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테 콜비츠
캐테 콜비츠 지음, 전옥례 옮김 / 운디네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내가 생일날 지인에게 선물로 받은 책이다. 책값이 두둥 3만 8천원인지라 내 손으로는 못사고. 선물을 뭘 받고 싶냐길래 이 책을 말했었다. 선물 받은 지인에게는 상당히 미안한 일이지만 이 책은 내 기대에 전혀 못 미쳤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케테 콜비츠에 대한 설명 부족

이건 뭐랄까. 마치 신화 화보집 같다. 무슨 소린고 하니 이미 신화가 누구이고 뭐 하는 사람들인지 다 아는 이들만 사 봐야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나는 케테 콜비츠가 화가라는 것만 알았지 그녀에 대해 거의 정보가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은 거기에 대한 설명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저 그녀가 대단하단 소리만 해댄다. 오죽 대단하면 책이 나왔겠나만은 그래도 세상에는 가끔 나 처럼 대단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잘 그 사람에 대해 잘 모르는 인간들도 있다. 그런 인간에게 좀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면 안되었을까? 케테 콜비츠를 알고자 읽었는데 읽고 나서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 책이 꼭 지식을 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알려 주지 않을꺼라면 차라리 그냥 화집으로 내지 왜 책의 형태를 취한것일까?

2. 너무 비싼 가격

책이 두껍고. 그림이 들어 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3만 8천원은 상당히 비싼 가격이다. 거의 4만원대에 육박하니 이 책을 사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물론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야 돈이 문제겠는가 만은 문제는 가격에 비해 책이 그저 그렇다는 것이다. 하드커버를 하고 있고 살짝 두껍고 그림이 있다는 이유로 이렇게 비싸게 받는건 이해가 가질 않는다.

3. 일기

책의 대부분은 케테 콜비츠가 쓴 일기이다. 뭐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가장 확실한 것이 일기등의 개인적인 기록을 보는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일기를 편집 과정을 거쳐서 연대별이 아닌 사건 순으로 전개를 해 두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누군지도 잘 모르겠는데 그 사람의 일기를 읽는게 흥미로운 일이냐고 묻는다면 난 아니라고 대답을 하고 싶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내가 보기에는 약간 방향을 잘못 잡은것 같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싼 가격을 달고 나온 책이다. 그녀의 그림을 보는건 좋았지만 그 그림에 대해 설명이 좀 부족했으며 (양보다는 질적인 면에서) 책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그녀의 일기는 좀 부담스러웠다. 선물을 받았으니 망정이지 내 돈으로 샀다면 제대로 아까울뻔 했다.

덧붙임 : 물론 케테 콜비츠를 잘 알고 있으며 그림에 대해 조예가 깊은 사람이 보면 어찌될지 모르겠지만 나처럼 쥐뿔도 모르는 인간이 읽기에는 상당히 버거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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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5-06-15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은비님. 님께는 괜찮은 책일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그림 전공하셨잖아요. 흐.. 저는 전공자가 아니여서 그런지 살짝 지루했어요.^^

sweetmagic 2005-06-15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테 콜비츠는 삶이 너무 기구해서(?) 그림마저 너무 직설, 현실적이예요. 어두웠던 것 같기도 하구요,,, 판화였던가요?? 여튼.... 기대많이 하고 봤다가 약간 실망한 기억이... 엽서는 좋았다는 ㅎㅎㅎ

플라시보 2005-06-15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weetmagic님. 네. 저도 케테 콜비츠의 그림과는 그다지 코드가 안맞는것 같더라구요. 삶이 기구하기로는 프리다 칼로도 만만치 않은데 그녀의 그림은 그래도 좋던데... ^^ 아무튼 안타깝게도 저에게는 조금 버거운 책이었습니다.

바람돌이 2005-06-15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케테 콜비츠 좋아하는 화가입니다. 제가 가장 처음본 콜비츠의 그림은 이거였어요.



독일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라는 다소 직설적인 제목의 그림이죠. 하지만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저 아이들의 눈이 며칠동안 저를 괴롭혔었거든요. 몇개의 선으로 저리도 많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화가란 그리 많지 않을테니까요.

이 화가를 처음 보는 사람에겐 이 책은 많이 지겨운 책이었을 것 같아요. 저도 조금 지겨웠거든요. 하지만 사랑은 모든걸 이기잖아요. 지겨움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화가를 만난다는 기쁨이 저에겐 더 컸습니다.


플라시보 2005-06-15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저도 케테 콜비츠 싫어하지 않습니다.^^ 다만. 일기가 너무 많아서 그게 좀 마음에 안들었어요. 흐흐. 저 그림은 저도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눈빛이 너무 리얼해서요.^^ 님에게는 좋은 책이었다니 다행입니다. 누구나 다 좋은 책이 같을수는 없지만 이왕이면 좋은게 좋은거지요. 흐흐^^

mannerist 2005-06-17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보셨을지도 모르지만... 매너가 지난 봄, 베를린에서 들른 케테 콜비츠 박물관 부클릿입니다.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500209

 실천문학사의 역사인물찾기 시리즈. 아마 한국에서 나오는 시리즈물 중 이만큼 알찬 것도 드물지 싶네요. 한 권 한 권, 버릴 게 없으니까요. 중간중간 좀 지루한 책도 있긴 하지만요. 그중에서도 첫 두 권, 닥터 노먼 베쑨과 케테 콜비츠는 정말 대단한 책입니다. 새로 나오면서 눈 두기도 더 좋아졌구요. 한 번 읽어보시길요. =)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렉 버렌트 외 지음, 공경희 옮김 / 해냄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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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질을 할때. 사람들은 말한다. 상대에게 너무 많이 전화하지 말고 가끔은 튕기며 그리하여 상대로 하여금 나에게 애가 타도록 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말이 그럴 뿐이다. 막상 사랑이라는 급물을 타기 시작하면 이미 이성이라는 노는 방향을 잡는데 턱없이 부족하다. 똑똑한 여자들은 좀 다를꺼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지켜 본 바에 의하면 이런건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게 들었느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은 여자가 그녀보다 훨씬 허접한 남자에게 목 매고 상처받는걸 얼마나 많이 지켜 봐 왔던가.

가끔은 친구들이 남자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는다. 겉으로 볼때는 '어머 정말? 얘 그 사람 안되겠다' 를 바라는것 같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그렇지 않다. 그녀들은 일단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자상한 남자이며 매력적이라는 것을 기본으로 깔고 있다. 그래서 나는 좀처럼 그녀들이 표면적으로 바라는 [함께 남자친구 씹어주기]는 절대 하지 않는다. 왜냐면 그래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미 그에게 반한 그녀는 결국 모든걸 다 용서하고 받아들일 것이 뻔하니까. 그녀가 바보라서도, 연애 경험이 부족해서도 아닌 바에야 충고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될까? 여태까지는 그랬었다. 어차피 사랑과 연애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고 일반화될 수 없는 수많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냥 지가 알아서 잘 해야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책을 만나기 전 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녀들에게 충고를 하거나 함께 남자친구를 씹어주는 대신 나는 앞으로는 이 책을 선물 할 예정이다.

세상에는 남녀의 차이를 나열한 책들이 수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공전의 히트를 친 것은 남녀가 각각 화성과 금성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책일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화성이나 금성 출신은 아니겠지만. 그 책은 그만큼 남녀가 다른 타입의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어느정도 함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남자들의 행동을. 그래 남자니까 저런거야. 여자와 남자는 너무도 달라서 여자인 내가 그를 이해하는건 불가능하지. 그러니까 그냥 받아들여야 해.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허나 이 책은 말한다. 다른건 몰라도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당신이나 그들이나 하고싶고, 원하고, 하게 되는것이 똑같다고 말이다. 남자가 전화를 잘 하지 않는다고? 그건 남자라서 혹은 그가 전화를 싫어하거나 전화 통화에 익숙하지 않거나 쑥쓰러워서가 아니다. 그는 단지 전화를 할 만큼도 당신에게 반하지 않은 것 뿐이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당신이 남자에게 반했다면. 그러면 당신은 전화라는 매체를 싫어하고 쑥쓰럽고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전화를 하지 않는가? 혹은 바쁘다는 이유로 며칠씩 안부를 전하지 못하는가? 모르긴 해도 아마 하루종일 전화기를 잡고 걸까 말까 수십번도 더 고민 하거나 아니면 그 바쁜 와중에도 비록 짧게나마 전화를 할 것이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우리에게 반했다면 그들도 그래야만 한다.

인간이란 동물은 간사해서 가끔은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 못 보는게 아니라 안하는거다. 너무 정면으로 봐 버리면 비참하니까. 그래서 갖은 핑계거리를 찾아 낸다. 그는 너무 바쁘다던지 아니면 최근에 아픔을 겪었다던지 아니면 이사하느라 정신이 없다던지. 하지만 말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이 모든 개떡같은 상황에서도 상대를 향한 마음을 늦추거나 느슨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사랑 아닌가? 그렇게 모든걸로 다 통제가 가능하다면 개뿔 그게 무슨 사랑인가? 그냥 데이트나 하는 정도지.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례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약간 한심해 보인다. 어째서 저걸 모르는 걸까. 답이 너무 뻔하게 나와 있는데 왜 모를까 싶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 되면 정말로 모르게 된다. 아니 모르고 싶은지도 모른다. 수많은 이유와 핑계를 대어서 그가 나에게 전화하지 않고 무관심한 것에 대해 내가 대신 변호를 해 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아무도 직설적으로 대답해주지 않았던 문제들에 대해 가장 정확한 답을 내려준다. 그래 그럴수도 있겠지 하고 둘러서 말하지 않는다. 물론 사람마다 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양한 결론들이 나올 수 있겠지만 책은 말한다. 적어도 반했다면 남.녀가 하는 행동은 다 똑같다고. 또 그건 어떤 상황에서건 집중하게 만든다고 말이다.

여자들은 알다시피 바보가 아니다. 그녀들은 회사에서나 집에서나 모두 세련되게 처신하고 생각도 많고 꿈도 있고 아름답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랑만 하게 되면 달라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문제는 그 사랑의 파트너도 역시 같은 증상을 겪고 있으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건 정말 냉정하게 생각을 해 봐야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당신이 이성을 못 차리고 정신을 놓고 입에서 침을 흘리고 있는데 상대방 남자는 뭐가 그리 대단해서 자제하고 참고 인내할 수 있을까? 당신에게 반했다면 그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절대 그럴 수 없다.

너무 뻔해서 하품나는 내용들만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알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다시 한번 문자로 접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다소 유치하긴 하지만 이 책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다 알고 있지만,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정면으로 승부를 걸지 않는다. 왜냐면 그가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혹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미쳐버릴것 같으니까. 하지만 똑바로 보자. 괜찮은 남자이건 자상한 남자이건 멋진 남자이건 일단 기본은 나한테 반해야 한다. 그래야 사랑이건 뭐건 할게 아닌가. 이 책은 각종 애매모호한 상황 (남의 일이라면 뻔히 보이지만 내 일이면 잘 안보이는) 을 나열해놓고 말한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고. 그러니까 당신에게 반해서 정신 못차리는 다른 남자를 찾아 나서라고 말이다. 연애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책들을 다 믿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책 만큼은 별 다섯을 줄만하다. 직설적이고 솔직한 것 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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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5-06-14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하긴 남자라서 전화 잘 안한다는 게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지요. 제 친구의 남자친구는...거의 의처증 수준이거든요. 죽어라 전화하더라구요... 그래놓고 제 친구더러 전화 안 한다고 야단이고..ㅋㅋㅋ 전화할 시간을 줘야 전화를 하지... 여하튼 제 친구는 거의 사생활을 뺏기다시피 했는데, 그 남친 하는 말이... 자기는 구속당하는거 싫어서 연애하는 거 별론데... 크헉... 입에서 불 나올 뻔 했어요~~~^^

플라시보 2005-06-14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님. 흐흐. 그 남자분은 정도가 좀 심하기는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뭘 하고 있는지가 궁금한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간섭은 하지 않아야 하겠죠. 그냥 아는 수준에 그쳐야죠. 남자도 여자한테 반하면 당연히 전화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여자들이 그러듯이요^^

클리오 2005-06-14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중하지 않는다면 온갖 핑계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번번히 눈을 가리고 자신이 보고 싶은것만 보는게 사랑의 비극성이죠... 흐흐.. 저는 '강한 여자의 낭만적 딜레마'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는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여자일수록 오히려 자신을 버리고 갈게 뻔한 애타게 하는 남자에게 집착한다고..그러다가 그 남자가 자신에게 정착하려고 하면, 당황하며 자신이 도망간다는 이야기가 분석되어 있더군요.. 사랑이 양쪽 다 딱 맞아서 서로를 똑같은 만큼 원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플라시보 2005-06-14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 네 맞아요. 집중하지 않는다면. 더구나 시작하려고 하는 판국에 그런다면 더더욱 아닌거죠. 그런데 가끔은요. 정말이지 보고 싶은것만 본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죠. 나중에는 그가 하지도 않은 변명을 혼자서 해 주고 앉아있기도 하구요. 아무튼 사랑이란건 암만 많이 해봐도 잘 모를 문제인것 같습니다. 매번 그런것 같아요. 흐..

moonnight 2005-06-14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놓고 아직 못 읽었어요. ;; 플라시보님 리뷰를 읽으니까 얼른 읽고 싶어지네요.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는 말이 참 맞는 거 같아요.

플라시보 2005-06-15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onnight님. 그렇죠. 사랑하는데도 눈이 멀지 않고 이성적이고 평상시와 똑같은 평정을 유지한다면 그게 이상한거죠. 흐흐. 문제는 상대방도 그러냐 아니냐 인것 같습니다.^^
 

요즘 하도 볼만한 영화가 없어서 꽤 오랫동안 극장을 안갔었다. 그러다가 연애의 목적이 밤 12시에 개봉을 하길래 동네주민 언니랑 둘이서 마실삼아 슬슬 걸어가서 이 영화를 보고 왔다. 밤 12시 영화라서 심야할인에 통신사 카드 할인을 받아서 6천원에 영화를 보니 뿌듯하기 그지 없었다. (거기다 팝콘은 집구석에서 튀겨가고 콜라도 박스떼기로 사놓은 캔을 들고 갔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고등학교 교사인 유림 (박해일)은 새로 온 교생 홍 (강혜정) 에게 끊임없이, 그리고 노골적으로 찝쩍거린다. 유림에게는 이미 6년동안 사귄 여자친구가 있고 홍에게도 곧 결혼할 남자가 있다. 유림의 뻔하고 노골적인 수작에 홍은 계속 외면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 뻔뻔스러운 남자가 귀엽게 느껴진다. 유림과 홍은 드디어 연애질을 하게 된다. 이들의 연애는 아름답거나 고귀하지는 않지만 솔직하고 담백하다. 사심을 숨기지 않는 유림과 그의 수작을 알면서도 넘어가주는 홍. 그러나 이들의 연애에 갑자기 예기치않은 문제가 생기고. 일면 쿨한듯 보였던 연애질이 점점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되고 박해일의 뻔뻔스러운 연기에 관객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관심있는 여자에게 해대는 뻔한 짓거리란 짓거리는 모조리 해대는 박해일. 그러나 박해일이기 때문에 전혀 미워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이 영화를 보고 '나도 박해일 처럼 해도 여자들이 넘어와 주겠지?' 라고. 남자들이여 착각하지 말자. 그건 어디까지나 박해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가 조금이라도 느글거리는 면이 있었다면 그랬더라면 관객들은 도저히 그를 봐 넘겨줄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애란 포떼고 차떼면 참으로 뻔한 플레이구나. 자기들끼리 할때는 아무렇지 않겠지만 제 3자가 되어서 그걸 지켜본다면 이것처럼 유치한 놀이가 없겠구나. 어쩌면 그렇게 뻔하고 뻔해서 재미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영화를 보는동안 박해일이 보여주는 뻔한 수작과. 그 수작을 알면서도 넘어가주는 강혜정의 모습은 결코 우리가 영화에서 기대하는 사랑의 내용들은 아니다. 어쩌면 홍상수 감독과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이 영화는. 홍상수가 조금만 더 영화적 멋을 부린다면 이런 영화를 찍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감독 한재림은 이 작품으로 데뷔를 했으며 시나리오를 직접 썼다.)

영화가 시작되고 처음 몇분 동안은 남자가 보면 참으로 거시기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그들이 했던 혹은 앞으로도 할 수 있을지 모르는 그 모든 뻔한 수작들을 너무 숨가쁘게 나열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반부로 접어들면서 이 남자 생각만큼 뻔뻔하고 나쁜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남자들의 목적은 다 뻔하다. 다만 박해일이 맡은 유림이라는 캐릭터는 그걸 크게 미화시키지 않을 뿐이다. 여자와 자고 싶다는 표현을 애둘러서 하기 보다는 직접적으로 하고. 약간 애두른다는 것도 상대방이 눈치채기 딱 좋은 정도밖에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게 영화가 아닌 현실이면 어떨까? 장담하건데 박해일이 아니라면, 또 여자가 그 남자에 대해 마음이 있지 않는한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약간의 신파조를 보이던 부분에서 다소 실망스럽긴 하지만 감독은 꽤 상큼하게 끝맺음을 잘 한다. 만약 거기서 좀 더 얽히고 섥혔으면 초반부의 쿨함을 다 말아먹었겠지만 이 감독은 영특하게시리 잘도 피해간다. 다만 중간에 홍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조금 부족하다. 홍이 유림에게 한 행동은 자신이 당한것과 똑같은 행동이다. 홍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영화 후반부에 보면 그럼으로써 홍이 그 고통스런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겠구나 싶기는 하지만. 자신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에게 자신의 고통을 똑같이 나눠준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쉽사리 동의하기 힘들다.

아무튼 영화는 적당히 귀엽고 적당히 상큼하다. 그리고 여자라면 아마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너무너무 뻔해도 좋으니까. 어디서 저런 녀석이 나타나서 수작 좀 걸어주면 좋겠다고. 이 영화의 감상 포인트는 뭐니뭐니 해도 박해일이 펼치는 뻔한 수작 퍼레이드이다. 정말이지 내가 알고 있던 남자들의 뻔한 수작이란 수작은 다 등장한다. 단. 섣불리 따라 하다가는 연애고 나발이고 무지하게 쪽만 팔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홍이 유림에게 넘어갔던건 순전히 유림이 그렇게 해서라던가, 그렇게 해도 되어서가 아니라 홍의 마음에 유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없다면 그런 수작을 백날 걸어봐야 따귀만 맞을 뿐이다. (그러니까 할때 하더라도 이 여자가 나한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을 잘 해야한다.)

끝으로 이 영화는 뭐라고 뭐라고 길게 할 말이 없는 영화이다. 그저 한번 보라는 소리를 할 수 밖에. 보면 안다. 그리고 아마 봐야할꺼다. 되게 재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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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6-09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오홋. 땡겨요, 땡겨...ㅋㅋㅋ

플라시보 2005-06-09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은비님. 후훗. 저는 재밌게 봤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박해일의 그 뻔뻔한 수작들. 참 유쾌하게 봤습니다.

마냐님. 후훗. 저도 이 영화. 개봉전부터 무지하게 땡겼었습니다. 님의 촌철살인 감상문이 기대됩니다.^^

sooninara 2005-06-09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깁니다.^^

플라시보 2005-06-09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ooninara님. 그럼 땡기시지요. 흐흐^^

moonnight 2005-06-09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 +_+ 보고 싶어집니다. 마구마구. ^^

플라시보 2005-06-09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oonnight님. 후훗. 이 영화 괜찮습니다. 다만 동성이랑 가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이성이라면 막역한 사이는 괜찮은데 조금이라도 삐리리가 시작되려는 사이는 별로 함께 볼만하지 않아요^^ (내용이 내용인지라..흐흐)

클리오 2005-06-09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가 혹평을 하기도 하던데, 플라시보님이 굉장히 재밌다고 하시니 봐야될 듯 합니다... (근데 아무래도, 안보게 될 듯 하긴 하지만요.. ^^)

플라시보 2005-06-09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 흐... 물론 영화라는것이 개개인의 해석이나 혹은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 등등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거겠지요. 그리고 저 영화는 여자들에게 특히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영화임은 분명합니다. 남자 주인공은 뻔한 찝쩍임을 넘어서 성추행의 수준에까지 이르렀으니까요. 영화니까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지 현실이었다면 아마 힘들었을껍니다.

jozefow님. 물론 그런 부분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문제는 여자 주인공이 그 이후에도 남자가 성추행할 만한 상황에 자주 놓였으며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지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도 성추행 부분에 있어서는 좀 표현이 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 정도로 추행을 하고 나면 남자가 아무리 마음에 들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여자들은 마음이 싹 가심은 물론 고소를 해도 할 판이거든요. 그냥 영화라 그렇다고 생각하기에는 찝찝한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저도 그 부분에 대해 언급을 해야할까 생각하다가 빼버렸는데 할껄 그랬다는 생각이 좀 드는군요. 쩝.

비로그인 2005-06-09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방 이 영화 보구 왔어요.. 역시~~ 박해일 넘 귀여웠어요^^ 플라시보님 말씀처럼 저렇게 뻔히 속보이는 수작이라도 좋으니 저런 놈이 어디선가 나타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하하. 그나저나 강혜정은 무슨 복이랍니까. 현실에선 조승우, 영화에선 박해일. .아~~ 부럽기 그지없습니다. ㅠㅠ

jozefow 2005-06-09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앗. 글을 지웠는데 답글 달아주셨네요. 죄송해요.

2. 전 일단 남녀 관계에 관한 건 일자무식인 편입니다. 그래서 그냥 교육(?)받은 내용을 꼭꼭 암기(?)하고 있는 편인데, 영화를 보면서 '오잉. 상대방이 일단 노를 했으면 노라는 건데, 쟤는 왜 계속 찝적대고 그런다냐. 거기에 완전 성폭행까지' 했다가 '음. 그게 박해일 같은 부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건가. 그럼 그것까지 마저 얘기를 해주던지.' 라고 머리가 혼미해진 후, 영화 끝나고 화장실에서 문뜩 거울을 보니 암만 봐도 조인성 얼굴은 아닌지라, 집에 오는 길에 KFC 패밀리 세트를 사서 거의 죄다 먹었답니다. -_-..

3. 씨네 이번호에 기자들이 대담하는 내용 중에서 역시 그 대목이 나왔습니다. 보니까 그 장면을 잘라내면 박해일이 단순히 인상좋은 선수 정도의 이미지로만 남았을 거구, 그래서 고민하다가 감독이 살렸을 거다 라는 언급이 있더라구요. 글쎄요. 어떨지.

플라시보 2005-06-0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마음처럼님. 제가 아는 프리미어의 기자가 말하더라구요. 자기가 숱한 여배우를 봤지만 강혜정을 보는 순간. 아. 이래서 배우구나 하는게 딱 느껴지더래요. 물론 외모에 국한해서 말한거지만 실제로 보면 그렇게 예쁘다네요. 하여간 세상에 이쁜것들은 다 죽어야 해..가 아니고 아무튼. 이쁘면 현실에선 조승우를 일로는 박해일을 만날 수 있는건가봅니다. 흐흐.

jozefow님. 호홋. 괜찮습니다. 그리고 님 말씀이 맞습니다. 현실에서 No 라고 하면 정말로 No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만 영화속 강혜정처럼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 남자들은 헤깔리겠죠. 그렇다 하더라도 No는 No로 받아들이는게 좋습니다. 요즘 여자들은 싫어도 죽어라고 No라고 말하는 내숭은 잘 안떨거든요. 저는 개인적으로 수학여행 장면을 뺐으면 더 나았겠다 싶더라구요. 그건 찝쩍임과 추근을 넘어선 추행이었거든요. 보기 거북한 장면중 하나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귀여운 것은 순전히 박해일의 힘이라고 봅니다.^^

RainSmile 2005-06-11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봤는데.. ^^ 박해일의 힘!! 완전 공감입니다!
홍이 자신이 당한것을 똑같이 유림에게 돌려주는건, 고통을 넘겨 주는것도 있겠지만
또다시 홍이 약자의 입장이 되면 또 버려질까봐 그런게 아닐까요?
저는 강간을 당했다고 말하는 홍을 보면서 참, 연애가 지저분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는 지저분한건 사는 거고, 연애는 지저분한 삶을 무마시켜주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 ^^;;; 올 여름은 연애가 대세를 이루지 않을까 하는~ㅋㅋㅋ 얼른 연애해야지요~

플라시보 2005-06-11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RainSmile님. 그렇죠? 박해일이 아니었다면 아마 누가 해도 말이 안된다는 생각만 들었을것 같습니다. 음... 홍이 그렇게 한 이유가 그런거로군요. 전 도대체 뭘까 생각했었습니다. 분명 유림을 좋아하면서도 그 순간 왜 그랬을까. 어쩌면 저걸로 과거를 청산하고 싶어서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정말이지 저도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이 슬슬 듭니다. 저런 영화들이 자꾸 바람넣으면 안되는데...흐흐^^
 
M.C. 에셔, 무한의 공간 다빈치 art 14
모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외 지음, 김유경 옮김 / 다빈치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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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M.C. 에셔의 그림을 가끔 보긴 봤지만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었다. 그러다가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에 등장한 에셔의 그림을 보고 나서 다음번에는 꼭 그에관한 책을 한권 사 보리라고 마음먹었었다. 그리고 읽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에셔의 그림은 다들 한번쯤은 봤을 것이다. 무한하게 공간을 메우는 그림들. 어떤것을 보느냐에 따라 나머지가 배경이 되기도 하고 또 배경이 되었던 부분에 집중을 하면 아까 봤던 부분들이 다시 배경이 되기도 하는. 그러다가 마침내 위가 아래가 되고 벽이 천정이 되기도 하는 그림부터 무한하게 지속되는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그림까지. 그는 주로 소묘와 판화작업을 했는데 어떻게 보면 그의 그림들은 작품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수학적 유희처럼 보이기도 한다.

책에는 에셔의 판화와 그림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총 3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장은 에셔가 삽화가 오에이 탱 시트와 함께 주고받은 편지를 수록하고 있으며. 두번째 장에는 에셔 본인이 강의를 위해 준비한 글들과 슬라이드 (여기서는 그냥 그림으로 인쇄되어 있다.) 를. 세번째는 에셔의 친구인 베르뮐러가 에셔에 대해 써 놓은 글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것은 두번째 장. 즉 에셔가 자신의 그림을 가지고 직접 설명을 하는 부분이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작품들을 작가 자신의 해석이 아닌 후세의 다른 사람들로 부터 설명을 듣곤 하는데 에셔는 강의 준비를 하기 위해 써 놓은 원고와 슬라이드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정작 강의는 하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는 아주 드문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작가에게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직접 듣는것. 그것은 작품을 보는 것 못지 않은 감동을 준다.

아주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작품에 대해 그게 미술이건 음악이건 영화이건. 해석을 해 놓은 사람들을 보면 정말로 작가가 그런것을 의도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나치게 치밀하다. 그럴때 마다 나는 작가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한다. 예전에 나도 무언가를 하나 만들었을때 타인들이 그것을 해석해 놓은 것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나는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염두에조차 두지 않은 텍스트들을 분석하고 분해하고 해석해놓은 그들의 놀라운 솜씨앞에 나는 입이 떡 벌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덕분에 택도아닌 그것이 마치 대단한 의미라도 지니는양 과대평가되는 모양을 지켜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그 경험 때문인지 나는 해설이나 해석을 볼때 마다 늘 그런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작가는 이렇게 해석이 될 것을 알고나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에셔가 자기 작품에 대해, 직접 그리고 만든 사람으로써 정확하게 의도를 밝히고 감상 포인트를 챙겨준 것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에셔의 작품은 참으로 묘하다. 보통 미술 작품을 볼때 일어나는 감성 혹은 감흥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그것은 꼭 알아서는 안되는 우주의 비밀을 살짝 엿보는 기분마저 들게 한다. 단순한 눈의 착시를 이용했다기 보다 에셔는 3차원의 공간들을 마음대로 주물러서 2차원인 면에다 펼쳐놓는다. 가끔 그의 그림은 강박적으로 보일만큼 반복적이고 또 그 섬세함은 돋보기를 이용해서 작업을 해야 할 정도로 섬세해서 마치 깨어지기 쉬운 유리조각을 기름칠한 손으로 들고 있는 마음이 들게도 한다. 어떤 작가에게서도 느낄 수 없었던 감흥을 나는 에셔의 작품을 통해서 느꼈다. 그것은 위대하다던가 그림이 너무 좋다던가 대단히 잘 그렸다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여준다.

나는 전화통화를 하면서 낙서를 자주 하는 편이다. 그 낙서의 대부분은 그림이라기 보다는 6면체나 8면체의 공간들을 그리는 것인데. 내가 사람이나 꽃 등을 그리지 않고 그런 것들을 그리는 이유가 순전히 그림을 못 그려서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에셔의 그림을 보고나니 이런걸 제대로 그리기를 작정한 사람도 있었구나 싶어서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에셔의 책을 보는 내내 소실점이랄지 하는 미술시간에 배운 용어들이 생각났고 나는 에셔가 어디에서 중심을 잡아서 시선을 처리했는지 참 궁금했다. (그의 작품은 대게 위도 아래도 앞도 뒤도 옆도 다 뒤섞여 있다.) 판화 작업을 주로 했지만 그가 보여주는 소묘나 정밀묘사도 정말 섬세하고 감각적이다.

작가의 작품을 다룬 책들은 대게 작가의 생애에 대해 주절거리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해서 싫은건 아니다만) 이 책은 이체롭게도 작가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강의하듯 진행되는 것이 좋았던것 같다. 에셔의 그림에서 한번쯤 묘한 기분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추천할만 하다. (그림만 봐도 본전은 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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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5-06-07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빈치에서 나온 책들은 다 평이 좋은 것 같아 주저하지 않게 돼요. 저도 다빈치 책 몇 권 있는데 여러면에서 좋더군요.

플라시보 2005-06-07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님. 저도 다빈치 책 몇권을 읽어봤는데 다 괜찮은것 같더라구요. (적어도 읽은 것들은 그랬어요^^) 이 책은 그림도 내용도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작가에게 직접 특강을 듣는 기분이었어요^^
 
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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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글들은 작가가 상상을 해서 혹은 취재나 여타 경로를 통해서 잠시잠깐 체험을 한 것으로 충분히 쓸 수 있는게 있다. 하지만 또 어떤 글들은 뼛속까지 그걸 느껴보지 못하고, 혹은 그게 삶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써 낼 수 없는 글들이 있다. 공선옥의 유랑가족은 그렇게 나눠보자면 후자 쪽이 아닐까 싶다. 잠시 잠깐의 가난. 아니면 TV화면에 보이는 가난. 그걸로는 도저히 다 써낼 수 없는 깊이의 가난을 그녀는 말한다.

도시에서 나고 도시에서 자란 내게 있어 최대한의 가난이라는 것은 길거리 노숙자나 쪽방 생활자들이었다. TV에서 접하는 것도 길거리에서 접하는 것도 그게 전부였기 때문에 그보다 더 가난한 무언가를 생각 해 낼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선옥이 말하는 가난은 농촌의 가난이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산에 고추 농사를 지어서 사는 손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다. 또 한 아이가 있다. 엄마는 도망가고 아빠는 도망간 엄마를 찾으러 집을 나가고 병든 아버지와 잔소리가 심한 할머니와 사는 아이는 라면을 먹고 싶지만 아까운 라면을 축낸다고 할머니에게 야단맞을 생각에 감히 라면을 먹지 못한다. 왜냐면 라면은 그들에게 특별한 날에 먹는 특별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흔히 가난하면 떠오르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을 떠 올리는데 그것 조차도 여의치 않은 가난과 마주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말 할 것이다. 노력하지 않아서, 게을러서 가난한거라고. 남보다 더 애쓰고 노력하고 열심히 저축하면 언젠가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꺼라고. 그렇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어떨까? 농촌에서 태어나 엄마는 도망가고 아버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늙고 병든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산다면. 매일매일 논이나 밭에 나가 허리가 휘게 일해도 겨우 감자가 많이 든 밥을 먹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렇다면 그 아이는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가고 출세해서 더이상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과거에는 그게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과외도 학원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당장 서울에 있는 각 대학들의 합격률을 보길 바란다. 농촌에서 올라와서 과외나 학원의 도움 없이 입학한 아이들이 몇이나 되는지. 먹고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거기서 열심히 공부 어쩌고 하는건. 적어도 열심히 공부하면 대학이라도 갈 수있을때나 될 말이다. 농촌에서 초등학교도 겨우겨우 다니며 하루종일 어른 못지않게 일해야 하는 아이가 도시에서 학원을 몇개씩이나 다니고 제 학년보다 보통 1,2년은 더 앞서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따라 잡으라는건 100m 달리기에서 누군가는 출발선에 서고 누군가는 50m 지점에서 동시에 달리기 시작하는 것과 똑같다. 아니면 출발선이 같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뛰어가고 누군가는 자가용을 타고 가거나. 누구나 다 대학을 가야 하는건 아니지만. 다들 알 것이다. 대학은 고등학교때 보다 공부를 더 심도있게 하러 가는곳이 아니라 그나마 멀쩡한 직장에 취직을 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최소한의 관문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현실은 이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다 멀쩡한 직장을 보장해주지 않아 대졸 실업자들이 차고 넘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고등학교 혹은 그 이하의 학력보다 대졸 학력을 가진자가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고 더 나은 경제적 생활이 가능하다.)

공선옥이 그려내는 가난은 남들보다 좋은옷을 못 입고, 좋은 음식을 먹지 못하고, 좋은 물건을 사지 못하는 가난이 아니다. 그들의 가난은 당장 집안에 벽이 허물어져도 그 벽을 막을 수 조차 없는 가난이고 먹을것을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절대적 빈곤이다. 동네 슈퍼마켓에 가면 단돈 500원에 살 수있는 라면조차 아주 특별한 날이 아니면 아끼느라 먹을 수 없는 가난 앞에서 우리가 여태 생각했던 가난들은 너무 추상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선옥이 말하는 가난은 정말이지 읽는 내내 불편하다. 확실히 아름답고 재미있고 유쾌한 소설들에 비해 그녀의 소설을 읽는 과정은 아프고 힘들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면할 수 있는것은 아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똥구멍이 찢어질듯한 가난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가난들이 존재하지조차 않는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원리를 생각할때 누군가가 가졌다면 누군가는 덜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존재한다. 마치 의자 뺏기 놀이처럼 말이다. 의자라면 빼앗겨도 큰 탈이 없겠지만 그게 생존을 위협할 정도의 가난과 생계와 직결된 최소한의 돈이라면 우린 그걸 의자 하나 차지한것 처럼 천연덕스럽게 외면해도 되는 것일까?

부자인 사람들을 뺀 나머지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것에 신경을 쓰기에도 모자란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남을 도와야 한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해야 한다는 소리는. 어쩌면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랄때 '내가 불우이웃인데 돕긴 누굴 도와' 할때처럼 내 살기도 바빠죽겠는데 남을 언제 생각하냐는 식이 될지도 모르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는건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살고 있다. 당장 내 앞날도 불투명한데 그리고 까딱하다가는 나도 밑바닥으로 얼마든지 추락할 수 있는 위험소지가 다분한데 오지랖넓게 누가 누굴 돕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적어도 외면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돕지는 못할 망정. 아예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지지리 가난한 것들은 정말 생각하기도 싫다는 식의 외면은 누군가의 의자를 빼앗은 사람들로써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가난은 이제 개인의 손을 떠난 문제가 되어버렸다. 개인이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걸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농촌에서 자라 중. 고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또다시 도시의 노동자로 적은 임금과 높은 물가에서 형태는 다르지만 여전히 가난하게 살아야만 하는 그들에게 정말 이 땅이 해 줄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는걸까? 정말로 더 큰 문제는 이 가난이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부자 부모를 둔 자식이 부자가 되고 가난한 부모를 둔 자식은 반드시 가난해지는 지금의 시스템은 마치 연좌제처럼 대를 뛰어넘어서도 그 고통을 전가시키고 있다.

도와주지도 못할망정 걱정이 다 무슨 소용이겠냐 만은 적어도 눈감고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 것 보다는 아프지만 있는 현실을 제대로 보는게 훨씬 더 나을것 같다. 그렇게 자꾸 들여다 보다가 보면 언젠가는 그게 문제라는 생각도 들고 해결책이 나와도 나올테니까 말이다.

다소 불편하지만 추상적인 가난이 아닌. 가난을 있는 그대로 그려준 작가 공선옥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그녀의 글은 상상이나 취재 만으로는 쓸 수 없는. 뼈와 살의 경험에서 나온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글을 보여준 그녀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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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5-06-06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함부로 쓰여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별 오지랖이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가난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재탕되고 우려먹어지는 거 정말 싫습니다. 우리의 일회용 눈물을 위해 희생되는 거 넘 잔인한 것 같아요,
님 리뷰를 보니 이 책이 무척 궁금해 집니다. ^^

플라시보 2005-06-06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weetmagic님. 네. 저도 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우리에게 잠깐의 눈물을 위해서 써먹을 만큼 가벼운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이 책은. 그렇게 가볍게 다루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몰랐던 것도 많이 알게 되었구요. 읽어보시면 마음은 좀 답답하겠지만 후회는 안하실것 같아요. ^^