를 웃기려고 동작을 거꾸로도 하고, 얼굴을 망측하게 찌푸리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관념은 《아에네이스》와 《광분하는 롤랑》을 비교해 보면 어느 경우보다도 더 잘 이해가 된다. 전자는 확고하게 날개를 활짝 펴서 높게 날며, 늘 자기의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후자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아 앉듯,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뛰어 돌아다니며, 자기 날개에 자신이 없어 짧은 거리밖에는 날지 못하고, 숨과 힘이 지탱 못할까 봐 밭이랑마다 내려서 쉰다.


그는 단거리 질주를 시도한다.                (베르길리우스)


 

플루타르크와 세네카 436∼438

다른 종류의 독서는, 쾌락에 좀더 내용을 섞어 주며 거기서 내 기분과 조건들을 조절하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이런 데 내게 소용되는 작품들은 플루타르크와 세네카이다. 그들은 둘 다, 내가 거기에서 찾는 지식을 조각조각 풀어서 취급해 놓았기 때문에 오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내 비위에 맞는 특기할 장점이었다.

플루타르크의 《소품집》과 세네카의 《서한집》등이 그렇다. 이 《서한집》은 그의 작품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유익한 문장이다. 내가 이 공부를 시작하는 데는 큰 계획도 필요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덮어 둔다. 왜냐하면 이 문장들 사이에는 상호간에 연락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작가들은 대부분의 사상이 유익하고 진실한 점에서 일치한다. 그들은 같은 세기에 출생하였고, 둘 다 로마의 두 황제의 사부였으며, 외국에서 들어왔고, 다 부유하였고 세력도 누렸다. 그들의 가르침은 철학의 진수를 온당한 방식으로 내놓은 것이었다. 플루타르크는 더 고르고 꾸준하며, 세네카는 더 파동이 있고 잡다하다. 세네카는 힘들고 굳어지며 긴장해서 허약과 공포와 못된 욕망에 대항해서 도덕을 무장시킨다. 플루타르크는 이런 성질의 영향을 그렇게 위험한 것으로 보지 않고, 자기 보조를 서두르거나 이런 일에 경계하는 태도를 경멸하는 것 같다. 플루타르크의 사상은 플라톤적이고 순해서 시민 생활에 조화될 수 있는데, 세네카는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상을 받아서 일반의 습관과는 융화되지 않으나 내 의견으로는 개인 생활에 더 편리하고 견실하다. 세네카의 경우는 그 시대 황제들의 포학을 좀 옹호하는 것 같다. 그가 카이사르 살해범들의 장한 거사를 비난하는 것은 확실히 강제당한 판단으로 보인다. 플루타르크는 모든 면에 자유롭다. 세네카는 풍자와 재기에 충만하고, 플루타르크는 사물의 지식이 풍부하다. 플루타르크는 보다 만족을 주며 교양을 준다. 그는 우리를 지도한다. 세네카는 우리를 밀어 보낸다.

키케로로 말하면, 그의 작품들 중 내 목적에 소용될 수 있는 것은 특히 도덕 철학을 취급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과감하게 진실을 고백한다면(사실상 이미 건방진 한계를 넘은 바에 이것을 억제할 수도 없다), 그의 글 쓰는 방식이 내게는 지루하게 보이며 다른 점도 그렇다. 서문이나 정의·구분·어원 따위가 그의 작품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준비가 너무 긴 때문에 문장이 생기를 잃고 내용이 질식되고 있다. 한 시간 동안이라도 그를 읽는 것이 내게는 힘든 일이지만, 거기서 진짜 정수를 뽑아서 보아도 대개는 바람밖에 잡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까지도 그의 사상에 필요한 논법이나 내가 찾고 있는 요점에 직접 관계되는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웅변가나 학자가 되기보다는 현명해지기를 바라고 있는 터이니, 이런 논리학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절차는 못마땅하다. 나는 마지막 요점부터 시작하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이나 탐락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런 것을 분석해 갈 필요는 없다. 나는 처음부터 이런 노력을 지탱해 나를 가르쳐 줄 진실하고 견고한 이치를 찾고 있다. 문법상의 미묘한 점이라든지, 말과 논법의 교묘한 구조 같은 것은 필요없다. 나는 가장 심각한 의문점에 첫 공격을 가하는 사색을 요구한다, 그의 문장은 뚝배기 주위를 돌다가 기운이 빠진다. 그런 수작은 학교나 재판정이나, 설교단에 맞는 일이다. 그런 데서 우리는 실컷 졸고 있다가 한 15분쯤 뒤에 보아도 말의 줄기를 잡을 여유가 넉넉히 있다. 옳건 그러건 자기가 승소하려는 때, 재판관 앞에서, 그리고 알아들을 수 있나 보려고 모두 말해 주어야 하는 어린아이와 속인들 앞에서 이렇게 말할 일이다.

나는 사람이 주의를 끌려고 포고를 큰 소리로 외치는 사령처럼, "내 말 들으시오!" 하고 5번이나 고함지르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 이런 것 모두가 내게는 쓸데없는 말이다. 나는 그것을 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온다. 내게는 미끼도 양념도 필요치 않다. 나는 날것으로도 잘 먹는다. 이런 준비와 서곡으로는 내 식욕이 당기게 하기는커녕 거기 물려서 입맛을 잃게 만들어 놓는다.



 

브루투스의 경우 439

나는 브루투스가 도덕에 관해서 쓴 저작이 소실된 것을 수백 번은 애석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실천을 잘할 줄 아는 인물의 이론을 알아두는 것은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와 설교자는 같은 것이 아닌 만큼, 나는 브루투스를 플루타르크의 저서에서나 그 자신의 저서에서나 마찬가지로 읽어 보고 싶다. 나는 차라리 그가 전투한 다음 날 자기 군대에게 해 준 언행보다, 전투하기 전날 자기 천막 속에서 친한 친구 하나와 흉금을 털어놓고 하던 이야기를 알고 싶으며, 그가 자기 사무실이나 방에서 하던 일을, 그가 광장이나 원로원에서 하던 일보다 더 알고 싶다.


 

키케로의 경우 439∼440

키케로의 경우, 나는 그가 학문을 제외하고는 마음에 탁월한 점이 적었다고 보는 일반의 판단을 따른다. 그는 성질이 호탕하고 선량한 시민이었다. 그처럼 생긴 뚱뚱한 농담꾼들은 흔히 그렇다. 그러나 그가 마음이 허약하고 허영된 야심을 가졌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뿐더러 나는 그가 어떻게 자기 시를 세상에 발표할 만한 것으로 생각했는지 변명해 줄 것이 없다. 시구를 잘 못 짓는다는 것은 대단히 불미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시가 그의 이름의 영광과는 당치 않게 뒤떨어진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그에게 판단력이 없었던 탓이다. 그의 웅변은 전혀 비겨 볼 거리가 없다. 그에게 대응할 사람은 결코 나오지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小) 키케로는 이름 하나밖에 그 부친을 닮은 점이 없었고, 아시아에서 군지휘관이었다. 어느 날 그가 베푼 연회석에 여러 손님들이 참석하였는데, 그 중에 카에스티우스라는 자가 유력자들의 공적 연석에 잘 끼어드는 식으로 식탁의 말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키케로는 자기 부하 하나에게 그가 누구냐고 물어서 그의 이름을 알았다.

그러나 생각이 딴 데 있어 대답하는 말을 잊어버리는 자가 그렇듯, 그는 다음에도 두서너 번 이것을 다시 물었다. 하인은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 수고를 덜 겸, 전부터 그에게 알려 주려고 하던 터라, "이 자는 자기 웅변에 비해서 대감님 조상대에서의 웅변이 대단할 것 없다고 말하는 것을 누군가 말씀 드린 바로 그 카에스티우스입니다"라고 말했다. 키케로는 여기에 분개해서 이 가련한 카에스티우스를 잡아들이게 명령하고, 자기 앞에서 실컷 매질하게 하고 "고약하게 공손한 손님이로군" 하였다.


 

esse videatur 440

모든 점을 참고해 보고, 그의 웅변을 비길 바 없는 것으로 평가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의 웅변에 흠이 있는 것을 간과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그의 친구였던 저 위대한 브루투스도 그의 것을 '부서지고 허리 부러진' 웅변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의 세기와 가까운 시대의 웅변가들도 역시 그가 문장의 끝에 붙이는 기다란 시가에 다는 운을 각별히 유의해서 집어넣는 버릇을 꼬집으며, esse videatur(그런 듯싶을 것이다)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을 지적하였다. 나로서는 장단격으로 짧게 떨어지는 음절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그는 드물기는 하지만 음절의 수를 가끔 뒤섞는 일이 있다. 나는 그의 문장에, "나로서는 늙기 전에 늙는 것보다는 늙고 나서 오래 있지 않는 편이 낫다"(키케로)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플루타르크는 특히 나의 마음에 드는 작가이다 440

역사가들은 내게는 입에 맞는 떡이다. 그들은 재미나고 평이하다. 그들은 또 인간의 내적 조건들의 잡다성과 진실성의 전부와 세부적인 것, 그가 총체로 가진 여러 방법의 다양성과 그를 위협하는 사건들, 즉 내가 알고 싶어하는 인간 전체가 다른 어떤 데서보다도 여기서 더 생기 있게 나타난다. 그런데 인물들의 전기를 쓰는 자들은 그 인물들이 겪는 사건보다도 그 목적에, 또 외부에서 닥쳐오는 것보다도 그들 내부에서 나오는 것에 더 흥미를 갖기 때문에 플루타르크는 특히 나의 마음에 드는 작가이다.


 

특히 카이사르는 441

특히 카이사르는 단지 역사학뿐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해서도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살루스투스도 그런 축에 들지만 그만큼 그는 다른 자들보다 뛰어난 완벽함과 탁월함을 가지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딴 작품들을 읽는 것보다 더한 존경과 숭배를 품고 이 작가를 읽는다. 어느 때는 그의 행동과 위대성의 기적을 통하여 그 사람됨 자체를 고찰하며, 때로는 그의 순수하고도 비길 바 없이 연마된 문장을 탐하여 읽는다. 그의 문장은 키케로도 말하듯, 모든 역사가들의 것보다 탁월할 뿐더러, 키케로의 것보다 더 나은 글이다. 그의 판단을 보건대, 그만한 성실성을 가지고 적을 말하면서 도리에 어그러지고 흉악한 야심의 그릇된 원칙과 더러운 동기를 감추려고 거짓을 써 나가는 것밖에는 그 자신을 말함에 극히 인색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다시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자기 글 속에서 말한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한 자기 고유의 능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만큼 위대한 업적이 수행될 수 없는 일이었다.


 

중간 것들 441

진실로 탁월한 역사가들은 알아 둘 만한 사실을 골라 낼 능력을 가지고, 두 가지 보도 중에서 더 진실한 것을 선별할 수 있으며, 군주들의 사정이나 그들의 기분에 관해서 의향을 결론 짓고 그들에게 맞는 말을 시키고 있다. 그들이 생각에 따라 우리의 신념을 조절하는 권한을 갖는 것도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작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 두 부류의 중간 것들은(이것이 가장 보통이지만) 모든 것을 벌여 놓는다. 그들은 우리가 씹을 것을 대신 씹어 준다. 그들은 판단할 권한을 자기가 가지며, 역사를 자기 생각대로 꾸며 나간다. 왜냐하면 판단이 한편으로 기울어지는 이상, 사람들은 이야기를 그 편으로 굽혀서 돌리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판단을 적어 넣는 습관 443


나는 잘못 기억하거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몇 해 전에 정독하고 써놓기까지 한 책을 내가 모르는 새로 나온 책이라고 다시 들추어 보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얼마 전부터(내가 한 번밖에 쓰지 않으려는 것은) 책마다 끝에 다 읽은 날짜를 기록하고, 적어도 그것을 읽으며 그 작가에 관해서 내가 품은 일반적 관념과 모습을 상상해 보고, 거기서 대강 끌어낸 판단을 적어 넣는 습관을 들였다.


11. 잔인성에 대하여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446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이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자들 중에는, 마음을 도덕에 맞게 잘 조절하여 착한 상태로 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결심과 사상을 모든 외적 운의 힘을 초월해서 갖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보다도 그것을 시련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들은 고통과 궁핍과 경멸을 싸워 이기며, 그들의 심령을 긴장시키키 위해 이런 것을 찾아 가지려고 한다. "도덕은 투쟁 속에서 크게 성장한다."(세네카)

이것은 그들과는 다른 학파인 에파미논다스가 지극히 합법적으로 운이 그의 손에 쥐어 주는 재물도 거절해 가며, 빈궁과 싸워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항상 극도의 궁핍 생활을 지켜 가던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소크라테스는 흉악한 아내를 참아 내는 고역으로, 그보다 더 심한 시련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새파랗게 날선 칼만큼 독한 시련이다.


도덕의 길 446


메텔루스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 중 홀로, 로마의 호민관 사투르니누스가 모든 힘을 다해서 평민들에게 유리한 법률을 부정당하게 통과시키려는 포악한 처사에 대항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 법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사투르니누스가 내리는 극형을 받게 되자, 곤경에 빠져서 자기를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나쁜 일을 하기란 얼마나 쉽고 비열하며, 아무 위험도 없는 곳에서 착한 일을 하기란 얼마나 속된 일인가. 그러나 위험이 있는 곳에서 착한 일을 하기는 도덕 군자가 마땅히 할 일이로다"라고 하였다.

메텔루스의 이 말은 내가 증명하려는 바를 명료하게 보여 준다. 즉, 도덕은 쉬운 일을 동무삼기를 거절하는 것이며, 착한 마음의 성향으로 조절된 걸음을 인도하는 평탄하고 경사진 길은 진실한 도덕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은 거칠고 가시덤불진 길을 찾는다. 도덕은 그것이 싸워 나갈 거리로, 메텔루스의 경우와 같이 그 꿋꿋한 행진을 좌절시키려고 운이 즐겨 가져 오는 외부적인 시련이거나 우리 본성의 무질서한 욕망과 불완전성이 가져오는 내면적인 시련을 가지려고 한다.


인생에 상응하는 죽음 449


모든 죽음은 당사자의 인생에 상응해야만 한다. 죽을 때에 사람이 다르게 되는 수는 없다. 나는 항상 그 생애를 보고 그 죽음을 해석한다. 그리고 물러 빠진 생애에 결부된 강렬한 죽음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그것이 그 생애에 맞는 약한 원인에서 온 것으로 해석한다.

 

풋내기들 450

전쟁에서 풋내기들이 위험한 지경이나 아무 잘못 없는 숫자에 몸을 던지며 큰 코를 다친 다음에야 그만두는 것은 사실이다.

최초의 전투에서
아직 경험하지 못한 영광의 갈망과 첫 번째 승리의 희망에
유혹되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베르길리우스)

그 때문에 특수한 행동에 관해서 판단할 때는, 그것을 정의하기 전에 여러 사정과 그것을 행한 자의 인간됨을 고찰해 보아야 한다.



탐락과 싸우려는 자들은 454

탐락과 싸우려는 자들은 그것이 모두 악덕스럽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이런 논법을 잘 본다. 즉, 악덕이 가장 큰 노력을 할 때에는 이성이 거기에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제압한다고 하며, 여자와 육체관계를 맺을 때에 우리가 느끼는 그 경험을 끌어서 말한다.

육체는 쾌락을 재촉하고
비너스가 여자의 밭에 파종하려고 할 때에    (루크레티우스)

그때에 쾌락은 우리를 너무 심하게 혼미시켜 버리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력은 그 힘을 상실하고 완전히 탐락 속에 오그라들어 정신을 잃고 마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일이 다르게도 될 수 있으며, 사람은 때로는 자기가 원하면 바로 그 순간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마음이란 긴장시켜서 경계심으로 굳게 다져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 쾌락의 충격을 억제할 수 있음을 안다. 그리고 나보다도 더 품행이 단정한 많은 사람들이 흔히 증언한 바와 같이, 나는 비너스를 강압적인 여신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나는 나바르 여왕이 《일곱 밤 이야기》의 하나에서 말하듯(이 작품은 그런 제재로는 묘하게 꾸며진 것이다), 한 남자가 오래 갈망해 오던 애인과 며칠 밤을 보내는데, 모든 기회와 자유를 가지고 함께 지내며 단지 키스와 접촉만으로 만족하라는 약속의 신의를 지켰다는 것을 기적 같은 일이라고도,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12. 레이몽 스봉의 변호


나는 무엇을 아는가?
461


몽테뉴는 스봉의 사상을 변호한다는 구실로 이 변호에서 사실상 스봉의 사상과는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사상을 전개시킨다. 몽테뉴의 《에세이》 중 다른 것과는 동떨어지게 긴 이 장은 그 사상이 가장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해석에 가장 난점을 많이 제기하는 논문이다. 그의 유명한 표어 '크세주(Que sais je? 나는 무엇을 아는가?)'로 요약되는 이 극단의 회의주의는 몽테뉴의 중심 사상으로 몇 세기 동안 인정되어 오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의 연구로는 이것이 제3권의 심리적, 도덕적 확신으로 향하는 중간 단계로 해석되고 있다.(<역자 해설> 중에서)


대단히 드문 비판적 의의 463

이 《에세이》는 어떻게 보면 그 내용과 형식이 작품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논문은 그의 철학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몽테뉴는 이성에 대한 신뢰를 잃고, 이성의 계속적 긴장과 죽음의 공포에 대한 방어책을 기대하던 철학에서 이탈하며, 천성에 몸을 맡기고 명상 속에서 해결책을 구하며, 학자나 철학자보다도 농민과 무식자를 본받으라고 권하는 사상으로 향하고 있다. 동시에 섹스투스의 학문에 접함으로써 그의 지적 신중성은 굳어지며,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심정과 사람은 사실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상을 가꾸며, 그 때문에 그의 사상은 그의 시대에 대단히 드문 비판적 의이를 가지고 드러나게 된다.

다른 면에서는 위와 같은 이유에서, 그는 1572년의 태도보다 좀더 개인적인 태도로 향하게 된다. 즉, 지적 신중성으로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경험에 의한 관념을 얻게 되었다는 의식, 자기 관념들이 상대적이라는 심정, 자아라는 직접적으로 알려진 정신적 사실을 세워야 하는 필요성, 이 모든 것이 그 자신을 무대로 내세우게 하며, 그를 자아의 묘사에 밀어넣는다. 이 경향은 1572년경에는 찾아볼 수 없으나, 1579년경에 확립된다.(<역자 해설> 중에서)

 

내가 고양이를 희롱하고 있자면 481∼482

자만심은 타고난 근본적인 병폐이다. 모든 생령들 중에서도 가장 재난당하기 쉽고 취약하며, 동시에 가장 오만한 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우주의 가장 나쁘고, 죽어 없이지며 비천한 부분에 못 박혀, 하늘의 끝없는 곳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최후 단계의 주거로, 여기 이 세상의 진흙과 분뇨통 속에서 세 가지 동물들(조류·포유류·어류) 중의 가장 나쁜 조건에 있는 동물들과 함께 자기를 보고 느끼고 한다. 그러고도 그는 상상력으로 달의 궤도 위에 올라서 하늘을 자기 발밑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바로 이 공상력으로 그는 자기를 하느님과 견주며, 하늘의 거룩한 조건을 자기가 차지하고 자기 자신을 따로 골라 다른 생령들과는 구별해 놓고, 자기 동료며 친구인 동물들에게는 그들의 몫을 갈라 주며, 그들에게 자기 멋대로 정한 소질과 힘을 부여한다. 그는 어떻게 자기 지성의 힘으로 동물들의 내적 움직임과 비밀을 안단 말인가? 그는 어떻게 그들과 우리를 비교하며, 동물들에게 어리석은 성질을 주고 있는 것인가? 내가 고양이와 희롱하고 있자면,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소일하는 것인지 누가 알 일인가?

짐승들과 우리 사이의 의사 소통이 불가능하게 된 결함이 어째서 그들에게 있고, 우리에게는 없다는 말인가? 우리가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결함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짐승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우리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이유로 우리가 그들을 짐승이라고 보는 만큼, 그들도 우리를 짐승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도 크게 괴이한 일은 아니다.


 

손으로는 어찌 하지? 483

사랑하는 애인들끼리는 화를 내고, 서로 화해하고, 간청하고, 지적하는 모든 일을 눈으로 한다.

침묵도 소망과
생각을 나타낼 줄 안다.    (타소)

손으로는 어찌 하지? 우리는 요구하며, 약속하며, 부르며, 내보이며, 위협하며, 기원하며, 간청하며, 부인하며, 거절하며, 물어보며, 감탄하며, 헤아리며, 고백하며, 후회하며, 두려워하며, 부끄러워하며, 의심하며, 가르쳐주며, 명령하며, 교사하며, 맹세하며, 증거하며, 비난하며, 처단하며, 죄를 사하며, 욕설하며, 경멸하며, 도전하며, 분개하며, 아첨하며, 갈채하며, 축복하며, 굴욕을 보이며, 조롱하며, 화해하며, 권장하며, 고무하며, 축하하며, 즐기며, 동정하며, 슬퍼하며, 낙담시키며, 절망하며, 놀라게 하며, 소리치며, 침묵케 하며, 그리고 무엇은 못할 것인가? 혓바닥에 못지않게 잡다하고 복잡하게 무엇이든지 표현한다.




대지 위에 벌거숭이로 내던져진 단 하나의 동물 486

자연은 보편적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포용한다. 그리고 생령 중에서, 자연이 그의 생명 보존에 필요한 모든 방법을 아주 충분하게 제공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사람들이(그들은 방자한 생각으로 때로는 자기를 구름 위에 올려놓고, 때로는 그 반대편 극단 속에 집어넣는다) "우리는 속박당하고 잘 씌워져서 대지 위에 벌거숭이로 내던져진 단 하나의 동물이며, 남이 내버린 물건으로밖에 자기를 싸감아 무장해 볼 거리도 없다. 반면에 다른 피조물들은 자연이 그들을 조개껍데기·깍지·덧껍질·털·모사·가시·가죽·잔털·날개짓·거북·등껍질·양털 가죽, 돼지털 등 그들의 생활에 필요한 대로 옷을 입혀 주고, 그들을 발톱·이빨·뿔 등으로 무장시켜서 공격하고 방어하게 하고, 자연이 헤엄치기·달음질치기·날기·노래하기 등 그들에게 맞는 일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반대로 우는 것 외에는 배우지 않으면 길가기·말하기·밥먹기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말을 듣는다.
 

장소와 위치에 따라 489
 

 

락탄티우스는 짐승들에게 말뿐 아니라 웃는 능력도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리고 나라가 다르므로 언어가 다른 것은, 같은 종류의 동물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관해서, 장소와 위치에 따라 메추리의 노랫소리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때로 잡다한 조류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우는 소리가 대단히 달라지며,
그 중에는 환경의 변화와 함께 목소리도 변하여
목쉰 소리로 노래하는 것도 있다.      (루크레티우스)

(나의 생각)

찰스 다윈의 『인간의 유래』를 떠올리게 한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490

우리는 다른 동물들보다 위에 있는 것도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은 같은 법과 운을 받는다고 현자(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말했다.

모든 사물들은 정해진 운명의 사슬에 묶여 있다.                                                                   (루크레티우스)

거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거기에는 질서와 단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본성의 모습 아래에서의 일이다.

사물들은 각각의 길을 걸어가면서
자연이 정한 움직일 수 없는 차이를 지켜간다.                                                                      (루크레티우스)


 

그들이 짐승을 섬긴다고 말해야 옳다 493

디오게네스는 부모들이 자기를 노예에서 해방시키려고 애쓰는 것을 보고 "어버이들은 미쳤어. 나를 맡아 대접하고 먹여 살리는 자야말로 나의 노예요" 하고 말했다. 짐승을 먹이는 자들은 짐승이 그들을 섬긴다고 하기보다도 오히려 그들이 짐승을 섬긴다고 말해야 옳다.

그뿐더러 짐승들에게는 더한층 품위 있는 면이 있다. 사자는 결코 다른 사자를 섬긴 일이 없고, 말이 다른 말을 섬긴 일이 없는 것은, 그렇게 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짐승들을 사냥하러 가듯, 호랑이와 사자들은 사람을 사냥하러 간다. 서로간에 같은 사냥을 하고 있다. 개들이 토끼에게 꼬치 고기가 잉어에게, 제비가 매미에게 , 매가 콩새와 종달새에게 하는 식이다.


 

칸디아의 염소들 494

칸디아의 염소들을 보면, 그들이 화살을 맞았을 때에 수많은 잡초들 중에서도 백선(白鮮)을 골라서 치료하며, 거북은 독사를 잡아먹으면 즉시 화박하(花薄荷)를 구해서 속을 훑어 내고, 도마뱀은 회향(茴香)으로 눈을 닦아 밝히며, 고니는 스스로 바닷물로 관장하고, 코끼리는 자기 몸과 자기 동무의 몸에서뿐 아니라 주인의 몸에서도(그 증거로 알렉산드로스에게 패한 포로스 왕의 코끼리가 있다), 전쟁 때 적에게 얻어맞은 작은 창과 삼지창 등을 우리로서는 할 수 없을 만큼 아프지 않게 뽑아 낸다. 이런 것을 어째서 지식이며 예지라고 말하지 못할 것인가? 동물들을 얕보기 위해서, 그들이 이런 일을 아는 것은 단지 본성이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이라고 핑계하는 수작은, 그들에게서 지식과 예지의 자격을 빼앗는 일이 아니고, 그렇게도 확실한 여 선생님(本性을 가리킴)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보다도 더 그들에게 이 자격을 부여하는 일이 된다.


 

복습하는 코끼리 496

아리우스는 말한다. "나는 옛날에 한 꼬끼리가 양쪽 허벅다리에 꽹과리를 달고, 또 꽃대롱에도 하나 달고, 이것을 치는 소리에 맞춰서 다른 놈들은 모두 동그랗게 춤을 추며 악기의 지휘에 따라서 어느 박자에 가서는 머리를 올리고 숙이는 것을 보았는데, 이 화음은 듣기에도 유쾌하였다." 로마의 극단에서는 코끼리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끊겨서 대단히 배우기가 힘든 많은 음계와 여러 박자에 맞춰 춤추며 움직이는 것을 예사로 볼 수가 있었다. 그중에는 공부한 것을 혼자서 외어 보며, 스승에게 꾸지람받고 매맞지 않으려고 힘써 조심해 가며 복습하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심각한 연구와 자기 반성 497

그러나 플루타르크가 책임지고 말하는 까치에 관한 다른 이야기는 괴상하기까지 하다. 이 까치는 로마의 어느 이발사의 이발소에서 그가 듣는 모든 것을 목소리로 흉내내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팔수들이 이 이발소 앞에 멈춰서 오랫동안 나팔을 분 일이 있었다. 그 이튿날은 이 까치가 사뭇 생각에 잠겨 입을 다물고 우울하게 지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놀라, 그가 나팔소리에 얼이 빠져서 귀가 먹고 그의 청각과 함께 목소리도 사라져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것은 심각한 연구이고 자기 반성이었으며, 그가 그 뒤 처음 낸 목소리는 이 나팔소리를 그 반복과 자태, 음조의 변화까지 완전히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공부로 그가 전에 말할 줄 알았던 것은 모두 버리고 경멸해 버렸던 것이다.


 

미래와 과거 전체를 결론지을 수 있을 것 499

우리는 평범한 일보다는 범상치 않은 일들을 더 높이 평가한다. 그렇지 않았던들 나는 이렇게 긴 기록으로 능청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와 같이 사는 동물들에 관해서 여느 때 우리가 보는 것을 상세히 연구해 본다면, 다른 시대나 다른 나라의 것을 수집해 오는 것만큼 경탄할 만한 사실을 찾아볼 수가 있을 것이다. 사물의 진행은 모두가 동일한 본성에 의해서 굴러간다. 현재의 상태에 관해서 유능하게 판단한 자는, 확실히 미래와 과거 전체를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나은 놈을 골라서 남겨 두려면 502

사냥꾼들이 확언하는 바에 의하면, 여러 마리의 강아지 속에서 가장 나은 놈을 골라서 남겨 두려면, 그 어미가 고르도록 하면 된다고 한다. 개 집에서 강아지들을 밖에 내놓으면 어미개가 맨 먼저 가져다 들여놓는 놈이 언제나 가장 나은 놈이며, 개 집을 사방으로 불로 둘러싸는 체하면, 살려내려고 가장 먼저 달려 드는 강아지가 가장 좋은 놈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짐승들은 우리가 갖지 못한 예측하는 습관을 가졌거나 또는 새끼들을 판단하는 데에 우리와는 다른 더 생기있는 덕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짐승들이 출생하고, 새끼를 치고, 기르고, 행동하고, 움직이고, 살고, 죽고 하는 방식이 우리와 아주 닮은 이상, 우리가 짐승들보다 나은 조건을 우리에게 붙이고 짐승들에게서 그들의 원래 자질을 끊어내 버리는 것은, 이성으로 판단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정으로 말하면 503

우정으로 말하면, 그들은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생기있고 견실하다. 리시마코스 왕의 개 히르카노스는 그 주인이 죽자, 그의 침대 밑에서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받지 않고 고집하고 있다가, 시체를 태우는 날 달려가서 그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피로스라고 부루는 사람의 개도 역시 그러하였다. 이 개는 주인이 죽은 이후로 그의 침대 밑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실어갈 때에 함께 실려가서 마침내 그 주인을 불태우는 섶 속에 뛰어들었다.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 504

욕망은 마시는 것이나 먹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이 있고, 여자와의 관계와 같이 자연스럽고도 필요치 않은 것이 있고, 또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것이 있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거의 이 마지막 종류에 속한다. 이런 것은 모두가 피상적이고 인공적이다. 왜냐하면 놀랍게도 본성이 만족하기에 필요한 것은 참으로 적으며, 본성이 우리에게 욕망할 거리를 남겨 놓은 것도 참으로 적은 까닭이다. 우리가 음식상에 차려 내는 것은 우리 본성이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스토아 학파는 사람은 하루에 감람나무의 열매 하나만 먹으면 살기에 족하다고 하였다. 포도주의 미묘한 맛은 본성이 명하는 바가 아니며, 사랑의 욕망에 첨가하는 점도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랑에는 위대한 집정관의 딸이 필요로 할 건 없다.      (호라티우스)

행복에 관한 무지와 그릇된 사상이 우리 마음속에 부어넣는 이런 외부적인 욕망은 너무나 수가 많아서, 본성에서 나오는 욕망들을 거의 모두 몰아 낸다.


기가 막힐 일이다 507

두 왕들 사이에
불화로 일어난 큰 투쟁이 벌어진다.
이때 전군(全軍) 의 생기 띤 전투적 열중과
군중의 진동하는 맹위가 어떠한가는 상상에 맡겨 둔다.   (베르길리우스)

나는 이 거룩한 묘사를 읽으면, 언제나 인간성의 졸렬한 허영을 읽는 듯하다. 왜냐하면 그 공포와 경악으로 우리를 황홀케 하는 저 투쟁적인 동작, 저 음향과 고함소리의 폭풍우.

검광이 번쩍 하늘에 솟으니
주위 대지는 맞부딫치는 무기의 눈부신 빛으로 번쩍이고,
인간들의 굳센 걸음에 땅이 울리고,
그 난동에 충격받은 산악의 반향은 하늘의 별들에까지
그들의 소음을 치솟아 올린다.                                    (루크레티우스)

이 수천 수만의 무장한 인간들의 가공할 장비, 그 맹위·정열·용기, 이런 것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원인으로 일어나서, 가벼운 인연으로 사라지는가를 고찰해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파리스라는 사람 때문에 저 처참한 전쟁이
그리스와 외족(外族) 국가 사이에 야기되었다고
전한다.                                                                   (호라티우스)

아시아 전체가 파리스의 오입질 때문에 전쟁으로 불타 버려 파괴된 것이다. 단 한 남자의 시기심, 울분, 쾌락, 가족 간의 질투 등, 수다스런 마나님 둘이 서로 할퀴며 대들게 할 만큼 성나게 할 것도 못 되는 원인들, 이것이 전쟁의 핵심이며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런 전쟁을 일으킨 주요한 인물이며, 동기가 된 자들의 말이면 바로 믿어 주어야 할 일인가? 가장 위대하였고, 가장 승리하였고, 이 세상이 있은 이후로 가장 강력하던 황제가, 놀잇감 삼아서 아주 재미나고 극히 교묘하게 바다와 육지에서 수많은 전쟁을 일으켜, 50만 명의 생령과 피가 그의 운명을 좇아 사라지고, 세계의 동서 두 부분의 힘과 부가 그가 이루려는 계획을 위해 소진되게 한 일을 들어 보자.

안토니우스가 글라피라와 사랑을 했다고
풀비아는 자기도 사랑해 달라고 내게 의무를 부여한다.
풀비아와 사랑을 하라고! 마리우스가 청해 온다면
그도 사랑해 줘야 하나?
아니다. 내게 이성이 있다면! 사랑 아니면 전쟁을!
하며 그녀는 말한다
- 뭐라고 내 생명보다 내 남근이 더 중하도다 · · · · · ·
울려라! 나팔아!                                                      (아우구스투스, 마르티알리스의 인용)

이 팔도 많고 대가리도 많은 사나운 괴물은 어쨌든 인간들이다. 허약하고 참담하고 가련한 인간들이다. 그것은 다만 뒤흔들리며 열에 뜬 개미집일 뿐이다.

검은 부대는 평원을 횡단하며 행진한다.      (베르길리우스)

거꾸로 부는 바람결, 한숨, 까마귀가 날아가며 우는 소리, 우연히 지나가는 한 마리의 독수리, 말의 헛디딤, 꿈 하나, 목소리 하나, 징조 하나, 아침 안개 하나가 그 괴물을 쓰러뜨려 굴러 떨어지게 하기에 족하다. 단지 햇볕을 그의 얼굴에 쬐어 보라.

그는 바로 녹아서 기절하리라. 시인이 노래하는 꿀벌 떼처럼 그의 눈에 먼지 한 줌 불어 넣어 보라.

우리의 모든 군기(軍旗)들, 연들, 그 선두에선 저 위대한 폼페이우스까지도 패하여 흩어진다.

 

충성심으로 말하면 509-510

충성심으로 말하면, 세상에 사람만한 배신자는 없다. 우리 역사에는 개들이 죽은 주인들의 원수를 맹렬히 추격해 간 이야기가 있다. 피로스 왕은 어떤 개가 시체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개가 사흘 동안이나 이러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이 시체를 매장하라고 명령하고, 개는 자기가 데리고 갔다. 어느 날 그가 자기 군대의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하러 갔을 때에, 이 개는 자기 주인을 살해한 범인을 알아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듯 그들을 향하여 맹렬히 짖으며 대들었다. 그래서 이 첫 번째 지적으로 살인 행위에 대한 원수를 갚는 수속이 진행되어 얼마 뒤에 재판의 한 방법이 되었다. 현자 헤시오도스의 개도 나우팍토스 인 카니스토르의 아들들이 자기 주인에 가한 살인을 입증하여 똑같이 복수를 하였다.

다른 개 하나는 아테네의 어느 사원을 지키고 있었는데, 신을 모독하는 도둑 하나가 가장 귀중한 보배를 훔쳐가는 것을 보고 힘 자라는 데까지 짖었다. 그래도 집사가 잠을 깨지 않자, 이 개는 도둑을 쫓아가기 시작하였다. 날이 샌 다음에도 도둑을 눈에서 떼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머물러 감시하며, 그가 먹을 것을 갖다 주어도 받아 먹으려 하지 않았으나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에겐 꼬리를 흔들며 주는 것도 받아 먹었다. 그리고 도둑이 자려고 멈추면 이 개도 같이 머무르는 것이었다. 이 개의 소식이 사원의 집사들에게까지 이르러 그 뒤를 쫓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크로미온 시에서 개를 확인하고, 그 도둑을 잡아 아테네 시로 데려와 처벌하였다.

재판관들은 이 개의 착한 봉사에 대한 감사로, 개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국가의 비용으로 얼마간의 밀을 부담하기로 했으며, 수도사들에게 개를 보살펴 주도록 명령하였다. 플루타르크는 이 이야기가 사실이며 자기 시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개, 코끼리, 호랑이 513∼514

도량(度量)의 크기로 말하면, 인도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보내 온 큰 개가 한 일보다도 더 분명한 모습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싸워 보라고 처음에는 사슴을 내놓고 다음에는 산돼지, 그리고 다음에는 곰을 내놓아도, 그는 상대를 않으며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았다. 그러나 사자 한 마리를 보았을 때에는 즉시 벌떡 일어서며, 이놈이면 한번 싸워 볼 만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는 일로 말하면, 어떤 코끼리 한 마리가 분에 복받쳐 자기를 부리던 사람을 죽이고는 너무 극심한 비탄에 빠져, 먹을 생각을 않고 그대로 죽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관대성으로 말하면, 모든 짐승들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짐승인 어느 호랑이 한 마리가 그 앞에 새끼 염소 한 마리를 내 주어도 해치지 않고 이틀 동안을 굶고 지내다가, 사흘째에는 자기가 갇혀 있던 우리를 부수고 나가서 다른 먹을 거리를 찾아다니기까지 하면서, 자기 손님인 새끼염소를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알시온 이야기 514∼515

서로 사귀어서 이루어지는 친밀성과 합의의 권리로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고양이·개·토기를 함께 살도록 길들여 볼 때에 보통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바다로, 특히 시칠리아의 바다로 여행하는 자들은 알시온의 생활 조건에서 인간 사고력의 한계를 넘는 일을 경험으로 배운다. 어떤 종류의 동물들의 잉태와 출생과 해산에, 자연이 그만한 영광을 부여한 일이 있던가?

과연 시인들이 말하는 바처럼, 델로스의 섬은 옛날에는 둥둥 떠다니다가 라토나의 해산을 위해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알시온이라는 새가 물결 위에 새끼를 치는 동안은 바다 전체가 정지해서 잔잔해지고 물결도 바람도 없고 비도 오지 않게 해 주었다. 그것은 바로 1년 중에 낮이 가장 짧은 동지 때의 일이며, 그의 특권 덕택에 우리는 한겨울에도 이레 밤 이레 낮을 위험 없이 항해할 수 있다. 그 암컷들은 자기 짝 이 외에는 다른 수컷을 모르며, 한평생 버리지 않고 그를 거둔다. 그리고 수놈이 노쇠하여 허약해지면 그를 자기 어깨에 메고 사방으로 다니며, 죽을 때까지 섬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알시온이 새끼를 기르려고 물결 위에 지어 놓은 보금자리의 놀라운 구조를 밝혀 보거나 그 재료를 짐작해 볼 총명성을 가져 본 일이 없다. 플루타르크는 그 새의 집을 열어 보고 만져도 보았다는데, 그 재료는 여느 물고기의 뼈를 서로 맞추고 잇고 엮고 다른 것은 가로지르고 한 것으로, 곡선과 둥근 면을 조절하여 물에 잘 뜨도록 동그란 배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새는 집을 다 지어서는 그것을 물결 위에 갖다 놓는데, 바다의 물결은 그것을 살그머니 쳐서 아직 맺어지지 않은 곳을 더 여미고, 그 구조가 아직 확실치 못해서 늘어진 곳을 다진다. 또 잘 이어져 있는 것은 물결이 쳐 조이기 때문에, 돌이나 쇠로 두드려도 여간해서는 부서지지도 풀리지도, 손상되지도 않게 만들어 놓는다고 한다.

더욱 감탄할 일은 그 내부의 오목한 형상과 균형이다. 과연 그 집을 지은 새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게 꼭 닫혀져 있어서, 비단 바닷물뿐 아니라 다른 어떠한 것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여며져 있다. 이것이 바로 그 구조에 관해 서적에서 인용한 극히 명백하게 설명된 묘사이다. 그렇지만 이 설명은 그 구조를 꾸미기에 곤란한 면을 아직 충분하게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마음이 허영되기에 우리가 모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을 우리 능력만 못한 것으로 보고, 경멸조로 해석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털도 뼈도 없는 토끼 515

우리와 짐승들의 능력이 대등하며 상호 관련성이 있다는 점을 좀더 자세히 말해 보자. 우리의 심령이 생각하는 바를 모두 자기 사정으로 해석하고, 자기에게 잡히는 모든 것에서 없어지게 하는 것이고 육체적인 소질을 벗겨 없애고, 자기가 알아 둘 가치가 있다고 보는 모든 사물들을 거기서 두께·길이·깊이·무게·빛깔·냄새·거칠음·매끈함·단단함·물렁함 등, 모든 감각적인 소질은 전부 피상적인 비천한 재료인 양 치워 두고 정리하며, 그들을 마치 내 마음속에 있는 로마와 파리, 내가 상상하는 파리를, 그것이 크기도 장소도 돌도 회도 나무도 없는 것으로 파악하며, 그들을 영생 불멸의 정신적인 자기 조건으로 조절해 가는 것을 영광으로 삼는 우리 심령의 특권, 바로 이 특권을 짐승들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팔소리나 총소리나 전투에 길들여진 말이 마구간에 누워서, 마치 지금 싸움터에 있는 것처럼 자다가 꿈틀거리고 부르르 떨고 하며, 그 마음속에 소리 없는 북소리, 무기와 부대가 없는 한 군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사실 그대는 강건한 준마들이 사지를 뻗고 잠들어 누워서도
그 동안 땀을 흘리며 자주 헐떡이며 마치 승리를 다투듯,
온 근육을 긴장시킴을 보리라.                                                                                            (루크레티우스)

사냥개가 꿈속에 토끼를 쫓고 있다고 상상하며, 잠 속에서 그 뒤를 쫓느라고 헐떡이며 꼬리를 뻗치고 오금을 흔들며, 그리고 달음질치는 동작을 나타내는 것을 우리는 본다. 이때의 토끼란, 털도 뼈도 없는 토끼이다.


 

저 원숭이, 어찌도 그리 우리를 닮았는가! 518

우리에게 가장 많은 짐승은, 모든 짐승들 중에서 가장 추하고 못난 짐승이다. 과연 외부에 나타난 모습과 얼굴의 형태로 보아서, 그것은 원숭이일 것이다.

가장 못난 짐승인 저 원숭이, 어찌도 그리 우리를 닮았는가!                                                   (엔니우스)

내부와 생명이 매인 부분들로 보면 돼지가 그렇다. 아주 벌거숭이로 해놓은 인간을, 그의 오점이나 타고난 굴종과 완전하지 못함을 생각해 보면, 다른 어느 동물보다도 우리가 몸을 감싸고 다니는 것에 정당한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점에서 우리보다 더 혜택을 받고 있는 자들에게서, 그들의 미로 우리를 장식하고, 그들에게서 벗겨 온 물건 밑에 우리를 가리려고, 털실·날개깃·털·명주실 등을 빌려 오는 것은 너그러운 눈으로 보아 달라고 해야 할 만한 일이다.
 



오로지 우리들만이 '우리 종족에게 숨겨서 해야 한다는 점' 519

그뿐더러 우리는 그 결함이 바로 동물들의 감정을 거스르는 단 하나의 동물이며, 오로지 우리들만이 본성에서 나오는 행동을 우리 종족에게 숨겨서 해야 한다는 점을 주목하자. 고려해야 할 만한 일은 이 방면의 대가(大家)들이 명령하기를, 사랑의 정열에서 치유되려면 욕심나는 대상의 육체를 자유로이 들여다볼 일이며, 애정을 냉각시키려면 사랑하는 것을 자유로이 보기만 하면 된다고 한 것이다.

어떤 자는 상대편 신체의 음부를 보고는
불타오르던 흥분이 즉시 얼어붙었다.      (오비디우스)

이런 치료법은 아마도 좀 까다롭고 냉각된 마음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서로 터놓고 친교를 맺어 가다가 싫증이 나게 된다는 것은 인간성이 지닌 결함의 두드러진 징조이다. 우리네 부인들이 사람들 앞에 나오려고 자신을 분칠하며 장식하고, 여간해서 자기 방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는 것은, 정숙한 마음보다는 기교와 조심성에서 하는 일이다.

우리 비너스들은 실수하지 않는다.
그녀들은 사랑의 올가미로 결박해 두려는 남자들에게
자기 사생활의 이면을 은닉하려고 매우 조심한다.      (루크레티우스)


무식한 사람 522

무식한 사람의 연장은 더 빳빳이 서지 못한단 말인가?    (호라티우스)


가련하고 참담한 동물 524

참으로 자연은 우리의 가련하고 허약한 처지에 대한 위안으로, 우리에게 오만함밖에 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에픽테토스가 '사람은 자기 생각을 사용하는 것밖에 자기 고유의 것이란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몫으로 바람과 연기밖에 가진 것이 없다. 철학은, 신들은 건강을 본질로 갖고 질병은 지식 속에 가졌으며, 사람은 그 반대로 행복은 공상으로 갖고 불행은 본질로 가졌다고 한다. 우리가 상상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재화와 보물은 한낱 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가련하고 참담한 동물이 허풍을 떠는 꼴을 보라.


상상력 때문에 526


어린아이들의 부드럽고 연한 살이 우리의 살보다 찢고 째기에 더 쉬운 것은 그들이 무지한 탓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말(馬)의 살은 어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상상력 때문에 병에 걸리는가? 우리는 자기 생각으로만 느끼는 병을 치료하려고 피를 뽑고 속을 훓터 내고, 약을 쓰는 자들을 본다. 우리에게 진짜로 병이 없을 때에는 무성을 알고 있다는 것이 도리어 탈이 된다. 얼굴 빛깔이 이러니 무슨 염증 충혈의 징조가 되고, 계절이 더우니 무슨 열병에 걸릴 위험이 있고, 그대의 왼손에 생명의 줄이 끊겼으니, 중한 병에 걸릴 징조를 알려 주는 것이 된다. 이 지식이 염치 없이 건강에 대든다. 청춘의 이 쾌활한 정력은 늘 그대로 있을 수 없으며, 그 힘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면 안 되니까, 미리 피를 뽑아서 힘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부의 사랑 527


우리가 경험으로 보는 바 가장 천하고 둔한 자들이 사랑의 실천에는 더 견실하고 바람직하며, 마부의 사랑이 한량들의 사랑보다 더 유쾌하다는 것은, 후자에게는 마음의 동요가 육체의 힘을 혼란시키고 꺾고 피로케 한 탓이 아니면 무슨 까닭일까?


건강을 가장 가벼운 병만큼도 느끼지 못한다 528


고통과 불행에 대해서 냉담하고 둔감한 취미를 갖는 것이 주는 편리함은 역시 그 결과로 해서 좋은 것과 유쾌한 것을 누리는 경우에도 예민하지 못하고 맛보지도 못하게 만드는 불편함을 이끌어 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비참한 조건으로는 즐겨야 할 것보다도 피해야 할 일이 더 많고 극도의 탐락은 가벼운 고통만큼도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게 되어 있다. "인간은 고통보다도 쾌락의 감각이 적다." (티투스 리비우스) 우리는 건강을 가장 가벼운 병만큼도 느끼지 못한다.


행복이라는 것은 불행이 없다는 것에 불과하다 529


우리의 행복이라는 것은 불행이 없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탐락을 가장 높이 평가한 어떤 학파의 철학자는 이 행복이라는 것을 다만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세워 놓았다. 엔니우스가 말하듯, 불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이 바랄 수 있는 한의 행복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불행을 갖지 않음은 많은 행복을 가짐이다. (엔니우스)

우리를 한순간 건강과 고통이 없는 상태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듯한 바로 그 근질거림과 예민한 감각, 이 힘차고 동적이며 무엇인지 모르게 찌르는 듯하고 물어뜯는 듯한 탐락도, 역시 그 목표는 고통이 없는 것이다. 여자와의 접촉에서 우리를 황홀케 하는 정욕은, 우리에게 맹렬한 욕망이 지닌 고통을 없애는 것밖에 찾지 않으며, 이 욕구를 채워 그 열병을 없애고 편안히 쉬는 것밖에 요구하지 않는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단순함이 우리를 아무 불행도 없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조건으로서는 대단히 생복한 상태로 지향케 하는 일이다.

나는 가능하지도 바랄 만하지도 않는 이 고통 없는 상태를 칭찬하지 않는다. 나는 병에 걸리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내가 병에 걸렸으면 그것을 알고자 한다. 그리고 사람이 내 살을 태우고 찢고 하면 그것을 느끼기를 원한다. 진실로 고통의 의식을 뽑아 없애는 자는 동시에 탐락의 의식을 근절시킬 것이며, 마침내는 인간 자체를 파괴할 것이다. "고통이 없음은 높은 값을 지불해서밖에는 얻지 못할 것이다. 즉 심령의 둔화와 육체의 마비를 초래한다."(키케로)

 

키케로의 거짓말과 참말 530

지나간 행복의 추억은 고통을 배가한다.                                                                            (단테의 시 개작)

철학이 주는 이 충고로 추억 속에다 지나간 행복만을 담아 두고, 우리가 겪은 불쾌한 일을 지워 버리라는 것은 마치 망자의 기술이 우리의 권한 안에 있는 것 같은 말이니, 다 똑같은 수작이다. 이것은 또 우리를 한층 더 못나게 만드는 충고이다.

지난날 불행의 추억은 감미롭다.                                                                                                   (키케로)

운명과 싸울 수 있게 내 손에 무기를 쥐어 주어야 하며, 인간의 모든 역경을 발밑에 유린해 버리도록 내 마음을 굳세게 만들어 주어야 할 철학이 어째서 물러빠지게 이 비겁하고도 꼴사나운 계책으로 나에게 숨을 구멍만 찾아 다니게 하려는 것인가? 기억력은 우리가 택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보여 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 준다. 참으로 무엇을 잊어버리고 싶은 욕망만큼 그것을 우리 기억에 생생하게 새겨넣은 것이란 없다. 어떤 사물을 잃어버리고 축원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길이 새겨서 잘 보존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어떻게든지 우리의 불행을 영원한 망각 속에 매장하고, 번영하던 시절의 유쾌하고 감미롭던 추억을 환기시킴은 우리 능력 안에 있는 일이다"(키케로)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원치 않는 때에도 내 추억을 간직하고, 내가 원하여도 그것을 잊지 못한다"(키케로)는 말이 진실이다. 이 충고는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홀로 자기를 감히 현자라고 표명한 자'의 말이다.



최후의 해결책 533


전도서에는 '예지가 많으면 번민이 많다', '학문을 쌓는 자는 노역(勞役)과 고민을 쌓는다'고 하였다.

이 점에서 대개 철학 사상이 합치하지만, 모든 종류의 가난에 대한 최후의 해결책은,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없는 인생에게 종말을 지으라고 명령한다.

"재미있나? 복종하라. 재미 없나? 그대 가고 싶은 데로 가라."(세네카)

"고통이 쓰린가? 그래, 그것이 그대를 괴롭힌다고 하자. 그대가 알몸뚱이거든 목을 내밀라. 그러나 그대가 불카누스의 무기로 옷 입었거든 저항하라." (키케로)


오오 오만이여! 535


오오 오만이여! 너는 얼마나 우리를 방해하느냐! 소크라테스는 예지의 신이 그에게 현자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그리고 자신을 샅샅이 살펴보고 뒤흔들어 보고서도, 거기서 이 거룩한 호칭의 아무런 근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만큼 정의롭고 절도 있고 용감하고 박식하며, 자기보다 더 말을 잘 하고 잘생기고 나라를 위해 유익한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자기가 남보다 특출난 것이 없고, 자기가 현명한 자로 처신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며, 그의 신은 사람이 학문과 예지에 관해서 가진 생각을 사람이 특수하게 어리석은 탓으로 보고 있으며, 최선의 학설은 무지의 학설이며 최선의 예지는 순박성이라고 결론지었다.


보리 이삭 537


나는 결국 인간이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할 힘이 그의 역량에 있는 것인가, 또는 그렇게 오랜 세기를 두고 찾아본 결과가 어떤 새로운 힘과 견고한 진리로 인간을 부유하게 만들어 주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양심적으로 말하는 것이라면, 그가 그 오랜 추구에서 끌어 낸 모든 소득이라는 것은 그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타고난 무지는 오랜 연구로 확인되고 증명되었다.

박학한 사람들에게는 보리 이삭에서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속이 비어 있는 동안은 고개를 쳐들고 오만하게 처신한다. 그러나 성숙해져서 낟알이 생기며 속이 차서 굵어지면 겸손해지고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든 것을 시도하고 탐구해 본 다음, 이 학문의 더미와 사물들의 잡다한 창고 속에서 허영된 일 외에는 아무것도 단단하고 견실한 일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들의 자만심을 포기하고 자신의 타고난 조건을 인정하는 것이다.


가장 현명한 인간 538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현명한 인간은 무엇을 아느냐고 누가 물어 보자,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 우리가 아는 것의 최대 부분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사물들의 최소 부분이라는 것,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모르는 것의 극히 적은 일부분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우리는 꿈으로 사물들을 알고 있다. 실은 우리는 사물들을 모른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거의 모든 옛 사람들은 인간이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우리의 감각은 제한되어 있고, 지성은 허약하고, 인생은 짧다고 말하였다."(키케로)


몽테뉴가 살던 시대의 고민과 고뇌 542


다른 자들이 구속받고 있는 필요성에서 자기가 면제되어 있는 것만도 장점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환상이 만들어 낸 하고많은 잘못 속에 얽혀 자기보다는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고 있는 편이 더 좋은 일이 아닌가? 이렇게 소란스레 싸움을 거는 분열 속에 섞여드는 것보다는 확신을 갖는 일을 미뤄 두는 것이 더 낫지 않는가?


어려운 사고방식, 난해성 546∼547

결국 이런 것은 허망한 제목을 가치 있게 보이려고 하며, 우리의 정신에 호기심으로 흥미를 돋운다. 또 우리 정신을 길러 가꿀 재료라고 내주는 것이 살점 없는 헛된 뼈다귀나 갉아먹으라고 던져 주는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이런 어려운 사고 방식을 탐하는 것일까? 클리토마코스는 카르네아데스의 문장을 보고, 그가 무슨 의견을 가졌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에피쿠로스는 어째서 평이한 문체를 피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왜 '까다로운 자'라는 별명을 받았던가? 난해성은 학자들이 요술쟁이처럼 그들 기술의 허황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사용하는 잡술로서, 어리석은 인간들이 여기에 쉽사리 속아넘어간다.

난삽한 언어로 속물들에게 명성을 떨친다.(헤라클레이토스를 가리킴)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들은 애매한 문구 속에
숨겨진 사상만을 애호하며 탄복하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


사로잡힌 신세에 절망한 사람들 549

사로잡힌 신세에 절망한 사람들이 진리의 탐구에 기쁨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연구는 그 자체가 재미나는 일이며, 너무나 재미나기 때문에 스토아 학파들은 여러 탐락 중에서도 정신의 수련에서 오늘 탐락을 금지하고 그것을 억제하려고 하며, 너무 알고자 하는 데에도 무절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갈증을 채우는 쾌감을 잃지 않으려고 549∼550


데모크리토스는 식탁에서 꿀맛같이 단 무화과를 먹어 보고는,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감미로움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근원을 밝히려고 식탁에서 일어나 무화과를 따 온 자리의 나무 생김새가 어떤가를 보러 갔다. 그의 하녀는 이렇게 소란을 떠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를 듣고, 그걸 가지고 그렇게 수고하지 말라고 웃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무화과를 꿀그릇에 담아 두었던 것이다. 그는 이 때문에 탐구해 보려는 기회를 잃고 자기 호기심의 재료를 빼앗긴 것에 분개해서 "물러 가거라, 기분 나쁘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본래 그런 것으로 보고, 그 원인을 끝까지 캐어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잘못된 추측을 고집한 상태로 진실한 이유를 발견하려고 하였다.

이 유명하고 위대한 철학자에 관한 일화는, 우리가 어떤 사물의 원인을 참구하여 알아내지 못하고 절망할 때에, 그 추구해 보는 연구에 대한 정열에서 느끼는 재미의 성질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다. 플루타르크도 이것과 같은 예를 하나 들고 있다. 어떤 자는 탐구하는 재미를 잃지 않기 위해서, 자기가 그 원인을 캐고 있는 사물이 해명되기를 원치 않더라는 것이다. 또 어떤 자는 물을 마셔서 갈증을 채우는 쾌감을 잃지 않으려고, 의사가 그의 열병에서 오는 갈증을 치로해 주기를 원치 않더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있기보다는 쓸모없는 사물이라도 배우는 편이 낫다." (세네카)


몽테뉴의 책이 금서로 지정될 만한 근거를 제공했던 대목들 559

마호메트가 신자들에게 비단이 깔리고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되고, 천하일색의 미인들이 가득하며, 특이한 음식과 술이 가득한 천당을 약속할 때에, 그들은 죽어 갈 자기 인생의 욕망에 맞는 관념과 희망으로 꿀을 발라서 우리를 꾀려고 우리의 어리석은 마음에 아첨하는 희롱꾼인 것을 나는 잘 안다. 그런데 우리 중의 어떤 자들은 똑같은 잘못을 범하며, 우리가 부활한 다음에도 온갖 종류의 쾌락과 행복이 수반되는 이승의 현세적 생활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늘에서 내린 것 같은 거룩한 개념들로 하느님의 성질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거룩하다는 별명까지 얻은 플라톤이, 이 가련한 생령(生靈)인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힘(거룩한 세상의 힘)에 적응할 수 있는 무엇을 가진 것으로 생각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허약한 이해력이나 감각의 힘이 영원한 행복에 참여할 수 있고 영겁의 고초를 당해 낼 만큼 강력하다고 생각했다고 믿을 수 있는 일인가? 우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그에게 이렇게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저승에 가서 얻으리라고 그대가 약속하는 쾌락들이 내가 이승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무한과 아무 공통된 점을 갖지 않는다. 내가 태어난 오관(五官)의 감각들이 환희로 충만하고 이 영혼이 욕구하고 희망할 수 있는 모든 만족으로 잡혀져 있다 해도, 우리는 영혼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그것 역시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 속에 내 것이 무엇이든지 들어 있다면, 거기에 거룩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만일 그것이 현재 우리의 처지에 속할 수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면, 그것은 고려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사라질 인생들의 모든 만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친척과 자녀나 친구들의 선심이 만일 저승에 가 있는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우리가 그때에도 그런 쾌락을 중히 여겨야 한다면, 우리는 이승의 제한된 재물들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저승에서 숭고하고 거룩한 약속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의 위대성을 당연하게 상상해 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우리의 이 비참한 경험으로의 위대성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상상해 보아야 한다." "하느님이 신자들에게 준비해 놓으신 행복은 눈으로 볼 수 없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고, 사도 바울은 말하였다.(고린도서)

"우리에게 그것이 가능하게 하려고, 누가 우리 존재를 개조하고 변경하여 준다면(플라톤이여, 그대가 그대의 정화를 가지고 말하듯), 그것은 너무나 극단적이며 보편적인 변화가 될 것이기 때문에, 물리학의 학설에 의하면 그것은 이미 우리 자신이 아닐 것이다.

      격전 속에서 싸우던 것은 헥토르였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의 말에 끌려가던 시체는
      이미 헥토르가 아니었다.                        (오비디우스)

      변화하는 것은 모두 분해된다.
      그러므로 그는 멸한다.

      심령의 부분들은 사실 위치가 바뀌어지고,
      그 질서가 옮겨진다.                              (루크레티우스)

는 식의 보상을 받을 것은 다른 사물일 것이다."

"왜냐하면 피타고라스의 윤회설에서, 즉 그가 우리의 영혼에 관하여 상상하던 그 영혼의 거주지가 변함에 따라, 카이사르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사자는 카이사르가 가지고 있는 심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그 사자가 카이사르라고 생각해야 할 일인가? 그 사자가 바로 카이사르라면 플라톤의 의견을 논박하며, 당나귀로 변한 어미를 아들이 타고 다닌다는 식의 어리석은 수작이 있을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 옳을 것이다."

"동물들의 신체가 다른 종류의 동물의 신체로 변할 때에, 다음에 나온 동물은 그 전의 동물과 다를 것이 없다고 우리는 생각하는가? 페닉스의 재에서 벌레가 나오고, 다음에 다시 다른 페닉스가 나온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둘째 번 페닉스는 첫 번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 명주실을 만들어 주는 벌레는 죽어서 말라 비틀어지는 것같이 보이는데, 바로 이 몸뚱이에서 나방이 나오면, 또 거기서 다른 벌레가 나온다. 이 벌레를 아마도 첫번 벌레라고 본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 한번 존재하기를 그친 것은 이미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시간은
우리의 물질을 모아 지금 있는 질서로 부흥시키고,
생명의 빛이 다시 우리에게 주어진다 해도
한 번 우리의 추억의 선이 단절된 다음에는 적어도
우리는 이런 사건들에 관심이 끌리지 않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플라톤이여, 그대가 다른 곳에서 내세에 가서 보상을 누린다는 문제가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일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무지 그럴 성싶지 않은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눈알이 뽑혀 신체의 다른 부분과 분리되면
눈은 단독으로는 어느 물체도 식별할 수 없다.      (루크레티우스)

"이 점에서 고려하면, 그것은 이미 인간이 아닐 것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주요한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의 분리는 우리 존재의 죽음이며 파멸이기 때문이다."

그 중간에 생명의 멈춤이 일어나고,
모든 동작은 감각을 떠나 흩어져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였다.        (루크레티우스)

"인간이 사용하며 살아가던 팔다리를 벌레가 파먹고 흙이 그것을 썩힐 때, 인간이 고통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살아가며,
그 집합체는 우리 개인을 구성하므로 그런 일은
우리와는 무관하다.                                            (루크레티우스)

그뿐더러 인간 속에 선하고 도덕적인 행동들이 들어가서 실현되게 한 것이 곧 신들이 한 일인 이상, 신들은 그들 정의의 어느 기반 위에서 인간이 죽은 다음 그의 선하고 도덕적인 행동을 알아보고 포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의지를 조금만 움직이면 사람들이 실수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들이 사람들을 그릇된 조건에 데려다 놓고, 이쩌서 인간의 악행에 분격하고 복수하는 것인가?

인간은 자기가 있는 것으로밖에는 있을 수 없으며 자기 능력의 한계 안에서밖에 상상해 볼 수 없다. 사람밖에 못 되는 자들로서 신과 반신(半神)들에 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음악을 모르는 자가 노래하는 자를 평가하거나, 진영(陳營)에 있어 본 일이 없는 자가 무기와 전쟁에 관해서 토론하려는 식으로, 경솔한 추측으로 자기가 알지 못하는 기술의 실체를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보다도 더 오만한 수작이라고 플루타르크는 말한다.


무한수 567

그대의 이성은 세상이 여러 겹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밖에는 더 그럴듯하고 견고한 기초를 갖지 못한다.

대지·태양·달·바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모두
단일하기는커녕 반대로 무한수로 존재한다.                            (루크레티우스)


만일 우주가 여럿 있다면 568

그런데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등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생각한 바와 같이, 만일 우주가 여럿 있다면 그 진리와 규칙들이 다른 우주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인지 누가 알 일인가? 다른 우주들은 아마도 다른 모습과 제도를 가졌을 것이다.


극히 짦은 한 중단임에 불과한 이 순간을 가지고 569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생명인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죽음인지 누가 아는가?      (에우리피데스)

그것도 그럴듯하지 않은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우리가 이 영원한 밤의 무한한 흐름 속의 한 섬광이며, 우리에게 영원히 계속되는 자연 조건의 극히 짧은 한 중단임에 불과한 이 순간을 가지고 존재한다는 자격을 얻을 것인가? 죽음은 이 순간의 앞과 뒤의 전부와, 이 순간 자체의 상당한 부분까지도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자들은 멜리소소의 추종자들처럼 운동이라는 것은 없으며,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고(왜냐하면 이 우주가 하나밖에 없다면, 플라톤이 말하는 천체의 움직임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의 움직임도 여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 자연에는 생산도 부패도 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571

······ 이 생각은 "나는 무엇을 아는가?" 라는 질문의 형식으로 더 확실하게 파악된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저울대에 표어로 새겨 놓았다.


몽상과 과오의 원천 572

과거건 미래건 이 무한한 세기들은 하느님에게는 한순간에 지나지 않으며, 선과 예지와 힘이 그의 본성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언어는 그것을 말하지만 지성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오만은 하느님의 소질을 우리의 판단으로 검사해 보려고 한다. 여기서 세상 사람들이 사로잡혀 있는 몽상과 과오가 생기며, 자기 무게보다 동떨어진 사물들을 자기들 저울대로 달아 보려고 한다. "아주 작은 성공에 용기를 얻을 때에, 인간 심성의 오만이 저지를 일은 놀랄 정도다." (플리니우스)


대자연은 수수께끼 같은 시에 불과 583

나는 플라톤에서, 대자연은 수수께끼 같은 시에 불과하다고 말한 이 거룩한 말을 읽지 않았던가? 그것은 마치 무한히 잡다한 그릇된 빛이 서로 엇갈려 비쳐서, 우리 추측에만 맡겨 두도록 베일로 가려진 한 폭의 그림이라고도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완전한 경이 586

어째서 정신적 인상이 한 뭉치로 된 굳은 물체 속에 이렇게 길을 만들어가며, 이런 경탄할 만한 장치의 관계와 연락의 성질이 무엇인지 인간으로서는 알아본 자가 없다. "이 모든 사물들은 인간의 이성에 알려지지 않았으며 대자연(본성)의 장엄성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 플리니우스는 말하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체와 영혼의 결합은 완전한 경이로서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며, 이 결합 자체가 인간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일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확실하다는 인상 588

확실하다는 인상은 미친 수작과 극단의 불확실함을 드러내는 확실한 징조이다.

아리스토텔레스 591

 

아리스토텔레스를 잊어버리지 말자. 그는 육체를 자연스레 움직이게 하는 것을 엔텔레케이아(생명 존속)라고 이름지었다. 그것은 다른 것에서 볼 수 없을 만큼 냉정한 착상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혼의 본질도 근원도 본성도 말하지 않고, 다만 그 효과만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일리아드 593

만일 원자들이 우연에 의해서 여러 형상들을 지어 놓은 것이라고 하면, 어째서 그들은 집 한 채, 구두 한 켤레 만들어 놓을 수 없었던 것인가? 또 어째서 무한수의 그리스 문자를 마당에 뿌려 놓다가 《일리아드》의 원본을 만들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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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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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21. 상상력에 대하여


영생 불멸의 작품들의 작가 114


자연은 이 기관에게 죽어 갈 인생들의 유일한 영생 불멸의 작품들의 작가로서 어떤 독특한 특권을 부여할 때, 그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에게는 생식이 거룩한 행동이며, 사랑은 영생의 욕망이고, 그 자체가 영생의 정령인 것이다.


22. 한 사람에게만 이로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롭다



우리 마음의 소원 119


장사는 청년들의 낭비가 없으면 되지 않는다. 농군은 곡식이 비싸야 하며, 건축가는 집이 무너져야 하고, 재판소 관리는 사람들이 소송과 싸움질을 해야 되며, 성직자들의 영광과 직무까지도 우리의 죽음과 악덕이 있어야만 된다. 의사는 자기 친구가 건강한 것도 좋아하지 않으며, 군인은 자기 도시의 평화도 좋게 보지 않는다고 옛날 그리스 희극 작가는 말한다. 다른 일도 다 마찬가지이다. 더 언짢은 일로, 우리 각자가 자기 속을 뒤져 보면, 우리 마음의 소원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손해가 생겨나 커지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찰해 본 나는, 대자연이 이 점에서 그의 전반적인 행정을 게을리 하는 바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자연법학자들은 개개의 사물의 출생과 양육과 성장은 다른 사물의 변질과 부패라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23. 습관에 대하여, 그리고 이어받은 법을 쉽사리 변경하지 않음에 대하여



습관은 최강의 상전 119∼120
 

 

이 이야기를 처음으로 꾸며 낸 사람은 습관의 힘을 아주 잘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한 시골 여인이 송아지 한 마리를 낳았을 때부터 두 팔에 안고 쓰다듬어 주는 버릇이 생겨 이 일을 계속했더니, 그것이 습관이 되어 큰 황소가 된 뒤에도 거뜬히 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습관이란 것은 사실 배신적인 맹위를 떨치는 훈장인 까닭이다. 그것은 우리 속에 은밀히 그 권위의 발판을 닦는다. 그러나 시작은 순하고 잔잔하게 하다가 시간의 도움을 받아 발판을 닦아 자리잡고 난 뒤, 얼마 안 가 맹렬한 폭군의 얼굴을 드러낼 때, 우리는 거기 대항해서 눈을 쳐들 힘도 없어진다. 우리는 습관이 자연 법칙의 모든 방면에 침범하는 것을 본다.

습관은 모든 사물들 가운데 최강의 상전이다.     (플리니우스)


옆 사람의 코 121


내 옷깃에 뿌린 향수는 코에 상쾌하다. 그러나 사흘만 계속해서 입고 다니면 그것은 옆 사람의 코에만 소용이 있을 뿐이다.


습관은 대단찮은 일이 아니다 121∼122

플라톤은 한 아이가 도토리를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그러지 말라고 책망하였다. 그 아이가 "대단찮은 일로 책망하시네요"라고 대꾸하자 "습관은 대단찮은 일이 아니다"라고 플라톤이 대꾸하였다. 우리의 가장 큰 악덕은 연약한 소년 시절에 주름잡히는 것이며, 우리의 가장 중요한 훈육은 유모의 손에 달렸다고 본다. 어린애가 암탉의 목을 비틀고 개나 고양이에게 상처를 주며 날뛰는 꼴을 보는 것이 어머니들의 소일거리가 되고, 어떤 아버지는 바보처럼 아들이 자기 몸을 방어할 줄 모르는 농민이나 하인을 정당하지 못하게 때리고 있는 것을 보고 기사 정신을 가진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배신과 속임수로 자기 동무를 농락하는 것을 보면 재롱을 피운다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잔인과 폐악과 배반의 씨앗이며 뿌리이다. 그런 것이 싹이 트고 떳떳이 커가서 습관의 손에서 힘차게 득세한다.


이러한 비열한 경향을 아이의 나이가 어리고 경솔한 탓으로 돌리며 변명해 주는 일은 매우 위험한 교육 방법이다. 첫째 이것은 천성이 하는 말이니, 이때 그 천성은 더 약한 만큼 그 소리는 더 순수하고 강력하다. 둘째로 속임수의 더러움은 금화와 푼돈과의 차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에 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푼돈을 다룰 때에만 그렇지, 금화를 다룰 때에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식보다는, '푼돈으로 속일 바에야 어째서 금화로는 못 속여?'라고 결론짓는 편이 더 옳다고 본다. 어린애들에게는 조심해서 그 꾸밈 자체를 미워하도록 가르쳐 주어야 할 일이다. 또 그들이 단지 행동에서뿐 아니라, 특히 마음에서 이 악덕을 피하도록 본래의 나쁜 점을 가르쳐 주어야 하며, 악덕이 어떤 가난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그런 생각마저 징그럽게 보여 주어야 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항상 크고 평탄한 길을 걷도록 지도받았고, 또 어린애 장난에라도 속임수나 야바위 따위를 섞을 때에는 분노를 느껴왔기 때문에(진실로 어린애들 장난은 장난이 아니고, 그들에게는 가장 신중한 행동이라고 간주해야 하는 만큼), 아무리 가벼운 심심풀이라도 속이는 일에는 마음속에서부터 극도의 혐오를 느꼈다.


버릇이 되면 123


기적은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그것이 자연의 본질은 아니다. 버릇이 되면 우리들의 판단력은 마비된다. 야만인들은 우리가 그들 눈에 비친 것보다 그들이 우리 눈에 더 괴상하게 보일 것도 없으며, 더 그러할 이유도 없다.


습관은 우주의 여제 127

습관은 키오 섬에서 7백 년 동안 아내들이나 처녀들이 잘못을 범한 기억 없이 지냈다는 기적을 실현하지 않았던가? 결국 내 생각으로는 습관이 하지 않는 일이나 하지 못할 일은 없다. 그리고 핀다로스가 습관을 우주의 여제라고 불렀다고 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다.

여기까지가 아비들에게 모욕적인 취급을 하던 한계 127

 

제 아비를 때리고 있던 자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자기 집 습관이라고 하였다. 그 아비는 그 조부를 그렇게 때렸고, 그 조부는 그 증조부를 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가리키며, 이 애도 내 나이쯤 되면 나를 때릴 것이라고 하였다. 아들이 거리에서 아비를 잡아당기며 끌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문 앞에 와서는 아비가 아들에게 멈추라고 명령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비를 거기까지밖에는 끌고 가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아들들이 습관적으로 버릇이 되어서, 그 가정에서 아비들에게 모욕적인 취급을 하던 한계였다.

 


습관의 힘 128

습관의 힘이 가진 주요 효과는 우리를 너무 강력하게 움켜잡아 옭아넣고 있는 까닭에, 명령하는 것을 생각해 따져보기 위해 그 지배에서 벗어나 제 정신을 차려 볼 수가 거의 없다는 점에 있다. 참으로 우리는 출생해서 젖먹이 때부터 이 습관을 들이마시며, 처음 세상을 볼 때에 세상은 이 습관이 보여 주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길을 따라가야 하는 조건으로 세상에 나온 것처럼 생각된다. 그리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신뢰받고, 조상들에게 씨를 받아서, 우리 마음에 주입되어 있는 공통의 사상은 그것이 보편적이며 자연스런 사상인 것같이 보인다.


24. 같은 결심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다른 결과


운에 매이는 수가 많다 141

나는 의술뿐 아니라 더 확실성 있는 여러 기술도 운에 매이는 수가 많다고 본다. 시상이 떠올라 작가가 황홀한 무아경에 실려가며 시를 읊는 경우에는 왜 운을 탔다고 하지 못할까? 이러한 영감은 자기 능력과 힘에 넘치는 일이며, 그것은 자기 자신 밖에서 오는 힘인 것을 작가 자신도 인정한다. 웅변가들도 비상한 동작과 흥분에서 자기가 의도하던 것보다 넘치는 말을 할 때에 그것이 자기 능력이 한 일이라고 하지 않는다. 미술도 그와 같으며, 때로는 화가의 필법을 벗어나서 그의 구상과 지식을 초월하는 작품이 나오면 화가 자신도 감탄과 경악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운은 이런 모든 작품들에 그가 차지하고 있는 몫을 작가의 의도뿐 아니라 지식 없이 이루어지는 그 작품의 우아성과 아름다움 속에 더 명백하게 보여 준다. 능력 있는 독자는 흔히 다른 사람의 문장 속에 작가 자신이 그런 점을 알아보며 거기 넣은 것과는 다른 완벽성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 더 풍부한 의미와 양상을 찾아 준다. 군사적인 작전으로 말하면, 운이 거기에 얼마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가는 각자가 보는 일이다.

우리의 충고와 고찰에도 그 속에 운과 요행이 섞여 있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지가 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것이 못되며, 예지는 예민하고 생동할수록 그 자체에 더욱 허약성을 발견하며, 그 자체를 경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음모를 당할 위험을 느끼는 자 142

음모를 당할 위험을 느끼는 자는 실력으로도, 경계 조치로도 안전을 기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적이 나를 가장 잘 보살펴 주는 친구의 가면을 쓰고 올 때에 적에 대해서 내 안전을 도모하는 것, 그리고 우리들을 보좌하는 자들의 의지와 마음을 알아보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신념은 신의를 불러온다 144

너무 상냥하고 잘 살펴보는 예지는 고매한 사업에는 치명적인 적이다. 스키피오는 시팍스를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군대를 남겨 두고, 새로 정복해서 치안이 아직 의심스런 스페인을 떠나서 아프리카 땅으로 건너가던 때에, 단지 배 두 척을 가지고 적의 땅이며 야만인 왕의 세력권이고 신의도 믿을 길 없는 곳에, 아무 보증도 없이 인질도 잡아 두지 않고, 다만 자신의 위대한 용기와 자기 행운과 높은 희망이 약속하는 바를 믿고 뛰어들었다. "우리가 보여 주는 신념은 신의를 불러온다."(티투스 리비우스)


25. 학식이 있음을 자랑함에 대하여


이책, 저책, 내 마음에 드는 문장을 도둑질해 다니며 151

우리는 기억력을 채울 생각만 하고, 이해력과 양심은 빈 채로 둔다. 마치 새들이 모이를 찾으러 나가서 그 모이를 새끼에게 먹이려고 맛보지 않고 입에 물어 오는 것과 똑같이, 우리 학자님들은 여러 책에서 학문을 쪼아다가 입술 끝에만 얹어 주고, 뱉어서 바람에 날려 보내는 짓밖에는 하지 않는다.

이 어리석은 수작이 얼마나 내 경우에 들어맞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내가 여기 글을 쓰는 것도 똑같은 수작이 아닐까? 나는 이책 저책, 내 마음에 드는 문장을 도둑질해 다니며, 그것을 담아 둘 곳도 없어서, 내게 저장해 두지 못하고 여기다 옮겨놓는 것이다. 사실 이 문장들은 전에 있던 자리에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지식으로만 배우는 것이고, 과거의 것은 미래의 것과 똑같이 지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앵무새도 이만큼은 할 것 152

우리는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플라톤의 도덕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라는 식으로 말할 줄 안다. 그러나 우리 자신으로는 뭐라고 말하나? 우리는 어떻게 판단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앵무새도 이만큼은 할 것이다.


지식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152∼153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지식을 받아 담는다. 그것뿐이다. 지식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불이 필요해서 이웃집에 불을 얻으러 가서는, 거기서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불을 보고 멈춰서 쬐다가 얻어 온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자와 같다. 배 속에 음식을 잔뜩 채워 보았자, 그것이 소화가 안 되고 우리 속에서 변화되지 않으면, 또 우리들을 더 키워 주고 힘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학식이 많아서 경험이 없이도 그렇게 위대한 장수가 되었던 루쿨루스는 우리들의 방식으로 지식을 섭취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너무 심하게 남의 팔에 매달려 다니다가 결국 우리 자신의 힘마저 없애고 만다. 내가 죽음의 공포에 대비할 생각을 가지면? 나는 겨우 세네카의 사상에서 꺼내올 뿐이다. 내가 자신이나 또는 남을 위해서 위안의 말을 찾아보고 싶으면? 나는 그 말을 키케로에게서 빌려온다. 사람들이 나를 그 지식으로 단련시켜 주었던들, 나는 그것을 자신에게서 찾아 가졌을 것이다.


26. 아이들의 교육에 대하여
     드 귀르송 백작 부인 디아느 드 포아에게



나팔의 좁은 홈 161

역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읽을 거리고, 시 역시 특별히 즐겨서 읽습니다. 왜냐하면 클레안테스가 말하듯, 마치 소리가 나팔의 좁은 홈으로 몰려서 빠져나갈 때에 더 날카롭고 힘차게 나오는 것처럼, 문장은 시의 형식과 음률의 수에 억제되어 더 박차게 솟아나오며, 내게 더 강하게 감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이 가련해지고 161

내게는 아직도 저 너머의 나라가 보이는데, 그 시야가 혼탁하고 몽롱해서 아무것도 풀어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내 공상에 떠오르는 것을 아무것이나 무척대고 말하려고 하며, 여기 내 고유의 타고난 방법만 쓰기로 하고,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좋은 작품들 중에 내가 취급하려는 것과 같은 제재를 우연히 만나 볼 때에는(내가 방금 플루타르크에서 그의 상상력의 힘에 관한 설화에 부딪친 것처럼) 이런 사람들에 비하여 내가 얼마나 약하고, 허술하고, 둔하고, 잠들어 있는가를 깨달으며, 내 자신이 가련해지고 못나 보이게 됩니다.


이런 문장 162

어느 날, 나는 이런 문장에 부딪혔습니다. 나는 프랑스어의 핏기 없고, 살이 붙지 않고, 속 비고, 의미 없는 글을 흥미 없이 읽어 가자니, 그것은 확실히 프랑스어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권태를 느끼며 읽어 가다가 갑자기 고매하고 풍부하며 기개가 하늘에 솟는 한 문장에 부딪쳤습니다. 만일 그 내리막이 순하고 오르막이 좀 길게 보였다면, 그것은 변명될 수 있었을 겁니다. 여기 와서는 절벽이 낭떠러지로 깎아지른 듯 첫번 여섯 글귀로 나는 내 몸이 다른 세상으로 날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거기서 나는 전에 읽은 것이 너무나 얕고 깊은 구렁텅이임을 깨닫고, 다시는 그리고 내려갈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만일 내가 이런 풍부한 약탈품을 가지고 내 글 한 장만 장식했다면, 다른 장들이 얼마나 졸렬한 것인지 너무 잘 밝혀졌을 것입니다.


나 자신을 더 많이 말하기 위해서밖에는 163∼164

나는 나 자신을 그만큼 더 많이 말하기 위해서밖에는 남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이라는 식으로 내놓은 것이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것으로 내놓습니다. 나는 여기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생각밖에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일을 배워서 내가 변해 간다면, 나 자신은 아마도 내일쯤 달라질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신임받을 권한도 없고, 그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에는 나 자신의 교양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니까요.


타고난 성향 164

타고난 성향을 고치기는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자기 길을 잘 잡지 못한 탓으로 사람들은 늘 헛수고를 하며, 오랜 세월을 낭비하여 어린애들이 기반을 닦을 수 없는 일에 쓸데없이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어려움에 대해서 제 견해로는, 어린애들을 항상 가장 좋고 유익한 일로 지도하며, 우리가 어릴 적의 아이들 동작을 보고 경솔하게 짐작하고 예측하는 바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철학의 분석을 공부하게 173

나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작품 속에 다른 사람이 읽지 못한 수백 가지 사물들을 읽었습니다. 플루타르크는 이 작품 속에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것 외에도 수백 가지 사물들을 읽었고, 아마도 작가가 생각하던 것 이상의 사연을 읽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순수한 문법상의 공부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속에 우리들 천성의 가장 심오한 부분들이 침투되어 있는 철학의 분석을 공부하게 합니다.


'세상에서' 174

세상 사람들을 많이 알아 두면 판단력에 경탄할 만한 빛을 얻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들 속에 뭉쳐 죄어서 자기 코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누가 소크라테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그는 '아테네에서'라고 대답하지 않고 '세상에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남달리 상상력이 충만하고 드넓던 그가 세상을 자기 도시와 같이 생각하고, 인류 전체에게 자기 지식과 교유와 애정을 베푼 것은 우리가 발 아래밖에 못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박을 맞고 있는 자 175

머리 위에 우박을 맞고 있는 자는 지구 반쪽이 전부 폭풍우에 휩쓸리는 줄 압니다.


강을 건너려고
 177

감히 현명하여라.

시작하라, 잘 살아 볼 시간을 미루는 일은

강을 건너려고 물이 다 흘러가 버리기를 기다리는 촌사람 격이니라.

그 동안 강물은 흐르며, 영원히 흘러갈 것이다.                              (호라티우스)


책을 짊어진 당나귀 198

내 이야기로 돌아와서, 어린애의 교육에는 욕망과 애정을 돋우어 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책을 짊어진 당나귀밖에 만들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매질해서 그 주머니에 학문을 잔뜩 넣어 줍니다만, 이 학문을 잘 하려면 담아 두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합니다.



27. 우리들의 능력으로 진위를 가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수작이다


세상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미친 수작 199

나는 이성으로 어떤 사물을 이렇게 결단적으로 그릇되고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의지와 우리 어머니인 대자연의 힘에 한계와 제한이 있다는 생각으로 자기를 우월한 처지에 두는 수작이며, 그리고 이런 일을 우리의 능력과 역량의 척도로 다룰 수 있다고 보는 일은 세상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미친 수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괴물이나 기적이라고 부른다면, 얼마나 많이 그런 일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인가! 우리 손에 잡히는 대부분의 사물들에 관한 지식이라는 것은,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 장님이 손으로 더듬듯 얼마나 컴컴한 구름 속을 거쳐서 잡게 되었던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 참으로 우리는 지식보다도 습관에 의해서 이런 일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도 보아 싫증이 나서 이제는 어느 누구도

빛나는 창공을 쳐다볼 생각도 않는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이런 사물들을 처음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었더라면, 우리는 다른 어느 것만큼이나 또는 그보다 더 이런 일이 믿을 수 없이 보였을 것이다.

이제 이 사물이 처음으로 인간들 앞에 나타나서
마치 그것이 갑자기 그들 눈앞에 놓여졌다고 상상하라.
이보다 더 기적에 비할 만한 일이 있을까?

그것을 보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루크레티우스)

강물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자가 처음으로 강 앞에 나왔을 때에, 그는 그것이 대양인 줄 알았다, 이와 같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큰 사물들은 그것이 자연이 만들어 낸 극한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큰 강이 아닐지라도
그보다 더 큰 것을 못 본 자에게는 크게 보인다.
한 나무와 한 인간을 두고도 그러하니, 모든 종류에게
각자가 본 가장 큰 것은 거대하게 보인다.      (루크레티우스)


아무 것도 지나치지 않게 200

우리는 사물의 크기보다 그 새로움에서 원인을 찾아보고 싶어진다. 대자연의 무한한 힘은 더한층 존경심을 가지고, 또 우리가 무식하고 허약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믿을 만한 사람이 증명한 것으로서, 진실일 듯싶지 않은 사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것을 믿지 못하겠거든, 적어도 판단을 유예해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일을 불가능하다고 결단을 내리는 것은 당돌한 자부심이며, 가능성의 한계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다고 잘난 체하는 것이다. 불가능과 범상치 않음 사이의 차이, 그리고 자연의 흐름이라는 질서에 반대되는 것과 일반 사람들의 의견에 반대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충분히 이해한다면, 또 경솔하게 믿지 않고 쉽사리 믿지 않지도 않는다면, 사람들은 킬론이 권장하는 '아무것도 지나치지 않게'라는 규칙을 지키게 될 것이다.


오만과 호기심 203

오만과 호기심은 우리 마음에 대한 두 가지 천벌이다. 호기심은 우리들이 무슨 일이건 참견하려 하게 하고, 오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고 확실하지 않은 채 두지 못하게 한다.


28. 우정에 대하여


정의보다 우정 204

본성이 우리를 사교성보다 다른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으로 보이는 일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수한 입법자들은 정의보다도 우정을 더 가꾸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정의 마지막 완성점은 이러하다. 왜냐하면 대개 탐락이나 이익, 공적으로나 사적인 필요성으로 가꾸는 모든 우정은 그 때문에 우정 자체보다도 다른 원인이나 목적과 보상을 우정에 혼합하기 때문에, 그만큼 아름답지도 너그럽지도 않으며, 그만큼 우정답지도 못하다.


우정이란 206

여기 여자에 대한 우정을 비교해 보면, 우리의 선택에서 나오지만, 그것을 우정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사랑의 근심에 쓰디 쓴 감미를 섞는 여신도
나를 모르는 바 아니로되                  (카툴루스)

더 활발하고 태우는 듯 더욱 격렬하다. 그러나 이것은 절도가 없고 경박하고 동요하는 잡다한 불꽃이며, 작열하다가 수그러지기 쉽고, 우리의 한구석밖에 잡지 못하는 열병의 불꽃이다. 우정은 전반적이고 보편적이며, 그러면서도 절제 있고 고른 열이고, 견고하고도 침착한 열이며, 거기에는 거칠고 찌르는 것이 없이 아주 보드랍고 매끈한 심정이다. 더욱이 사랑의 열은 우리에게 빠져 달아나는 것을 잡으려고 뒤쫓는 강제된 정욕이 있을 뿐이다.


포획한 산토끼 206

수렵자는 추위와 더위에도
산으로 계곡으로 산토끼를 쫓아간다.
그는 포획한 것은 이미 거들떠볼 생각이 없고
달아나는 짐승에게만 욕망이 생긴다.                (아리오스토)


다만 '그가 그였고, 내가 나였기 때문'
209

대체로 보통 친우 또는 우정이라 부르는 것은 어느 기회에 편의상 맺어져서 우리 마음이 서로 사귀는 친교와 친밀성에 불과하다. 내가 말하는 우정에서는 마음이 아주 보편적인 혼합으로 뒤섞여 융합되기 때문에, 그들을 맺는 매듭이 지어져서 알아볼 수 없이 된다. 누가 내게 왜 그를 사랑하느냐고 물어 본다면, 나는 그것을 표현할 수 없음을 느낀다. 다만 '그가 그였고, 내가 나였기 때문'이라고밖에는 대답할 길이 없다.


그는 나다 213

유일하며 주체되는 우정은 다른 모든 의무를 면제해 준다.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겠다고 네가 맹세한 비밀, 나와 다른 자가 아닌 그자에게는 맹세를 어김 없이 알려줄 수가 있다. 그는 나다. 자기가 이중으로 된다는 것은 하나의 큰 기적이다.


좋은 친구
214

내가 양식(良識)을 가진 한
좋은 친구와 비교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호라티우스)


친구를 잃은 슬픔 216

오! 불행할꺼나, 형제여, 그대를 잃다니
그대의 달콤한 우정이, 인생에 가다듬던 우리 희열은 모두
그대와 더불어 단번에 사라진다.
그대 죽음으로써 내 온 행복은 부서진다.
형제여! 그대와 더불어 우리 심령은 무덤으로 내려가고
그대 죽은 이후
나는 공부와 내 심령의 모든 열락을 내 마음에서 쫓아 냈다.
그대에게 다시는 말도 못할 것인가?
그대 목소리 다시는 듣지 못할 것인가?
생명보다도 더 소중하던 형제여!
나는 언제까지나 그대를 사랑하리라.               (카툴루스)


30. 절도에 대하여


배운 꾀가 탈이 되어서, 극도의 철학
 219

과녁 너머로 활을 쏘는 자는 화살이 과녁에 못 미치는 자와 똑같이 실패한다. 눈은 캄캄한 속으로 내려가는 때나 너무 밝은 빛 속에 나가는 때나 똑같이 혼란을 느낀다. 플라톤에 나오는 칼리클레스는 극도의 철학은 해롭다고 하며, 이익이 있는 정도를 넘어서 거기 빠지지 말라고 충고한다. 철학을 절도 있게 대하면 유쾌하고 유익하지만, 마침내는 사람을 황당하고 악덕스럽게 만들고, 일반의 종교와 법률을 경멸하고, 사람들과의 교섭을 회피하며, 인간적인 해학을 적대시하고, 모든 정치적 사건의 처리나 남을 도와주는 일이나, 자기를 지키는 일도 불가능하게 되며, 빰을 얻어맞아도 대항 못하는 인간이 되게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이 옳다. 왜냐하면 철학이 과도하고 지나치게 풍부하면 우리의 타고난 자유를 속박하며, 배운 꾀가 탈이 되어서 오히려 자연이 우리에게 그어 준 좋고 탄탄한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


31. 식인종에 대하여


운명에 패한 것 234

한 인간의 품위와 가치는 그 마음과 의지로 이루어진다. 여기 그의 진실한 영광이 있다. 용감성은 팔이나 다리가 아니고, 마음과 심령의 견고성이다. 그것은 우리의 말이나 무기의 가치에 있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자기 용기에 고집하여 쓰러지며, '쓰러져도 무릎으로 서서 전투하는'(세네카) 자, 아무리 죽음의 위험이 임박해도 태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는 자, 숨을 넘기면서도 경멸하는 확고한 눈초리로 적을 쏘아보는 자는 패하여도 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운명에 패한 것이다. 그는 살해당한 것이지 패한 것은 아니다.


가장 용감한 자 234

가장 용감한 자는 때로는 가장 불행한 자이다. 그러므로 개선 못지않은 패배도 있는 것이다. 태양이 그의 눈으로 보아 온 중에 가장 아름다운 승리인 살라미스·플라타에아·미칼라·시칠리아 등 4대 승리의 영광 전부를 뭉쳐 보아도, 테르모필레 협곡에서의 레오니다스와 그의 부하들이 전멸당한 영광에 감히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36. 옷 입는 습관에 대하여

이집트 인들과 페르시아 인들 사이에 일어난 전쟁에서, 헤로도투스는 자기도 다른 사람과 같이 보았다며, 거기 죽어 쓰러진 자들을 보니, 이집트 인의 머리가 페르시아 인의 것보다 비교가 안되게 더 단단한데, 그 이유는 페르시아 사람은 머리에 늘 모자를, 다음에는 터번으로 감고 있으며, 이집트 사람은 어릴 적부터 머리를 깎고 맨머리로 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37. 작은 카토에 대하여


비록 진창 속에 굴러도 251

내가 허약하다고 해도 그것은 평가해 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의 힘과 정력에 관해서 내가 가져야 할 의견을 변경하게 하지는 않는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모방할 수 있는 것밖에 칭찬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키케로) 비록 진창 속에 굴러도, 나는 하늘 꼭대기에 이르듯 도저히 모방할 수 없게 고매한 몇몇 영웅적 심령들을 주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요즈음 사람들 252

우리의 판단력은 병들어서 타락한 풍속을 좇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 시대의 정신들이 옛 사람들의 행동을 비굴하게 해석하고 그들에게 헛된 사정과 원인들이나 꾸며 붙이며, 고대의 아름답고 후덕한 행적들의 영광을 더럽히는 약은 꾀만 쓰는 것을 본다.

위대한 재간이지! 글쎄, 가장 훌륭하고 순결한 행동을 내놓아 보라. 그러면 나는 거기 그럴듯하게 50가지 나쁜 의향을 꾸며 댈 것이다. 거짓말을 펴 보려고 하는 자에 의해서, 우리 속마음의 의도가 얼마나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해갈 것인가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그들은 남을 모함하는 데는 심술궂기보다도 더 둔중하고 상스럽게 재간을 부린다.

사람들이 이런 위대한 이름들을 깎아 내리는 데 쓰는 수고로, 그와 똑같이 방자하게 나는 이런 이름들을 높이는 데 수고하며 어깨를 빌려 줄 것이다. 그 희귀한 모습들은 현자들의 동의를 얻어서 세상의 모범으로 추려낸 것이니, 나는 이 이름들에 영광을 다시 살려 주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능력을 다하며, 유리한 사정으로 해석해 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색 노력은 그들의 가치를 이해할 힘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도덕을 묘사하는 일은 착한 사람들의 임무이다. 그리고 이렇게 거룩한 모범을 위해서 감격하며 열중하는 것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일도 아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이와 반대로 하는 수작은 악의로 하거나, 또는 지금 내가 말한 바 인물들의 신용을 자기들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악덕에서 하거나, 또는 차라리 이렇게 생각해 보고 싶지만, 찬란한 도덕을 그 소박한 순결성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만큼 이해력이 강력하고 명석하지 못하고 그러한 훈련도 받은 일이 없는 탓이다. 마치 플루타르크가 말하는 바, 그의 시대에 어떤 자들이 작은 카토의 죽음의 원인을 카이사르가 무서워서 그랬다고 하는 따위이다. 거기에 대해서 플루타르크가 분개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이 죽음을 야심뿐이라고 해석하는 자들에 대해 그가 얼마나 분개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름답고 후덕하고 정당한 행동을 그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보다는 차리리 세상의 추악함을 더럽게 생각하여 버렸을 것이다.

이 인물은 진실로 인간의 도덕과 지조가 어느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 대자연이 골라 놓은 시범이었다.


39. 고독함에 대하여


군중 260

군중 속의 전파는 대단히 위험하다. 사람은 악인들을 모방하든지 미워하든지 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다 위험하다. 그들의 수가 많으니 많아질까 두렵고, 우리와는 너무 다르니 너무 많이 미워할 일이 두렵다.


귀찮기가 덜할 것은 없다 260

그런데 고독함의 목적은 모두 더 한가로이 편안하게 살자고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제나 그 길을 잘 찾는다. 사람들은 제반사를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일거리를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정 하나를 보살피는 것과 국가를 다스리는 것 사이에는 고초가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다. 어디에 마음이 매여 있건, 사람은 거기에 전부 매인다. 그리고 가정일이 덜 중요하다고 해도 귀찮기가 덜할 것은 없다. 그뿐더러 궁전이나 장사일에서 풀려 나왔다 해도, 우리는 인생의 고초에서 풀려 나온 것은 아니다.


여행을 다녀왔지만 261

누가 소크라테스에게 아무개가 여행을 다녀왔지만 조금도 나아진 것이없더라고 말하자 "그는 자기를 짊어지고 갔다 온 것이지" 하며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모든 연결을 물리치고 262

그러므로 마음을 끌어 내어 제 자신에 돌려주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 외롭고 쓸쓸함이다. 이것은 도시의 한복판이나 왕들의 궁전에서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따로 떨어져서 더 잘 자기를 누린다. 그래서 우리는 홀로 살며 사람들과 교섭 없이 지내려고 하는 만큼, 우리에게 만족이 매여 있게 하자. 우리를 타인에게 얽매이게 하는 모든 연결을 물리치고, 정말 홀로 살며 편안하게 살아갈 능력을 얻기로 하자.


뒷방을 가지고 263

할 수만 있다면 아내·아이·재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강을 가져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 행복이 거기에 매여 있게까지 집착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에게 남이 침범하지 않는 아주 자기 고유의 것인 뒷방을 가지고, 그 속에 진실한 자유와 은둔처를 마련해 둘 일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과의 일상의 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사사로워서, 외부와의 어떠한 관련이나 교섭도 그 곳에는 미치지 못하게 할 일이다.

아내도 어린애도, 재산도, 다른 사람도, 하인도 없는 듯 그곳에서 혼자 생각하며 웃고 지내며, 그런 것들을 잃는 경우에 부딪혀도 그런 것들 없이 살더라도 아무런 별다름이 없게 할 일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들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 그것은 자기를 동무삼을 수 있다. 마음은 공격할 거리, 방어할 거리, 줄 거리와 받을 거리를 가졌다. 이러한 고독함 속에서 할 일 없이 괴롭다고 오그라들까 두려워 말자.


가장 쓸모없고 헛된 물건인 명성이나 영광 264

우리 용도에 가장 쓸모없고 헛된 물건인 명성이나 영광을 위해서, 건강과 안락과 생명을 즐겨 바꾸지 않을 자 누구인가? 우리는 죽음만으로 두려움이 부족한가? 우리의 아내·아이·가족들의 죽음까지 짊어지자. 우리의 일만으로 수고가 부족한가? 우리 이웃사람이나 친구들의 일까지 맡아서 속을 썩이고 골치를 앓자.

웬 말인가, 한 인간이 무슨 사물을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는 생각을 머리에 두다니!      (테렌티우스)


남을 위해 실컷 살아 보았으니 264

고독함은 탈레스의 본을 따서 자기 활동기의 화려한 세월을 세상에 바친 자들에게 더 적합하고 온당한 것같이 보인다.

남을 위해서 실컷 살아 보았으니, 적으나마 인생의 말기에는 자기를 위해 살아 보자. 우리의 사상과 의향을 자신의 안락을 위해 돌아 보자. 확실하게 은퇴할 자리를 잡는 것은 가벼운 시도가 아니다. 은퇴해 보면 다른 일에 참견 안 해도 할 일이 상당히 많이 생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사해 갈(죽을) 채비를 할 여유를 주시는 이상, 그 채비를 하자. 짐짝을 꾸리자. 일찍 사람들과 작별하자. 우리를 다른 데 매이게 하고 자신에게서 물러나게 하는 가혹한 속박에서 벗어나자. 이러한 강력한 속박에서 풀려 나와 이제부터는 이것저것 즐겨 보며, 무엇보다도 자신 외에는 위하지 말 일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물들이 우리 것이 되게 하자. 그러나 그것이 너무 우리의 피부에 달라붙어 살점이 떨어지거나 자신의 한쪽이 무너져 내리지 않고는 떼어 버리지지 못하게 되지는 말게 하자. 세상에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으로 있을 줄 아는 일이다.

이제는 사회에 보태 줄 거리도 없으니 우리가 사회에서 물러날 때가 왔다. 그리고 남에게 빌려 줄 거리가 없는 자는 남의 것을 빌려 오려고 생각지 말자. 힘은 빠져가고 있다. 힘을 뽑아다 우리 자신에게 담아두자. 우정의 봉사와 동료의 봉사를 자신에게 쏟아넣고, 뒤섞을 수 있는 자는 그렇게 할 일이다. 자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없고 걷어채이는 존재가 되게 하는 이 보잘것없음에서, 자기 자신에게도 걷어채이며 둔중하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지 말게 하라. 자기를 추어올리며 애무해 주라. 자기 이상과 양심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며, 그들 앞에 잘못하면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자기를 다스리라. "사실 자신을 충분히 존중하는 것은 희귀한 일이다."(퀸틸리아누스)

스크라테스는 말하되, 젊은이는 교육을 받아야 하고, 성인은 일을 잘 해야 하고, 노인은 모든 시민적, 군사적 직무에서 물러나서 어떤 정해진 일에 얽매임 없이 마음대로 살아가야만 한다고 하였다.


268∼269

책은 재미있다. 그러나 책과 너무 가깝게 지내다가 우리에게 최선의 부분인 쾌활성과 건강을 잃고 만다면,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저버리자. 나는 책을 읽는 결과가 이러한 손실을 보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척박하고 가시돋친 것 269

학문 중에는 척박하고 가시돋친 것이 있으며, 대부분은 민중을 위해서 꾸며 낸 것이다. 그런 것은 세상 일에 봉사하는 자들에게 맡겨 둘 일이다. 나로서는 재미나고 쉽고 내 기분을 돋워 주거나 내 죽음을 조절하도록 위안을 주며 충고하는 서적들밖에 좋아하지 않는다.


둥둥 떠 살아왔다 270∼271

"그대는 이제까지 헤엄치며 둥둥 떠 살아왔다. 항구로 죽으러 돌아오라. 그대는 다른 생명을 모두 빛에게 주었다. 남은 생명은 어둠에게 주라. 생명의 열매를 버리지 않는다면 직무를 버리기는 불가능하다. 이 목적으로 명예와 영광을 위한 모든 근심을 버려라. 그대 과거 행동의 빛은 너무 과하게 그대를 밝혀 주며 그대의 은둔처까지 따라올 위험이 있다. 다른 탐락들과 아울러 남들의 칭찬에서 오는 쾌락을 버려라. 그대의 학문과 능력으로 말하면, 걱정하지 마라. 그 성과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그만큼 그대 자신에 더 값어치가 생긴다. 사람들이 켤코 알아 줄 수 없는 기술을 가지고, 무엇때문에 그렇게 고생하느냐고 누가 물어 보자 "아는 자, 얼마 없어도 족하다. 하나라도 족하다. 하나도 없어도 족하다"고 대답한 자의 일을 상기하라."

그는 진실을 말하였다. 그대와 동무 하나만 있으면, 그대들 둘이 충분히 인생의 무대가 된다. 또 그대와 그대 자신만으로 족하다. 세상 사람들이 그대에게는 하나이며, 그대 하나가 그대에게 민중 전체가 되게 하라, 한가하게 집에 있거나 은둔에서 영광을 끌어 내려고 하는 것은 비굴한 야심이다. 자기 굴에 들어가는 문턱에서 발자국을 지우는 산짐승의 본을 떠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대의 말을 해 주기를 찾는 것이 그대에게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대가 어떻게 그대 자신에게 말해야 할 것인가를 찾으라. 자신에게 은퇴하라. 그러나 먼저 그 곳에 그대를 받아들일 차비를 하라. 그대가 그대를 지배할 줄 모른다면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 미친 수작이다. 외로움 속에서도 사람들과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실패하는 수가 있다. 그대가 그 앞에 감히 실수하지 못하는 자가 되기까지, 자신에게 부끄러움과 존경을 느낄 때까지 "그대 마음에 선한 이상을 수호하라." (키케로) 그대 마음에 늘 카토와 포키온과 아리스티데스를 그려 보라. 그들 앞에서는 미친 자들까지도 자기 잘못을 감추더라. 그들을 그대의 모든 의향의 조정자로 삼으라. 만일 이 의향들에 헛길이 들어가면, 그들에 대한 존경심이 길을 잡아 주리라. 그들은 그대가 자신으로 만족하는 길을 지키게 하며, 자신에서밖에 아무것도 빌려 오지 않게 하며, 그대 마음을 확실하고 한정된 사색에 멈춰 다져지게 하며, 그리고 사람들이 이해하면서 더욱 즐기는 진실한 보배를 이해하고 나서, "생명이나 명성을 연장시킬 욕망 없이, 그것만으로 만족하게 하는 올바른 길에 그대를 잡아 둘 것이다"라고 말한다.


41. 자신의 영광을 양보하지 말 것


가장 억세고 고집스런 습성
278

명성은 그 달콤한 소리로 오만한 인간들을 매혹하며
그다지도 예쁘게 보이지만, 그것은 한 메아리
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살랑 스치는 바람에도
불려 사라지는, 꿈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토르콰토 타소)

그리고 인간들의 가장 주책 없는 기분들 중에서, 철학자들까지도 다른 무엇보다 여기서 풀려나는 일이 가장 느리며 마음이 괴로운 것같이 보인다. 이것은 가장 억세고 고집스런 습성이다. "왜냐하면 명성은 도덕의 길로 상당히 진척한 자들까지도 유혹하기를 그치지 않는다."(성 아우구스티누스) 이것만큼 명백하게 이성이 그 허영됨을 비난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야심은 우리 속에 너무도 생생하게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누구 하나 이것을 깨끗이 벗어 던진 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대는 이런 생각은 없다고 단단히 말하고 굳게 믿고 나서도, 명예욕은 그대의 이성에 거슬러 내장에까지 사무치는 경향을 나타내는 까닭에 여기에 어떻게 당해 낼지 방도가 어렵게 된다.

키케로가 말한 바와 같이, 이런 사상을 배격하는 자들까지도 그런 말을 써내는 그들의 책 겉장에 자기 이름을 붙인다. 그들이 영광을 경멸했다는 것으로 영광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42. 우리들 사이에 있는 불평등에 대하여


평가의 잣대 280∼281

사람들의 정신과 정신 사이에는 땅에서 하늘까지만큼 헤아릴 수 없는 층계가 있다.

그러나 인간들의 평가를 두고 하는 말이지만, 우리들 말고는 어느 사물이건 그 자체의 소질만으로밖에 평가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말 한 필을 두고, 그 힘차고 숙달된 것을 칭찬하는 것이며, 그 안장을 보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사냥개는 그의 속력을 보고 칭찬하는 것이지 목띠를 보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한 인간을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것을 보아서 평가하지 않는가? 그는 따르는 사람이 많고 훌륭한 궁전을 가졌고 신용이 있고 연수입이 많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주위에 있다.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자루 속에 넣은 고양이를 자루만 보고 사지 않는다. 말을 흥정할 때는 그 장비를 벗기고 맨몸을 드러내서 보며, 또는 옛날에 왕공들에게 팔려고 내놓을 때에 하듯 말을 덮어씌워 놓은 때에는 좀 필요성이 적은 부분을 덮으며, 털이 곱다든가 엉덩이가 크다든가에 현혹되지 않고, 주로 가장 유용한 부분인 다리와 눈과 발을 유의해 본다.

어째서 사람을 평가할 때에 그대는 싸잡아 묶어 놓고 평가하는가? 그는 자기 것이 아닌 부분밖에는 내보이지 않으며, 그를 진실로 평가하며 판단할 자료가 되는 부분은 감춰 두고 있다. 칼의 가치를 보아야 할 일이지 칼집은 볼 것이 못 된다. 그것을 벗기고 보면 아마도 한 푼이라도 주기가 아까워질 것이다. 그 자체로 평가해야지 그 장식을 보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옛 사람이 아주 재미나게 말하듯 "당신은 그의 키가 어째서 커 보이는지 아시오? 당신은 그 신발의 높이를 계산에 넣으시오"라는 식이다.

받침돌은 조각이 아니다. 말놀이용 대막대는 제쳐놓고 재어 보라. 부귀와 명예는 제쳐놓고 셔츠 바람으로 나오게 하라. 그가 경쾌하고 건강하여 직무에 적합한 신체를 가졌는가? 그의 마음은 어떤가? 마음이 건전하며 그 모든 부분이 유능하고 잘 하게 보이는가? 그 마음이 자기 것으로 풍부한가? 또는 남의 것으로 풍부한가? 요행으로 얻은 것은 없는가? 뽑아든 칼을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볼 수 있는가? 입으로건 목으로건 어디로 생명이 달아나도 꼼짝도 않는지, 마음이 침착하고 공평하고 만족하는지를 봐야 하는 것이며, 이런 것으로 우리들 사이에 있는 극도로 많은 차이를 판단해야 한다.


잠방이 차이밖에 아닌 것 282∼283

천성은 우리들에게 고통 없는 신체와
걱정이나 공포 없는 행복의 심정을 누릴 수 있는
마음밖에 요구하는 바가 없음을 보지 않는가?      (루크레티우스)

군중이 어리석고 천하고 비굴하고 지조 없이 잡다한 정열의 폭풍우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끊임없이 떠돌고 있는 꼴과, 이 현자의 자태를 비교해 보라. 하늘과 땅 사이보다 더한 거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습관적으로 맹목적이 되어서 이러한 차이를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어떤 농군과 왕, 귀족과 상민, 관리와 개인, 부자와 가난한 자를 관찰해 보면, 갑자기 극도의 불평등이 우리 눈앞에 보이는데, 그것은 그들이 입은 잠방이 차이밖에 아닌 것이다.


사물들은 소유자의 심성에 따라 가치가 생긴다 285

마음이 나쁘고 어리석은 인간이니 그런 것을 다 무엇하나? 탐락도 행복도 정력과 정신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

사물들은 소유자의 심성에 따라 가치가 생긴다.
사용할 줄 아는 자에게는 그것이 좋다.
잘 사용할 줄 모르는 자에게는 나쁘다.    (테렌티우스)

운으로 얻은 재산은 있는 그대로를 맛보려면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소유함이 아니고, 누릴 줄 알아야만 행복하게 된다.

가옥이나 토지, 청동이나 황금 더미가
소유자의 걱정이나 신체의 열을 치유함이 아니다.
그 소유자가 건전해야만 획득한 재물을 잘 누린다.
그가 욕심이나 공포로 고민한다그의 재산은 눈병 환자에게 그림 격이고
통풍 환자에게 향유 격이다.      (호라티우스)

그는 바보요, 그의 취미는 둔중하고 멍청하다. 그는 코감기에 걸린 자가 그리스 포도주 맛을 모르듯, 장식한 말 안장을 말이 누리지 못하듯,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즐기지 못하며, 플라톤이 말하듯 건강· 미모·힘·부유·기타 재물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이 정당한 자에게 행운이 되듯, 부당한 자에게는 화가 된다. 그리고 재화는 거꾸로 된다.

그리고 신체와 정신이 나쁜 상태에 있다면 이런 외부적 편익이 무슨 소용이 될 것인가? 바위에 조금 찔리거나 마음이 정열에 사로잡히면, 세상의 쾌락이 다 뭉쳐 와도 소용없다. 통풍을 앓기 시작만 하면 재상이니 대왕이니 다 소용없다.


물 마시는 쾌감 287

우리는 합창대 아이들이 음악을 대단히 즐긴다고 생각하는가? 너무 많은 음악들로 그들은 오히려 물리고 있다. 향연·춤·가면 무도·무술 시합 등은 그런 것을 자주 본 일이 없고,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준다. 그러나 그런 것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아는 자에게는 멋쩍고 재미없다. 여자도 실컷 즐긴 자에게는 유쾌할 것이 없다. 목마를 틈이 없는 자는 물 마시는 쾌감도 알지 못할 것이다. 


거북하고 싫증나는 일 287

풍부함보다 더 거북하고 싫증나는 일은 없다. 아무리 욕망이 큰들, 터키 태수가 후궁을 지니고 있는 것같이 3백 명의 여자가 자기 마음대로 된다면 싫증이 나지 않을 자 있겠는가? 조상들 중에 7천 명의 매 사냥꾼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들로 나가지 않던 자는 무슨 취미로 사냥을 했을까?


피로스와 키네아스 290∼291
 

피로스 왕이 이탈리아로 원정하러 가려고 기도하고 있을 때에, 그의 현명한 고문관 키네아스는 그의 야심이 얼마나 허영된 것인지 느끼게 하기 위해서, "글쎄, 전하" 하고 물어 보았다. "전하는 무슨 목적으로 그런 큰 계획을 세우십니까?" "이탈리아의 영주가 되련다"고 그는 갑자기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이 성취된 다음에는요" 하며 키네아스는 말을 이었다. "골과 스페인으로 가겠다"하고 왕은 말했다. "그 다음엔요?" "나는 아프리카를 정복하러 가겠다. 그리고 마지막에 세상을 정복하여 내 영토로 만든 다음에는, 나는 만족하고 편안하게 살겠다." 키네아스는 다시 질문하였다. "그런 소원이시면 어째서 전하께서는 지금 그렇게 편히 살지 않으시려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런 생활을 지금 이 시간에 하고, 이 두 나라 사이에 그만한 수고와 위험을 면제해 주지 않으시렵니까?" 




성격과 운 291

"각자의 성격이 각자의 운을 만드는 것이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


46. 이름에 대하여


동성 동명 301

수많은 혈족들에 동성 동명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잡다한 민족·시대·국가에도 또 얼마만큼 많은가? 역사상에는 소크라테스가 셋, 플라톤이 다섯, 이리스토텔레스가 여덟, 크세노폰이 일곱, 데메트리오스가 스물, 그리고 테오도르가 스물 있었다.



47. 판단력의 불확실성에 대하여



308

그렇기 때문에 사건과 결과는, 특히 전쟁에서는 대부분 운에 달려 있고, 그 운은 우리 생각이나 조심성에 따라서 도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가 버릇처럼 말하는 것이 지당한 일이다. 다음 시도 그것을 말한다.

흔히 소홀한 조치가 성공하고, 조심하다가 실수한다.
운은 반드시 행운을 받을 가치 있는 자에게
승인과 원조를 주는 일 없이, 피차를 가리지 않고 돌아간다.
그것은 우리들 위에 군림하여 우리를 지배하는 특별한 힘이 있어
모든 인생의 사물들을 그의 법 아래에 두기 때문이다.      (마닐리우스)


50. 데모크리토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 대하여



53. 카이사르의 말 한마디



영원히 계속될 이 굉장한 논쟁 331


우리 마음이 아무것에도 만족해 안정되지 못하고, 욕망과 공상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택할 힘도 갖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하게 생겼다는 특이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일까? 철학자들이 인간의 최고선을 찾기 위해 항상 싸웠으나 해결도 합의도 없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며, 영원히 계속될 이 굉장한 논쟁이 이것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자기 것이 되기 전에는 331


우리가 욕구하는 사물이 자기 것이 되기 전에는 그것은 다른 일보다 중대하게 보이며
그것을 향유하게 되면, 다른 갈망이 솟아나와서
우리는 똑같은 갈증에 사로잡힌다.    (루크레티우스)


무엇이건 만족을 주지 못함 331


우리의 인식과 향락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건 만족을 주지 못함을 우리는 느낀다. 그리고 현재가 우리를 포만시키지 않는 만큼, 우리는 장차 오게될 알지 못하는 사물들을 우두커니 바라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사물들이 우리를 만족시킬 거리가 못 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병적이고 혼란된 상태로 사물들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54. 헛된 묘기에 대하여



운명의 화살이 쏟아져 와도 333


현자들은 사건들의 성질을 잘 저울질해 보고 고찰하고 나서 건강한 용기의 힘으로 그 위를 뛰어넘는다. 그들은 강력하고 견고한 심령을 가졌기 때문에 인생의 재앙들을 경멸하며, 발밑에 짓밟는다. 그들에게는 운명의 화살이 쏟아져 와도 도로 튀어서 끝만 뭉툭해지고, 그 신체에 아무런 자국도 남겨 주지 않는다.


56. 기도에 대하여



참 언짢은 병폐 341


자기와 반대되는 사상을 가질 수 없다고 확신할 만큼 자기를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 언짢은 병폐이다. 내세의 일에 희망과 공포를 품는 사상을 물리치고 인간에게는 현세에서의 어찌 될지 모르는 불균형한 운명밖에 없다는 식의 사상에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더욱 언짢은 일이다.


57. 나이에 대하여



20세가 되면 349


나로서는 우리 심령은 20세가 되면, 그것이 장차 될 싹수는 다 풀려져서 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약속해 준다고 본다. 이 나이에 자기 능력의 명백한 징조를 보여 주지 않은 심령으로서, 그 후에 그런 능력을 가진 증거를 보여 준 일은 없었다. 자연의 소질과 덕성은 이 시기가 되면 그 심령이 가진 강력하고 아름다운 표시를 보여 준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보여 주지 않는다.


30세 이후보다 349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아름다운 인간 행동들 중에서, 그것이 무슨 종류이건, 옛 시대나 오늘날에나 대부분은 30세 이후보다 그 전에 이루어진 것을 더 많이 헤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한 인간의 생애를 두고 보아도 그렇다. 한니발의 생애와 그의 위대한 적수인 스키피오의 생애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생애의 아름다운 반생을 그들은 젊었을 때에 얻은 영광으로 살아 보았다.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 비교해 보니 위대하였다.

(제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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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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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제 1 권

2. 슬픔에 대하여


눈물과 통곡 22


비참한 일을 참는 것은 극도에 달하면 사람의 정신 전체를 뒤집어엎고, 그 행동의 자유를 잃게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대단히 언짢은 소식을 듣고 놀랐을 때에, 몸이 얽매여 얼어붙듯 하며 모든 동작이 오그라져 붙었다가, 눈물과 통곡으로 토해 내면 설움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와 얽매였던 마음도 풀리고 몸도 편해지는 식이다.

마침내 고통은 간신히 울음에 길을 터준다.    (베르길리우스)


3. 우리들의 감정은 세상 너머에까지 이른다.


저 너머
24


우리의 눈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지 않고 늘 저 너머에 있다. 공포나 욕망, 희망 등이 우리들을 늘 미래로 비약시킨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현실에 관한 고찰과 마음을 가리고, 장차 올 일, 다시 말하면 우리가 장차 세상을 떠날 날의 일에 관심을 갖게 한다.


존재의 밖에 있게 되면 26

모든 일을 뒤적거려 보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무도 자기가 죽기 전에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 솔론의 말을 음미하며, "어느 자가 순리대로 살다가 죽은 뒤에, 그의 평판이 나빠지고 그의 후손이 비참하게 되어도,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우리는 움직이고 있는 동안 자기에게 좋을 대로 앞을 내다보며 살아간다. 그러나 한번 존재의 밖에 있게 되면, 현재의 것과는 아무런 연락도 가질 수 없다. 그러면 그가 존재하지 않게 된 이후에만 행복할 수 있을 바에야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솔론에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7. 생각이 우리들의 행동을 판단한다



우리 힘에 달린 것은 진실로 우리들의 의지뿐
39


우리는 자기 역량과 수단 밖의 일에 매달릴 수는 없다. 이런 이유에서, 결과와 집행은 결코 우리 힘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 힘에 달린 것은 진실로 우리들의 의지뿐이니, 인간의 의무에 관한 모든 법칙은 필연적으로 이 의지에 기초를 두고 수립된다.


8. 나태에 대하여


정신의 일거리
40


빈 땅이 기름지고 비옥하다면 수만 가지 쓸데없는 잡초만 무성해진다. 이 땅을 유용하게 이용하려면 이것을 개간해서 씨를 뿌릴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정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신은 어떤 문제에 전념하도록 제어하고 강제하는 일거리를 주지 않으면 이런 저런 공상의 막연한 들판에서 흐리멍덩히 헤매게 된다.


마음의 목표 41


마음은 일정한 목표가 없으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말처럼, 사방에 있다는 것은 아무 곳에도 있지 않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9. 거짓말쟁이들에 대하여



말문 43


기억력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은 이야기를 너무 멀리 끌고 가며 헛된 소재를 잔뜩 덧붙여 놓기 때문에, 좋은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들은 그 좋은 점을 질식시켜 버린다. 그것이 좋은 이야기가 아닌 때에는 그들이 기억력으로 복받은 것을 저주하지 않으면 판단력에 복이 없는 것을 저주하게 된다. 말문이 열린 후, 그것을 막고 이야기를 풀어 버리고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한 마리 준마의 힘 43


한 마리 준마의 힘은 그 말이 적당한 때에 딱 정지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것으로밖에는 더 잘 알아볼 것이 없다. 분수 있는 사람들 중에도 줄기차게 말하다가 그만 끊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 이야기를 끝낼 계기를 찾고 있는 동안, 그들은 마치 허약한 사람들이 쓰러져 가는 꼴마냥 횡설수설하며 이야기에 질질 끌려간다.


백 번은 더 들어본 이야기
43

특히 늙은이들에겐 지난날의 기억이 남아 있고 그 말을 되풀이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위험이 더 많다. 나는 한 귀족이 원래는 재미난 이야기를 가지고, 내가 듣기에 진력이 나게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자리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에 백 번은 더 들어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 들어앉아서 인식과 지식이 되어 박혀 있는 까닭으로 45


가장해서 변질시킨 말을 이야기 속에 집어넣다가, 일순간 말문이 막히지 않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사실대로의 이야기가 먼저 기억 속에 들어앉아서 인식과 지식이 되어 박혀 있는 까닭으로, 그것이 공상에 떠돌아서 갑자기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 확고한 발판도 없고 아주 박히지도 않은 거짓말을 몰아내며 첫번에 받은 인상이 가짜로, 또는 변질시켜서 말한 부분이 기억을 잊어버리게 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거짓말쟁이
44


그들은 지각 없게도 제 올가미에 자신이 걸리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난다. 왜냐하면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그렇게도 여러 가지로 말해 놓은 것을 무슨 기억력으로 모두 둘러맞출 재간이 있겠는가? 나는 우리 시대에 이런 훌륭한 기술을 가졌다는 평판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보았지만, 그것은 명성이 뭔지 모르거나 성과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거짓말과 옹고집 45

거짓말만이, 그리고 그보다 좀 덜하지만 옹고집은 모든 기회에 억눌러서 나오지도 크지도 못하게 막아야 할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은 그들과 함께 커 간다. 그리고 주둥이에 이런 못된 버릇이 생기는 것을 놓아 두면,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놀라울 만큼 어려운 일이다.


진실과 거짓말 45

만일 진실과 같이 거짓말에도 얼굴이 하나밖에 없다면 우리의 사정은 더 나아질 것이다. 그러면 거짓말쟁이가 말하는 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의 반대는 수없는 얼굴과 무한한 벌판을 가지고 있다.


거짓말과 개 45


정말 나는 엄숙하게 뻔뻔스런 거짓말을 하고 난 다음, 확실하게 닥쳐올 극도의 위험에서 나를 보호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옛날 교부(敎父-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기를, 우리는 무슨 말을 할는지 알 수 없는 사람보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개와 같이 있는 편이 낫다고 하였다.


10. 빠른 말법과 느린 말법


좁은 홈통 48


웅변이 자유롭고 유쾌하게 굴러가지 않으면 쓸모 있는 말을 하지 못한다. 어떤 작품들은 애써서 지은 품이 박혀 있어 어딘가 투박하고 무뚝뚝한 맛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등불과 기름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것은 잘 지어 보려고 애를 쓰며 자기 일에 너무 긴장하고 억눌린 마음 때문에 자연스러운 웅변을 억누르고 꺽어 빽빽하게 만들고, 마치 풍부한 물이 억지로 맹렬하게 밀려 나가다가 좁은 홈통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격이 된다.


14. 선악의 취미는 대부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달려 있다


불행이라는 것
57


사람들은 (그리스의 옛 속담에 말하되) 사물 자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사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 때문에 속을 태운다고 한다. 이 전제를 모든 점에서 진실하다고 증명할 수 있는 이는 우리들의 비참한 인간 조건을 개선하는 데 크게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불행이라는 것이 우리의 판단에 의해서 들어오는 것이라면, 그것을 경멸하거나 또는 좋은 일로 돌려놓기는 우리의 힘에 달렸기 때문이다.


운은 우리에게 단지 재료만 제공하는 것 58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고 아무것도 우리들을 강제하지 않는다면, 병이나 궁색, 경멸 같은 것에도 좋은 맛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운은 우리에게 단지 재료만 제공하는 것이고 형체를 지어 주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이라면, 우리에게 가장 괴로운 편으로 자기를 연결시키며, 그런 것에 쓰고 나쁜 맛을 준다는 것은 괴상하게도 어리석은 수작이다.


사상
60


모든 사상은 생명을 걸어가며 품어 보기에 족할 만큼 강하다.


피론의 돼지 62


오늘날에도 어린애들까지 수월찮은 고통을 받을까 무서워서 죽음을 택하는 예를 흔히 본다. 이 점에서 비겁한 자들까지도 도피의 방법으로 택하는 죽음 따위를 우리가 두려워한다면, 세상에 두렵지 않을 일이 무엇이 있을까 하고 한 고인은 말한다. 남자건 여자건 보다 더 행복한 시대에 살며, 여러 종파의 사람들로서 꿋꿋하게 죽음을 맞이한 자, 자진해서 받아들인 자, 또는 이 인생의 고난을 면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단지 살기에 지쳐서 저승으로 도피한 자, 그리고 다른 곳에 더 나은 생의 조건을 기대해서 죽음을 택한 자들의 목록을 벌여놓을 양이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 수효는 너무나 많아서, 사실 죽음을 두려워한 자를 헤아리는 편이 쉬울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런 예이다. 철학자 피론은 어느 날 배를 타고 가다가 대단한 위험에 빠졌는데, 그때 자기 주위의 공포에 싸인 자들에게 예로서 거기 있던 돼지 한 마리를 보여 주었다. 그 돼지는 그 폭풍우에도 아무 걱정이 없었다. 우리가 대단한 자랑으로 여기는 이성, 그것으로 해서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며 제왕으로 자처하고 있지만, 그 이성의 장점이 겨우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었던가? 사물에 관한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우리가 안식과 평정을 잃는다고 하면, 그것이 우리를 피론의 돼지만도 못한 조건에 놓아 두니,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우리가 가장 소중한 보배로 받들고 있는 지성을 가지고 우리는 대자연의 의도, 즉 각자는 자기 편익을 위해서 연장이나 방법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사물들의 이 보편적 질서와 싸우며, 우리를 파면시키는 일에 이 지성을 사용해서야 될 말인가?


죽음 63

죽음은 한순간의 이동인 만큼, 생각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고통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65


그렇지 않다면 우리 중에 도덕·용기·힘·큰 마음·결심 같은 것을 명예로 삼을 자, 그 누구일까? 고통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것이 무슨 역할을 맡을 것인가? "용덕은 위험을 탐한다."(세네카) 거친 방석 위에서 자고, 모든 무장을 갖추어 입고, 대낮의 더위를 참아 내며, 말과 당나귀 고기를 먹고, 자기 살을 째고 뼛속에서 탄알을 뽑아 내는 것을 눈으로 보며, 살의 꿰매고 태우고 하는 수술을 참아 내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보통사람보다 나을 것이 무엇인가? 똑같이 착한 행동들 중에서도 더 힘든 것이 할 만한 것이라고 현자들이 말하는 것은, 불행과 고통을 피하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다.

사실 사람이 행복한 것은 경솔의 동류인
희열, 쾌락이나 담소, 유희 속에 있을 때가 아니고,
비애 속에서 견고성과 지조를 지킬 때이다.      (키케로)


더 큰 희열 65


덕은 치르는 희생이 클수록 더 큰 희열을 준다.      (루카누스)


전능한 원동력 65


고통이 그렇게도 참을 수 없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만족을 정신에서 얻는 습관을 갖지 않고, 우리들의 조건과 행위의 유일한 상전인 우리 심령의 힘에 기대하지 않는 탓이다. 육체는 다소간의 차이를 제하고는 한 자세밖에 갖지 않는다. 마음은 모든 종류의 형태로 변할 수 있고, 육체의 느낌이나 다른 모든 사건을 무엇이든 그 자체에, 그리고 그 자체의 상태에 맞추어 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연구하고 탐색하며, 그 속에 있는 전능한 원동력을 일깨워야 한다.


마음 역시 그렇다 66∼67


우리가 도망치면 적이 더 악을 쓰며 추격해 오는 것과 같이, 고통도 우리가 그 밑에 떨고 있으면 더욱 거만해진다. 고통은 잘 버티는 자에게 더 순해질 것이다. 고통에 대항해서 마음을 긴장시켜야 한다. 물러나거나 뒤로 빼면, 고통은 우리를 위협하는 파멸을 불러온다. 육체가 굳어질수록 짐을 지기에 더 든든하듯, 마음 역시 그렇다.


고통에 내어주는 자리만큼밖에 67


우리는 마치 보석들이 그것을 놓아 두는 자리의 빛깔에 따라 생생하거나 흐릿한 빛깔로 보이듯 고통도 변모해 가며, 우리가 그 고통에 내어주는 자리만큼밖에 우리 속에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것을 알 것이다. "그들은 고통에 몸을 맡길 정도로 고통을 받았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가장 유쾌하고도 가장 필요한 기관 71


시각은 감각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지 모르나, 가장 유쾌한 감각이다. 그러나 가장 유쾌하고도 가장 필요한 기관은 아이를 낳는 데 쓰이는 연장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단지 그것이 너무 맛을 주기 때문에 아주 싫어하고, 그것의 값어치 때문에 그 사용을 포기했다.


가치 71

우리는 사물들의 품질이나 그 유용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을 차지하기에 얼마만큼의 값을 치렀나를 보고는, 마치 그것이 사물의 실체 그 어느 부분같이 생각한다. 또 사물이 우리들에게 가져오는 것을 가치라고 하지 않고, 그 사물을 위해서 우리가 갖다 주는 것을 가치라고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대단한 절약가라고 본다. 돈을 치른 무게에 따라 그만큼 그 사물을 본다. 우리들의 생각은 결코 돈 쓴 값어치를 헛된 비용으로는 하지 않는다. 산 값이 금강석을 귀하게 만들고, 덕은 그 닦기의 어려움, 신앙은 그 괴로움, 약은 그 쓴맛이 그 값어치를 만든다.


부유하다는 것 71


에피쿠로스는 말하되, '부유하다는 것은 살기 쉬움이 아니라 일거리가 달라지는 일'이라고 하였다.


인색해 지는 것 71


사실 사람이 인색해지는 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먹을 것이 많아서 그렇게 된다.


가장 무서운 빈곤 73


부자로서 불안하고 궁색하고 분주한 자는 그저 가난한 자보다 더 가련하게 보인다. "부유한 자가 품고 있는 가난은 가장 무서운 빈곤이다." (세네카)


돈더미 74


돈더미에 마음이 쏠리는 버릇이 생기면, 그때부터 돈은 그대의 소용이 되지 못한다. 그 가장자리도 떼어 보지 못할 것이다. 생각하다시피, 건드리면 모두가 무너져 버릴 건축물이다. 운명에 목덜미를 잡히듯 꼼짝달싹도 못할 경우에나 건드려 볼 것이다.

그런데 위험한 일은 이 욕망에 확실한 한계를 세워서(좋다고 생각하는 일에 한계를 짓기는 어려운 일이다) 저축을 알맞게 그만두기는 쉽지가 않다는 일이다. 이 돈뭉치를 줄곧 키워 가며, 작은 숫자를 더 큰 숫자로 불려 나가서, 결국엔 비천하게도 자기 재산을 즐겨 볼 생각은 못하고, 모두 간직해 조금도 쓰지 않는 수작만 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순서 74


플라톤은 육체적 또는 인간적으로 보배로운 재물을 건강, 미모, 체력, 부유의 순서로 늘어놓는다. 


여행의 재미 75


나는 저축하는 버릇을 버렸다. 큰 돈을 쓰며 하는 여행의 재미가 이 어리석은 생각을 뒤집었다. 여기서 나는 세 번째의 생활로 들어갔다.(나는 느끼는 대로 말한다.) 실로 더 재미나고 절도 있는 생활로 끌려갔다. 그것은 소비가 수입과 맞아 가게 하는 방식이다. 때로는 한편이 더하고 어느 때는 다른 한편이 더하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이가 떨어지는 일은 매우 드물다.


획득의 욕심이 없음과 사들이는 탐욕이 없음 75


내가 돈을 모을 때는 머지않아 쓸 데가 있다는 생각으로 저축한다. 더 가져도 소용없는 땅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사려는 것이다. "획득의 욕심이 없음은 재산이다. 사들이는 탐욕이 없음은 수입이다."(키케로) 나는 재산을 불릴 욕심이 전혀 없다. "부유의 과실은 풍부이며, 풍부의 규범은 만족이다."(키케로) 나는 당연히 인색해질 나이에 이 버릇을 고치게 된 것을 매우 고맙게 여긴다. 인색은 늙어서 모두 잘 걸리는 병으로, 인간의 모든 어리석은 수작 중에서 가장 꼴같잖은 일이기 때문이다.


넉넉함과 가난 76


그러니 넉넉함과 가난은 각자의 생각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영광이나 건강도 마찬가지로, 부유를 소유하는 자가 생각하는 정도로밖에는 좋은 것도 유쾌한 것도 못 된다. 각자는 자기 생각대로 잘 살기도 하고 못 살기도 한다. 어느 누가 그렇다고 믿어 주는 사람이 만족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자만이 만족한다. 이 점에서만, 신념은 그 자체에 본질과 진리를 보여준다.


행복 또는 불행한 조건의 유일한 원인 76


운은 우리들을 좋게도 나쁘게도 하지 않는다. 운은 우리들에게 그 재료와 씨를 제공할 뿐이다. 우리의 마음은 운보다도 더 강하며, 행복 또는 불행한 조건의 유일한 원인이 되고, 자기 마음대로 운을 돌리며 적용한다.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 76


실로 못난이의 공부하기와 주정꾼의 술끊기가 고통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수한 생활이 방탕아에게는 고문이 되며, 연약하고 한가로운 자에게 훈련은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사물은 그 자체로서는 해로운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약하고 비굴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 위대하고 고매한 일들을 판단하려면 그만큼 위대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것인 악덕을 그런 일에 전가시킨다. 꼿꼿한 삿대는 물 속에서 굽어 보인다. 사물을 본다는 것보다도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이다.


자제할 줄 아는 것 77


"경박하고 연약한 편견은, 고통 속에서나 쾌락 속에서나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의 마음은 그 때문에 약해진다. 말하자면 흔들린다. 우리는 벌에 한 번만 쏘여도 고함지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모든 일은 자제할 줄 아는 것에 귀결된다."(키케로) 여기 말해 두지만, 사람은 사는 고통이 심하고 인간은 약하다는 점을 과도하게 주장해 보아도, 철학은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논리는 "궁하게 사는 것이 나쁘다면 적어도 궁하게까지 살아가야 할 필요는 없다"는 대꾸를 막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77


누구나 오래 불행하다는 것은 모두 자신의 탓이다. 죽음도 삶도 참아낼 용기를 갖지 못하는 자를, 저항하기도 달아나기도 원치 않는 자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둔한 소와 망아지 81


둔한 소는 안장을 욕심내고, 망아지는 밭갈기를 갈망한다.   (호라티우스)


18. 공포심에 대하여



공포심
85


전장에서 실컷 얻어맞은 자들이 아직 피투성이 그대로일지라도 다음날 다시 싸움터에 내보낼 수 있다. 그러나 적에 대해서 극심한 공포를 품은 자들에겐 그저 적군을 면대시켜 보지도 못할 것이다. 재산을 빼앗기고 추방당하고 굴복당한다는 천박한 공포에 눌려 있는 자들은 마시지도 먹지도 잠자지도 못하며,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살아 간다. 그 반대로 가난한 자들, 추방된 자들, 농노들은 다른 자들과 똑같이 유쾌하게 살아간다. 공포의 충격을 참아 내지 못해서 목매달아 죽고, 빠져 죽고, 뛰어내려 죽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공포는 죽음보다도 더 참아 낼 수 없이 괴로운 일임을 알 수 있다.


19. 사람의 운은 죽은 뒤가 아니면 판단하지 못한다



사람은 언제나 마지막 날을 기다려 보아야 아느니
죽어서 장례 지낸 뒤가 아니면
어떤 이라도 행복한 이라고 큰 소리치지 못한다.     (오비디우스)


솔론의 말 86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린애들도 크로이수스 왕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는 키로스 대왕에게 사로잡혀 사형선고를 받자 그 집행하는 마당에서 "오! 솔론이여! 솔론이여!" 하고 소리쳤다. 이 말이 키로스에게 보고되어,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고 심문했다. 크로이수스가 대답하기를, "옛날 솔론이 자기에게 한 말에, 사람은 운이 아무리 좋아도 그 인생의 마지막 날을 보기 전에는 그를 행복한 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인간의 일이 불확실하고 변화무궁하여 아주 가벼운 동기로 어떤 형세에서 전혀 판이한 다른 형세로 변해 가기 때문이라고 하더니, 이제 자기의 불행이 이 예고에 적중되었다"는 것이다.


한순간에 둘러엎는 힘 87

 

운은 어떤 때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을 정확히 노리고, 그가 오랜 세월을 두고 건설해 준 것을 한순간에 둘러엎는 힘을 보여준다. 라베리우스(기원전 2세기의 로마의 풍자극 작가) 말처럼 "정히 나는 살아야 할 일보다 쓸모없이 하루를 더 살았다"(마크로비우스)라고 소리치게 하는 것 같다.


최종 막의 가장 어려운 대목이 상연되는 것을 보기 전에는 88


그래서 우리는 솔론의 그 훌륭한 충고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철학자로서, 운의 좋고 나쁜 것이 행이나 불행의 자리를 잡지 못하며, 위대성이나 권세라는 것은 흥미 없는 성질의 사건이라고 본다. 나로서는 그가 한층 더 멀리 내다보며, 우리 인생의 행복은 천성을 잘 타고난 정신의 안정과 만족, 그리고 조절된 심령의 결단성과 확신에 달려 있는 만큼, 최종 막의 가장 어려운 대목이 상연되는 것을 보기 전에는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일 듯싶다. 다른 모든 일에서는 가면을 쓰고 있을 수도 있다. 가령 철학자의 아름다운 논법은 우리에게 체면을 꾸미는 일에 지나지 않으며, 여러 사건들은 우리 생명 자체에까지 시련을 주는 것이 아닌 바에야, 우리에게 늘 평정한 용모를 유지할 여유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의 죽음과 우리 사이의 역할에는 아무것도 꾸며 댈 건더기가 없다. 똑똑히 프랑스어로 해야 한다.

항아리 속에 있는 좋고 깨끗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종말이 좋을 것 88

다른 사람의 인생을 비판하는 경우, 나는 항상 그 끝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본다. 나 자신의 인생에 관한 주요한 관심은 이 종말이 좋을 것, 즉 묵묵히 고요하게 죽어가는 일이다.


20. 철학에 마음을 쏟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철학에 마음을 쏟는 것 89

키케로는 철학에 마음을 쏟는 것은 죽음을 대비하는 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더욱이 연구와 명상은 우리 마음을 바깥으로 끌어 내어, 신체 이외의 일에 분망하게 하는 것이며, 또 죽음을 공부하고 죽음에 닮아가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예지와 사유가 결국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이 한 점에 귀결된다.


우리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적 89


세상의 모든 의견들은 (여기 여러 방법이 있다고 하여도) 쾌락이 우리의 목적이라는 점에 일치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이런 것을 배척할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통과 불안을 자기 목표로 하는 자의 말을 누가 들을 것인가?

이에 관해 철학의 여러 학파들의 의견 불일치는 말투의 불일치에 그친다. "그렇게 교묘하고 어리석은 이론은 모르는 체하자."(세네카) 사람은 어떠한 역할을 맡든 간에 항상 그 중에서 자기의 역할을 연기한다. 그들이 무어라고 말해도, 도덕으로 보아도, 우리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적은 정신이 빠질 정도로 즐기는 데 있다.


매한가지로 잡아 가는 이상 94


모두들 가고, 오고, 아장거리고, 춤추고 한다. 죽음에 대해서는 소식도 없다. 이런 것 모두가 아름답다. 그러나 역시 그들에게, 또는 그들의 아내나 아이, 친구들이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때에 갑자기 죽음이 닥쳐 오면, 어찌 그렇게도 고민하고 고함지르며 발광하고 절망에 빠져서 허덕거리는가?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도 천해지고, 변하고, 심신이 전도되는 꼴을 본 일이 있는가? 우리는 일찍부터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우둔한 무관심이 지각있는 사람의 머리에 들어앉아야 한다 해도 (나는 그런 일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보지만) 그 대가가 너무 비싼 것이다. 그것이 피할 수 있는 적이라면 비겁함을 무기로 빌려 와도 좋다고 권하겠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이상, 그대가 도망을 치건 비겁하건 점잖은 인물이건 매한가지로 잡아 가는 이상

실로 죽음은 연로한 어른이 도망쳐도 뒤따라오고
용기 없는 젊은이의 겁 많은 등도
오금도 용서치 않는다.      (호라티우스)

아무리 강하게 쳐낸 강철의 갑옷이라도 막아 내지 못하며
아무리 조심스레 쇠와 구리의 갑주 밑에 숨어도
죽음은 그 숨은 머리를 찾아내고 만다.   (프로페르티우스)

항상 제자리에 단단히 서서 이 적에 대항해 버티며, 그와 싸우기를 배워 볼 일이다.


죽음에 더 가까워질수록 99


나는 이미 인생의 쓸모와 쾌락에 대한 흥미를 잃기 시작했으며, 인생의 재미에 그렇게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죽음을 대하는 데도 공포를 훨씬 덜 느낀다. 이것은 내가 인생에서 멀어지고 죽음에 더 가까워질수록, 이 두 교환을 더 쉽게 해치울 것이라고 기대하게 한다.


불행한 존재에서 존재하지 않음으로의 비약은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다 99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변화와 쇠퇴 속에 자연이 우리에게 이 손실과 악화에 관한 맛을 제거해 주는 모습을 보자. 한 노인에게는 그의 청춘 시절의 힘과 지나간 인생의 무엇이 남아 있는가?

아아! 늙은이에게 어느 만큼의 생명이 남아 있는가?    (막시미아누스)

카이사르의 호위대 병사 하나가 기진맥진한 채 쇠약한 몸으로 거리에서 그만 죽으러 가겠다고 퇴직을 요구했다. 그러자 카이사르는 그 쇠잔한 모습을 보고, "너는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구나" 하며 놀리는 조로 말했다. 갑자기 그런 상태에 떨어진다면 이 변화를 견뎌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의 손에 이끌리어 가벼운 경사를 부지불식 중에 한 계단 한 계단 끌려 내려가면, 자연은 우리를 이 비참한 상태로 굴려가며 거기에 길들여 준다. 그리하여 청춘이 우리에게서 죽어 갈 때는 생명의 온전한 죽음이나 노년의 죽음보다 더 가혹한 일이지만 우리는 아무 충격도 받지 않는다. 감미롭고도 꽃 피어나는 생명에서 힘들고 괴로운 생명으로 변해 갈 때와 같이, 불행한 존재에서 존재하지 않음으로의 비약은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다.

육신은 굽어지고 휘어져서 무거운 짐을 지탱하는 힘이 줄어든다. 우리의 마음도 역시 그렇다. 이 영혼을 이 적수의 공격에 대항해서 단련시키고 강화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이 적수를 두려워하는 동안 안정을 얻기는 불가능하니, 이것은 인간 조건의 힘에 넘치는 일이지만 우리가 확고하게 이 죽음에 대할 수 있다면, 불안·고민·공포, 그리고 가장 사소한 불쾌감까지도 마음에 깃들기는 불가능하다고 자랑할 수 있는 일이다.


통과점 101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통과점에 관해 속을 썩이다니 어리석은 수작이지!


좀더 살거나 덜 살거나 하는 문제 따위 102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되, 히파니스 강에는 하루밖에 살지 않는 작은 짐승이 있다고 하였다. 아침 8시에 죽는 것은 청춘에 죽는 것이고, 저녁 5시에 죽는 것은 노쇠해서 죽는 것이다. 이 순간적인 지속을 가지고 행이나 불행이라 하며 고찰하는 것을 누가 비웃지 않을 것인가? 우리 인생을 영겁에 비교해 보면, 그보다도 산·강물·별·나무, 또는 어떤 동물에 비교해 보면, 좀더 살거나 덜 살거나 하는 문제 따위는 똑같이 가소로운 일이다.


죽음은 우주 질서의 한 부분 102


어떻든 대자연은 우리에게 강제한다. 이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여기서 나가라고 하며 말한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들어올 때에 거쳐 온 길을 무슨 심정이건, 공포심도 가질 것 없이 생명에서 죽음에로 다시 거쳐 가거라. 그대의 죽음은 우주 질서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세상 생명의 한 부분이다.


죽음을 지어가는 것 102


그대가 살고 있는 것은 모두 생명에서 훔쳐 온 것이다. 생명은, 생명의 희생으로 이루어진다. 그대의 생명이 끊임없이 하는 일은 죽음을 지어가는 것이다.


만족해서 물러가라 102∼103


그대가 인생에서 소득을 보았다면, 그대는 거기에 포만했다. 만족해서 물러가라.

어째서 마음껏 먹은 손님처럼 인생을 뜨지 않는가?   (루크레티우스)

인생을 이용할 줄 몰랐다면, 인생이 쓸데없었다면
그까짓 것 잃었다고 서러울 것 있나? 무엇 때문에 삶을 또 바라나?


삶과 죽음의 단맛과 쓴맛 106


키론은 시간과 지속의 신인 그의 부친 사투르누스에게서 영생의 조건을 듣고 그것을 거절했다. 영원한 생명을 상상해 보라. 인간에게는 내가 그에게 준 생명보다 더 참을 수 없고 괴로우니라. 그대에게 죽음이 없었다면 그대는 내가 죽음을 주지 않았다고 끊임없이 나를 저주했을 것이다. 나는 이 죽음의 효용이 편리함을 고려해서, 그대가 너무 탐하여 천방지축으로 죽음을 찾으려고 하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 거기다가 조금 쓴맛을 섞었다. 그대가 생명을 피하지도 말고 다시 죽음을 피하지도 말라고 내가 그대에게 요구하는 절도를 그대가 지키게 하기 위해서, 나는 삶과 죽음의 단맛과 쓴맛을 골고루 조절하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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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에 대한 추억......
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월드북 12
미셸 드 몽테뉴 지음, 손우성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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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든 나는 감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말하기로 작정했다. 공표할 수 없는 생각이 있다는 것까지도 불쾌하다. 내 행동이나 상태들 중의 가장 나쁜 것도, 그것을 감히 고백하지 못하는 것이 추하고 비굴한 일이라고 보는 정도로, 그렇게 추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느 누구나 고백하는 데는 조심스럽다. 행동에 있어서도 그래야 할 것이다. 당돌하게 실수하는 일은 그것을 당돌하게 고백하는 일로 어느 면에서 보상되고 억제된다. 모두 말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는 자는 침묵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의무를 질 것이다. 내 지나친 방자함이 우리의 결함에서 생겨난 저 겉모양만 꾸미는 비겁한 도덕을 벗어 나서 사람들을 자유 속으로 끌어내고, 내 무절제한 행위의 부담으로 그들을 사리에 맞는 점까지 끌어 온다면, 그것이 바로 내 소원이다!
 - 몽테뉴

 * * *


(몽테뉴도 읽었던 책들 ① :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몽테뉴 수상록의 기본 텍스트에 가깝다)



(몽테뉴도 읽었던 책들 ② : 몽테뉴는 키케로와 세네카의 문장들을 광범위하게 인용한다)



(몽테뉴도 읽었던 책들 ③ : 몽테뉴가 읽었던 책들을 읽고 나서 다시 몽테뉴를 만나는 느낌은 이전과 확실히 다르다)

 * * *

나는 요즈음 한동안 몽테뉴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이런 일을 가끔씩 겪는다.) 몽테뉴의 책은 수상록 말고는 더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있는 책이 없다. 그는 단 한 권의 책만 썼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로서 이 사람만큼 자기 자신을 잘 고찰한 인물을 알지 못한다. 몽테뉴가 보르도 시장을 지내고 법관으로서도 오래도록 공직을 수행한 인물이지만, 그리고 그가 살던 시대의 내전에 가까운 신구교도간의 종교 갈등 때문에 프랑스 궁정을 비롯한 여러 곳으로부터 중책을 제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헌신짝 같은 사회적 명예를 그에 걸맞게 여기고 일찍 은퇴하여 독서와 사색으로 소일하면서 이런 책을 남길 수 있었음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의 책을 읽으면 몽테뉴의 안내로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에 관한 흥미진진한 행적들 뿐 아니라 그런 인물들에 대한 생애를 찬찬히 되새김질해 볼 수 있어서 좋다. 그는 온 세상의 전쟁과 동란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 뿐만 아니라 온갖 시시콜콜한 일상들에 대해서도 강력하고 흥미로운 고찰들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좀처럼 중복되거나 지루한 법이 없다.

그는 부친의 배려 덕분으로 어려서부터 라틴어만 쓰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리스와 로마의 작가들이 쓴 고전들을 두루 빼놓지 않고 읽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고대의 역사에 관한 책들과 시문학을 특히 사랑했다. 그는 예리한 판단력을 가지고 여러 고전들을 섭렵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함량미달인 책이거나 따분한 책들은 금새 알아볼 수 있었고, 그만큼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들한테 자신이 스스로 끌어올린 수준에 걸맞는 생각들을 전달하려 애썼을 뿐만 아니라,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도록 특별히 세심하게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서 그의 책은 매우 두툼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끌어나가는 대로 호흡을 맞춰 따라가다 보면 자꾸만 그의 얘기에 더욱 이끌려 끝까지 읽어나가는 데 별 어려움이 생기지 않는다.

그가 에세이의 형식으로 쓴 이 책은 수필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역사와 철학과 문학과 심리학과 시를 두루 섞어 놓은 좀 기묘한 책에 가깝다. 그의 이야기는 온 우주와 세계의 근원과 진로를 다루다가도 갑자기 친구와의 우정, 애인과의 연애, 음식과 여행으로 건너 뛰고, 종교와 영혼 문제를 다루다가도 코끼리와 고양이와 개와 토끼와 원숭이를 다루는 식으로 종횡무진 거침이 없다. 그의 얘기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 가지만, 그의 얘기를 읽는 독자들은 끊임없이 '나 자신'으로 되돌아 온다. 그의 책이 주는 핵심적인 매력이 거기에 있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자주 그가 우리를 묘사하고 비판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의 문장은 훗날 셰익스피어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조금도 과장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을 만큼 표현이 마음먹은 대로 자유롭고 막힘이 없어 보이고, 진실하고 강직하고 용감하다가도 느닷없이 광대처럼 까불고 뒤로 자빠지고 어르고 달래고, 불같이 화를 내다가도 어느덧 마음씨 착한 노신사처럼 유순하고 부드럽고 따뜻하다.

그가 얼마나 시문학에 정통했는가는 그의 책에 인용된 다양한 작가들의 무수히 많은 기묘하고도 적절한 싯구절만 봐도 충분하다. 그가 주로 인용한 시들은 호머, 베르길리우스, 루크레티우스가 쓴 작품들에서 뽑아 낸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표현이 조금씩 딸린다 싶은 대목에서는 '말솜씨로는 그에게 대응할 사람은 결코 나오지 않으리라고 생각되는' 키케로의 입을 빌려서 말하거나 조금 더 무게를 더하고 싶을 때에는 세네카의 입을 빌릴 때도 많다.

그는 자신의 작품의 주제를 '나'로 삼았다. 자기 자신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보다 더 탐구할 게 많은 연구 대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면서 온갖 다채로운 모습을 지닌 자기 자신을 묘사하는데 온 심혈을 기울인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기 자신'을 탐구하다가 '인간의 본성'을 보기 드물 정도로 훌륭하게 고찰한 인물이 되었다. 좀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의 재발견'이라고 할 만큼 그의 인간 내면에 대한 탐색은 집요하면서도 탁월하다.

몽테뉴(1533∼1592)가 살았던 세상은 코페르니쿠스가「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지동설을 주장했던 시기와 겹친다. 그러나 그 당시 유럽은 여전히 그리스도교적 세계관이 엄연히 지배하고 있던 봉건적 세계에 가까웠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로서 '인간에게 편안한 죽음을 맞도록 해주는 데' 충실하도록 강요받고 있었다. 하지만 몽테뉴가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지식의 목적은 인간에게 현세에서 더 올바르게, 더 생산적으로,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는 데 있다는 (당시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주장을 펼쳤다. 

그가 평생의 모토로 삼았던 화두는 '끄세쥬(Que sais je? 나는 무엇을 아는가?)'였다. 그토록 호기심이 많고 모든 사물에 의문을 가졌던 그가 (그가 보기엔 몹시도 엉성해 보였던) 낡은 교조적 교리에 얽매인 기독교 신앙을 아무런 의심없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음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의 여러 에세이 가운데 '레이몽 스봉의 변호'라는 유난히 독특하고도 기나긴 에세이를 통해 스봉의 자연신학을 변호한다는 구실을 빌미삼아 정작 자기 자신의 '철학 사상'을 전개한다. 그 내용들은 결국 종교 당국의 '사상적 검열'을 받았으나 '정통 카톨릭 신자'로 공인받은 그가 혹여라도 종교재판에 넘겨질 염려는 조금도 없었다.(그만큼 그의 글은 교묘하게 쓰여졌다. 겉으로는 '카톨릭 신자'라는 든든한 외피를 두른 모습이었지만, 정작 그는 '교회의 담장'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가 그곳을 자유롭게 활보하면서 제발 '교회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난 '교회밖 풍경'으로 눈길을 돌려 보라고 '숨겨서' 호소한다.) 결국 몽테뉴의 《에세이》는 그가 죽고도 한참 뒤인 1676년에 가서야 마침내 영광스럽게도 금서 목록에 올랐고, 18세기에 들어서는 '기독교에 대한 배신적 공격'으로까지 격상(?)되는 행운까지 누렸다.

그의 작품은 결국 그가 의도했던 바대로 훗날 많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상가들, 즉 무신론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는 역할을 떠맡았으며, 결과적으로 그는 인류의 관심을 허공에 붕 떠있던 '내세의 구원' 이야기로부터 땅바닥에서 일어나는 '세속 세계'로 끌어내림으로써, 이른바 '인간'을 중시하는 인본주의 시대를 이끌어낸 인물이 되었다. 그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살았던 옛사람들이 쓴 책들을 탐독한 몽상가였지만, 너무나 자유로운 생각과 예리한 판단력과 실증적인 생각들과 온갖 호기심으로 가득찬 열정 덕분에 결국 수많은 후대의 사상들이 거기서부터 싹터 나올 수 있도록 씨뿌려진 묘상(苗床)과도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가 이 책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내세우는 사람은 단연 소크라테스였다. 그만이 '현자'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 유일한 인물이고, 그보다 더 인류의 표본이 되는 사람은 없다고 보았다. 그건 왜일까? 그가 평생 동안 온 힘을 기울여 파고 들었던 연구 주제가 '자기 자신'이었고, 또 그가 1576년에 한 메달에 접시 저울과 함께 새겨겨 넣었던 말이 '끄세쥬'(나는 무엇을 아는가?)였음을 떠올려 보면,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강조했던 '너 자신을 알라'와 묘하게 엮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거기에 그 해답이 있지는 않을까? 몽테뉴 자신이 일생 동안 찰싹 들러붙어 결코 떨어지지 않으려 애썼던 바로 그 질문-나는 나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이 역사상 가장 현명한 인물이었던 소크라테스로부터 비롯된 철학적 명령에 응답하는 또다른 질문임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몽테뉴에게 소크라테스는 단지 훌륭한 철학적 과제 하나만 던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인간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게 살았고 가장 훌륭하게 죽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시종일관 여러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살핀다. 그리고 결국 그 이야기들을 빌어 자기 자신과 독자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질문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곧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현대의 유형으로 출현한 이후 대략 600억 명이 살았다고 한다. 그 어마어마한 숫자에 못지 않게 그들 각자의 삶 또한 얼마나 다양했을지를 상상해 보는 일은 무척 흥미롭다. 수백 년 전에 살았던 어느 유쾌하고도 매력적인 몽상가가 평생 동안 수많은 책들을 뒤져 읽으며 찾아낸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다양한 고찰과, 그와 동시에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 애썼던 흥미로운 이야기는 결국 죽을 때까지 '나 자신'으로부터 한치도 벗어나기 힘든 우리 모두의 주된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어느 한 인물이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그가 평생 동안 읽은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수백 혹은 수천 가지 사물들을 읽어낸 경우가 있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찾기 위해 만약 그와 같은 사람의 친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몽테뉴는 바로 그런 이들에게 그런 도움을 주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은 게 나의 솔직한 생각이다. 그토록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애썼던 몽테뉴는 과연 자신을 온전히 아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 성공한 것일까? 그 대답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분명 그는 그 일을 '성의(誠意)'를 다해 열심히 진척시켜 나간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면에서 나는 몽테뉴가 참 고맙고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몽테뉴의 소원을 좀 거들어 주고도 싶다.

쇼펜하우어는 '철학적 성찰에 있어서는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 때문에 생각하고 탐구하고 한 자만이 뒤에 가서 타인의 이익도 된다'고 말했다. '사람이 자신을 위하여 생각하고 탐구하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일반적인 성의(誠意)라는 성격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려고는 하지 않는 것이고, 또 자기 자신에게 씨없는 호도(胡桃)를 주지 않는 법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몽테뉴의 문장들이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이쯤에서 그쳐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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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뭉치들이 담긴 자루를 꺼내며 드는 생각
    from Value Investing 2014-01-25 15:21 
    고전을 읽다 보면 이상한 일을 자주 경험한다. 마치 옛 사람들이 빤히 알고나 있었다는듯이 천연덕스럽게 '지금' 막 우리들 눈 앞에서 벌이지고 있는 일들을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 들 때, 우리가 '헉. 과연 이 사람이 까마득한 옛날에 살았다는 그 사람이 맞아?'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정말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떨 땐 오늘날 우리들이 겪고 있는 여러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건들에 부닥쳐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을 때 고전을 쓴 저자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페크pek0501 2013-11-15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얘기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 가지만, 그의 얘기를 읽는 독자들은 끊임없이 '나 자신'으로 되돌아 온다. 그의 책이 주는 핵심적인 매력이 거기에 있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자주 그가 우리를 묘사하고 비판한다고 말하고 싶다.'"
- 몽테뉴의 생각을 읽지만 또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해 탐구하는 시간이 되겠죠.
오렌 님 덕분에 <도덕감정론>에 이어서 이젠 <몽테뉴 수상록>에 빠져 지내야겠군요. ^^

oren 2013-11-16 10:19   좋아요 0 | URL
몽테뉴의 수상록도 [세상을 바꾼 100권의 책]에 늘 빠지지 않는 걸작이니만큼 pek님처럼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두고두고 빠져서 읽을 만한 책이라 여겨져요. 좋은 책에 대한 권유가 되길 바랄께요~

숲노래 2013-11-15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 님도 oren 님 이야기를 써 보셔요.
아름다운 사진을 찍으시듯
oren 님 삶과 생각 이야기를 써 보시면
참 좋으리라 생각해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한국말 말밑(어원)에서
'아름답다'는 '나답다'에서 비롯했어요.
사람들 누구나 '내가 나다운 모습으로 살아갈' 때에 '아름답다'고 해요.
한국말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해요.

'나'를 찾는 길이란
아름다움을 찾는 길이 되겠지요.

oren 2013-11-16 10:25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 님처럼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술술 써내시는 분들을 보면 참 부러워요.
저 또한 제 자신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고, 오랫동안(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군대,직장생활 초기 몇년까지) 써왔던 일기를 다시 써 볼까 싶은 생각도 여러번 가져봤지만, 정작 요즘엔 남들의 일기를 읽는 게 더 재미있으니 이게 웬 말입니까. 암튼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그 굴뚝같은 마음이 누구에겐들 없겠습니까마는 그게 늘 시(詩)처럼 도무지 어렵게만 느껴지니 그게 늘 문제이지요. 암튼 소중한 댓글 남겨주셔셔 늘 고맙습니다.

transient-guest 2013-11-16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깊은 독서를 하셨다는 생각입니다. 한 저자의 책에서 밝힌 사상과 문장의 근원이 되는 책들을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은 그 전과 다르겠지요. 언젠가 한 사람을 정해서 따라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oren 2013-11-16 10:30   좋아요 0 | URL
저는 몽테뉴의 수상록을 대입시험이 끝난 직후 대학 입학을 앞둔 겨울방학때 처음 읽었었는데 그땐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즐겁게 읽었던 듯해요. 그러다가 군대 있을 때 다시 한번 읽고 독후감도 써 놓았더랬는데, 이번에 수상록을 두 번씩이나 거듭 읽으면서 이 책의 깊이를 새삼 느끼게 되었어요. 그리고 30 년쯤 전에 읽었던 몽테뉴가 지금껏 나한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왔구나 싶은 생각을 지금에서야 조금쯤 알 수도 있게 되었고요. 몽테뉴의 생각이 후대의 여러 작가와 사상가들한테 끼진 영향을 발견하는 재미도 아주 쏠쏠했던 것 같아요.

yamoo 2013-11-17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이 페이퍼는 정말 오렌님 서재에서 본 페이퍼 중에서 가장 가치있는 글 중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저두 구차달님 의견에 동감 만빵~ 이달의 최고 페이퍼라 생각합니다!

저는 오랜 시간을 두고 읽어 온 책이 별로 없습니다. 한 권 있다면 프롬의 <사랑의 기술>정도. 이 책은 7번 정도 읽은 기억이 있지만 정리를 끝내고 다시 읽은 적이 없네요.

몽테뉴 수상록은 베이컨 수상록과 같이 읽어 봤습니다. 비슷한 주제를 두고 두 철학자가 확현이 다른 사고를 하더군요. 그렇지만 한 번 휘리릭 읽은 책이라 음미하면서 읽어보진 못했습니다. 오렌님께서 발행해 주신 이 페어퍼로 인해 몽테뉴 수상록을 재독하고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봐야 겠습니다. 책에 대한 가치를 환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몽테뉴에 대한 이런 글을 만나보는 건 쉽지 않은데, 귀한글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oren 2013-11-18 09:22   좋아요 0 | URL
몽테뉴 수상록에 대한 리뷰는 쓰다 말다 덮어두곤 했던 글인데 묵혀 두기도 그렇고 발행(출판?)하기도 그렇고 해서 계속 꾸물대다가 간신히 '몽테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글을 올린 것인데 yamoo님께서도 좋게 봐주시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네요.

yamoo 님께서는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무려 일곱 번씩이나 읽어 보셨다니 그 책에 대한 감동이 얼마만큼 컸을지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 듯합니다. 나중에라도 한번 더 읽으시면 그땐 꼭 yamoo님의 남다르고도 멋진 리뷰 읽어볼 수 있기를 기대할께요.

M의서재 2013-11-24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페이퍼 정말 좋네요. 대단하십니다.
이 글이 아니었다면, 읽어볼 생각을 전혀 해보지 못했을 몽테뉴 수상록을 장바구니에 넣어요~
좋은 책을 만나게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oren 2013-11-25 11:33   좋아요 0 | URL
몽테뉴 수상록은 워낙 유명한 책이라서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책이라 믿어요.
불량주부 님께서도 언젠가는 몽테뉴를 만나서 그와 즐거운 시간들을 함께 하실 수 있었을텐데, 제 글이 그런 시간을 조금쯤 앞당길 수 있도록 하는데 보탬이 된다면 저로서도 그저 기쁠 따름이에요. 날씨가 또 추워질 모양이에요. 따뜻한 시간들 많이 가지시길 바랄께요~

수나 2013-12-12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글을 읽고 '몽테뉴의 수상록'이 읽고 싶어졌어요.
도대체 무슨 내용이 나오길래 ....나에 대해 오롯이 알 수 있을까? 호기심을 일게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3-12-13 10:10   좋아요 0 | URL
수나 님 반가워요~

몽테뉴 수상록은 정말 안심하고 추천할 수 있는 책이라 생각해요. 『평생독서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의 말대로, '지난 4세기 동안 고전으로 읽혀 온 역사가 증명하듯이, 독자는 곧 몽테뉴의 매력, 지혜, 유머, 스타일, 정신적 경향에 호응하게 된다.'는 말을 믿고, 수나 님께서도 즐겁게 몽테뉴를 만나 보시기를 기대할께요~

재와률 2013-12-29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권위 책을 읽고 나서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하는 것은 그 책을 두 번 읽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도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고 나서 리뷰를 써 보고 싶은 맘이 드네요 좋은 글 잘 읽었어요

oren 2013-12-30 10:18   좋아요 0 | URL
재와률 님 반갑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독자로서 저자와 나눴던 교감을 글로 써보는 일도 책읽기 못지 않게 흥미로운 일인 듯합니다. 그런데 항상 느끼는 점이지만 그 '느낌'을 글로 온전히 옮기는 일이 여간 어렵지가 않으니 끝내 자신의 생각을 겨우 조금 옮기느라 애쓰다가 주저앉고 마는 듯해요. 제가 이 책을 읽으며 떠올렸던 수많은 생각들도 결국은 리뷰로 옮기기도 전에 금세 어디론가 다 떠내려가고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스며들고 만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starover 2014-01-09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잘 읽었습니다. '몽테뉴 수상록',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와 몽테뉴의 깊은 연관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거침없는 표현과 자유분방한 이야기는 결국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요약되는, 몽테뉴의 놀라운 기법이 눈에 띄네요.
"나는 무엇을 아는가, 그리고 난 어떻게 살 것인가?' 덕분에 이 질문과 하루 종일 씨름해야겠네요~^^

oren 2014-01-09 13:25   좋아요 0 | URL
몽테뉴 자신이 '나는 무엇을 아는가'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평생을 고민했던 사람이니만큼, 그가 미리 살펴본 수많은 '인물들'의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정말 많은 소득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무쪼록 몽테뉴와 만나는 시간이 즐겁고 유익한 시간들이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9-18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몽테뉴 수상록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너무 두껍고 어려울것 같아 고민중이였는데, 이 포스팅 덕분에 바로 구매했답니다.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4-09-18 10:37   좋아요 0 | URL
제가 남긴 리뷰 덕분에 님께서 몽테뉴의 수상록을 바로 구매하셨다니 저로서도 여간 기쁘지 않네요.
모쪼록 '말할 수 없이 재치가 넘치고 매력 덩어리인 프랑스 사람' 몽테뉴와의 만남이 내내 즐겁고 보람있는 시간이 되기를 빌께요. 감사합니다.
 
베르그송이 말했던 '어떤 과감한 소설가'는 결국 프루스트가 아니었을까?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대우고전총서 1
앙리 베르그손 지음, 최화 옮김 / 아카넷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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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 관한 모든 해명의 요구는 생각지도 않게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환원된다. 즉, <시간은 공간에 의해 충분히 표상될 수 있는가?> - 거기에 우리는 대답한다. 흘러간 시간에 관한 것이라면 그렇지만, 흐르고 있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그런데 자유로운 행위는 흐르고 있는 시간에서 일어나지, 흘러간 시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유는 하나의 사실이며,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들 중에 이보다 더 명확한 것은 없다. 문제의 모든 난점들과 문제 자체는 지속에서 연장성과 동일한 속성을 찾으며, 계기를 동시성으로 해석하고, 자유의 관념을, 그것을 번역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한 언어에 의해 번역한다는 것으로부터 탄생한다.(272쪽)

 * * *

베르크손이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이하 『시론』)을 발표한 때는 그가 아직 총각 신세였던 1889년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때였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892년 1월 7일에 촉망받는 철학교수였던 그는 서른셋이라는 늦은 나이에 루이즈 뇌뷔르제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 참석한 여러 하객들 중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신부의 친척으로 결혼식의 들러리를 섰던 마르셀 프루스트였다.(베르크손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프루스트가 훗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의 제1부 <스완네 집 쪽으로>를 발표한 건 그로부터 21년이 더 흐른 1913년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날 결혼식의 신랑이었던 베르크손과 하객으로 참석했던 프루스트 둘 모두 '시간'에 대해서 놀라운 사유를 보여준 인물이라는 점이다. 결국 베르크손은 이 책을 통해 '지속'이라는 '전정한 시간'을 발표함으로써 서양철학사의 체계를 근본으로부터 뒤흔들게 되었고, 프루스트는 베르크손의 영향을 받아 '잃어버린 시간' 곧 '진정한 시간'을 찾아 나서는 엄청난 분량의 소설을 썼다. 그 둘에게 '진정한 시간'이란 곧 '진정한 자아'에 다름이 아니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이 책의 제목부터 좀 더 쉬운 말로 풀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실 내가 이 책의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들었던 생각은 '혹시, 시간과 공간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어느 철학자가 '우리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이라고 표현한다면 그건 십중팔구 칸트의 철학부터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주저인『순수이성비판』을 통해 밝혔듯이 우리가 '경험' 이전에 선험적으로 갖게 된, 그래서 우리가 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형식틀로서의 '시간과 공간' 말고 철학적으로 또다른 무엇이 또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 책은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책은 맞되 칸트의 철학적 입장과는 전혀 새로운, 오히려 칸트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놀라운 책이었다. 이 책의 제목을 풀어서 쓰면 '의식이란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 아니 바로 우리 자신 그 자체이지만, 너무도 가깝게 있기에 오히려 직접적으로 보지 못하고 항상 외부세계로부터 빌려온 형식과 틀, 특히 공간적 사유방식에 의해서 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러한 공간적 사유 방식을 털어 내어 내게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그대로의 의식을 파악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풀어서 써놓고도 여전히 그 뜻이 알듯말듯하고 알쏭달쏭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에 관한 얘기를 조금 덧붙일 필요가 있다. 베르크손이 훗날 자신의 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해 달라는 어느 부인의 질문을 받고 내놓은 대답부터 들어보자. 그는 <나는 시간이 있고, 그것은 공간적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였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시간이 공간적이 아니라는 말'은 사실상 그의 철학의 완벽한 요약인데 그 대답은 사실 아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베르크손이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발견한 '진정한 시간'에 대한 고백도 흥미롭다. 그것에 대해 '말만 하면' 사람들이 모두 그의 진실을 이해할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이 논문을 발표할 때 '지속'(베르크손이 발견한 진정한 시간)에 관해 설명해야 했다면 정말로 큰 어려움에 봉착했으리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자신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것일수록 항상 설명하기는 더 어렵기 마련'인 법이다. 그러니 그가 발견한 '지속'을 이 서평을 통해 '설명'하는 일도 지난한 일이 되기는 마찬가지일 듯싶다.(그래서 부끄럽지만 이 글의 많은 부분을 역자가 쓴 '해제'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서평을 쓰기로 했으니 잡힐듯 말듯한 베르크손의 생각에 대한 '나만의 감상'을 조금이라도 피력할 수 있게 된다면 나로선 힘에 부치는 무거운 짐을 조금은 내려놓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베르크손의 어려운 철학을 풀어놓기에 앞서 그의 '천재적인 면모'부터 살펴보는 일도 재미있다. 그 자신이 '한 철학자의 삶은 그의 이론을 이해하는데 아무런 빛도 던져주지 않는다'고 항상 주장했지만, 그리고 '내 작업의 출판이 내 생애에 대한 선전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면 출판한 것을 영원히 후회했을 것'이라고도 거듭 밝혔지만, 그의 생각을 굳이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호기심은 그에 대한 궁금증을 외면하기 힘들게 한다.

그는 9살에 국비장학생이 되었고, 꽁도르세 고교시절에는 교내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으로 공인된 학생이었다. 고교때 전국 학력경시대회에서 수학, 라틴어 작문, 프랑스어 작문, 영어에서 1위, 기하학에서 2위, 그리스어 작문과 역사에서 4위를 차지했다. 특히 수학문제에 대한 그의 해법은 너무나 완벽하고 아름다워서 수학전문지에 게재될 정도였는데, 그런 면모는 수학과 철학에서 동시에 재능을 보였던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와 파스칼을 연상시킨다. 그가 프랑스 지적 엘리트들의 집합소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하면서 선택한 전공은 '철학'이었다. '칠판 앞에서 풀기만 하면 되는' 수학을 버리고 철학을 택하게 된 것은 고교때 라셜리에의 철학책을 '열광에 차서' 읽으면서 철학에도 뭔가 '심각한' 것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이 책『시론』은 라셜리에에게 헌정된 책이다.)

베르크손이 고등사범학교에 '3위'로 입학했을 때 동기생 가운데는 프랑스 사회주의를 이끈 장 조레스와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도 있었다. 입학 당시 수석은 조레스의 차지였다. 조레스와 베르크손 사이에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는 베르크손의 면모를 눈앞에서 그려볼 수 있게 해준다. 어떤 교수가 두 학생에게 한 명은 망실된 키케로의 변론을 재구성하게 하고, 다른 한 명에게는 그것을 반박하게 했다. '조레스가 먼저 그의 유창한 언술로 온갖 미사여구와 비유와 이미지를 섞은 웅변을 토하며 키케로를 대신해 변론했을 때, 장내는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 반론자가 일어나 아무런 웅변적 음율도 없이 차분히 상대방의 주장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갔는데, 그 타격점이 너무나 정확하고 그 표현의 선택이 너무나 섬세하며 폐부를 찌르는 것이어서 키케로의 대변자가 세운 대건축물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장내에는 정적이 감돌았으나, 내심으로는 모두 그 논리의 힘과 사유의 섬세함을 경탄했다'고 한다.

그는 37세가 되던 1896년에 두번째 주저인 물질과 기억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철학자로서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1900년부터 1921년까지는 꼴레즈 드 프랑스의 철학교수를 맡았는데, 그의 강의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만원을 이뤘고 심지어는 창문에 매달려서 듣는 사람도 있어서 그 장면을 찍은 사진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온갖 상을 휩쓸던 '버릇'을 어른이 되어서도 그대로 이어간 끝에, 뢰지옹 도뇌르 훈장은 물론 1928년에는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했고, 1921년에는 아인슈타인과 퀴리 부인 등 세계적인 석학들이 참여하는 국제연맹 산하 지적 협력 국제위원회(오늘날 유네스코의 전신) 의장을 맡기도 했다.

베르그송이 '지속'의 개념을 발견한 것은 '스펜서'를 읽으면서였다고 한다. '시간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일 수가 없고 거기에 뭔가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은 보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분명히 보지 못했어요. 그것은 아직 매우 모호한 출발점이었어요 어느 날 칠판 앞에서 학생들에게 엘레아의 제논의 역설을 설명하면서 어떤 방향으로 탐구해야 할지를 좀더 분명하게 보기 시작했지요. ······ 그러니까, 보시는 바와 같이 내가 출발한 것은 과학적 시간 개념이었지 절대로 심리학이 아니었어요. ······ 요약하자면 지속을 의식하기 전까지 나는 내 자신의 밖에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어요. ······ 순수 지속을 살고 거기에 다시 잠기는 것이 나에게만큼 모든 사람에게도 쉽지는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몇 해가 걸렸어요. ······ 말해 주기만 하면 다 이해하리라고 믿었죠. 그후 나는 사태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베르크손의 일기, 1922년 2월 22일자)
 
그것은 '일종의 발견'이었다. 그가 '시간'에 대해 '작은 틈새'를 발견하고 의심하면서 점점 더 파고 들어가자 그것은 '철학사 전체가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통로'임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운좋게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착각을 표현한 역설인 '제논의 역설'을 깰 수 있는 길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 지성의 발현인 철학사 전체를 뒤집을 수 있는 길'도 찾았다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지속의 발견'을 담은 이 논문이 출판 당시부터 크게 주목받은 것은 아니고 나중에 물질과 기억이 성공하고나서야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책은 모두 세 개의 장과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장은 양과 질, 연장적인 것과 비연장적인 것을 구별하는 서론이며, 제2장은 공간이나 공간적 시간과 다른 지속 그 자체를 밝히는 핵심 부분이고, 제3장에서는 그 지속의 개념을 자유의 문제에 적용하여 <결정론>과 <자유론> 사이의 오랜 난점을 해소하는 부분이다.

우선, 제1장 <심리상태들의 강도에 대하여>를 통하여 베르크손은 심리상태들은 '비연장적'이며 각각 질적으로 달라서 그 강도를 '연장적인 것'과 같이 양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흔히 기쁨과 슬픔, 욕망과 희망 등에 대해서 너무나 익숙하게 '양적으로 표현'하는 '심리상태들의 강도'는 사실상 잴 수 있는 게 아니며, 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질과 양을 혼동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깊은 감정들' 뿐만 아니라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느낌과 같은 미적 감정, 연민과 공감등의 도덕감정, 격렬한 감정들(격렬한 욕망, 분노, 사랑, 증오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고통이 증가한다는 것은 더 많은 종류의 악기 소리가 들려오는 교향악에 비견될 수 있다. 고통의 크기는 바로 그 고통에 동조하는 신체 부분들의 수와 범위이다. 즉 고통이 크다는 것은, 그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신체가 그만큼의 다양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이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행동하라는 명령이라면, 쾌락은 운동하지 못하게 사로잡힌 무기력이다. 그것의 크기는 거기에 빠져 다른 감각을 거부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그 모든 단계는 따라서 거기에 관여된 신체의 다양한 부분들에서 오는 질적으로 다른 상태들이다.(335쪽)

감각의 크기를 잴 수 있다는 이론이 이른바 '정신물리학'인데, 베르크손은 두 감각을 측정하려면 그 질적인 면을 제거해야 하고, 그 질적인 면이야말로 바로 측정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측정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결국 '의식의 상태들'이 모두 질적으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질에 양을 집어넣거나 결과에 원인을 집어넣어 해석한 결과일 뿐임'을 밝힌 것이다.

제2장 <의식상태들의 다수성에 관하여 : 지속의 관념>은 이 책의 핵심인데, 베르크손 철학의 핵심인 '지속'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의식상태들의 다수성'이라는 것은 외부 사물의 공간적, 수적 다수성과는 다르며, 그것은 '삼투압'처럼 상호 침투하며 서로로부터 구별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조직화되는 '질적 다수성'임을 밝힌다.

'수'는 단위들의 집합이지만, 그 단위들은 모두 동질적이며, 동시에 동일한 공간 위에서 장소만을 달리하며 '벙치'되어야 한다. 수를 시간 속에서 셀 때도 하나하나 세어갈 때마다 항상 지금까지 센 것을 공간 속에 병치시켜야 한다. 결국 수의 관념에는 항상 공간의 관념이 들어간다. 그리고 수의 단일성은 이미 다수성을 내포하는 단일성이다. 또 각 단위들의 단일성도 이미 그 단위들이 무한히 나뉠 수 있다는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연장적'임을 뜻한다. 수 또는 단위가 단일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단지 우리의 정신에 기인하는 것일 뿐이다. 수가 그러한 것이라면 거기에 '다수성'이라는 의미는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수를 형성하는 물질적 대상들의 다수성이며, 다른 하나는 '수의 모습'을 띨 수 없는 '의식적 사실들의 다수성'이다. 가령 종소리를 여러 번 듣는 '물질적 다수성'과 그것이 주는 '질적인 인상'에서의 다수성은 '수적, 공간적인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시간'이 만약 구별하고 세는 장소라는 의미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공간일 뿐이며, 그것과 순수한 지속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순수한 지속'은, 우리 자아의 각 상태들이 서로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한 선율의 음들처럼 서로 속에 녹아들어가 상호 침투하여 내적, 유기적으로 결합한 전체를 이룰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적 사유에 사로잡힌 우리는 그 각 상태들을 서로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옆에 병치시키고, 계기를 연속적인 선으로 표상하는 데 익숙하다. 그것은 '하나가 온 뒤에 다음 것이 오는 계기'를 단번에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결국 지속을 연장에 투사하고 시간을 공간에 투사한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베르크손이 2장에서 '운동의 운동성'을 설명할 때 등장시킨 유명한 사례는 '별똥별'에 관한 이야기이다. 별똥별의 움직임처럼 '운동은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옮아가는 것인 한 정신의 종합이자 심리적이며 불가분적인 과정'이다. 공간 속에는 공간의 부분, 즉 움직이는 물체가 차지하는 위치밖에 없다. 의식이 그 이외의 것을 거기서 발견한다면, 그것은 정신이 계속적인 위치를 기억해서 종합한 것이다. '그것은 질적인 종합, 즉 선율의 통일성과 흡사한 종합이다. 바로 그러한 질적 종합이 운동의 운동성 그 자체이다. 가령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볼 때, 우리 눈에 남은 잔상은 별이 지나간 공간적 궤적이며, 그 궤적을 지나간 운동 그 자체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불가분적인 느낌으로 감각될 뿐이다.'

제논의 역설은 '운동이 지나간 공간적 궤적'과 '운동 그 자체'를 혼동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아킬레스가 지나간 공간은 무한히 나뉠 수 있는 성질이지만 바로 그러한 공간을 단번에 지나가는 아킬레스의 운동은 나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운동 그 자체를 '공간과 혼동하여 공간처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제논의 역설이 생기는 것이다.

과학은 시간에서 '지속'을 빼고서야 그것들을 다룰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운동들이 두 배, 세 배 빨라지면, 의식은 거기에 대해 어떤 질적인 느낌을 가질 것이지만, 물리적 공식이나 거기에 들어갈 '수'는 수정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학적 방정식이 표현하는 것은 항상 '완성된 사실(동시성과 위치)일 뿐,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지속과 운동 그 자체'는 표현할 도리가 없다. 수학이 자리잡는 양 끝점 사이에서 일어나는 '지속과 운동'은 항상 방정식 밖에 있다. '지속과 운동'은 정신적 종합이지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공간만이 동질적이고, 공간에 위치한 사물들은 상호 병치되어 <구별되는 다수성>을 이루며, 모든 <구별되는 다수성>은 공간에서의 전개를 통해 이루어진다. 반면, 의식의 다수성은 <질적 다수성>이며, 그것을 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과 언어의 혼동에 의해 <질적 다수성>에 양적, 공간적 요소를 개입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식적 삶의 두 측면, 즉 자아의 두 측면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 베르크손의 주장이다. '동질적 공간에 응고된 비인격적 자아의 이면에, 한없이 움직이고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적이며 살아있는 자아가 있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끊임없이 변하며 모든 것은 진행 중에 있고 과정 속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변화를 사상하고 한 사물을 그에 대응하는 동일한 말로 고정시킴으로써 그것이 항상 동일하며 불변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인상에서 안정되고 공통적이며, 따라서 비개성적인 것을 저장하는 역할을 맡은 언어는 순간순간 변하는 개인의 섬세하면서도 사라지기 쉬운 인상들을 덮어 버린다.' 왜냐하면 언어와 사유는 통약 불가능한 incommensurable 것이므로. 그래서 '유능한 소설가는 우리의 상투적인 자아의 그물을 찢고 우리를 본래적 자아 앞에 세움으로써 그 섬세한 질적 느낌을 다시 살게 해준다.'

제3장 <의식상태들의 조직화에 관하여: 자유>에서는 '지속의 관점에서 자유의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다. 여기서는 물리적 결정론, 심리적 결정론, 자유로운 행위, 실재 지속과 우연성, 실재 지속과 예견, 실재 지속과 인과성 등을 다루고 있다.

우선 물리적 결정론은 한 유기체의 원자와 분자들의 위치와 운동을 안다면 그 유기체의 심리상태도 예견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생명체에까지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명현상은 비가역적이다. '물질들은 영원한 현재에만 머무르지만 의식적 존재자에게 과거는 하나의 실재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명체나 의식적 존재에게는 덧부임(과거가 자꾸 불어나니까)이 있으며, 바로 그 사실은 그들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벗어남을 의미한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보편적 법칙으로 생각하는 것은 심리적 오류에 불과하다.

자유로운 행위란 무엇인가. '각 개인의 심적 상태는 각자의 인격 전체가 반영된 것이다. 그에 반해 언어는 서로 다른 의식상태의 객관적, 비인격적인 측면만을 붙잡은 것이므로, 그것을 병치한다고 해서 구체적 상태 자체를 번역할 수 없다. 자아를 그 전체가 녹아들어간 고유의 색채에서 파악할 때, 그러한 고유한 내적 상태의 외적 표현이 바로 자유로운 행위이다. 오직 자아만이 그것의 작가이고, 그것이 바로 자아 전체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유는 절대적이라기보다는 정도차가 있다고 해야 한다. 모든 의식상태가 인격 전체에 스며들어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자아의 표면에는 독립적인 심리상태들이 떠다닌다. 최면이나 갑작스러운 분노, 간질 발작 등이 그것이다. 그 다음에는 각각의 요소들이 섞이기는 하지만 자아 전체에 완전히 녹아든 것은 아닌 상태들이 있다. 잘 이해되지 못한 교육으로부터 오는 관념이나 느낌들이 그러하다. 그것들은 기생적 자아를 형성하며,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자유를 모른 채 그 속에서 살다가 죽어간다. 마지막으로 근본적 자아가 있는데, 자유로운 결정일수록 거기에 가까워진다.'

'결정론은 동일한 자아가 그 역시 동일한 채로 남는 두 개의 대립되는 감정 사이를 오고가다가 어느 한 쪽을 택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 모든 것이 동일한 채로 있다면 어떻게 어느 한쪽으로 결정을 내리겠는가? 숙고의 모든 순간 자아는 바뀌며 그 자아는 또한 그를 흔드는 두 감정을 바꾼다. 그 모든 과정들이 상호 침투하고 서로를 보강하여 자유로운 행위에 도달할 동적 연쇄를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조금씩 변하며 그러한 변화는 우리 자신으로 녹아들고, 그 전체가 바로 우리이다. 결국 나로부터 그리고 오직 나로부터만 나오는 모든 행동이 자유로운 것이라면, 우리 인격의 징표를 지닌 모든 행동은 분명히 자유롭다. 오직 우리의 자아만이 그것을 낳은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활동을 예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과학의 예견에 의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이 예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다루는 시간이 원하는 만큼 마음대로 단축할 수 있는 시간이고, 다시 말해 '진정한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의 시간은 그것과 완전히 다른 질서이며 단 일초라도 단축하면 전체가 달라지는 지속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불행히도 우리는 자연과학의 압도적 영향을 받아 인과관계를 절대적 필연성의 방향으로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의식은 절대적 필연성 같은 것을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함에도 불구하고, 원래 의식을 통해서만 인식되는 힘의 관념이 일단 자연에 투여된 후에는 거기에 오염되어 절대적 필연성과 혼동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두 외부 현상의 기계적 결정과 우리 행위의 동적인 관계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의식이 자기자신을 직접 보지 못하고 외부세계를 보는 눈을 통해 굴절되게 본 결과이다.'

'자유는 구체적 자아와 그가 수행하는 행동 사이의 관계이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관계는 정의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은 분석되지만 진행은 분석되지 않으며 연장성은 분해되지만 지속은 분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분석하려면 그것을 고정시켜야 하기 때문에,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진행은 사물로, 지속은 연장으로 그리고 자발성은 타성으로, 자유는 필연으로 변해 버린다.'

'결국 자유에 관한 모든 해명의 요구는 <시간은 공간에 의해 충분히 표상될 수 있는가?>하는 물음으로 환원된다. 흘러간 시간은 그렇지만, 흐르고 있는 시간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자유는 흐르고 있는 시간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흘러간 시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유는 따라서 하나의 사실이며, 사람이 인정하는 사실 중에 더 이상 명확한 것은 없다.'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는 칸트 철학과 대결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 논문이 출판될 당시만 하더라도 '칸트 철학'이 포함되지 않으면 아예 논문 취급을 받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사실 베르크손의 철학은 칸트 철학을 비판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는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칸트의 철학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형식'을 통해 사물을 본다는 것을 확립하는 것이었다면, 베르그송의 입장은 거꾸로 우리 자신을 '외부세계의 형식'을 통해 파악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우리가 사물에 적용하는 형식은 우리에게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와 사물 사이의 타협의 결과이며, 외부세계를 돈 다음 우리 자신을 다시 파악하려 할 때는 이미 외부세계의 형식에 물들어 있음이 틀림없고, 따라서 우리의 심적 상태는 그러한 외부세계의 특성, 특히 공간성을 제거했을 때에만 비로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칸트의 잘못은 '시간을 동질적 장소로 간주한 것'에 있었다. '지속과 공간을 혼동했기 때문에 자유는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자유롭고 실재하는 자아를, 지속 밖에 있기 때문에 우리 인식 능력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시간과 공간이 인식형식이라면 안과 밖이라는 구별 자체가 시공의 작품일 것이므로, 시공 자체는 우리 속에도 밖에도 있지 않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시간이 질료가 들어올 형식이라는 것은 그것이 곧 공간성을 띤다는 것인데, 시간이 공간과 같은 동질적 장소라면 과학은 시간에 대해 공간에서와 같은 효력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베르크손은 이 책을 통해 누누이 밝혔다. '칸트는 지속이 공간과는 다른 이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자유를 시간 밖에, 즉 우리에게 입장이 금지된 물자체의 세계로 넘겨 버렸다. 의식의 상태들을 서로로부터 떨어져 응고된 결정체로 보는 순간, 연상주의자와 결정론자가 출현하여 자유를 금지하거나, 칸트주의자가 출현하여 자유를 신비의 영역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그 독특한 삶의 순간들의 입장에 선다면, 즉 동적인 통일성과 질적 다수성의 구체적이고도 살아 있는 지속의 입장에 선다면, 자유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 계기와 동시성, 지속과 연장성, 질과 양을 혼동하는 데에서 오는 착각일 뿐이다.'

베르크손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속의 철학'이다. 이 책『시론』은 '지속을 방금 발견한 베르크손이 그것을 널리 공표하고 설명하는 자리인 셈'이다. 지속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진정한 운동' 그 자체이다. 우리는 외부의 물질계를 자르고 재단하여 '숫자화'하고 '양화(量化)'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의 관심은 물질계와 그 존재방식으로 향해 있으며, 진정한 운동인 '지속' 그 자체에는 관심을 가지지도, 또 가질 필요도 없고, 실제로 '숫자화'할 수도 없기 때문에 '양화(量化)'할 수도 없다. 우리에게 늘 중요한 것은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사실 '철학(philosophia)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전면적인 앎(sophia)을 알 수는 없지만 거기에 무한히 가까이 가려고 추구한다(philo)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때, 이 책의 제목은 결국 <모든 의식 외적인 요소들을 걷어내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직접적·내적 직관에 드러나는 대로의 우리 의식에 주어지는 것들에 충실했을 때, 그것들에서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앎, 즉 철학>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렇게 주어지는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진정한 시간으로서의 지속'이며, 지속의 상하에서 자유의 문제를 풀려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므로 베르크손 자신이 직접 번역한 영어 번역의 제목은 <시간과 자유의지 Time and Free Will>였다.

'자유의지'가 베르크손이 발견한 진정한 시간인 '지속'을 통해 충분히 해명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독자로서는 정말 근사한 경험이다. 아직까지도 '의지의 자유'와 '자유로운 행위'에 관한 숱한 논의들이 끊이지 않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베르크손이 해명했던 '자유의지'의 문제는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의식' 뿐만 아니라 더 깊숙한 곳에 감춰진 '무의식'으로까지 탐구범위를 계속 넓혀나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그가 이 책에 뒤이어 물질과 기억을 통해 해명하고자 했던 '물질과 생명의 구분'이나, 창조적 진화를 통해서 찾고자 했던 '더욱 자유로운 생의 비약'에 대한 탐구의 여정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나로서는 이 책이 베르크손과의 첫 대면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책 속에는 이상하리만치 '쇼펜하우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실 베르크손의 철학은 후설의 현상학에 가깝고 실제로 후설도 베르크손의 철학이 자신의 철학과 매우 비슷하다고 감탄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런 면에서는 후설의 제자였던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이 오히려 베르크손의 '지속의 철학'과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사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통해 해명하려고 시도했던 '존재와 시간'에 대한 물음 또한 베르크손이 '진정한 시간'을 찾아냄으로써 찾고자 했던 '존재의 본질'인 '참 나'와 별 다를 게 없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책을 통해 내가 발견했던 쇼펜하우어의 그림자는 어디서부터 찾아질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야말로 '칸트를 통해 칸트를 뛰어넘은, 칸트의 진정한 후계자'인 인물이고 베르크손의 철학은 '칸트의 물자체'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철학이 아니던가.

사실 쇼펜하우어 역시 '칸트 철학'의 많은 부분들을 폭넓게 비판한 인물이며, 그의 비판은 결국 여러차례에 걸쳐 플라톤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던 게 사실이다. 나로서는 쇼펜하우어가 찾아냈던 '의지의 철학'이 상당부분 베르크손이 발견한 '순수 지속'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는 '진정한 자아'와 매우 닮은 것으로 비춰졌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나의 깊은 곳으로부터의 느낌'이기 때문에 그걸 쉽게 설명하는 일은 몹시도 어려운 일이 될 것 같다. 내가 두 철학자의 닮은 점을 좀 더 찾아볼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은 베르크손의 나머지 주저들 때문이다. 베르크손의 물질과 기억이라는 책은 쇼펜하우어의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과 '탐구하려는 방향'이 매우 닮아 보였다. 두 책 모두 '물질계'와 '생명계'를 구분하거나 혹은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형이상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책들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두 철학자 모두 '물질계에 관한 자연철학' 즉 '과학'에 대해 매우 폭넓고도 깊은 탐구가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공통점까지도 지니고 있다. 베르크손이 나중에 창조적 진화를 통해 찾아낸 '생의 비약' 또한 쇼펜하우어의 '지칠줄 모르고 잠시도 쉬지 않는 의지'와 매우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지금껏 나온 철학논문들을 두루 찾아본다면 틀림없이 두 철학자의 공통점을 논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베르크손이 칸트를 비판하면서 언급한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형식이 완전히 우리의 작품일 수 없고, 물질과 정신의 타협으로부터 나온 것임에 틀림없으며, 우리가 물질에 많은 것을 준다면 우리도 틀림없이 그것으로부터 무언가를 받고 있으며······>와 같은 대목은 사실 쇼펜하우어의 생각과 매우 닮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책의 결론부분에 등장하는 다소 심오한 베르크손의 언급을 하나만 더 끌어오자. <우리 밖에는 지속 중의 무엇이 존재하는가? 오직 현재만 또는 원한다면 동시성만이 있다. 물론 외부 사물들도 변화하지만, 그것들의 순간들은 기억하는 의식에 대해서만 이어진다. 우리는 주어진 한순간에 우리의 밖에서 동시적 위치들의 총체를 관찰하며, 이전의 동시성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지속을 공간 속에 놓는다는 것은 진정한 모순을 범하면서 계기를 동시성의 바로 한가운데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 사물이 지속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우리 지속의 계기하는 매순간 그 사물들을 생각할 때, 그것들이 변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표현할 수 없는 이유가 그 사물들 속에 있다고 해야 한다.> 이 대목 역시 쇼펜하우어가 '시간의 심오한 차원'을 설명하는 부분과 매우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고, 내 생각으로는 심지어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과도 별반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베르크손이 여기서 말한 '어떤 표현할 수 없는 이유'야말로 '시공의 공통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겨우 한 권의 책을 읽고 글을 너무 지나치게 멀리까지 밀고 나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철학책을 읽는 독특한  즐거움은 '철학자들의 생각'이 '우리 자아에 대한 끝모를 깊이'에까지 우리를 쉽게 이끌고 간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베르크손의 철학을 읽는 즐거움은 거기에 더하여 '과학적 엄밀성'과 '문체의 아름다움'까지도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비롯한 당대까지의 많은 생물학자들의 성과를 바탕으로 쓴 『창조적 진화』는 '철학적 성과'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도 완벽한 문체' 때문에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작품이다. '창조와 진화'에 대한 탐구를 통해 '철학과 자연과학'의 근본적인 결합을 모색하는 창조적 진화는 오래 전부터 '제목'만 알고 있었던 책인데, 그 책을 통해 여러 천재들의 생각을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쇼펜하우어는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를 통해 자신의 철학이 '자연과학과 공통의 경계점을 갖는 유일한 철학'임을 밝혔고, 포이어바흐는 '칸트의 인간학도 프리스의 인간학도 이루지 못한 사유의 인간학적 전회가 이 책에서 일어났다'고 평가했다. 베르크손의 창조적 진화가 '철학과 자연과학의 결합'을 모색하는 쪽으로 방향잡은 사실도 쇼펜하우어와 닮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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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크손 철학의 핵심은 <지속의 철학>이며,  이 책 『시론』(1889년)에서 출발한 그의 철학은 그의 4대 주저 가운데 나머지 3권인 『물질과 기억』(1896년), 『창조적 진화』(1907년),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1932년)에 걸쳐서 '대상'만 달리할 뿐 근본 기저이자 동력으로 계속 작동하고 있다. 이하는 '지속의 대체적인 의미와 형이상학적 의의'를 살펴보기 위해 이 책 『시론』의 말미에 딸린 '역자 해제' 가운데 『시론』의 서평글을 읽는 분들께도 참고가 될 만한 부분만 간단히 인용한 것이다. 최대한 서평글과 연결되는 부분만 골라서 인용했지만, 아무래도 베르크손의 철학을 이해하는 첩경은 그의『시론』을 직접 읽는 데 있음은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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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하는 것은 운동 자체

지성은 그 풍부한 실재로부터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을 추상해 내고 그것을 자신에게 편리하게 공간 속에 배치한다. 그 추상물은 사물의 표면에서 추출해 낸 것이며 오직 그것에만 관계한다. 표면에 만족하지 못할 때에는 사물을 쪼개보기도 하지만 그때에도 보이는 것은 쪼개진 표면일 뿐이다. 결국 각 추출물은 하나의 <사물>로서 실체화한다. 지성의 그러한 습관은 너무나 철두철미하여 그의 눈앞에서 전개되는 운동(공간운동) 조차도 운동 자체는 사상하고 그것의 공간적인 측면, 즉 죽어 있는 공간적 궤적만을 보며, 거기서도 또 운동체를 추상해 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하나의 <사물>인 운동체가 죽은 공간의 궤적을 따라 운동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정작 실재하는 것은 운동 자체이며, 운동체와 운동의 궤적은 지성의 표피적 추출물일 뿐이다. ······ 상호 병치적이며 동질적이어서 무한히 분할할 수 있는 공간과는 다르게 운동 자체는 상호 침투적이며 이질적이어서 분할할 수가 없다. 그 불가분의 움직임으로 무한히 분할 가능한 공간을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 그 자체, 즉 지속을 발견한 베르그송은 이제 모든 것을 진정한 존재인 <지속의 상하 sub species durationis>에서 볼 것을 권한다. 그리하여 『시론』은 자유의 문제를,  『물질과 기억』은 심신관계를, 『창조적 진화』는 우주와 생명을,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은 행동의 문제를 지속으로부터 해결하려는 시도들이다. 본질에서 기능으로, 형상에서 지속으로, 공간에서 시간으로, 단힌 우주에서 열린 우주로, 형태에서 유전으로, 성년 중심에서 연속성의 담지자인 씨앗 중심으로, 도덕률에서 상황으로, 무감동에서 참여로 ······ 그 변혁은 너무도 근본적인 것이라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그것은 서양철학사가 겪은 가장 큰 지각변동이었다.
(311∼312쪽)


사실 운동을 지속으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전통 형이상학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었다. 전통 형이상학에서 진정한 존재는 운동이 가능한 한 다 빠진 영원한 정지체였다. 진정한 존재는 존재 아닌 것, 즉 무적인 것이 모두 빠져야 하는데, 생성과 변화와 운동은 완전히 존재인 것도 아니고 완전히 무도 아닌 그 중간에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그런 것들도 다 빠져야 진짜 존재를 얻을 수 있고, 그렇게 하여 확보되는 진정한 존재는 영원 불변의 정지체로서(운동이 다 빠졌으므로) 타자의 어떠한 간섭도 없이 무간섭, 무감동의 상태에서 존속하게 된다(플라톤의 이데아를 생각하라). 즉 정지야말로 참된 존재이며 거기에 운동이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더 무에 가까운 것이 된다. 다시 말해 정지가 운동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는 것이 전통 형이상학의 핵심 직관이었다. 그러나 베르크손에 와서는 운동이야말로 진정한 실재이며, 정지는 운동으로부터 끊어낸 추출물에 불과하므로, 운동이 정지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완전히 뒤집힌다.(312쪽)


지속이란 운동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임을 잃지 않는 운동

<운동이 존재>라는 것은 <존재는 운동>이라는 말과 다르다. 가령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은 흐른다>고 할 때,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시시각각으로 변하여 하나도 고정적인 것은 없고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가 없다는 뜻이며, <존재는 운동>이라는 말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변한다면 모든 것이 변한다는 그 사실만은 변하지 말아야 하고, 따라서 그와 같은 주장은 자기 파괴적임을 간파한 플라톤은 이미 존재는 운동과 정지로 이루어진다고 선언한 바 있지만, 어쨌든 베르크손의 <운동이 존재>라는 철학은 그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의 운동은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바로 지속인데, 지속한다는 것은 자기동일성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것이 운동하여 자기동일성을 잃고 변해 버렸으면 그것은 더 이상 지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속이란 운동하면서도 동시에 자기자신임을 잃지 않는 운동을 말한다. ······ 설탕이 물에 녹기를 기다려야 하는 까닭은 설탕이 물에 들어가자 마자 자신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임을 잃지 않으려고 뜸을 들이다가 결국은 자신을 포기하고 물 속으로 녹아들어가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아니 그 <뜸> 자체가 바로 시간이다. 그러니까 물질도 어느 정도는 지속하는 것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시간이 걸리는 것은 모두 지속하고, 모든 운동은 시간 속에서 시간이 걸려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모두 지속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지속하는 것은, 종국에 가서는 자기자신임을 잃어버리는 물질적 지속을 넘어서서 한사코 자기동일성을 버리지 않고, 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기자신임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플라톤이 <완벽한 존재> 또는 <능동자>라 부르고 베르크손이 생명 또는 순수 지속이라 부른 것으로, 물질과 만나서 물질 속에서 자신을 구현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타자화의 필연적 법칙이 지배하는 물질을 극복하고 거기에 비결정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때 비결정성은 물론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무규정성이나 이래도 저래도 좋다는 무원칙성이 아니라, 비결정성 자체의 자기동일성은 한사코 유지하는 비결정성이다. 필연의 거대한 수레바퀴에 대항하여 자신의 비결정성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켜낼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더 큰 비결정성을 구현하려는 비결정성이다. 비결정적인 것은 비약한다. 결정적인 것은 필연의 사슬을 따라 한치의 빈틈도 없이 진행되는 것이지만, 비결정적인 것은 다음 순간에 무엇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으며 전건에 없던 것이 후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비약하는 자기자신의 동일성은 항상 유지하는 비약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르크손은 그것을 <생의 비약>이라 부른다. 비약은 비약이지만 <생>이라는 자기동일성은 유지하는 비약이라는 것이다. <창조적 진화>라는 그의 책제목도 동일한 사태를 표현한다. 생을 종단면으로 잘라보면 매순간 전건에 없던 것이 후건에 나타나는 새로운 것의 <창조>이지만, 횡단면으로 잘라보면 그 창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진화>라는 것이다. 생은 결국 끊임없이 자신임을 떠맡으면서, 이미 자신을 넘어서 있는 존재자이다. 자기자신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넘어서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모순율에 위배된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존재자가 실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존재한다. 모순율은 사실 물질계에서 정지체를 끊어내고 그것의 자기동일성에 기반을 두고서만 편안함을 느끼는 지성의 그리고 오직 그것만의 최고 법정이다. 진정한 운동은 매순간 모순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낸다.(314∼315쪽)


우리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 바로 기억

생명은 기억(신체적 기억과 정신적 기억을 포함하여)이 있기 때문에 탄생으로부터 성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계속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생명체이지만, 내 눈앞에 있는 이 돌은 일 초 전과 일 초 후가 전혀 다르다. 기억이 없기 때문에 자기자신임도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돌은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속에서 무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일 초에도 몇 조(兆) 번을 진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돌을 이 돌로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존재방식을 그 돌에 투영하여 의인화한 결과이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사물들의 윤곽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우리의 자기동일성을 가지고 나가서 끊어낸 결과물이다. 따라서 모든 자기동일성의 원천은 바로 우리 자신이며, 모순율도 그 궁극적 원천은 우리 자신의 기능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그러한 모순율을 끊임없이 넘어서고 있다. 우리는 분명 우리 자신인 존재자이지만, 동시에 즉물적 자기 존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존재자인 것이다.

그런데 방금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해 주는 것이 바로 기억이라는 사실을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밝힌 사람이 바로 베르크손이며, 그와 동시에 기억은 타자화하는 물질을 거슬러 올라가 매순간 자신의 과거를 버리지 않고 끌고 감으로써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이므로, 원리상 모든 것이 모조리 기억되어야 한다는 이론이 확립된다. 그렇지 않으면 기억되지 않는 그만큼은 자기동일성을 잃을 것이며, 따라서 그만큼은 타자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뇌는 <기억의 기관>이 아니라, 오히려 원리상 이미 기억되어 있는 모든 것이 매순간 떠오르지 않도록 막아주는 <망각의 기관>이라는 이론 또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매순간 모든 것이 기억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뇌가 평소에는 기억들을 누르고 있다가 그때 그때 필요한 것에만 문을 열어주는 기관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밝힌 책이 바로 『물질과 기억』이며, 이 책에서 처음으로 기억이라는 현상이 생물 일반을 물질로부터 구별하게 해주는 원리로 부각된다. (316∼317쪽)


산다는 것 자체의 연속성만이 문제


정지체 중심에서 운동 중심의 철학으로 넘어왔다는 것은 불변의 본질에서 활동적 기능 중심의 철학으로 넘어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다시 형상에서 지속으로 그리고 본질들이 펼쳐지는 공간에서 활동성이 전개되는 시간으로 넘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무와 대비되어 가장 완벽한 도형(원)으로서의 완결적 형태를 이루는 닫힌 우주에서, 지금 현재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형성될 것이므로 완결되지 않고 미래로 열려 있는 우주로 우주관 전체가 바뀌게 된다. 사실 처음에 모든 것이 주어진다는 결정론이나, 나중에 모든 것이 주어진다는 목적론이나 결국 <모든 것이 주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며, 매순간 모든 것이 새롭게 <이루어지는 중에 있는> 운동 자체를 보지 못한 닫힌 철학이고, 따라서 운동 자체에 자리잡은 열린 우주론으로 대체되지 않을 수 없다. 생명도 그 기능에 따라 완결된 본질적 형태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 자체의 연속성만이 문제이고 그 형태는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유전적 존재, 즉 진화하는 존재로 파악되며, 따라서 완결된 형태를 갖춘 성년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연속성의 담지자인 씨앗이 중심이 되고, 성년체는 그 씨앗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혹>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우주는 물질의 필연과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는 생의 비약으로 이루어지며, 생은 각 상황에 따라 마비(식물), 본능(곤충), 지성(영장류)의 방향으로 갈라져 각자의 삶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 거대한 나무와 같은 것으로서, 각 방향은 나름의 생을 추구할 뿐, 목적론과 같이 하나가 다른 것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창조적 진화』는 그러한 생명과 우주의 모습을 방대한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묘사한 책이다.(317∼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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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N 2015-01-2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르그송 미학을 공부하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요. ㅎㅎ

oren 2015-01-26 16:5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소녀N 님.. 베르그송 철학이라면 (제가 이 글에서 쓴) 그의 주저들을 읽으면 될 텐데, `베르그송 미학`이라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저도 잘 모르겠군요. 원하시는 답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름숲 2017-04-16 0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쓰신 글이군요
저와는 이제서야 인연이 된 글입니다
많은 도움이 됩니다
물질과 기억 읽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읽어야겠군요

oren 2017-04-16 13:54   좋아요 1 | URL
하림 님 반갑습니다. 압축할 힘이 모자라 길게 썼던 글을 좋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베르그송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늘 진부함보다는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철학자인 듯합니다. 아무쪼록 그의 책들로부터 많은 걸 발견하시길 바랄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