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무뚝뚝한 인상이라 누군가 내게 호감을 보일 때면 일단 경계를 한다. 대개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거나 약장수, 혹은 무심결에 베푼 배려가 다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누군가의 호감에 최대한 호들갑을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익숙하지 않다보니 오바해서 피하거나 홀로 상처입을 때가 많다. 유리멘탈 같으니. 보자마자 서로 혹 반해서 맺어진 친구 사이도 좋지만 서로 조금씩 호감을 쌓아가는 관계도 좋은데 살면서 그런 경우는 한두번 정도였다.

 

 어렸을 때도 그랬지만 나이 들어서 친구를 만들기는 만만치 않은데 요즘 호감가는 사람이 생겼다.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바르고 예쁘다. 좁은 동네다보니 여기 가면 만나고 저기 가면 스쳐서 오다가다 몇번 인사하다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는 사이가 됐다. 아직 서로 나이는 모르고 어떻게 여기로 흘러들어왔는지, 공통의 주제 정도만 얘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참 좋다. 지금 내 역할에 맞는 친구를 사귀어야한다거나 이런 압박 없이 말이다. 누군가가 궁금해진게 참 오랜만이다. 꾸며낸 상냥함이 아니라 본래 갖고 있는 다정다감함에 스르르 빠져든달까.

 

 통통볼도 아닌게 통통 튀려고 애쓰던 시절에는 무례하게 사람 간을 봤다. 에둘러가지 않고 바로 궁금한 것을 묻고 사람을 파악했다고 자신하며 관계를 맺었다. 지속될리 만무했다. 파악한 것도 거즘 겉핥기가 다였다. 지금은 그러지 않으려고 모처럼 계속 만나고 싶은 사람을 봤는데 함부로 나대지 않으려고 자중하고 있다. 누군 이런 나를 보면서 사람이 바뀐거 같다, 사람이 쉽게 안 바뀐다면서 훈수 두지만 그 말 때문이라도 확 바뀌어야겠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이나 너무 해가 쨍쨍한 날 말고 선선하거나 살짝 흐린 날 맛있는 김치볶음밥을 해서 그이를 초대하고 싶다. 아기 또래의 친구랑 아기는 거실에서 놀고 나는 그이랑 맛있는거 먹으면서 밥을 먹고 코코아를 넣어 카페모카 맛을 내는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싶다. 호구조사 말고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이야기를 조금씩 듣고 내 얘기도 조미료 치지 않고 건네고 싶다. 아기 얘기 말고 우리 얘기를 진득하게 나누고 싶다. 아기들이 가만 놔둘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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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겨울, 북콘서트 자리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이창근씨 가족이 있었다. 대기실에서 그 가족의 얼굴을 실제로 본 이들은 일순 숙연해졌다. 뭐라 잘 설명할 순 없어도 그동안 버텨오신 날들의 이력이 두 분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였다. 가장이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견디며 보낸 몇 년과 아내가 생활을 꾸리며보낸 몇 해, 엄마아빠의 투쟁 현장을 따라다니며 아이가 보낸 나날의 세목은 다른 듯했다. 하지만 세 시간 다 보통 시간이 아니었을 거라는 점만은 분명해 보였다. 북콘서트 2부 때 두 분은 고통을 나누는 과정과 의미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두 시간 남짓 주최측에서 준비한 프로그램이 모두 끝났을 때 사회자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 지금 당신을 가장 절망케 하는 건 무엇입니까.

(중략) 이윽고 이창근씨 아내인 이자영씨 차례가 왔을 때, 그녀는 누구도 건너본 적 없는 시절로 혼자 돌아가듯 담담하게 말했다.

“저를 가장 절망하게 만든 건, 더 노력해야 된다는 말이었어요.”

 

  그 말 앞에서 나는 좀 놀랐다. 그리고 또 ‘놀랐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철저히 그녀의 고통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노력한들 세상에는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고통과 그 고통이 담긴 타인의 몸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자영씨는 여기서 어떻게 더 노력하라는 건지, 어떻게 더 힘을 내라는 건지 알 수 없어 때때로 절망스러웠다고 했다. 그녀의 대답 속에선 황량한 외로움이 느껴졌다. 육체적, 정신적, 금전적 고통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세상의 무관심과 폭력 속에 홀로 버려진 느낌을 받을 때 그 시간에 잠겨본 자만 알 수 있는 외로움이었다.

 

  그런데 최근 진도 앞바다에서 나는 비슷한 장면을 봤다. 바닷물에 맨발을 담근 채 쪼그려앉아 울고 계신 분의 뒷모습에서였다. 한밤중 ‘우리 아이들을 빨리 꺼내달라’고 진도에서 청와대를 향해 어둡고 캄캄한 길을 십여 킬로미터나 걸어간 분들의 초조 속에도, 파도가 거세게 이는 바다를 향해 ‘힘없는 엄마 자식으로 태어나게 해 미안하다’고 외치던 분의 울음 속에도 그런 한기가 있었다. 보통 사람은 가늠할 수 없는, 표현할 수도 없는 거대한 외로움이 그것이었다.

 

[눈먼자들의 국가]에서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20대 국회에 오는 6월 8일, 41만 6천명의 서명을 받아서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개정 입법청원을 하려고 합니다. 아직까지 많이 모자라다고 하네요. (지난주까지 약 15만명).
 세월호 참사 특조위가 세월호 조사까지 할 수 있도록 조사기간을 보장할 것, 성역없는 조사를 보장할 것, 특조위의 독립성 강화 등을 요구하는데요. 서명하셨다면 안 한 분들 동참시켜주세요.

링크 참조해서 서명에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온라인 서명: https://docs.google.com/forms/d/12wFEU8xCJ47vsEZ3_OXZOiYjTqgQhVQ5oCu4-lYs52c/viewform?c=0&w=1

4.16 연대 홈페이지: http://416act.net/notice/14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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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친척 오빠랑 (새)언니, 동생과 고기를 구워먹었다. 참숯은 아니지만 불을 기가 막히게 조절해서 고기 맛이 좋았다. 아니지, 고기는 거의 탔지만 산으로 둘러싸인 동생 집에서 정신없이 먹는 조카들을 옆에 두고 있다보니 맛나게 느껴진거지. 한잔 두잔 술잔을 기울이고 저물어가는 풍경을 지켜보며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워나갔다. 가부장의 때를 못벗은 오빠는 언니가 아침밥을 안 챙겨준다는 한탄을 했다. 나이가 몇갠데 아직도 밥을 못챙겨먹냐고 뭐라고 했더니 또 뭐라뭐라하고. 이야기는 산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칠줄 몰랐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누군가의 말을 끊고 얘기를 하는걸 인식했다. 그러길 한 번, 두 번, 세 번. 인지한 것만 세 번이었지 아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약간 취했고 흥겨웠다. 언니, 오빠에게 난 항상 똑소리나고 야무진 동생이고 동생에겐 믿음직한 언니였으니까 좀 자신했을까. 내가 대화 도중에 끼어들어도 좀 봐주겠지란. 아무도 내가 말하는 도중 끼어드는걸 제지하지 않았고 불쾌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눈치챘다. 꼴같지 않은 짓을 한다는 생각에 아득해졌다. 내가 뭐라고 사람들 말을 가로채고 말을 끊는단 말인가. 며칠 뒤 동생을 만나서 내가 그랬노라고 고했다. 한소리 들을 줄 알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동생 왈, 언니가 아기랑 있다 보니 얘기가 하고 싶었나보네.

 

 한다. 독설이라면 나 못지 않은 동생이 선뜻 저렇게 말해주니까 고맙고 푸근하고 그렇다고 막 고맙다고 하긴 쑥쓰러웠다.

 

 언젠가 동생 지갑에서 소원을 적어놓은 종이를 본적이 있다. 가족들이 건강했으면 좋겠다하고 뭐 사고 싶고 뭐 하고 싶다고 써놓은 말미에 언니에게 30평대 집을 사주고 옷이랑 화장품, 책을 사주고 싶다는 글이 적혀있었다. 맨날 얼굴 방치하지 말라고 구박하고 정리정돈 좀 하라고 한소리 하는 동생.

 

 동생은 요즘 수시로 찾아와 놀다간다. 아기가 입을 삐죽거리면서 우는 게 이뻐 죽겠다며 발을 물어대는 통에 접근금지라고 협박했지만 짠하고 고마운 맘이 들 때가 많다. 언니 심심할까봐 와서 고스톱 치고(거의 동생이 따서 거지될 지경) 아기랑 한참을 놀다간다. 혼자 먹는 밥은 아무리 맛난 반찬이 있어도 맛없는데 동생 덕에 대충 볶은 밥도 맛나게 먹는다.

 

 아기 보는 게 한결 수월하고 행복한 건 옆에서 지치지 않게 도와주는 동생이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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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2 2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18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잦은 음주와 이어지는 코곯이로 몇주째 신랑과 따로 잤는데 어제는 코를 곯지 않겠다는 확고한 다짐을 받고 같이 잤다.

어제는 낮고 가늘게 코를 곯아서 신경은 쓰였지만 따로 자진 못한채 몇번 뒤척였다.

혼자 쓰는 침대가 익숙했는지 자리도 불편했다.

- ㅇㅇ씨, 내가 작은방에서 잘게. 자기가 침대에서 자.

- 나 코 많이 곯았어?

- 아니. 어제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자리가 좁고 불편했어.

- 알겠어. 그런 아치가 침대에서 자. 나는 내가 알아서 잘게. 옷장이든 어디든.

- 옷장에서 자면 재미있겠다.

- 그런데 옷장에서 자다 다음날 아침에 나 못볼 수도 있어.

- 응?

- 자는 동안 다른 세계로 갈 수 있거든.


*

신랑은 염장 다시마를 깨끗이 씻어서 먹기좋게 썰고 나는 초고추장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왠지 주말 저녁에 초고추장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변덕이 생긴 것.

신랑이 선뜻 자기가 초고추장을 만들겠다고 했다.

침대에 누워서 뒹글거리며 초고추장 만드는 신랑을 봤다.

조청이랑 현미식초를 조금씩 넣어가며 고추장을 찍어먹어보고

싱거운지 매실청을 넣고 깨를 갈아서 넣는다.

새콤한지 다시 고추장을 푹 퍼넣고 조청도 조금 더 넣는다.

그 모습을 보는데

ㅇㅇ씨가 나 없어도 잘 지내겠구나란 생각이 들어 울컥했다가

나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

요즘 우리 관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 '연속 동작'

과자를 먹고 나면 봉지는? 바로 쓰레기통에 넣는다.

물통이 다 비었으면? 물을 끓여놓는다.

과일 다 먹은 접시는? 설렁설렁 헹궈서 물기를 뺀다.

둘뿐인 생활이지만 연속동작을 하지 않으면 빈틈이 발생하고 그 틈에서 '안 맞네'란 잠정적 결론을 내리고

서로를 미워할까봐 자신이 손 댄 일은 다 끝내기로 했다.

잘 지켜질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서 서로 싫은 소리, 잔소리를 할 때가 많아서

이번에는 냉장고에 상대가 했으면 좋겠는 일들을 적어놓는다.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로 일주일 동안 뭘 맛있게 해먹을 수 있을지 상의도 한다.

나는 이런 게

신랑과 내가 6시면 퇴근하는 삶을 살고

지금 여기에서 살기 때문에 가능한거라고 생각한다.

예전엔 외식이 잦았고 식사를 때우는 방식이었는데

지금은 왠만해선 집에서 다 해먹는다.

나가서 사먹을 곳이 없기도 하고 서로 의견조율하면서 음식 만들만큼 여유도 있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지금이 조금 더 낫다.

우릴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소꿉장난 같은 일상보다는

좀 더 탄탄하고 계획적인 삶으로 진입할지도 모르겠다.

그때까지, 지금 잠시 외출하는 기분을 내고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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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9-2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아치님, 그동안 결혼 하셨어요??

Arch 2015-09-22 13:07   좋아요 0 | URL
^^ 본격 결혼은 아닌데...
 

  출퇴근 길에 마주쳤던 개의 이름은 ‘사랑이’다. ‘사랑아’라고 부르면 눈꼽이 잔뜩 낀 얼굴을 내밀며 꼬리를 흔든다. 사랑이는 아이들을 네 번 낳은 베테랑 엄마고 함부로 사람들을 타고 오르거나 무턱대로 짖지 않는 점잖은 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랑이가 보이지 않았다. 사랑이가 있던 자리에는 흙과 돌이 한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주인 아저씨는 군에서 공사를 한다고 사랑이가 살던 곳을 비워줘야 했단다. 아저씨 땅이 아니라 군 땅이니 어떻게 할 수 없긴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나게 큰 흙산을 만들어버렸을 때는 무척 놀랐다고 한다. 지금은 없지만 언뜻 본 공사 안내 표지판에는 물을 끌어올리는 공사를 진행해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보다 쾌적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취지가 적혀 있었다.

 

  과연 그 물을 끌어올려 전기세 들여가며 분수를 돌리고 밤에는 촌스러운 조명을 밝힌다고 관광객이 올까? 취지부터 잘못됐다. 언젠가 지역 경제의 중요성에 관한 강의에서 춘천 닭갈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춘천에는 닭갈비가 유명하다. 맛있기도 하지만 지역 사람들이 즐겨 먹기 때문에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관광객은 한때지만 그 지역에서 계속 살고 있는 사람들이 찾아야만 가게도 영업이 되고 맛도 유지가 되는 것이다. 지역 주민들이 즐겨 찾지 않고 밖을 향한 관광을 위한 공사란 첫걸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원래 계획한 것이니 그냥 밀어붙여도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공무원은 주민 의견을 모아서 집행할 뿐인데 주민들 뜻과 상반되거나 무리한 일로 예산을 써도 책임지는 일이 없다. 계획이 방만해지고 무책임해지는 일이 허다하다.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넘겨짚는 것이다. 하지만 계획의 무모함과 방식의 야만성, 성과에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구조라면 넘겨짚는 얘기가 그리 억지만은 아닐 것 같다.

 

  군의 땅을 무단점유한 아저씨가 권리를 행사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아저씨가 방귀 꽤나 뀌는 지역 유지였다면? 지역 유지가 아니어도 한가닥 성질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주변 사람들을 끌어들여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랬더라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했을까 싶다. 물론 이건 ‘떼쓰기’ 밖에 안 된다. 옳은 일도 아니고 추천할 방법도 아니다. 하지만 왜 국가권력은 이렇게 떼쓰기조차 못하는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행사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사를 간 사랑이는 낯선 환경에 많이 긴장한다고 들었다. 밤마다 늑대처럼 구슬피 울며 주인 아저씨를 속상하게 한다. 아저씨는 주변에서 개 울음소리 때문에 신경 쓰인다고 개를 치워달라는 얘기가 있다며 혹시 사랑이를 키울만한 곳이 없는지 묻는다. 그럴만한 장소가 없어 그저 죄송하다는 말씀밖에 드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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