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기업의 선택
짐 콜린스 & 모튼 한센 지음, 김명철 옮김 / 김영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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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 피터 드러커 



두말 할 나위 없이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몸을 쪼개서 두 군데를 갈 수 없는 이상 우리 모두는 갈림길 앞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합니다.  한 개인의 선택이 그 사람의 일생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한 조직이나 기업의 리더들의 판단과 선택은 기업의 흥망은 물론 그 딸린 식구들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환경

지혜롭고 현명한 기업과 리더, 조직과 사회는 반드시 ‘혼돈과 불안을 발판 삼아’ 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혼돈 속에서’도 번창할 수 있습니다. 

저자(복수지만 단수화 함)는 이를 알아보기 위해 불리한 위치에서 시작해 커다란 성과를 내고 통제 불가능하고 빠르고 불확실하며, 해를 입을 수 있는 거대한 힘으로 둘러싸인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성공을 일궈낸 기업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다음 이들에게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밝혀내기 위해, 승자와 낙오자를 대조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즉 동일한 극단적 환경에서 큰 성과를 내는 데 실패한 비교 기업과 대조했습니다. 저자는 큰 성과를 거둔 연구 대상 기업군에 ‘10X'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그 이유는 이 기업들이 그럭저럭 성공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대단한 성과를 냈기 때문입니다. 


책에는 수많은 기업들이 등장합니다. 화려한 조명을 받거나,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우선 이 책의 장점, 저자들의 강점은 PC 앞에서만 쓴 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10X의 기업들을 선별하기 위해 2만 400개의 기업을 11차례(약 10년간)에 걸쳐 체계적으로 걸러냈다고 합니다. 



10X 리더


“승리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을 이를 행운이라 부른다.

패배는 미리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불행이라 부른다.”                   


                                          - 로얄 아문센



1911년 10월, 두 팀의 탐험대가 역사상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하고자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 중 한 팀은 경주를 마치고 안전하게 귀가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팀의 앞에는 통렬한 패배를 인정 할 일과 더불어 목숨이 달린 경주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 경주를 끝내 마치지 못하고 다가온 겨울에 휩쓸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발견된 몇몇 대원의 마지막 일기와 가족들에게 쓴 편지에서 알 수 있듯, 두 번째 남극원정대는 5명의 대원 모두 기진한 상태에서 동상과 통증으로 쓰러져갔고, 눈 속에서 서서히 얼어 죽어갔습니다. 이 두 팀은 완벽한 비교 대상입니다. 각각의 리더는 바로 승자인 로알 아문센과 패자인 로버트 스콧입니다. 


리뷰에서 이 상황을 모두 언급하는 것은 무리지요.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아문센은 20대 후반부터 준비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항해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3,200km를 자전거를 이용해 노르웨이에서 스페인까지 다녀왔습니다. 돌고래 고기가 비상식량으로 가능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날것으로 먹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에스키모들의 삶을 배우려고 그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에스키모들이 개로 썰매를 끄는 방법, 영하의 기온에서 몸을 얼리지 않는 방법 등등을 체득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눈 속에 파묻힌 채로 발견된 로버트 스콧은 어땠을까요? 아문센과 반대였다고 생각하면 빠른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아문센은 모든 악조건을 예측하며 대비를 했습니다. 그것도 매우 철저하게 했습니다. 의욕만 앞서고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스콧은 그의 일기의 대부분을 날씨 탓으로 돌렸습니다.  저자는 이 스토리의 결론을 이렇게 맺습니다.


“상황이 달랐던 것이 아니라 행동이 달랐다.”


아문센 뿐 만이 아닙니다. 위기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한 리더들은 ‘수많은 위험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위험을 더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대비한 것입니다. 


위험대비에 대한 이야기를 쓰다 보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올해도 태풍이 지나간 자리는 비탄과 황량감만 남기고 갔습니다. 여름과 가을사이 거의 빠짐없이 매해 태풍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진정 대비책은 있기나 한건지요?  지명은 기억을 못하나 일본의 어느 해안 소읍의 지도자가 생각이 납니다. 우리가 일본이 받는 태풍의 피해에 비하면 그래도 감사할 일이지요. 일본에겐 좀 미안하나 거대한 태풍이 올라올 때마다 일본이 방파제 역할을 해준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일본의 소읍. 매년 태풍이 지나갈 때마다 해일까지 동반되어 초토화되는 소읍입니다. 무너지면 다시 짓고 삶의 터전을 옮길 생각은 꿈도 못 꾸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지도자가 새로 선출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방파제를 쌓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방파제는 있었지만, 그동안 지나간 태풍을 면밀히 검토해서 최고 높이의 파고보다 더 높게 쌓는 일입니다. 물론 반대여론이 심각합니다.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이는데 거금을 들여 방파제를 쌓는 일이 결코 환영받을 일이 아니지요. 예산 낭비다, 자연 경관을 해친다 말도 많습니다. 날씨가 좋으니까요. 그러나 그해 태풍이 가장 강하게 지나갔습니다. 예전 같으면 마을은 형체를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형 태풍이 지나간 자리 그 마을은 그리 평온할 수 가 없습니다.  일 년에 한 두 차례 지나가는 태풍이지만 대비를 잘 한 덕분입니다. 낙관적으로 “뭐, 지나가면 그만이지”하고 그냥 있었으면 어찌 되었을까요?



일관성과 꾸준함

또한 10X 리더들의 공통점은 일관성과 꾸준함입니다. 회사 내에 룰이 있습니다. 보통 ‘내규’라고 부릅니다. 상벌 규정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회사 중역들과 말단이나 신입사원들에게 적용되는 잣대가 다르다면 회사 내에 쌓이는 불신과 반목은 감당하기 힘듭니다. 대부분 직급이 위로 올라갈수록 부서별 민심의 흐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구리가 올챙잇적 생각을 못합니다. 한 기업이 성장하고 자리 잡는 것은 매우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나 무너지는 것은 그대로 두면 해결됩니다. 그냥 하루아침에 무너집니다.


역시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에서 메인 주 끝까지 3,000마일에 이르는 거리를 도보 여행하려고 합니다. 한 사람은 매일 20마일을 걷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20마일을 걷습니다. 컨디션이 좋고 날씨도 좋다고 더 걷지 않습니다. 딱 20마일입니다. 피곤하다고 쉬지도 않습니다. 20마일입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마침 출발하던 날. 날씨가 넘 좋았습니다. 바람까지 살살 불어줘서 기분 좋다고 40마일이나 걸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뻗었습니다. 못 일어났습니다. 계속 이 상황이 반복 되었습니다. 완전 날씨에 좌우됩니다. 

20마일이 목적지에 도달 했을 때 그 때 그 때 다른 템포로 워킹을 하던 나머지 사내는 반도 못 간 상황에서 비척거리며 가고 있습니다. 목적지에 가기 전에 쓰러지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 부분은 내가 책을 읽고 리뷰를 쓰면서 적용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자주 쓰는 말입니다만, ‘꾸준함을 이길 장사는 없습니다.’



운(運)을 분석 한다

저자는 10X 기업과 비교 그룹을 대조해보는 과정에서 운이라는 것이 생각만큼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0X 기업과 비교 기업을 구분해 볼 수 있도록 230가지 중요한 운 관련 사건들을 식별하고 체계적으로 분석했습니다. 


결론은 ‘운(運)'이라는 것이 미친 영향은 ‘없다’ 입니다. 


책에는 많은 기업, 기업가들이 등장합니다. 일어선 사람, 주저앉은 사람. 죽다 살아난 사람, 살아나는 듯 돌아가시는 분 등등 다양합니다. 나의 삶은 나의 경영입니다. 나의 기업입니다. 나의 자산입니다. 내 안의 나를 경영해보는 생각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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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철학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사상선집
게오르크 W. F. 헤겔 지음, 서정혁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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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철학’ 그리고 ‘철학적 세계사’. 이 둘은 같은 말이며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세계사에서 철학적 요소를 찾아보는 과정이고, 후자는 세계사를 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헤겔은 이 책에서 이 둘을 혼용해서 쓰고 있습니다. 


헤겔은 우리가 역사를 바라볼 때 보편적 세계사 자체를 바라보기 원합니다. 세계사에 관한 보편적 반성이 아니라, 세계역사 자체의 내용이라고 합니다. 덧붙이면 “세계사는 오직 정신의 자유라는 개념으로부터 비롯되는 필연적 전개”이며 “보편 정신의 펼침과 실현”이라고 주장합니다. 


헤겔에게 「세계사」는 깊은 숙제였던 듯합니다. 그의 다른 저서 《법철학강요》에서 역시 세계사 전개의 네 가지 원리와 그에 상응하는 네 가지 단계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정신이 최초로 직접 현현된 상태에서 실체적 정신과 일체화한 정신의 형태이며, 둘째는 실체적 정신이 앎의 단계로 들어서서 정신이 적극적이고 충실한 내용을 갖춤으로써 실체적 정신의 생동하는 형식으로서의 자각적 존재, 즉 아름다운 인륜적 개체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지적인 활동을 하는 자각적 존재가 객관세계와 무한히 대립하는 모습을 띠는 것이며, 넷째는 이 대립이 반전해서 정신이 스스로의 내면으로 진리와 구체적인 본질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객관세계 속에서 편안히 둥지를 틀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 동양세계, 그리스 세계, 로마 세계, 게르만 세계라는 역사적 발전 단계에 대응하는 것으로 서술된다고 합니다.


헤겔은 근원적 역사에서 전설, 민요, 전승되어 온 것들과 시가(詩歌)들은 제외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같은 전설, 전승되어 온 것들은 아직도 흐릿한 방식들이며, 의식의 측면에서 아직도 흐릿한 표현 방식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흐릿한 의식을 지닌 민족들이나 그들의 흐릿한 역사는 [근원적 역사의] 대상이 아니며, 적어도 철학적인 보편적 세계사의 대상이 결코 아니라고 합니다. 철학적인 보편적 세계사는 역사 속에서 이념의 인식을 목적으로 하며, 자신의 원리를 의식하면서 자신들이 어떠하며 무엇을 행하는 가를 알 수 있는 민족들의 정신들로 이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제대로 된 역사는 발생한 것에 대한 기억이 있어야하며, 명료한 의식으로서 기억은 구체적으로 ‘자유의 실현’ 으로서 국가라는 조건에서만 가능하고, 기억이 가능함으로써 비로소 역사 기술, 즉 역사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계사에서 우리는 제대로 된 국가가 없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수많은 민족들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싫건 좋건 세계사의 주역으로 기억되는 민족은 언제나 강성한 국가를 이루어 그 시대를 지배한 민족입니다. 헤겔은 이러한 민족을 세계정신의 구현으로서 ‘시대정신’이라 부릅니다. 흐릿한 역사의 예로 인도를 들고 있습니다. 인도는 매우 오랜 전통을 가진 민족이고, 언어 등에서 게르만 민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점도 인정되지만, 그들이 역사를 지녔다는 점에서는 회의적입니다. 왜냐하면 인도에서는 카스트제도와 같이 자연적으로 확정된 질서의 항구성이 지닌 ‘부자유’로 인해, 어떤 진보나 발전의 궁극목적도 부재하며 ‘기억’의 대상도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헤이든 화이트에 의하면 헤겔이 《역사철학 강의》에서보다도 《백과전서》나 《미학강의》를 통해서 더 풍부하게 역사 서술과 역사 전반에 관한 문제를(역사철학과는 다른 의미에서)다루었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거의 주목된바가 없다고 합니다. 《역사철학 강의》에서 정립하려고 했던 역사‘과학’은, 그의 개념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실제로 ‘반성적’ 역사가들이 형성한 업적 위에서 이루어진 후대의 역사의식이나 철학적 성찰의 산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헤겔은 《미학강의》에서 역사 서술 자체에 관한 이론을 정립했는데, 그는 역사 서술을 일종의 언어 예술로 보았으므로, 미의식에 예속된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헤겔은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며 세계사도 이성적으로 진행되어왔고, 세계사는 좀 더 나은 상태, 완전한 상태를 향한 부단한 발전의 과정이며, 인간 속에는 ‘좀 더 좋고 완전한 것을 향한 변화 능력’이, 다시 말해 ‘완전성을 향한 추동력’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아울러 역사발전이 그냥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겹고도 고통스러운 투쟁과 노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점에 공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맹점이 있습니다. 과연 사실에 입각해서 쓰인 역사인가?를 확인해봐야겠지요. 헤겔은 이런 경우 전문적인 역사가에게 현혹되지 말기를 당부합니다. 독일의 역사가들 중에도 역사에 선험적인 날조를 한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즉, 최초에 가장 오래된 한 민족이 있었고, 이 민족은 직접 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완전한 통찰력과 지혜로 살았고, 모든 자연법칙과 정신적 진리를 꿰뚫어 아는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는 이런저런 성직자 무리들이 있었다거나, 아니면 좀 더 특별한 것을 언급하자면, 로마의 영웅서사시가 있었다는 것 등등[이 그러한 날조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헤겔의 역사관은 통상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단순한 숙명론이나 낙관적 역사관이 아니라는 점에 공감합니다. 헤겔의 역사관의 밑바탕에는 ‘냉철한 현실주의’가 깔려 있고, 헤겔은 인간이 역사에서 실현해야 할 자유라는 목적과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주체적인 인간의 노력과 투쟁을 무엇보다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헤겔(1770~1831)은 독일 슈트트가르트에서 출생했습니다. 튀빙겐 신학교에서 수학했습니다. 주요 저서로 《정신현상학》, 《논리학》,《엔치클로페디》  《법철학 강요》, 《미학강의》, 《세계사의 철학 강의》, 《종교철학 강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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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돌베개 우리고전 100선 18
김부식 지음, 김아리 엮음 / 돌베개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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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문자, 기록의 소중함을 느낍니다. 문자가 없었다면 어찌 이런 기록이 남아 있을까. 그리고 문자가 있다한들 기록할 사람이 없었다면 역시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오늘 남기는 글과 생각들의 수명이 얼마나 갈까요. SNS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많은 생각을 비록 짧은 글에나마 남기지만 그 수명이 얼마나 갈까요. 흘러가는 물처럼, 흩어지는 바람처럼 사라져갈 말과 생각들이 허다합니다.
 
『삼국사기』는 삼국시대의 정치와 외교, 사회 제도와 문화를 알 수 있는 역사서이자 가장 오래된 우리의 역사서입니다. 『삼국사기』없이 우리 역사를 말할 수 없습니다. 요즘 일본을 보면 괘씸하면서도 안쓰럽습니다. 우리나라와 중국과 계속 부딪고 있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지형이 점점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불안감 때문에 기왕지사 물에서 놀아야하니 바다라도 넓히자는 심산인가요. 우리와 부딪는 중국의 욕심도 하늘을 찌릅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 역사를 자기네 마음대로 끼워 맞추고 있습니다. 고구려 유적을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행위는 도저히 그냥 묵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고구려를 중국의 일개 지방 정권으로 정의하고 중국 영토에 있는 고구려의 문화와 역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예 관심조차도 없어지게 됩니다.
 
『삼국사기』는 총 50권으로, 본기(本紀), 연표(年表), 지(志), 열전(列傳)으로 구성된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입니다. 방대한 양의 『삼국사기』를 다 읽는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이 책처럼 중요부분만 발췌한 서적만이라도 읽는다면 그래도 우리나라 국사에 대한 큰 밑그림이 그려질 것입니다.
 
 
『삼국사기』를 읽으면서 오는 느낌이 있습니다. 마침 대선을 앞두고 들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누구’를 앞세워 이판에서 득세(得勢)해보자고 난립니다. 그 ‘누구’는 지금까지 치세(治世)를 해왔던 방식에서 벗어나 참 민주사회, 복지사회를 만들어보겠다고 공언(空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정치를 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삼국사기』나 읽어봤나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는 앞서 지나간 정치가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잘했던 못했던 그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1145년에 완성된 이 책은 1000년의 역사를 담았고, 그 이후 천 년 동안 전하고 읽혀지고 있습니다. 스테디셀러인 성경에도 위로는 하나님의 말을 잘 듣고 백성들을 평안하게 한 왕의 이름이 정확하게 실려 있고, 말도 지지리도 안 듣고 포악한 정치를 하다가 비참하게 죽어간 왕들이 부지기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치가들은 이런 책을 통해 반면교사(反面敎師)의 기회로 삼을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 실린 왕들의 이야기 중 내가 생각하는 가장 한심한 왕은 백제 동성왕입니다.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 되었는데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하자는 관리들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 궁궐 안에 쓸데없이 높은 건물만 짓고, 연못을 파선 기이한 새들만 기르고 그야 말로 놀고 있습니다. 신하들이 상소를 올려 간언했으나 왕은 답하지 않고, 또다시 귀찮게 할까봐 아예 궁궐문을 닫아버렸답니다. 나 원 참. 아니 누가 이런 사람을 왕으로 만들었어요? 하긴 이런 사람일수록 ‘스스로 왕’이 대부분이지요. 장자(莊子)에는 “자기 잘못을 알고도 고치려 하지 않고, 충고를 들으면 더욱 심해지는 것을 못돼 삐뚤어졌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 딱 맞는 사람이 동성왕입니다.
 
 
그런가하면 문무왕은 참으로 성왕(聖王)입니다. 왕의 유언 중 일부를 옮겨봅니다. “(....)나 자신은 풍상을 무릅쓰고 다니느라 결국 고질병이 생겼고, 정치와 교화를 위해 근심하며 애쓰다보니 병은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사람은 죽어도 이름은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니 홀연히 저 세상으로 돌아간들 무슨 한이 있겠는가! (.....) 종묘사직의 주인은 잠시라도 비워서는 안 되니 태자는 관 앞에서 즉시 왕위를 계승하라. (.......) 옛날 천하를 다스리던 영웅도 결국 한 무더기 흙이 되었다. 나무꾼과 목동이 그 흙무덤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 굴을 판다. 그러니 무덤을 호화롭게 만들어 봐야 공연히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엔 오점을 남길 뿐이며, 공연히 사람들만 힘들게 하고 죽은 사람의 넋은 구제하지 못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슬프기 그지없다. 이러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죽으면 열흘 후에 곧 창고 문 바깥뜰에서 서역(西域)의 방식대로 화장하라. 상복의 격식은 정해진 예가 있는 것이지만, 장례 절차는 검소하게 하도록 힘써라. 변방의 성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일과 주, 군에 세금을 부과하는 일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모두 없애고, 율령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개혁하라. 나의 이러한 뜻을 사방에 알려 두루 알게 하고, 담당자는 시행하라.”
아름다운 사람은 머물렀던 자리도 아름답다고 하지요.
 
삼국시대는 전쟁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먹고 먹히고, 쫒고 쫒기는 역사입니다. 자연적으로 이름 난 장수들의 등장이 많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절로 가슴을 뛰게 합니다. 충절과 용맹이 그들의 타이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시라고도 알려져 있는 을지문덕 장군의 시는 참으로 멋집니다.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고구려에선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에 거짓 항복을 하러갑니다. 그러나 짐짓 그들의 진영을 살펴보기 위함이 컸습니다. 수나라 왕은 밀지를 전해 만약 고구려왕이나 을지문덕을 만나면 붙잡으라고 했지만 한 고위관리가 그를 풀어줍니다. 뒤늦게 두 장군이 의논할 것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며 다시 잡으려고 쫒아갔지만 뒤도 안돌아보고 고구려로 돌아갑니다. 수나라 군사들은 살수(薩水 : 평안북도 서남부를 흐르는 옛 이름)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산을 의지해 진을 쳤는데,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다음과 같은 詩를 보냈습니다.
 
신묘한 계책은 하늘의 이치를 꿰뚫었고
기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를 다하였도다.
전투에 이긴 공 이미 드높으니
만족하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어르고 뺨친다.’는 말이 딱 맞는 상황입니다.
 
『삼국사기』에 대해선 말도 많지요. 사대적이다. 신라 중심사관이다 등이 주요 이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종 임금과 김부식 어르신에게 감사할 일입니다. 이 두 분이 없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알’(卵) 수준의 신화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참 소중한 기록입니다.
 
"우리 것 먼저 알고, 남의 것 배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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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터리 저울추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요제프 로트 지음, 주경식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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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무거운 책을 머리에 이고 있었더니 좀 가볍게 가고 싶어 좀 핸디한 소설을 손에 잡았습니다. 제목이 재밌을 것 같지요?  “엉터리 저울추” 예..시작은 재밌었는데 다 읽고 나니까 이젠 가슴이 무거워집니다. 아니 가슴이 짠해집니다.


“옛날 츨로토그로트 지방에 안젤름 아이벤쉬츠라는 도량형기 검정관이 살고 있었다.” 로 시작이 됩니다. 도량형기 검정관은 그냥 우리식으로 ‘단속반원’이라고 하지요. 주인공이기도 한 이 사나이의 이름은 ‘콧수염’으로 하겠습니다. 이 사나이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합니다. 콧수염의 업무는 그 지방의 모든 상인들이 사용하는 도량형기의 치수와 무게를 점검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일정 기간에 이 상점에서 저 상점으로 다니면서 자와 저울과 저울추를 검사하는 일이지요. 혼자는 아닙니다.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일을 함께 해주는 지방 경찰서 소속의 순경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2인 1조지요. 


대단히 장대한 체구의 남자인 콧수염은 원래 포병연대의 장기 목무 하사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의 성화에 옷을 벗고 민간인이 된지 얼마 안됩니다. 콧수염은 내내 불만스럽습니다. 마누라 등쌀에 제대를 했지만 군생활이 그립습니다. 민간인 생활이 너무 불편하고 힘듭니다. 단속반원 생활이요? 차라리 군 제대 후에 주어진 직업이 맘에 들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요. 밥먹고 할 짓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을 그려보세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광장시장이나 동대문시장 포목점에 가면 아직도 팔을 쫘~악 벌리면서 마를 끊어주는 경우요. 판매자나 소비자가 너무 익숙한 생활습관에 갑자기 정부 주도로 정확한 줄자를 써서 판매를 해야 한다는 엄한 규정이 적용된다면 어찌 생각하시겠습니까? 단속에 걸리면 고발 조치를 당해서 벌금을 내야합니다. 콧수염이 하는 일이 이 일이었으니 참으로 딱하지요. 그러나 콧수염은 12년 동안 군 생활을 하며 몸에 배인 근면함, 명령에 복종 등으로 그럭저럭 버티며 나름대로 충실한 직무수행을 하던 중에 사건이 생깁니다. 사건이 안 생기면 소설의 진행이 안 되긴 하지요. 아, 글쎄 그렇잖아도 웬수덩어리인 그의 아내가 바람을 핀 것입니다. 그 상대도 하필이면 콧수염의 부하직원이군요. 화도 나고 자존심도 상하고 아무튼 그러나 자제하며 잘 넘깁니다. 콧수염의 부하직원과 그의 아내 사이에 아이까지 만들자 더 이상 참지 못한 그는 집을 나섭니다. 


그가 집을 나와 간 곳은 처음엔 업무차, 그리곤 어찌하다보니 가게되고, 이젠 아예 의도적으로 가는 국경에 위치한 술집입니다. 콧수염은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다니는데 어떤 땐 말이 알아서 그곳으로 그의 주인을 모십니다. 누구였지요? 우리 선조들 중 알아서 술집을 모시고 갔던 말. 이제는 술집에 안 간다고 다짐을 한 후. 잠결에 말이 다시 그 술집 앞에 내려주자, 그 말이 무슨 죄가 있다고 목을 베었다던가? 당신도 당신 마음을 잘 모르면서 말이 어찌 당신 마음을 알리요.. 그 술집엔 왜 가냐구요?  물론 술을 마시고 싶어서 가긴 하는데 더 중요한 것은 망나니 그 술집 주인의 애인인 집시여자를 보고 싶어 가는 것이지요. 나도 남자지만, 그저 남자들이란 돈과 여자 그리고 술을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튼.. 예상된 일이기도 하지만 콧수염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부서지고 흔들리고 붕괴 될 것 같은 집”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콧수염이 국경의 술집을 드나들 때 알아봤습니다. 스토리가 어찌 진행이 될지 말입니다. 


국경의 술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온갖 건달과 범법자들의 집합소이기도 합니다. 러시아군의 탈영병들의 단골 숙소이기도 하구요. 탈영병들이 네덜란드나 캐나다 혹은 남아메리카로 가려면 돈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지요. 그 술집의 주인인 망나니가 단속반장 콧수염에게 걸려들면서 감옥에 갑니다. 그 사이에 콧수염은 그 망나니의 애인을 가로챕니다. 공교롭게도 정부에서 그에게 그 국경주점의 관리를 맡기게 되는군요. 그 문서를 들여다보면서 콧수염이 이런 마음을 갖습니다. “내겐 지금 불행과 행운이 같이 왔다.” 그래도 본성은 착한 사람입니다. 비록 그의 아내가 바람을 피어 다른 씨앗을 키웠지만, 그래도 아내에 대한 연민의 마음, 그의 업무에 대한 책임감은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군요. 그러나 그러면 뭐합니까.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걷잡을 수 없습니다. 그가 국경주점에 폭 빠져 있는 동안 콜레라가 창궐하면서 그의 아내와 아내의 아이가 죽습니다. 그리고 콧수염은 탈옥한 망나니의 손에 죽습니다. 

콧수염. 그가 무너지는 과정이 안쓰럽습니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었겠지요.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되기 힘든 구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요.


책을 다 읽고 나서 나의 관심은 콧수염보다 이 소설의 작가인 ‘요제프 로트’에게 쏠렸습니다. 이 작품은 한국어로는 처음 번역 출간되는 책이기도 합니다. 요제프 로트(Joseph Roth)는 1894년 9월 2일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 브로디에서 출생했고, 1939년 5월 27일 파리에서 사망했습니다. 


“나의 가장 강력한 체험은 전쟁과 내 조국의 멸망이다. 내가 가졌던 유일한 조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멸망하기 몇 주 전에 나온 이 고백을 읽어보면 그의 생애가 방향을 찾지 못하고 헤매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지원병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로트는 군인신문의 기자로 출발합니다. 기자 생활 틈틈이 칼럼, 시, 소설, 시사 해설 등 전 방위적인 글쓰기에 몰입합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로트는 누구보다도 먼저 독일을 떠납니다. 그는 파리로 망명을 떠났고 그 후 빈, 잘츠부르크, 암스테르담, 마르세유, 니스 그리고 폴란드 등지를 전전합니다. 

“이 땅의 손님” 스스로 그 자신을 묘사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디아스포라’ 였습니다. 


주인공 콧수염이 머물고자 했던 집은 무너졌습니다. 사라졌습니다. 그에겐 한 쪽 눈이 먼 퇴역 말과 잠시 그의 삶의 목적이기도 했던 바람 따라 떠도는 집시 여인뿐이었습니다. 그가 가고자 했던 곳은 어디였을까요? 우리의 상식으로 군대 탈영병은 매우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냥 입은 채로 나오는 탈영병은 그래도 착합니다. 군에 대한 불만, 사람에 대한 불만,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을 주치할 수 없어 뛰쳐나오며 그냥 안 나옵니다. 총이나 수류탄을 들고 나옵니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탈영병들은 측은지심입니다. 

“새벽 3시경에 어떤 탈영병 하나가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한다. 그는 노래 〈야 루빌 티비아(I love you)〉를 불었다. 모두 울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제 막 포기한 고향을 그리워하며 울었다. 이 순간 그들은 자유보다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다.”

아마 저자인 로트가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 않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울추..엉터리 저울추..저자에겐 이 저울추가 나라마저도 없애고 모든 국민들을 디아스포라로 만들어버리는 어둠의 큰 손을 생각하며 만들어낸 소재일 수도 있겠지요. 그 손안에서 흩어져버리는 민초들의 삶을 생각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엉터리 저울추는 내 품안에도, 그대 품안에도 있지요. 나와 남의 몸과 마음을 잴 때 달리 적용되는 엉터리 저울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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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 역사 2 -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
헤이든 화이트 지음, 천형균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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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철학자이며 지성사가인 카를 뢰비트는 궁극적으로 ‘역사의 개념’이 신화, 그리고 중세 초에서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의 사학 사상을 지배해온 역사 지식과 신화 간의 혼동이 초래한 흉악한 ‘역사 철학’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은, 오직 부르크하르트와 더블어서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뢰비트는 부르크하르트가 발전시킨 우아함과 기지,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파악하려는 욕구인 ‘사실주의’와 순수한 ‘관조’로서의 지식에 내포된 반동적인 의미가 바로 특수한 형태의 신화적 의식의 요소였음을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적 사고를 신화가 아니라 당대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던 역사의 신화, 즉 로맨스, 희극, 비극의 신화로부터 해방시켰을 뿐이었지요.

 

그의 스승인 랑케처럼, 부르크하르트도 역사를 당시의 정치적 분쟁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으며, 적어도 역사 연구 - 사실은 보수주의의 명분에 기여할 따름인 역사연구 - 가 초래한 정치적 교리를 역사 연구가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부르크하르트는 랑케의 ‘역사철학’을 ‘역사의 ‘이론’이라고 불렀으며, 그것을 설명과 분석의 목적 때문에 사료를 ‘자의적으로’ 배열하는데 불과하다고 설명했지요. 그의 염세주의가 그로 하여금 사건에는 어떤 ‘성격’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설의 사치조차 용인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사건에 ‘실질적인 성격’을 부여하려는 기도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염세주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통해 부르크하르트의 정신 속에서 지적 근거를 찾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포이어바흐가 마르크스나 정치적 좌파에게 한 것과 같이, 쇼펜하우어는 부르크하르트와 정치적 우파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염세주의의 대부 쇼펜하우어를 만나보겠습니다. 얼마 전 얼핏 TV 프로그램에서 쇼펜하우어 운운하는 이야기가 들려서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패널들 5~6명이 나오고 MC가 괄호 넣기 문제를 내는 프로그램 이었지요. 문제는 “쇼펜하우어가 이야기하길 상대방의 논쟁에서 이기는 것은 ( )이다.” 이었습니다. 답이 궁금해서 잠시 지켜봤더니, 어처구니없게도, 아니 ‘쇼펜하우어답게’ 라고 해야 할까요? 괄호 안에 들어간 답은 (인신공격)이었습니다. 그냥 웃고 말았지요.

1840년대까지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1850년 이후에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전문적인 철학자들 사이에서보다 오히려 예술가, 작가, 역사가, 정치 평론가들 사이에서, 다시 말하면 철학적인 데 관심을 갖고 있거나 철학 체계에서 행동의 근거를 찾으려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럽의 지적 생활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세계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개념은, 1850~1875년 사이에 지식인들의 욕구에 특히 적합했다고 합니다. 또한 수많은 젊은 저술가들과 사상가들이 극복해야 할 출발점임과 동시에 장애물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니체, 바그너, 프로이트, 만, 부르크하르트 등은 모두 그 개념으로부터 배웠고, 또 창조적인 예술가와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학습자로서 그들 각자가 느낀 삶의 불만을 설명한 스승을 쇼펜하우어에게서 발견했습니다. 이들 다섯 사람 가운데서 두 사람은 끝까지 쇼펜하우어의 신봉자로 남아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바그너와 부르크하르트입니다.

 

“그대가 살고 있는 동안에 가질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것만을 추구하도록 힘쓰라. 물질적인 사물은 변하고 있으므로 이 욕구는 비물질적인 것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욕구가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고 있다면 욕구도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에,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 쇼펜하우어의 메시지입니다.

 

역사학자들과 역사 철학자들간의 예민한 신경다툼이 있었습니다. 역사철학은역사철학자가 전문적인 역사가의 저작에 내포되어 있는 설명적이며 설화적인 전략을 들추어내려고 하기 때문에, 역사학에 대한 하나의 위협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지요. 역사철학은 특히 학문적으로 인정된 전략을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전략으로 바꾸려는 욕구의 산물이므로, 역사학에 더 큰 위협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르크스니체는 고통과 갈등의 상태로부터 벗어난, 건전한 역사적인 삶의 탄생을 인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두 사람은 사학(史學)상 그들과 유사한 인물이 없었다는 의미에서 다 같이 극단적인 낙관론자들이었습니다. 랑케의 낙관론은 개인의 악덕을 공익으로 전환 할 수 있다고 주장할 만한 이론적인 근거에서 주장된 것이 아니었지요. 미슐레의 낙관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미슐레가 심각하게 느끼고 역사적 합리화라는 방법을 통해서 시도한 모든 것을 가리키는 어떤 분위기나 욕구를 반영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토크빌과 부르크하르트에게도 낙관론의 근거는 없었지요. 마르크스와 니체는 낭만주의나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자들로 자처한 사람들의 낙관론은 물론, 그들과 유사한 아마추어 사가들의 비관론까지도 비판했습니다. 19세기 후반의 ‘역사주의의 위기’에 대한 마르크스와 니체의 공헌은, 바로 객관성 그 자체에 대한 개념의 역사화에 있었다고 봅니다. 그들에게 역사적인 사고는, 단순히 역사의 장에 관한 자료에 ‘적용’할 수 있는 객관성의 기준이 가져다 준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문제시한 바로 객관성 그 자체의 본질이었습니다.

 

니체는 비합리주의로의 퇴각에 의해서만 벗어날 수 있었던 절망 상태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인간이 아이러니 형식으로 설명되고 구성된 역사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려고 한 역사철학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19세기의 모든 역사철학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탁월한 역사가였던 베네데토 크로체입니다. 크로체는 철학자로서는 물론 전문적인 학자로서도 출발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대학도 마치지 못했고, 대학에서의 지위도 얻지 못했지요. 실제로 당신의 대학 문화에 대한 그의 견해는 니체나 부르크하르트와 매우 유사한 경멸감을 내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부르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교양 있는 학자였으며, 개인의 고통과 공동생활의 권태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역사 연구로 방향을 돌린 아마추어였습니다. 그의 초기 저작은 엄밀한 의미의 용어로는 골동품 수집적이었고, 역사적이라기보다는 고고학적인 것이었으며, 구 나폴리의 민속생활, 건축에 관한 연구로 구성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893년에 이르러 크로체는 〈예술의 일반적 개념에 내포된 역사〉라는 제목의 에세이로 역사철학의 분야에 뛰어들게 됩니다. 사상에 대한 그의 집념과 노력은, 그로 하여금 철학자로서의 생애를 시작하도록 만든 이 에세이에 잘 드러나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메타 역사 』1, 2권을 통해서 많은 역사가와 역사철학자들을 만나봤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깊이 있게 그들을 만나보는 길입니다. 이 헤이든 화이트의 시각을 통해 얻어진 밑그림 위에 역사서를 한 권 한 권 읽어 나갈 때마다 구체화된 형상이 빚어질 것입니다. 전적으로 저자의 의견이 옳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저자가 언급한 역사가와 역사철학자들의 저서들을 제대로 못 봤기 때문에 반박할 자료가 전무한 상태입니다. 앞으로 그들의 저서를 읽을 때 곁에 두고 참고 자료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역사서를 읽어보고자 하는 분들이나 기왕의 역사, 역사철학서들을 읽으신 분들이 참고로 하시면 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역사관련 서적으로만 보기에는 아까운 감도 듭니다. 19세기 사상과 철학의 흐름을 알 수 있는 명저(名著)로 추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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