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전에 태동검사를 통해 진통 강도는 이 정도면 괜찮은데 간격이 너무 멀고 자궁문 열리는 속도가 느리다며 촉진제를 맞자고 했다. '오전에 의사가 오늘 안에 낳자고 했는데 9시간 진통 했으니까 자궁수축제를 맞는다고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란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자궁수축제인 옥시토신을 맞자마자 진통은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밀려왔다. 한숨 돌리면 다시 진통이 시작되고 또 시작됐다. 임신 초기에 다양한 선택지 안에서 고민했던 내용들이 참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가능하면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진통이 언제 끝날지 모를 지금 상태라면 제왕절개나 무통분만 등 인위적인 시술도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촉진제 맞으면 오늘 안에 낳나요?' '그럴 수도 있지만 진통하다 말기도 한다'고 간호사가 말했을 때는 진통하다 말고 펑펑 울고 싶었다.

 

 진통이 올 때 간호사가 코로 숨을 깊게 들이쉬고 입으로 내뱉는 호흡을 해야 아기도 밑으로 잘 내려올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몸을 비틀며 진통을 견디는데 급급했다. 빨리 이 과정이 끝나서 아이를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촉진제를 맞기 전 자궁문이 5cm가 열렸는데 촉진제를 맞고 나서 진통이 계속되니 골반이 아릿하고 간이 침대에 발을 쾅쾅 구를 정도로 주책 맞게 아팠다. 10cm가 열려야 분만할 수 있다고 했는데 설마 지금 버틴 시간만큼 또 견뎌야하나. 생각할 틈도 없이 진통이 계속됐다. 촉진제를 맞은지 30분쯤 지나서 간호사 한명이 내진을 했다. 그러더니 간호사들이 우르르 분만 대기실로 몰려들어와 순식간에 공간을 메웠다.

 

 분만 준비가 갑작스레 시작됐다. 내진으로 자궁문이 충분히 열렸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산도를 유지하기 위해 다리는 최대한 벌리고 진통이 시작되면 손으로 허벅지를 꽉 잡고 힘을 주라고 했다. 아기가 위험할 수 있으니 진통이 있어도 몸을 비틀면 안 되고 호흡을 끝까지 해야한다고 했다. 아기는 엄마보다 세배나 고통스럽게 나올 준비를 한다고도 했다. 고통은 극에 달하는데 여러 요구와 꾸짖음, 협박이 오고갔다. 몸을 최대한 안 움직이며 다릴 잡고 힘을 줬다. 내진을 하던 간호사가 신호를 보내자 등 뒤에서 날 받치고 있던 간호사가 내 몸을 공처럼 구부러트렸다. 이 후 신속하고 일사분란하게 분만실로 이동했다. 이 과정은 흡사 분만 어벤져스 같은 느낌을 줬다.

 

  분만대 계단 위로 올라갔다. 휑하고 썰렁한 분만대 위에 누워 얼마나 더 기다려야 아이가 나올지 생각하다 다시 진통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진통이 있을 때마다 분만대 손잡이를 힘껏 당기고 다리 올리는 곳에 발을 올리고 힘껏 밀라고 했다. 호흡을 뱉지 말고 숨을 참으며 힘을 주라고 했다. 하라는대로 했지만 진통을 견디느라 몸을 비틀어 또 혼났다. 대변을 볼 때 힘주는 곳에 힘을 주고 다시 힘껏 밀고 당겼다. 신호에 맞춰 있는 힘껏 힘을 줬다. 간호사가 자신이 하겠다며 다시 분만대로 올라와 내 등 뒤에서 내 몸을 구부러뜨리며 배를 꾹 눌렀다. 몇 차례의 진통과 힘주기가 끝나고 뭔가 준비됐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아마 아기 머리가 보였나보다. 수술 가운을 입은 의사가 나타나고 다시 한 두번 더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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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3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13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임신 초기의 불편함과 기분 저하는 임신 중기의 '살만한 몸 상태'가 되면서 완화됐다. 임신 중기가 되면서 배가 조금씩 불러오는 것 말고 큰 변화가 없었다. 주변에서 이런저런 안부를 묻는 것 말고는 신경쓸 게 하나도 없는 거뜬한 상태랄까. 정체모를 무기력함이 아예 없어진 건 아니지만 속도 편해지고 태동을 느끼면서 맘도 많이 안정됐다. 임신 말기로 가면서 다양한 증상들이 나타났다. 골반이 조금씩 벌어져서 걸을 때 뒤뚱거린다거나 생리할 때처럼 가끔 배가 싸하게 아팠다. 아기가 점점 밑으로 내려가서 배 아랫부분이 묵직하고 신트림이 자주 나서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예정일인 화요일이 지나도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되지 않아 산부인과에서 유도분만 날을 정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부터 가진통이 시작됐다. 진짜 진통 같아 간격을 재가며 병원 갈 준비를 했는데 갑자기 진통이 뿅하고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정도' 진통으로 아기를 낳는 건 어림도 없다는걸 알았어야 했는데 처음이라 알 수가 있나. 아기를 처음 낳는 초산인 경우 양수가 터지거나 진통이 5분 간격으로 짧아야 병원을 가란 얘기가 있다. 그만큼 자궁문이 열리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한다. 간헐적으로 진통을 하다 보니 진짜 진통을 해서 얼른 아이를 만나고 싶은 바람이 커졌다. 금요일 밤에 살살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밤새 진통이 계속되고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중에 안 바로는 자연관장이라고 아이를 낳기 전에 몸이 미리 장을 비운다고 했다. 진통주기를 확인해보니 거의 3분대여서 진통이 그치지 않길 바라며 병원으로 갔다.

 

 

  새벽 6시, 병원에 도착했다. 잠이 덜 깬 간호사가 옷을 벗으라고 하더니 위생장갑을 끼고 질을 내진하고 2cm 정도 열렸다며 입원복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갑작스럽고 황망해서 뭐라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분만할 때까지 이어졌다. 링겔을 맞으며 산부인과 출산 굴욕 3종세트라고 하는 제모와 관장을 했다. 나머지 하나는 회음부절개다. 30분마다 태아 심박수 체크를 하고 간호사들이 번갈아가며 예고도 없이 내진을 했다. 자궁문이 얼마나 열렸는지 확인하는 거라는데 질 속을 손으로 휘젓는 것 같은 통증이 둔하게 느껴졌다. 초음파 검사할 때와는 다르게 환한 형광등 불빛 아래서 시간차를 두고 내진을 하니 민망하기도 했다. 혹시 모를 수술에 대비해서 금식을 한 터라 입은 바짝 말라가고 진통은 계속됐다.

 

 

  언제 끝날지 모를 진통은 오후 12시를 기점으로 강도를 더해갔다. 그전의 진통이 그냥 커피라면 12시 이후는 TOP? 뭐라고 비유할 수 있을까. 누구는 큰 트럭이 배를 깔고 지나가는 것 같다고 하고, 다른 누구는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 같다고 했다. 익숙하지 않은 아픔이었다. 저 멀리서 기척을 내며 다가오는데 두통이라면 머리를 누르고 복통이라면 배를 움켜쥘텐데 이 진통은 아련하게 다가왔다 기세등등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달까. 한번도 겪어보지 못해 낯설고 자궁 수축 때문에 오는 통증이란건 알겠는데 좀 막막했다. 신음소리가 절로 나고 신랑은 옆에서 골반과 등허리를 연신 문질러줬다. 그 전 진통이 아팠지만 견딜만 했다면 12시 이후에는 배 아래 근처에서 소용돌이치고 움찔거리며 통증이 시작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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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에 마을 행사에 갔다가 할머니들 틈에 껴서 전이랑 이런저런 잔치 음식을 먹었다. 마침 깬 아기를 돌보며 어머니들 아기 키웠을 때 얘기, 아기가 올망졸망 예쁘다는 얘기 등등을 두런두런 나눴다. 할머니들 중 유독 한분이 아기를 귀여워하며 한번 안아보자고 했다. 선뜻 아기를 안겼더니 한참을 아기랑 재미있게 놀았다. 그러다 밥 때가 돼서 (그동안 먹은 건 에피타이저였나? 무려 돼지고기 삶은 것까지 먹어치웠는데) 밥이랑 국, 반찬이 바닥에 깔리자 할머니가 밥을 먹어야겠다며 아기를 나한테 '던지듯' 건넸다. 다른 어머니들이 애기 엄마 어쩌고 하면서 챙겨주는데 그 할머닌 나만 쏙 빼놓고 옆 할머니한테 수저를 준다. 옆 할머니가 '애기 엄마는'이러면서 챙길 정도.

 

 아기랑 놀다 우유를 먹는데 자꾸 할머니가 놀자고 발을 간지럽혔다. '해찰하면 애기가 밥을 잘 못먹어요.'라고 해서 그런가.

 

 평소에 자주 가는 베이커리 까페가 있다. 임신 했을 때는 혼자 가서 책도 보고 그랬던 곳인데 주인이 마음씨 곱게 두분이 왔다며 포도즙을 줘서 더 인상적이었던 곳이다. 아기가 어느 정도 컸을 때 까페에 들렀는데 아기에 대해 아무런 말을 안 하는거다. 평소에 데면데면했던 가게 사장님들도 활짝 웃으며 아기 좀 보자 했는데.

 

 아기가 귀한 시골이라 아기를 데리고 다니면 기대 이상의 환영을 받는다. 아기도 얼르고 웃는 어른들에게 환하게 웃어준다. 환영이 디폴트값이 되다보니 안 그러면 서운하다. 가져선 안 될 마음이고 고마운 정도로 끝나야 하는데 기대치란게 맘대로 하향 조정이 안 된다. 아기를 막 귀여워하다 자기 일 있다고 신경을 안 쓰면 왜 그렇게 서운한건지.

 

 아기 덕분에 어디서건 내가 갖지 못한 관심과 집중, 사랑을 받아서 이걸 기준점으로 착각하는걸까. 암튼 종잡을 수 없는 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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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랑이 워크숍을 가고 동생도 점차 바빠지는 시기. 어제 오늘 아기랑 단둘이 있었다. 어제는 비가 안 와 더위가 한풀 꺽일 무렵 유모차를 끌고 밀며 바깥바람을 좀 쐬었다. 오늘은 비가 오다 안 오다 하니 괜히 나섰다 비를 맞을까 꺽정스러워 나갈 엄두를 못냈다. 그야말로 셀프 감금이다. 아기랑 놀다 누군가 오거나 잠깐 나갔다오면 분위기 전환도 되고 나도 잠깐 숨쉴 틈이 있는데 이건 꼼짝없이 대기상태로 아기가 잠들 때까지 있어야 한다. 혼자 아기 키우는 게 힘든 것보다 아기에 대해 말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게 더 적적하달까.

 

 아기에 집중하면서 몇개 발견한 건 있다. 아기는 이유식을 잘 먹지만 아직까지는 우유를 배부르게 먹고 싶어한다. 새로운 물건을 엄청나게 좋아한다는건 알고 있었는데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집중하는 건 처음. 그리고 또 뭐가 있었더라. 긴장이 툭 끊어져버리니까 기억도 뇌도 기능이 툭 저하된 듯하다. 아기는 순한 편이고(이젠 무슨 주문 같다.) 낮잠도 두번이나 자고 밤에 자면 쭉 자니까 요령껏 나 혼자 쓸 시간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혼자인 시간엔 이유식을 만들고 마늘을 까고 (그걸 대체 왜!) 멸치를 까는 등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아냐. 일을 하지 않고 멍하니 드라마 보는 시간도 필요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기가 기어다니기 시작하면 좋은 시절 다 갔다고 사람들이 겁줄 때 콧방귀 뀌었는데. 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배밀이를 하고 플랭크 자세로 무릎을 들 때 아찔한걸 보면 그 콧방귀 반납하고 싶다. 아기 낳기 전엔 '그때가 제일 편할 때다', 아기가 태어나서 누워있을 때는 '지금을 누려.'라고 하던 사람들에게 일일이 미안하다고 하고 싶다. 그럴거면 왜 아기를 낳냐고 따져묻지 않아 다행이다. 손에 닿는 모든 물건을 다 만지고 물고 뜯고 빤다. 조금만 가까이 가면 머리카락을 휙 잡아당겨 머리 끝이 얼얼해진다.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소리를 내고 보행기에서 펄쩍펄쩍 뛴다. 가끔씩 너무 사랑스러워 꼭 깨물어주고 싶다가도 앞서 말한 것들을 순차적으로 혹은 뒤죽박죽 시전해보이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난다.

 

  점심에 국수를 하려다 좋아하는(이라고 적고 처치해야하는 이라고 읽는다.) 야채들이 눈에 띄어 다시마 육수를 내서 채소 샤브샤브를 했다. 무려 아기랑 나 단둘이 있는데!  그 전에 이유식을 먹이고 아기 기분까지 다 체크했다. 낮잠 시간 한참 전이고 배도 불렀다. 정말이지 시작은 좋았다. 국물 맛도 괜찮았고 야채 손질도 금방이었다. 젓가락을 들고 먹기를 몇번, 으응 응거리는 아기. 고음까진 아니었지만 저 깊은 곳에서 소리를 끌어모아내고 있었다. 기저귀를 갈려고 봤더니 응아다. 씻기고 기저귀 갈아주고 보행기에 태웠더니 잘 논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먹어볼까. 알맞게 익은 청경채와 배추를 소스에 찍는데 으으 응 으 아!!

 

 보행기가 맘에 안 드나보다. 장난감은 자주 갖고 놀았다고 애초에 관심밖이다. 부엌에서 쓰는 깔때기와 주걱을 대령했다. 심히 만족스러운 듯하여 다시 젓가락을 짚었다. 다시 으으 응 아! 이유식으로 배가 덜 찼나보다. 우유를 타서 먹이니 자려고 한다. 그래, 자거라 너는 자고 엄마는 맘마를 먹겠다. 우유를 다 먹어서 잘 눕히고 자리를 뜨려고 하니 눈을 땡그랗게 뜨고선 놀자 한다. 엄마 밥 좀 먹고.

 

 주걱을 물고 씹고 뜯으며 노는 동안 국수까지 넣어서 점심식사를 끝마쳤다. 시계를 보니 식사를 하는데만 2시간이 걸렸다. 포만감이 안 드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정리하고 설겆이 하려고 하는데 잠이 온다고 칭얼댄다. 재우려고 같이 자장자장 하다 나도 같이 잤다. 기저귀도 빨고 설겆이도 해야하는데. 깨어보니 저녁. 다시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이유식을 데우고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이고 그리고. 하, 뭔 얘기를 하려다 여기까지 온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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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 - 판타스틱 픽션 WHITE 1-1 판타스틱 픽션 화이트 White 1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송정은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운이 좋으면 5시, 아닐 때는 4시에 아기 밥을 먹이고 7시에서 8시쯤 잠에서 깬다. 아기가 조금 더 자다 일어나면 기저귀를 갈고 아기 밥을 주고 나서 나도 밥을 챙겨먹는다. 이틀에 한번 꼴로 아기 기저귀를 빨고 저녁마다 젖병을 씻는다. 아기는 아침 무렵 1~2시간 놀다 잠이 든다. 전에는 포대기로 업어줘야 잤는데 요새는 우유를 먹다가 잠이 든다. 가끔 다른 곳에서 잘 때 잠투정을 하기도 하지만 잠은 잘 자는 편이다. 아기가 잠든 사이 방을 쓸고 닦거나 그냥 널브러져 있는다. 아침에 응아를 한 경우에는 기저귀를 빨고 아기를 씻기기도 하면서 체계 없이 마구잡이로 집안일을 하며 아기를 돌본다.

 

  오후에도 다시 비슷한 일과가 반복된다. 5시 무렵부터는 저녁 준비를 한다. 외벌이를 한다면 가사와 육아를 내가 전담하리란 예상은 했지만 너무 전담이라 가끔 협박과 한탄으로 신랑이 할 부분을 맡긴다. 하지만 이게 또 애매하다. 처음에 확고한 맘으로 일정 부분 집안일을 분담하게 하리란 다짐을 했다면 지금은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고 온 사람에게 걸레를 빨라거나 설거지를 하라고 하기 미안하다. 그래서 지금은 은근한 압박은 하되 막 시키지는 않는다. 주인의식을 갖으라거나 향후 내가 돈 벌러 나갈 때를 대비하라는둥 말이다.

 

  아기가 비교적 순한 편이고 밖에 안 나가면 벌떡증 나는 사람도 아니라 집에서 지내는 생활이 그렇게 나쁘진 않다. 우울증이 올만한 시기에는 가족들과 동생이 귀찮을 정도로 곁에 있어줬다. 신랑은 퇴근 후 다른 약속 잡아서 노는 것보다 아기 돌보는 걸 낙으로 생각한다. 신랑에게 아기를 맡기고 가끔 영화를 보거나 도서관에 가서 놀다 오기도 한다. 그럭저럭 이 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아기를 낳기 전 대단한 성취를 거두고 승승장부하던 여자였다면 어땠을까. 아기와 함께 그 모든 경력과 성취를 고스란히 반납하고 집에서 아기만 키워야 한다면? 신랑이 나보다 돈을 적게 버는데 꼼짝없이 육아를 해야 한다면 말이다. 딱히 아기를 원한 것도 아니고 갖은 고생 끝에 낳은 아기가 맹렬하게 나를 거부한다면? 그것도 모자라 주위에 나를 응원해줄 사람 하나 없는데 신랑마저 나를 아기에게 해로운 사람 취급한다면?

 

 서늘한 기운, 차갑게 굳어버린 에바의 얼굴, 빛나다 끝을 향해 으스러지는 조명.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보고 남은 건 영상의 이미지와 큼직한 감정 덩어리였다. 결과의 도덕적 판단은 명확하지만 원인은 유보할 수 밖에 없는 사건과 그 후에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를 영화는 이미지로 전달한다. 전지적 시점으로 내려다보며 주인공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이창동 화법은 아니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관객의 시도를 매번 좌절하게 만든다. 목요일의 사건은 누구 편을 들 수 있는 사안도 아닐 뿐더러 단서 역시 부족하다.

 

  책을 읽는 건 반신반의였다. 영화로 충분히 압도당했는데 책이라니. 그런데 책이 더 좋았다. 미국의 문화를 모르면 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고 잘 안 읽히는 문장과 오역, 오탈자가 여럿 있었는데도 한동안 푹 빠져 책을 읽게 만들 정도였다.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단박에 나를 사로잡았다. 남편인 프랭클린에게 편지쓰는 형식은 탁월했다. 당사자인 에바는 긴장감 없이 넋두리를 늘어놓는 게 아니라 남편과의 미묘한 갈등, 케빈의 비밀과 속마음을 검열하고 조정하며 객관적으로 전달한다.

 

 그동안 접한 틸다 스윈튼의 영화 속 역할은 비현실적이었는데 ‘케빈에 대하여’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 속 ‘에바’가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영화에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피해 공사장 찾아 안도한다거나 공놀이를 하는 씬이 기억에 남는데 책 속 에바는 더 맹렬하게 집요하고 차갑다. ‘어쩌면 내가 셀리아를 사랑하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어’란 말이 인상적일 정도로 에바는 케빈과의 악전고투에 너덜너덜해졌다. 게다가 사람들은 아이가 왜 그런지를 엄마에게 묻는다. 변명과 자기방어가 무색할 정도로 끈질기게 추궁한다. 에바가 할 수 있는 건 자기변명 대신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노출시키기. 사람들의 의혹은 더 커져간다. 무정한 엄마라면 아이가 그랬을 수도 있다는 가정도 서슴치 않는다.

 

 앞서 얘기한 것과 달리 아기를 돌보는 일은 본인이 아기를 낳기 전 어떤 사람이었는지와 별개로 고달프고 힘들다. 집에 갇혀 아기의 욕구와 활동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아기를 통해 인식과 기쁨의 지평은 넓어지되 사회적인 나는 콩알만하게 쪼그라들고 만다. 그럼에도 앞의 이야기를 한 건 이러저러한 변수들이 고된 육아를 좀 더 가볍게 할 수도 더 무겁게 자신을 짓누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에바에게는 그런 부수적인 도움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케빈은 너무나도 영리했다. 둘은 서로를 너무 잘 파악하고 싶어 쉽게 부모 자식 역할에 빠질 수 없었다.

 

“요즘에 무슨 밴드 음악 듣는지도 물어야지?” 그 애가 진지하게 말하더군. “다음엔 첫째 줄에서 날 간질이는 작고 귀여운 보지가 있는지도 알아낼 수 있겠는걸. 물론 그 단계로 넘어가는 건 전적으로 내 결정에 달렸지만. 하지만 복도에서 영계를 굴리기 전에 난 내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거야. 자, 이제 디저트도 나왔으니 약물에 대해서도 물어봐야지. 조심해, 당신도 날 겁줘서 고개를 떨어뜨리게 하고 싶진 않을 테니까. 당신은 당신이 그걸로 무슨 실험을 했는지 말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나 역시 실험을 했다는 뜻은 아니야. 결국 그 한 병을 다 빨고 나면 당신의 눈은 끈적거리는 시선으로 바뀔 거고, 함께 귀중한 시간을 보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고 하겠지. 그리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꽉 껴안을 거야.”

“네 말이 맞아, 비평가 선생.” 난 상추를 던져버렸어. “그래,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지?”

“이건 당신 아이디어였어. 난 이 빌어먹을 것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어.” 426p

 

“... 아줌마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는 ‘무식한’이야. 그다음으로는 ‘자랑하는’이고. 잘난 척을 하는 게 아니라면 ‘바보 천치 미친놈 개새끼들보다 내가 훨씬 잘났어.’는 대체 어디서 뚝 떨어진 거지? 그 여자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잖아. ‘믿고 있기... 다른 나라 사람들이 미국인들을 참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거야.’” 그 애는 이 말에 밑줄을 그은 다음, 혐오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내 눈을 바라봤어. “음. 당신이 다른 멍청한 미국인들과 계속해서 서로 닮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뚱뚱해지지 않는 거야. 당신이 독선적이고 우월하게 행동할 수 있는 건, 단지 당신이 말랐기 때문이니까.” 여기서 독선적이란 거들먹거리는 걸 말하는 거야. “어쩜 나한테는, 이 빌어먹을 나라에서 자기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는 커다란 암소 같은 엄마가 있었으면 더 나았을 뻔했어.” 433p

 

 하, 어떻게든 뭔가를 쥐어짜서 결론에 도달하고 싶지만 이 리뷰는 많은 물음을 남긴채 끝을 맺는다. 일반적인 도덕은 지루하고 차원이 다른 논의는 낯설다. 나는 다만 서늘한 기운과 날카로운 시선에 압도당한 채 결코 왜 그랬는지에 답할 수 없는 이야기를 읽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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