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세상의 끝 지만지 희곡선집
장뤼크 라가르스 지음, 임혜경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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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프랑스 작가인 장뤼크 라가르스의 희곡. 10년 만에 집을 떠났다 집으로 온 그 집의 장남 루이가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서른 넷도 채 안 된 지금 이 나이에 난 죽을 것이다.(...) 위험을 무릅써 보지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희망은 결코 없기에, 두렵기만 하다. )...스스로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내가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고, 극단적으로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환상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모처럼 큰 맘 먹고 집으로 왔지만, 더욱이나 그의 앞에 다가오는 죽음을 이야기하려는 비장한 마음은 식구들이 그에게 쏟아붓는 말들 속에 묻혀버린다. 오히려 그는 말하는 입장이 아니라 듣는 처지가 된다. 그 동안 그(루이)가 집을 떠난 후 소식이 없었다는 것이 대화의 중심이 된다. 따라서 그는 극중에서 독백을 할 수 밖에 없다.

 

쉬잔(루이의 여동생) : 큰 오빠가 떠났을 때 오빠가 그렇게 오래 떠나 있을 줄 몰랐어, 신경 안 썼어.(.....) 오빤, 가끔씩 우리한테 편지를 보냈지, 가끔씩 우리한테 편지를 보내는데, 편지가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하지? 쪽지 글, 단지 쪽지 글, 문장 한 두 줄, 그 외에는 아무것도, 그걸 뭐라고 하더라?  생략어법. "난 잘 있어 그리고 다들 그렇기를 바라" 라는..

 

그들의 대화를 듣는 것은 어수선하다. 루이의 복잡한 마음을 함께 느낀다. 어쩔수 없이 루이의 독백을 주목하게 된다. 루이는 이젠 집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을 집으로 오기 약 열흘전 쯤 불쑥 결정하게 된다. 그저 식구들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집으로 가야겠다는 마음만 챙겼다. 그리고 갈등의 며칠을 보내면서 스스로 집으로 안 가도 된다는 이유들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집으로 가서 가족들의 얼굴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안 바꿨다.

 

루이는 어느 날 문득 불안감이 들었다. 비록 스스로 집을 떠나 가족들을 잊고 살다시피 했지만, 그의 죽음이 다가오는 느낌때문에 그랬을까? 가족들에게 잊혀져 가는 존재, 포기한 사람, 이젠 모두가 날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그의 마음을 지배했다. 잊혀져 가는 사람. 헤어진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잊혀진 사람이라던가? 김춘수 시인은 이를 詩語로 표현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루이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느 날 아침. "지금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내가 불평했던 그 사랑의 결핍이 언제나 날 비겁하게 만든 유일한 이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의 결핍은 언제나 나보다도 다른 사람들을 더 상처받게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 마디 할 수도 없고 나한테 한 마디 할 의무도 없는 죽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살아 있는 나를 그들은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는 이상하고도 절망적인 그리고 계속 사라지지 않는 생각으로 난 잠에서 깨어았던 것이다." 그 중 독백자가 한 사람 더 등장한다. 주인공 루이의 남동생 앙투안은 집을 떠나 소식이 없던 형에 대한 원망과 연민이 섞인 독백 같은 대사를 통해 그의 마음을 표현한다. "...아무도 형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런 걱정, 이런 걱정이 이젠 내 불행이 되었어, 마치 언제나 어린 동생들이 형을 따라하거나 걱정하는 것 같이, 이제 나도 불행해, 그런데도 계속 죄의식이 들어, 내가 별로 불행하지 않는 것에 죄의식이 들고, 억지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불행하다고 생각되지 않아서 조용히 죄의식을 가질 정도로..."

 

작가는 이 희곡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관객들은 이 연극이 무대에서 공연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가족에 대해, 사랑에 대해 그리고 또 다른 무엇 책임감이나 연대감?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족'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본다. '나'라는 존재는 가족이란 울타리와 공동체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어려부터 같이 한 지붕 밑에서 한 솥밥을 먹고 생활한 가족들은 나를 얼마나 알고 이해하고 있을까? 나는 그들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완전 이해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명쾌한 답변을 할 자신이 없다.


이 책을 옮긴이 임혜경 교수에 의하면 이 작품은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한다. 오랜만에 재회한 가족이 보내는 어느 일요일 하루 나절 이야기에서 시골 가정의 현실, 흔한 가족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사실적인 면. 그리고,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부분이 섞여 있다고 한다. 특히 주인공 루이의 의식 세계는 단순히 그날 하루라는 현실 시간을 넘어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유로이 넘나들고 있고, 현실과 비현실을 오간다.

 
결국 루이는 가족들 앞에서 그가 하고 싶었던 말(그의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그 말)을 못하고 다시
집을 떠난다. "그 다음에, 내가 한 건, 떠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몇 달 후 죽는다. 1년 안에...밤에, 산에서 길을 잃었다. 철길을 따라 걷는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는 밤, 홀로 걷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건 크고 멋진 소리, 계곡에 울려 퍼지도록 환희에 찬 긴 함성을 질러야겠다고, 나한테 선사해도 될 그런 행복, 힘껏 한 번 소리쳐 보는 것,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갈 위에서 내 발소리와 함께 난 다시 길을 떠난다.  그건 망각이다, 후회하게 될, 내가 지르지 않은 함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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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경 - 동양 고전에서 배우는 이기는 기술
자오촨둥 지음, 노만수 옮김 / 민음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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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동양 고전에서 배우는 이기는 기술

 

논변(論辯). 책의 서두에는 이 단어가 나온다. 논변((論辯). 사물의 이치에 대해 옳고 그름을 밝혀 말함 또는 어떤 의견을 옳고 그름을 따져 자세히 말함이라는 뜻이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 된 역사서인 [상서(尙書)]는 논변에 관한 기록을 풍부하게 담고 있다. 춘추 전국 시대로 접어든 뒤 논변은 불꽃이 활활 타오르듯 그 기세가 자못 왕성한 형세로 바뀐다. 혀는 검과 같고 입술은 창과 같은 논변가들이 예리한 언사로 상대 논객과 날카롭게 맞서는 논변 장면이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격동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이른바 말솜씨로 천하를 주름잡는 유세객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공자의 논변은 말은 쉽되 뜻은 심원하고 태도는 점잖고 우아했다. 맹자의 논변은 장쾌하고 기세가 높았지만 반드시 예리하지는 않았다. 장자의 논변은 과장하여 묘사하고 지나치게 장식하고 자세히 진술했지만 그 기세가 웅장하고 호방하여 구애됨이 없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소진과 장의는 각 제후국에서 합종연횡의 유세를 펼쳐 전국 시대의 국제 정치 판도를 좌지우지했다. 괴통은 죽음을 무릅쓰고 허심탄회하게 논변했다. 해서는 바르고 곧은 절개로 논변하며 감히 황제의 역린(逆鱗, 임금의 노여움을 이르는 말. 용의 턱 아래에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리면 용이 크게 노하여 건드린 사람을 죽인다고 함. ≪한비자≫의 <세난편(說難編)>에서 유래)까지 건드렸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인 좌오촨동은 중문학을 전공하고 현재 중국 감남대학교 중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논리학 관련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여 뛰어난 성과를 이뤄냈다. 이 외에도 저자의 저서는 [논변에서 이기는 기술], [중국고대심리건강사상개론], [웅변절초 101], [과학자로의 길을 향해 : 과학 기술 창조 사례]등이 있다.


책은 총 4부로 편집되어 있다. 1부는 책사들이 천하를 종횡하고 논변의 백가쟁명이 일어난 춘추 전국 시대를, 2부는 백가쟁명이 끝나고 궁정 논변이 펼쳐지는 양한, 위진 남북조 시대를, 3부는 쟁신을 육성하여 궁정 논변의 황금기를 구가한  당나라, 송나라 시대를, 4부는 소수 민족 정권과 함께 논변의 격변기를 맞는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시대를 담고 있다.


춘추 전국 시대에선 '노자'를 만나본다. 노자(老子)가 살던 시기는 노예제가 봉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로 사회가 극심하게 동요하는 불안한 시대였다. 지배 계급 내부에서도 분화가 발생하여 신구 세력 간의 투쟁이 격렬했다. 투쟁 수단은 흔히 찬탈, 반란, 부친 살해, 임금 시해 등이었다.  여러 해 동안 사관을 지냈던 노자는 약탈 전쟁의 잔혹함과 장기간에 걸친 백성들의 굶주림과 추위를 목도하며 '인위 없이 자연의 순리에 맡기자.'라는 무위(無爲)를 주장했다. 마땅히 그는 모든 싸움을 버리고 '절성(絶聖, 성스러운 체하는 것을 그만두기)'과 '기지(棄智, 아는 체하는 것을 버리기)'와 '절학(絶學, 배우기를 그만두기)'을 하자고 부르짖었다.


절성, 기지, 무위, 망아를 주장한 노자는 자연스럽게 논변도 찬성하지 않고 '지변(止辯, 논변 중지)'을 요구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知者不言 言則不知)

선한 사람은 변론하지 않고, 변론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다. (善者不辯 辯自不善)  

- '도덕경'



비록 노자는 자신의 주장을 선양하고 남과 논변을 펼칠 때에는 조리가 있었지만, 논변을 펼치는 것에 대해서는 격렬한 반대 입장을 표방했던 셈이다. 


양한, 위진 남북조 시대에선 '장석지'를 주목한다. 황제의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공정하게 법을 집행한 그의 기개를 들여다본다. 장석지는 집안이 부유해 재물로 기랑(騎郞), 즉 황제가 외출 할 때 호위를 하는 기병이 되었으나 승진도 되지 않고 알아주는 이도 없자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때 중랑장(환제 근위병을 통솔) 원앙이 황제의 측근에서 문서와 상소문을 받고 전달하는 벼슬아치인 알자(謁者)로 추천을 했다. 


장석지는 태자와 태자의 동생을 불경죄로 탄핵한다던가, 황제가 자신이 죽은 후 그의 묘를 진기한 보석과 구슬을 넣어 호화롭게 꾸미겠다는 생각을 하자 '탐나는 물건이 없으면 황제의 무덤도 온전할 것'이라고 직언한다. 그 외에도 공평무사한 법 집행만이 백성들의 믿음을 얻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재벌 총수들과 그 가족들의 엄청난 비리가 드러날 때 마다 그들을 비호하기에 급급한 작금의 국내 상황에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다. 


당나라, 송나라 시대에 들어와선 '손석'을 만나본다. 송나라 진종은 요나라와 싸움을 벌이다 화의를 했는데, 송나라 입장에선 불평등한 조약이자 치욕적 사건으로 기록된다. 진종은 이 일 때문에 모욕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이러던 차에 간신 왕흠약이 천서(天瑞, 하늘이 내리는 상서로운 조짐)사건을 벌인다. 이 때 강직한 사람 손석이 이를 진종에게 직언한다.  "어리석은 신이 들은 바로는 하늘이 말을 하지도 못하는데 어찌 글을 쓰겠습니까!" 

가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혹사시키고 물자를 낭비하며 제사를 지내는데만 몰두하는 진종에게 "백성은 신령의 주재자이니 밝은 군주는 먼저 백성을 안정시킨다"고 목숨을 걸고 상소한다.

뒤이어 "나라가 흥하려면 민의를 따르고, 멸망하려면 귀신의 분부를 따른다"고 직언한다.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시대에선 '과감한 개혁 정치로 난세를 구한 '장거정'을 만나본다. 장거정은 강릉(江陵,지금의 호북성)사람으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해서 일곱 살에 육경의 큰 뜻에 통달했으며, 열두 살에 수재에 합격했다. 승승 장구해서 마흔 다섯 나이에 내각의 최고 수장인 수보의 자리에 오른다. 용모도 출중했지만, 심지가 굳고 담력이 크고 지모가 풍부했다. 상소문을 통해 '행정 개혁 여섯 가지'를 올린다. 그 내용은 '공론을 줄인다.', '기강을 바로 잡는다.', 조령을 중시한다.' '드러난 명성과 실제의 공이 명실상부하도록 한다.'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한다.', '군비를 바로 갖춘다.' 등 그 당시로선 획기적인 행정 개혁안이었다. 그 후 개혁 정치는 순풍에 돛을 달고, 전국적으로 토지를 측량해 탈세자가 없게 한다던가 모든 조세와 부역을 통일하는 일조편법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 책을 옮긴이 노만수는 이 [쟁경]을 동양의 논변을 총망라한 '동양 논술 대백과 사전'이라고 칭한다. 그 표현이 지당하다. 다섯 수레에 실어도 다 못 실을 만큼의 방대한 분량의 동양 고전 목록에서 논변에 관한 액기스만 뽑아냈다고 생각한다. 


싸워서 이긴다는 뜻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 싸움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또한 깊이 생각해본다. 누구와 무엇을 위해 싸울 것인가. 나의 마음에는 정도(正道)가 있는가. 그저 남과 싸우기 위한 마음의 칼날만 갈고 있지는 않은가. 남과 싸워서 이긴다는 것은 나의 뜻을 상대방의 마음 속에 넣어서 굴복하게 하는 일인데, 과연 나는 바로 서 있는가. 남과 싸우기 전에 나 자신과 먼저 그 싸움을 해야하지 않는가.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삶을 통해 남을 살피기 전에 나부터 잘 살피고, 나부터 바로 서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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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 찬가 - 정글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인간으로 살아남기
조국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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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는 이 책을 사회의 정글화에 대한 비판을 위해 썼다고 합니다. 책의 제목에 보노보(bonobo)라는 생소한 동물이름을 사용한 것은, 진화심리학과 사회생물학에 대한 개인적 관심 외에도 보노보의 행동양식이 정글화되고 있는 한국사회에 여러 시사를 던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민주, 인권, 공정, 평등, 연대, 복지 등 진보의 가치를 보노보를 통하여 우회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파니스쿠스'라는 종명(種名)을 가진 보노보는 아프리카 콩고의 밀림지대에서 새로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트로글로디테스'라는 종명을 가진 침팬지와 구별되는 영장류 동물입니다.  저자는 그의 전공이 아니지만, 보노보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여러 침팬지 연구를 참고 한 덕분이라고 합니다. 침팬지는 수컷 중심의 수직적 서열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폭력을 수반하는 내부의 치열한 권력투쟁, 다른 침팬지 집단과의 잔혹한 전쟁, 성인 수컷에 의한 유아살해 등의 행태를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무한경쟁, 권력투쟁, 전쟁, 학살, 남성지배 등의 생물학적 기원을 바로 인간의 '사촌'인 침팬지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보노보라는 종(種)은 좀 다릅니다. 침팬지와 달리 암컷끼리의 연대가 매우 강합니다. 수컷이 암컷을 지배하지 못하며, 공동체내에서 부자보다 모자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점에서 보노보 무리는 암컷 중심의 사회입니다. 아울러 엄격한 수직적 서열을 만들지 않으며 상당히 평등한 문화를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노보의 행태와 문화는 전 세계 영장류학계는 물론, 인류학계, 사회학계, 여성학계에 크나큰 충격파를 던졌다고 합니다. 인류가 '자연법칙'으로 수용하는 침팬지식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른 보노보식 삶의 방식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은이는 대한민국이라는 '정글'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침팬지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 점 깊이 공감합니다. 제일 심한 곳이 '정치판'입니다. 논란 많은 '여성부'란 곳이 있기도 하지만, 직장에서 성차별은 꿋꿋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동물의 왕국'이 되어버렸다고 개탄하기도 합니다. 



-  '정글자본주의'의 시대, 진보의 길 찾기

지은이는 자본 앞에서 초라해진 '법 앞의 평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시장권력 또는 경제권력은 민주화 이후 오히려 정치권력에 비해 더 자유로운 조건에서 더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이미 이러한 사례는 뉴스를 통해서 보고 듣고 있는 상황입니다. 재벌 총수가 경제, 폭력등의 사유로 검찰을 들락거리게 되면, 휠체어와 마스크가 법정 복장으로 통일됩니다. 모 판사는 논문에서 이렇게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수천억 원을 횡령한 재벌 회장은 도주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김 한 장을 훔친 노숙자는 얼마든지 도주할 수 있고, 한국의 피해자는 돈만 있으면 90퍼센트 정도가 합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양형은 피고인의 재력에 달려 있는 셈'이라고 했습니다.


-형벌권의 과잉과 남용은 안 된다.

매년 수많은 사람이 범죄를 저질러 유죄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갇힙니다. 범죄인의 기본권이 제한, 박탈되는 것은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이지만, 문제는 감금 이후입니다. 지은이는 현재 우리나라의 교정시설과 방법에 대해 우려하고 있습니다. 굳이 '신시내티 선언'이 아니더라도 '수형자에 대한 행형규율의 최고목적은 보복적 고통을 과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의 개선이어야 한다.'는 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오죽하면, 교도소가 '학교'로 바뀌었겠습니까? 교도소 동기생들이 한 판 벌리면, 크게 한 판입니다. 지은이는 이를 염려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도소는 수인들에게 고립과 고통과 무의미한한 노역의 기간이 아니라 그들이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생활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러할 대 재범률은 줄어들고 다수자의 안전도는 놓아질 것이다."

 

- 이 땅의 소수자를 위하여

다문화사회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질 정도로 주변에 외국인과 외국인이 결합된 가정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일본인들에게 서양인들에게 받은 차별의 역사가 깊습니다. 현재도 재일교포가 받는 차별에는 분노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같이 호흡하고 있는 외국인들을 무시하고, 차별하고, 멸시까지 하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우리 안의 인종차별주의는 난민인정 속에서 드러난다고 합니다. 우리는 중국정부에 대하여 탈북자에게 난민지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하면서 한국을 '약속의 땅'으로 믿고 목숨 걸고 찾아 온 난민들을 냉대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야기들을 듣고 생각하다보면 부끄러워집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인간이 보노보나 침팬지를 스터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연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듭니다. 보노보가 속으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들은 어찌 저렇게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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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국을 보았다 나는 천국을 보았다 1
이븐 알렉산더 지음, 고미라 옮김 / 김영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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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체험(죽었다 깨어난 사람들의 경험)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크게 있다! 와 없다!로 분류됩니다. 임사체험에 관한 한 세계적인 권위자로 지목되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세계 각국에 있는 수만 명의 임사체험 사례를 수집해서 사람이 삶을 마치고도 생명은 계속되며 의식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로즈 박사는 사람에게는 3단계 사망과정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첫 단계는 의식이 신체를 떠나는 것인데 이때 뇌파가 사라지고 심전도 역시 사망상태로 나타납니다. 그 다음 2단계는 시공(時空)의 제한이 없이 가고 싶은 곳으로 순식간에 가게 되는데 시각장애인은 이때 앞을 볼 수 있고, 언어장애인은 말을 할 수 있으며 청각장애인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제 3단계는 시공을 초월해 일생을 되돌아보게 되는데 몇 초 내지 몇 분 시간에 많은 의식들이 겹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후 많은 의사들이 사망과 임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왔는데 모두 로즈 박사와 비슷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한 편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를 이끌어 온 셀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사람이 죽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라는 질문을 해보길 원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끌어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인간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혼이란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를 스스로 묻고 답하길 원합니다.


셀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에 대한 강의자에 걸맞게 그 역시 '임사체험'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삶이 끝난 후에도 삶이 계속되는가'에 대립되는 두 그룹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뤄진 인간이라는 '이원론'과 인간은 육체만으로 이뤄진 인간이라는 '물리주의'가 그것입니다. 그의 관점에 의하면 이원론자들이 받아 들이는 임사체험은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설명하는 반면, 물리주의자들의 주장은 다만 생물학적 과정의 관점에서 약속어음의 상태로 내버려두고 있다고 합니다. 


물리주의자들이 생물학적인 설명을 한 부분을 더 언급해보며 이렇습니다. "생물학적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육체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엔도르핀이 과도하게 분비되고, 이 때문에 희열의 느낌을 경험하게 되는 것" 또는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시신경이 특별한 방식으로 반응함으로서 터널과 눈부신 빛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잠시, 이런 논란을 접어놓고..임사체험의 당사자를 만나보렵니다. '이븐 알렉선더'. 미국의 유명한 신경외과 의사입니다. 그의 연구분야는 '뇌기능 매핑'(Human Brain Mapping)입니다. 최근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뇌기능 매핑을 위한 획기적 영상도구들이 개발되어 실용화되고 있습니다. 즉, 뇌의 전기 혹은 자기신호를 측정하는 EEG 혹은 MEG를 이용한 매핑과 뇌의 대사적 혹은 혈역학적 활성도를 측정하는 SPECT, PET, fMRI등을이용한 매핑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에 더하여MRS,DTI,OCT,TMS 등 새로운 영상도구들의 발전으로 해부학적, 생리생화학적 매핑도 가능해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뇌기능 매핑'(Human Brain Mapping)을 이렇게 장황하게 추가 설명드리는 이유는 저자는 이렇게 과학적, 분석적, 실증적 학문의 연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지은이인 이븐 알렉산더에게 일생 일대의 큰 사건이 닥칩니다. 바로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지요. 희귀한 뇌손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집니다. 동료 의사들은 그에게 생물학적 사망 판정을 내리려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7일째 되는 날에 그의 영혼이 그의 몸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공개적인 가장 최근의 임사체험자로 기록 될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한 독자들은 곧 바로 궁금점과 의문점이 들게 될 것입니다. 그는 7일 동안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느꼈을까? 


이 책에 그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이 천천히 돌면서 새하얀 가는 빛줄기들을 발함에 따라 내 주위의 어둠은 점점 부서지면서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 그런 후 빛의 한 중앙에서 다른 무언가가 나타났다. 나는 최대한 깨어 있는 의식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했다. 열려 있는 구멍이었다. 나는 더 이상 천천히 회전하는 빛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었다."


그는 그 곳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꿈의 세상.."을 보게 됩니다. 아니, 그 안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는 그곳에서 '사랑'을 느낍니다. 그곳에 가기 전에 마음 속에 담고 있던 '사랑'의 의미와는 또 다른 차원의 '사랑'을 느낍니다. 그가 천국에서 그의 영혼이 다시 그의 몸으로 돌아 올 때 그는 크나 큰 심적 고통을 느낍니다. 그곳이 그 만큼 평안하고 좋았다는 이야기겠지요. 지은이의 표현을 빌리면, 천국문이 닫히고 그의 영혼이 육체로 돌아온 상황을 모든 입체적이었던 경험들이 전반적으로 평평해졌다(저는 밋밋해졌다는 표현으로 바꿔보렵니다)고 합니다. 천국의 문이 닫혔을 때 깊은 상실감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커다란 벽 같은 구름들을 통과하며 나는 아래로 이동했다. 주위에서 온통 속삭이는 소리들이 들렸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어둠 저편에서 내 위와 내 아래에 쫙 깔린, 보일듯 말듯, 느껴질 듯 말 듯한 여러 층위의 존재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다. 그들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그가 눈을 떴습니다. 그가 누워있던 중환자실에선 주위의 있던 사람들이 거의 기절할 정도의 드라마틱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7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성인이 깨어나는 모습이 아니라, 갓 태어난 아기의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봅니다. 이 세상에 막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그런 눈빛으로 위, 아래, 이쪽, 저쪽을 찬찬히...


천국을 다녀와서 현실 생활에 적응되는 과정 중에 어려운 상황이 좀 있었군요. 중환자실 증후군이라고도 하는 망상증 단계가 걷히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잠도 안 자고 그들(가족들)에게 인터넷, 우주정거장, 러시아의 이중 첩자 등과 같은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늘어놓기도 했답니다. 어쨌든 그는 결국 회복이 되었습니다.


"신경과학자로서의 지식은 하나 둘씩 아주 천천히 돌아온 반면에, 몸에서 벗어나 있던 일주일 동안의 기억들은 내 의식 속에 아주 선명하게 불쑥 등장했다. 지상의 세계를 넘어선 영역에서 일어났던 일들 때문에 나는 순수하게 행복한 기분으로 다시 깨어 날 수 있었고, 그 행복감은 아직까지도 내 안에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무척이나 행복했다. 하지만 내가 행복했던 또 다른 이유는(최대한 꾸밈없이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처음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종류의 세상인지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땅에 살아가면서, 이 책의 지은이처럼 임사체험을 겪지 않고도 보다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삶이 결코 허황되지 않다는것을 느낍니다. 신경과학자로서 이런 글을 써서 책으로 펴내는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들려주는 말은 내 몸에서 영혼이 떠나가는 날까지 힘을 줄 것입니다. 살아가며 무엇이 소중하고, 덜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주고 생각하게 해줍니다. 그의 영혼이 일주일 간의 여정에 머물렀던 기억이 신(神)을 믿는 단계까지 발전하지는 못했으나 신을 알고, 이해했다고 합니다.  삶 뒤에 죽음만을 생각하고 살 것인가, 죽음 뒤에 이어지는 또 다른 삶을 염원하고 믿을 것인가는 각 개인의 몫입니다. 저는 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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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력 - 예능에서 발견한 오늘을 즐기는 마음의 힘
하지현 지음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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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각 TV 프로그램마다 예능 프로가 대세입니다. 예능 프로그램의 재미는 출연하는 연예인이나 게스트들의 평범한 일상 속 이미지를 들여다보는 데서 오는 듯 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 콘티가 짜여진 상태에서 진행이 되긴 하지만, 그네들의 애드립에 미소나 폭소가 유발되곤 합니다. 애드립의 특징은 그 사람의 평소 생각이 드러나는 계기도 되지요. 나중에 편집이 되긴 하지만, 더러 생방송으로 진행 하는 중 애드립으로 날린 말들이 구설수에 오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능 프로그램은 일상에 지친 시청자들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매력이 있습니다.


신경정신과 의사로서 이미 여러 권의 저서를 통해 환자가 아닌 독자들과도 친근한 이미지를 심어 주고 있는 이 책의 지은이 하지현. 지은이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일견 한없이 가볍고 단순해 보이는 예능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웃음과 감동을 주고, 때로는 오늘의 상처까지 치유해 주며, 다음 날을 또 한 번 이겨 낼 힘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를 다시 줄여서 "예능에서 발견한 오늘을 즐기는 마음의 힘"이라고 표현합니다.


지은이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예능력'이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생각의 전환'이 일어 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예능을 알고 이해하고 즐기면 무엇보다 잘 놀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재충전을 할 수 있기까지 하답니다. 이성이 아닌 감성의 중요성을 확인 하는 시간도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삶의 태도에서 핵심 키워드가 되어야 할, '의미와 가치', '낙관의 힘', '독창적이고 특별한 나'에 대해, 예능이 반복적으로 알려 준다는 것입니다.


지은이는 이를 다시 이렇게 분류하고 있군요. 나를 단단하게 지키는 힘,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힘, 삶을 놀이로 만드는 힘, 삶을 감동으로 채우는 힘,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힘.


콤플렉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지은이는 [개그콘서트]의 '네 가지'를 예로 듭니다. 네 가지는 어쩌면 우리 사회의 일반적 콤플렉스이기도 합니다. 촌스러움, 작은 키, 인기 없음, 과체중. '네 가지' 의 네 남자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스스로 노출시킵니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표현합니다. 지은이는 이 당당함이 대중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다시 대중들의 마음에 '응, 그래 나 정도면 되어도 괜찮네..'라는 마음을 심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즉, 콤플렉스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살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놀이. 아이나 어른이나 놀이 문화에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그 놀이가 복잡하고 심난한 마음을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요. 물론 아이들이 놀이에 빠지는 것과 어른들의 그것이 서로 다르긴 합니다만 놀이문화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 되었다고 생각듭니다.


프로이트는 놀이를 하는 모든 사람이 작가와 같으며 놀이를 하면서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놀이의 대립물은 진지함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했습니다. 현실을 벗어난 우리는 그래서 놀때 즐겁고, 잘 노는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출연진들이 그저 노는 것만 봐도 카타르시스 효과를 보는 것이 아마도 그런 이유인듯 합니다.  지은이는 이렇게 권유합니다. 세상을 보는 프레임을 바꿔 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공포심을 버리고, 게임을 할 때처럼 목표 달성을 즐기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은 마음 자세를 가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은이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힘"이라는 챕터에서 '나에게 가치 있는 일로 오늘에 집중하라'고 권유합니다. 예능의 핵심이 웃음과 즐거움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웃다가 잠이 들면 그만이라는 것이지요. 굳이 그것에 무슨 의미를 찾고, 부여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지요. 시간 낭비였던 것 같지만, 그 시간들이 내 마음에 여유를 준다는 것입니다. 


삶은 방향이 있다고 합니다. 뒤를 돌아보는 일 즉, 나의 과거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옆을 보는 것. 즉,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현재의 불만족을 보는 것이지요.  세 번째는 앞을 보는 것.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미래는 희망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결국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나를 위한 바람인가? 타인이 기대하는, 타인에게 보여 주기 위한 모습인가를 냉정히 판단해야겠지요.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 삶의 가치와 의미'가 되겠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니까, 예능 프로그램을 자주 보며 재충전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사실 그간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요. 때로는 출연자들이 과장된 언행을 보여주는 모습을 보며 '뭐 저렇게까지?'하는 마음을 갖기도 했으나, 내 안에 너무 고지식한 틀을 갖고 살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나를 다 흩어버린 후 재조립. 마음의 리모델링을 하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상의 틀을 다시 추스리기 위해선 때론 그런 시간도 필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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