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을 누가 망치는가 - 소비자를 위한 유기농 가이드북
백승우 외 지음 / 시금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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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에 살지만 농사를 짓지 않는다. 흙을 만지고 작물을 키우고 싶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일손을 거든다. 얼마 전에는 자두 따는 이장님댁에서 자두 수확을 거들었다. 감 따는 것보다 훨씬 쉬웠지만 굽혔다 일으켰다 하는게 힘들었는지 엉덩이가 당겨 선별 작업조로 발령? 좌천 됐다. 이장님을 도와서 자두를 고르고 살짝 무른건 칼로 베어내 즙을 만드는 통에 담았다. 크기별로 선별기에 들어간 자두들이 노란 박스에 가득 찼다. 겉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데 유통을 거치면서 무르거나 상할 우려가 있는 자두는 즙을 내는 통에 담겼다. 자두답게 달콤하고 살짝 말랑거리는건 즙을 내거나 아는 사람에게 줬다. 해사한 향을 내뿜은 자두들은 맛이 아닌 오랫동안 여러 단계를 거칠 수 있는지에 따라 선별했다.


 예전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요근래 먹거리에 더 관심이 생긴다. 도시처럼 현란한 소스와 양념으로 입맛을 들었다놨다하는 외식이 빈번하지 않고 집에서 요리를 하다보니 좋은 재료야말로 그 자체로 완성형이란 생각이 드는 것. 퇴비로 키웠다는 고구마는 맹탕이라 샐러드를 할 수 밖에 없다. 대개의 야채들이 향이나 맛이 없다. 토마토는 선별을 해야해서 익기 전에 딴다. 황교익씨는 다 익은 맛과 향이 풍부한 토마토를 먹었으면 좋겠어서 그런 바람을 여러차례 유통상인이나 판매상인에게 얘기했지만 답은 부정적이었다고 했다. 선별하지 않은 토마토를 가판에 놓으면 누가 작고 못난 토마토를 고르겠냐는 것. 생산자나 판매자 입장에서는 크고 빛깔이 좋고 모양이 예쁜 것을 고르는 소비자를 감당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직거래를 해서 믿음을 주고 받고 얼굴있는 거래를 하면 어떨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지금의 유통구조가 정말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원가도 보전받지 못하는 농가와 밭떼기란 형식으로 농산물 생산량이나 수요에 따라 헐값이 되는 구조는 정말 아니었다. 나는 막연하게나마 직거래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농사처럼 불확실한 분야에서 중간 상인 없이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을 개별적으로 충당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농부가 주는대로 먹는 꾸러미가 있지만 이것만으로 식단을 꾸리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유기농, 생협활동은 초기에 협동과 연대, 얼굴이 보이는 농산물 직거래, 농사꾼은 소비자의 안전한 밥상을, 소비자는 농사꾼의 살림을 책임지는 방식의 사회운동 성격으로 시작되었다. 이때는 결품이 있어도 물건이 기대치에 못미쳐도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웰빙 열풍이 불면서 유기농쪽으로 다양한 소비자층이 몰리면서 애초의 사회적 성격 대신 유기농 역시 소비하는 쪽으로 흐르고 말았다. 관행농처럼 농약과 화학비료는 쓰지말되 빛깔과 모양은 그럴싸해야한다. 생협 등이 땅을 살리고 농부를 살리는 애초의 성격에서 소비자의 권리를 우선하는 소비자협동조합으로 변모하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소외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유기 농사를 지은 분과 유통을 맡은 분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쉽게 돈 쓰는 권리에 젖은 나 같은 소비자들을 뜨끔하게 한다. 


 내 가족만 생각한다면 그냥 일반 농산물을 먹는 게 낫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선택만 골라 하는 똑똑한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모양과 크기가 일정한 걸로만 아무 때나 사 먹겠다는 방식으로 농사꾼들에게 애를 먹이고 있다.


 우리 농업의 소중함, 유기농업의 가치에 대해 깊이 알고 우리 농업 환경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왜 결품이 나는지, 농산물 상태가 왜 안 좋은지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좋겠다.


 최대의 이윤 추구를 위해 어떤 것이든 훼손하는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서 가치 소비, 공정무역 등에 관심을 갖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일관되고 균일한 제품과 서비스에 익숙한 사람들은 '가치'에 방점을 찍은 경험이나 소비가 간혹 불편하기도 하다. 최근에 장애인들의 자립을 도모할 수 있도록 조성된 까페를 이용하면서 콧물을 훌쩍이는 한 친구가 빵을 굽는걸 보고 맘이 불편했었다. 마트보다 작은 상점을 이용하려고 하지만 유통기한을 일일이 확인하고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가격이 비쌀 땐 고민이 된다.


 책에서 잠깐 소개한 안철환 선생님의 자연농 이야기를 들으며 싱그럽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란 채소들을 상상한다. 귀농학교 다닐 때 자연농으로 키운 양배추의 아삭함과 참외의 생생한 향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런 먹을거리를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가슴이 벅차오른다. 소비자이기 전에 동시대를 고민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때때로 손쉽고 습관적인 선택을 한다. 계속 관심을 갖고 알려고 노력하고 응원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비료 팍팍 주고 농약 팍팍 쳐! 그리고 잘 골라서 보내
진짜 가족의 건강을 위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걸 원한다면 식량 작물을 생산하는 농업을 회복시키고 농업을 1차산업의 지위로 되돌려 놓는 것에 합의하고 강력한 사회적 힘을 만들어 이를 관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혁명적인 발상과 실행이 필요하다
자동차 산업의 성과는 자동차를 생산하는 기업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세금을 들여 길을 닦고 신호체계를 정비하고 면허를 쉽게 딸 수 있도록 제반 법규를 정비하고 주유소를 어디나 지을 수 있게 제도를 바꾸고 석유화하간업을 키우는 등, 전 국민의 동참으로 단시간에 세계적인 자동차 생산업체를 만들어냈다. 농업도 마찬가지다. 못할 일은 아니다. 단지 안 할 뿐. 새로운 길을 만드는 데 부족한 건 우리의 상상력이지 현실적인 장애물이 아니다.

친환경성은 실험실에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 속성. 생활철학, 생활 과정 등을 찬찬히 살펴봐야 비로소 이 사람이, 혹은 농산물이 환경 친화적인지 판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기농은 개념적 가치. 유기성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속성이다. 유기농업은 유기성이라는 가치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며 유기농산물을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가치가 충분히 구현됐다고 인증된 먹을거리이다.

‘책임지는 소비’란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바람직한 제품을 선택하는 소비를 말한다. 소비자가 가치 있는 상품을 선택하는 것은 더 나은 사회와 생태 환경을 만드는 일과 같다.
물질 중심으로 사고하게 되면 유기농의 사회적 가치는 점점 퇴색하고 책임지는 생산자들의 동기도 변할 수 있다. 생산 현장과 생산과정을 모르쇠하고 결과물에만 집착할 경우, 유기농업이 갖는 가치나 사회적 이여는 사라지고 단지 부유한 소비자의 특별한 소비 욕구를 만족하게 하는 값비싼 상품으로 전락하고 말 수도 있다.

식용유는 물리적인 압착 방식보다는 석유에서 만들어진 핵산을 이용해 기름 성분을 녹여내는 추출법으로 만들어진다. 콩이나 옥수수 등을 잘게 부순 후 핵산이라는 유기용매를 이용해 추출하고, 불순물을 제거하는 탈검 공정, 가성소다를 이용한 탈산 그리고 탈색, 탈취 공정을 거쳐 투명하고 깨끗한 기름이 나온다. 식용유는 깻묵처럼 유박에 해당하는 많은 영양 물질과 항산화 물질, 레시틴과 같은 유용한 물질들이 제거된 깨끗한 이름 용액일 뿐이다.
옥수수 사료를 먹고 자란 소에는 인간의 몸에 좋은 오메가3 대신 염증과 혈전을 일으키는 오메가6가 많다.
트랜스 지방은 식물성 기름에 수소를 첨가해 고체화시켜 인위적으로 만든 기름. 트랜스지방은 식물성기름을 고체화하여 산패 방지 효과와 조리의 편리성을 도모했지만 동물성 포화지방보다 더 나쁘다. 혈관에 쌓이면 심혈관 질환을 일으키고 당뇨병과 암도 일으키는 것
저항성 전분. 감자를 섭씨 121도에서 1시간 가열하고 섭씨 4도에서 24시간 냉각하기를 세 번 반복해 소화가 늦게 되는 저항성 전분을 만든다. 소화하기 힘들지만 포만감과 맛은 느끼면서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다이어트 식품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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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형아 검사에서 시작한 선택과 고민의 정점은 예방접종이었다.















 모르는 게 좋았을텐데 의식있는 부모들?이 주변에 있는 덕분에 예방접종의 위험성에 대해 직접적인 조언을 듣고 책까지 선물받았다. 예방접종 약의 낯선 성분에 수은이 들어있는지, DTP처럼 여러 백신이 합쳐진 것은 더 위험하다든지. 알아야하고 제대로 알고 있어야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책을 읽다가 포기, 나는 억척스런 엄마가 될 수 없는건가 잠깐 고민에 빠졌다.


 아는 언니에게 아이를 갖고 선택의 연속이었다며 이건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 같다고 하소연을 했다. 기형아 검사에서 시작해 태아보험, 출산 준비물까지. 한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분야에 대해 전문적으로 선택하고 알고 있어야 하는 스트레스. 언니는 '자아변형게임'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지금 집중하고 있는 문제 말고 내 힘과 에너지, 방향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게임이라고 했다. 전에 한번 해본적이 있다. 그때 세웠던 초점은 '피곤함에서 벗어나 생기를 되찾고 싶다'는 거였다.


 그 당시 어깨가 너무 결리고 몸이 천근만근이어서 정말 죽을 맛이었다. 눈 다래끼는 일주일 넘게 지속되고 피곤에 절어서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보약이라도 먹어야하는게 아닐까 싶었고 운동을 해야하나 잠깐 고민하기도 했다. 게임을 하면서 피곤함이 육체적인데 국한된 게 아니라는걸 깨달았다. 그 즈음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러지도 못하고 그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왔던게 몸으로 나타난 것. 감정영역에서 유독 힘들었었다.


 이번에 게임할 때는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고 좋은 엄마가 되게 해주세요.'라는걸 초점으로 잡았다. 같이 게임을 하는 분들이 물질영역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나는 내 수호천사 '힘' 덕분에 정신, 영까지 순식간에 도달했다. 의식 영역에서 뽑은 칩들은 무척 벅차오르는 단어들이었다. 기분좋음, 생명력, 충만함, 분별력... 


 불안했다. 준비없이 덜컥 아이를 갖은 것 같고 제대로 엄마 노릇을 할 수 있을지, 내가 먹고 입고 사는 게 고스란히 아이한테 간다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혹시 그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느라 정작 이 아이가 내게 왔다는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아이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와 a를 부모로 선택했다. 편안하고 고요한 뱃속에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를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한다. 아이가 나를 선택해서 온 것에 대해 온전히 고마워하지 못했다는 것, 이 아이를 만나면서 담담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는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언니가 말했다. 우리가 아이를 선택한 게 아니라 아이가 우리를 선택했다고. 부모는 이 세계가 아이가 있던 곳보다 안전하고 살만한 곳이란걸 전해주면 된다고. 예방접종을 안 맞춰서, 혹은 맞춰서 잘못되는 건 어쩔 수 없는거라고. 모든걸 부모가 책임지려고 하는건 오만한거라고. 조금 마음이 놓였다. 물론 태아보험을 내게 강권했던 친구를 만나서 현실적인 얘기를 듣는다면 또 다시 흔들릴지 모르겠지만.


 뱃속에서 꼬물거리던 아기는 요새 부쩍 힘이 세졌다. 발과 손으로 한번씩 배를 치는데 깜짝깜짝 놀란다. a가 배에다 손을 대면 새침하게 가만히 있다가 편안하게 누워있으면 다시 힘차게 움직인다. 나도 잘 모르겠고 내 불안과 걱정을 나 역시 책임질 수 없다. 하물며 다른 생명을 책임진다니. 꼬물거리는 아이를 이렇게 지켜보듯 아이가 태어나면 옆에서 지켜봐주고 힘내서 세상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성향상 간섭하고 잔소리꾼 엄마가 될 우려가 크지만 안 그러도록 노력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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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프로에서 가상 데이트 시뮬레이션 같은걸 했다. 눈빛이 마주치고 처음 손을 잡았을 때의 설렘, 망설이고 망설이다 어렵게 내뱉은 고백 같은 것. 아, 나도 저렇게 풋풋할 때가 있었지 싶은. 그런데 그런 장면들은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본격 설렘 같은 것. '자, 봐라. 이래도 연애 생각 안 나겠어? 이래도 안 설레겠어?' 이런 느낌. 솔로의 가슴을 후벼파며 누가 더 가슴에 불이 났는지 경쟁하듯 내뱉는 얘기도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대신


 아는 언니들이 올 12월에 일본 여행을 가는 건 구미가 당겼다. 다들 옆구리에 남편과 아이를 주렁주렁 끼고 있지만 파격적으로 4일 정도의 휴가를 받고 간다는 여행. 언니들은 여행 일정을 얘기하면서 혼자 떠나면 게스트하우스 같은데서 남자-사람을 만날지 모른다는 얘기를 했다. 하, 혼자 여행 떠날 생각도 없고 남자 사람에 대해 관심도가 팍 줄은 요즘인데 그 얘기를 듣고 있자니 왜 이렇게 맘이 동하는지.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향후 몇년간은 아이 때문에 옴쭉달싹 못할거라 더 그럴거라는 위로를 망고쥬스처럼 들이키며 은근히 상상해봤다.

 낯선 여행지, 낯선 사람, 낯선 분위기와 만남. 

 a에게 살짝 이 얘기를 했더니 '당신은 그럴 것 같은데'란 참으로 나를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어서 귀를 잡아당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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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이 무료했거나 새로운 전환이 필요하다거나 이유를 찾으려면 뭐든 있겠지만 여전히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내가 임신을 하기로 결심하고 지금 8개월째 꼬물거리는 태명을 가진 아이를 가지고 있는 이유 말이다.


 의학적으로 노산의 경계에 들어선 나이 때문에 조급했던 건 아니다. 엄마가 된다는 상상을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다. 조카들을 키우는데 만족했다. 주위에서 조카를 키우는 것과 제 아이를 키우는건 천지 차이라고 했지만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콧방귀를 뀌었다. 조카들에게 최선을 다했고 살면서 그렇게 많은 고민을 했던 적도 없었다. 물론 고민의 양이 질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다가 아닐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조카들에게 아이랑 교감할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을 다 쏟았다. 저출산이 생존투쟁이고 이렇게 불안한 세상을 아이가 살게 할 수 없다는 부정도 한몫했다. 이제 막 익숙해진 일을 그만둘지도 모르고 여유있는 지금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숙고했지만 결론은 늘 아직은 아니었다. 20대 때부터 생리가 불안정해서 내가 임신 가능한 몸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피임을 악착같이 하긴 했지만 영구피임이 아닌한 모든 방법들은 불안정 했다. 하지만 실수로라도 임신을 한적이 없는걸로 봐서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 아닐까란 막연함은 있었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라고 그 당시를 회상해본다. 그런데 정말, 뚜렷하고 확고한 무언가는 없었다.


 적극적인 피임을 멈췄지만 임신을 할줄은 몰랐다. 그즈음 규칙적이던 생리가 돌연 오지 않고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 지속됐지만 만성적인 소화불량 탓인줄 알았다. 임신 테스트기에 두줄이 선명하고 혹시 몰라 찾아간 산부인과에서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늙은 의사가 마지막 생리 날짜를 다그치는걸(이 의사를 다시는 볼 일이 없었지만) 이상하게 생각하고서야 내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걸 실감했다. 소식을 전하자 엄마는 거의 30분 넘게 일하는 곳 아주머니 흉을 보더니 '축하한다'라고 말했다. b는 '축하할 일이야?'라고 되물었다. a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축하를 해줬다. 나는 아직까지도 축하받을 일인지 자신하지 못하고 있다.


 아이를 낳아서 어떻게 키울지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거 참, 그동안 호르몬이 내 몸속에서 뭘하는지 몰랐는데 얘네야말로 임신을 위해 존재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확고하게 자기 역할을 했다. 임신 초기, 순간순간의 우울감과 무기력함,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이 한꺼번에 덥쳐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식욕 저하는 기본 옵션이고 비염으로 기능이 충분히 떨어진 코도 분주하게 냄새를 맡으며 입덫을 했다. 내 뱃속에서 생명이 자란다는 원초적 즐거움보다는 생리적인 이상 반응과 기분 저하, 끊임없이 쏟아지는 잠이 임신 3~4개월을 채워나갔다. 일하다 말고 욱욱 거리며 화장실을 향하는 드라마 속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다. 나만 알고 기임신 경험자에게만 토로할 수 있는 생리현상이 왕왕 일어났다. 모성이 들어설 자리는 물론이고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모성에 반감을 갖고 있던 터였다.


 정신 좀 차리고 호르몬도 진정 했을 때가 5개월 즈음. 증상 참고용으로 설렁설렁 봤던 책들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임신 출산 육아의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삼성출판과 중앙북스의 책. 책을 보면서 내 몸이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 몸의 변화에 익숙해져 갔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기형아 검사로 대표되는 임신을 관리하는 문화와 임신해서도 할 수 있는 섹스 체위에 관한 것이었다. 임신을 자연스럽고 편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관리하고 검사하면서 안심해야하는 일로 보는 것. 물론 현대의료기술로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야 정말 다행이고. 하지만 인위적인 초음파로 아이를 들여다보고 아이 얼굴을 잘 보이게 한다며 초음파 기계로 배를 험하게 누르는건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됐다. 90%확률을 자랑한다는 기형아 검사도 그렇다. 비급여로 비용이 비싼 것도 흠이지만 5개월 넘게 뱃속에서 나랑 같이 먹고 자고 놀던 아이를 확률상 기형아에 속한다면 어쩌란 말인가. 의사는 자기 병원에서 낙태는 하지 않는다며 아이가 태어났을 때 대비하기 위한 검사란 설명을 덧붙였다. 선택은 없고 고민만 깊어지는 검사인 것.

 

 임신해서도 가능한 체위에 이르면 정말 성이 야만적이란, 아니 일반적인 배려가 누구를 기준으로 설정되어있는지까지 생각이 이르러 화가 날 정도였다. 기분이 격렬한 놀이기구처럼 오락가락한데 남편을 배려하는 섹스를 해야한다고 버젓이 얘기하는게 정말 이해가 안 됐다. 일반적인 생각, 남자의 성욕은 참을 수 없고 해소해야할 무언가로 확고하게 믿지 않는다면 가능한 얘기일까. 이 책들은 내가 한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배우는데 필요한 기본 지식을 제공하지만 계속 읽자니 찝찝했다.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으면 어떨까. 후기를 보니 처음 아이를 낳는 경우에는 아이가 나오지 않아 산부인과에 가는 경우도 있다는데. 회음부절개는 꼭 해야하는걸까. 산부인과 검사는 병원에서 원하는대로 받아야할까. 예방접종은? 정보는 많고 모든 것을 선택해야만한다. 한가지 노선이 있는 게 아니라 여러갈래로 흩어진 주장과 당위는 자꾸 이런 선택이 복불복이 아닐까란 의심이 든다. 예방접종 안 맞고 건강하게 크는 아이가 있는가하면 안 맞아서 병에 걸려 고생을 하는 아이도 있다. 자연분만을 하고 싶지만 내 몸이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태아보험을 꼭 들어야한다는 강권에서부터 우리나라 민간 보험 지급률이 몇프로 안 된다는 얘기. 아이를 낳고 금식을 시켜서 황금똥을 싸게 해야한다는 주장에서부터 그러면 위험해진다는 과학적인 얘기까지.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이루기는 어려워보인다.


 지금 한창 뱃속에서 꼬물거리는 이 아이를 생각하면 한없이 맘이 너그러워진다. 이제 막 아프기 시작한 허리와 골반 통증쯤은 아무렇지 않다, 라고 쓰려고 했는데 입이 방정이라 아무렇지 않은게 아니지 않겠나 싶어 신경쓰이긴 한다 정도로. 과민해서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거고 고민의 양에 상관없이 나은 선택을 하는 것보다 귀차니즘 탓에 관행적으로 아이를 낳고 키울 확률이 더 높다. 섹스 도 귀찮고 몸이 안 따라줘서 그렇지 내 신념에 반하고 투철한 의식을 갖고 안 하는 게 아닌 것처럼. 


  다만 나와 아이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은 어느 정도인지까지 정리를 해야할 것 같다. 내 몸이고 스스로 책임을 지는 문제면 상관이 없지만 그게 아니니까. 대체 난 어떻게 이렇게 큰 일을 덜컥, 겁없이 저지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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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10-02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홍색 홍시가 괜히 먹고 싶은 게 아니었군요, 아치!
아, 아치!
소식이 뜸한 동안 큰 일을 덥썩 안고 있었군요.
축하해야 할일인지 아닌지는 생기기 전에 고민할 일이고, 일단 뱃속에 자라나고 있고 또 아치랑 함께하고 있다면 축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카들과 이미 치열한 고민을 했던, 고민을 아는 몸이 되었으니, 아치, 잘 할거에요. 임신출산육아 서적에서도 이렇듯 걸리적거리는 부분을 짚어내는 여전한 아치라 너무 좋아요. 기운내요!

Arch 2015-10-04 14:52   좋아요 0 | URL
고민을 아는 몸? 그래서 더 염려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 심각하게 쓰고 생각했지만 벅차오르고 기분 좋을 때도 많아요! 응원하는 다락방이 있으니 더 기운이 나요! 축하해줘서 고마워요~

별족 2015-10-02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대백과는 아무도 못 줄 읽었다는 게 부끄럽던 기억이^^; 저는 축하드려요. 저는 기형아 검사는 안 했습니다. 인생이 복불복인걸요. 하자면 끝도 없는 게 걱정이라.

Arch 2015-10-04 14:5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별족님. 복불복!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걱정들이에요. 요샌 예방접종 제대로 알고 맞히자류의 책을 읽고 있어 근심이 스물스물 올라오지만, 좀 태평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치니 2015-10-02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그리고 꼭 건강하게 순산하시길.

Arch 2015-10-04 14:53   좋아요 0 | URL
치니님 감사합니다. 저도 꼭 순산했으면 좋겠어요 ^^
 














 어제 자기 전 정희진의 책을 읽었다.


 예전에는 책을 서문에서 목차까지 순서대로 읽고는 했는데 요새는 생각나는대로 책을 살짝 펼쳐들고 원하는 꼭지를 읽는다. 신문에 연재한 글인만큼 짧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데 글은 짧아도 생각할거리는 짧게 끝나지만은 않는다.

 프로이트와 페미니즘이 대항이론을 갖고 있는게 아니라 페미니즘 이론의 여러면은 프로이트에 빚지고 있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이 부분을 어디서 들었더라 하면서 생각하다 시간이 늦고 졸려서 잠이 들었다. 새벽녁에 잠이 깼고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잠이 휙 달아났는지 정신이 말똥말똥해져 '히잉'하면서 다시 자려고 기를 쓰는데 a가 옆에 와서 누웠다.


 a는 곧바로 잠이 들었고 나는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오이디푸스팀으로 구성된 50여명의 사내들은 부자와 젊은 여자들을 죽이려고 한다. 사내들은 대단한 에너지를 뿜어대며 살인을 하기 전 야구경기를 한다. 그 중 한명은 야구 경기를 하고 싶어서 팀에 가입을 했다며 자신의 가족들이 피해를 받지 않도록 미리 도망치라고 했다. 나는 이제 곧 죽는구나, 얼마 없는 돈을 이불 사이에 끼워놓고 자전거를 탔다. 조카랑 같이 자전거를 탔는데 조카는 무당이 어린 아이로 만들어서 위험에서 벗어났다. '나는 곧 죽는구나.' '허망하게 죽는구나'란 생각이 턱 끝까지 차고 들어와 숨이 꽉꽉 막혔다.

 한 사내가 내 몸을 더듬는데 흥분은 커녕 숨이 막혔다. 목을 조르는 것도 아니고 지딴에는 뭔가 해보려고 애를 쓰는데 하나도 즐겁지가 않다. 숨이 막히고 가슴 위로 쇳덩어리가 내려앉는 것 같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 엉엉 울었다. 옆에 있던 a가 더웠는지 덮는 이불을 뭉개고 내쪽으로 몸을 기대서 베개와 이불 틈바구니에서 갑갑하게 잠이 깨고 말았다.


 정희진 책에서 오이디푸스가 나오고 a가 좋아하는 야구와 부자연스러운 잠자리. 하루종일 숨이 차다. 생리적인건지 심리적인건지 생각하다 '나는 나에 대해 집중하는 것보다 다른걸 생각하는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다'는 루이제 린저의 조언이 생각나 생각하길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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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2015-10-02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의 조언이 참 좋네요.

Arch 2015-10-02 11:35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