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그대를 꽃에 비하리
전민정 지음 / 창조문예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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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발레리가 시인(詩人)을 표현하길, “정신이 살짝 엿본 데 불과한 것을 그들의 말로 사로잡는 일” 이라고 했다. 혹자는 “시(詩)는 소중한 삶의 노래며, 자연의 신비에 대한 찬미, 또한 우리가 꿈꾸는 세계의 아름다운 표상이다”라고 표현했다.

전민정 시인의 시는 참 맑고 깨끗하다. 탁하지가 않다. 시를 읽다보면 그대로 그림이 그려진다. 시를 따라가다가 발에 툭하고 걸리는 걸림돌이 없다. 

“문득 둘러본 세상이 / 시로 가득 합니다 / 서둘러 가을 낙엽을 밟으며 / 산길을 걷노라면 / 발등에 스스로 떨어지는 이름들이 / 내 안에서 길을 만듭니다.”  (시집 ‘서두’에서..부분)

 시인의 눈에는 모두가 시의 재료요, 향기이다. 때론 발밑에 만들어진 길보다, 내 안에서 만들어진 길이 더욱 길고, 깊다. 우린 그 안에서 모두 길가는 벗이자, 나그네이다.

“아직은 작은 그릇 / 투박하기 그지없는 상념들..”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상념의 편린들은 시인이 걸어온 삶의 여정과 걸어가고 싶은 길들을 밝게 비춰주고 있다.

 

“위로 위로 솟아서 / 하늘과 가까운 너 / 나는 너에게 귀 기울여 / 천상의 소리를 듣는다 //
 긴 겨울 모질게 견딘 후 / 두 손 모으고 솟아오른 겸손의 기도 //
 그러나 어찌하랴 / 삶의 빈 공간 채우지 못하고 / 마디로 남겨진 내 상처들 //
 변치 않는 푸르름의 길을 따라 / 사색의 깊은 숲에 이르면 //
 댓잎소리에 잠시 멈춘 발길 / 나는 긴 호흡을 한다”      (‘대나무 숲으로 간다’ - 전문)
왜 아니랴, 누군들 마디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마디 덕분에 다시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산등성이와 어깨를 마주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 빈 공간이 시인은 내내 아쉽다. 그래서 이렇게 시를 쓰면서 그 공간을 채우고 싶은 모양이다.

“생각만 해도 / 왜 이토록 간절해질까 / 네 뒷모습을 보며 / 기도하는 나날 //
 고열에 들떠 응급실에 실려 갈 때 / 달려가는 맨발 / 하늘은 온통 노란 절망 이었다 /
 그런 나를 책망하시던 음성 / 주님은 늘 너와 함께하셨다 //
 이제는 까치발을 올려도 닿지 않을 만큼 /
 훌쩍 커버린 아들아 //
 숱한 세월이 지나가도 / 네가 손을 뻗으면 / 
 나는 항상 그 곳에 있다.”         (‘나는 항상 그곳에 있다’ - 전문)
시인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응급실에 실려 가던 아들을 염려하던 엄마의 마음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주님의 마음이다. ‘숱한 세월이 지나가도 / 네가 손을 뻗으면 / 나는 항상 그 곳에 있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위안을 받는다. 아들이 엄마의 사랑을 의심 안하듯 시인 역시 어떤 위기상황과 절망적인 여건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 또한 시인의 손을 굳게 잡아 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

“친구가 그리운 날에는 / 남한산성에 오릅니다 /
높게 쌓은 돌탑위에 / 내 마음도 하나 얹어 두고 옵니다 /
계곡의 젖은 흙내음 맡으며 / 우리가 함께 걸었던 길은 /
오늘도 그대로입니다//
길가에 흘러내린 돌 하나 /
무너지는 내 마음인양 눈에 밟혀 /
슬며시 집어 다시 올려놓습니다 /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
안부 전하듯 //
슬프게 내려앉은 산 그림자 기척에 /
너무 오래 무심했던 속내 들킨 듯 /
쭈뼛쭈뼛 산을 내려옵니다.”            (‘너 그리운 날이면’ - 전문)
 살아가며 누군가 문득 그리운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삶은 퍽이나 건조하리라. 그것은 아직도 지나친 자기애와 아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른 시인의 시집에서 보았던 시가 한 편 그려진다. 시인이 지하철역에서 20여년 만에 반가운 얼굴을 마주쳤다. 그러나 어쩌랴..서로 손 한번 맞잡아보곤, 언제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없이 그리 스치고 지나갔단다. 이젠 다시 만날 기회와 시간이 정말 얼마 안 남았는데 하는 마음과 함께..
‘슬프게 내려앉은 산 그림자 기척’..석양이 지는 모습은 슬프다. 발길도 빨라진다. 어두워지는 것은 잠깐이기 때문이다.

“봄날은 / 햇살을 안고 / 내게로 다가오는 / 아픈 사랑이다 //
 움 돋는 기다림으로 삭은 / 나를 날려버리고 //
 시샘하는 바람 다독여 / 햇살을 부른다 //
 목련이 흔들리는 어느 날 / 모든 것 다 잃는다 해도 /
 지금 내 봄날은 / 행복한 오후다.”   (‘지금 내 봄날은’ - 전문)
봄은 누구에게나 희망이 될 수 있다.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도 기지개를 펴며, 숨을 고르는데 난들 그리 못할 이유가 없다. 봄은 무엇인가 기대되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 느낌을 꽃이 먼저 전해준다. 지금 내가 가진 것, 내가 사랑했던 존재들이 사라져간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현재라는 시간이다. ‘내 봄날은 간다.’가  아닌, 내 봄날은 행복한 오후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행복은 나와 함께 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 마주서면 / 내가 가진 것은 검불뿐 / 안다고 믿었던 것들은 /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 목발 딛고 일어서서 걸으려하면 /
 세상이 수없이 태클을 걸어오고 / 내 절망은 거친 바람 소리 같았습니다. //
 마주치는 수많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 이유도 계산도 조건도 없이 /
 오로지 듣기만 하는 귀가 되도록 / 높은 곳을 향해 두 손을 모았습니다.//
 살아가면서 눈뜨는 지혜 / 굳게 닫았던 마음의 문고리 / 이제야 조금씩 열어봅니다.
                                          (‘이제야 조금씩’ - 전문)
때로 우리 몸이 아파서 환자가 될 때 배울 것은 겸손이다. 그렇지 못하고 몸 뻣뻣 마음 뻣뻣한 채로 살아간다면, 참으로 딱한 일이다. 시인은 ‘죽음의 문턱에서..검불하나 밖에 가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모든 것을 비우고 내려놓는다. 검불하나가 나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한발 한발 내딛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할 만큼 힘든 걸음을 걷던 낙타의 등위로 새 한 마리 지나가며 떨어뜨린 깃털하나가 그를 무릎 꿇게 한다는 말이 있다. 검불하나의 위력이 그렇게 나타날 때도 있지만, 그 실체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하찮은 존재. 결국 내가 소중하게 생각되었던 것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시인은 깨닫는다.

‘말을 하는 것이 지식의 영역이라면, 듣는 것은 지혜의 특권이다.’ 라는 말이 있다. 어둠의 터널을 지나며 ‘오로지 듣기만 하는 귀’가 나의 주체가 되는 삶을 계획한다. 그리고 그동안 닫았던 마음의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글쓴이의 심상(心想)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장르는 시(詩)라고 생각한다. 전민정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기억 속 편린들과 삶을 바라보는 겸허함, 믿음, 내려놓음 등을 느낄 수 있다. 좋은 시를 읽는 것은 우리 마음 자락, 감성지대를 개척하는 길이기도 하다.
시인의 다음 시집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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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용법 - 한 편집자의 독서 분투기
정은숙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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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책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맡는다.
감성에는 지적인 자극이 반드시 필요하다. 삶이라는 감각을 질료로 하여 지적인 자극 끝에 감성이 만들어진다.”

원초적인 질문을 해본다. 책은 왜 읽는가?
저자의 말을 옮겨본다. “책은 인류 진화의 산물이다. 책은 나날이 변화하고 있다. 그것은 고착되는 법이 없이 살아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에서 호흡하며 몸을 뒤척이고 있다. 특히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책이 주는 균형 감각이다. 한 두 권의 책을 읽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책을 섭렵하고 얻은 지식은 지혜가 되어 삶을 보는 균형감각을 준다. 여기에서 말 그대로 건전한 비판의식이 싹튼다. 또한 고전이나 문학작품은 조악한 이론이 보여주지 못하는 삶의 진경들을 펼쳐 보인다. 이것은 사이비 이론, 남이 불러준 이론, 한두 권의 책에 치우친 이론을 ‘물리치는 독서’를 가능케 해준다.”
이 말엔 전적으로 동감한다. 나는 다른 북 리뷰에서 독서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피력하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좀 덜 잘못하고, 덜 후회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삶을 책에서 배우고 있다.”

저자 정은숙은 대단한 책 마니아이다.
26년차에 이른 편집자이자 〈마음산책〉대표.  전주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1985년 편집자로 출판계에 입문했으며, 2000년〈마음산책〉을 창업하여 오늘까지 책에 대한 고민과 사랑을 껴안고 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책이 지닌 아우라를 극대화하면서도 너무 무겁지 않은, 정보전달의 효능은 최대화하면서도 그 모양새와 품위를 다시 보게 되는 책을 펴내려고 애쓰고 있다. 책을 만드는 일은 책을 읽는 작업의 연장이다. 원고를 읽으며 완성될 책의 형태를 꿈꾸듯, 세상의 책들을 읽으며 새로운 삶을 꿈꾸었다. 책과 떨어져 살 수 없는 운명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렇듯 책 모서리를 접고 포스트잇을 끊임없이 붙인결과, 『책 사용법』 을 쓰기에 이르렀다.

1992년〈작가세계〉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후 시집 『비밀을 사랑한 이유』(1994), 『나만의 것』(1999)과 편집자 세계를 그린 『편집자 분투기』(2004)를 펴냈다.  

우린 보통 ~사용법, 매뉴얼에 무관심한 편이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하는 신기한 제품이 아닌 이상 잘 읽지도 않거니와, 정작 필요해서 찾으려면 그땐 어디다 두었나? 찾느라고 법석이다. 이 책의 제목은 책 사용법이다. 책을 사용하기 위해선 책이 곁에 있어야한다. 책도 없고, 안 읽어도 사는데 별 지장 없으니 책 사용법도 필요 없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럼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우선 책 사용법을 한 번 읽어보자. 그리고 책과 친구해보자.
“이 책에서 나는 책의 사용에 대한 많은 길들을 보여주고 싶다. 특히 이 글을 쓰는 동안 내가 읽었던 책들의 이야기를 많이 삽입하여 독자가 직접 그 책들을 찾아보게 되기를 바란다. 그런 과정에서 어슴푸레 우리 책읽기의 외연을 넓힐 수 있기를 감히 꿈꿔본다. 나는 이 책읽기를 통해, 또 책을 사용하면서 얻은 많은 진실을 전해보려고 행간에 꿈을 싣는다.”

책의 기능이라는 타이틀 글들 중 ‘치유로서의 책’에선 저자가 무엇이라고 하나 들어본다.
“책이 병을 낫게 한다. 나는 주위에서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을 몇 보았다. 어느 직장인은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대도시를 떠나 지방에 정착하고 긴 시간 열차를 타고 다니면서 ‘노자’를 읽기 시작했는데, 신통하게도 그 많은 병들이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맑은 공기와 성큼 가까워진 대자연도 분명 큰 영향을 미쳤을 테지만, 나는 그가 절박한 심정으로 읽은 ‘노자’가 마음에서 싹튼 병을 낫게 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 자신 또한 이렇게 믿고 있다.”

“현실의 두꺼운 벽을 느낄 때마다 나는 책을 펴든다. 현실 도피? 아마 그런 점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고 많은 현실 도피 방법보다 더 쉽고 또 현실 복귀도 빠르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책을 잘 읽기 위한 계명’ 중 하나를 옮겨본다.
“책읽기의 멘토로서 고전만 한 책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고전을 읽지 않고 독서의 기초를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건조한 현실을 위한 책들을 의무적으로 봐야 했을 때 나는 그 책읽기가 끝나자마자 고전을 펴들어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다. 즉 책으로 책을 해독하는 행위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런 고전 읽기를 통해 나는 책읽기의 상위한 층위들을 파악하면서 또 다른 책읽기의 차원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 책에 대한『로쟈의 인문학 서재』이현우의 짧은 글이 책 뒤표지에 실려 있다.
“인생은 짧고 책은 너무 많다. 거의 무한이다. 책에 대한 사랑은 덩달아 무한한 사랑이고 무한에 이르는 사랑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오랜 세월동안 ‘꼬깃꼬깃’ 품어온 책 사랑이 다림질을 해놓은 것처럼 단정하게 펼쳐져 있다. 알맞게 재단해놓지 않았다면 무한히 펼쳐졌을 사랑이다. 아마도 기침만큼이나 숨길 수 없는 사랑이었으리라.
하여 『책 사용법』을 『책 사랑법』으로 고쳐 읽는다. 연애에도 가이드가 필요하다면, 이 책이 바로 그런 가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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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용기 도모생애교육신서 11
폴 틸리히 지음, 차성구 옮김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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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용기는 올바른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생명력의 표현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존재의 용기는 생명력의 기능이다. 생명력이 감소하면 결국 용기도 감소한다. 생명력을 강화한다는 것은 존재의 용기를 강화한다는 의미이다. 신경과민적인 사람들과 신경과민적인 시기에는 생명력이 부족하다. 그들의 생물학적인 실체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몸은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마음은 몸을 따라간다. 따라서 심신(心身)은 함께한다.
옛사람들은 ‘용기’에 대해 어떻게 정의를 내렸을까? 용기는 하나의 윤리적 실체(reality)지만 인간 실존의 전 영역에, 그리고 존재 그 자체의 구조 속에 뿌리 내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용기를 윤리학적으로 이해하려면 먼저 존재론적으로 고찰해야한다고 한다.

저자 폴 틸리히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린 철학가이며 신학자이다. 1886년에 독일에서 출생. 1912년에 루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나치에 의해 교수직을 박탈당한 1933년까지 독일 여러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라인홀드 니버를 통해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1933년부터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한 후 퇴임하여 하버드 대학교의 석좌교수로 초빙되었다. 1962년에 하버드 대학교를 퇴임하고 시카고 대학교로 옮겨 1965년 사망하기 전까지 신학을 가르침.

폴 틸리히는 그를 따르던 신학자들에게서 ‘신학자들의 신학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러한 호칭은 사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국내의 시인 한 사람이 시를 읽지 않는 사회 분위기와 읽히지 않는 시만 쏟아내는 시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시는 더 이상 시가 아니다. 시인들끼리 주고받는 메시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저자는 신학자들끼리 주고받는 차원에서 벗어나 기독교 신학과 철학의 많은 부분에 접근하지 못하고 관련성을 찾지 못하던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저자는 새롭고 역동적인 신학용어들을 창조하여 현대 사회가 지닌 불안의 위기를 진단했고, 신학을 학문에서 해방시켜 현대적인 담론 속에서 새로운 청중과 새로운 관련성이라는 두 영역에 전달해주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책은 1950년대에 예일 대학교에서 테리 재단(Terry Foundation)의 후원으로 열린 몇 편의 강연내용으로 시작되었다. 이때는 미국문화와 종교생활이 가장 역설적인 시기라고 한다. 교회의 출석률이 급증하고 교회 건물을 신축하는 분위기가 미국 전역에 전염병처럼 확산되었다. 타임(Time)지는 이를 미국의 종교적인 ‘거대건물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저자는 이 당시 미국이 누리고 있는 신앙적인 부흥의 깊이나 영성에 대해 그리 확신하지 못했다. 이를 저자는 “종교속의 상실된 차원”이라고 표현했다.

저자는 ‘용기’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자기긍정, 즉 자아가 자신을 긍정하려는 것을 방해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자기 긍정이라고 한다. 용기와 대립되는 것은 두려움과 불안이다. 저자는 불안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운명과 죽음의 불안〉〈공허함과 무의미함의 불안〉〈죄의식과 정죄의 불안〉등이다.

불안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신학과 의학 사이에 있는 협력의 원리 가운데 몇 가지는 존재론적 분석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실존적인 불안은 의사가 의사로서 관심을 기울일 사안 - 비록 그가 충분히 그것을 알고 있어야하지만 - 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모든 유형의 신경과민적인 불안은 목회자가 목회자로서 관심을 기울일 문제 - 비록 그가 충분히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하지만 - 또한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목회자는 실존적인 불안을 그 자체 속으로 이끌어 들이는 존재의 용기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고, 의사는 신경과민적인 불안을 제거하는 존재의 용기에 관한 질문을 제기해야한다고 한다. 저자는 불안증상에 대응하는 의사의 기능과 역할보다 목회자의 그것에 비중을 높이 두고 있다. 따라서 온전한 목회의 기능은 자신의 기능은 물론이고 의학적인 기능까지도 포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극히 타당한 이야기긴 하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책의 마지막 챕터는 “용기와 초월”이다.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라고 되어 있다. 용기는 또한 비존재의 실제에도 불구하고 행하는 존재의 자기 긍정이라고 한다. 그것은 개별적인 자아가 포괄적인 전체의 일부로서 혹은 개별적인 자아성 속에서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비존재의 불안을 떠맡는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용기는 언제나 위험을 내포하게 된다. 용기는 존재의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은 비존재를 초월하는 힘이어야 한다. 비존재는 운명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경험되며, 공허함과 무의미함의 불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한다.

저자는 마르틴 루터를 예로 들고 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 체계속의 객관적이고, 양적이고, 비인격적인 요소들을 공격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위해 싸웠다. 그에게서 나타난 확신의 용기는 기독교 사상사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루터의 모든 작품, 특히 그의 초기 저작들은 그와 같은 용기로 가득 차있다. 그는 계속해서 트로츠(trotz),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가 경험한 모든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불안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자기 긍정의 힘을 이끌어냈다.  

저자는 ‘존재의 용기’에 대해 책 말미에 이렇게 표현했다. 이 책의 내용을 매우 깊고,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재의 용기는 의심의 불안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져 버린 때에 나타나신 
         

                                하나님 안에 뿌리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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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지식 - 책의 바다를 항해하는 187편의 지식 오디세이
고명섭 지음 / 사계절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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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나를 믿으라.!” 존재를 최대한 풍요롭게 실현하고 최대한 만끽하기 위한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대양으로 너의 배를 띄워라! 너 자신에게 필적할 만한 자들과의 대립 속에서 살아라! 너 앎을 찾는 자여! 지배자나 소유자가 될 수 없다면, 약탈자, 정복자가 되어라.”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너 앎을 찾는 자여!’  라는 말이 강한 자극을 준다. 살아간다는 것은 앎을 알아가는 과정이자, 그 앎을 실천해가며 수확을 얻는 길이 아닐까? 설령, 수확이 없으면 어쩌랴. 과정 자체가 삶의 진정한 모습이거늘.. 
 

이 책은 『한겨레 신문』문화부 출판 담당기자로 있는 저자의 북 리뷰 모음집이다.
제목 『즐거운 지식』은 니체의 『즐거운 학문』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저자는 이미 『광기와 천재 - 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인물과 사상사), 『담론의 발견 - 상상력과 마주보는 150편의 책 읽기』 (한길사), 『지식의 발견 - 한국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그린비)외 여러 권의 책을 낸바 있다.

“앎의 기쁨, 배움의 즐거움을 동력으로 삼아 인식의 항해에 나섰던 것인데, 그 몇 년의 항해 기록을 보니 선상에서 우아한 사유의 만찬을 즐겼다기보다는 굶주린 하이에나가 짐승의 고기를 탐하듯 약탈자의 심정으로 게걸스럽게 지식을 물어뜯었음을 알았다. 그렇게 뜯어먹는 중에 앎의 유혹이 삶 자체를 낚아채지 못하도록 견디는 오디세우스의 저항법도 익혀야했다. 삶이 풍요로워지지 않는다면 앎의 욕구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갉아먹는 탐욕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절감한다.”  라고 서문에 적고 있다. 겸양의 표현을 했지만, 앎을 향한 항해를 떠나고 싶어 하는 항해자들에게 가이드 맵을 제공해주고 있다.

총 187편의 리뷰가 실려 있다. 크게 세 파트로 나누어진다. 「사상의 바다」, 「인문의 바다」, 「교양의 바다」. 각 바다엔 5~6개의 섬이 있다. 저자의 독서력과 리뷰를 쓰는 내공이 상당하다. 역시 북 리뷰를 쓰는 내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다. 책을 좀 읽는다하는 내게 생소한 책이 많다. 그 이유는 내가 당장 먹기 좋고 소화 잘될만한 것만 찾았던 데 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금 독서의 항해를 위한 체계와 철저한 각성을 하게 되는 다짐을 한다. 니체의 말대로 ‘지배자나 소유자가 될 수 없다면, 약탈자, 정복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을 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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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비밀 박필교수의 말 시리즈 6
박필 지음 / 행복을만드는사람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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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생활에서 ‘감사’가 빠지면, 신앙인만 남는다. 종교인만 남게 된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내게 구하라”고 하셨다. 이에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자, 하나님은 지혜뿐 아니라 구하지도 않은 부와 영광도 함께 주셨다. 어떻게 이런 복을 주셨을까?

그 비밀은 ‘감사’에 있다.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게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왕상 3:5~6)

보통은 누가 우리에게 ‘너 무엇 줄까? 너 위해서 무엇을 해주면 좋겠니?’ 했을 때..‘음~ 난00이 좋아요. 00이 필요해요.’ 하지만 솔로몬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 전에 ‘아버지 다윗의 대를 이어서 저에게까지 왕위를 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에 감사합니다’ 라고 답을 드렸다. 그리고 기껏 구한 것은 우리가 너무도 좋아하는 물질의 축복이 아닌 지혜를 구했다. 하나님이 좋아하실만하다. 구하지 않은 것도 주시고 싶어하실만하다.

저자 박필 교수는 호주 시드니에서 다년간 영성과 치유, 가정사역전문가로 사역했으며 20여 년 간 성경 속에 ‘말’의 권세와 비밀을 연구하여 생명언어학을 개척하여 확립하였다고 한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출간했다. 

저자는 응답과 축복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응답은 구한 것을 받는 것이요, 구한 만큼 받는 것이다.
축복은 구한 것에 구한 것 이상으로 받는 것. 나아가서 구하지 않아도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귀한 선물을 열수 있는 키는 역시 ‘감사’다.

스펄젼(Charles H. Spurgeon)은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이 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계속 형통이 찾아온다.” 고 했다. 모 가수는 그가 유명해지자 인터넷에서 수많은 안티팬들이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홈페이지에 올린 안티팬의 글에 “좋은 지적을 해줘서 감사하다. 더욱 노력하겠다.”며 감사의 글을 올리곤 했는데, 그 안티팬이 모두 돌아서서 진짜 팬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감사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뿐 아니라 또한 사람을 감동시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감사는 나의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의 독소를 제거하여 사랑과 온유와 신실함으로 변화시키는 강력한 해독제다. 
 

바울의 감사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2)며 어떤 환경에서도 감사하며 만족하는 사람이 되었다. 감사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빈부에 처하거나 비천에 처하거나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함을 누린다. 바울은 깊은 영성, 최고의 영성에 도달한 사람이었다.

스펄젼은 “하늘을 향한 감사, 그 자체가 기도”라고 했다. 영국의 종교가로 유명한 기도의 사람이었던 윌리암 로우(Law William)는 “위대한 성자는 기도를 많이 했다든지, 금식을 많이 했다든지, 혹은 자선을 많이 베풀었다는 사람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감사하는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 된다.

감사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며, 
 

 

감사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닮게 된다.

감사하는 사람이 최고의 영성에 이르게 된다.


 

“시애틀 근교의 작은 교회에 간 적이 있다. 흑인교회라 아주 활기찬 예배를 드리는데 특이한 것은 예배시간에 목사님의 인도로 성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난 한 주간 생활 속에  감사했던 이야기를 짧게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모두 기쁨으로 한 주간의 감사이야기를 내어놓고 또 함께 기뻐하며 박수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감사를 보며 함께 감격에 빠졌었다.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 감사를 받고 싶어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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