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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이야기 7 ㅣ 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7
김명호 지음 / 한길사 / 2019년 7월
평점 :
《 중국인 이야기(7) 》 _김명호 | 한길사
1.
이 책의 지은이 김명호 교수는 20여 년간 중국을 오가며 ‘문화노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와 자신이 수집한 자료 및 사진들을 바탕으로 『중국인 이야기』를 쓰고 있다. 제7권은 ‘혁명 이후 다시 일어서는 중국’이라는 키워드로 읽게 된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제1장은 중국인들 가슴속 영원한 퍼스트레이디 쑹칭링을 둘러싼 소문의 진상, 제2장은 혁명을 이끈 전설의 명장들이 겪은 파란만장한 인생, 제3장은 개혁개방으로 중국식 사회주의를 만들어낸 시중쉰(시진핑의 부친)과 덩샤오핑. 제4장은 중국 과학의 비조 예치쑨의 안타까운 사연과 둔황에서 예술혼을 불태운 창수훙, 그리고 마지막 제5장은 대만의 미래를 설계한 영원한 라이벌 우궈전과 장징궈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역사 속에 사람이 있고, 사람이 역사를 만들어간다. 중국의 현대사속 정치가, 군인, 혁명가, 지식인, 예술가 들이 다수 등장한다. 많은 인물들 중 특히 한 사람이 관심을 끈다.
2.
중국 물리학의 비조(鼻祖)) 예치쑨(葉企孫)
1992년 봄, 칭화대학 구석방에 원로 과학자 27명이 모였다. 중국 원자탄의 비조 자오중야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양전닝 등 세계적인 과학자가 대부분이었다. “내년이 예치쑨 서거 15주년이다. 공정한 평가를 받을 때가 됐다. 동상이라도 세우자.” 미국에서 날아온 우젠슝이 핸드백을 열었다. 손수건을 꺼내며 훌쩍거렸다. “비극적인 말년을 생각하면 속이 터질 것 같다.” 다들 눈시울이 붉어졌다. 1년이 후딱 흘러갔다. 한 언론매체에 생소한 인물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린다. “중국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양전닝과 리정다오, 원자탄의 아버지 첸싼창과 왕진창 같은 걸출들을 배출한, 중국 근대 물리학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라며 업적을 상세히 소개했다.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예치쑨이 재직했던 칭화대학이 특히 심했다. “이런 대가의 족적을 우리와 단절시킨 이유가 뭐냐?” 예치쑨 탄생 100주년 기념대회가 열린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성황을 이룬다. 90세를 넘은 중국 과학계 원로가 몇 마디로 예치쑨을 정의했다. “예치쑨이 있었다는 것은 물리학계의 영광이며 교육계와 중국 지식인의 영광이었다.” 리정다오도 스승을 회고했다. “노벨상을 받으며 제일 먼저 떠오른 얼굴이 예치쑨 선생이었다. 중국의 제대로 된 물리학은 선생으로부터 시작됐다.” 예치쑨은 어릴 때부터 유학(儒學)의 기초가 단단했다고 한다. 열일곱 살 때 이미 국내외 출판기구, 학술단체와 교류하며 성숙한 학자티를 풍겼다고 한다. 중국 고전 연구와 감상력도 뛰어났다. 독서도 건성으로 하지 않았다. 상세한 독서일기를 남기는가 하면, 전국을 유람하며 가는 곳마다 자연과 풍물을 시(詩)로 화답했다.
3.
예치쑨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 유학을 떠난다. 시카고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한 예치쑨은 “과학은 경제의 산물”이라고 확신한다. 경제학과 수업도 빠뜨리지 않았다. 대학원은 하버드대학을 선택했다. 훗날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피시 브리지먼 문하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미국의 저명한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들이 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학위 논문도 마찬가지였다. 귀국한 예치쑨은 물리학과 설립을 준비하던 모교인 칭화(淸華)대에 초빙을 받는다. “평생을 인재 육성과 중국의 과학 사업에 일관하겠다”는 일기를 남겼다. 27세. 청년티가 물씬 날 때였다. 대학환경은 녹록치 않았다. 북양정부에 예속된 칭화대학은 총장이 전권을 행사했는데, 총장은 학문과 거리가 먼 관료나 정객이 대부분이었다. 자연적으로 관료들과 교수진들 사이에 충돌이 많았다. 예치쑨의 투쟁으로 관료들이 대학을 떠나고, 교수회의가 대학을 대표하는 교수치교가 펼쳐진다. 예치쑨은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우리의 장관급에 해당하는 중국과학원 학부 위원 55명이 예치쑨의 제자였고,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인공위성 개발에 거대한 공을 세운 과학자 70여 명도 예치쑨의 제자였다. 한 역사가는 이런 평을 했다. “예치쑨은 이미 공자를 추월했다.” 그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고 한다.
4.
관료들이 대학 운영을 좌지우지하던 시절, 북벌(北伐)에 성공한 장제스가 난징에 국민정부를 수립한 무렵, 예치쑨이 장제스와 담판 후 대학을 교수중심으로 변화시켰다. 1949년 1월, 중국인민해방군이 베이핑에 입성한다. 군사관리위원회가 칭화대학을 접수했다. 교무위원회 주석 예치쑨은 정치와 거리가 멀었다. 현실 대처 능력이 신통치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예치쑨은 천성이 학자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건 케인스건 그 소리가 그 소리”라는 말을 자주 했다.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가지 않은 이유도 단순했다. “철학책 한 권만 읽으면, 마르크스나 레닌주의 받아들이는 건 일도 아니다”는 말을 했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미운털이 박히던 시절이었다. 예치쑨은 대학 운영에서 점차 소외되기 시작한다. 공산당 정권수립 3년 후, 신중국은 대학 조정을 단행한다. 예치쑨도 베이징대학으로 자리를 옮긴다. 교수치교의 신봉자였던 예치쑨은 되는 일이 없다. 불평이 늘어나고 웃음이 사라진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예치쑨도 비껴가지 못한다.
5.
문혁기간 중 예치쑨은 말도 안 되는 ‘반동학술 권위’로 몰린다. 홍위병들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맞았다. 말 같지 않은 심문에 시달렸지만,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결국 예치쑨에게 ‘국민당 스파이’라는 황당한 죄명이 붙는다. 제자들은 통탄했다. “중국인들의 건망증은 당할 자가 없다. 예치쑨은 어느 당파건 참여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1948년 말, 해방군이 칭화원(淸華園, 칭화대 사람들은 칭화원이라는 명칭을 애호했다)에 임박했을 때도 의연했다. 국민당이 일류학자들을 베이핑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보낸 비행기도 타지 않았다. 선생은 공산당도 교육과 과학을 소홀히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강했다. 국민당 스파이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6.
대학을 접수한 중국공산당 내부엔 자신의 자리보전을 위해 유의미한 공적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인물들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예치쑨을 다시 국민당 스파이로 몰아가는 인물들 때문에 하루아침에 처지가 형편없어진다. 구금되어서 곤욕을 치른다. 대학 측은 예치쑨의 가택 수색과 월급지불을 중지했다. 매달 소액의 생활비만 지급하고 거처도 학생 기숙사로 제한했다. 다소나마 행동의 자유는 허용되었지만, 거리의 노숙자나 다름없는 모습이 목격된다. 젊은 학생이 지나가자 돈이 있으면 몇 푼만 달라며 손을 내밀기도 했다. 모욕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던 학자들이 속출하던 때였다. 세월이 지나서, 예치쑨은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4년간 예치쑨을 조사한 베이징대학 측은 무혐의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미 예치쑨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교수자격을 회복하고 숙소도 배정받았지만,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전립선 비대증이 심각했다고 한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소변도 가누지 못했다. 방 안에 악취가 진동했다. 의사들이 수술을 권해도 막무가내였다. 치료도 거절했다. “내버려둬라. 이제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몇 년 더 살아봤자 의미가 없다. 내게 관심 갖지 말고 문병도 오지 마라.” 1977년 1월 10일, 예치쑨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친구들이 수레에 태워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측은 고약했다. 신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며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반나절을 기다리다 아는 의사를 통해 뒷문으로, 그것도 몰래 들어가서 겨우 입원했다. 예치쑨은 입원 3일 만에 눈을 감았다. 당 선전부는 “평가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도를 금지시킨다. 일주일 후, 초라한 추도회가 열렸다.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 추도사를 읽는다. 중국 과학과 과학인재 양성에 거대한 공적을 남겼다는 언급이 없다. 보다 못한 물리학자 우유쉰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이런 억울한 일이 있느냐며 통곡을 했다. 사망 9년 후, 예치쑨은 명예를 회복했다. 찬사가 쏟아졌다. 1999년 9월, 중국은 양탄일성(兩彈一星, 원자폭탄, 수소폭탄, 인공위성)공로자 23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거의가 예치쑨의 제자들이었다. 2016년 5월, 중국은 예치쑨의 업적을 기리는 우표를 발행한다.
7.
비록 말년은 비참했지만, 중국 과학부문 명예의 전당에 오른 예치쑨의 이야기를 옮기면서, 정치는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한다.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에게, 과연 무엇을 위한 정치인가?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묻고 싶다. 아울러 말로만 ‘과학강국’을 내세우고 실질적인 계획과 실천은 계속 미루고 있는 한국의 상황을 보면서, 그 어수선하고 궁핍한 중국의 현대사에서도 학문에 매진한 학자들의 기개에 진솔한 찬사를 보낸다. 예치쑨을 통해 중국현대사의 한 귀퉁이를 본다. 중국과 한국의 과학 분야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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