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로 중용을 풀다 이한우의 사서삼경 2
이한우 지음 / 해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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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東洋古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사서오경(四書五經) 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입니다. 이는 유교의 경전으로, 경전 중에 가장 핵심적인 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서(四書)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말하고, 삼경(三經)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을 말합니다.  삼경(三經)에 "춘추(春秋)"와 "예기(禮記)"를 합해 오경(五經)이라 부르고, 합해서 사서오경((四書五經)이라 부릅니다.

 

사서삼경 또는 사서오경은 여전히 먼 그대입니다. 멀리 하기엔 너무 가까운 존재(서가에  몇 권이 자리잡고 있기에)임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하기엔 먼 존재(선뜻 손이 잘 안 갑니다)로 자리잡는 이유는 한 마디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간간히 책을 읽으면서도 이해되는 부분보다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책 [논어로 중용을 풀다]의 저자인 이한우는 프로필을 통해 대학에서 영문학을,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한 것으로 소개됩니다. 10여 년에 걸쳐 [조선왕조실록]을 탐독하며 조선 군주의 리더십 연구에 몰두해 온 저자는 인문적 깊이와 감각적 필치가 돋보이는 [이한우의 군주열전] 시리즈로 태종, 세종, 성종, 선조, 숙종, 정조에 대한 저서를 펴내면서 역사학계뿐 아니라 정치학자들에게까지 통시적 사회 읽기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중용(中庸)"은 사서(四書)중에서 가장 추상적이고 난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지은이에 의하면 "중용"이 그렇게 난해한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식이 든것은 바로 번역과정에 있다는군요. 글자 한 자 한 자까지 깨치고 들어가는 번역을 하지 않는 한 이해불가라는 것입니다.  그 예를 듭니다.

 

唯天下至聖 爲能聰明睿知 足以有臨也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인(聖人)이어야 총명예지(聰明睿知)가 족히 임할 수 있다."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기때문에 그 뜻을 헤아리기가 더욱 힘들다는 이야깁니다. 지은이가 이를 다시 번역해보았답니다.

"오직 천하제일의 성스러운 임금만이 능히 귀 밝고(聰) 눈 밝고(明) 사리에 밝고(睿) 사람에 밝아(知) 족히 '제대로 된 다스림(臨)이 있을 수 있다."

 

이를 비교해보니, 수긍이 갑니다. 마치 위의 번역은 한글과 영어가 뒤섞여있는 느낌을 받게 되는군요. 지은이는 얼마 전 우리 사회에 "중용"붐을 일으킨 도올 김용옥의 번역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중용"이 읽기 어려웠던 이유 두 번째로 사서(四書)읽기의 순서와도 상관이 있다고 합니다.

"중용"에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말들이 많기 때문에 맥락과 단어를 함께 잡아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고는 제대로 읽어나가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쇠가 "논어"에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논어"를 체계적으로 치밀하게 읽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래저래 갈길이 멀어지는군요.

 

그러면 이제 왜 21세기에 우리는 "중용"이라는 책을 읽어야 하는가. 지은이는 "중용"만큼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책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합니다. "논어"역시 인간 관계론의 보고(寶庫)라고 알려져 있지요. 그렇지만, "논어"에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이 한데 어우려져 있는 반면 "중용"은 수기(修己), "대학(大學)"은 치인(治人)에 집중하여 공자(孔子)의 생각을 일목요연한 체계로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고대 중국에는 "중용"이나 "대학'이라는 경서가 없었답니다. 송나라 때의 학자 주희(朱熹)가 "예기(禮記)" 49편 중 제31편을 따로 빼내 집주를 달고서 "중용"이라 붙이고, 제42편을 끄집어내어 집주를 달고서 "대학"이라 이름을 붙여 경서의 지위를 부여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중용"이나 "대학"을 그 자체만으로 소화시키는데는 무리가 있다는 이야깁니다. "논어"가 그 땅을 일구는 보습이 되어야한다는 것이지요.

 

지은이는 독자가 스승의 도움 없이 혼자의 힘으로 사서(四書)를 읽을 경우 "논어", "중용", "대학", "맹자"순으로 읽을 것을 권고합니다. 이는 조선시대 때 사서(四書)를 읽어 나가던 순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먼저 "대학"을 읽고 이어 "논어"와 "맹자"를 읽은 다음 "중용"으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지은이는 난이도를 감안해서 중간 정도의 난이도를 갖고 있는 "논어"를 먼저 읽고 보다 깊은 "중용"과 "대학"을 읽고 추상도 면에서나 시기적으로 사상적으로 처지는 "맹자"를 읽어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앞으로 이러한 점을 감안해서 사서오경의 들과 산에서 호흡해보렵니다.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단상을 함께 옮겨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혹은 남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라."  ('學而 16')

나부터 그러하지만, 사람들은 받는 것에 익숙해있고 기대를 하면서도 막상 주는 것에는 매우 인색합니다. 내가 어디에가서 대접을 잘 못 해준다고 화를 내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마음의 배려를 해주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 경우 종종 겪어보시지요? 목에 잔뜩 힘을 주면서 "내가 누군데?"
나원참..내가 당신을 어찌 알겠오. 그리고, 설령 내가 당신이 그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힘을 쓸데에서 써야지. 아무데서나 그리하면 어쩌오. 일상에서 가끔 부딪는 상황입니다.

지은이는 앞서 밝힌데로 "논어"를 통해 "중용"의 문구들을 이해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는 다 아는 사람이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물이나 덫, 혹은 함정의 한가운데로 몰아넣어도 그것을 피할 줄을 모른다. 또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는 다 아는 사람이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들은)중하고 용하는 것(中庸) 을 택하여 제대로 한 달을 버텨내지도 못한다."

 

이 말은 "논어" '옹야(雍也)5'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중하고 용한다면(中庸) 그 사람은 어진 사람(仁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공자는 말했다. "안회는 그 마음이 삼 개월 동안 인(仁)을 떠나지 않았고, 그 나머지 제자들은 하루나 한 달에 한 번 인(仁)에 이를 뿐이다."

 

동양고전의 멘토 신영복 교수님은 동양고전을 대함에 독자들이 현독(賢讀)을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텍스트의 필자를 읽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독서생활을 돌아 볼 때 여전히 텍스트에서 헤매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천천히라도 꾸준히 가다보면 나 자신을 읽을 경지까지 가겠지요. 아뭏든 이 책을 통해서 사서(四書)읽기에 대한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지은이가 "논어'와 "중용"에서 나오는 내용들을 어떻게든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모습이 이곳 저곳에서 느껴집니다. 이 책을 읽고 "논어"와 "중용"을 따로 다시 읽어보는 방법도 좋겠습니다. 단, 지은이가 우려하는 것처럼 제대로 성실하게 번역이 된 책을 만나는 것이 관건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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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며 철학자인 박이문의 주저(主著)이자 '박이문 철학'의 결정판이다. 한국 자생철학을 대표하는 우리 시대의 세계적인 석학 박이문이 평생에 걸친 시적.철학적 사유와 방랑 끝에 우리에게 제시하는 '박이문 철학'이 바로 '둥지의 철학'이다.










 

생명의 기원은 인류가 오랫동안 품어온 의문의 대상이다. 그러나 아직도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시나리오는 존재하지 않으며, 최근의 다른 학문 분야의 발전에 힘입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자본과 국가 등 구조라는 괴물에 익숙해지는 동안 모른 척하고, 말하지 못한 것을 일깨우는 책이다. 이 괴물들이 침묵의 공장을 가동하는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그러나 치밀하게, 국어는 제멋대로 편집되었고 국사는 왜곡당했으며 인문학은 굴종해야 했다.













'의료'를 키워드로 한국 근대인들의 삶을 그린 세밀한 조감도. 우리나라에서 서양 근대의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시점인 1876년 개항 즈음부터 1910년의 경술국치 무렵까지 보건의료 환경의 변화를 다룬 책이다.









우리 주위의 공간에서 최고 무용수들이 춤추는 순간들을 포착해서 삶의 진정한 모습들을 담아낸 사진집이다. Dreaming, Loving, Playing, Exploring, Grieving, Working, Living의 7가지 키워드로 분류된 사진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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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만남 - 우리 시대 최전선을 만나다
조국 지음 / 쌤앤파커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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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보니 떠오르는 단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입니다.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것 자체가 어찌보면 우습기도 합니다. 누구나 마음안에는 보수와 진보가 섞여 있지요. 단지 상황에 따라 또는 몰려다님에 따라 보수도 되기도 하고, 진보가 되기도 하지요. 자주 기울이는 쪽이 왼쪽이냐 오른쪽이냐에 따라 그 성향이 구분되기도 합니다. 


과학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전문으로 다루는 저널리스트 크리스 무니는 그의 저서 "똑똑한 바보들(The Republican Brain)"(동녘사이언스, 2012)에서 틀린데 옳다고 믿는 보수주의자의 심리학을 펼치고 있습니다. 무니는 과학적 연구를 토대로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심리적 요구, 도덕적 직관을 포함한 여러 특성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무니는 책 말미에 진보주의자의 모델로 철학자 장 자크 루소를 묘사한 글로 진보주의자의 팔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토머스 칼라일이 루소에 대해 쓴 글입니다.


"그는 다락방에 갇힐 수도 있었고, 광인이라고 놀림 받을 수도 있었으며, 우리 안에 남겨진 야생 동물처럼 굶주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그가 세상에 불을 지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 책의 지은이 조국 교수가 만난 사람들은 '우리를 달라지게 하고, 지금보다 더 낫게 만들기 위해 결코 멈추지 않고 다그침을 계속하는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정신'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지은이가 만난 사람들 거의 모두가 진보성향으로 분류되고 있으니까요. 


지은이는 2012년 3월, 고정 칼럼을 쓰는 것보다는 인터뷰하는 것이 훨씬 시간이 덜 들것이라는 [한겨레]편집국장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조국의 만남'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인터뷰어의 수고와 역할이 크다는 것을 알았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지은이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은 인정되는 부분입니다. 인터뷰이(인터뷰의 대상자)는 인터뷰어를 잘 만나면 내면 깊숙히 담겨져 있던 생각들이 석류가 익어 톡톡 알갱이들을 쏟아내주듯이 언어로 표출되는 계기가 됩니다. 


지은이는 '조국의 만남'에서 우리 사회의 가장 뜨거운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 분명한 소신과 철학을 갖고 자신의 영역을 파고들어 새로운 장을 연 사람들'을 모시고자 했다 합니다. 지은이 조국 교수는 자타가 인정하는 진보인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터뷰어로서 그의 질문에 그의 입장이 반영 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분의 정치적 입장이 진보이건, 보수이건, 이 손님들(인터뷰이)들의 진솔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길 당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한계와 편향을 갖고 있고 진리의 부분만을 알고 있지 않던가!"


책은 4부로 나뉩니다.  '내가 싸우는 이유', '나는 세상의 불청객', '내 방식대로 세상에 말 걸기',

'야만의 시대, 원로로 살 수 없다'. 등 지은이가 편의상 분류를 해놨군요. 리뷰가 좀 길어지고 있습니다만, 두 만남을 옮겨보렵니다. 가슴이 아프고, 가슴이 뛰는 만남입니다. 가슴이 아프니 뛸 수 밖에 없지요. 


인터뷰이는 은수연(가명)입니다. 친아버지에 의한 장기간의 성폭력에도 무너지지 않은 사람. '가정'이란 이름의 지옥을 탈출해 가해자를 처벌하고 나아가 가해자를 직접 대면해 나는 더렵혀지지도 않았고 망가지지도 않았다고 선포한 사람. 그 이후 힘차게 환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

이 사람은 자신의 너무도 치욕스럽고 아픈 상처를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이매진, 2012)라는 책으로 세상을 향해 큰 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아직 책은 못 읽어봤으나, 조국 교수가 추천사를 썼다고 합니다. 


"내 삶이 의미가 있을까, 내 고통의 시간들이 의미가 있을까?' 이런 질문에서 시작됐어요. 아프고 힘들었지만 밝고 힘 있게 이겨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성폭력 문제를 다를 때 언론 등은 끔찍하고 선정적인 사건만 다루잖아요. 저는 '사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사건 속에 살고 있는 사람 말이예요."


기억을 더듬어보니, 인터넷에서 기사를 보았었군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9년간 친아버지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친어머니가 아버지의 폭력이 시작되면 어린 딸을 아버지한테 밀어붙이면서 "네가 좀 달래서 아빠 좀 진정시켜라"며 성폭력을 묵인하고 부추기기까지 했다는 대목에선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사람들이 사는 가족이란 공동체가 맞는가?  인터뷰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더 이상 미움, 분노, 원망에 묶이고 싶지 않아 용서한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가해자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크게 반성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라는 인간은 용서를 구함이 없었다는 대목에 더욱 가슴이 아려옵니다.


소개하고자 하는 두 번째 인터뷰이는 우리가 잘 아는 조정래 작가님입니다. 지은이의 표현을 빌리면 "소설가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치열하고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람을 만났다. 몸에 밴 강직과 절제, 그리고 여전히 청청한 기운을 보고 느낄 수 있어 좋았고, 인터뷰 후 막걸리를 마시며 부인 김초혜 시인과의 열열한 연애 비화를 들을 수 있어 더 좋았다."


조정래 작가님은 지금까지 8만 매가량 되는 엄청난 양의 원고를 쓰셨지요. '황홀한 글 감옥'이란 책을 몇 해 전에 읽은 기억이 납니다만, 다시 읽고 싶어집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의 대하 소설을 쓰셨지요. 이분이 '천재'를 정의한 부분을 마음에 담습니다. 

 

 "천재는 따로 없어요. 두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천재입니다. 첫째,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무한히 책을 많이 읽은 사람.  둘째, 끝없이 노력하는 열정을 잃지 않는 사람."


특히 [태백산맥]은 이 땅에 민주화 비슷한 것이 진행된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에 쓰기 시작한 것이니까 작가로서는 그야 말로 목숨 걸고 쓰는 원고였지요. 선생은 [태백산맥]을 쓰면서 정신적 고통이 매우 심하셨다고 합니다. 좌익 부분을 쓰고 나면 계속 악몽에 시달렸답니다.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두드려 맞는 꿈. 그러다 보니 심한 위궤양이 생기겨서 위에 두 군데 천공이 났답니다.


결국 [태백산맥]으로 경찰 대공분실과 검찰에서 조사를 받기까지 하셨지요. [태백산맥]를 쓰실 때 후배작가들이 "왜 투쟁하지 않느냐"고 비판했고, 선생님은 "그 시간에 글로써 투쟁하겠다" 고 답하셨답니다. 1980년대 후반 연일 격렬한 시위가 일어날 때 그렇게 비난했던 후배들이 90년대 중반에 접어들자, "아, 역시 조 선배가 옳았어"했답니다.


지은이 조국 교수는 마음의 부담과 세인들의 공격을 예상하면서도 현실 정치에 깊숙히 관여하게 됩니다.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시작으로 2012년 국회의원 총선거 그리고 대통령 선거까지 세 번의 큰 선거. 지은이는 이 세 번의 선거가 우리 사회의 법적, 제도적 변화를 일으킬 중대한 변곡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지은이는 많은 공격과 비방을 받습니다. 그것은 '친북좌파 폴리페서'로 요약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조국 교수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래, 맞다. 나는 책상에 자리잡고 앉아 책 읽기를 좋아하는 '친북좌파(親Book座派)'다!.  그렇다면, 일 주일에 평균 4~5권의 책을 읽고 리뷰로 정리하는 나 역시 '친북좌파(親Book座派)'임에 틀림없습니다. 조국 교수와 한 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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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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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을 때는 첫 문장에 주목한다. 너무 길면 재미가 없다. 짧으면서도 그 다음을 읽어보게 만드는 맛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점수를 줄 만하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전직 여배우 아야미는 손에 방명록을 든 채 오디오 공연장의 두번째 계단에 앉아 있었다."


오디오 공연장이라? 낯설다. 우선 궁금증을 자아낸다. 아야미는 음향 기기 사이 어딘가에서 간헐적으로 라디오가 작동되며 나오는 음악소리를 듣는다. 우선 이 대목에서 군복무 중 겪었던 일이 오버랩된다. 70년대 중반. 휴가를 나가서 모아놨던 돈으로 카세트 레코더를 하나 샀다. 워크맨이 나오기 전이었다. 거의 노트북 크기의 그 기기는 오직 녹음 테입만 작동시켜 주는 기능만 있었다. 영어회화 테입을 한 질 사서 귀대후 이어폰을 꽂고 들었다. 어느 날 밤. 카세트 테입이 들어있는 줄 알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별이 빛나는 밤'이던가? 귀에 익은 음악 소리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조곤조곤 들려왔다. 웬일인가 싶어서 열어봤더니 아무 것도 없었다. 플레이 릴축이 돌아가면서 떠돌아 다니던 방송 주파수를 불러 들인 것이다. 그후 영어회화는 뒷전이고 테입없이 플레이만 누르고 라디오를 들었다. 나의 소중한 비밀이기도 했다. 


아야미가 라디오 소리를 들은 것은 아마도 환청이 아닐 것이다. 복잡하게 뒤얽힌 음향기가 어드메쯤에서 그때 나에게처럼 떠돌이 주파수가 잡혔을 것이다. 나이가 지긋한 극장장은 아유미가 라디오 소리를 듣는다고 하자. 이렇게 답한다. "그렇다면 혹시 뒤에 남게 된 소리의 그림자가 아닐까요?"  아유미가 있는 곳은 오디오 공연장이다. 그럴 법한 이야기다. '소리의 그림자.'


독순술(讀脣術). 아유미에겐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독순술이다. 독순술은 원래 청각전선에 이상이 생긴 사람들이 자구책으로 키워지는 능력이다. 청력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예민해지는 부분이다. 아유미의 청력엔 이상이 없어보인다. 그래도 뛰어난 독순술을 발휘한다. 덕분에 멀리 있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아니 볼 수 있다. 


아야미는 우연한 계기에 한국 여인에게 독일어 교습을 받게 되었는데, 그 여인은 아야미의 이름을 부르기 싫다며, 독일어 교재 속에 등장하는 이름인 '눈먼 부엉이'라고 불러준다. 아야미는 '보이지 않는 식당'에서 직장 상사인 극장장을 만난다. 극장장이 만났다는 '김철썩'시인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작가가 문인들을 바라보는 시선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철썩'이라는 시인이 '철썩'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동기는 "자신이 타인을 설득하는 일에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말을 걸면, 그 대답으로 세상은 흙을 한 삽 떠서 그의 무덤에 퍼붓더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철썩, 철썩 흙이 그를 묻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아야미를 짝사랑하는 '부하'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 외에도 몇 사람이 소설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다분히 몽환적이다. 하나같이 다 외로운 사람들이다. 부하는 아야미를 '시인 여자'라고 부른다. 소설에는 이란 작가인 서덱 헤더야트의 [눈먼 부엉이(The Blind Owl)]이야기가 등장한다. '고통과 몽환으로 가득 찬 분위기와 염세주의 미학으로 이름 높은 작품'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마치 이 소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를 작가인 배수아가 함축적으로 소개하는 느낌이다. 소설의 모티브도 [눈먼 부엉이]에서 잡아 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소설을 읽으면서 길을 잃었다. 누가 누군지를 모르겠다. 그러나 문득 길을 잃지 않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잘 못 된 생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만 가만히 앉아서 생각해봐야겠다. 배수아의 이 소설은 심미적이다. 그냥 꿈꾸듯이 읽어야 할 것 같다. 마지막 문장은 책 말미에 해설을 붙인 김사과의 글이다. 


"왜냐하면 고독은 실패이기 때문이죠, 아야미."

 

그럴까? 고독이 실패일까? 그럼 실패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인데, 고독은 고독 자체로 그냥 두는 것이 좋겠다. 이 땅에 살면서 고독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고독하니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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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라일락 꿈꾸는돌 7
캐럴린 마이어 지음, 곽명단 옮김 / 돌베개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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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는 기본 생활권을 의식주(衣食住)로 표현합니다. 물론 이 단어가 그 중요도 순서로 붙인 것은 아니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론 순서가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주식의(住食衣). 먹고 입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방 막힌 공간이 없는 곳에서 생활한다는 것은(아니 생활 자체가 힘든 상황이지요) 참으로 비참합니다.


"그땐 몰랐다. 우리가 쫒겨나 삶이 송두리째 뽑히고, 정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될 줄은, 그때 프리덤 타운에 살았을 적, 우리 외할아버지 짐 윌리엄스는 일분 일초라도 짬만 나면 아름다운 꽃밭을 손질했다. 할아버지는 그 꽃밭을 좋아했고, 나는 그런 할아버지가 좋았다. 할아버지네 꽃밭은 내가 가장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화자 역할을 하는 주인공은 '로즈 리'라고 불리우는 흑인 소녀입니다. 로즈 리에겐 할아버지네 꽃밭이 에덴 동산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쫒겨난 것은 그럴 만한 잘못을 저질렀다치고, 로즈 리와 마을 사람들이 그 터전에서 쫒겨나는 것은 매우 상황이 다릅니다. 그 에덴 동산에서 할아버지가 특히 아끼는 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하얀 라일락'입니다. 


"이건 아주 귀한 나무야. 자줏빛 라일락은 흔해도 이렇게 하얀 라일락은 평생 가야 한번 볼까 말까 하거든."  


로즈 리는 정원사인 할아버지의 일터이기도 한 백인 가정 벨씨네 집에 할아버지를 따라 나섰다가 느닷없이 식사시중을 들게 됩니다. 그러다가 백인 여인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안 들었어야 하는 말이지요.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죠, 여사님. 프리덤타운을 어떻게든 해야 해요. 그러면 해결된다니까요."


프리덤 타운은 그 지역의 흑인 집단 거주지역입니다. 전혀 프리덤하지 못한 프리덤타운. 도미니크 라피에르의 '시티 오브 조이'가 오버랩 됩니다. '환희의 도시'라 불리는 지옥 같은 곳, 캘커타가 생각납니다. 


여인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 딱한 검둥이들이야 프리덤타운을 뜰 기회라고 좋아하지 않겠어요? 큰비만 내렸다 하면 샛강이 넘쳐 진창이 되니 지긋지긋할 만도 하잖아요! 우린 그저 거기보다 살기 편한 데로 옮겨 살게 해주는 것뿐이죠. 하긴 검둥이가 워낙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코흘리개 같으니, 이주하는 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고 구슬려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먹고 살만한 백인들은 흑인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공원, 도서관 등을 세울 꿈에 부풀어있군요. 

그 동안 프리덤타운을 밀어버리겠다는 소문과 분위기가 있었지만, 로즈 리가 백인 가정에서 들은 이야기를 할아버지에게 했고, 로즈 리는 아빠의 일터에 모인 흑인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줘야 하는 중책을 맡습니다. 들은대로 생각나는대로 이야기를 전하자 흑인들은 흥분하면서 대책 회의에 들어갑니다. 


백인들은 백인들대로 시장을 등에 업고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심한 말도 내뱉는군요. "딜런에서 삭막한 것을 제거하고 너저분한 것을 싹 없애자." 


자, 그렇다면 프리덤타운에 거주하는 흑인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죽어도 여기 남겠다는 그룹,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저항하겠다는 그룹, 또 다른 도시, 아예 먼 곳으로 이주하겠다는 마음들이 스몰스몰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세인트루이스에서 잠시 고향에 들른 로즈 리의 고모 수재나는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영국 시인 윌리엄 쿠퍼가 쓴 시 중에서 한 귀절을 읽어줍니다.


겁먹은 성도들이여 새로이 마음을 다지라

그대들이 그토록 무서워하는 저 구름은 

자비를 잔뜩 머금었으니  언젠가는 흩어져

그대들 머리에 축복을 뿌릴지니


이 와중에 KKK단(큐 클렉스 클랜) 수백 명이 프리덤타운을 행진하며 교회 앞에서 십자가를 불에 태우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잘 아시는바와 같이 kkk단은 백인 우월주의, 반유대주의, 인종차별, 반 로마 가톨릭교회, 기독교 근본주의, 동성애 반대 등을 표방하는 살벌한 미국의 극우 비밀 결사 단체이지요. 사태는 점점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로즈 리에게 할 일이 생겼습니다. 흑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강압적으로 몰고가는 분위기에 역행하는 백인 여성 퍼스 선생이 로즈 리에게 스케치북과 연필을 챙겨주면서 프리덤타운의 구석구석을 모두 그림으로 남기라고 지시합니다. 로즈 리가 그림을 곧 잘 그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어디서나 권력과 결탁한 무리가 그 뜻을 행하는 방법. 화재가 일어납니다. 어린 아이조차도 짐작할 수있는 방화로 추정되는 화마가 학교 건물을 덮칩니다. 한편 로즈 리는 스케치북을 들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군요. 아직 어린 아이이건만 본인이 안하면 안 되는 크나큰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 구석 저 구석 열심히 그리고 다닙니다. 사람들이 로즈 리가 그린 그림을 보고 누구네 집인지 단박에 알 수 있도록 충실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이의 시선과 마음과 손을 통해 그 참담한 상황을 그리게 만든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잠시 생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이의 눈을 통해서 본 상황이기 때문에 그나마 세심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는 생각이요. 어른들의 시선은 좌아니면 우로 치우치게 되지요. 감성보다 감정이 앞서지요. 흑인 해방 운동을 주제로 한  "어느 뜨거웠던 날들"(리타 윌리엄스-가르시아 / 돌베개)에서도 세 자매가 아이들의 얼굴에 잘 새겨지지 않은 채로 집을 나간 엄마를 찾아 나섰지요. 그 엄마는 흑인 인권 운동 단체인 '흑표범당' 당원이었지요. 


결국 프리덤타운은 지도상에서 사라집니다. 거주하고 있던 흑인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지고 맙니다. 흑인들은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었던 1920년대 상황입니다. 


이 책의 저자 캐럴린 마이어 이야기를 해볼까요? 1935년 펜실베이니아에서 피아니스트 어머니와 아마추어 배우 아버지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답니다.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했고, 여덟살 때 처음으로 소설을 썼답니다. 지금까지 50권이 넘는 책을 내놓았다는군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역사소설로 명성을 얻었고,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도 열정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합니다.


이 책은 저자가 1991년 2월 28일, 텍사스 주 덴턴 도시공원에서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을 때 초대받아 간 후, 기념비에 새겨진 글을 보며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실제 그 마을 이름은 '퀘이커타운'이었고, 책에선 '프리덤타운'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당시 기록과 자료를 열심히 뒤져서 나온 작품입니다. 1992년도에 이 책을 첫 출간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군요.


"이 책에 실린 등장인물들이 겪은 숱한 비극도 프리덤타운과 딜런에 얽힌 이야기도 70년 전 텍사스 주 넨턴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썼음을 밝혀둔다."


흑인 대통령이 연임하는 미국이란 나라지만, 흑인들의 인권은 아직도 채워지지 못한 부분이 더 크지요.  빈부의 격차와 더욱 공교해지는 공권력 앞에 무력감만 느끼고 살아야 하는 우리네 서민들 역시 같은 입장인 듯 합니다. 새로운 도시 건설과 계획 앞에 힘없이 무너져 내려야하는 민중들의 인권은 어디서 찾아내야 할런지요. 이 땅에도 여전히 부와 권력만이 지배하는 '폭력사회'가 만연해있으니 참으로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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