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사상선집
데이비드 흄 지음, 김혜숙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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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단순히 알아들었다는 뜻인가?

그 앞뒤 사정까지도 생각이 보태진다는 뜻인가?

 

흄에 의하면 인간 이성이 다루는 모든 탐구 대상들은 근본적으로 두 부류, 즉 관념들의 관계(Relations of Ideas)를 다루는 것들이거나 사태(Matters of Facts)를 다루는 것들이다. 관념들의 관계에 해당하는 것들로는 기하학, 대수학, 그리고 산수와 같은 학문이 있다. 즉, 직관적으로나 논증적으로 긍정되는 것들에 대한 모든 주장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사태는 어떤가? 관념과 같은 방법으로 확인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갖는 그 진리에 대한 확실성 또한 그것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관념들의 관계에 대한 탐구가 갖는 확실성만큼 크지 않다. 따라서 사태에 관한 모든 추론은 인과 관계에 기초하고 있는 듯 하다고 한다.

 

“인과관계에 대한 지식은 추론에 의해서 선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특정한 대상들이 서로 지속적으로 결합된다는 것을 발견할 때 얻어지는 경험으로부터 생긴다. (......) 어떤 대상이든 감각에 나타나는 성질들만 가지고서는 대상을 산출해 낸 원인을 밝혀낼 수 없으며, 그 대상으로부터 나올 결과도 밝힐 수 없다. 경험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이성은 사실적 존재나 사태에 어떤 추론도 해낼 수 없다.”

 

여러 관념들은 세 가지의 관념 연합의 법칙에 의해 섞이고 복잡해지며 확장된다. 연상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이 세 가지 법칙은 유사성의 법칙, 근접성의 법칙, 그리고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다. 연상 법칙이란 객관적 실재 세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느낌에 의존한 법칙이다. 흄은 인간의 앎 전부를 인상들과 관념들, 그리고 연상 법칙에 의한 관념들의 연합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의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진리는 주관적인 것, 심리적인 것이 된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1711년 에든버러의 스코틀랜드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을 일찍 여윈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고 교육받았다. 법률가 가정 출신이고 교육열이 높았던 그의 어머니는 흄이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으나, 그는 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고, 늘 그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어 했다. 이런 바람으로 흄은 늘 글쓰기에 게으르지 않도록 자신을 채찍질했고, 그 결과 많지 않은 나이인 25세에 대작 《인간 본성론》을 완성하게 되었다.

 

흄이 역사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역사 공부의 당위성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시대나 장소를 초월하여 거의 모두 같고 역사는 어떤 특정 시대나 장소에서도 특별나고 새로운 사건이 벌어진 바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인간의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본성을 발견하는 데에는 역사가 주로 많이 이용된다. 역사는 온갖 다양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여러 정황에서 묘사해주고,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고 인간의 행동과 행위의 규칙적인 발생 원천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자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흄은 인간의 본성은 그 원리들이나 작용들에 있어서 늘 여전히 동일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된다고 한다. 같은 동기는 항상 같은 행위를 낳는다. 동일한 사건들이 같은 원인들에서 생긴다. 이는 여러 가지로 얽혀 있으며,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야망, 탐욕, 이기심, 허영심, 우정, 관용, 공공 정신 등과 같은 정념은 태초부터 계속해서 인류에게서 관찰되는 모든 행위와 모험심의 원천이다.

구조주의 문예 이론가이자 사상가인 츠베탕 토도로프는 그의 저서 『민주주의 내부의 적』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치의 범죄, 특히 강제수용소의 실상이 밝혀졌을 때, 서구 여론은 자신들을 나치즘의 괴물과 구분 지으려고 애썼다. 오늘날까지도 역사가, 소설가, 영화감독이 나치 주모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동기로 그러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할 때마다 항의가 빗발친다. 그래서 누군가 과거사건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심지어는 단순히 당시의 맥락을 고려하기만 해도 그가 사건을 변호한다고 선언해버린다. 히틀러가 우리와 같은 특징을 가진 인간이었다는 생각에 우리는 분노한다. 히틀러가 저지른 악은 끔찍하다. 사람들은 그를 우리의 본성과 역사의 외부에 있는 비정상적인 괴물로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듣고 싶지 않더라도 소수자의 목소리가 정반대의 실상을 명백하게 증언한다. 세계대전 때 자유프랑스 전선에서 싸운 로맹 가리는 첫 소설에서부터 적들이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인간성을 지녔다는 사실과 인간들의 잔인함을 고발했다. 그의 소설 『튤립』에서 할렘의 흑인 낫(Nat) 삼촌은 “독일에서 범죄자는 바로 인간이야.” 라고 말하며 소설 『절반』에서는 알제리인 라통이 친구 뤽에게 “너 이 세상에 독일 놈들이 몇 명이지 알아? 30억이 넘어.”라고 말한다.

 

흄은 이 책에서 철학의 여러 종류에 관해, 관념의 기원과 연합에 관해, 이해력의 작용에 대한 회의적 의심에 관해, 불확실한 것들에 대한 회의적 해결에 관해, 개연성 그리고 필연적 연관성이라는 관념에 관해, 자유와 필연성에 관해, 아카데미 철학 혹은 회의적 철학에 관한 깊은 내용들을 비교적 쉬운 설명과 문체로 우리의 사고(思考)를 인도해주고 있다. 역자 김혜숙 교수는 이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는 칸트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칸트 자신이 술회한 바처럼 그를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이 책은 영어로 된 철학 저술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을 만큼 중요한 저서이므로 누구나 반드시 읽어 봐야할 필독서라고 추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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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경제학 - 경제학자들도 모르는 부동산의 비밀
전강수 지음 / 돌베개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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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와 관련된 문학작품은 국내에도 여럿 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은 책이 한 권 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이다.

 

존 스타인벡의 나이 37세 때 출판된 〈분노의 포도〉는 그의 열한 번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출간과 동시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작품 속에 나오는 죠드 가족의 이주과정은 작가가 실제로 동행한 길이다. 그는 철저한 현장체험으로 이 글을 집필했던 것이다.

〈분노의 포도〉가 발표된 1930년대는 1928년의 경제공황의 뒤를 이어서 세계적으로 대불황이었던 시기이다. 이러한 시대상황 때문에 정치가뿐 아니라 문학자, 일반 대중도 당연히 경제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농촌의 생활상은 심각했다. 오클라호마의 땅을 빼앗기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온 25만의 빈농들의 문제는 커다란 사회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그들은 더러운 오우키들이라고 멸시를 당하고 있었으며, 온 식구가 나가서 해가 저물도록 쉬지 않고 일을 해도 겨우 한 끼를 먹기 힘들 정도였고 그나마 그런 일자리라도 걸리면 다행이었다. 이렇게 시달리는 오우키들의 굶주림은 차차 분노로 변했고 캘리포니아의 벌판에 포도는 주렁주렁 열매를 맺었건만 이주농민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분노만 무르익더라는 이야기다.

 

분노의 포도는 여전히 열리고 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은행잔고는 두 번째다. 부동산 소유의 많고 적음이 부의 판단이다. 부동산도 강남땅이냐 빌딩이냐 저 산간벽지의 임야냐에 따라 달라진다. 많이 가진 자를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내 삶이 더 팍팍해진다. 비교하는 것은 싫다. 단지 그들이 페어 플레이를 하지 않는 것이 맘에 안 든다. 비중 있는 공직자 청문회 때 단골메뉴는 부동산 투기와 위장 전입이다.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은 ‘땅’이다. 그 땅도 보통 땅이 아니다. 귀하신 ‘몸 땅’이다. 곧 개발 될 예정지(일반에겐 공표가 안 된)는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본인 이름으로 매입하면 티가 나니까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줘서 사거나 정보 제공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다. 이런 문제가 문제인 것이다.

 

저자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막중한 책임과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무지함과 어긋난 욕심에 의해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시장만능주의자’와 ‘가격규제만능주의자’들이 그들이다. 이 두 부류 모두 몹시 맘에 안 든다. 한 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한 쪽 면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있음이 훤히 보인다.

 

“지식인들의 무관심과 침묵은 사회가 내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음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징후인데,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보이고 있으니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이 책을 통해 ‘헨리 조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헨리 조지라는 걸출한 경제학자는 고전학파의 토지이론을 완성했다. 헨리 조지는 당시 영미권에서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에 버금가는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헨리 조지의 엄청난 영향력에 위협을 느낀 미국의 막강 지주세력이 당시 엘리트로 꼽히던 경제학자들을 고용해서 헨리 조지 경제학을 무너뜨리는 작전을 전개했다. 고매한 학자마저도 해결사로 움직이게 하는 돈의 위력이다. 미국에서 헨리 조지의 휴매니티 정신이 가득한 토지이론을 뒤집어엎고 일어선 것이 신고전학파이다. 이들은 주류경제학에서 토지를 빼버리는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그 기세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를 위한 일등공신이다.

 

 

“토지의 천부성(토지는 창조주가 인류에게 공짜로 준 것이다)과 공급고정성(토지의 공급은 일정하다)은 인류가 토지를 어떻게 다루어야 좋을지 가르쳐준다. 토지는 일반 재화나 자본처럼 개인에게 절대적. 배타적 소유권을 인정해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 옳다.”

 

토지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토지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다. 단지 시간이 문제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토지의 가격이 전체 경제에 막강한 힘을 휘두른다는 점에 있다.

“토지 소유와 토지 가치는 소득과 자산의 분배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토지와 부동산 가격의 변화는 소비, 투자, 금리, 임금 등 주요 거시경제 변수들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경기변동에 큰 영향을 준다. 토지를 이용목적이 아니라 투기목적으로 보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것은 토지 이용 양태와 환경에 영향을 끼친다.”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들어서는 정부마다 돌려막기식의 단기성 대책 말고 장기적으로 상생의 묘안이 없을까? 저자는 이런 의견을 제안한다.

 

“토지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서는, 토지의 사용권을 민간에게 부여하되 사용료를 공적으로 징수하면 된다. 토지의 수익권을 공공이 갖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지가의 문제나 토지 불로소득 같은 문제들은 바로 사라진다. 토지 매매시장은 극도로 위축되거나 소멸하겠지만, 토지 임대시장이 남아서 작동하기 때문에 가격을 매개로 하는 토지의 효율적 배분은 아무런 문제없이 이뤄진다. 뿐만 아니라 투기 목적으로 토지를 보유하려는 사람들이 사라지게 되고, 토지 사용자는 그때그때 사용료를 납부해야 하므로 토지를 최선의 용도로 사용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토지가치공유제(토지가치세제와 토지공공임대제)는 토지의 사용권을 민간에게 부여하되 사용료를 공적으로 징수하는 것을 가능케하는 대표적인 수단이다. 이런 제도야말로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답게 만드는 시장친화적인 토지제도가 아닌가?”

 

이 땅에 회복되어야만 할 정의 중에 토지정의가 우선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소위 좋은 땅, 괜찮은 땅은 모두 죽은 땅이다. 거대한 건물과 고층 아파트에 짓눌려있다. 코르타르로 빈틈없이 메워져있다. 도회지 땅의 소유자는 땅이 돈으로 보인다. 그러니 들풀이 자라는 것조차도 용납 못한다. 땅은 이렇게 절규한다.

 

“나 숨 좀 쉬게 해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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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코 (천줄읽기) 지만지 고전선집 486
서보 머그더 지음, 정방규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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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소설은 열세 시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이다. 주인공 어누슈커가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6시 45분에서 부다페스트행 밤 기차가 떠나는 저녁 8시까지. 어누슈커는 순간순간 무엇과 마주칠 때마다 연상되는 과거의 묵은 씨앗들이 마음속 깊은 잠에서 깨어 새롭게 살아난다.

 

이 책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상투적인 예술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와 함께 갈등하고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을 깊은 이해로 그려 심리학의 연구 대상이 될 만한 인물들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헝가리의 작가로서 외국에 많이 알려진 여성 작가 서보 머그더의 작품. 서보는 시, 아동문학, 드라마, 여행기, 에세이 등 문학전반에서 업적을 남겼다.

 

글의 전개는 과거와 현재가 경계 없이 넘나든다. 그래서 여간 주의를 하지 않으면 다소 혼란스럽다. 엄마의 장례식 때문에 고향을 내려온 주인공이 느닷없이 학교로 뛰어간다.

“그녀는 달려갔고 비스듬히 총총하게 땋은 머리는 등 뒤에서 흔들거렸다. 그녀가 학교의 문을 막 들어서는 순간 종은 다시 울렸다. 그것은 이미 8시가 되었음을 알리는 종이었다. 이때부터 진짜 아침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누슈크는 그녀가 고향을 떠날 때 예순 네 살이었던 언주라는 사람과의 재회에서 만큼은 평안함을 찾는 듯하다. 지금은 일흔 세살의 머리가 하얀 노인네가 된 언주. 이 소설에선 이 두 사람이 주요 인물이다. 어누슈크와 언주. 어누슈크는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해서 목사인 그의 아버지한테 구타를 당할 정도의 반항아적 기질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그의 딸 어누슈크에게 지독하게 욕심이 많은 아이, 너무 못된 아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잣대로 재보기엔 그랬다. 누구나 성장과정 중에서 받은 상처는 오래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성장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유럽이 동서로 갈라지면서 공산권의 문학에서 두드러진 작품은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과 비평위주였다. 따라서 그 저항정신의 높이에 따라 문학 작품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그러나 저자인 서보의 소설을 접한 서방세계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 건설에의 기여라는 목적이 앞선 나머지 예술이라고 부르기엔 턱도 없는 현실의 공산권 헝가리에서 이렇듯 완벽한 문학이 태어났구나 하는 놀라움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특징은 화자의 입을 통해 서술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많이 기대하는 대화체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운문(韻文)체다. ‘의식의 흐름’기법이다.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이 글이 쓰인 시대적 배경은 공산권인 헝가리이다. 출판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기간 동안에 썼던 글들은 저자의 책상 서랍 깊숙이 들어 있다가 1956년 헝가리 혁명이후 출판이 허가되자 연달아 작품을 발표했다. 훌륭한 작품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느낌과 감동을 줄 수 있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 아무 때나 혼자서 훌륭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어누슈커가 집을 떠난지(가출) 9년 만에 찾은 고향, 가족은 뒤로 변화해가고 있다. 야심으로 한 꺼풀 덧입힌 욕심과 일단 나 혼자만 살고보자는 이기주의만 남아 있었다. 어쩌면 저자는 공산주의 치하에서 살아가는 군상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적당히 따라가는 척 하면서 내 앞가림만 챙기고 있다. 나눔과 희망은 안 보인다. 그나마 인간적인 냄새는 어누슈커와 그의 은밀한 동조자인 언주뿐이다.

 

 

“그녀(어누슈커)에게는 모든 사람이 색깔이었고 색깔로서 그녀의 안에 살아있다. 어머니는 노랗고 아버지는 새까맣고 연커는 회색, 고아는 초록, 늙은 커티는 베이지, 쿤 라슬로는 붉은색. 그러나 할머니는 색깔이 없다.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언주는 하얗다. 하얗기는 아담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색깔로 표시했기에 그녀의 마음속에 투영된 그들의 이미지가 어떤지를 알 수 있고, 그들의 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기에, 아니 그녀의 가슴 속에 커다란 어두움으로 자리 잡고 있기에 아버지는 ‘새까맣다.’

 

나는 그대 가슴에 어떤 빛깔로 남아있을지 궁금해진다.

굳이 그대가 좋아하는 깔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새까맣게’ 칠해져있지는 말아야 할 텐데 라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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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제니 그랑데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조명원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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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평생을 재산 축적에만 올인 해온 수전노 그랑데 영감의 무남독녀 외동딸 외제니 그랑데의 가족과 주변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다.

플롯은 소설이나 희곡의 단골 메뉴인 부(富)와 재산(財産), 명예(名譽), 권력 그리고 사랑, 배반 등이다. 이 책을 통해 발자크는 낭만주의 시대에서 사실주의 작가의 대열로 등재되는 계기가 된 동시에 작가로서의 성공을 확실시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대적 배경은 나폴레옹이 실각한 뒤 다시 왕의 통치 체제로 돌아선 복고 왕정 시대가 그 배경이다. 소뮈르의 작은 마을에 위치한 낡고 음침한 저택을 무대로 펼쳐지는 10년 동안의 이야기는 대혁명이후 프랑스 사회의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자리 잡게 되는 신흥 부르주아지의 탄생 과정에 대한 실증적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늘 억압되어 있던 두 여인은 고통의 영역에서 한순간 자신들의 천성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일 수 있었다.”

 

주인공의 지독한 구두쇠 아버지 그랑데 영감은 늙은 통장수이며 포도재배자이다. 그는 자신의 수확량에 따라 통을 천 개 만들어야 할지 아니면 오백 개 만들어야 할지 거의 천문학자처럼 정확하게 추산했다. 나름대로 재산 축적을 하는 데는 공을 들이고 노력하는 부분이 보인다. 문제는 얼마 되지도 않는 식구인 아내와 딸에게까지도 지나치게 인색함을 보이는 것이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하녀에게 창고 문을 열고 그 날의 양식을 겨우 요기할 정도만 내주는 격이니 이건 참 지나치다 못해 이해할 수 없는 소치이다.

 

그랑데 영감은 재정적인 면에서 호랑이와 보아 뱀의 특성을 두루 지니고 있었다. 그는 몸을 낮춰 도사린 채 먹잇감을 노려보고 있다가 한순간에 덮치는 법을 안다. 그리곤 지갑의 주둥이를 열어 한 줌의 돈을 삼키고 나서 태연한 얼굴로 냉정하고 꼼꼼하게 소화시키는 뱀처럼 조용히 드러눕는 것이다.

 

영감의 지독한 인색함과 질식할 것 같은 집안 분위기 덕분에 모녀는 아무 의욕도 없이 하루하루 지내는 생활이 이어지던 중 이 책의 주요 플롯이기도 한 영감의 딸 외제니의 사촌이 파리에서 이 집으로 오게 됨으로 긴박감이 더해진다. 사촌간이지만(예전 유럽 쪽에선 사촌간의 결혼이 공공연하게 의도적으로 행해졌다)서로 사랑의 마음을 품게 된다. 좀 더 선명한 설명은 외제니가 사촌 샤룰에게 연정을 갖게 된다. 샤를은 파리지엥이다. 온갖 사치와 환락의 세계에서 잠시 그의 큰아버지인 그랑데 영감에게 그의 아버지의 편지를 전해주러 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샤를의 아버지는 아들을 그의 형에게 보냄과 동시에 재정적인 이유로 권총 자살을 하게 된다. 그는 그가 죽고 난 후 아들의 장래를 염려하며 그의 형인 그랑데 영감에게 맡긴 것이다.

 

서로 사랑을 느끼면서 “영원히 그대에게!” 라는 말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샤를이 돈을 벌기 위해 인도로 떠나면서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7년 만에 부자가 되어 돌아온 그는 더 이상 외제니와 굳은 맹세를 나누던 때의 샤를이 아니었다. 그 동안 외제니에게 단 한 장의 편지도 보내지 않던 그는 인도에서 귀국을 앞두고 외제니와 결합 할 수 없다는 나름의 이유와 변명을 하며 부(富)의 유지와 신분 상승을 위해 다른 여인과 전략적인 결혼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편지를 보낸다.

 

발자크는 이러한 샤를의 모습을 그리면서 순진하고 유약한 한 청년이 사리에 밝은 냉혈한으로 변모되는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 메커니즘과 당시 만연해 있던 부르주아적 결혼관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오노레 드 발자크는 쉰한 살이란 길지 않은 생애동안 100여 편의 장편소설과 여러 편의 단편 소설, 여섯 편의 희곡과 수많은 콩트를 써낸 정력적인 작가이다.

 

글을 읽는 이에 따라 각기 다른 느낌과 평가가 다르겠지만, 이 소설의 끝은 해피 엔딩으로 보고 싶다. 외제니와 샤를이 서로 결합되는 것은 아니다. 돈과 명예만을 쫒는 자의 삶의 결말은 일차적으로 그랑데 영감을 통해서 보게된다. 남겨 놓고 가는 돈이 너무 아까워서 제대로 죽지도 못한다.

가는 마당에 딸에게 오직 이 말을 남긴다.

 

“모든 것(재산)을 잘 간수해야 한다. 저승에 와서 내게 보고해야 돼”.

 

 

문득 떠오르는 유머가 있다. 그랑데 영감은 발치에도 못 미치는 더 지독한 탐욕가가 있었다. 딸린 자식과 식솔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임종 직전에 유언을 남긴다. “모든 재산을 현금화해서 내 관에 함께 넣어 줄 것!” 장례식날 입관 때 고인의 장남은 봉투 하나를 던져 넣었다. 그 안에는 [약속어음]이 들어 있었다. 저승에서 뵙게 되면 드리겠다는 추신과 함께..

 

아무리 돈에 미쳐서 날 뛰는 사람이 주변에 많아도 주인공 외제니는 꿋꿋하다. 물려받은 유산을 지혜롭게 잘 관리하며 나눔을 실천한다.  ‘뭐 그렇게까지’할 정도로 사랑의 배신자이자 사촌인 샤를에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표현한다.

 

 

흥미로운 것은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의 성품은 대체적으로 물질지향, 권력지향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그에 비해 여인들은 사려 깊고 지혜롭다. 이는 아마도 발자크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난 후 그 궁핍의 시기에 수 없이 많은 여인들(주로 부인들)에게서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받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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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지만지 고전선집 661
스와보미르 므로제크 지음, 정정원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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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그 해 겨울은 원 없이도 눈이 많이 내렸다. 시장에서는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었다. 우선 큰 눈덩이를 굴렸다. 눈사람의 배가 될 부분이었다. 그 다음에 만든 좀 더 작은 눈덩이는 어깨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조금 더 작은 눈덩이를 굴려서 눈사람의 머리를 만들었다. 검은 석탄으로 단추도 달아 주었는데, 다 잠글 수 있도록 위에서 아래까지 촘촘하게 박아 넣었다. 코는 당근으로 만들었다. 아이들이 만든 눈사람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저 무심히 지나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줄지어 아이들의 집을 찾아온다.

 

처음에는 신문가판대 아저씨다. 눈사람의 당근 코가 문제였다. 본인의 빨간코를 빗댄 것이라고 한다. 기분이 나쁘단다. 추워서 그런 거지 보드카를 마셔서 그런 것이 아니란다. 한사코 본인은 술꾼이 아니라고 큰소리친다.

두 번째는 마을조합장이다. 눈덩이를 그렇게 쌓아놓은 것은 마을 조합에 도둑놈위에 도둑놈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기분이 몹시 나쁘단다.

세 번째 방문객은 지역회의 의장이다. 역시 눈사람이 화근이다. 아니 눈사람은 아무 잘 못 없는데 모두 난리다. “나는 집에서 단추를 풀고 다니는데 그건 내 사적인 문제요. 그러니 댁의 아이들이 그걸 우스갯소리 삼을 권리는 없단 말이오. 머리에서 발끝까지 촘촘히 붙어 있는 그 단추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소. 내 다시 말하오만, 내 집에서 내가 바지를 벗고 다니건 말건 그건 댁의 아이들이 관여할 일이 아니오. 명심하시오!”

 

아이들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아이들 아빠는 사회적 분위기상 아이들에게 벌을 준다. ‘저녁을 굶기고 구석에 가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게 한다. 그 후 아이들은 다시 눈사람을 만들 기회가 되었다. 이제는 모델이 분명히 정해졌다. 신문가판대, 조합장, 의장아저씨를 만드는데 아이들의 의기가 투합 되었다. 그리고는 즐겁게 작업에 착수했다.

 

 

 

 

다소 썰렁한 느낌이드는 풍자적 단편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다. 세상에는 감추고 싶지만 감춰지지 않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드러나지 않는 진실 또한 없다. 단지 시간이 개입될 뿐이다. 작금의 정당화는 차후엔 변명이 된다. 역사상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이 책에는 이러한 단편이 42편 실려 있다. 국내에 처음 번역 소개되고 있다.

 

저자  스와보미르 므로제크

폴란드의 대표적 극작가이자 단편소설 작가, 만평가다. 1930년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 근처 보젱친에서 출생. 해외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희곡 덕분이다. 므로제크의 희곡작품들은 도덕적 희곡 또는 철학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희곡작품과 매우 흡사한 자신의 산문 작품 속에서, 므로제크는 사회 현상에 대한 통찰 쪽으로 움직여간다. 부조리한 유머를 사용해 지역 정서와 진보 사이의 간극을 표현하고 있다. 저자의 작품들은 폴란드 계엄(Martial Law)시절 폴란드에서 대단한 인기를 모았고, 지하 출판을 통해 널리 퍼져나갔다. 1950년대 폴란드의 민초들이 당했던 상황은 1960년대 이후 70, 80년대의 암울했던 국내 상황과 흡사하다. 깨끗하고 정당한 방법의 권력 승계가 아닌 정권의 탈취는 언론, 출판, 집회 및 개인적 표현의 자유부터 접수한다.  그 어둠의 시기에 ‘타는 목마름’으로 봄날의 바람이 우리의 가슴속으로 들어와주길 얼마나 기다렸던가.

 

저자는 이 짧은 단편 속에 폴란드가 처했던 어둠의 시간 속에서 폴란드인들의 입가에 짧은 미소와 울창한 숲 속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희망의 햇살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라 믿고 싶다.

 

이 책을 번역한 정정원 교수는 대학원 시절 폴란드어를 공부하면서 한 편 한 편 번역을 하다가 결국 전편을 다 번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번역본이 ‘좋은 추억’으로 컴퓨터 한 구석 ‘므로제크’ 라는 폴더에 수줍게 자리잡게 되었는데, 어느 날 다시 꺼내 읽으면서 묘한 재미와 독특한 감동이 몰려 왔다고 한다.

“1950년대 폴란드라는 나라, 폴란드 정부, 폴란드 관료주의, 폴란드 공산주의 등에 대한 풍자가 21세기 한국이라는 나라, 한국 정부, 한국 관료주의에 대한 풍자로 자연스럽게 투영되고 있었다.”

 

이 단편의 타이틀이 된 〈코끼리〉

코끼리가 없는 동물원이 배경이다. 이 동물원은 코끼리가 없는 대신에 토끼 3000마리로 대신해 보려고 하다가, 결국 의욕만 앞서는 과잉충성 동물원장의 아이디어로 공기를 가득 채운 그럴싸한 고무 코끼리를 만들어 세워두게 되었다. 특별히 굼뜨다는 안내문과 함께. 그러던 어느 날 학생들이 동물원으로 현장 학습을 오게 되는데, 그들은 4000킬로그램에서 6000킬로그램까지 나가는 가장 무거운 육상동물인 코끼리가 미풍에 실려 하늘 높이 올라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 이후 학생들은 술을 마시고 유리창을 깨는 건달이 되었고, 더 이상 코끼리를 믿지 않게 된다.

 

어디 코끼리만 못 믿었겠는가.

소설에는 언급이 안 되었지만, 학생들이 이러지 않았을까?

 

“이 세상에 믿을 넘 하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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